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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09 黃帝內經講義 (3) 1965년 3월호


출처: http://www.handongseok.org/lecture3.htm

黃帝內經講義 (3) 1965년 3월호

韓東錫

第二章 五運

第一節 五行學의 發達

  宇宙는 무엇으로써 構成되었을까?

  또는 어떻게 움직이며 무엇이 이것을 움직이게 하는가? 神의 攝理인가? 物質自體의 運動인가? 하는 問題는 科學的 哲學的인 領域을 거쳐서 有史以後 今日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大宇宙의 一大宿題로서 남아있을 뿐이다.

  돌이켜 西洋哲學界에서 這間의 消息을 살펴보건대 古代 希臘의 「탈레쓰」Thales(B.C. 640∼550)는 宇宙의 本質을 「물」이라고 生覺하였고 「아낙시메네쓰」Anaximenes (B.C. 588∼524)는 「空氣」라고 生覺하였고 「헤라크레이토쓰」Herakleitos (B.C. 535∼475)는 「불」이라고 生覺하였고 「엠페도클레쓰」Empedokles는 「불」 「공기」 「물」 「땅」의 四元素로 組織된 것으로 生覺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쓰」Demoklitos(B.C. 460∼370)는 宇宙를 構成하는 原質을 原子로서 生覺하였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原子理論의 始初가 되었으며 또한 唯物論의 胎動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宇宙의 運動을 原子群이 機械的으로 離合集散하는 現象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感覺이나 視覺도 內外가 原子群間의 衝突에서 오는 反應이라고 生覺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科學文明이 싹트게 되었고 따라서 二十世紀의 華麗한 物質文明을 産出하기까지 이르렀거니와 本講에서 論하려는 바는 이에 대해서 그 功罪를 論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 內容을 硏究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希臘의 自然哲學이 「데모크리토쓰」Demoklitos에 이르러서 科學化의 발판이 생기면서부터 「탈레쓰」Thales 以後 「엠페도클레쓰」Empedokles 까지 사이에 發達하였던 自然哲學의 硏究는 차츰 影子를 감추기 始作하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哲學의 硏究手段이었던 自然法則인 精神的 方向이 차츰 物質的 方向으로 옮겨가기 始作하였던 것이다.

  勿論 十九世紀 初葉에 「헤겔」Hegel(1770∼1830)에 依하여 宇宙精神이 提唱되었고 또한 그의 獨特한 辨證法에 依하여 萬物의 生化運動의 規範인 自然運動의 原理를 一部分이나마 回復시켰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遼遠하기 限量없는 것이다.

  당행 「헤겔」과 同時代의 사람 「쉘링」Scelling(1775∼1854)이 나옴으로써 自然原理와 그의 法則에 接近하였지만 哲學界는 아직까지도 여기에 注目하려 하지 않는 것 같으니 답답하고 애달픈 마음 禁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宇宙原理를 硏究하는 데 있어서 가장 올바른 態度는 어떠한 것이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그의 影子에서 찾아 낼 수는 없는 것이오 正確한 本體를 찾아냄으로써만이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動하는 物質은 影子에 不過한 것이고 決코 本體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物質에서 宇宙의 本質을 찾아내려는 西洋哲學의 경우는 眞實로 緣木求魚와도 彷佛한 것이다. 여기에 오늘날 그들의 盲點이 있기도 하며 同時 「데모크리토쓰」Demoklitos의 過誤도 實로 여기오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東洋哲學 즉 象數學은 이 問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五千餘 年 前으로 推算되는 먼 옛날 伏羲氏 때 물 속에서 河圖(龍馬가 그림을 지고 나온 것)가 나왔다. 伏羲氏는 이것에 대해 專心致思한 끝에 드디어 그 그림 속에서 거기에 變化莫測한 宇宙의 動靜하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에 衣하여 「힌트」를 얻었는가? 河圖는 「象」(凡人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볼 수 있는 準備를 갖춘 사람은 볼 수도 있는 모습이 「象」이니 이것은 無形이 有形으로 轉換하는 中間過程에서 나타난다.)과 「數」로써 象徵되어 있다는 事實을 發見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象」을 正確히 把握하기는 비록 어려운 일이고 또한 認識方法이 觀念에 屬한다 할지라도 「數」의 計算만은 自然數 自體가 分裂과 綜合하는 一定한 法則에 依하는 것이므로 數列이나 數式의 變化에는 거짓말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象은 思惟와 認識에 依해서 觀察하고 그 「象」自體가 演出하는 바의 「數」의 分合現象은 이것을 反證하여주기 때문에 이것을 象數原理라고 하는 것이다.

