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충청 산하를 지키자-계룡의 산(계룡·향적산등)

기사입력 2008-06-03 23:12


계룡산과 향적산, 천마산 등이 감싸고 있는 계룡시는 말 그대로 상록 도시이다.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고 유구한 세월을 동고동락한 역사의 산증인 인 계룡의 산. 이들 산에 대해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은 개발은 가급적 자제하고 인간과 자연이 상생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 개발이 상록 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계룡시에 우선시 되고 있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 꿈틀대는 계룡의 산을 자연 그대로 보존하고 잘 가꿔 후손에 물려주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일 것이다.

▲계룡산 (천황봉)

계룡산의 주봉이자 배달민족의 영봉인 천황봉은 해발 845.1m로 국운을 굽어 살피고 있는 듯한 자세로 산의 경관이 수려,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대표하는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정상에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 하늘에 제를 올리는 산제단(山祭壇)이 있고 이 곳에 서면 신선이 노니는 듯한 계룡산의 전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는 계룡산이 그다지 높지 않아 운무(雲霧)가 별로 없고 주변의 산들이 상대적으로 낮아 시야를 별로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계룡시 어디에서 보아도 선뜻 이마에 닿을 듯이 솟아 있는 천황봉은 계절따라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 변화무쌍함은 대자연의 신비 자체로 웅장한 산봉우리 위에 찬란한 해가 솟아 오르면 보는 이의 가슴에 용기와 희망을 주기에 충분해 계룡시는 매년 이 곳에서 새해 첫 날 해맞이 행사를 열고 있다.

천황봉은 자태가 백성을 품안에 안고 있는 제왕의 모습이라 하여 상제봉(上帝峰)이라고도 했으며, 상봉(上峰) 혹은 제자봉(帝字峰) 이라 불리기도 했다. 제자봉은 부남리와 석계리 뒤편에 있는 산봉우리를 지칭하는데 이 봉우리를 경계로 암용추와 숫용추가 좌청룡, 우백호의 전설을 품고 있기도 하다.

또 대궐터의 주봉이기도 했던 제자봉은 신도안 신흥종교가 번성했을 당시 교주들과 신도들이 가장 신성히 여겨 수시로 찾아 간바 있으며 무속 ,민속종교 등의 교인들과 등산객들의 기도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현재는 이 곳 일대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출입에 제한이 있으며 예전에 이곳을 즐겨 찾던 산악인들은 지금까지 그 향수(鄕愁)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한편 천황봉 정상에는 1948년에 설치한 철탑이 우뚝 솟아 미관을 저해하고 있다. 이 철탑의 제거와 함께 일상적인 등산로의 개방은 우리가 머지않아 풀어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

▲향적산 (국사봉)

계룡산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등산코스로 유명한 국사봉은 종교연구가에게 있어 제2의 신도안이자 한국 최고의 무속촌이었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할 때 친히 올라가 국사를 논했다하여 국사봉이라 유래된 이 곳은 두마면 향한리와 도곡리 일대의 산으로 계룡산맥의 남쪽 능선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이다.

해발 574m로 일명 향적산(香積山)이라고도 불리는 국사봉은 향기로운 땀이 쌓여 있는 산이자 공부와 도를 깨우치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또 국사봉에는 일부(一夫) 김항 선생이 정역(正易) 공부를 하였다는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있고 맨재소류지 위쪽으로는 국제선원 무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국사봉을 오르면 멀리 동쪽으로 대전시가 한눈에 들어오며, 가까이 눈 아래로는 계룡대와 계룡시가지가 훤히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는 연천봉 능선이, 북쪽으로는 천황봉과 머리봉이 지척이며, 남쪽으로는 연산면으로 뻗어나간 국사봉 능선이 용의 허리와 흡사한 모습으로 굽이쳐 있다.

한편 국사봉 정상에는 오(五), 화(火), 취(娶), 일(一) 등 네 글자가 음각된 오행비와 함께 천지창운비라는 비석이 있는데 이 비의 크기는 2m정도로 동서남북 각 면에 천계황지(天鷄黃地), 불(佛), 남두육성(南斗六星), 북두칠성(北斗七星)이란 글씨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이는 한반도가 1000년 이상 동방예의지국으로 유지되도록 하는 단군성조의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국사봉의 맨재골 최상단에는 약수와 같은 샘물이 난다하여 약수암이 있고 이는 논산, 연산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계룡지역에는 지역민들이 쉽게 찾고 있는 천마산이 금암동을 아우르며 친근하게 다가서고 있다. 천마산 정상에는 천마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수려한 천마산을 쉽게 볼 수 있고 동쪽으로는 계룡시 금암 신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며 서남쪽으로는 백제 계백장군의 충혼이 어린 황산벌이 멀리 보인다.

천마산 서편 기슭으로 왕건이 하늘의 도움으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개태사가 자리하고 있는 등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처럼 어느 한 곳 민족 역사와 숨결이 배어있지 않은 곳이 없는게 계룡의 산이다. 계룡의 산을 제대로 보존하고 소중히 가꿔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계룡=이영민 기자>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댓글을 달아 주세요



무학 대사는 천일기도를 전국의 산을 돌면서 하게 되는데 지금 남해에 있는 보리암에 이성계의 기도처인 태조기단이 있다. 이성계는 기도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보광산을 금산이라 개명했다.

다시 차길진선생의 말을 들어보자.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올리며 매달린 절대자 셋은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그리고 단군, 이렇게 3대다. 이성계 영가(靈駕)는 “그렇지만 단군 할아버지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반목한 것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하면서 조선 태조 기단(祈壇) 위쪽의 삼불암(三佛巖)을 보기로 들었다.

바위 셋 중 하나는 누워 있고, 둘은 서 있다.
이 바위 셋의 모습이 꼭 앉아 있는 부처 같다.
이성계 영가가 100일 기도를 하기 전까지 바위 셋은 죄다 누워 있었다.
기도를 마치자 바위 둘이 일어나 앉았다.
나머지 하나는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셋이 다 일어났다면 이성계는 조선의 국왕을 넘어설 수 있었다.
중국까지 손아귀에 쥔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단군과 석가가 각자 평가, 추후 맞춰 보고 공감한 이성계의 그릇 크기는 그러나 조선까지였다.”
<2006년3월6일자 주간조선>

그리고 여러 산에 기도를 거쳐 마이산에서 천신으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게 되는데 이곳 마이산에 있는 은수사에는 팔각정이 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으면 마이산과 돌탑만 보고 지나치게 되는데 이곳 팔각정에는 단군화상이 있고 태조 이성계가 도검을 하사받는 그림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고 그 증표로 씨앗을 심었는데 그것이 싹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청실돌배나무가 은수사 절 안에서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계와 무학은 계룡산에서도 많은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 삼신당. 이 곳은 아쉽게도 군부대내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보기가 어렵다.  
 
바로 기도를 드린 장소가 ‘제석사(帝釋寺)’와 ‘삼신당(三神堂’)이 있는 장소이다.
아쉽게도 이곳 제석사와 삼신당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군부대내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 보기가 어렵다.

