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개국사찰인 개태사 대웅전의 모습.  
 
자! 계룡산 줄기에 또 다른 역사가 보존되고 있으니 유동리를 지나 화악리 오골계팻말을 보고 지나가노라면 S-OIL주유소 전 버스승강장사이로 굴다리가 나있는데 여기를 돌아가면 개태사가 나온다.

굴다리 사이로 승용차를 힘겹게 빠져나오면 정말 형편없는 절이 나온다. 조그만 암자 같은 곳이니 개태사가 큰절인 것으로 알고 찾아간다면 정말 실망이 앞설 것이다.

고려를 창업한 ‘태조 왕건’,  TV드라마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온 그 왕건!  그분의 영정이 존재하고 있었던 그 절이니 그 규모가 대단했을 텐데......

고려사절요에는 ‘개태사를 지을 때 사치스러운 것이 극도에 이르고.....12개월 만에 개태사가 완성되니 낙성법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소(疏)를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태사를 지을 때는 10만여 평이나 되고, 8만9암자(八萬九庵子)를 소속시켰다고 하니 고려의 호국대찰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지만 눈앞에 모습은 그 것과 다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이제부터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나씩 쳐다보고, 아기자기함을 느껴보자.

이절에 우리의 전통신앙의 모든 것이 배어있고 잘 진열되고 있으니 이곳에서 우리 조상들이 말해주고자 하는 정신세계의 모든 것을 천천히 찾아보도록 하자.

여기서는 놓칠 것이 하나도 없다.

일주문에서 사찰정문에 이르는 너무도 짧은 길

일주문에서 사찰정문에 이르는 길 양편으로는 거대한 고목들, 향나무냄새를 맡으면서 심호흡을 해보자 상큼함이 베어 나올 것이다. 원래 향나무를 심는 것은 귀신을 물리친다는 ‘신목(神木)’의 성격을 띠는 나무인지라 보편적으로 묘지나 사당 주위에 많이 심어놓았다.

이러한 신목으로는 향나무 외에 회화나무, 엄나무, 화살나무를 많이 심기도 한다. 특히 회화나무는 학자집안에 많이 심고 부귀를 불러온다고 하여 많이 권장되어 심는 것 같다.
대전 현충원에도 이러한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계룡시에도 금암동에는 회화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공해에도 튼튼하고 보기도 좋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입암 공단 조성작업으로 200년 이상 된  ‘엄나무’가 잘려나갔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엄나무는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기 때문에 200년 이상 된 엄나무는 보기도 힘들고 그 정도로 자라기도 힘들다.

계룡시에서는 택지개발이나 주택개발 등으로 잘려나가는 고목들을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이곳이 신령 깊은 땅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인식한다면, 그 것이 상록도시 이미지에도 부합하지 않을까.

그나마 인근 대전시처럼 기존에 잘 자라는 나무도 베어내고 새로 나무를 3천만그루를 심는다고 아우성치지는 않아서 좋지만 그렇다고 잘려나가는 고목나무들을 도외시 한다면 결국은 우리가 그 해로움을 당할 것 아닌가.

방금까지 달려온 도로의 삭막함이 일순간 사라진다면, 이제 역사의 길이 시작되는 문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풀어보자.

이야기를 다시 천호산으로 돌려보자.

우리가 쓰는 연호(年號), 단기(檀紀)는 하나의 시발점을 의미하듯이 불가에서는 불기(佛紀)를 쓰고 있다.
그런데 개태사 초입의 일주문상량에는 불기 3007년으로 씌어있고 정문상량에는 불기 2542년으로 다르게 적혀있다.

왜 다를까?

한 건물에 나이가 465년씩이나 차이가 나는 다른 두 가지 표시를 해놓고 있으니 이 건물의 나이가 불량한 것인지 제멋대로 적어놓은 것인지 그렇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이 절에 배치되고 있는 모든 것은 상당히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아무렇게 배치되거나 허접스럽게 가져다 놓은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하나하나에 주의를 더욱 기울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도래한 고구려 시대로부터 1962년까지 약 1300년 동안은 석가부처의 탄생을 1027BCE로 하는 북방불기를 사용해오다, 1956년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 불교도대회에서 불법의 기원에 대해 당해 연도인 1956년을 2500년으로 공통적으로 적용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태국과 미얀마 등의 남방불교에서 쓰던 불기가 채용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본래 쓰던 불기 3000년과 약 500여년의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태사는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으로 인해 북방불기를 고수하고 있다고 보여 지는데 북방불기(불탄 3007년=서기 1980년, 일주문상량)와 불멸을 기원으로 하는 남방불기(불기 2542년=서기 1998년, 정문상량)을 함께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불기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는 것 같으나 너무 많은 지식은 여행의 가치를 고식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자. 