  西洋에서도 數에 對해서 相當히 關心을 가지고 있었으니 비록 東洋에 있어서처럼 象數의 一元的인 原理로서는 發達하지 못하였지만 「피타고라스」Pythagoras(B.C. 580∼500)가 「萬物은 無限한 것과 有限한 것이 綜合하여서 生成하는 것이니 이것은 數의 奇偶가 綜合하여 變化하는 것과 同一한 原理」라고 말한 것이나 또 「쏘크라테쓰」Socrates(B.C. 469∼399)가 「幾何學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學校에 오지도 말라」고 한 것 等으로 미루어서 生覺하여보아도 西洋에 있어서의 哲學과 數의 關係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伏羲氏의 象數發見은 이미 五十 世紀 前에 벌써 萬古不變의 眞理로서 이 世上에 擡頭하게 되자 이것이 文王, 周公, 孔子를 거쳐서 易學의 大系를 이루었고 다른 쪽으로는 伏羲, 箕子, 老子, 公孫龍子, 鄒衍을 거쳐서 陰陽五行의 變化原理를 完成하여 놓았던 것이다. 勿論 這間에 있어서 老子의 自然觀은 勿論 列子, 莊子 등이 寓話形式을 取하면서 自然原理를 解明함으로써 實로 偉大한 功積을 남겨 놓았던 것은 다시 말할 必要도 없는 것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學派에 區別이 있었고 敷衍하는 方法에 있어서 多少間의 差異는 있었을 망정 그러나 그 原理의 歸着點을 살펴보면 一源同流에 不過한 것이며 따라서 그 法則은 어느 것을 勿論하고 宇宙動靜의 原理에서 出發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東洋에 있어서의 哲學의 方向은 端的이 아니며 統一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東洋哲學은 希臘哲學의 胎動期에 있어서처럼 그의 原質을 어떤 낱개의 物質이나 性質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니고 反對로 統一된 形象에서 찾으려는 것이니 즉 統一된 每個의 宇宙에서 찾아내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東洋哲學은 前記한 바와 같이 河圖에 象徵된 바에 依하여 象數의 法則을 찾아내고 따라서 自然을 支配하는 宇宙精神도 이 法則에 立脚한 것이라는 것을 基本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如何한 生命體에 있어서나 그의 大小를 莫論하고 各各 小宇宙를 形成하고 있다는 事實을 看過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萬物은 모다 每個의 小宇宙인 이상 그 宇宙라는 것은 精과 神의 反復하는 運動인 것이며 物과 質이 散合하는 모습에 不過한 것이다. 이리하여 精神과 物質이 서로 媒介하면서 끊임없는 變化 作用을 일으키게되고 그 結果로 生成된 것이 存在이며 따라서 生成을 가능케 한 그 原質이 바로 存在者인것이다.

  그러므로 「精神+物質=存在」라는 公式은 哲學의 硏究에 있어서 絶對眞理가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이 公式을 無視하고서는 宇宙의 本質을 찾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물]이나 [불]과 같은 物質에서 宇宙의 本源을 찾아보려는 一部 西洋哲學者가 犯했던 것과 같은 矛盾을 다시 되풀이하려는 學者도 없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筆者는 上古의 希臘哲人들에게 無限한 敬意를 表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自然哲學的 思想 속에는 自然法則이 그냥 흐르고 있다는 事實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下에 論할 機會가 있음)

  却說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精神+物質=存在」라는 公式에 가장 忠實한 것이 우리의 立場인 것이다. 그렇다면 萬物이 動靜하는 모습도 역시 「精神+物質=存在」의 運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吾人은 여기에서 精神的 存在와 物質的 存在를 抽出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따라서 精神存在에서는 精과 神을 區別하여야 할 것이며 物質存在에서는 物과 質을 辨別하지 않으면 안된다.

