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티맨
2010.12.08 22:18:12

우주변화의 원리를 수강하고 있습니다

 

처음 동양철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풍수지리를 공부하다가 인연이 되었습니다

각종 이론을 공부하면서 열심히 외우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론이 나오게된 원리가 궁금해 지드라구요. 넘 궁금해서 사주명리 등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지만 갈증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주변화의 원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도대체 머리말 부터 막혀서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만큼  너무 어려워 여러번 실의에 빠지다가 모 종교방송에서 무료방송을 보면서 겨우겨우 1독을 했지만 모르기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한동석 선생님 말씀따라 좀 넓게 파야되겠다 싶어 음양오행 관련 서적을 탐독하다보니 다소간의 진척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정리가 안되는 거예요. 회의감도 몰려들기 시작했지요 그럴때 유일한 위안은 막고 품는 것이었지요 몰라도 여러번 읽었습니다. 언젠가는 되겠지 하고요 조금씩 용어에 대한 적응은 돼가는데 전체적인 흐름이 꿰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던 중 음양오행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오행의 새로운 이해(은남근 저)'를 보고나서 동양철학을 계속 공부해야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때의 상실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죠.  근 2년간 미친듯이 달려왔는데 음양오행이라는 것이 추연, 동중서, 유흠 등에 의한 정치적 산물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내용을 보고 충격이 컸습니다. 그래도 동양철학에 대한 인연이 그 충격보다는 커서 였던지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본 강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며칠동안 흥분의 나날이었고 그간 잘 버텨 여기까지 이르게 해준 하늘에 감사했습니다

 

음양오행을 체계적으로 배우기는 매우 어려운게 현실인 거 같습니다

시중에 많은 서적이 범람하고 동영상 강좌가 있지만(가격도 만만치 않죠) 내용이 다 달라 혼선이 빚어지지고 그럴수록 더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는 같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번 강좌는 저와 같이 갈증에 허덕이는 초학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갈증도 해소해주고 나아갈 좌표까지 제시하니깐요 강좌수강을 통해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 하나의 용어에 묻혀서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없었는데 선생님의 강의 통해 큰 틀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서 곁가지 까지도 많이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늘 답답해 하는 부분이었는데 그 흐름들이 꿰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책 저책 기웃기웃거렸는데 운기, 주역, 정역분야로 구분하시는 강의를 듣는 순간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 나갈지 방향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덜 헤매고 탄력이 붙을 거 같습니다

 

둘째

그간 음양오행에 대해서 반신반의 하던 부분이 싹 사라지고 음양오행을 우주변화의 진정한 법칙으로 믿고 자신있게 이 공부를 해도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섰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제게 삶의 좌표를 그려주는 크나큰 행복있었습니다

 

셋째

이 수업이 지금 향적산방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아는데 직접 계룡산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수강(그것도 무료로)할 있다는 점입니다.

돈도 안들이고 이 엄청난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죄스런 마음도 듭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해야되겠단 생각도 들고요 그외에도 많지만 너무 길어져 이만 줄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自天祐之 吉无不利 란 경구를 가슴에 새기며 계속 정진토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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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변화의 원리" "중의원리" 의 무중선생님 강의는 동양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

 

연수
2012.02.26 16:23:44

 

처음 동양학에 관심을 두고 어떤 책으로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다. 지인들에게 물어보고 인터넷을 뒤지고 절판된 책을 국립도서관에 가서 복사하여 책으로 만들고 온갖 정성으로 접하고자 했으나 허공에 손짓만 하는것 같아 답답했다.

 

음양오행이 모든 동양학의 근본이겠거니 하고 우선 음양오행의 원리를 알고자 인터넷서점에서 뒤지던중 원리를 설명한 책은 하나도 없고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만 원리를 밝혀놓은 책이라는 설명과 한의대교수도 어려워서 3장 읽고 덮는다고 하여 망설임 끝에 덜컹사서 읽었는데 무슨말인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인지 알수가 없어 1번은 읽었으나 도저히 이해가 안갔다.  마침 우주변화의 원리에 대한 무료강의가 있어 지지닷컴을 접하게 되었고 ,

 

처음 강의부터 엄청난 강의에 정신을 잃고 빠져들어 며칠만에 우주변화의 원리 강의를 마쳤다. 선생님의 혜안으로 원리를 밝히고 그것을 쉽게 풀어 설명해주었기에 초급자인 나도 알아들을수 있었다. 내친김에 선생님의 필작인 "중의원리"를 연달아 강의를 듣고 우주변화의 원리에서 미쳐 설명하지 못한 부분까지 설명이 되어있어 이해가 더 빨랐다. 물론 책을 먼저 읽고 강의를 들었으면 더 깊이있게 알수 있었겠지만 강의를 듣는 기쁜마음에 강의를 듣고 이제 책을 읽어야 겠다. 읽고 또 읽다보면 선생님이 원리를 세우고 밝히고자 하는 깊은 뜻을 조금은 더 알아갈 수 있을것 같다.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된것을 나에겐 엄청난 행운과 복이다. 그렇게 찾아해메던 지난 시간이 이런 행운을 가져다 주었나보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경전, 응용강의도 모두 섭렵하고자 합니다. 그후 오프라인에서 만날수 있다고 하니 한번이라도 전체를 공부한 뒤에 뵐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제는 해메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고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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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handongseok.org/lecture5.htm

黃帝內經講義 (5) 1965년 8월호

第一編 變化原理

第三節 五行의 相生과 相克

    가. 相生

  五行이라는 槪念과 五運이라는 槪念은 서로 다르다. 五行이라고 하면 木火土金水 다섯 種類의 氣가 아무런 變化없이 循環하는 自然的인 狀態를 말하는 것이요 五運이라고 하면 이미 그 純粹性을 잃고 變化하는 狀態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五行이라고 할 때에는 東方에서는 木을 生하고 南方에서는 火를 生하고 中央에서는 土를 生하고 西方에서는 金을 生하고 北方에서는 水를 生한다고 하는 基本的인 法則을 말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木火土金水란 五行法則은 그 性質이 純粹하여 아무런 變化나 鬪爭도 없는 基本的 槪念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은 基本的 槪念은 五行은 原則的으로 相生하거나 或은 相克하는 作用을 하는 五原質 自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五原質이 相生과 相克作用 즉 相扶相助와 豫備對立을 일으키고 있거나 或은 일으킨 다음의 狀態를 五運이라고 하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五行은 여기서 이미 純粹性을 잃은 混濁之象이 된다.

  이와 같은 五行이 純粹性을 잃으면 그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五行이 곧 變化하는 狀態의 五行이니 이것을 五運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五行이란 槪念과 五運이란 槪念은 區別하여야 하는 것이거니와 五運에 대한 說明을 後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五行만을 說明하기로 하겠다.

  그러면 五行 즉 純粹 五原質의 相生原理부터 說明하기로 하겠다. 이 原理는 河圖에 나타난 것이므로 河圖의 象을 그대로 表示하고 五行相生圖와 對照하여 보기로 하겠다.

  河圖


  五行相生圖


  河圖의 象을 보면 東쪽에 있는 三과 八은 五行相生圖의 東方에 있는 甲乙木이니 甲은 三이고 乙은 八이다. 河圖의 南쪽에 二와 七은 相生圖의 丙丁火이니 丙은 七이요 丁은 二다. 河圖中央의 上下便에 各各 五가 있고 正中央에도 五가 있으니 이것은 相生圖의 戊己五十土이다. 河圖의 西方에 四와 九가 있으니 이것은 相生圖의 西方에 있는 庚辛金이다. 庚은 九요 辛은 四다. 河圖의 北方에 一과 六이 있으니, 이것은 相生圖의 北方에 있는 壬癸水다. 壬은 一이요, 癸는 六이다.

  이와 같이 본즉 五行相生도는 河圖를 그냥 옮겨놓은 것에 不過하다(다만 東西南北의 間方에 辰戌丑未를 表示한 것은 이 四個의 土가 五行과 合하여 作用할 때에 變化가 생기므로 記載하여 둔 것이고 여기서 論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爲先 相生圖와 河圖를 對照한 結果 한 개의 疑問이 나타난다. 즉 相生圖를 順序로 볼 때에 壬癸와 甲乙은 一六과 三八의 順序로 되어있는데 왜 丙丁과 庚辛은 七二과 九四의 順序로 되는가? 하는 問題다. 이것은 다만 表面에 나타나 있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問題點이거니와 좀더 깊이 살펴보면 그밖에도 많은 問題點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河洛의 變化를 說明할 때에 說明할 問題들이다.

  却說 相生이란 것은 河圖 그대로의 表示라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떻게 相生하는가? 하는 問題를 硏究하여야 한다. 즉 甲乙三八木은 丙丁二七火를 生하는데 이것은 五行의 一般的 槪念에서 說明한 바와 갈이 가장 힘이 있고 또 통가다리인 木氣가 다시 再分裂하는 過程이니 즉 통가다리인 木이 그것을 基礎로 無數한 再分裂을 함으로써 內容은 衰弱하여지면서 外形은 가장 旺盛하는 過程이 바로 木生火의 過程이니 이것이 解放의 第二契機 인 것이다.

  그 다음 丙丁二七火가 戊己五十土를 어떻게 生하는가? 火란 것은 木이 再分裂 한 것이라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그런데 火는 또다시 分裂하여서 分裂의 極端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分裂을 爲한 分裂이 아니고 分裂에 終止符를 찍기 위한 分裂이다. 이것이 解放의 第三契機가 되는 火의 分裂인즉 그것이 바로 火가 土를 生하는 過程인 것이다. 이와 같은 火의 分裂은 解放의 終點인 同時에 統一의 始點인 土를 現象化하는 中繼點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時點이 바로 無極을 生하여서 矛盾對立을 止揚하고 萬物을 成熟하게 하며 人間은 統覺(神明)이 생기며 靑年은 圓熟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한바 感性과 理性의 二 契機가 融合하는 곳이다. 즉 統一의 第一 契機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戊己土는 庚辛金을 生하나니 金이란 表面을 굳게 하는 性質이다. 다시 말하면 第三分裂인 火의 分裂은 純粹中立인 無極(土)으로 化한즉 그 土(無極)는 中立의 性質로서 外炎灼熱한 바의 第三分裂을 柔懷抱捉하여 놓게되면 그것은 바로 火인지 土인지 혹은 水인지를 분별할 수조차 없는 象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런즉 이러한 象은 火土水의 和合한 象이므로 外堅性을 가진 金으로서는 捕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分裂을 捕捉(綜合)하는 第二의 契機를 生하는 것을 土生金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成立된 金은 水를 生하게 마련이니 즉 金이 水를 生한다는 말은 金氣의 外表堅斂作用이 한걸음 더 나가서 그 內面까지 貞固하게 하는 作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統一의 第三契機가 形成되는 것이니 이것이 易에서 말하는 坎爲水오 탈레스가 말한 물이다. 뿐만 아니라 孔子가 易繫辭에 太極生兩儀라고 한 太極의 母體인 것이다.

  이와 같이 太極이 成立되면 水는 다시 木을 生하게 되는 것이니 즉 貞固한 속에 囚閉되었던 氣는 다시 活動하여 木을 生하게 되나니 이것이 解放의 第一契機가 되는 것이다. 宇宙의 構成要素인 土元質은 이와 같이 統一과 解放作用을 쉴 사이 없이 反復하는 것이니 이 運動을 陰陽運動이라고 하며 또 그 陰陽運動이 다시 五元質인 五行의 承繼作用에 의하여 解放과 統一의 作用인 陰陽作用을 周流不編하는 法則을 五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法則인 五行各個의 槪念을 定함에 있어서 甲乙木 丙丁火 戊己土 庚辛金 壬癸水라는 槪念을 附與하는 것이니 이 槪念은 곧 五氣五行運動의 基本的 原則인 五行의 槪念인 것이오 三八, 二七, 五十, 四九, 一六 등은 다시 木火土金水의 生成原理를 確認하는 數自體의 自然法則인 것이다.