6·20사업으로 신도 안 계룡대에 있는 모든 종교단체들이 철거되었음에도 이곳 2곳만 건재하고 있으니 무엇이 이들을 지켜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곳 특히 삼신당이 20년간 독립운동을 지원한 애국운동의 살아있는 장소라는 것을 안다면 자연히 숙연해 질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방문해보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암용추를 지나 200여  미터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신당은 큰 나무들이 많은 것을 보면 경치가 무척 빼어난 곳이다.

   
 
  ▲ 암용추의 아름다운 모습  
 
삼신을 모신 천단(天壇)인 대전각(大殿閣)이 있고 뒤에는 그리 깊지는 않지만 천연 동굴이 있는 데 이곳은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려 할 때 이 동굴에 와서 얼마간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한다.
삼신당을 전각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뜻인 것 같다.
이 골짜기를 임금 우자에 자취 적자를 써서 우적골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도장 시설로 적 벽돌 양옥 이층의 태상전(太上殿) 대강당이 있다.
관리자가 바꾸었는지 문에 굳게 시건장치를 해놓았는데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이곳을 본 분의 말씀으로는 전각에는 태극 문양이 아름다웠고, 천정에는 중앙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무지개 색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고 이것은 삼태극(三太極)으로, 그것은 한국이 중앙이 되어 세계를 향해서 뻗어나간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마 이곳에는 누군가에 의해 무속이 행해지는 것 같은데 진정 뜻이 있는 자라면 이 삼신당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곳에 있는 커다란 넙적한 돌인 만복암(萬福岩)은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한자리로 알려져 있었기에 유명하기도 하다. 그리고 바위동굴은 무학 대사가 기도 한 곳이라 한다.
 
삼신당은 1983년에 이곳을 내주고 장태산 휴양림 근처에 이곳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여 이주하고 있는데 한번 찾아가 보니 아담한 모습을 잘 재현해 놓았다.
삼신당(三神堂)현판은 정원강 선생이 직접 쓰신 것이라고 하는데 당 안에 모셔진 것이 특이 했다.
지금은 박영숙 여사가 이곳을 지키고 계시는데 80순이 넘으신 분이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삼신당의 유래를 설명하시는데 말씀하시는 것이 또렷하면서도 소리의 굴곡이 없으신 것을 보니 많은 지혜를 받은 분 같았다.

삼신당 법칙은 천지인 (天地人)삼신인데 천(天)은 하늘이요. 지(地)는 땅이요. 인(人)은 사람이라 천지인 삼라만사 만물이 생(生)하고 사(死)하고 하는데 세상만물 중에 사람이 최고 귀하니, 첫째 내 영을 닦아 불심을 길러야 하고, 둘째 삼강오륜을 지켜 유를 길러야 하고, 셋째 연구조화선법을 길러야 하나니 그래서 유불선삼교니라. 어쨌든 3가지 중 하나만 빼놓으면 코끼리 하나놓고 세 사람이 더듬어 보고 다투는 격이라고 한다.

박영숙 여사가 오래전에 구술예언을 한 것이 있는데 참 흥미롭다.
“송도 3백년 운은 씨를 뿌리는 격으로 사람들이 어둔하고, 삼각산 한양 오백년은 싹을 가꾸는 격으로 사람들이 삼강오륜을 숭상하고 예를 바로 잡아 지킨다. 계룡산 8백년 도읍에는 이미 다 배울 대로 다 배워서 머리가 비상하고 깨칠  대로 깨쳐서 사람들이 미련한 사람이 없으며 밝고 맑아지며 가을열매를 거두는 시기라. 가야산 천년도읍에는 편안하게 사는 시절로 밥도 안 해 먹고 약만 먹으면서 사는 시대로 겨울에 저장하는 시기이라.

삼백년 도읍시절에는 40살이 종명(終命: 인간수명)이고, 그러므로 10세나 12세에 결혼을 함이 적절하고, 삼각산 오백년 시절에는 60살이 종명으로 15세나 18세에 결혼함이 적절하고, 계룡산 8백년 시절에는 80살이 종명으로 30세나 32세 또는 33세에 결혼함이 적절하며, 가야산 도읍에는 100살이 종명이니35세나 40세에 혼례를 갖출 것이다.

앞으로는 앉아서 천리, 서서 만리를 볼 것이다. 또 빨래를 안 하고 꼬매지도 않는다.
두드리지도 않고 밥하는 사람은 밥만 하고 떡 하는 사람은 떡 만 하고 바느질하는 사람은 바느질만 할 것이고 양반 상하가 다 없어지고, 어른 아이를 몰라보고 남녀가 구별이 없고 부자지간에도 재판하고 형제지간에도 재판한다.“

 
한 40분 그늘 아래에서 어른의 말씀이신지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강연을 들고 안내를 받아 삼신당 안을 보게 되었다.

그 흔한 조각성물도 없었고 탱화도 없었다.
마치 초현대식 화랑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는데, 울긋불긋 알 수 없는 색깔로 그려진 문양이 천정에서부터 벽면까지 그려져 있었다. 우리민족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삼신(三神)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장소이다.

천정에는 천단(天壇)을 상징하는 삼태극(三太極)의 팔괘문양을 그려놓았다.
오른쪽부터 하늘을 상징하는 천(天: 元天上帝), 가운데는 인간을 상징하는 인(人: 人皇)을 그리고 맨 왼쪽으로 땅을 상징하는 지(地: 元始地皇)의 단을 모시고 있다.
그 흔한 사람모습이 아니라 알록달록하게 그려진 영국 국기 같은 모습이다. 한마디로 환상적인 그림이다.

천지인을 상징하는 문향이 특이해서 몇 번이고 쳐다보았는데 안정감을 주면서 신비감과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우리의 삼신사상을 재구성하고  여기에 사용되는 문향을 잘 재현해서 여러 군데 쓸 수 만 있다면 정말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룡산에 있는 삼신당을 종교를 떠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패러다임으로 이용할 수는 없는지 뜻있는 분들의 마음자세가 아쉽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향을 알고 쓰더라도 선조들의 뜻이 무엇인지 그 가르침을 정확히 알고 써야 하는 법이거늘 우리나라는 태극기 하나도 잘못 만들어져 쓰고 있으니 상징하는 그것을 잘못 그려서 얼마나 혼란이 오는지 알기나 하는가?

깊이 들어가면 머릿속이 흔들거리니 간단히 말해서 북쪽은 추운 물의 기운으로 검정색으로 남쪽은 따뜻한 불의 기운으로 빨강색으로 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환란이 계속되고 시끄러운데 왜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이가 그리 많은지...