향나무 길을 걸어 일주문에서 절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은 짧다.
‘풀끝의 이슬’같이 그것이 인생인 것을, 너무 짧아 허무감을 느끼기 전에, 자 고개를 들어  개태사 정문 현판을 보자!

‘대천호산 삼천일지 개태사(大天護山 三天一地 開泰寺)’ 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개태사의 전체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개태사가 있는 이 뒤 산이 바로 천호산(天護山)이다. 천호산의 예전 지명이 황산(黃山)이다.
태조 왕건이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여겨 황산(黃山)이라 부르던 승전지의 배산(黃嶺의 북부)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연산 뜰에서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던 태조 왕건이 위기에 몰리자 갑자기 천호산에서 신장을 들고 말을 탄 병사들이 나타나 백제군을 무찌르게 되었다고 하여 산의 신에 대한 가호에 감사를 드린다고 황산을 천호산이라 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남해 금산의 지명을 바꾸어 준 것과 같이 높으신 분이 뜻이니 천호산도 그렇게 지어지고 불리우 게 된다.

그렇다 이 근처, 연산 앞뜰이 황산벌이다.
이 지역은 예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서, 계룡산의 관문으로 여기를 지키다 순국한 수많은 원혼들이 있는 곳이었다.

유명한 계백의 황산벌이 바로 이 언저리인데, 양정 고개에서 연산면으로 들어가는 들판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는 계백장군이 신라군의 젊은 화랑 관창의 목을 벤 곳으로 유명한 관동리가 있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른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곳이 이곳 황산벌 싸움에서였으니, 이곳이 바로 계백 장군의 결사대가 순국한 곳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의 아들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명실상부하게 통일 대업을 달성한 곳도 바로 여기이다.

수많은 왜인들이 유독 이곳에 많이 침략을 해온 것도 고려의 3대 사찰로서 이 곳 일대에 수많은 전투가 치러졌으니, 그리고 동학혁명의 깃발에 다시 집결하게 된 곳도 이곳 계룡산이니 이곳에 왜 그리 선조들은 애착을 가지고 지키려 했을까?

천호산은 연산이다(連山).

연산이란 연이어진 산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병풍첩이 붙어서 펼쳐진 것같이 여자한복의 주름이 첩첩이 늘어진 것과 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산은 기운이 좋다고 하는데 익산에 용안에 있는 뒷산이 그렇고 대전에 있는 구봉산이 연산의 형태인바, 이러한 산들의 주위에는 정말 기운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연산의 형태이지만 느슨하게 연이어 있는 대전의 월평산성이 있는 월평산도 갑천을 따라 용 같이 길게 늘어져 있는데 여기를 뚫어 길을 낸다고  많은 마찰이 생기고 있다.  이런 산은 등산을 많이 하면 원광대 조용헌 교수의 표현대로 ‘마운틴오르가즘’을 많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연산이 늘어진 산인 늘뫼-놀뫼-논산이 되었다고 하는데 여하간 보기 좋은 산이다.

요새는 산중턱까지 전원주택을 진다고 산을 마구 헤쳐 놓았으니 볼썽사납다.  
이제 다시 개태사현판으로 돌아가서 삼천일지(三天一地)라고 쓰여 있는데, 하늘은 3이요 땅은 1이라, 즉 세 분 하느님을 한 분이 땅에서 받든다는 뜻이다.

