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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서 긴 세월을 보냈던 법문(천상녹화 도승선)이 지지닷컴과의 인연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수개월 동안 밤낮으로 원근출판본 탄생을 위해 자전을 뒤적이며 타이핑에 고생하신 공경옥님, 정역과의 연결고리를 궁구하신 안초님께 감사드린다.

이 법문의 소장자는 3명으로 조재련선생(경오생, 작고)과  최병석(의탄)선생(병자생,행불) 두분이 원본을 소장하였으며, 지지닷컴의 원근출판본은 최선생 소장본을 토대로 본인 임재욱(경자생)이 필사한 필사본(신유년, 1981년) 중심으로 초안이 작성되었다.

법문에서 밝히는 미래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천상천하 자연원리
-천상도법 신통원리
-구세선법 인간원리
-도유득법 도덕원리
-삼라만상 계절원리 5가지로 집약된다.

일부 선생의 정역과 본 법문이 밝히는 미래는 유리세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과 신명이 공존하는 대 통합의 세상, 1명이 수십만 수백만의 선남선녀를 먹여 살리는 역 피라밋 세상을 예언하고 있다. 아래는 법문 탄생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병진년(1976년) 봄날 지리산 법계사에서 조선생을 만나다. 신라 이후 고찰의 모습은 없었고 암반위 삼층사리탑과 초막 두채 그리고 조선생과 노보살(손보살,한청화님: 최근 최화수의 智異山이야기 홈을 보고 실명을 암)만이 나를 반긴다. 폐사지에서 만남의 인연은 무오년(78년) 까지 지속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무오년 겨울 자형 조재영(로타리산장 건립의 중추적 역할)의 권유로 본인은 법계사 아래에 있는 로타리의 집(지금의 로타리 산장) 초대 산장지기로 지리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기미년(1979년) 봄날 최선생을 만나다. 흰도포자락에 흰수염과 백발 홍안의 얼굴이 지리산 도사로서 손색이 없었다. 법문이 하달되는 그해 겨울까지 최선생으로 부터 달랑 두장의 종이에 기록한 역학원리를 전수받고 스승으로 모셨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기미년 12월의 법계사는 엄동설한의 연속이었으며 군에서 제대한 강원만(갑오생,고운동천 거주)형을 만난다. 그리고 조선생의 천상법문 기록은 시작된다.

-조선생은 근 보름 동안  매일 술시만 되면  한자인지 그림인지 분간키 어려운 두어자 정도의 한자를 노트에 쓰기를 반복한다. 한글만 겨우 깨우친 조선생은 한자를 몰랐기에 매일 두어시간을 그림만 그린 것이다.

보름간 앙송편 1-1페이지 절반의 절반도 안되는 분량이었다. 갑갑해 하던 조선생이 기러기 한글을 적어면서 말하기를 '법문을 하달하는 분이  안타깝지만 이제 부터는 한글로 내린다'라며 한글로 쓰기 시작하면서 법문의 원본은 한글이 되었지만, 법계사에 머물던 최선생이 한글을 다시 한자로 서책(조선생본 붓글, 최선생본 볼펜글)에 옮긴 이후 안타깝게 한글 노트본은 소실(귀중한 열쇠를 잃어버림)되어 두분 소장 서책을 원본으로 한다.

최초 천상법문은 한문으로 하달되었으나, 받는 이가 한자를 몰랐기에 한글본이 진본으로 될 수 밖에 없지만 소실되었다. 따라서 최선생이 한글본을 보고 한자로 옮긴 서책을 원본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 지지닷컴 원근출판본의 한글은 공경옥님의 타이핑본을 토대로 본인이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며 대부분 복원되었지만,  한자는 역학을 공부하던 최선생이 조선생과 대화하면서 해석이 난해한 한자로 작성한 것이기에, 미래세상을 공부하는 관심있는 분들의 참여로 진의를 가려야 한다.  이제 장을 마련하였으니 감응자 반드시 문을 열리라... 