사소하다고 보여 지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국운과 직결되는 것임을 누가 알겠는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고치지 않는 우리의 자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강한 근성도 안보이고 외국에만 빌붙어 사는 무리들만 양산해내고 있으니 여기서는 크게 한숨을 내쉬자. 어~휴~
  
계룡산 삼신당은 원래 평북태생의 백옥성(白玉星) 이라는 분이 묘향산에서 신도 안으로 이주해오면서 정도령이 오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고 믿고 공부를 하던 중 이곳에 수도 하러온 정원강(鄭元剛)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사위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정원강은 “노송의 껍질은 따서 가루를 만들어 붓치고 일주일 만에 떼어보라“라는 습종의 특효약을 교시 받아 이병을 앓고 있던 이선달 등 애국지사와 독립군에게 전해줘 신통력과 도술을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이 정씨를 따르자 계룡산 삼신당과 한양 삼각산에 독립기도를 드릴 수 있는 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부자들 몇 명이 자금을 내어 초하루 보름으로 구국기도를 올렸는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쌀을 가마니로 떡을 하고 풍성한 재물을 차려 놓고 기도를 올린 뒤에 시국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종교단체 같았지만 그 내막은 나라를 되찾고자 염원하는 이들의 밀집이었던 것이다.
뜻이 있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모여들어 다 모여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당시 경성태창방직의 백낙원, 백낙중 사장을 비롯한 많은 지사들의 협력이 있게 되었고 이층 양옥집을 지었다. 산꼭대기에 빨간 벽돌을 날라다 훌륭한 이층 벽돌집을 지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후 삼신당은 조선팔도 도사들이 만나 독립운동을 하는 거처로 변모했다고 한다.
매월초하루 보름날 한양삼각산에서는 저녁 술시(戌時)에, 계룡산에서는 밤 자시(子時)에 어김없이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운수기도가 지성으로 시행되었다.

3·1운동의 실패로 조성된 신도 안 이주 열풍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넘쳐나게 되었다.
일제의 멸망을 기원하며 1921년에는 계룡산 신도 안에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말까지 퍼지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일본으로의 침공을 외치기까지 하는 위험한 수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곳을 일제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는가?

이곳에서의 민족주의 성향의 독립운동의 열기는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위험지역으로 낙인찍히게 되고 신종교단체를 탄압해 나가게 되는데 치졸하게도 사기, 폭력, 금품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어 마음대로 탄압하게 된다.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을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 안은 그 불꽃이 타오르는 심지가 되었으니 민족의 성지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믿기지 않는 것은 신도 안에는 외국인이나 그 기운은 맥을 못 쓴다고 한다.
“계룡산 장군봉 밑에서 통신대대장인 미군소령인데, 새벽에 호랑이가 물어 메쳐서 죽었거든. 양갈보, 미군 죽은 거 보고 옷도 안 입고 내려왔어, 날이 밝아서. 그 이튿날 뜯어서 상봉에 옮겼거든 (그게 언젭니까?) 을축년(1949년) 해방 후 바로. 신도 안에 왜놈이 못 들어갔어. 주재소 안 죽으면 불나고 자꾸 죽어. 주재소 옮겼어. 되놈도 재미 못 봐. 되놈이 장터 점령하고 음식점 했는데 세 놈 죽으니 되놈 안 들어와. 왕도의 왕기(王氣) 시작도 안한 덴, 뭐이든 처음은 무서운 힘이거든, 외국기운은 맥을 못 써요“(김일훈저 신의원초 중에서)
 
광복 직후인 1948년, 미군은 계룡산 주봉인 천왕봉에 군용 통신 탑을 세우려 했다. 건축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 병사가 속출했다.
미군을 물리고 우리나라 군인이 공사를 전담한 다음에야 탑이 완공될 수 있었다.
이후 통신시설 관리를 명분삼아 슬그머니 계룡산으로 돌아 온 미군은 원인불명의 통신장애가 잇따르자 한국군에게 모든 것을 넘긴 채 완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주간조선 2005년11월12일자)

그렇지만 “계룡산 산신 찾는 소리에 귀가 시끄러워 벌레 같은 중생들 징그러워 모두 내 쫒을 난다. ” 라고 예언되어 6·20사업으로 한사람도 없이 사방 십리 밖으로 모두 내쫓겼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역사의 미완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곳이 우리의 독립운동의 역사적 증거이며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의 회복이라는 터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방치되고 있으니 애석할 뿐이다.

나라를 위하는 유적들이 함부로 방치되고 후손들에게 그분들의 정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누가 일하려 하겠는가?
더욱 이곳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시대에 부끄러울 뿐이다.

정원강 선생이 사상범으로, 독립운동혐의로 붙잡혀 경북성주경찰로 넘어가 고문 끝에 돌아가신 후, 그 며느리인 박영숙씨가 정원강 선생을 독립투사로 인정해주고 삼신당을 독립운동의 산실로 육성해달라고 외쳤건만 아직도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독립지사들의 기도장소로 그 숭고한 얼이 담긴 유물이 방치되어 손상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으니 역사 앞에 또 다른 죄를 짓는다는 의식이 깊이 든다.

삼일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선조들이 애국과 동지애로 만주에서 관동군 총칼에 피 흘리고 죽어 가고 이곳에 계룡산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지사들의 그 고혼(孤魂)이 오늘까지 위로받을 곳이 없다는 것은 너무 허망하다.

이곳을 길이 보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행이 이곳을 계룡시에서 사적지로 정한 것 같은데 다행스러운 일이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태조가 권중화(權仲和)에게 수도 자리(安胎地)를 구한바 권중화는 현재의 금산군 진산면을 천거하고 별도로 계룡산 도읍 도를 헌상하게 된다.

   
 
  ▲ 신도내 주초석 뒤로 보이는 낮은 산이 장구산이다.  
 
태조는 개성에서 수 백리를 달려와 비행장 옆 해군본부사령실 부근에 있는 장구 산 중봉에 올라 너른 뜰을 살펴본다. 이 봉우리가 계룡산의 여의주로 이태조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위치시키려했던 구릉으로 인경 봉으로도 불리는데 신도안의 중심 한복판에 있는 장구 산 중봉이다.

5일간 이곳을 답사한 후 크게 만족하여 1393년 3월 드디어 새 수도 건설의 대단원의 막이 오르게 된다.
이 너른 뜰, 신도로 구획된 안쪽이 지금의 용동리, 부남리, 석계리, 정장리로 신도안(新都內)이라 호칭한다.

전설에 의하면 계룡산에 제자봉(帝字峰)이 있고, 그 아래를 예로부터 제도(帝都)라고 불렀는데, 신라 말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와서 보고는 중국에 황제가 있거늘 이 소국에 제도가 있을 수 있느냐? 이를 마땅히 삭제하여야 한다 하므로 부득이 제자의 위아래 양쪽 획을 빼고 신(辛)자만을 남겨 신도(辛都)라 일컬어 왔다.

조선개국 초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번영의 기세를 올리고자 시경의 근기명(斤其明)의 근(斤)자를 따다 신(辛)자에 붙여 신도(新都)라 불렀다고 한다.

신도 안 이 명칭에 대하여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다.
신도 안, 부르기는 신도 안으로 불리어지고 한문으로는 신도 내(新都內)로 쓴다.
이러한 지명은 일면 이 일대를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는 ‘신도의 안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도 안을 표기 할 때 신도 내(新都內)라고 한다.