삼천은 세 분 하느님으로서 여기 개태사에서는 미륵삼존불을 의미하고, 일지는 땅에 계신 한 분이 세 분의 하느님을 받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한 분이 바로 개태사의 삼존불이 모셔진 전각 왼편에 위치한 팔각정에 모셔져 있는 ‘나반존자’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태조 왕건이 나라를 창립할 당시는 삼신사상이 강했고 단군에 대한 믿음도 강한 시기이고 지금도 우리나라의 단군영정의 표본이 있는 장소인지라  삼천세계는 환웅, 환인, 단군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결국  천부경의 삼태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현판이 만들어진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을 보면  국초 이래로  ‘연산현(連山縣) 계룡산 개태사 터는 곧 후대에 정씨가 도읍할 곳이다.’라는 참설에 영향을 받아 삼천세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장소임을 알리는 표현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들의 신화에 담겨진 ‘3’의 의미를 지나치게 간과해왔다.
우리 민족의 탄생신화에조차 녹아 있는 3은 가장 환상적인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삼족오, 풍물 굿의 삼채장단인 삼박자, 삼성혈, 삼재수, 삼정승과 민족 신화에 3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음은 우리 민족의 형성기부터 3이 매우 중요했음을 암시한다. 하기야 기독교에서도 삼위일체가 있고, 유교에서도 삼강오륜이 있으니 3이라는 숫자의 묘미는 어디까지 일까? 삼천세계는 결국 3을 중시하는  삼신사상의 영향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3을 중시하는 우리 풍속에 삼신할멈이 있다.
제주도의 명진국 생불 할망 본풀이에서는 삼신할멈의 탄생과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삼신할멈의 나이가 일곱 살 되던 해 정월 초하루 인시에, 옥황상제님이 불러서 "너는 인간세계에 가서 아기를 낳게 하는 삼신할멈이 되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삼신할멈은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고 내려오다가, 아기를 낳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 아기를 낳게 해주었다. 삼신할멈은 은가위로 그 아이의 탯줄을 끊고 석자 실로 잡아맨 다음, 더운 물로 목욕시키고 유모를 불러 젖을 먹이는 한편, 미역국을 끓여 산모에게 먹였다.
그리고 사흘 후에 산모에게 쑥물로 목욕케 하고 태를 사르고 아기에게는 배내옷을 입혔다.
민간에서 삼신을 모시는 과정도 위와 같다.
      (주강현저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중에서)

개태사의 대표적인 삼불부처도 삼신신앙의 확대 과정에서 등장한 부처가 아닌가 싶다.
삼불제석도 아기를 점지해주고 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
그래서 개태사가 미륵도장으로 유명했던 것 같다.
 
삼불의 ‘불’을 원래는 근본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인 ‘부리’에서 나온 말이 후대에 불교와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개태사에는 이렇게 ‘3’ 자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개태사 현판의 ‘삼천일지’, 요사채 3동건물, 팔각정에 모셔진 3분, 창운각에 모셔진 3분과 용화궁에 모셔진 석불입상 3분이 모두 3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빼먹지 말고 알아야할 3이 있으니 창운각안에 모셔진 단군 옆에 놓여 있는 천부경 안에 있다.
그것은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라는 표현 중 ‘석삼극’이라는 글인데, 어려운 글이다.

자, 이제 ‘개태사(開泰寺)’

태조가 친히 기원문(祈願文)을 지어주었는데, 절 이름을 개국에 이르게 된 것은 부처와 산신령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개태사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이 있었으며,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신탁(神託)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 온 절이다.

고려시대 왕실의 원찰이자 호국 사찰로는 개성의 봉은사, 봉업사, 논산의 개태사가 있어 고려의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고려의 존립 475년 동안 왕실에서 한해도 빠짐없이 선왕에 대한 예를 올렸다고 한다.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km에 달하는 토성이 있는데 승병이 주둔하였다고 전한다.
승병이라는 것은 고구려이전 시대부터 조의선인이라고 하여 왕의 친위부대의 명칭인 것이다.
절의 스님으로 구성된 병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절에는 유독 고려 말 이후부터 왜구의 침입이 많았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에는 한나라의 운세를 바꿀 수 있는 ‘해인(海印)’이 묻혀 있다고 한다.
이것만 있으면 천하도 두렵지 않는다고 한다.

이 땅에서 태생한 백제의 후손들이니 이를 모를 리 없을 것이고 이를 찾기 위하여 수많은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쳐들어 왔으니 바퀴벌레도 아니고 죽여도 나타나니 ‘개뿔도 없는 인간’들 같으니, 반성하는 뜻이 없는 민족이다.

옛날 삼신께 죄를 지은 황궁 씨는 자기 몸을 스스로 결박해 천제 단으로 나아가 하늘이 정죄해 줄 것을 자청했는데 이러한 속죄행위를 계불 의식이라 한다. 흔히 ‘개뿔도 없다’라는 말은 뿔 없는 짐승인 개(犬)의 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황궁 씨의 계불 의식에서 유래 된 말이다.