  위에서 五行의 相生을 말했다. 그것을 여기서 要約해보면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의 發展까지는 解放過程의 三契機요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는 統一의 三契機였다. 이와 같이 보면 發展의 過程은 土에서 끝나는데 또한 統一의 過程도 그 土에서 始作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土는 二重性格을 띈 것이 分明하다. 왜 그런가? 하는 疑問은 다음에 六氣를 說明함으로써 分明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基礎的으로 그렇게 記憶만 남겨두기를 바란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兼하여 또 記憶해야 할 것은 언제 어떠한 場所에서든지 五行의 槪念이 木火土金水의 順序로 配列되면 여기는 相生原理를 內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 한가지 注意할 것은 甲乙木 丙丁火 戊己土 庚辛金 壬癸水라는 槪念이 木火土金水에 붙으면 이것은 五行의 基本原理이고 또한 變化하는 五運의 原理가 아니라는 것을 銘心해야하는 것이다.

    나. 五行의 相克

  五行이 지닌바 基本原理의 또 한개의 側面으로서 相克原理가 있다. 相克作用은 相生作用의 反對作用이므로 相生은 木火土金水의 順行法則이었던 것과는 反對로 이것은 金木水火土의 逆行作用을 하는 法則인 것이다. 相生作用이 相扶相助의 基本的 本質이었다면 相克作用은 矛盾對立의 基本的 要素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相生作用은 陽의 作用이요 相克作用은 陰의 作用이다.

  여기서 陰陽二契機의 矛盾과 對立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對立을 위한 矛盾이 아니고 發展과 統一을 위한 矛盾이다. 그러므로 相克의 必要性이 認定되는 것이니 그것을 人道的 立場에서 보면 善을 保護하기 위한 必要惡이기 때문이다.

  却說 이 相克原理는 洛書에서 啓示되는 原理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五行相克圖와 洛書를 그려놓고서 서로 對照하면서 硏究하기로 하겠다.

  洛書


  五行相克圖

  註 ()內의 金火와 四九.二七은 바꿔진 것을 表示한 것

  원에 두개의 그림을 對照하여 보면 爲先 洛書는 河圖와 다른 점으로 河圖의 四九와 二七이 易位된 點이다. 다시 말하면 河圖는 四九가 西에, 二七이 南에 있었는데 洛書는 四九가 南에, 二七이 西에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數가 易位되었다는 말은 數의 本體인 金火가 易位되었다는 말이다.

  이밖에도 洛書와 河圖는 그 象이 다른 점이 많지만 여기서는 다만 金火가 四九 二七이 交易된 點만을 말하겠다. 이와 같이 交易되었다고 말을 하거나 또한 象을 表示하는 것은 勿論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自然의 運行法則이 .그렇게 垂象했기 때문에 人間은 그것은 그냥 文字로서 옮겨 놓은 것 뿐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圖表는 어떠한 根據에 依하여 成立되었는가?

  五行이 相生할 때는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의 順序로 그 生하는 바의 基本的인 原則만을 說明한 것이었다. 그러나 相克法則은 그 生하는 側面, 즉 生하기 위한 必要惡을 說明하는 것이다. 宇宙의 運行하는 象을 詳察하면 火가 南에서 旺盛하기 바로 前인 巳(이것은 六氣說明에서 詳論)에서 이미 金의 收斂運動이 싹트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이 차츰 勢力을 얻어서 西에 이르게 되면 南에서 旺盛하던 火는 金氣에 依하여 完全包圍를 當하게 된다. 그러므로 宇宙의 運行을 다만 相生하는 面에서만 보면 五行은 生成作用의 基本的인 法則에 不過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變化하는 面에서 보면 다시 말하여서 어떻게 生成하느냐? 하는 面에서 보면 이와 같은 金火交易의 必要克에 依하여 生成作用은 實現되는 것이다.

  그런즉 相克原理란 生成作用의 裏面 즉 成하는 바의 本質的 內容을 표시한 것이 바로 相克法則인 것이다.

  그런데 相生作用은 北方水位에서부터 始作하여 左旋運動을 하였는데 相克運動은 相克圖에서 表示한 바와 같이 南方火位(卽 四九金位)에서 始作하여서 오히려 生의 作用을 側面에서 돕고 있는 克인 것이다. 그러므로 相克作用은 金에서 始作하여 右旋運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金木水火土의 順으로서 五行相克 序列을 定하는 것이다.

  天地運行에 있어서 이와 같은 生成作用은 恒常 必要惡인 相克作用을 絶對로 要求하기 때문에 北方水가 水生木을 하려고 하면 南方火는 벌써 金을 克하여서 金克木의 準備態勢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相生作用 즉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를 始作하면 相克作用은 同時에 金克木 木剋土 土克水 水克火 火克金의 反對作用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相克이라고 하거니와 이와 같은 相克은 宇宙의 變化와 人間의 生成에 있어서 不可無의 必要克이며 必要惡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헤에겔이 말한 辨證的 發展過程이기도 한 것이다.

  註 헤에겔은 이와 같은 過程의 飛躍까지만을 보고 그의 統一法則을 發見하지 못하였다.

  世界가 實現하는 矛盾과 對立은 이와 같은 五行運動의 生克過程에서 일어나는 必要惡이므로 이와 같은 矛盾과 對立이 바로 世界이며 그것이 또한 世界의 生命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矛盾과 對立이 없는 世界란 形成될 수도 없고 또한 形成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變化도 찾아볼 수 없는 無意味한 暗黑界일 것이다.

  註 以上 論한 바를 初步者로서는 完全히 理解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宇宙發展에 있어서 相生과 相克의 絶對 必要性을 記憶함과 아울러 金火交易이 萬物生成의 裏面的 內容이 된다는 것을 銘心하기만 하면 된다. 다만 아직 이 程度의 進度에서 좀 지나치게 깊은 곳을 말한 감도 不無하다. 그러나 한번 이 程度의 아웃트라인 이라도 스쳐 지나가는 것이 金火交易 土化作用 寅申相火 等의 깊은 곳을 硏究할 때에 理解를 促進시킬 수 있으리라고 生覺되기 때문에 蛇足을 添加한 것이다.

 

 

  그렇다면 五行의 變化인 五運에 대해서 硏究하기로 하겠다.

第四節 五運과 變化

  運이란 槪念이 運動 運行 等에 對한 基本槪念이다. 運字를 만들 때에 軍字와  字를 合하여 만든 것은 軍이 가는 것(走)을 象徵한 것이다. 軍隊란 盲進만을 目的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前進할 때는 前進하고 後退할 때는 後退하는 것을 軍이라고 하는 것이다. 軍隊에서는 이것을 作戰이라고 한다. 軍이란 것은 이와 같은 作戰에 依하여 戰勢에 變化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한 意味에서 運字가 軍字와  字를 合하여 取象한 것은 運이란 것은 軍의 行進이 戰鬪에 變化를 나타내는 것처럼 運의 律動도 또한 一種의 戰鬪的 變化를 나타내면서 나가는 것이며 同時에 軍隊의 行進처럼 一進一退하면서 前進하는 宇宙變化의 律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運이라고 하거니와 여기에다가 五字를 合하여 五運이라고 하는 것은 宇宙運行의 基本法則인 五行이 變化하는 象을 五運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五行이라고 하면 五行 自體의 基本的인 法則을 意味하는 것이오 五運이라고 하면 五行이 變化를 實現하는 宇宙現象의 象을 意味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吾人이 五運을 硏究하려면 그의 名稱과 槪念부터 硏究하여야 하고 또한 宇宙는 運行하는 象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數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自然數의 生成關係를 硏究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五運이 變化現象과 물의 生化成形하는 것을 硏究할 수 있는 것이다.

    가 五運의 名稱과 方位의 否定

    A. 名稱

  五行이라는 五氣의 基本法則과 五運이라는 그가 運行하는 象인 律動이 서로 다른 한 그 의 名稱이 다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甲己를 土運이라고 하고 乙庚을 金運이라고 하고 丙辛을 水運이라고 하고 丁壬을 木運이라고 하고 戊癸를 火運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圖表에 依하여 說明하면 다음과 같다.

  五運圖









  위의 그림에서 보면 運은 土運에서부터 運行하기 始作하는 것이니 왜 이것이 土運에서부터 始作하는가? 하는 것부터 硏究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五行의 相生作用은 木(木火土金水)에서부터 始作하였고 相克作用은 金(金木水火土)에서부터 始作하였는데 五運은 왜 土에서부터 始作하였느냐? 하는 것부터 硏究하여야 한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五運이란 것은 變化現象의 象이다. 그런데 五行가운데서 오직 中立不偏하는 象을 나타내는 곳은 土位인 것이다. 水火金木은 各各 偏僻된 性質을 가지고 있지만 土만은 無이며 中이며 空인바의 象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象을 나타내는 五運이 土에서 出發하여야 할 것은 明若觀火한 것이다.

  그러므로 土는 甲에서 己에 이르는 變化過程에서 생겨나므로 甲己化土라고 하면 그 다음으로 乙에서 庚에 이르는 사이에서 金이 생겨나므로 乙庚化金이라고 하며 그 다음은 丙에서辛에 이르는 사이에서 水가 생겨나므로 丙辛化水라고 하며 그 다음은 丁에서 壬에 이르는 사이에서 木이 생겨나므로 丁壬化木이라고 하며 그 다음은 戊에서 癸에 이르는 사이에서 火가 생겨나므로 戊癸化火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五運의 名稱(槪念)을 甲己土 乙庚金 丙辛水 丁壬木 戊癸火로 規定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五運이 化하는 面에서 본 名稱인 것이다. 그러므로 各人이 萬一 五運이 變化하는 面을 規定한다고 하면 應當 己甲土 庚乙金 辛丙水 壬丁木 癸戊火가 成立될 수 있다는 것도 머리에 넣고 生覺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五行에서 變化하여서 五運이되는 根據를 論據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五運의 變化에서 說明하겠다.

  다만 여기에서 記憶하여야 할 것은 五行과 五運은 本質的으로는 그 槪念이 同一하다. 그러나 五行은 基本적인 法則이고 五運은 變化하는 現象이므로 本體와 作用의 面에서 名稱을 分離한 것이다.

    B. 方位의 否定

  五行에 있어서는 甲乙木 丙丁火와 같은 方位의 規定이 嚴格하였다. 그러나 五運에서는 方位를 定할 必要도 없고 또한 定하여 낼 수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五行은 五原質의 基本法則이었지만 五運은 運動하는 變化의 現象이므로 方位를 定할 수 없는 것이다. 現象은 언제나 流動的이므로 方位와 같은 固定性이 介在될 수 없다. 同一한 原質의 五行의 個性이 옮겨지는 空間과 時間에 依하여 各其相殊한 變化를 造成하는 것뿐이므로 運에서는 時空間的인 象을 다루는 데만 目的이 있는 것이고 方位나 場所와 같은 固定的인 面 - 다시 말해서 方位의 固定性은 變化를 拒否하는 것이므로 - 은 벌써 五運의 對象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五行의 基本인 方位가 없이는 五運의 流動인 象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數

  數를 硏究하려면 먼저 數의 槪念과 成立을 生覺하여야 하고 그 다음에 數의 變化를 硏究해야 한다.