-본 법문은 기미년(79년) 부터 신유(81년)년 까지 3년간 지속되었으며, 글자의 분량은 약 4~5만여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무학자에게 법문이 하달된  의미를  궁구하면 상학, 중학, 하학의 깊은 뜻을 조금은 바라보지 않을까... 그리고 법문이 하달되는 기간 동안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폐사지에 자금, 목재, 기와, 벽돌 등 불사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수십리 떨어진 중산리에서 등짐 또는 목도로 운반하였고, 산악인등 전국 남녀노소의 땀과 노력, 푼푼이 기부한 시주로 신라고찰이 복원(지금은 조계종 쌍계사 말사)되었다. 불사의 시작에 있어서 조계종의 노력은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법계사에서 시작된 법문은 경신년(80년) 부터 지리산 세석고원, 하봉, 고운동을 직접 답사하며 하달되었다. 이어 태백산, 계룡산, 덕유산, 마이산, 대둔산 등 텐트에 의존한 야영생활로 답사하며 법문을 하달 받았다. 중국과 북한에 소재한 장백, 백두, 묘향산은  그 당시 현장답사가 불가하였고 여건도 허락치 않았다. 특히 에베레스트와 솔로몬 군도 등 동남아 일대의 답사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미래세상을 여는 법문이 세군데에서 하달된다고 조선생께서 이야기 하곤 했었는데, 두곳에 대한 인연의 실마리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계룡산자락 정역이후, 나머지 한곳은?)
지리산 법문은 법계사 불사에 이어 삼제봉 자락에 30여년 동안의 세월을 준비하며 삼만도사를 배출할 터전 가꾸기에 갑오생분이 전력질주하고 있다.  이 분은 법문하달시 명에 의해 법계사에서 세석으로 이동 세석산장지기를 하다가 지리산 남부능선을 따라 고운동천에 정착했다. 인간이 만든 금환락지는 구례 운조루를 칭하지만, 본 법문에서 밝히는 금환낙지는 이곳이 아닐까 본인은 생각한다.[ 비록 양수발전소 상부댐 건설로 많은 것이 파괴되었지만 산중호수의 탄생과 더불어 별유천지 원판이 바뀐것은 아닐 것이다.이곳에서 밤하늘 북두칠성을 바라보면 가락지안에서 하늘과 맞닫음을 느낄 수 있다.]

-법문이 하달되는 초기에는 매일 술시만 되면 노트에 글쓰기와 그 글에 대한 최선생과의 대화가 주 였는데, 경신년(80년) 초겨울 부터는 술시에 글을 마치고 해시에는 대중(병자, 경자, 노보살, 기타 등등) 앞에 춤추며 노래로 글풀이를 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때 참석했던 몇몇 대중의 이름이 법문 하달편에 등장한다.  

어느날 본인에게도 2시간 동안 조선생의 춤과 노래가 할애되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법문을 전달해야 하는 童子의 역할 강조와 앞으로는 산속에서 도인을 찾지말고 대중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내용등이다. 새벽 법계사 동쪽 산마루에 두개의 둥근 태양을 목격한 것도 이 즈음이다. 본인의 대학생활은 학교가 아닌 지리산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부억 쪽방 촛불속에서 씨름하던 최선생의 낭낭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이 무렵으로 기억한다. 붓글본 앙송편이 완성되고 낭송이 시작되었다. 이치를 궁구하며 신명의 감응의 연이 없음을 늘 한탄하던 최선생은 만독으로 끝장을 볼 결심이었던 것 같다.