최영 장군은 1376년에는 연산의 개태사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하였다고도 하는데 최영장군까지 나선 것을 보면 결국은 이러한 대규모사찰도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대전을 향해 진군 중인 왜군에 의해 개태사가 불태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여립이 여기를 중심으로 한 모반이 있었다고 하여 조선왕조에서 의도적으로 더욱 폐사 화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신도 안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조선왕조는 이곳 계룡산일대를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 진다. 대한제국 말까지 이 신도 안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못했다.
 
누구든지 이곳에 들어와 득세하는 기미가 보이면 정감록을 꿈꾼다 하여 관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백성들이 들어와 살 수 없는 곳으로 대부분의 토지가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주변은 제약이 덜했지만 이곳에는 김장생, 송시열 등의 기호학파의 중심지로, 조선중기 이후 강경포구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파평 윤씨, 광산김씨 등의 쟁쟁한 문중들이 그 터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권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국초 이래로 “연산현(連山縣) 계룡산 개태사 터는 곧 후대에 정씨가 도읍할 곳이다.” “이 씨는 망하고 정 씨는 흥한다는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尊邑興)”이라는 참설에 과민 반응을 보여 왔던 조선왕조는 ‘정씨 외에’ 다른 성을 가진 집안이 계룡산일대를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하여 세도를 부렸어도 이를 용인해오는 정책을 써왔다.

‘삼발에 한번 똥 눈 개는 늘 눈 줄 안다’고 한번 죄를 진 사람은 언제나 의심받게 되니 그러다가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였으니 그 이름이 정여립(鄭汝立)이다.

조선왕조는 무엇이 두려워 정여립모반사건과 기축옥사를 만들어 정여립을 죽게 하고 진보적이고 유능한 인사들을 대부분 죽이거나 유배 보냈을까?

정여립모반사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 10월에 일어났고, 그때 죽거나 다친 자가 무려 1천여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나라의 인구가 500여만 명에 불과했다니 그래서 흔히 ‘기축옥사’를 ‘조선조의 광주사태’ 라고도 한다. 이 때에 호남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정여립을 두려워 한 것이 진정 무엇일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는 인민주권설, 능력에 따라 누구든 임금이 될 수 있다는 공화주의를 주창했으니 가히 혁명적인 사상 이론을 외쳤다. 어찌 보면 당시로서는 역성적인 사상가라고도 하겠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도 50여년 앞서 공화주의를 외쳤으니, 단재 신채호는 ‘그는 4백 년 전에 임금은 신하에 대하여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동양전래의 유교적학설인 군신강상설(君臣綱常說)을 타파하려고 했던 위대한 사상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주장과 움직임이 거대한 혁명으로 까지 가지 못해, 루소의 민약론에 영향 받아 거대한 파도처럼 장엄하게 전개된 프랑스혁명에 비할 수 없게 되었다고 단재 신채호선생은 말씀하시고 있는데 대단한 사상가였음은 틀림없다.

율곡 이이도 칭찬해 마지않을 정도로 당대의 천재로, 이이는 그의 학문과 인물됨을 사랑하여 기회 있을 때 마다 그를 요직에 천거하였고 당대의 최고의 엘리트들이 가는 홍문관의 수찬(정6품)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데 그는 이이가 죽자 집권파인 동인으로 변신하였고 이이를 비방하기에 이르게 되니 이에 선조가 “이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네가 지극히 따르더니 지금은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라고 질책하자 ”처음에는 신이 그들의 마음을 몰랐으나 이제야 깨달았으므로 절교하려는 것입니다”하면서 “신이 지금부터 다시는 천안(임금의 얼굴)을 뵐 수 없겠다”고 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선조를 쳐다보았다고 할 정도로 기개가 당당한 정여립이다.

더구나 양반과 상놈, 귀한 자와 천한 자를 구별하지 않아 그와 뜻을 같이 한 선비들은 물론 천민과 승려들이 많이 몰려들었으니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고,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고 외치면서, 전제군주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세상에 경천동지할 소리요. 당시의 유교의 가치관을 뿌리째 뒤엎을 만한 주장인지라 조선왕조에서는 섬뜩 함을 아니 느꼈겠는가.

더욱 왜란에 대비한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영향을 받아 대동계라는 무장단체를 만들고 정여립의 사상에 영향 받아 일부에서는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는 인계, 양반살육계(兩班殺戮契-다무력폭동단체)등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었으니 정권차원에서 불안을 아니 느낄 수가 있겠는가?