  萬一 그것들을 철저히 가려내지 못한다고 하면 그 法則은 宇宙의 本質을 探索하려는 法則으로서 너무나 無能力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哲學적 要求 때문에 이에 副應할 수 있는 自然法則의 發見이야말로 哲學徒에게 내려진 至上命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東洋哲學은 基本法則을 設定함에 있어서 「陽+陰=太極」, 「木+火+土+金+水=陰陽」이라는 公式으로 歸納되는 것이며 또는 「太極=陰+陽」, 「陰陽=木+火+土+金+水」로서 다시 演繹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萬物의 尺度이며 따라서 그의 分合運動과 그 本質을 測定하는 法則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萬物의 過程的 變化에서 그 原理를 硏究할 수 있는 契機가 마련되었고 그 契機에 依하여 樹立된 法則이 바로 陰陽五行의 運動法則이며 同時에 萬物과 宇宙의 本源도 여기에서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法則은 宇宙間의 모든 變化現象을 探求할 수 있는 大本이기 때문에 哲學, 醫學, 科學, 法律, 政治, 社會學 등의 原理의 探求도 여기에 依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以下에 論하려는 바는 實로 그 目的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第二節 五行의 槪念

    A. 緖論

  五行이란 말은 위에서도 若干 言及한 바와 같이 太極이라고 불리우는 統一體가 太易 太初 太始 太素의 四段階를 거쳐서 비로소 太極으로 發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發展되는 過程的 段階에 대해서는 列子에 詳述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略하거니와 要는 太極이 생김으로써 거기에서 다시 陰陽이기가 갈라지게 됐고 그 갈라진 바의 陰陽二氣는 거기에서 또 다른 分合作用이 促進되므로 因하여 五行의 原質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을 五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地球 위에 있는 森羅萬象이 비록 數億을 算한다 할지라도 萬一 우리가 그것들의 性과 質을 一一이 따져본다고 하면 어느 것 할 것 없이 五行의 기운으로 되어있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이것을 萬一 科學的 立場에서 觀察한다면 宇宙間에 차있는 萬物은 모다 元素의 集合體에 不過할 것이다.

  그러나 原素라고 하는 것은 物質만의 單位이기 때문에 元素로서 모든 生命力 있는 物質을 規定함에 있어서 그 分析能力만으로는 오히려 不足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生命力이 없는 純粹物體를 分析하기에는 알맞은 方法이겠지만 活力體를 이것으로써 規定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象數의 法則인 五行法則은 有와 無를 測定할 수 있는 自體의 要素를 內包하고 哲學界에 君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五行法則이란 것은 物質單位 만으로서 萬象을 測定하려는 方法이 아니고 精神이나 生命을 가진 살아있는 物質의 原質을 規定하며 또 測定하는 方法인 것이다. 古聖이 이와 같은 方法을 發見하게 된 것은 그 以前에 벌써 萬物의 動靜은 五行氣의 動靜이라는 것을 알아내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萬物의 움직임은 五行이라고 하는 五原質의 綜合體가 움직이는 것인즉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는 問題는 가장 重要한 硏究 課題인 것이다.

  모든 時空에 彌滿하고 있는 것은 그 自體가 五行의 氣運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萬物이란 것은 별것이 아니라 宇宙間에 가득 차 있는 五行氣運이 凝固하게 되면 形體를 이루게 되고 萬一 瓦解하게 되면 다시 純粹한 五行氣가 되는 까닭이다.

  이러한 過程에서 生成하며 消滅하기도 하는 것이 物質이기 때문에 그 物質 속에는 躍動하는 精神과 生命이 內包되지 않을 수 없으므로 萬物은 반드시 自己自體의 活力素를 가지고 나게 되는 것이다. (精神과 生命의 創造에 대해서는 別途로 論할 것임) 宇宙間의 萬物은 이와 같은 條件에서 生成하였고 따라서 그 自體가 變化無雙한 것은 五行이 氣化變固하는 作用에 依한 것뿐이기 때문에 그 自體 亦是 無形과 有形의 어느 쪽에나 適應될 수 있는 五行法則만이 萬象硏究에 있어서 至上의 規範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法則을 五行이라고 命名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爲先 「五」字를 위에 붙인 것부터 生覺하여보자. 五行이라는 法則에는 다섯 가지의 原質이 共棲하고 있다는 말이다.