-신유년(81년)  대학3년 1학기는 학교에서 여름방학은 로타리 산장에서 산장지기를 마무리하다. 그해 법계사 대웅전과 산신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1000년의 세월이 복원된 것이다. 주춧돌 기단위에 나무를 깎아 그대로 올렸으니 세칸 맞배 지붕이다. 두 선생의 권유로 겨울방학은 대웅전 다락방에서 임술년(82년) 봄이 오는 길목까지 3개월을 보낸다. 최선생본 법문을 서책 두권에 필사하는 밤낮 없는 작업이었다. 옥편을 뒤적이며 최선생본 달필을 따라 그리는 작업과 낭송의 연속은 아마 미친놈의 몸부림으로 보였을 것이다. 공선생께서 원근출판 작업에 얼마나 전력투구 했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임술년(82년) 초여름 무거운 베낭을 등짐지고 법계사를 찾다. 불사가 마무리 된 법계사엔 조선생과 노보살 나머지 분들은 모르는 분들이다. 법문의 인연들은 인연따라 대부분 법계사를 떠난 자리다. 물 한잔을 마시고 조선생과 이별을 고한다. 나의 마음의 스승이었고 사형지간이었다. 천왕봉에 오를 때 까지 아마 조선생은 본인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마음으로 느낀다.[ 그날 이후 조선생과는 거림에서(91년도) 한번 뵙고 몇해 후 무덤앞에 인사드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장터목을 지나 세석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워 지고 촛대봉 아래서 만독에 열중하는 최선생과 순두류 박보살(추후 별도 소개)을 만난다. 그 다음날 최선생은 세석을 떠나 고운동천에 잠깐 머물다 가야산 끝자락에 터전을 잡는다. [최선생과의 만남(94년)도 그 터전에서 단 한번의 만남 이후 지금도 행방이 모연할 뿐이다.]  

다음날 영신봉 자락에 텐트를 치다. 만독은 못미쳐도 천독은 마무리 하겠다는 일염으로 필사본 법문을 낭송한다. 귀신과의 조우를 희망하며 두어달을 불철주야 매진했다.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멋지고 오만방자한 시간이었다. 인간이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맑은 영혼과 체력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 아마 수십리 정도의 기(氣)를 느겼던 것 같다. 신과의 조우는 실패? 하고 폭풍전야의 새벽 인시에 영신봉으로 부터 본인의 정수리 까지 쏟아지는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빛의 소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일주일간 폭풍우에 우뢰가 쏟아지는 세석고원의 험상한 날씨에 텐트를 팽겨치고 몸만 세석산장에 위탁한다. 세석고원 병풍바위에서 6월과 8월사이가 마무리 되었다. 60kg가 넘는 물기가 가득한 베낭을  메고 거림까지 하산하는 길은 폭풍우에 페이고 끊긴 산길의 연속이었다.

-임술년 초겨울  반천계곡을 따라 고운동천을 찾다. 7년간의 지리산 인연과 학창시절을 갈무리 하는 장소로 이곳을 택했다. 갑오생 원만형과 박보살(작고, 순두류 박보살이 아님)께서 겨울을 보낼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지난 여름에 못다한 승부를 이곳에서 결판낼 요량으로 텐트를 치고 낭송에 열중했지만,
일주일만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내리를 스치는 것은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동안 베낭속을 가득체운 짐들을 태워버려야 겠다는 상념에 정말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필사본 법문도 불길까지 갔다가 유일하게 살아 남아 원근출판의 모체가 되었다.

-계해년(83년)이 밝았고 본인은  고운동천을 떠나 전국을 떠돌다 3월 군입대로 지리산과 이별을 고한다. 임술년 여름을 마지막으로 천왕봉을 오른 이후 지금까지 지리산 주변만 멤돌았다. 지지닷컴과의 인연으로 지난 30여년의 세월을 뒤돌아 보며 법문이 탄생된 배경의 큰 줄기를 잡아 보았다. 동자의 역할인 심부름 꾼으로서 소임을 다한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가볍다. 세부적인 내용들은 틈틈이 기억을 더듬어 글로서 올리고자 한다. 픽션같은 이 글은 본인이 직접 눈으로 귀로 몸으로 겪은 체험담임을 다시 한번 밝히며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2007. 8.31.
두류산인 임재욱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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