정여립이 일찍이 중 의연의 무리와 국내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폐사(廢寺)가 되어 있던 개태사의 벽에,

‘손이 되어 남쪽 지방 노닌 지 오래인데
 계룡산이 눈에 더욱 환 하여라
 무자 · 기축 년에 형통한 운수 열리거니
 태평 성세 이루는 것 무엇이 어려우랴’

라고 시를 썼는데, 그 시가 많이 전파하게 된다.

혁명의 시발점이 되는 표현이다.
이러한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을 조선왕조에서 가만히 놔두겠는가?

‘끽’이다

그곳도 계룡산아래 개태사에 알쏭달쏭한 시를 쓰고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그를 계룡산 정도령으로 보아 그 싹을 자르기 위하여 ‘애매한 두꺼비 떡돌에 치였다’고 무참한 살육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그의 집터며 선산, 그리고 사당 등은 모반 당시 숯불로 혈맥이 끊기고 파헤쳐졌으며 그와 인연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쑥대밭이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가 뜻을 못 펴보고 사라졌으니 안타깝다.
결국 개태사는 또 한 번의 사상가로 인하여 존립자체가 위협받게 되고 소멸될 위기에 이르게 된다.

개태사는 이래서 우리에게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된다.

절 안으로 발을 들여놓아보자.

여기에서 관람순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다오는 반시계방향으로 보는 것이 더 멋있고 이해하기가 좋다. 반시계방향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옛날로 가는 타임머신이 아닌가?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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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암 마을!

가야곡에서 운주로 넘어가는 국도 길옆에 있었으니, 여기를 찾아가기 전에 들러보아야 할 곳이 많으니 하루 일정을 잡고 좋은 여행코스를 소개하니 참고를 하시라.

계룡시에서 출발하여 유동리를 지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화악리 이래진 오골계 마을’이라는 신호간판이 나오면 철길을 건너 여기를 둘러보자.

 
 
 
  ▲ 화악리 오골계.  
 
연산 오골계 마을은 태조의 아들인 익안대군 14대손인 이형흠이 처음으로 오골계를 사육하다가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것을 그 후손인 이래진이 계승 사육하였다고 한다.

화산 전주이씨 지천석비가 마을입구에 씨족마을 이라는 느낌과 전설을 간직함을 보여 주는 것 같은데 몇 그루의 느티나무고목과 돌무덤이 있어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여기 느티나무 고목은 천호리 고목과 아울러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개태사를 창건하고 국찰로 명하였다.
왕건은 개태사를 짓는데 공이 큰 두 사람을 불러 느티나무 한그루씩을 상으로 내렸다.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집 근처에 심고 정성을 다하여 가꾸면서 서로 의형제를 맺고 도우며 살아갔다.
그 후 형은 옥동자를 낳아 훌륭하게 키웠다. 동생 역시 왕이 내려준 나무를 정성껏 가꾸어 무성하게 자랐다.

어느 날 왜적들이 마을에 침입하여 느티나무 그늘 밑에서 고기를 굽고 술상을 차려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그 나무를 심은 동생은 참다못해, ‘ 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려 주소서’하고 빌었다.
그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한바탕 폭풍우가 휩쓸더니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그 나무를 향해 벼락이 내려쳤다. 왜적들은 벼락에 맞아 죽고, 그 이후 이 마을에는 더 이상의 화는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는 벼락을 맞아 화상을 입어 속 부분이 불에 탄 채 텅 비어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오석으로 커다란 오골계조각돌을 세워놓았는데 재미있는 발상인 것 같다.
이곳의 오골계는 천연기념물 265호로 지정되었고 당나라를 통해 들여온 것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잘 자라지 않고 이곳에서만 사육되었다고 한다. 다른 지역은 전부 여기서 분양된 것이라 한다.

최근에 익산부근에 닭 캐슬 병이 유행했을 때 이곳의 오골계를 다른 지역으로 공수 받는 귀한 대접을 받을 정도였으니 부럽다.

조선연산군 때에는 일반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정승까지도 오골계를 먹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벼슬을 빼앗기고 심지어는 귀향까지 보냈다고 할 정도로 귀하게 보호되었다고 하니 예나 저나 귀한 대접을 받는 꼬끼오(高貴吾)오골계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전비방(家傳秘方) 책에는 이 오골계가 중풍, 고혈압에 너무나 신기하게 잘 듣는다고 적혀 있다.  그 방법을 소개하면, 탕을 끓일 때는 털과 내장을 버리고 해바라기 꽃 둥근  것 전체를 두세 개를 따서 오골계와 같이 푹 고아 국물과 살코기를 먹는데 사람이 따라 다르겠지만 다섯 마리 정도면 90퍼센트 완치를 볼 수 있다고 하니 권하고 싶다.