    A. 數의 槪念

  數에도 亦是 哲學的 哲念과 言語學的 槪念의 두 가지가 있다. 言語學的인 面에서 考察하여 보면 數라는 것은 事物의 質量을 計算하는 手段에 不過할 것이다. 그러나 哲學的인 面에서 살펴보면 數는 事物의 幾微이며 有가 無에 이르는 過程이며 單이 多로 化하는 象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宇宙間에 存在하는 事物의 變化하는 象을 詳察하여보면 形(物質)이 分化하고 象(無)이 綜合하는 有無分合의 法則的 循環이 繼繼承承하는 물(水)의 波濤와 泡沫인 것이다. 그러므로 列子는 人物의 律動하는 變化를 물 속에서 出沒하는 潛水夫의 妙技로 보았고 伏羲는 그 물을 一(全體)이 六으로 分化하고 六이 一로 綜合하는 象을 河圖에서 發見하였고 文王은 그 물이 다시 分裂되어서 泡沫이 되고 그 泡沫(無)이 綜合의 契機로 飛躍하는 金火交易의 幾微를 洛書에서보았고 一夫는 이와 같은 先聖의 達觀에 依하여 正易을 著述하였고 또한 그것이 이루어지는 中心點(無極)을 指稱하여 十十一一之空이라고 함으로써 비로소 律動하는 물의 神秘는 開發되고야 말았다.

  却說 數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물(水)의 分化하는 形象을 象徵하는 물 自體의 表現인 것이니 그것이 바로 變化의 烙印이며 妙萬物의 母體인 것이다. 字典을 稽考하여보면 數字의 意味를 幾, 計, 細密 等으로 表示하였으니 幾라는 것은 幾微만 있어서 實在를 把握할 수 없는 것이다. 計라는 것은 一이 十으로 分裂되는 過程에서 생기는 事物의 發展과 그 綜合을 말하는 것이고 細密이란 것은 물이 泡沫이 되어서 물로서의 形을 喪失하고 다시 化合하기 始作하는 飛躍의 象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字典의 內容을 稽考하여 보면 數라는것은 上記한 바와 같이 古代의 先聖들이 立法한 河洛의 變化인 分化하는 물 自體의 表現 方式인 것이 分明한 것이다.

  宇宙란 것은 變化하는 時空間이다. 時空間이란 것은 變化하는 幾微의 一點 卽 十字의 交叉點인 것이다. 時의 延長과 空의 收藏은 반드시 이 間(十字의 交叉點)을 얻음으로써 飛躍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變化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意味에서 筆者는 緖論에서 「피묻은 十字架」 라는 表現을 빌려 쓴 일이 있거니와 이러한 時空間的 變化인 形象의 發展을 그 自體의 모습대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數라고 生覺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數는 變化하는 現象을 記錄하는 表示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이 變化自體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여기서 宋學이 「有氣則 有度 有度則 有數」라고 한 深奧한 底意를 엿볼 수 있으니 이것을 좀더 풀어서 말하면 宇宙라는 變化하는 大氣圈은 언제나 五行氣로서 充滿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모든 것이 動靜하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動靜하는 것은 氣가 있기 때문이요 氣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度가 있고 度가 있는 곳에 數가 따르는 法이다. 그것이 바로 推進力과 引退力인 陰陽의 運動力이다. 그러므로 地球와 日月의 秩序整然한 運行도 이와 같은 氣度數의 現象으로서 나타나는 것이오 曆命數와 物象數의 現象도 實로 여기 緣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數의 槪念을 一層 더 좁혀서 말한다면 數란 自然法則 自體의 運動現象의 表現인 것이다.

    B. 數의 成立

  自然數의 數列은 一, 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의 順序로 配列하여 成立되었다. 그런데 이 列을 자세히 살펴보면 奇數와 偶數가 서로 交代하면서 規則的으로 配列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奇數+偶數=數列」이라는 公式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問題되는 것은 이러한 數의 成立이 人爲的이냐? 或은 自然的이냐? 하는 것이 問題된다. 一般的으로 이 問題를 人爲的인 것으로 生覺하는 傾向이 많다. 그렇다면 自然數라는 槪念부터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萬一 數의 成立을 人爲的이라고 한다면 自然數란 槪念은 반드시 自然所産인 事物을 計量하는 것이 모든 自然數라고 한다고 하여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槪念學上으로 보아서 잘 首肯되지 않는다. 自然數란 말은 數 自體가 自然의 法則 그대로의 表象이기 때문에 自然數라고 한다고 하여야 槪念的으로 妥當하게 느껴진다. 萬一 數의 成立을 人爲的으로 된 것이라고 한다면 옛적에 數를 만들 때에 가령 數列을 一, 三, 四, 七, 九 等으로 粗雜하게 配定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오랜 동안의 歷史的 習慣에 依하여 事物을 그렇게 計量했을 것이다. 그것은 勿論 計數上으로는 無妨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一 다음에 三이라고 計數하더라도 그것이 習慣化 되기만 하면 一 다음은 二라고 認識하는 것을 一 다음은 三이라고 習慣으로 認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人爲的인 數를 使用한다면 哲學의 發展은 있을 수 없다. 특히 東洋哲學은 基本을 數에다 두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數라는 것은 動靜하는 事物의 現象 自體이기 때문이다. 勿論 西洋哲學에 있어서도 數를 대단히 重視한 피타고라스와 같은 學者가 있기는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다 疑心하였지만 思惟하는 나 我와 數만은 疑心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만 보아도 그가 數를 얼마나 重視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數에 대한 思索과 硏磨의 자취는 찾을 수 있지만 反面 數的인 法則을 硏究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東洋哲學은 그 出發부터 數로서 始作하였다. 다음의 河圖에서 그것을 엿보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위의 그림의 一, 三, 五, 七, 九는 白色圓이다. 이것은 奇數니 陽을 象徵하는 것이오 二, 四, 六, 八, 十의 黑色圓은 偶數이니 偶數는 陰을 象徵하는 것이다. 또 一, 三, 五, 七, 九의 五位 中에서 一, 三, 五는 陽數로서의 生數요 七, 九는 陽數로서의 成數다. 二, 四, 六, 八, 十 中에서 二, 四는 陰數로서의 生數요, 六, 八, 十은 陰數로서의 成數다. 이것을 다시 추려보면 自然數의 數列은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인데 그 중에서 一二三四五는 生數라고 하고 六七八九十은 成數라고 한다. 그런데 生數인 五位 즉 一二三四五 中에서 奇數인 一三五는 陽의 生數요 二四는 陰의 生數다. 또 成數인 六七八九十 中에서 六八十은 成數 中의 陰數요 七九는 成數 中의 陽數이다. 이와 같이 生數와 成數가 各各 奇偶數를 가지고 있는데 生數는 萬物이 變化하는 基本原理이고 成數는 萬物이 變化하는 實現形態인 것이다. 그런데 自然數는 이와 같은 性質을 가진 奇偶가 互相交雜하여 一陰一陽하면서 數列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法則으로서 成立된 數列의 理論的 根據가 바로 河圖에서부터 나왔다. 그것이 바로 數의 化生이며 同時에 萬事萬物의 化生인 것이다.

  여기서 河圖에서 나타난 數理를 대략 說明하면 一과 二인 水火의 生數는 宇宙變化의 二大 基本原理이고 三과 四의 木金은 一二 즉 水火의 運動을 돕기 위한 幇助的인 原理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一이 二로 化하려면 三의 도움이 必要하고 二가 一로 變하려면 三의 도움이 必要하다. 그런즉 宇宙의 運動은 一과 二의 互惠運動이므로 自然數의 一은 그 基本要素인 一二가 차례로 配列되고 그 다음은 一이 二로 發展하는 것을 돕는 要素인 三이 配置되고 그 다음은 二가 一로 歸藏하는 것을 돕는 要素인 四가 配置됨으로서 變化와 生成의 序列이 決定된 것이다. 이것이 一二三四의 順位가 法則的으로 形成되지 않을 수 없는 河圖의 序列인 것이다. 이것을 變化의 法則인 五行運動에서 보면 水火는 宇宙變化의 基本要素이고 木金은 幇助的 要素이므로 水火를 一二順位로 하고 木金을 三四位로 하였다는 말과 相通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生數 중에서 아직 남아있는 것은 五이다. 五는 生數 中에서 中數다. 이것을 五行의 槪念으로 바꿔놓으면 土다. 土의 性格이 不偏不黨한 中이라면 五의 性格이 그러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水火金木이 偏僻된 性格者라면 一二三四가 그러할 것도 當然한 것이다. 그러므로 一二三四의 다음에 五가 配置되어야 할 것은 水火金木의 中位에 土가 있어야 하는 것과 一般인 것이다. 그러므로 五는 數列의 中位인 五位에 配置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河圖를 살펴보면 中央의 五가 十에 依하여 包圍 當하고 있다. 五는 一二三四五의 生數의 끝이므로 十의 가운데 있으면서 生하려는 뜻을 內包하고 있는 것을 表象한 것이다. 위에서 變化의 化生數인 生數의 成立을 말했다. 그러면 다음은 變化形成數인 成數의 配置된 理由를 말하겠다.

  宇宙를 彌滿한 것은 萬物이다. 萬物은 大小와 粗密의 反復運動을 하면서 形上形下에 形象을 나타낸다. 그 運動의 過程에서 形而上的 表象이 바로 生數인 一二三四五의 化生이며 形而下的 表現이 成數인 六七八九十의 形成인 것이다.

  위에서 生數는 變化의 基本原理요 成數는 萬物이 變化하는 實現形態라고 한 것도 實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成數는 生數의 基本原理를 얻음으로써 萬物의 實現形態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고 生數는 成數의 實現形態를 얻음으로써 基本原理 즉 生命을 保存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陰陽의 互惠運動인 것이다. 그러므로 生數인 一二三四五는 成數인 六七八九十을 얻음으로써 萬物이 實現되는 것이다. 數가 自然自體인즉 數 自體의 發展도 自然自體의 發展과 同一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이 生數가 成數로 發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즉 生數는 一二三四五의 五位이지만 五는 一二三四의 綜合者 土로서의 性格을 가졌으므로 五가 곧 一二三四의 代表이며 同時에 生成의 本質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一+五=六, 二+五=七, 三+五=八, 四+五=九, 五+五=十의 公式으로 成數가 形成된 것이다. 그런즉 六은 五라는 形成의 本質과 一이라는 生化의 基本原理가 서로 綜合됨으로써 물(水)의 形質을 갖추게 되었고 七은 五라는 形成의 本質과 二라는 生化의 基本原理가 서로 綜合되어 서로 불(火)의 形質을 갖춘 것이다.(以下略)

  이와 같이 하여 生數와 成數의 互惠生成하는 運動을 陰陽의 五元化運動인 五行法則으로 規定한 것이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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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handongseok.org/lecture4.htm

黃帝內經講義 (4) 1965년 7월호

韓東錫


第一編 變化原理

    C. 十五分紀와 그의 槪念

  위에서 말한 바는 五行의 一般的 性質 다시 말하면 五行의 普遍的인 槪念에 不過했던 것이다. 그러나 宇宙의 變化原理인 五行은 各各 그가 지닌 바의 一般的 原理를 가지고 있거니와 여기에서 그의 一般的인 普遍性을 좀더 分析하여야 할 必要가 있기도 하며 또 그 自體가 普遍性에서 脫出하여 具體性을 띠려고 애쓰고 있기도 한 것이다.

  가령 木氣의 境遇에서 例를 들어보면 木을 生하는 힘(力)이라고 規定하는 것은 木의 作用에 대한 一般的인 모습에 不過한 것이다. 그러나 實際로 生하는 힘을 測定함에 있어서 그 힘의 强弱의 差를 無視할 수 없는 것이므로 여기에서 다시 힘을 細分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木의 힘이 絶對的으로 中道的 作用을 하는 境遇와 또는 너무 過强한 境遇와 너무 不及한 境遇의 셋으로 區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各人이 現象界를 觀望할 때에 위에서 말한바와 같은 세 가지 分裂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無數한 分裂을 目睹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人間의 認識이 언제나 皮相的인 觀望에만 머물기 쉽고 具體的인 觀察을 하여내지 못하게 되는 때문인 까닭이다. 萬一 吾人이 이것을 細密하게 觀察하여 낸다고 하면 그의 所謂 無數한 分裂을 하는 것 같던 變化狀態는 一이 三에서 分裂되고 또 그 一이 (첫번에 一이 三에서 分裂되면 三으로 分裂했다는 結果가 되지만 그 發展한 바의 三이란 것은 또한 獨立된 三個의 一에 不過한 것이다.) 다시 三으로 分裂하는 過程의 無數한 反復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變化過程에 있어서의 所謂 分裂作用은 本質的으로는 三數의 反復分裂이므로 五行의 一般的 槪念은 다시 다섯 가지라도 그 하나하나는 반드시 三으로 分裂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畢竟 이것은 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十五로 分裂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槪念設定에 있어서도 十五種의 新槪念이 다시 設定되어야 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一般的인 槪念과 具體的인 槪念으로 나뉘게 되며 따라서 十五分紀設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平氣 太過 不及이 五行의 三種이 된다는 것도 찬언할 餘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以下에 그의 十五種槪念을 說明하기로 하겠다.