  「行」字를 놓은 것은 氣運이 循環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니 거기에는 離散의 意味도 內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行」자를 分析하여 보면 「 」(자축거리며 걸을 척)字와 「 」(앙감질 촉)字의 두자가 합하여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 」字에는 가는 길에 비록 難關이 있다 하더라도 能히 行을 克服하여낸다는 뜻이 있고 「 」字에는 前進이 아니고 後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行이라는 것은 一進一退를 意味하는 것이니 즉 「行=往+來」라는 公式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宇宙의 一往一來하는 모습이 五行氣의 運動規範이라는 것을 表示하기 위해서 如此命名한 것이다. 따라서 五行運動은 分合運動이기 때문에 陽運動의 過程인 木火에서는 分散하고 陰運動의 過程인 金水에서는 綜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聚散의 意味가 (行字 속에) 內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近日 돈이 聚散하는 곳을 「銀行」이라고 하며 物件이 聚散하는 곳을 「洋行」이라고 하는 것 같은 것은 實로 이 「行」자체가 가지고 있는 意味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다음은 五原質인 五行에 對해서 그의 한 개 한 개의 槪念을 硏究하여 보기로 하자.

    B. 五行의 一般的 槪念

  宇宙의 原質을 五種으로 命名할 때 이것을 木火土金水라고 하였다. 그러나 決코 木이라는 것은 나무 自體이며 火라는 것은 불 自體를 意味하는 것은 아니다. 勿論 木火土金水의 五行은 나무 불 흙 금 물 등의 形氣具存한 物質들로 包含되어 있는 것은 事實이다. 그렇지만 五行法則의 符號는 單純한 物質의 代表符號만은 아니요 그의 生命이나 精神도 代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形」자나 「氣」자를 附加하여 「木氣」或은 「木形」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有形的인 形而下와 無形的인 形而上을 다 代表하는 것이 五行인 것이다. 萬一 哲學硏究에 있어서 가장 重要한 그의 原質을 代表하는 符號가 形의 上下나 或은 有無의 어느 한쪽만을 代表하는 데에 치우친다면 그것으로써 變化律動하는 大自然의 모습을 探索하기는 너무나 不自由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古代의 希臘人들이 犯했던 失手이며 또 오늘의 西洋哲學者들이 갈피를 못 잡고 彷徨하고 있는 點이기도 한 것인즉 그것은 바로 哲學의 基本法則이며 思惟의 唯一한 案內者인 法則自體에서 媒介된 矛盾點인 것이다.

  그러므로 象數學은 그의 原質法則의 基本槪念을 決定하는데 있어서 이와 같이 形과 氣(有無)를 自由로이 代表할 수 있는 融通性 있는 基本槪念을 設定하여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人間의 任意的 決定이 아니고 大自然의 啓示이며 또한 命令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變化하는 大自然의 本質을 詳察하여 보면 이것은 形도 氣도 아닌 것으로써 다만 分裂과 綜合을 永遠히 反復하고 있는 宇宙變化의 一大幻像에 不過한 것이므로 그 運動에는 永遠한 恒久란 있을 수가 없고 다만 感應과 恒久가 反復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直觀하고 움직이는 自然 그대로 ∼ 다시 말하면 그러한 自然을 測定하며 또 探索하기에 가장 알맞게 定한 것이기 때문이다.(註 直觀이라는 말은 틀림없이 觀察한다는 말이고 決코 보고 느낀 그대로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人間이 보고 느끼는 곳에는 恒常 自己의 感情이 앞서기 때문에 바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直觀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近來에 直觀을 「보고 느낀 대로」라고 解釋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 木

  木이라는 것은 奮發하는 기운을 代表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生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湧力이나 湧出하는 것은 다 生과 마찬가지로 木氣에 대한 象徵인 것이다.

  例를 들면 사람이나 動物의 境遇에 있어서 힘이 强하다는 것은 그것은 木氣를 가장 많이 所有하고 있다는 말과 共通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木氣가 生이나 湧出 湧力의 主體가 되는 것은 그 힘이 集中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萬一 그 힘이 集中되지 못하고 分散한다면 여기에는 生도 없으며 勇力이나 湧出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生하는 그 힘은 如何한 形態에서 充足되어지는 것일까?