또 다른 방법은 오골계 한 마리에 검은콩 한홉을 넣어 달여서 마시되 세 번만 먹으면 효력을 본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 화악리 이래진 오골계 집은 정성을 다해주는데 양과 주머니 사정을 비교하면  가격이 좀 비싼 것이 흠이다.

여기를 보고 다시 돌아 나오면 철길 건너 쪽 앞 언덕위에 모 방송국의 ‘칭찬   합시다’에 나오시기도 했다는 신복균 씨가 운영하는 허름한 묵밥집이 있다. 시각장애인으로 장애인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분인데 많은 분들이 찾는 곳이다.

 
 
 
  ▲ 고려의 개국사찰인 개태사 대웅전의 모습.  
 
다시 하행 길로 가면 개태사역에 이르게 되는데 역 옆에 주유소 가기 전 버스주차장 옆으로 개태사로 진입하는 좁은 통로 길이 나있으니 조심해서 통과하면 종교박물관, 왕건의 고려왕조 개태사가 나타난다.
무조건 둘러보아야 할 곳이다.

다시 오던 길로 내려오면서 좌측 산을 보면 이것이 천호산이고 용마루같이 늘어진 병풍처럼 주름이 겹겹이 생겼다. 36개의 봉우리가 정말 멋있다.
그래서 늘어진 산이라는 의미로  '늘이기재' 또는 '누르기재' 라고도 부른다.
한문으로는 연산(連山)이 우리말로 놀뫼가 한자로 음역되면서 논산이 되었다고 한다.

연산검문소를 지나면서 공단좌측으로 벌곡으로 가는 연산 구길 로 접어들어 내려가다 보면 송불암이 있는데 여기에 서 있는 부처님이 계신다. 옆에 소나무가 멋있다.

그 아래에는 예전에 금들농원이었는 데 지금은 ‘산애들애’라는 참나무 장작  바비큐 집이 있는데 정원을 잘 가꾸어 놓았다. 여기서 연산사거리 가지 전 앞에 있는 주유소 좌측으로 돌아서 산 쪽으로 한참을 가면 ‘콩콩이와 청청이’이라는 상호로 두부와 김치찌개를 하는데 맛이 끝내준다. 한번 가보기를 권한다.

여기는 유명한 ‘산꾸지뽕’물을 주는데 여성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물이니 후회는 없을 것이다.
먹는 이야기는 여기쯤하고 연산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서 한민대학교를 지나가다 보면 여기도 맛있는 집이 있는데 송어무침집이 있다.

시간나면 들리고 아니면 그냥 직진하여 호남고속도로 위를 지나게 된다.

이 호남고속도로를 경계로 예전에 신라와 백제군이 대치를 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보아온 곳이 황산일대로 황산벌전투가 있었던 장소임을 알고, 고속도로 경계를 지나 200m쯤 가면 당골 마을에 김일부 선생의 묘역이 있으니 한번 가서 참배하고 계속 달려가 보자.

양촌시내에서 직진하면 유명한 바랑산, 대둔산과 그 일당들이 기다리지만 다음 기회로 하고 가야곡 쪽으로 진입하여 (물어서 가야 할 것이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좌측 산 옆에는 한국신약이 보이면서 ‘쌍계사’가 나온다. 여기는 가족들이 필히 도시락을 싸가지고 찾아보기를 권한다.

 
 
 
  ▲ 쌍계사 대웅전과 내부모습.  
 
쌍계사 뒷산이 불명산이고 이 주변은 아직도 옛날의 절이 많아 문화재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불명산 뒤쪽 완주에 화암사가 있다. 화암사 극락전은 그 내부도 멋있지만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하앙식(下昻式) 구조이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세까지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라고 하여 한국의 건축양식을 깔보던 일본이 이 하앙식 구조 건물이 발견되자 코가 석자나 빠졌다고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절이다.

자! 쌍계사 이절은 대웅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 품삮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절이다.

본인이 작성하여 법원문집에 실린 글을 옮겨 보겠다.