    (가) 평기

  木氣

  木氣의 平氣를 敷和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木의 平氣라는 것은 木氣가 生함에 있어서 가장 알맞은 氣運을 平氣라고 한다. (火土金水의 境遇도 一般이다) 그러므로 그 槪念을 敷和라고 하는 것이니 이제 그의 뜻을 硏究하여보면 「敷」자의 뜻은 한오리로 쭉 뻗어나가는 狀態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日用하는 말에서 그 例를 찾아보면 鐵道를 建設하는 것을 敷設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의 建設하는 形態가 一絲不亂하게 두 줄로 쭉 펴져 나가는 까닭에 敷設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和」자의 뜻을 生覺하여 보면 不强不弱하며 맞게 適用될 수 있는 것이 和인 것이다. 그런즉 木氣의 正氣는 오직 敷하기에 알맞으며 동시에 그것이 和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過不及이 없는 木化作用을 할 수 있는 形象을 代表하는 것이 바로 敷和인 것이다.

    (나) 火氣

  升明

  火의 平氣를 升明이라고 하는 것이니 升字의 뜻을 살펴보면 十字의 변에 千字를 쓴 것이다.(此後부터는 ㅆ十+ㅆ千이라고 表示하겠다.) 그런데 自然數에 있어서 十과 千은 모다 陰數의 分裂인즉(下의 自然數에 詳論할 것임) 宇宙間의 明은 여기에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런즉 火氣의 平氣는 明을 生하기에 알맞은 것이며 또한 그의 正常的인 發展의 目的은 明을 生하려는 데에 있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明이란 것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火水가 均衡狀態에 놓였을 때에 明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그 明은 萬物을 完成시키며 모든 일의 目的을 達成하는 基本일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具體的으로 말하면 어떻게 생기는 것이며 또 그 正體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說明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精神問題를 說明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 土氣

  備化

  土의 公正한 作用이란 것은 모든 化할 수 있는 條件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平氣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化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氣運이(金木水火土) 가장 잘 中化되어서 不偏不黨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木火金水와 같이 偏僻됨이 없는 오직 絶對的인 中이며 또한 正中化한 土가 되는 것이니 즉 備化가 되는 것이다. 化字의 뜻은 本是 和字와 同意異稱인것에 不過한 것이다. 즉 和는 事物에 대한 指稱이며 反面에 化는 形而上에 대한 標示인 것이다.

  그런즉 化는 陰陽之中이기 때문에 그의 作用하는 面으로 보면 모든 事物의 過不及을 調節하는 氣運이지만 그 象으로 보면 寂然不動한 動靜의 中인 것이다.(中은 알맞다는 뜻이 있음) 그러므로 一般的으로 土를 가리켜서 中이라고 하지만 嚴密히 區分하면 平氣의 土 즉 備化만이 絶對中인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서 平氣의 土를 備化라고 命名한 것은 實로 這邊에 理由가 있는 것이다.(詳細는 土化作用에서)

    (라) 金氣

 審平

  金氣는 萬物을 生長에서 收藏으로 轉換하게 하는 最初의 氣運이란 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바 있거니와 收하는 기운이 藏하는 기운과 같이 恒常 殺伐하는 性質이 있으므로 그러한 境遇에 金氣가 萬一 公正性을 잃으면 收藏之道에서 第一 重要한 目的인 包陽作用∼다시 말하자면 金水가 包藏하는 바의 精神이 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五行中에서 金氣처럼 平氣의 維持가 重한 것은 없는 것이다.

  金氣는 本來 平定하는 것이 그의 機能이지만 또한 그의 性質이 자칫하면 猛暴에 치우치기도 쉬우므로 그의 平氣를 審平이라고 한 것이니∼다시 말하면 平定하기는 하여야 하지만 잘 살펴서 하여야 하는 것이므로 審字에도 역시 土의 性質을 內包하고 있다는 것을 잘 記憶하면 되는 것이다.

    (마) 水氣

  靜順

  水氣는 本是 五行의 墳墓이며 또한 精神의 府庫이기도 한 것이다.(精神論에서 詳述할 것임) 그런데 水氣를 詳察하여 보면 그 象은 靜的이고 其性은 順한 것이다. 우리가 一般的으로 靜寂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것을 잘 考察하여 보면 靜이라는 것은 絶對的인 것을 말하는 것이요 寂이라는 것은 相對的인 것을 意味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寂은 動하려고 하여도 動할 수가 없는 것이요 靜은 동하려면 動할 수는 있지만 動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글자의 象에서 살펴보면 寂字가 ㅆ ㅆ叔 으로 되어있는 것은 收藏하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뜻이 있고 靜字의 象을 살펴보면 ㅆ靑ㅆ爭 한 것은 靑(木)과 相爭하려는 意志는 있으나 아직 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吾人은 여기에서 寂에는 土의 象이 內包되어 있고 靜에는 水의 象이 潛藏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水의 平氣를 正名함에 있어서 靜字를 쓴 이유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順字의 意味를 生覺하여 보면 順字가 ㅆ ㅆ頁 하였으니 坤의( 는 坤의 古字) 큰 머리라는 象이 있으니 즉 坤土의 始作이란 뜻이 있다.

  이와 같이 보면 水가 平意일 때는 絶對的인 靜的 狀態에 놓이게 되지만 水는 將次 動하여야 할 것이므로 土化作用의 要素도 內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水의 平氣를 靜順이라고 命名하였던 것이다.

  (附言) 難解를 걱정 말고 復習을 反復하면 講義가 前進함에 따라 모든 難題가 解決될 것인즉 念慮할 것은 없다.

  不及

  木氣

  委和

  木氣가 不及한 것을 委和라고 한다. 그런데 一般的으로 말하는 木氣가 不足이라고 하는 말과 不及이라고 하는 말은 어떻게 다른가? 不足이라는 말과 不及이라는 말은 그의 槪念이 전혀 다르다. 不及이라는 말은 힘(力)은 있지만 아직 時期가 이르다고 하는 境遇나 或은 힘이 어떠한 外的 障害 때문에 그 힘을 發揮할 수가 없는 때에 쓰이는 通稱이요 不足이란 말은 힘이 根本的으로 모자라는 境遇에 쓰이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不及之氣는 氣의 不足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不及을 말하는 것이니 不足과 不及을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이제 여기에서 木氣不及을 委和라고 한 것을 檢討하여 보면 委字의 뜻은 委屈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勢力에 威壓當하여서 生하려고 하여도 生하여 낼 수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즉 委和라는 말은 和氣가 委屈되어서 나올 수가 없는 象態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和氣라는 것은 무엇일까? 위에서도 이미 말한바와 같이 化氣라는 말과 和氣라는 말은 同意異語에 不過한 것이다. 勿論 天道가 모든 事物에 있어서 木氣를 生할 때에는 반드시 和氣(토)가 先行함으로써만이 坎水(子)의 凝固作用에서 脫出하여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健全한 和氣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말할 餘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和氣가 委屈되어서 그의 所任인 化和作用을 하지 못한다고 하면 木氣는 生하지 못하거나 혹은 生한다 하더라도 그 生은 遲遲不進할 것이다. 그런즉 木氣의 不及은 木氣自體의 缺點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土氣의 化和 作用에 그 缺點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土氣가 正常化하여서 化和作用을 잘 한다면 木化作用도 正常的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不及之氣를 委和라고 命名하였던 것이다.(土氣가 委屈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는 것은 土化作用에서 解明할 것이다.)

  火氣

  伏明

  伏字의 뜻은 潛伏을 意味하는 것이다. 換言하면 기운이 없는 것이 아니라 潛伏하여 있기 때문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는 象을 말하는 것이다.

  明에 對해서는 위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神明論에 詳述할 것이거니와 다만 여기에서 簡單하게 말한다면 分裂을 어느 程度 抑制하면서 自己의 形體를 保存하려고 할 때에 自然的으로 形成되는 것이 明이니 이것은 天道運行의 必然的인 過程의 所産인 것이다.

  그러므로 天道의 運行은 萬一 이 過程(火의 過程에 過不及이 없으면 升明이라는 正常的인 氣化作用을 하게 될 것이고 萬一 不及하게 되면 明이 生할 수 없거나 或은 生한다고 하여도 微微 不振한 狀態에 빠지게 될 것이니 이것을 伏明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不及을 伏明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不及을 伏明이라고 하는 것은 明이 不足한 것이 아니라 一時的인 潛伏으로 因한 不及이란 것을 말하는 것이다.

  土氣

  卑監

  土氣가 알맞으면 備化之氣가 되므로 陰陽의 相乘을 잘 調節하게 되는 것이니 矛盾과 對立은 그 힘에 依하여서 融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土氣가 萬一 不及하게 되면 土化作用은 正常을 잃고 卑監으로 化하게 되므로 陰陽의 對立과 矛盾을 仲裁하여 내지 못함은 勿論 事物의 備化作用이 中絶되어서 人事는 不和에 빠지게 되고 모든 生物은 氣가 下陷함으로 因하여 生命力인 陽氣가 發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天地之道도 또한 同一한 原理에 屬하여서 陰盛陽虛가 되면 凶年과 疾病에 빠지게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阿鼻叫喚의 慘狀을 빚어내는 것도 또한 土氣不及에서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은 意味에서 土氣가 不及한 象을 卑監이라고 하는 것이니 卑字의 뜻을 高字의 뜻과는 反對가 되는 것이다.

  모든 事物은 陽氣가 많으면 高化되게 마련이요 陽氣가 不及하면 卑縮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陰陽의 本性인 것이다.

  監字의 뜻은 視 또는 臨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즉 土가 卑監이 되는 것은 前半期의 陽作用이 不及하였을 境遇에는 土化作用에 미치는 影響이 크므로 그 때문에 不及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土의 本性은 솜(綿)처럼 피우는 作用이 있기 때문에 모든 事物을 醇化함으로써 事物의 組織을 中化시키는 것인데 萬若에 土가 下陷하여 卑監이 되면 土가 제구실을 못하게 되고 오직 下陷만을 계속하므로 다만 낮은 쪽만 바라본다는 뜻에서 卑監이라고 命名한 것이다.(詳細한 것은 土化作用을 論할 때에 詳述할 것임)

  金氣

  從革

  위에서 金氣의 平氣가 審平이란 것을 말한 바 있다. 金氣가 萬一 金의 그 사나운 性格 때문에 殺伐의 念慮를 警戒하여야 할 것은 勿論이지만 不及하는 境遇에 있어서도 그것만 못하지 않은 걱정이 있는 것이다.

  金이라는 것은 本是 收藏의 始初이기 때문에 木火의 때에 發展했던 陽을 自己(金氣)의 품안에 包藏하려는 本能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金과 火는 가장 相爭이 甚한 對立性을 가지고 있으므로 土의 仲裁를 기다려서 自己의 所任을 遂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土가 萬一 適當히 仲裁를 하면 金이 平氣를 얻을 수 있고 土가 萬若 調和力을 잃으면 金이 火를 包藏할 수 도 없으며 雖是 包藏한다고 하여도 이것은 金의 正氣를 나타내지 못하게 되므로 結局 金氣가 不及이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金氣의 不及을 從革이라고 하는 것이다.