그렇다면 안팎(內外)이 있다는 개념인데 여기 안(內)에 대하여 그 밖(外)에 위치 한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두마(豆磨)이다.
두마는 팥을 많이 가는 곳이라 하여 지금도 팥거리 축제가 행해지고 있다.

   
 
  ▲ 팥거리 축제 모습  
 
이것이 과연 옳게 사용되는 지명일까?

두마(豆磨)를 표기대로 뜻으로 해석한다면 팥갈이가 되지만 이곳에는 팥 밭이 많지 않고 팥이 다량으로 생산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지명은 팥과는 무관한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 안(內)에 대하여 그 밖(外)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안팎(內外)의 개념에서 팎거리란 지명이 생성되게 된 것이고 팎거리라 부르는 고유 지명을 한자로 옮겨서 차자 표기한 것이 두마(豆磨)이다.
훈몽자회 등에 팥두(豆), 갈마(磨)로 기록되어 있으니 옛날에는 두(豆)의 훈음이 팥이며 마(磨)의 훈음이 갈이다.

따라서 ‘신도안의 밖 거리’란 뜻으로 팎거리를 훈음차 표기한 한자 지명이 두마(豆磨)일 뿐이다.
두마는 신도안의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신도 안 밖의 거리를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팥이라는 곡식은 원래 사악한 잡신이 범접하지 못하는데 쓰이는 재료이다.
그래서 팥죽이 만들어 진 것이고 새로 이사 가는 집의 벽면에 팥죽을 뿌리는 벽사관습이 전래되어 왔다.
그리고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동지에는 팥죽을 먹어 사악한 귀신의 접근을 막는 척사신앙이 강한 곡식이다.

그러면 그전에 신도안 형성에 주축이 된 분들은 누구인가?

구한말 외세의 간섭과 각종 민란 그리고 갑오농민운동으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난리를 피하고 새 세상에서 벼슬도 할수 있다는 희망으로 신도안으로 이주현상이 본격화되고 이주민 중에는 수백 년 동안 차별을 받아온 서북출신들이 많았는바 ‘정감록’이 처음 출현한 곳도 서북지역이다.
 
신도 안에 정신적인 뿌리를 둔 동학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분오열하는 과정에 탈 정치노선을 주장한 시천교가 탄생하게 된다.
내부에서 친일파와 절연한 상제교의 동학의 3대교주인 김연국(金演局)이 황해도와 평안도의 신도 3천명을 이끌고 1924. 2. 13.계룡산에 이주해오면서 신도안형성이 시작되게 된다.

이 당시 신도 안 인구가 7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도 안에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찼고, 주변마을로 이주민이 몰려들게 된다.
 
이들이 내건 탈정치화는 계룡산에 이주하는 모든 종교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이로부터 계룡산과 신도안의 혁명적 상징성이 사라지게 된다.
천황봉에는 이들이 설치한 천단(天壇)과 산제단(山祭壇)비석이 잘 보존되고 있다.

한때 이곳이 인기가 있는 참배지로 일부 군인들에게 회자된 일화가 있다.

육군본부참모차장 출신인 신모중장이 이곳에 기도한 후 사성장군인 대장에 진급하였기 때문에 일명 ‘장군바위’로 통하는데 장군진급을 앞둔 고참대령 중 상당수가 이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장군으로 진급하려면 천황봉산제단에 먼저 인사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고 한다.
 
어쨌거나 태조는 옛 귀족이 건재 하는 개성이 싫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싶어 했던 것이다.
무척이나 신도 안에서 새로운 나라를 열기를 고대했고, 1년여 기간 동안 실제로 신도 안을 수도로 선포하여 왕궁과 도시공사를 하게 되었다.
 
여기를 떠나면서도 그 아쉬움이 남아 터를 누르는 작업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아쉬운 터전을 버리게 된 실제 이유는 무엇일까?

신도안천도가 무산된 것은 계룡산신의 반대라는 천명에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 이유 일 수 있지만 당시의 기득권세력의 반대에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에서 보이는 근거가 아닐까?

정도전과 하륜은 당시의 권문세가의 대표 수장들이다.
‘쇠고집 닭고집’ 같이 당시에 기득권을 움켜지고 있는 세도가들이 적극 천도를 반대했으니 집권초기 지지 세력이 약한 태조 이성계는 이것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고 보여 진다.

신도 안 천도를 결행하다 보니 개경에서 신도 안까지 이주해오는 관료들의 주거 문제도 큰 문제였을 것이다. 대대로 살아오던 개경 집을 몇 푼의 돈을 받고 떠나왔으니 억울하다는 것이  이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솔개 어물전 들 듯’ 개경에 애착을 가진 관료들이 그 곳을 선뜻 떠나지 못하는 심정이었으니 그냥 두면 불만이 폭발할 것이라 예견한 태조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 진다.

어찌 최근에 행정수도 천도와 그리 비슷한지, 서울사람들의 반대에 결국 신도 안 일대를 최적지로 지목하면서도 어정쩡하게 공주 장기일대로 후퇴해서 그것도 어찌 될 것인지? 

당시의 정도전과 하륜 등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도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고 하면서 천도를 반대 했다.

이런 주장을 보면, 당시의 학자들의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새 왕조의 옹립에 집착했고 멸망했지만 어엿한 개성일대에 막강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세도가들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가까운 한양을 나두고 뱃길도 없는 먼 남쪽에 있는 신도 안까지 오려고 했을까

당연이 ‘못 간다.’ 이 말이 나왔을 것이다.
하물며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할 때도 토지로 인하여 많은 문제가 노출되었으니 이주해오는 관료들의 주거 문제였다고 한다.

윤사영의 상소문에는 당시 관리들의 주거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데,

“군자감승 박희종이 세자의 힘을 빌려 부당하게 집터를 분양받고자 했으니 파직하소서. 세자의 좌정 자는 세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박희종이 세자의 좌정자로 있을 때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세자를 이용하려 들었고 아래로는 사풍을 더럽혔으니 법대로 죄를 물으소서.”

이렇듯이 이주 시 관리들의 주거문제로 시끌했으니 오늘날에도 똑같지 않은가, 예나 저나 권력과 부를 가진 집단의 반대 움직임에는 어찌할 수 없는 것 같다.
결국 풍수도 아닌 것을 가지고 풍수 핑계만 되는 모습이 지금에 봐도 한심하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신도안천도가 그것이 조선 초에만 있는 주장이던가, 조선 내내 신도  안에 대한 천도주장들이 많았으니 조선말에 흥선대원군이 도참서와 정감록에 계룡산은 정씨도읍지라는 전해오는 말을 듣고,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해서 정감록을 압수해 불태우고 이 지역의 출입을 금지하게 된다.
 
정감록은 이성계와 정몽주의 실제 조상이 아닌 상상속의 조상인 이심, 이연 형제와 정감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돼 있는 대담집으로, 실제로 정씨와 이씨가 문답한 것으로 ‘정이문답(鄭李問答)’이라 하는 것이 맞을 듯도 한데 이런 명칭은 매우 드문 경우이고 정감이 더 호감이 가는 측면이 있어 그랬는지, 대개는 ‘정감의 기록’이란 뜻에서 ‘정감록’이라 불렀다.