“ 예전에 포장이 안 되어 다니기도 어려웠으나 지금은  포장이 잘되어 있다.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전각이 손실되어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들기는 하나 구례의 쌍계사에 견주어 절 자체로는 논산의 쌍계사가 더 멋있다. 특히 조각에 의한 장식 미는 그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 보물 제40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이 법당  안을 감돌고 있다.

이제부터 대웅전 그 자체가 지니는 조각의 극치를 만나보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도깨비를 찾아보자.

전면 5칸에 모두 열 짝이 달린 문에는 국화, 작약, 모란, 태극, 무궁화, 연꽃 등 6종의 꽃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채색되어 있는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신기한 것은 법당 안에 들어가서 문을 보면 조각된 그림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문살만 보인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박람회를 핑계로 문짝을 떼어서 서울에 가져가서 구경까지 시켰다고 한다.

법당을 들어서면 법당입구위에 ‘게’그림이 그려져 있다.
웬 절에 게 그림이 그려져 있을까 의아심이 들겠지만 이것이 남방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남의 미황사에는 법당의 기둥 주추 석에 이런 게 그림이 나오는데 이런 것이 모두 남방불교의 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 이제 정면의 탱화를 보자. 웬 임금이 오만하게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유학 속에서 불교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석가여래부처님을 모시고 좌측으로 아미타불과 오른쪽은 약사여래를 모셔두고 있는데, 고개를 들고 부처님 위를 쳐다보면 닫집이 있다. 이 닫집은 임금님의 자리나 부처님의 자리위에 장식으로 만들었다는 집의 모형이다. 이 닫집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석가여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물을 토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멋진 조각솜씨이다. 여기서는 감탄사가 나와야 한다. 닫집 앞에는 새를 매달아 놓았다. 이것이 바로 용을 잡아먹는 전설속의 금시조라고 한다.

고개를 뒤로 젖혀서 천장을 보면 나무로 만든 학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천상세계를 실감나게 해준다.
이쯤 되면 법당 안이 조각전시장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뒤로 젖힌 고개를 바로하고 부처님 앞에 놓여 있는 긴 탁자를 보자.
이 탁자는 15미터의 길이에 나무를 잇거나 합하지 않은 한 나무판이다.

법당의 기둥 중에 하나는 칡뿌리 기둥이라는 전설이 있으니 좌측법당으로 들어가는 쪽 뒤에서 두 번째 기둥이라고 한다. 봉황루에 있는 법고는 통나무를 파서 만들었다는데 절의 역사만큼 천년을 넘겼을 것이라고 추정 되고 있는바 아직도 온전함에 감탄을 금할 길 없다.

이런 조각 작품으로 잘 지어 놓은 집에는 부처님 말고 그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자 여기서부터 우리의 도깨비를 찾아 황당함의 극치를 맛보자.
우리의 도깨비는 본래 뿔이 없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뿔 달린 일본도깨비가 들어와 이것이 도깨비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이 국가로 발전할 당시, 음양도(陰陽道)라는 유파가 있었는데 그 방면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음양사(陰陽師)라 불렀다. 그들은 영주나 귀족, 국가경영의 고문으로서 폭넓게 활약했었다.
지금도 이들의 활동이 일부 보이듯 하다. 도깨비는 바로 그 음양사들이 만들어낸 요괴(妖怪)인 것이다.

고구려 군인들은 뿔 달린 투구를 쓰고 나오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무서워했고 이것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뿔 달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학자도 있다. 치우천황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그렇지만  뿔 없는 도깨비가 우리의 도깨비 본래 모습이다.
보통 도깨비 문양은 지붕의 기와에 새겨놓은 것이 많은데 여기서는 당당히 불집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쯤이면 도깨비를 찾았을 것 같기도 한데, 도깨비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봉황루 전면 창방부에, 나머지 두 마리는 대웅전 편액의 위쪽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참 순하디 순한 모습이다. 저 도깨비들이 장난을 하여 멋진 조각품을 해놓은 것이 아닐까 하여 미소를 머금어 본다. 토속종교가 절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 쌍계사를 나와 시간이 난다면 바로 옆에 있는 감코리아를 둘러 곶감 말리는 작업도 구경하고 한방 곶감도 한번 시식해 보기를 권한다. 양촌일대가 곶감의 주산지라 유명한 곳인데 여기는 곶감을 특수 한방 처리하여 제조하고 있는데 맛이 참 좋다. 고집쟁이인 ‘이주용’사장이 만들어 낸 걸작품이다.