  革字의 뜻은 一般的으로는 改革이라는 말로 쓰여지는 것이나 그러나 좀더 詳細히 稽考하여보면 革字와 皮字는 그의 槪念이 서로 다르다. 皮字의 뜻은 生命體 그대로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오 革字의 뜻은 生命體에서 이미 離脫시키서 人工을 加했을 때에 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製革이라는 語彙는 있어도 製皮라는 말은 없는 것이다.

  勿論 이것은 皮에다가 人工을 가한 境遇를 말하는 것이거니와 天工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金火가 交易하는 過程에서 萬若 火氣가 尙多하기 때문에 金의 收藏作用이 微弱하게 되는 그 象을 가리켜서 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人體에서 觀察하여 보면 皮膚의 毛髮은 火氣가 過하고 金氣가 不及할 때에 毛髮이 脫落되는 것과 同一한 原理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現象을 革化라고 한다. 그러므로 金氣不及의 作用을 從革이라고 하는 것이다.(詳細는 金火相爭에서)

  水氣

  流연

  水氣라는 것은 本來 流動의 源泉이며 萬物의 生命이며 精神의 府庫라는 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바 있다. 그렇다면 水氣는 어떻게 流動하는 것일까? 하는 것을 考察하여 보기로 하자. 宇宙안에 있는 森羅萬象은 動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 動하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물(水)의 流動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胎卵草木은 물덩어리에서 出發하게 마련이며 萬華方暢의 華麗한 춤도 또한 懸水三千 의 물(水)의 律動에 不過한 것이다.

  그런즉 萬物은 물에서 나왔다가 물로 다시 돌아가는 輪廻反復인 것뿐이다. 이것을 易에서는 坎이라고 하는 것이요 五行學에서는 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水라는 것은 果然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水氣自體의 特徵인 凝固力으로써 萬物의 生命이며 또한 精神이기도 한 陽덩어리를 密閉하는 作用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水氣가 一旦 門을 닫으면 核은 그의 陽을 貯藏하는 것이요 萬若 門을 열면 싹이 터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모습이 바로 水氣가 作用하는 形象이며 또한 律動하는 물의 幻像인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人間 世上에는 善惡의 對立과 生存의 競爭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極致에서 살펴보면 萬物의 變化過程은 다만 물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헤엄쳐 나오는 일만을 反復하는 潛水夫의 一生이야말로 바로 變變化化하는 造物界의 生涯와도 彷佛한 것이다.

  그런즉 물은 水氣에 의해서 形成되어진 것인즉 水의 存亡은 바로 萬物의 存亡인 것이다. 그것은 水源이 마르면 江이 마르게 되는 것과 같이 水氣가 宇宙에서  渴되어버리게 되면 律動하는 물의 變化는 찾아볼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詳細는 水火一體論에서)

 

 

  그러므로 水氣가 不足한 것을  流라고 命名한 것이니  字의 뜻은 一般的으로 물이 마른다는 말이지만 이 字에는 이것밖에  字의 뜻이 있는 것이다.  자에는 閉塞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水氣가  한다는 말은 渴한다는 뜻과는 다른 것이오나 다만 水氣가 不及하다는 뜻뿐인 것이다.

  流字는 古字를  不자로 썼던 것이다. 옛적에는 왜 이와 같이 流字를  不로서 標示하였던가? 이제 여기에서  不자의 象을 考察하여 보면  不字는 ㅆ水ㅆ不 하였으니 不자의 뜻은 木이 아직 一을 貫通하지 못하고 있는 象이다. 그러나 이 字를 水邊에 쓴 것은 不이 木으로 못된 것은 一水의 障碍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도록 暗示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즉  不字의 象 가운데는 動하는 힘이 潛藏하여있는 象이 있는 것이므로  流하는 말에는 動의 根源이 아직 不及하고 있다는 意味가 內包되어 있는 것이다. 水不及을  流하고 한 것은 실로 이러한 深奧한 理致가 있기 때문이다.

  太過之氣

  위에서는 不及으로 因한 缺點을 말했거니와 여기에서 말하려는 바의 太過는 바로 그의 反對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운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物化作用의 正常的인 發展과 收縮에 支障을 招來하는 境遇를 말하려는 것이다.

  木氣

  發生

  木의 太過를 發生이라는 槪念으로 命名한 것을 不及의 槪念을 委和라고 한 것과 比較硏究하여 보면 가장 明瞭한 것이다.

  그러므로 委和를 和氣가 委屈된 것이라고 한다면 發生은 나아가는 힘이 너무 많을 것을 意味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例를 하나 들어보면 銃彈이 爆發하는 모습은 바로 木氣의 太過現象이기 때문에 爆發이라고 하는 用語가 되어있는 것이며 또한 여러 해 묵은 씨앗에서는 종다리가 나오는 것은 여러 해 묵어서 凝固作用이 過多하기 때문에 木氣는 따라서 過多하게 된 것이므로 이것을 發芽라고 하는 것도 또한 그 때문인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五行氣가 平氣를 維持하지 못하고 太過나 不及이 생기게 되는 것은 허물이 水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其他 四氣의 境遇도 同一例인 것이다.(詳細는 生克論에서)

  火氣

  赫曦

  火氣가 太過한 것을 赫曦라고 하는 것이다. 火光이 沖天하는 것을 赫이라고 하고 日光이 曝射하는 것을 曦라고 한다.

  그런즉 赫曦라는 말은 灼熱이 蕃盛하는 象인즉 그것이 바로 火氣太過하는 모습이며 또한 伏明의 反對인 것이다.

  易에서는 이것을 亢龍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뜻은 陽氣가 너무 많아서 限없이 上升하여 後悔莫及의 境地에까지 오르는 象을 意味하는 것인즉 亢龍과 赫曦는 同一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亢龍이라는 것은 陽氣의 縱發하는 性質을 警戒한 것이오 赫曦라는 것은 陽性의 橫散하는 暴威를 말하는 것이니 각각 陽性(火)의 一面씩을 說明한 것이다.

  그러므로 植物이 萬一 赫曦之氣를 만나게 되면 枯死하게 마련이요 人間의 生理組織에 陽盛陰衰의 變故가 생기게 되면 빳빳하게 마르고 살이 생겨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들은 모다 赫曦의 罪科인 것이다.

  土氣

  敦阜

  土氣의 太過를 敦阜라고 하는 것이다. 敦字의 뜻을 生覺하여 보건대 敦字와 厚字는 意味가 同一한 것 같지만 實은 다르다. 氣化作用이 두터워지는 것을 敦이라고 하고 形化作用이 두터워지는 것을 厚라고 하는 것이다.

  阜字의 뜻은 土山이나 大陸이나 혹은 肥大한 것들을 指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阜字와 丘字는 意味가 서로 다르다. 丘는 阜에 비해 面積이 훨씬 적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 氣가 넓게 펴져서 이룬 것은 阜가 되고 氣가 잘 펴지지 못하고 이루어진 언덕은 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土化作用이 中正을 잃으면 或은 不及하여서 丘가 되고 或은 太過하여서 敦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前記한 赫曦의 경우와는 反對로 모든 組織이 지나치게 繁殖하게 되므로 사람이나 動物같은 것은 너무 肥大하게 되고 草木의 경우는 根幹에 비해서 枝葉이 지나치게 茂盛하는 結果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金氣

  堅成

  堅字와 固字는 그 뜻이 서로 다르다. 表氣가 굳어진 것을 堅이라고 하고 裏氣가 굳어진 것을 固라고 한다. 그러므로 金의 性質은 堅이요 水의 性質은 固인 것이다.

  成字의 뜻은 事物이 完成된 것을 意味하는 것이니 예컨대 果穀의 完熟이나 人事의 完決은 모다 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收와 成은 同一 意味로 相通되는 것이다. 但只 火의 立場에서 보면 成이지만 反面 金의 立場에서 보면 收인것 뿐이며 또 全體的(變化的) 見地에서 보면 收라고 할 것이며 個物的(四時的) 見地에서 보면 成이라고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金氣가 太過하다는 말은 堅으로서 成收하였다는 말이므로 이것을 堅成이라고 命名하였던 것이다.

  그런즉 金氣의 경우에 있어서도 다른 原質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隨伴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것은 모다 金이 審平이 되지 못한데서 오는 犯罪인 것이다.

  水氣

  流衍

  流字는 古字로 쓰면  不로서 표시되는데  不의 象을 보면 여기에는 動하는 모습이 內包되어 있다는 것은 前에 말한바 있다.

  衍字는 ㅆ行ㅆ水하였은즉 여기는 動하는 象이 있는 것이며 또 反面에는 水가 行하려고 하여도 行해내지 못하는 象도 있는 것이다. 이 글자의 意味를 詳考하여 보면 늘어진다는 뜻도 있고 또 箱子라는 뜻도 있는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서 流衍이라는 槪念을 檢討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事實을 알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衍에는 늘어질 수 있는 바탕이 있기는 하지만 水氣가 太過하기 때문에 오히려 箱子속에 幽閉당하여 있는 象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流衍이라는 槪念속에는 動할 수 있는 要因만 갖추고 있을 뿐 아직 감히 동해내지 못하고 있는 象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不及之氣인  流와 이것을 비교해보면  流의 경우에 있어서는 動할 수 있는 힘이 缺乏한 것이 아니고 水의 凝固力이 太過하기 때문에 감히 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流는 內的 條件의 不備에서 생기는 缺陷이며 流衍은 外的 狀態의 不應에서 오는 事故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① 五行法則과 엠페도클레스의 原理

  B.C. 495∼435 間에 希臘의 哲人 엠페도클레스 Empedokles는 宇宙의 原質을 四原素로서 主張한 일이 있다.

  그가 이와 같은 主張을 하게 된 것은 畢竟 存在와 生命問題를 矛盾없이 解決하여 내려는 意圖에서였으리라고 生覺된다.

  그가 이와 같이 四元論을 主張하고 탈레스Thales 以後의 一元論을 排斥하게 된 것은 그로서는 여러 가지 理由가 있었겠지만 吾人이 볼 때는 그가 古代의 一元論을 그의 머리로서는 演釋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生覺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니 도리어 初期의 自然哲學을 無價値한 것으로 輕蔑하였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은 오직 옘페도클레스에 있어서만 局限되었던 것은 아니고 歷代 哲學들의 通弊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筆者가 여기에서 論하려는 바는 그의 短點을 指摘하거나 批判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의 長點的인 着眼을 들어서 東洋的인 象數原理와 比較하여 보려는 것이다.

  이제 아래에 잠시 그의 所論을 紹介하여 보기로 하겠다.

  宇宙의 原質은 불(火), 공기, 물(水), 땅의 넷으로 生覺하고 다시 그 性質을 區別하여 말하기를 四種의 原理는 變할 수 없는 自己 同一性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다만 그 變化하는 性質만 다르다고 生覺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四種의 根源은 서로 그의 性質을 달리하면서도 또한 永遠히 같은 性質을 確保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같은 것에도 還元되지 않으며 아무런 새로운 性質도 가질 수가 없고 다만 離會集散함으로써 現實界의 變化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異質的인 四原素들이 어떻게 離會集散 할 수 있는가? 하는 問題에 對答하기를 그것은 四種의 根源이 가장 잘 融合된 圓球로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生覺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分合集散하는 要因으로서 憎惡와 사랑을 生覺해 냈으니 憎惡로서는 分離시키고 사랑으로서는 統合시킨다고 主張하였던 것이다.