정도령이란 칭호는 정감록에는 안 보이는데 민중들이 암암리에 진인의 출현을 기대하는 분위기속에서 이씨조선에 반대하거나 제거된 정몽주, 정도전, 정여립, 정희량 등 조선왕조에 반대하는 선봉이었으므로 새 나라는 반드시 정씨가 왕이 돼야 한다는 것이 민중의 주장이었고 그 진인이 정씨라는 예언이 조선후반기에 등장한 것 같다.

신도 안에 이런 전설도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신도 안은 우리나라 명산으로 손꼽히는 계룡산 아래 있는데, 옛날부터 이곳에 정씨가 도읍을 정하고 800년 권세를 누린다는 말이 끊임없이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그런데  칼날 같은 바위가 서있는 계룡산 갑사 쪽과 풍경이 좋은 동학사 쪽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신도 안 쪽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그때 마침  호탕하고 활 잘 쏘는 사냥꾼이 이곳을 지나다가, 조용히 살고 싶어 신도 안에 머물러 사냥을 하며 살았다.

그는 짐승을 잡아먹고 가죽은 웅진에 가서 팔아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갔는데 그날따라 노루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이 언덕 저 고개를 누비다가 노루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 뒤를 쫓는데, 노루는 그를 놀리듯 조금 도망치다 뒤돌아보고 화살을 당기려고 하면 다시 도망치곤 했다.

기어코 노루를 잡아야겠다는 결심으로, 계속 뒤를 따라 산비탈을 내려 들을 달리고 다시 언덕에 올랐다.
노루는 풀을 뜯어먹으며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화가 난 그는 마구잡이로 화살을 당겨 노루를 향해 날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노루는 틀림없이 달아나버렸는데 이상하게도 크게 울부짖는 말울음소리가 언덕 양편에서 들려왔다. 호탕한 그도 무서운 생각이 들어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자리에 눕자 곧 꿈을 꾸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고 먹구름이 쌓이더니 그 먹구름 사이로 백발노인이 노기를 띤 모습으로 나타나  "그래 너의 성이 정씨가 아니더냐."  정씨가 말을 쏘아 죽이다니. 그것도 두필의 말이나? 너는 큰 죄를 지었으니 내일 밤 안으로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이다“하고는 먹구름에 싸여 사라졌다.
생각할수록 괴이하게 여긴 그는 산신령의 노여움을 샀으니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이튿날 살던 집을 불태우고 멀리 떠나버렸다.

그 후로 이곳 신도 안에는 각처에서 사람이 몰려와 살게 되고, 부지중 주민들의 입에서는 “이곳 신도 안은 정씨가 맨 먼저 살면서 터를 닦았으니 정씨가 주인이다. 그러니 정씨 가문에서 왕이 나와 도읍을 정 한다”라는 말이 퍼졌다.

그러나 정씨가 이미 말을 쏘아 죽였으니 왕이 될 수 없다는 이설(異說)도 있다.
생각건대 이 전설이 원인이 되어 지금도 계룡산 신도 안에 정도령이 나와 도읍을 정하고 권세를 누린다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화살에 맞아 죽은 말의 울부짖음과 함께 신도 안 도읍이 물 건너 가 버렸는지, 아니면 왕 씨의 개성, 이 씨의 한양, 그 뒤를 이어 과연 정 씨의 계룡이 될는지 미지수다.    
(김석진저 ‘스승의길 주역의길 중에서)


이렇듯이 신도 안은 민중들입에서 오르내렸으니 조정대신들 사이에서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으니 19세기 말 권좌에 오른 대원군은 계룡산으로 천도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고 그는 천도를 통해서라도 이미 달아난 민심을 조선왕조에 매어두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은밀히 그 전설을 꺾고자 계룡산 하록에 도읍을 옮기려고 터를 닦는데 여기저기서 석추가 나와 ‘이곳은 정씨의 천년지택이니 이곳을 범하는  는 큰 화를 면지 못하리라’라는 유언비어에도 계속공사를 추진하다가 결국 재정난으로 공사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말이라는 것이 묘해서 한시대가 끝마치려면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니 쌀 이름도 백제 때는 백미, 신라 때에는 나(羅)락, 고려 때는 왕미(王米), 이조는 이(李)쌀, 입쌀이고, 계룡산 정씨가 도읍하면 정미, 지금은 정미소라고 하는데 이것이 끝나면 가야산 조 씨의 좁쌀이라고 하는데.....

최근에 와서 박정희대통령을 거쳐 노무현대통령시대에 다시 민족의 웅비를 깨울 수 있는 터라고 여기고 준비해 왔다. 그러함에도 지금도 그렇듯 없어진 단지 일국의 왕의 터만 매달리고 집착하는 기득권세력과 이에 동조하는 언론이 많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내 것이 손해를 본다는 생각에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속성이니 어찌하겠는가?

‘뭇 사람들의 의심은 괴변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하였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변화도 하지 못하면서 꽃과 열매를 같이 취하려 하면서 어물 쩡 된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시대에 또 다른 후회를 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무엇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일인지,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는 민족은 결코 발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와중에도 신도 안 인근에 다시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 건설이 7월20일 첫 삽을 뜨고 2030년까지 24년간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수도권의 반대, 위헌 판결 등 수많은 난항을 겪은 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로 5년 여 만에 실현되는 것이다. 2005년 제정된 행정도시 특별법에 따라 추진돼 온 행정도시는 오는 2030년까지 세계 초일류 인프라를 갖춘 명품도시로 건설된다.

특히 행정도시에 2010년 하반기 중 첫 마을 입주가 시작된 후 중앙인사위원회를 포함한 대통령 직속기관 4개, 국무조정실 등 국무총리 직속기관 12개, 재정경제부, 교육인적자원부, 건설교통부, 산업자원부 등 중앙행정기관 33개 등 총 49개 기관과 1만 여 명에 달하는 소속 공무원들까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순차적으로 이전하면서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행정중심복합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비록 기득권세력의 반발로 많은 축소가 되었지만 새로운 천도계획을 담은 엄청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부디 조선시대에 ‘1년 수도’의 미완성의 행정도시가 되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조선태조 이성계(왼쪽)와 무학대사  
 
이제 이성계의 집안을 추적해보자.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1250년 원나라 몽골군에 투항하여 그 대가로 두만강유역의 현재 연길일대에 5천호 정도의 다루가치가 되어 옷치긴가(家) 고려계 몽골의 군벌가문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닦게 된다.