  變化를 일으키는 陰陽의 造化는 恒常 蓄積과 發散의 反復인 것이다. 그러므로 木氣가 發하는 때는 內部에 蓄積되었던 陽이 外部로 脫出하려고 하지만 萬一 外部의 陰形이 아직 勢强하여서 陽氣의 噴出을 許容하지 않게 되면 그 속에서 潛伏하여 있는 陽氣는 더욱 더욱 그 힘이 强하여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힘이 脫出할 때에 생기는 反應이 바로 生이며 勇力이며 또는 噴出인 것이다.

  例를 들면 椅子나 寢臺 같은 것의 湧心鐵은 밟으면 밟을수록 점점 反撥力이 强하여 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上記한 바의 木氣의 運動原理인 것이다.

  英語의 語彙에 實로 滋味있는 것이 있으니 「스프링」Spring이라는 單語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의 一例이다. 즉 Spring이라는 「봄」「湧心鐵」「泉水가 湧出하는 모습」등을 表現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生覺하여 볼 것은 英國사람들이 옛적에 이 單語를 말들 적에 벌써 우리가 只今 말하는 바의 木氣의 原理를 知悉하고 Spring이라는 語彙로서 以上과 같은 말본으로 統一시킨 것이라고 生覺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如何間 Spring이라는 單語에는 木氣의 機能이 가장 잘 代表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木氣는 五行 中에서 어느 것보다도 陽氣를 抑制하는 힘이 强한 同時에 그 힘도 가장 强한 것이다. 따라서 慾心도 가장 强한 것이 또한 木氣인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힘과 慾心을 埋沒하는 무덤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木氣는 水氣를 발판으로 하는 最初의 發展이기 때문에 힘과 慾心이 强하지만 反面에서 보면 여기에 이르면 循環하는 바의 五行의 位置는 벌써 陽地에 접어든 것이니 그 힘과 慾心이 어찌 그냥 維持될 수 있을 것인가?

  水란 本是 凝固가 甚하여서 勇力을 潛藏하고 있을 뿐이고 뜻을 이루어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때가 이르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木氣로 變質되면서 힘(力)이 活動하기 始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水氣는 木氣의 母體가 되는 것이며 그 凝固를 爲主로 하던 水氣가 木氣의 때에 이르면 水氣의 凝固力은 점점 弱化되면서 陽氣는 潛藏에서부터 脫出하게 되므로 陽의 活動이 開始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木氣의 活動하는 모습이며 또 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自然數도 여기에서부터 火가 끝마치는 때까지는 逆數하게 되는 것이다. (自然數의 逆行云云은 「五行의 變化」에서 說明할 것임) 이와 같이 水氣를 바탕으로 發展을 하는 바의 木氣는 그가 漸漸 發展하는 동안에 이미 水氣에서 받았던 튼튼한 形質은 漸次로 엷어지게 되어서 火氣가 始作되는 곳까지 이르면 自己의 모습은 化하여 火氣로 바꿔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木氣가 發動하는 時期를 봄이라고 하며 또 東方이라고 하니 봄은 萬物의 싹(生)이 통가다리를 維持하는 때의 指稱인 것이오 東方은 陽이 發하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萬物의 싹이 다시 分裂하기 始作하는 때가 이르게 되면 이것은 火氣의 때에 속하는 것이므로 春氣는 여기에서 消盡하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理由로 人生一代에 있어서도 木氣發動의 時期는 바로 幼少年期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人間이 自己의 가지(枝)를 내기 以前이니 이것이 곧 人間의 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힘도 漸漸 생기며 따라서 모든 發育은 앞에 올 蕃盛을 對備하고 있는 것이다.