  以上에 論述한 바는 그의 思想의 要約이거니와 筆者가 여기에서 그것을 要約하는 것은 그의 所論 中 「四種의 根源은 서로 性質을 달리하면서 또한 永遠히 같은 性質을 確保하는 것이며 같은 것에로 還元되지도 아니하며 아무런 새로운 性質로 가질 수가 없고 다만 離合集散함으로써 現實에 變化를 나타낸다」고 하는 卓越한 觀點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論文을 詳察하여보면 그의 四原質 自體도 아직 完全치 못하며 또한 四原質의 基本點에 對해서 論及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비록 希臘 前期의 自然哲學 다시 말하면 그 時代의 一元論을 理解하지 못하였던데 緣由한 것이며 따라서 後期的인 變質要因이기는 하지만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여기에는 아직까지 前期的인 一元論의 命脈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東洋의 象數原理 즉 木火土金水의 法則인 運動原理와 彷佛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思想을 조금만 修正하여서 運動하는 原質이 五元素임을 밝히고 또한 그의 中樞가 陰陽의 本源인 太極이라는 點까지만 發展시켰더라면 그것으로써 宇宙原理는 完全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象數原理와 엠페도클레스 原理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差異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고 「四種의 根源은 서로 性質을 달리하면서도 또한 永遠히 같은 性質을 確保하는 것이며 또한 같은 것에로 還元하지도 아니하며 아무런 새로운 性質도 가질 수 없고 다만 離合集散하면서 現實界에 變化를 나타낸다」는 말을 하였더라면 希臘哲學의 次元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動하고 있는 現實的 存在만을 보고 靜하고 있는 基本的 存在를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思想의 一端에서 能히 엿볼 수 있으니 「憎惡로서 分離하고 사랑으로 統合한다」는 一節만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象數的 立場에서 보다면 木火發展의 過程에서는 憎惡心이 생기는 것이요 金水收藏의 過程에서는 博愛心이 생기는 것은 勿論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憎惡나 博愛는 宇宙의 運動法則인 四象(木火金水)에서 抽出한 人道的 原理일 분이고 그 自體가 바로 分裂에서 綜合으로 誘導하는 萬象의 原質이거나 法則일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萬物이 分裂할 때 이것을 인간이 사랑한다고 하여서 그 分離를 停止시키거나 또는 萬物이 綜合過程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것을 憎惡함으로써 그 綜合을 停止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認定하는 한 그의 理論은 空念佛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비록 現實과 本體, 人間과 天道는 同一한 法則에 依해서 움직인다는 點까지 看破하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사랑과 憎惡에도 分合의 原理가 있다고 본 點만은 看過할 수 없는 것이다. 一言으로 要約하면 그는 寶庫의 門고리는 잡았지만 아직까지 室內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東洋哲學은 이러한 愚를 犯하게 하지 말도록 하기 위하여서 모든 硏究에있어서 이와 같은 法則發見을 重視하였던 것이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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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handongseok.org/lecture3.htm

黃帝內經講義 (3) 1965년 3월호

韓東錫

第二章 五運

第一節 五行學의 發達

  宇宙는 무엇으로써 構成되었을까?

  또는 어떻게 움직이며 무엇이 이것을 움직이게 하는가? 神의 攝理인가? 物質自體의 運動인가? 하는 問題는 科學的 哲學的인 領域을 거쳐서 有史以後 今日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大宇宙의 一大宿題로서 남아있을 뿐이다.

  돌이켜 西洋哲學界에서 這間의 消息을 살펴보건대 古代 希臘의 「탈레쓰」Thales(B.C. 640∼550)는 宇宙의 本質을 「물」이라고 生覺하였고 「아낙시메네쓰」Anaximenes (B.C. 588∼524)는 「空氣」라고 生覺하였고 「헤라크레이토쓰」Herakleitos (B.C. 535∼475)는 「불」이라고 生覺하였고 「엠페도클레쓰」Empedokles는 「불」 「공기」 「물」 「땅」의 四元素로 組織된 것으로 生覺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쓰」Demoklitos(B.C. 460∼370)는 宇宙를 構成하는 原質을 原子로서 生覺하였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原子理論의 始初가 되었으며 또한 唯物論의 胎動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宇宙의 運動을 原子群이 機械的으로 離合集散하는 現象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感覺이나 視覺도 內外가 原子群間의 衝突에서 오는 反應이라고 生覺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科學文明이 싹트게 되었고 따라서 二十世紀의 華麗한 物質文明을 産出하기까지 이르렀거니와 本講에서 論하려는 바는 이에 대해서 그 功罪를 論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 內容을 硏究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希臘의 自然哲學이 「데모크리토쓰」Demoklitos에 이르러서 科學化의 발판이 생기면서부터 「탈레쓰」Thales 以後 「엠페도클레쓰」Empedokles 까지 사이에 發達하였던 自然哲學의 硏究는 차츰 影子를 감추기 始作하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哲學의 硏究手段이었던 自然法則인 精神的 方向이 차츰 物質的 方向으로 옮겨가기 始作하였던 것이다.

  勿論 十九世紀 初葉에 「헤겔」Hegel(1770∼1830)에 依하여 宇宙精神이 提唱되었고 또한 그의 獨特한 辨證法에 依하여 萬物의 生化運動의 規範인 自然運動의 原理를 一部分이나마 回復시켰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遼遠하기 限量없는 것이다.

  당행 「헤겔」과 同時代의 사람 「쉘링」Scelling(1775∼1854)이 나옴으로써 自然原理와 그의 法則에 接近하였지만 哲學界는 아직까지도 여기에 注目하려 하지 않는 것 같으니 답답하고 애달픈 마음 禁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宇宙原理를 硏究하는 데 있어서 가장 올바른 態度는 어떠한 것이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그의 影子에서 찾아 낼 수는 없는 것이오 正確한 本體를 찾아냄으로써만이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動하는 物質은 影子에 不過한 것이고 決코 本體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物質에서 宇宙의 本質을 찾아내려는 西洋哲學의 경우는 眞實로 緣木求魚와도 彷佛한 것이다. 여기에 오늘날 그들의 盲點이 있기도 하며 同時 「데모크리토쓰」Demoklitos의 過誤도 實로 여기오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東洋哲學 즉 象數學은 이 問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五千餘 年 前으로 推算되는 먼 옛날 伏羲氏 때 물 속에서 河圖(龍馬가 그림을 지고 나온 것)가 나왔다. 伏羲氏는 이것에 대해 專心致思한 끝에 드디어 그 그림 속에서 거기에 變化莫測한 宇宙의 動靜하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에 衣하여 「힌트」를 얻었는가? 河圖는 「象」(凡人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볼 수 있는 準備를 갖춘 사람은 볼 수도 있는 모습이 「象」이니 이것은 無形이 有形으로 轉換하는 中間過程에서 나타난다.)과 「數」로써 象徵되어 있다는 事實을 發見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象」을 正確히 把握하기는 비록 어려운 일이고 또한 認識方法이 觀念에 屬한다 할지라도 「數」의 計算만은 自然數 自體가 分裂과 綜合하는 一定한 法則에 依하는 것이므로 數列이나 數式의 變化에는 거짓말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象은 思惟와 認識에 依해서 觀察하고 그 「象」自體가 演出하는 바의 「數」의 分合現象은 이것을 反證하여주기 때문에 이것을 象數原理라고 하는 것이다.

  西洋에서도 數에 對해서 相當히 關心을 가지고 있었으니 비록 東洋에 있어서처럼 象數의 一元的인 原理로서는 發達하지 못하였지만 「피타고라스」Pythagoras(B.C. 580∼500)가 「萬物은 無限한 것과 有限한 것이 綜合하여서 生成하는 것이니 이것은 數의 奇偶가 綜合하여 變化하는 것과 同一한 原理」라고 말한 것이나 또 「쏘크라테쓰」Socrates(B.C. 469∼399)가 「幾何學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學校에 오지도 말라」고 한 것 等으로 미루어서 生覺하여보아도 西洋에 있어서의 哲學과 數의 關係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伏羲氏의 象數發見은 이미 五十 世紀 前에 벌써 萬古不變의 眞理로서 이 世上에 擡頭하게 되자 이것이 文王, 周公, 孔子를 거쳐서 易學의 大系를 이루었고 다른 쪽으로는 伏羲, 箕子, 老子, 公孫龍子, 鄒衍을 거쳐서 陰陽五行의 變化原理를 完成하여 놓았던 것이다. 勿論 這間에 있어서 老子의 自然觀은 勿論 列子, 莊子 등이 寓話形式을 取하면서 自然原理를 解明함으로써 實로 偉大한 功積을 남겨 놓았던 것은 다시 말할 必要도 없는 것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學派에 區別이 있었고 敷衍하는 方法에 있어서 多少間의 差異는 있었을 망정 그러나 그 原理의 歸着點을 살펴보면 一源同流에 不過한 것이며 따라서 그 法則은 어느 것을 勿論하고 宇宙動靜의 原理에서 出發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東洋에 있어서의 哲學의 方向은 端的이 아니며 統一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東洋哲學은 希臘哲學의 胎動期에 있어서처럼 그의 原質을 어떤 낱개의 物質이나 性質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니고 反對로 統一된 形象에서 찾으려는 것이니 즉 統一된 每個의 宇宙에서 찾아내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東洋哲學은 前記한 바와 같이 河圖에 象徵된 바에 依하여 象數의 法則을 찾아내고 따라서 自然을 支配하는 宇宙精神도 이 法則에 立脚한 것이라는 것을 基本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如何한 生命體에 있어서나 그의 大小를 莫論하고 各各 小宇宙를 形成하고 있다는 事實을 看過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萬物은 모다 每個의 小宇宙인 이상 그 宇宙라는 것은 精과 神의 反復하는 運動인 것이며 物과 質이 散合하는 모습에 不過한 것이다. 이리하여 精神과 物質이 서로 媒介하면서 끊임없는 變化 作用을 일으키게되고 그 結果로 生成된 것이 存在이며 따라서 生成을 가능케 한 그 原質이 바로 存在者인것이다.

  그러므로 「精神+物質=存在」라는 公式은 哲學의 硏究에 있어서 絶對眞理가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이 公式을 無視하고서는 宇宙의 本質을 찾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물]이나 [불]과 같은 物質에서 宇宙의 本源을 찾아보려는 一部 西洋哲學者가 犯했던 것과 같은 矛盾을 다시 되풀이하려는 學者도 없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筆者는 上古의 希臘哲人들에게 無限한 敬意를 表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自然哲學的 思想 속에는 自然法則이 그냥 흐르고 있다는 事實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下에 論할 機會가 있음)

  却說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精神+物質=存在」라는 公式에 가장 忠實한 것이 우리의 立場인 것이다. 그렇다면 萬物이 動靜하는 모습도 역시 「精神+物質=存在」의 運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吾人은 여기에서 精神的 存在와 物質的 存在를 抽出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따라서 精神存在에서는 精과 神을 區別하여야 할 것이며 物質存在에서는 物과 質을 辨別하지 않으면 안된다.

  萬一 그것들을 철저히 가려내지 못한다고 하면 그 法則은 宇宙의 本質을 探索하려는 法則으로서 너무나 無能力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哲學적 要求 때문에 이에 副應할 수 있는 自然法則의 發見이야말로 哲學徒에게 내려진 至上命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東洋哲學은 基本法則을 設定함에 있어서 「陽+陰=太極」, 「木+火+土+金+水=陰陽」이라는 公式으로 歸納되는 것이며 또는 「太極=陰+陽」, 「陰陽=木+火+土+金+水」로서 다시 演繹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萬物의 尺度이며 따라서 그의 分合運動과 그 本質을 測定하는 法則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萬物의 過程的 變化에서 그 原理를 硏究할 수 있는 契機가 마련되었고 그 契機에 依하여 樹立된 法則이 바로 陰陽五行의 運動法則이며 同時에 萬物과 宇宙의 本源도 여기에서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法則은 宇宙間의 모든 變化現象을 探求할 수 있는 大本이기 때문에 哲學, 醫學, 科學, 法律, 政治, 社會學 등의 原理의 探求도 여기에 依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以下에 論하려는 바는 實로 그 目的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第二節 五行의 槪念

    A. 緖論

  五行이란 말은 위에서도 若干 言及한 바와 같이 太極이라고 불리우는 統一體가 太易 太初 太始 太素의 四段階를 거쳐서 비로소 太極으로 發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發展되는 過程的 段階에 대해서는 列子에 詳述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略하거니와 要는 太極이 생김으로써 거기에서 다시 陰陽이기가 갈라지게 됐고 그 갈라진 바의 陰陽二氣는 거기에서 또 다른 分合作用이 促進되므로 因하여 五行의 原質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을 五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地球 위에 있는 森羅萬象이 비록 數億을 算한다 할지라도 萬一 우리가 그것들의 性과 質을 一一이 따져본다고 하면 어느 것 할 것 없이 五行의 기운으로 되어있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이것을 萬一 科學的 立場에서 觀察한다면 宇宙間에 차있는 萬物은 모다 元素의 集合體에 不過할 것이다.