옷치긴가 고려계 몽골군의 임무중 하나는 조국 고려침공을 도우며 압록강과 원산을 오가면서 원나라를 위해 수도 개경의 고려왕조를 감시하는 극악한 배역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원나라가 고려군을 감축하라는 압박 하에, 고려가 거의 국방력을 상실하게 된 다음에도 이성계 가문은 강군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세계제국의 정치적 현지경영법을 체득하고 원이나 명의 중앙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상대적인 독립성을 확보하여 가문의 지배적인 위상을 높이게 된다.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춘은 보안테무르, 큰아버지에게는 타스부카, 아버지 이자춘에게는 울루스부카라는 몽골이름이 있다. 이로 미루어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하기 전 34년 전에 태어난 이성계에게도 몽골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동북아 정세에 밝았고 명과의 전투, 티무르와의 전투 등 일련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고 그래서 위화도 회군도 결행할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원의 멸망 후 우리나라에는 조선이 중국에는 명나라가 서게 되었다.
당시 몽골제국은 고려를 인정했고 고려왕조와 함께 힘을 합쳐 몽골 칸 제국을 세웠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몽주가 단심가를 불러 목숨을 걸고 이성계 일당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원종이후 고려왕조의 역사적 정통성이었으니 결국 원에 충성하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밖에 없겠다.      
<주채혁저 순록치기가 본 조선·고구려·몽골 중에서>

그러면 무학 대사는 그 당시 어디에 있었을까?
 
역시 세계의 중심지가 원나라 시대에는 연경이었으니 무학 대사도 예외 일 수 없었으리라.
원나라 수도인 연경 이곳에 26세의 기백 있는 수도승과 20세의 용기 있는 청년들이 있었으나 이들이 만나게 된 경위는 구체적으로는 없다.

단지 무학의 스승을 통해서 인 것 같은데 역사적 기록과 전래되는 이야기 속에서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무학은 1353년 공민왕 때에 원나라 연도로 간다.
무학 대사도 유명한 스승을 만나게 되니 그 분들이 지공과 나옹이다.
지공스님은 인도분으로 인도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가섭존자의 108대 후계자로 소위 정통 중의 정통 스님이며 가섭불의 법통을 이은 분이시다.

중국 원나라 시절을 보내시다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오셔서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천보산 자리가 마치 스님이 머리를 깎았던 인도 나라난타 절 주변의
산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제자 나옹스님에게 이야기하여 이 절에서 주석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회암사이다.

나옹스님은 연경에 도착하여 절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화상을 만나 크게 깨달을 배우게 되고,
무학 대사는 인도 승 지공을 만나 도를 인정받고 이듬해는 법천사(法泉寺)에서 고려인 출신의 나옹을 만나 수도 하다가 1356년 나옹을 하직하고 귀국하였으며, 나옹 역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렀다.

1376 년(우왕 2)회암사(輦輹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은 그를 불러 수좌로 삼고자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그해 나옹이 입적하자 전국의 명산을 유람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여주에 가면 신륵사가 있다.
이곳의  조사당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그의 스승 무학 대사와, 인도스님인 지공대사, 그리고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선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있다.
조사당 안에는 세님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고, 앞마당에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다.
이를 보면 훌륭한 스승과 스승 아래에 훌륭한 제자가 나오는 법이니,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위인은 없는 것 같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와 관련된 인연이 느껴지는 일화가 있다.

당시 원나라에는 있던 나옹대사가 무학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한 산소 자리를 가리키며 “그 위 터는 왕휘지 지이고, 아래쪽은 장상이 날 자리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마침 이성계의 집 청지기가 그 곳을 지나다가 그 말을 듣게 되어 이성계에게 전하자 이성계는 나옹대사를 찾아가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나 나옹대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때 나옹에게서 수학을 하던 무학이 스승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그곳에 쓰고 세월이 지나 왕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로 미루어 이성계집안과 나옹대사간에는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스승이 말하지 않은 것을 굳이 이성계에게 말하여 주었다는 것은 이미 깊은 인연 관계가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일화이다.

그리고 무학 대사와 이성계가 고려 땅에서 만나는 일화도 있으니, 서산대사가 쓰신 ‘설봉산 석왕사기’나오는 글이다.

고려 우왕 10년(1384)에 무학 대사가 함경도 설봉산 석왕사 토굴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 무관으로 있던 이성계는 이상한 꿈을 꾸고 꿈이 하도 신기해 설봉산에 해몽하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없고 딸이 있는데 이 딸이 이성계의 꿈을 100냥에 사면서 당신 꿈은 “개꿈이다”라면서 침을 세 번 뱉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딸이 이성계 꿈 산 것을 알고서 딸을 때리고 이마에 침을 밷으 면서 돈을 돌려주고 꿈을 물렀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성계를 보더니 “난 해몽 못하겠소, 다른데 찾아가시오.
이안에 들어가면 설봉산 밑에, 삼방 석왕사 위에 석굴이 있는데 8만대장경만 외우는 중이 있으니 덮어놓고 살려달라고 절만하시오. “

그분이 무학 대사인데, 그래서 이성계가 찾아가 밖에서 절만하고 있는데 거들  떠 보지도 않는다? 이성계가 “정 이렇게 냉대하면 목을 치겠노라“하니까 무학 대사가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 해몽하러 왔다니까 ”해몽은 이 앞에 해몽하는 할머니가 따로 있잖소?“ 이성계가 그 할머니에게 갔더니 자기는 못하겠다고 이리가라고 합디다, 해서 왔다고 하니, 무학 대사가 “그러면 꿈 이야기나 해보시오”

그래서 꿈 이야기를 하는데 ,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석가래 만 3개 달랑 지고 나왔소.
나오는데 닭 새끼들이 꼬기오. 하고 울고, 또 사방에서 꽃이 송이송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소. “ 라고 하자.
무학은 “석가래 3개지고 나온 건 임금 왕(王)자요, 닭이 고귀(高貴)오 하고 울었으니 왕이 되는 건 틀림없소.
꽃 떨어지는 것은 낙화이종내어실(落花而終乃於實)이라 그러니 고려는 이제 망했소. 고려는 다 쓰러져가는 집이오. 인제 내려가시오“하고는 황해도 신기 곡산 고달산에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김일훈저 신의원초 중에서>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된 뒤 경기ㆍ황해ㆍ평안 감사를 시켜 무학 대사를 찾도록 한다.
새 왕조가 창건되면서 유명 무명의 유생과 승려들이 찾아왔지만 무학 대사는 종무소식이었다.
그래서 3도 감사에게 화상을 그려 돌리면서 무학 대사의 행방을 찾도록 한 것이다.
3년째 되던 해 곡산 고달산의 초막에 은거하고 있던 대사를 간신히 찾았다.

황해감사가 평안감사하고 의논해서 모시고 가자는데 말을 안 들어 이성계가 직접 와서 모시고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태조와 대면하게 되고 왕사(王師)가 되었다.
1392년(태조1)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 者)'라는 호를 내렸다. 엄청나게 길다.

이정도 면 태조가 무학을 배려하는 것도 보통이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 태조가 그러나 1402년(태종2) 다시 함경도로 가 돌아오지 않았을 함흥차사(咸興差使)시절에 무학 대사가 가서야 겨우 서울로 오게 할 정도로 우정이 깊은 사이였던  것이다.
결국에는 이방원을 임금으로 인정하고 무학 대사와 함께 불교에 정진하며 1408년에 세상을 떠난다.