      (註) 筆者는 위에서 發展이란 말을 썼다. 發展은 前進이란 말과 다르다. 前進은 다만 앞으로 나가는 現象인 反面에 發展은 前進이면서도 그 모습에 屈伸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많은 障碍物을 克服하면서 前進하는 것을 發展이라고 하는 것이다. 自然의 運動에는 前進은 없고 다만 發展이 있을 따름이다. 象數學의 硏究에 있어서 이와 같이 正名하지 않으면 모든 硏究는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律動하는 自己만의 모습을 알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나. 火

  火氣란 것은 分散을 爲主로 하는 氣運이니 그러므로 모든 分散作用은 火氣의 象徵인 것이다. 따라서 宇宙의 모든 變化는 最初에는 木氣로서 出發하여 가지고 그 木氣가 끝날 무렵에 火氣가 繼承하여가지고 第二段階의 變化作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作用이 바로 長盛과 分裂을 爲主로 하는 바의 火氣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火氣가 分裂하며 자라는 作用은 그의 基盤을 木氣에 두고 있는 것이므로 木氣가 正常的인 發展을 經由하였을 때는 火氣도 正常的인 發展을 하게 되지만 萬若에 木氣가 正常을 잃었을 境遇에는 火도 亦是 不完全한 發展을 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火에서 뿐만 아니라 金木水火土의 어느 境遇에 있어서도 마찬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木氣의 發展은 통가다라를 維持하는 것이 特徵이었지만 繼承하여 火氣로 發展하게 되면 그 特徵은 벌써 消盡되고 分裂과 長盛이 特徵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木氣의 때에 힘과 勇氣가 特長이었다면 分裂과 長盛은 木氣에서 分家한 것에 不過한 것이다. 同時에 모든 慾心이 木에서 旺盛을 끝마치고 그 火氣의 때에 이르면 점점 稀薄하여지게 되는 것이다.

  裏面의 陽氣가 火氣의 때에 이르게 되면 外面으로 向하여 相當한 部分까지 나왔다는 證據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形質은 自然히 軟弱하여져서 外部의 形과 裏面의 陽은 그들의 抗爭에서 形體가 陽氣 앞에 判定敗를 당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힘이 弱化되는 反面에 外面은 더욱 華麗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萬一 植物에서 觀察한다면 꽃피고 가지가 벌어지는 時期인 것이오 人生 一代에서 보면 靑年期인 것이다.(形과 氣의 互相對立하는 關係는 五行生克에서 論하겠음)

  그러므로 이것을 四時의 配屬에서 보면 여름인 것이며 또한 南方인 것이니 여름이야말로 外形을 보면 萬華方暢한 때이지만 內面에서 보면 힘의 空虛에로 가는 것이며 同時에 生長이 끝나고 老衰로 접어들여는 準備段階에 不過한 것이다.

  이와 같이 宇宙의 發展은(發展은 木火의 때에만 있음) 離別을 告하고 一大轉換을 일으켜야 할 때 金火의 相爭을 中和시키기 위하여 土氣가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다. 土

  위에서 木火의 生長過程에 對해 말했다. 萬一 宇宙間에 있는 모든 生長分裂이 無制限으로 發展한다고 하면 人間의 키가 數千 尺에 달할 수 있는 것이고 樹木의 높이가 하늘을 찌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天道에는 반드시 마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發展은 生長過程에 있어서 盲目的인 前進이 아니고 發展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은 마디에 不過한 것이고 이제 火氣가 끝날 무렵에 들어오게 되는 바의 土氣야말로 眞實로 큰 마디인 것이다.

  그러므로 萬物은 여기에서 生長을 停止하고 되는 것이니 그것은 첫째로 生長에서 成遂에로 轉換하려는 것이요 둘째로 金火의 相爭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金火相爭이란 무엇인가?

  天道의 運行은 木火에서 無限分裂을 하게 되면 分列은 一旦 中止되고 다시금 그가 이미 分裂한 바를 綜合하여야하는 것이니 이 綜合作用은 金水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火氣의 分裂을 金水의 氣運으로 綜合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五行氣中에서도 金과 火의 性質은 유달리 서로 容納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金氣로서 火氣를 包圍하려하지만 火의 分裂은 金氣를 녹여버리기가 일수인 것이다.

  이것을 金火相爭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土氣가 中間에 介入하여서 이러한 弊端을 防止하는 것이 그의 任務이니 天道에 비록 四大節이 있다고 하더라도 土(未)만 더 큰 마디는 없는 것이다.(詳細는 土化作用을 說明할 때에)

  그러면 그 土氣는 果然 如何한 것일까?