  그러나 原素라고 하는 것은 物質만의 單位이기 때문에 元素로서 모든 生命力 있는 物質을 規定함에 있어서 그 分析能力만으로는 오히려 不足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生命力이 없는 純粹物體를 分析하기에는 알맞은 方法이겠지만 活力體를 이것으로써 規定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象數의 法則인 五行法則은 有와 無를 測定할 수 있는 自體의 要素를 內包하고 哲學界에 君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五行法則이란 것은 物質單位 만으로서 萬象을 測定하려는 方法이 아니고 精神이나 生命을 가진 살아있는 物質의 原質을 規定하며 또 測定하는 方法인 것이다. 古聖이 이와 같은 方法을 發見하게 된 것은 그 以前에 벌써 萬物의 動靜은 五行氣의 動靜이라는 것을 알아내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萬物의 움직임은 五行이라고 하는 五原質의 綜合體가 움직이는 것인즉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는 問題는 가장 重要한 硏究 課題인 것이다.

  모든 時空에 彌滿하고 있는 것은 그 自體가 五行의 氣運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萬物이란 것은 별것이 아니라 宇宙間에 가득 차 있는 五行氣運이 凝固하게 되면 形體를 이루게 되고 萬一 瓦解하게 되면 다시 純粹한 五行氣가 되는 까닭이다.

  이러한 過程에서 生成하며 消滅하기도 하는 것이 物質이기 때문에 그 物質 속에는 躍動하는 精神과 生命이 內包되지 않을 수 없으므로 萬物은 반드시 自己自體의 活力素를 가지고 나게 되는 것이다. (精神과 生命의 創造에 대해서는 別途로 論할 것임) 宇宙間의 萬物은 이와 같은 條件에서 生成하였고 따라서 그 自體가 變化無雙한 것은 五行이 氣化變固하는 作用에 依한 것뿐이기 때문에 그 自體 亦是 無形과 有形의 어느 쪽에나 適應될 수 있는 五行法則만이 萬象硏究에 있어서 至上의 規範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法則을 五行이라고 命名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爲先 「五」字를 위에 붙인 것부터 生覺하여보자. 五行이라는 法則에는 다섯 가지의 原質이 共棲하고 있다는 말이다.

  「行」字를 놓은 것은 氣運이 循環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니 거기에는 離散의 意味도 內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行」자를 分析하여 보면 「 」(자축거리며 걸을 척)字와 「 」(앙감질 촉)字의 두자가 합하여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 」字에는 가는 길에 비록 難關이 있다 하더라도 能히 行을 克服하여낸다는 뜻이 있고 「 」字에는 前進이 아니고 後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行이라는 것은 一進一退를 意味하는 것이니 즉 「行=往+來」라는 公式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宇宙의 一往一來하는 모습이 五行氣의 運動規範이라는 것을 表示하기 위해서 如此命名한 것이다. 따라서 五行運動은 分合運動이기 때문에 陽運動의 過程인 木火에서는 分散하고 陰運動의 過程인 金水에서는 綜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聚散의 意味가 (行字 속에) 內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近日 돈이 聚散하는 곳을 「銀行」이라고 하며 物件이 聚散하는 곳을 「洋行」이라고 하는 것 같은 것은 實로 이 「行」자체가 가지고 있는 意味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다음은 五原質인 五行에 對해서 그의 한 개 한 개의 槪念을 硏究하여 보기로 하자.

    B. 五行의 一般的 槪念

  宇宙의 原質을 五種으로 命名할 때 이것을 木火土金水라고 하였다. 그러나 決코 木이라는 것은 나무 自體이며 火라는 것은 불 自體를 意味하는 것은 아니다. 勿論 木火土金水의 五行은 나무 불 흙 금 물 등의 形氣具存한 物質들로 包含되어 있는 것은 事實이다. 그렇지만 五行法則의 符號는 單純한 物質의 代表符號만은 아니요 그의 生命이나 精神도 代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形」자나 「氣」자를 附加하여 「木氣」或은 「木形」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有形的인 形而下와 無形的인 形而上을 다 代表하는 것이 五行인 것이다. 萬一 哲學硏究에 있어서 가장 重要한 그의 原質을 代表하는 符號가 形의 上下나 或은 有無의 어느 한쪽만을 代表하는 데에 치우친다면 그것으로써 變化律動하는 大自然의 모습을 探索하기는 너무나 不自由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古代의 希臘人들이 犯했던 失手이며 또 오늘의 西洋哲學者들이 갈피를 못 잡고 彷徨하고 있는 點이기도 한 것인즉 그것은 바로 哲學의 基本法則이며 思惟의 唯一한 案內者인 法則自體에서 媒介된 矛盾點인 것이다.

  그러므로 象數學은 그의 原質法則의 基本槪念을 決定하는데 있어서 이와 같이 形과 氣(有無)를 自由로이 代表할 수 있는 融通性 있는 基本槪念을 設定하여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人間의 任意的 決定이 아니고 大自然의 啓示이며 또한 命令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變化하는 大自然의 本質을 詳察하여 보면 이것은 形도 氣도 아닌 것으로써 다만 分裂과 綜合을 永遠히 反復하고 있는 宇宙變化의 一大幻像에 不過한 것이므로 그 運動에는 永遠한 恒久란 있을 수가 없고 다만 感應과 恒久가 反復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直觀하고 움직이는 自然 그대로 ∼ 다시 말하면 그러한 自然을 測定하며 또 探索하기에 가장 알맞게 定한 것이기 때문이다.(註 直觀이라는 말은 틀림없이 觀察한다는 말이고 決코 보고 느낀 그대로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人間이 보고 느끼는 곳에는 恒常 自己의 感情이 앞서기 때문에 바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直觀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近來에 直觀을 「보고 느낀 대로」라고 解釋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 木

  木이라는 것은 奮發하는 기운을 代表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生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湧力이나 湧出하는 것은 다 生과 마찬가지로 木氣에 대한 象徵인 것이다.

  例를 들면 사람이나 動物의 境遇에 있어서 힘이 强하다는 것은 그것은 木氣를 가장 많이 所有하고 있다는 말과 共通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木氣가 生이나 湧出 湧力의 主體가 되는 것은 그 힘이 集中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萬一 그 힘이 集中되지 못하고 分散한다면 여기에는 生도 없으며 勇力이나 湧出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生하는 그 힘은 如何한 形態에서 充足되어지는 것일까?

  變化를 일으키는 陰陽의 造化는 恒常 蓄積과 發散의 反復인 것이다. 그러므로 木氣가 發하는 때는 內部에 蓄積되었던 陽이 外部로 脫出하려고 하지만 萬一 外部의 陰形이 아직 勢强하여서 陽氣의 噴出을 許容하지 않게 되면 그 속에서 潛伏하여 있는 陽氣는 더욱 더욱 그 힘이 强하여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힘이 脫出할 때에 생기는 反應이 바로 生이며 勇力이며 또는 噴出인 것이다.

  例를 들면 椅子나 寢臺 같은 것의 湧心鐵은 밟으면 밟을수록 점점 反撥力이 强하여 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上記한 바의 木氣의 運動原理인 것이다.

  英語의 語彙에 實로 滋味있는 것이 있으니 「스프링」Spring이라는 單語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의 一例이다. 즉 Spring이라는 「봄」「湧心鐵」「泉水가 湧出하는 모습」등을 表現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生覺하여 볼 것은 英國사람들이 옛적에 이 單語를 말들 적에 벌써 우리가 只今 말하는 바의 木氣의 原理를 知悉하고 Spring이라는 語彙로서 以上과 같은 말본으로 統一시킨 것이라고 生覺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如何間 Spring이라는 單語에는 木氣의 機能이 가장 잘 代表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木氣는 五行 中에서 어느 것보다도 陽氣를 抑制하는 힘이 强한 同時에 그 힘도 가장 强한 것이다. 따라서 慾心도 가장 强한 것이 또한 木氣인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힘과 慾心을 埋沒하는 무덤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木氣는 水氣를 발판으로 하는 最初의 發展이기 때문에 힘과 慾心이 强하지만 反面에서 보면 여기에 이르면 循環하는 바의 五行의 位置는 벌써 陽地에 접어든 것이니 그 힘과 慾心이 어찌 그냥 維持될 수 있을 것인가?

  水란 本是 凝固가 甚하여서 勇力을 潛藏하고 있을 뿐이고 뜻을 이루어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때가 이르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木氣로 變質되면서 힘(力)이 活動하기 始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水氣는 木氣의 母體가 되는 것이며 그 凝固를 爲主로 하던 水氣가 木氣의 때에 이르면 水氣의 凝固力은 점점 弱化되면서 陽氣는 潛藏에서부터 脫出하게 되므로 陽의 活動이 開始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木氣의 活動하는 모습이며 또 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自然數도 여기에서부터 火가 끝마치는 때까지는 逆數하게 되는 것이다. (自然數의 逆行云云은 「五行의 變化」에서 說明할 것임) 이와 같이 水氣를 바탕으로 發展을 하는 바의 木氣는 그가 漸漸 發展하는 동안에 이미 水氣에서 받았던 튼튼한 形質은 漸次로 엷어지게 되어서 火氣가 始作되는 곳까지 이르면 自己의 모습은 化하여 火氣로 바꿔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木氣가 發動하는 時期를 봄이라고 하며 또 東方이라고 하니 봄은 萬物의 싹(生)이 통가다리를 維持하는 때의 指稱인 것이오 東方은 陽이 發하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萬物의 싹이 다시 分裂하기 始作하는 때가 이르게 되면 이것은 火氣의 때에 속하는 것이므로 春氣는 여기에서 消盡하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理由로 人生一代에 있어서도 木氣發動의 時期는 바로 幼少年期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人間이 自己의 가지(枝)를 내기 以前이니 이것이 곧 人間의 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힘도 漸漸 생기며 따라서 모든 發育은 앞에 올 蕃盛을 對備하고 있는 것이다.

      (註) 筆者는 위에서 發展이란 말을 썼다. 發展은 前進이란 말과 다르다. 前進은 다만 앞으로 나가는 現象인 反面에 發展은 前進이면서도 그 모습에 屈伸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많은 障碍物을 克服하면서 前進하는 것을 發展이라고 하는 것이다. 自然의 運動에는 前進은 없고 다만 發展이 있을 따름이다. 象數學의 硏究에 있어서 이와 같이 正名하지 않으면 모든 硏究는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律動하는 自己만의 모습을 알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나. 火

  火氣란 것은 分散을 爲主로 하는 氣運이니 그러므로 모든 分散作用은 火氣의 象徵인 것이다. 따라서 宇宙의 모든 變化는 最初에는 木氣로서 出發하여 가지고 그 木氣가 끝날 무렵에 火氣가 繼承하여가지고 第二段階의 變化作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作用이 바로 長盛과 分裂을 爲主로 하는 바의 火氣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火氣가 分裂하며 자라는 作用은 그의 基盤을 木氣에 두고 있는 것이므로 木氣가 正常的인 發展을 經由하였을 때는 火氣도 正常的인 發展을 하게 되지만 萬若에 木氣가 正常을 잃었을 境遇에는 火도 亦是 不完全한 發展을 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火에서 뿐만 아니라 金木水火土의 어느 境遇에 있어서도 마찬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木氣의 發展은 통가다라를 維持하는 것이 特徵이었지만 繼承하여 火氣로 發展하게 되면 그 特徵은 벌써 消盡되고 分裂과 長盛이 特徵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木氣의 때에 힘과 勇氣가 特長이었다면 分裂과 長盛은 木氣에서 分家한 것에 不過한 것이다. 同時에 모든 慾心이 木에서 旺盛을 끝마치고 그 火氣의 때에 이르면 점점 稀薄하여지게 되는 것이다.