감을 냉장고에 얼려서 썰어 놓으면 시원하면서 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양주안주로는 최고이다.
삼성그룹에서 이곳의 곶감을 구입하여 도자기 단지에 넣어서 선물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서울의 일부 백화점에 까지 납품되고 있다고 한다. 머지않아 계룡시에 홈플러스가 들어서면 이곳에도 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여기를 나와 다시 가야곡 쪽으로 가면 사육신의 한분인 ‘성삼문의 묘소’도 있으니 참배를 하기를 바란다.

성삼문의 시신은 능지처참되어 사분오열되어 없어진 것을 뜻있는 분이 시신일부를 수습하여 여기에 모셨으니 참배하고 언덕을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육곡리유적지’가 있고 그 아래 ‘가야곡왕주’ 공장이 있다.

술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는데 여기 물맛이 예전부터 좋은 것 같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터를 잡고 살아온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일대가 양질의 흑운모 화강암임을 누가 알랴?

여기서 가야곡사거리에서 운주 쪽으로 방향을 틀어 재를 넘어가기 전에 왕암리가 나오는데 여기가 왕암구들장이 생산된 동네이다. 여기부터는 물어보아야 찾아 갈 수 있고 약간 비포장산길을 올라가야 하니, 가족들과 왔다면  힘들기 때문에 운주에 가서 저수지 구경도 하고 화산붕어찜도 먹으면 하루의 여정이 저물 것이다.

왕암리 산속을 올라가다 보니 여기저기 구들장으로 축대를 쌓아놓고 때로는 구들장으로 쓰려고 바위를 떼어 놓은 흔적이 보이는데 정상 거의 올라가니 광산입구가 파쇄석으로 폐쇄되어 있었다.

지금은 채광을 하지 않고 있는데 나랑 같이 간 나에게는 ‘풋고추에 절이 김치인’ 한상교 선생은 은은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한다. 운모가루 때문에 바위자체가 흰빛으로 아른거리는데 더 들어가 볼 수 없어 여기서 서성거리면서 좋은 기운을 받고 흑운모 몇 점을 수집해서 나왔다.
옛적에는 흑운모 구들장1장에 논1평과 거래가 될 정도였다니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던 같다.

처음에 여기를 찾아갈 때는 건너편에 있었던 석회광산을 착각했었다.
이 광산도 폐광되었는데 거기도 석회 뿐 아니라 흑운모돌이 많이 나오는데 이 채광동굴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에 온몸이 오싹해진다.

한선생은 이곳의 기운이 쭈삣쭈삣하여 강하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정말 작열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괜찮은 장소인지라 본인도 어깨통증 때문에 몇 번 가봤는데 온몸이 시원해지면서 기분이 상큼해지는 것이 나만 가기는 아까운 생각이 거듭 드는 장소이다.
신경통 등 통증이 있으신 분들은 이곳의 기운을 쐬면 상당한 자연치료가 되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런 데에 진정한 목적의 요양시설이 들어서야하는 것 같은데 최근에 다시가보니 웬 암자를 건축하고 있어 야릇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만 있다면 어떠랴.

건강에도 좋은 석재이니 한번 찾아가서 온몸으로 기운을 받고 오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이런 곳에 요양원 시설이 들어선다면 참 좆으련만 당시 경성태창방직의 백낙원, 백낙중 사장을 비롯한  만 그놈에 경제성 때문에 문제이다.

건강! 건강! 웰빙! 웰빙! 하는 시절에 이런 곳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마치 ‘터진 꽈리 보듯 하니’ 물건이나 사람을 아주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고 중히 여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저 우리 쌀, 우리 농산물만 죽어라 찾으나 왜 이 땅에 나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하면서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남이 좋다고 하니 나도 한다는 안이한 생각들이 너무 퍼져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속담에 ‘참깨 들깨 노는데 아주까리 못 놀까’,  ‘참나무에 곁 낫걸이’라는 글이 있다.

별 어 중이 떠 중이들이 다 활동하거나 참여하는 일에 어엿한 내가 어찌 못 끼겠는가 하는 것으로 남이 하니까 나도 하고, 제 능력은 생각하지도 않고 엄청나게 큰 세력에 부질없이 덤비고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이제 계룡산아래에서 만이 이라도 이런 분위기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보통 흑운모가 섞인 화강암지대는 예로부터 인물이 많이 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돌의 좋은 기운이 많이 방사된다고 한다. 여행은 이만하고 무대를 다시 신도 안 왕궁 터로 옮겨보자.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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