무학이 금강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태종은 그의 사리를 회암사로 모시도록 지시를 했다.
회암사에는 태조가 무학을 위해 세워둔 부도가 있었다.

살면서 변하지 않은 이러한 진정한 우정으로 두 사람은 새 시대를 열었고, 그러한 점에서 이들의 우정은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실력을 갖춘 무학과 무인으로서의 태조는 두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마주 앉은 ‘은행나무 격이라’ 조선을 세울만한 큰 그릇이었던 것이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20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덕희 2008.05.22 2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성계 그는 우정도 충성심 대단한 인물이다
    그에 충성심은 명나라을 도와 오늘날 중국이 저거대한 대국이 되였다 그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안고 명나라을 쳐서 큰공을 세우고 정권도 잡았으면 누가 이성계을 민족에 반역자라 하겠는가
    이성계 그는 조선에 왕으로서 붊근도포을 입지 몿했다
    그는 명나라왕에게 충성심이 대단했다
    우리는 이런 민족에 국운을 꺽은 민족반역자을 대왕이라하고 용에다 비유하고 좋은 말은 다같다 그에게 치장했다
    왜그는 명나라을 쳐들어가지몿하고 구테타을 했을까
    작은나라가 큰나라을 치는건 예의에 벗어나는일이라는 어느선생의 답변이 참맘에 든다
    이순신이 적은 배와 적은 군사로 36번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리고 고려 고구려 많은장수들은 적보다 훨씬 적은 병사들로 수십배나 많은 적을 상대해서 그들을 물리쳤다
    이런 장수들은 영웅에 들지몿하고 용도 몿되고 이적행위을한 이성계을 우리은 영웅이라고 하고 용에다 비유하고 있다
    저 고구려에 광개토대왕님은 지렁이고 이성계는 용이야

  2. 사람 2009.04.09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성계랑 무학대사 관계를 잘 모르겟네요 ㅠ.ㅠ



우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연 이성계와 무학 대사의 향기로움이 배인 곳

   
 
  ▲ 계룡산 천왕봉  
 
계룡산(鷄龍山)!
우리가 늘 부르고 보아왔건만 845m의 이 산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금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의 명산! 풍수지리상의 최고 명당!
많은 미사여구를 받고 있지만 계룡산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아직도 살아있는 많은 전설을 그저 가슴으로 품고만 있다.

계룡산은 삼한시대에는 천태산(天台山)으로 불리다가 백제 때 계산(鷄山),  계람산(鷄藍山), 옹산(壅山), 구룡산(九龍山), 용산(龍山), 화채산(火彩山)이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고려 때 목화가 들어오기 전에 옷감으로 많이 쓰였던 삼(麻)이 이산에 많았다는 기록이 있고 껍질을 벗긴 삼대를 겨릅'이라 하기 때문에 겨릅 산이라 했다.

이 겨릅 산이란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 한자로 음역되면서 계립(鷄立)으로 되고 또 '립'이 비슷한 소리로 뜻이 좋은 용(龍)으로까지 발전해서 계룡산이 되었다고 보는 분도 있다.

이성계가 조선조를 창건할 무렵 무학 대사가 계룡산의 지형을 금계 포란형(金鷄抱卵形), 비룡 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해서 두 풍수적 형국에서 계(鷄)와 용(龍) 한자씩을 따 계룡산이라 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의 9백년 운은 서대궐은 무성(無城) 5백년, 동대궐은 유성(有城) 4백년으로 서대궐은 금계포란이고 동대궐은 비룡농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 속에는 금계는 부의 상징, 비룡은 현명한 임금을 의미하는 말이니 이는 조선의 창업자인 이성계와 당대의 사상계를 풍미한 무학 대사와의 만남이 있었음을 알리는 것이니,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밤에 금척(金尺)을 얻는 꿈을 꾸었을 때 송도로 돌아가 빨리 임금이 되라고 위화도회군을 종용한 사람이 바로 무학 대사이다.

어느 따스한 봄날, 태조와 무학 대사가 서로 농담하면서 희롱삼매에 들었을 때 태조가 먼저 말하였다.

"누가 농담을 잘 하는가 내기를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대왕께서 먼저 하십시오"

그래서 태조가 먼저 농담을 걸었다. "내가 자세히 스님을 쳐다보니 꼭 돼지처럼 생겼습니다 그려."
무학 대사 왈, "
제가 보니 대왕께서는 부처님처럼 생기셨습니다."

대사의 대답에 태조는 뜻밖이라는 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같이 농담을 하지 않습니까?"
대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님으로만 보이는 법입니다.”

두 사람은 함께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한다.
 
‘용 가는데 구름 간다.’고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다시 차길진 선생이 쓴 영기로 보는 계룡산 중에서 일부 글을 원용해 본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은 요즘도 계룡산 신도 안에 자주 들른다. 신도 안이란 말 그대로 600여 년 전 이성계가 일찌감치 조선의 수도로 점찍었던 곳이다. 그런데 10개월에 걸쳐 대궐 터까지 닦아놓은 상태에서 조선의 도읍은 갑작스레 한양으로 정해졌다. 무슨 사연이 숨어 있는가?

이성계는 왕이다.
절대 홀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을 초혼하려면 경호원들의 요란한 구둣발 소리를 감수해야 하듯, 태조 영혼의 행차에는 정도전, 하륜, 그리고 무학 대사 등 개국공신들과 국사(國師)가 동행한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는 필자에게 ‘~해라’체를 쓰고, 신하들은 ‘~하오’라고 한다.

“왜 계룡산을 포기하고 500리 나 떨어진 한양으로 가셨습니까.”
좌중을 둘러 본 태조가 털어놓는다.
‘이 사람들(정도전, 하륜)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기에....’
 
“그렇다면 사연봉(四連峰) 태조대왕 동굴은 무엇인가요.”
‘궁을 짓는 동안 기도하던 곳이었지. 그런데 기도하다가 계룡산 할머니를 만났어. 할머니가 반대하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네.’
계룡산 산신은 여성이라는 세인들의 믿음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할머니 신령은 ‘계룡산의 임자는 당신이 아니라 다섯 가지 덕을 갖춘 선인’이라며 이성계에게 공사 중단을 명했다고 했다.
“계룡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날 신인(神人)이 새 나라의 수도로 정해 800년간 쓸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 신인은 바로 언제나 숱한 추측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정도령’이다.

할머니 산신이 이성계를 무작정 내몬 것은 아니었다.
한양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동시에 500년이라는 조선왕조 수명도 예고했다고 한다.