  裏面의 陽氣가 火氣의 때에 이르게 되면 外面으로 向하여 相當한 部分까지 나왔다는 證據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形質은 自然히 軟弱하여져서 外部의 形과 裏面의 陽은 그들의 抗爭에서 形體가 陽氣 앞에 判定敗를 당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힘이 弱化되는 反面에 外面은 더욱 華麗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萬一 植物에서 觀察한다면 꽃피고 가지가 벌어지는 時期인 것이오 人生 一代에서 보면 靑年期인 것이다.(形과 氣의 互相對立하는 關係는 五行生克에서 論하겠음)

  그러므로 이것을 四時의 配屬에서 보면 여름인 것이며 또한 南方인 것이니 여름이야말로 外形을 보면 萬華方暢한 때이지만 內面에서 보면 힘의 空虛에로 가는 것이며 同時에 生長이 끝나고 老衰로 접어들여는 準備段階에 不過한 것이다.

  이와 같이 宇宙의 發展은(發展은 木火의 때에만 있음) 離別을 告하고 一大轉換을 일으켜야 할 때 金火의 相爭을 中和시키기 위하여 土氣가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다. 土

  위에서 木火의 生長過程에 對해 말했다. 萬一 宇宙間에 있는 모든 生長分裂이 無制限으로 發展한다고 하면 人間의 키가 數千 尺에 달할 수 있는 것이고 樹木의 높이가 하늘을 찌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天道에는 반드시 마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發展은 生長過程에 있어서 盲目的인 前進이 아니고 發展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은 마디에 不過한 것이고 이제 火氣가 끝날 무렵에 들어오게 되는 바의 土氣야말로 眞實로 큰 마디인 것이다.

  그러므로 萬物은 여기에서 生長을 停止하고 되는 것이니 그것은 첫째로 生長에서 成遂에로 轉換하려는 것이요 둘째로 金火의 相爭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金火相爭이란 무엇인가?

  天道의 運行은 木火에서 無限分裂을 하게 되면 分列은 一旦 中止되고 다시금 그가 이미 分裂한 바를 綜合하여야하는 것이니 이 綜合作用은 金水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火氣의 分裂을 金水의 氣運으로 綜合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五行氣中에서도 金과 火의 性質은 유달리 서로 容納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金氣로서 火氣를 包圍하려하지만 火의 分裂은 金氣를 녹여버리기가 일수인 것이다.

  이것을 金火相爭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土氣가 中間에 介入하여서 이러한 弊端을 防止하는 것이 그의 任務이니 天道에 비록 四大節이 있다고 하더라도 土(未)만 더 큰 마디는 없는 것이다.(詳細는 土化作用을 說明할 때에)

  그러면 그 土氣는 果然 如何한 것일까?

  그 기운은 和順하여 不偏不黨하는 絶對的인 中和之氣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生長인 發展의 便도 아니며 成遂인 收藏의 便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作用이 陽的인 動도 아니고 陰的인 靜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公正한 存在이기 때문에 木火의 無制限한 發展을 防止할 수 있고 다시 成遂에로 誘導할 수 있는 唯一한 適格者인 것이다. 그러므로 土氣만은 外向性도 없고 內向性도 없기 때문에 또한 金火의 調節者로 登場하게 되는 것이다. 土는 그밖에 또 萬物을 繁殖시키며 살찌게 하는 일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木火金水와 갈이 一方的인 特徵에서가 아니고 土의 自然的인 調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例를 든다면 살찐다는 것은 마음의 平和에서 오는 것이고 또 肥 한다는 것은 細胞가 잘 繁殖하기 때문이란 것을 吾人은 知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마음의 平和나 細胞의 繁殖은 전혀 土의 平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宇宙의 調和도 오직 土氣의 이와 같은 自然性에 依해서 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土氣는 어디에 그의 발판이 있는 것일까? 勿論 火氣에 그의 基盤이 있는 것이다. 즉 火氣가 無限分裂할 때 생기는 副産物이 바로 土氣이므로 土는 有形 無形의 中間的인 存在인 것이다. 長夏가 土에 配屬되며 方位는 中央에 位하여서 萬物의 繁殖에 寄與하는 것도 또한 그의 自然的 功用인 것이다.

      (註) 自然이란 것은 其然(陽的 行動)과 不然(陰的 行動)의 中心이므로 그 特性은 絶對 公正한 것이다.

  그러나 土는 반드시 火氣의 때에만 생기는 것도 아니고 비록 大小의 差는 있을망정 四季에는 언제나 土氣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四季의 末은 土用(土의 作用)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그것은 後에 詳述)

  이와 갈이 土氣는 五行中에 가장 複雜微妙한 內容을 지니고 있으므로 簡單한 說明으로써 理解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第二節에 土化作用이란 題目에서 詳述하기로 하겠다.

  다만 여기에서는 土는 木火에서 發展했던 것을 金水에서 收藏할 수 있도록 媒介하며 同時에 金火相爭을 調和하는 至公無私한 存在이며 따라서 五行中에서 萬物을 살리게 하고 繁殖시키는 唯一한 存在라는 것만 論及하려는 것이다.

    라. 金

  宇宙의 變化는 土氣의 公正無私한 黃婆(土의 仲媒調和하는 것을 黃婆의 作用이라고 함) 作用에 依하여 木火의 作用에 終止符를 찍게 하고 金水가 作用하게 하는 것이 이른바 陰陽作用의 四大節인데 이와 같이 收藏단계로 접어드는 最初의 段階가 바로 金氣의 作用인 것이다.

  그러므로 金과 木은 그 性質이 全혀 反對이니 木의 때에 있어서는 裏陽이 表面으로 脫出하려는 發展의 最初段階였지민 金氣의 境遇는 表陽이 內部에 收藏되어지려는 靜歸運行의 始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萬物은 春氣에 있어서는 그 힘이 表面으로 湧出하려고 하지만 가을에는 內部에 潛入하여 고요히 잠들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봄에는 萬物의 外殼이 軟化하여지는 것이나 가을에는 外殼이 漸漸 硬變하여지게 되는 것이다. 吾人이 봄에는 被服을 漸漸 엷게 입으며 가을이 되면 차츰 두껍게 입는 것은 從天道의 原理에 依함이요 또 靑少年은 皮膚毛髮이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壯老期에 접어들게 되면 그 容貌 筋骨이 거칠고 추하게 마련인 것은 避할 수 없는 金木의 反復作用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金木의 反復作用은 金火의 散布作用에서 媒介되었던 것이며 金火의 散布作用은 土에 依해서 媒介되었던 것이다.(金火의 散布作用은 「寅申相火」에서 論하겠음)

  그러므로 自然數도 여기에서부터 順行하게 되는 것이니 여기 대해서는 다음 「數의 變化」를 말할 때 詳述할 것이다.

      (註) ([散]字의 뜻은 火의 無限分裂을 意味하는 것이오 [布]字의 뜻은 金氣가 綜合作用을 始作할 때 表面부터 統一이 形成되어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金氣는 木氣와는 全然 反對되는 作用을 하는 것이니 그 基盤을 土에 두고 있으며 그 性質은 堅斂을 爲主로 하므로 人間의 慾心도 金氣에서 始作하여 木氣에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金氣는 季節로 보면 가을에 配屬되며 方位로 보면 西方이고 人間一代에서 보면 老壯期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收斂을 象徵하는 것이니 그것은 다음에 올 凝固作用을 爲한 準備인 것이다.

    마. 水

  萬物의 收斂作用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은 金氣作用을 거쳐서 비로소 收藏作用을 完成시키는 것이다.

  金氣는 表面을 堅斂시키는 일을 하였지만 水氣에 이르면 그 深度가 濃厚하여져서 內部까지 凝固시키고 애오라지 萬物의 生命인 核만은 本來의 軟性대로 保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가 生命의 倉庫이며 또 精神의 집인 것이다. 이것이 躍動의 本源이며 形貌의 母體인 것을 어찌하리오.

  이와 같은 水氣에 依하여 萬象은 精神과 肉體를 얻어서 그의 一代를 華麗하게 裝飾하는 것이며 또다시 歸藏하고 마는 玄微한 寶庫인 것이다. 象數의 硏究目標는 實로 여기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數千年 哲學史가 메마른 筆鋒으로 表皮만 더듬고 만 것도 畢竟은 玄玄妙妙한 이 境地를 開拓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東西의 古代 聖哲들의 한마디 한마디 속에는 言中有骨이었던 것을! 이것이 바로 「물」의 意志이며 坎의 變化인줄을 누가 알았으리요.

  却說 이와 같이 玄妙한 水氣는 오로지 自己의 全部를 犧牲하면서 淸楚한 봄과 華麗한 여름을 꾸미고 莊嚴한 가을과 嚴肅한 겨울을 만들어서 自己保存을 反復하는 無窮한 大宇宙의 本質이며 同時에 現實存在를 超越한 基本存在로서 永世無窮토록 이 宇宙에 君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물이야말로 宇宙의 本質이 아니고 무엇이리오

  「탈레스」(Thales)가 「宇宙의 本質은 물이다」라고 외친 한마디가 眞實로 蔑視의 對象일 것인가? 尊敬의 對象일 것인가?

  經驗은 眞理만큼 眞實한 경우가 많다.

  나는 數年 前에 어떤 園藝家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百合꽃을 크리스마스 때에 내면 좋은 장사가 되는데 그것을 그 때에 알맞게 내는 方法으로서 六七月에 百合의 뿌리를 七八度 가량의 冷室에 넣었다가 溫床에 栽培하면 그때에 꽃이 滿發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勿論 그는 우연한 經驗에서 體得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왜 그렇게 되는 理由는 모른다. 그러나 宇宙의 變化現象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보면 水氣作用의 功德인 것을 어찌하리요.

  嗚呼라 偉大한 眞理가 어찌 百合 한 송이에만 適用되리오!! 天地萬物이 모두 그 품에서 나(生)서 또다시 그 품안에 돌아가고야 말 것을!!

  銃알은 다져질수록 멀리 나가게 마련이며 한 알의 씨앗도 겨울의 凝固作用을 얻은 후에야 강한 싹을 내지 않는가

  그러므로 水氣의 活動은 萬物의 活動이며 萬物의 活動은 또한 水氣의 活動인 것이다.

  다만 北方 水氣를 四時에 配屬할 때 겨울에 속하는 것은 그의 本位를 말함에 不過한 것이다. 水氣는 火氣와는 性質이 相反되어서 發展의 敵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相殘하는 곳에서 萬物의 生命이 保存되는 絶對的인 必要惡인 것이다.(詳細는 水火一體論에서 밝히겠음)

  (附言) 以上 論述한 바를 硏究함에 있어서 相當히 理解되지 않는 곳이 많을 것이나 다만 理解되지 않는 곳을 熟讀하고 熟考하면서 前進하면 講義가 進行함에 따라서 절로 解得하게 되는 것이니 이 點을 留意하면 된다. 筆鋒으로서 舌端을 代行하려하니 紙面과 時間이 모든 것을 許諾하지 않는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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