  그 기운은 和順하여 不偏不黨하는 絶對的인 中和之氣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生長인 發展의 便도 아니며 成遂인 收藏의 便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作用이 陽的인 動도 아니고 陰的인 靜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公正한 存在이기 때문에 木火의 無制限한 發展을 防止할 수 있고 다시 成遂에로 誘導할 수 있는 唯一한 適格者인 것이다. 그러므로 土氣만은 外向性도 없고 內向性도 없기 때문에 또한 金火의 調節者로 登場하게 되는 것이다. 土는 그밖에 또 萬物을 繁殖시키며 살찌게 하는 일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木火金水와 갈이 一方的인 特徵에서가 아니고 土의 自然的인 調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例를 든다면 살찐다는 것은 마음의 平和에서 오는 것이고 또 肥 한다는 것은 細胞가 잘 繁殖하기 때문이란 것을 吾人은 知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마음의 平和나 細胞의 繁殖은 전혀 土의 平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宇宙의 調和도 오직 土氣의 이와 같은 自然性에 依해서 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土氣는 어디에 그의 발판이 있는 것일까? 勿論 火氣에 그의 基盤이 있는 것이다. 즉 火氣가 無限分裂할 때 생기는 副産物이 바로 土氣이므로 土는 有形 無形의 中間的인 存在인 것이다. 長夏가 土에 配屬되며 方位는 中央에 位하여서 萬物의 繁殖에 寄與하는 것도 또한 그의 自然的 功用인 것이다.

      (註) 自然이란 것은 其然(陽的 行動)과 不然(陰的 行動)의 中心이므로 그 特性은 絶對 公正한 것이다.

  그러나 土는 반드시 火氣의 때에만 생기는 것도 아니고 비록 大小의 差는 있을망정 四季에는 언제나 土氣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四季의 末은 土用(土의 作用)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그것은 後에 詳述)

  이와 갈이 土氣는 五行中에 가장 複雜微妙한 內容을 지니고 있으므로 簡單한 說明으로써 理解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第二節에 土化作用이란 題目에서 詳述하기로 하겠다.

  다만 여기에서는 土는 木火에서 發展했던 것을 金水에서 收藏할 수 있도록 媒介하며 同時에 金火相爭을 調和하는 至公無私한 存在이며 따라서 五行中에서 萬物을 살리게 하고 繁殖시키는 唯一한 存在라는 것만 論及하려는 것이다.

    라. 金

  宇宙의 變化는 土氣의 公正無私한 黃婆(土의 仲媒調和하는 것을 黃婆의 作用이라고 함) 作用에 依하여 木火의 作用에 終止符를 찍게 하고 金水가 作用하게 하는 것이 이른바 陰陽作用의 四大節인데 이와 같이 收藏단계로 접어드는 最初의 段階가 바로 金氣의 作用인 것이다.

  그러므로 金과 木은 그 性質이 全혀 反對이니 木의 때에 있어서는 裏陽이 表面으로 脫出하려는 發展의 最初段階였지민 金氣의 境遇는 表陽이 內部에 收藏되어지려는 靜歸運行의 始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萬物은 春氣에 있어서는 그 힘이 表面으로 湧出하려고 하지만 가을에는 內部에 潛入하여 고요히 잠들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봄에는 萬物의 外殼이 軟化하여지는 것이나 가을에는 外殼이 漸漸 硬變하여지게 되는 것이다. 吾人이 봄에는 被服을 漸漸 엷게 입으며 가을이 되면 차츰 두껍게 입는 것은 從天道의 原理에 依함이요 또 靑少年은 皮膚毛髮이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壯老期에 접어들게 되면 그 容貌 筋骨이 거칠고 추하게 마련인 것은 避할 수 없는 金木의 反復作用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金木의 反復作用은 金火의 散布作用에서 媒介되었던 것이며 金火의 散布作用은 土에 依해서 媒介되었던 것이다.(金火의 散布作用은 「寅申相火」에서 論하겠음)

  그러므로 自然數도 여기에서부터 順行하게 되는 것이니 여기 대해서는 다음 「數의 變化」를 말할 때 詳述할 것이다.

