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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24 조선의 재해


조선의 재해

 옛부터 재해는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전쟁, 도략(盜掠), 방화(放火)와 같은 인위적 재해를 제외한 풍재(風災), 수재(水災), 한재(旱災), 황재(蝗災), 화재(火災) 등 자연적 재해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 그 밖에도 질역(疾疫)은 인위적 재해라고는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자연적 재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와 같은 농업사회에 있어서는 자연적 재해는 흉황(凶荒)과 기근으로 연결되는 것이 하나의 방정식처럼 되어 왔다.
이아(爾雅)에 '곡물이 익지 않는 것을 기(飢), 소채(蔬菜)가 익지 않는 것을 근(饉)'이라고 하였다. 또 곡량전(穀梁傳)에 '한가지 곡식이 익지 않는 것을 겸(
), 두 가지 곡식이 익지 않는 것을 기(飢), 세 가지 곡식이 익지 않는 것을 근(饉), 네 가지 곡식이 익지 않는 것을 강(康, 허(許)의 뜻), 다섯 가지 곡식이 익지 않는 것을 대침(大侵)'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근(氣根)은 곡식이 익지 않는 것, 즉 흉황(凶荒)을 말하며 이것은 주로 자연적 재해에 연유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에 있어서 자연적 재해의 양상은 한재, 수재가 그 대표급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한재 때에는 거의 예외 없이 황재(蝗災)가 뒤따랐다. 그 밖에 풍재(風災), 진재(震災), 상재(霜災), 박재(雹災) 등을 손꼽을 수 있는데, 이 재해들은 앞의 한 · 수재에 비하면 그 피해가 크지 않았다. 여기에 조선시대의 제반 자연적 재해의 발생 횟수와 기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조선총독부 「朝鮮の災害」 조사자료 제24집 참조 )

          「旱蝗 104회 정종 원년(1399)∼고종 25년(1888)
            洪水 89회 태종 원년(1401)∼고종 29년(1892)
            暴風 20회 태종 12년(1412)∼영조 15년(1739)
            地震 87회(强震 44회) 태종 13년(1413)∼광무 2년(1898)
            霜害 22회 태조 7년(1398)∼영조 30년(1754)
            雹害 18회 태종 7년(1407)∼고종 11년(1874)」

위의 재해상황은 각종 사료에 의한 것으로 실제의 사실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참고가 되리라고 믿는다. 이같은 재해의 발생이 연속적인가 또는 간헐적인가 그리고 지역적인가 혹은 전국적인가에 따라 그 피해상황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피해상황의 사실로서 세종 6년(1424)의 전국 기민수(飢民數)를 살펴보기로 하겠다.(세종실록 권24 세종 6년 5월무자(戊子) )

            「慶尙道(3月朔) 安東 등 40官 飢民 1,853명
              忠淸道(3月朔) 淸州 등 50官 飢民 3,103명
              咸吉道(3月朔) 安邊 등 8官 飢民 399명
              平安道(4月朔) 平壤 등 33官 飢民 1,086명
              江原道(3月朔) 江陵 등 23官 飢民 2,212명
              黃海道(4月朔) 黃州 등 24官 飢民 589명
              開城留後司(4月朔) 飢民 576명」

위에 보인 전국 6개 도와 1개 유후사(留後司)의 기민(飢民) 총계는 9,818명이었다. 이것은 전국 8개 도 중에서 경기도와 전라도가 빠진 것이지만, 대체로 그 재해가 전국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민의 보고일자가 3월삭으로 되어 있는 곳이 4개 도였는데, 맥곡(麥穀, 夏穀)이 익는 4월말경까지는 기민이 계속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그 숫자가 더욱 증가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같이 지방 각지에서 흉황으로 말미암아 기근이 닥쳐오면, 허기진 기민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전국 각지를 방황하게 되었으며, 그 중의 일부는 한성부로 모여 들었다. 그런데 한성부로 모여 드는 기민은 대개 경기도를 비롯한 가까운 도에 재해가 발생했을 때에 더 많았다. 그러나 기근이 든 때에는 한성부민 자체도 식량을 구입할 수가 없어 기아자(飢餓者)가 생기는 까닭에 지방 기류민(飢流民)의 도성 집중은 한성부를 비롯한 행정 당국자의 큰 골치꺼리였다. 여기서 다시 세종 27년(1445) 정월에 한성부에서 밝힌 각 진제장(賑濟場)별로 수용하고 있던 기민수를 참고로 들어 보면,

           「普濟院 飢民 67인
             東活人院 飢民 90인
             洪(弘)濟院 飢民 70인
             西活人院 飢民 48인

이었다.(세종실록 권107 세종 27년 정월 갑진(甲辰))
이같은 자연적 재해가 연속적이고 또 전국적으로 발생할 때 기근문제는 무엇보다도 긴급하고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는 이 중요문제의 해결책으로 곡물을 비축하는 한편 기병자(飢病者)의 진제(賑濟) · 구료(救療)를 위한 대책 수립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역대로 내려오면서 우리나라의 재정계획은 3년간 지급할 수 있을 만한 곡물을 비축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일로 알아 왔다. 그것은 국가가 3년간 지급할 곡물을 창고에 저장하고 있다면 어떠한 재해나 전쟁이 일어나도 대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년간 쓸 수 있는 곡식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9년간 농사를 잘 지어 아껴 먹고 남는 것을 착실히 저장해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곡물 저장의 창제(倉制)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속되는 흉황이나 내우(內憂) · 외환(外患) 같은 사정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3년간의 지급곡물을 비축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서울특별시-서울육백년사로부터 발췌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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