무학 대사도 한 마디 귀띔했다.
‘대왕이 고려를 멸하는 과정에서 피를 너무 많이 불렀다는 점도 할머니는 못마땅해 했다.
그래도 태조와 나는 아직까지 아쉬움이 남아 한양에서 달(月)을 바라보다 흥이 오르면 여기로 온다.’는 요지의 말 이였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런 분이다.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인 23.5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세계의 핵심을 주관하는 여신답다.
하지만 현 시점 계룡산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개발이 할퀴고 있는 상처들로 몸이 몹시 아프다.
아물만하면 또 파고든다.
그래서 할머니가 유성 후암정사와 국립현충원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이성계를 비롯한 최고 권력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야욕을 숨기지 않은 외세를 물리쳐온 계룡산 할머니다.
'할머니는 말하셨지 욕심을 버려라. 웃으면서 사는 인생 자, 계룡산이다.'”
<2005년11월12일자 주간조선>

이런 것을 보면 ‘팔자 도망은 독 안에 들어도 못 한다’다고 하듯이 제가 타고난 운명에 따라야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무학 대사는 이성계를 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해 최선의 일을 다 한 것 같다.
무학 대사는 실제로 천문과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우암 송시열이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이었고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고 한다. 그만큼 후학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분이다.

그렇지만 하지 말아야 했을 일을 했으니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고, 수도를 한양으로 최종 결정하면서 왕인 태조 이성계 가문과 한양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금정(金井)에 다가 돌을 덮어 계룡산의 혈맥을 끊었다.

은색의 바위에 맥을 끊는 기구인 ‘붉은 구슬을 넣어 만든 은색덮개’로 흐르는 물이며 계룡산의 맥인 곳을 덮으므로 천도에 역행하는 비방을 쓰게 된다.
이곳이 계룡산 천왕봉에 있는 압정사(壓鄭寺)라고 한다.

무학 대사는 본인이 저지른 일을 그가 지은 청구비결(靑丘秘訣)에 이렇게 후회하고 있다.
“돌로써 금정을 덮었는데 어찌하여 옳게 보지 못 하는가”

조선시대 유학자인 서거정선생은 이 우물을 뚫으면 계룡산의 돌은 다시 푸른색으로 변해서 어지러운 세상은 금색이 튀어 나오듯 밝아진다고 하였으니, 계룡산의 혈맥을 끊는 지나친 행위를 하였으니 이를 어찌 하겠는가 ?

태조 왕건이 이 일대의 지맥을 누른 후 무학 대사가 큰 혈맥을 끊었으니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쇠말뚝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작은 혈맥의 기운마저 끊었으니 계룡산의 운명도 가련할 뿐이다. 

이런 글을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뜻이 있다면 다시 우물을 여는 것도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상징적인 국운융성의 포퍼먼스로 해 볼만 하지 않은가?
천왕봉에 있었던 철탑만 옮겨간 것으로 그리고 일본인이 저지른 쇠말뚝만 뽑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자연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자연이 건강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도 건강해질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사실 이 지역은 고려가 나라를 세운 후 터를 누르기 위해 각종 부처입상을 세워 기운을 죽여 오다가 조선 이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함에 따라 조선 건국 시부터 작심을 하고 터의 기운을 없애려고 했으며 정여립의 모반 이후부터는 이 지역을 폐허화하다시피 방치하여 오게 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그 도가 더욱 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 일본인들은 계룡산 구석구석의 혈맥만 정확히 골라 쇠말뚝을 박았다.
일제강점기 중 일본의 새 수도 최적 후보지는 역시 계룡산으로 보고 일제는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를 대전으로 옮기면서 부여에 자신들의 신궁을 만들 정도로 계룡산일대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패망하고 말았지 않은가?

   
 
  ▲ 천마산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곳이 한군데 있는데 양정 고개에서 시청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천마사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여기가 예전에는 법성사(法性寺) 라고 불리었는데 이성계와 무학 대사가 만난 곳이라고 한다.
무학 대사가 이곳 산을 천마산(天馬山)으로 명명했다고 하는데 개태사가 있는 뒷산이 천호산인 것을 보면 그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산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 천마사 대웅전  
 

   
 
  ▲ 천마사에 있는 옥석불상  
 

   
 
  ▲ 높이 0.8m의 석가모니상인 옥석불을 설명하고 있는 간판  
 

현재는 천마사로 불리는 데 이곳에 원래 신도 안 봉안사(奉安寺) 대웅전 삼불중 하나인 옥석불 (玉石佛 문화재자료 85호) 이 있다. 1984년대 계룡대 건설로 봉안사 폐쇄 시 이전되어 온 0.8미터 항마촉지인불상이다. 
조선말 조성한 것으로 재료는 석고이나 옥으로 만든 조각 같이 정밀하고  사실적 조성된 불상이다.

그저 멋이 있다.

아마 우리나라 땅에 얽힌 전설을 살펴보면 무학 대사가 등장하지 않는 곳이 드물 것이다.

   
 
  ▲ 농소정의 모습  
 


   
 
  ▲ 조선태조 이성계가 마셨다는 농소정  
 

여기서 다시 농소리로 발길을 돌리면 농소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물이 참 많이 솟아나는 곳이다.
수량도 엄청나게 많고 물맛도 좋고 하니 들려볼만하다.
이 물을 옛적에 태조 이성계가 드셨다고 하는데 그 옆에는 선돌이 하나 누워있다.
여기도 기복신앙이 배인 곳이라 선돌은 남근석같이 보이는데 글쎄, 한번 벌떡 세워놓고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고 한다. 휠씬 멋있을 것 같다.

대외활동이 무척 많은 조효연 사장이 입암리 안쪽 끝에 있는 배재대학교 소유의 임야에 X지샘이라는 물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물맛은 괜찮았지만 글쎄, 좀 다른 것 같다.
아무렴 임금님이 마신 농소정 물맛에 비하면 별로 인 것 같았다.

   
 
  ▲ 남자의 거시기 같이 벌떡 서 있는 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입암리'. 사진 속의 돌이 바로 그것이다.  
 

   
 
  ▲ '왕의 처소가 된다는 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왕대리  
 

입압리(立岩里)에는 남자의 거시기 같이 벌떡 서 있는 돌이 있다고 해서 입압리라고 했다고 하는데 인근에 왕대리(旺垈里)는 왕의 처소가 된다는 터인지라 이곳의 지명도 재미가 있다.  

 
 
 
  ▲ 무학대사의 지팡이가 자라 괴목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괴목정  
 
하여간 무학 대사와 이성계를 찾아다니다 보니 무학 대사가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를 꽂아서 자라 괴목이 되었다는 괴목정 등 신도 안에는 그들에 관한 많은 전설이 널려있었다.

부연하면 여기에는 전주이씨 들이 참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기에 왜 그런 가 했는데 조선 초 이성계의 주변 집안사람들이 ‘횃불이 비치는 장소는 전주이씨 땅’이라고 해서 전부 전주이씨 땅으로 했다고 한다.
이 말은 금천건설을 운영하는 이영구 사장으로 부터 들었다.

사람은 키 큰 덕은 입어도 나무는 키 큰 덕은 못 입는다고, 권력과 재력은 역시 병행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 땅이 잠자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북적되고 있으니 영기가 서린 땅은 값을 올리면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쌀고리의 닭이라’고 생각지도 않게 큰 부자가 되면 그 씀씀이도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법이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는데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이승에서의 짧은 동안의 사귐일지라도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은 죽어서도 저승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니

이성계와 무학의 만남이 조선의 건국에서만 만남이 있었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