      (註) ([散]字의 뜻은 火의 無限分裂을 意味하는 것이오 [布]字의 뜻은 金氣가 綜合作用을 始作할 때 表面부터 統一이 形成되어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金氣는 木氣와는 全然 反對되는 作用을 하는 것이니 그 基盤을 土에 두고 있으며 그 性質은 堅斂을 爲主로 하므로 人間의 慾心도 金氣에서 始作하여 木氣에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金氣는 季節로 보면 가을에 配屬되며 方位로 보면 西方이고 人間一代에서 보면 老壯期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收斂을 象徵하는 것이니 그것은 다음에 올 凝固作用을 爲한 準備인 것이다.

    마. 水

  萬物의 收斂作用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은 金氣作用을 거쳐서 비로소 收藏作用을 完成시키는 것이다.

  金氣는 表面을 堅斂시키는 일을 하였지만 水氣에 이르면 그 深度가 濃厚하여져서 內部까지 凝固시키고 애오라지 萬物의 生命인 核만은 本來의 軟性대로 保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가 生命의 倉庫이며 또 精神의 집인 것이다. 이것이 躍動의 本源이며 形貌의 母體인 것을 어찌하리오.

  이와 같은 水氣에 依하여 萬象은 精神과 肉體를 얻어서 그의 一代를 華麗하게 裝飾하는 것이며 또다시 歸藏하고 마는 玄微한 寶庫인 것이다. 象數의 硏究目標는 實로 여기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數千年 哲學史가 메마른 筆鋒으로 表皮만 더듬고 만 것도 畢竟은 玄玄妙妙한 이 境地를 開拓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東西의 古代 聖哲들의 한마디 한마디 속에는 言中有骨이었던 것을! 이것이 바로 「물」의 意志이며 坎의 變化인줄을 누가 알았으리요.

  却說 이와 같이 玄妙한 水氣는 오로지 自己의 全部를 犧牲하면서 淸楚한 봄과 華麗한 여름을 꾸미고 莊嚴한 가을과 嚴肅한 겨울을 만들어서 自己保存을 反復하는 無窮한 大宇宙의 本質이며 同時에 現實存在를 超越한 基本存在로서 永世無窮토록 이 宇宙에 君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물이야말로 宇宙의 本質이 아니고 무엇이리오

  「탈레스」(Thales)가 「宇宙의 本質은 물이다」라고 외친 한마디가 眞實로 蔑視의 對象일 것인가? 尊敬의 對象일 것인가?

  經驗은 眞理만큼 眞實한 경우가 많다.

  나는 數年 前에 어떤 園藝家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百合꽃을 크리스마스 때에 내면 좋은 장사가 되는데 그것을 그 때에 알맞게 내는 方法으로서 六七月에 百合의 뿌리를 七八度 가량의 冷室에 넣었다가 溫床에 栽培하면 그때에 꽃이 滿發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勿論 그는 우연한 經驗에서 體得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왜 그렇게 되는 理由는 모른다. 그러나 宇宙의 變化現象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보면 水氣作用의 功德인 것을 어찌하리요.

  嗚呼라 偉大한 眞理가 어찌 百合 한 송이에만 適用되리오!! 天地萬物이 모두 그 품에서 나(生)서 또다시 그 품안에 돌아가고야 말 것을!!

  銃알은 다져질수록 멀리 나가게 마련이며 한 알의 씨앗도 겨울의 凝固作用을 얻은 후에야 강한 싹을 내지 않는가

  그러므로 水氣의 活動은 萬物의 活動이며 萬物의 活動은 또한 水氣의 活動인 것이다.

  다만 北方 水氣를 四時에 配屬할 때 겨울에 속하는 것은 그의 本位를 말함에 不過한 것이다. 水氣는 火氣와는 性質이 相反되어서 發展의 敵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相殘하는 곳에서 萬物의 生命이 保存되는 絶對的인 必要惡인 것이다.(詳細는 水火一體論에서 밝히겠음)

  (附言) 以上 論述한 바를 硏究함에 있어서 相當히 理解되지 않는 곳이 많을 것이나 다만 理解되지 않는 곳을 熟讀하고 熟考하면서 前進하면 講義가 進行함에 따라서 절로 解得하게 되는 것이니 이 點을 留意하면 된다. 筆鋒으로서 舌端을 代行하려하니 紙面과 時間이 모든 것을 許諾하지 않는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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