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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17 살아있는 영물 개태사 가마솥
  2. 2008.05.17 고려의 개국사찰 '개태사'


능청망청 부처와 개태사 철확

지나치기 쉬운 능청 망청 부처 여기서 ‘능청 망청 부처님’을 만나 보자.
 

 
 
 
  ▲ 요사채가 있는 우주당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전에 축대 옆에 소박하고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부처님이 앉아 있다. 이것이 바로 능청망청 부처님.  
 
요사채가 있는 우주당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전에 축대 옆에 소박하고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부처님이 앉아 있다. 마당 한 편을 지키고 있는 이름 모를 석불좌 상이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고 있어 지나가는 이가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치기 마련이다.

잘 쳐다보면 작은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고 수줍어하는 척하면서 장난을 쳐주었으면 하는 듯한데, 이 부처상을 보니 왠지 쓰다듬어 주고 싶은 느낌이 든다.

사실 쓰다듬어주기 보다는 한대 쥐어박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누군가 머리위에 작은 돌을 얹혀놓고 기원한 듯 한데, 그래서 그런지 작은 돌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다. 이런 아기자기한 부처상을 만든 장인은 누구일까?

자꾸 쳐다보여지지만 아직도 봐야 할 것이 많으니 축대 옆 계단을 올라가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자.

오른쪽 구석에 전각에 웬 쇠붙이가 잘 모셔져 있다.

가마솥-살아있는 영물

이것이 그 유명한 이름하여 ‘철확(鐵鑊)’, 개태사 가마솥이다.
충남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철확은 우주정 안에 잘 모셔져 있다.

“어느 해의 일이다. 큰 스님 한 분이 개태사를 찾아와서 얼마 후 대홍수가 나서 본당의 부처님이 위험할 것이니 이 솥으로 본당에 이르는 물길을 막으면 불상은 안전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스님들은 가마솥으로 본당 앞을 막았다. 과연 대홍수가 났는데 불상은 안전했지만 가마솥은 떠내려가 지금의 고양리 다리 근처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 쇠 솥으로 제방을 쌓으면 수해를 막아주고 풍년이 들게 한다고 한다. 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 가마솥의 뚜껑은 인근 천의 어디 엔가에 묻혀 있어 지금도 흐린 날에는 ‘윙’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 살아있는 영물이라 불리우는 개태사 철확  
 
이 가마솥은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국을 끓이던 것으로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나 된다고 한다 .
조선시대에 절이 없어지면서 벌판에 방치된 채 있던 것을, 가뭄 때 솥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으로 옮겼다가, 연산 읍에 옮겨진 후 서쪽냇가에 묻혀 있다가 발굴하여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서 열린 경성박람회에 출품되기도 했던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 후 연산공원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개태사의 경내에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다.

일본인에 의해 1435년 부산까지 반출해갔다가 솥에서 울려 나오는 큰 소리 때문에 반출되지 못하고, 도둑의 손에 고철로 부서질 때도 뇌성 같은 소리와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면서 날이 갑자기 어두워져 모두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그때 파손된 부분이 현재 테두리에 남아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온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니 철확이 지닌 어떤 불가사의 한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온몸으로 역사의 찬란함과 부상 속에서 우뚝 선 우리의 역사 그자체이다. 역시 대단한 물건이다.

그래서 그런지, 논산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그 세 가지를 보았느냐는 질문을 한단다.

   
 
  ▲ 강경 미내다리 ⓒ논산시청  
 
하나는 강경 미내 다리이고, 둘은 개태사철확이며, 셋째는 은진미륵이다.
강경 미내 다리도 잘 복원해 놓았으니 한번 찾아가서 보기를 권한다.

 
 
 
  ▲ 관촉사의 은진미륵  
 
시간이 나면 양촌에 있는 쌍계사를 찾아가서 대웅전 전면 5칸에 조각된 작품도 보기를 권한다.
이것도 가마솥과 같이 경성박람회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이다.

이런 영험한 철확, 미내 다리, 은진미륵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천리를 멀다하고 찾아왔다고 한다. 철확을 붙잡고 한 가지 소원만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니 그 파란만장한 역사만큼이나 효험이 있었던 것 같다.

이 가마솥은 1천여 명이 먹을 수 있는 밥솥으로써 규모도 놀랍지만, 천년이 넘도록 금간 흔적도 없다.
이 정도 크기면 한번 밥을 하면 몇 백 명이 먹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인근 주택가 담벼락 밑에 묻혀 있는 석조와 함께 그만큼 개태사가 웅장하였고, 그 기세가 대단하였음을 잘 보여주는 고려정신의 혼이 남아있는 멋진 작품이다.

그러면 이러한 거대한 철확이 단순히 밥이나 국만 끓여 먹는 도구였을까?

식사도구로만 쓰이기에는 너무 큰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절에는 유명한 ‘수기(守其)’ 스님이 계셨다.
고려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으로 고종 19년(1232) 불타버리자 강화로 도읍을 옮긴 최우의 무신 정권은 초조대장경 판각 작업에 곧 착수하게 되고 총감독으로 논산 개태사의 승통이신 수기 대사를 지명한다.

바로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총지휘를 하신분이 아니던가?

수기화상이 교정의 총책임을 맡고, 학식이 높은 일군의 고승들이 참여하였고 선승, 문인 지식인이 참석하였는데 특히 이규보가 이곳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는 개태사조전원문을 썼다.
수기대사는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바로 대장경의 목록작성과 판본비교와 교정을 보게 된다.

그것은 학문의 중도적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대장경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화상의 빼어나게 높은 학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수기화상은 이러한 작업의 여정을 일일이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 30권이다.

그렇다면 수기스님이 계신 개태사는 이미 고려조에서 경판을 만드는 기술이 많이 축척되어 있는 절이었을 것 같다. 전성기의 개태사에는 천여 명의 대중이 주석하였다고 하니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경판조성사업의 인적자원이 확보되어 있었다.

또한 당대의 명승 의천(義天)과 균여(均如) 등이 간경(刊經)과 강경(講經)을 위해 이곳에 왕래하였고 한편으로 대장경의 조성에 큰 역할을 맡았던 수기(守其)와 해인사의 간경을 주도했던 천기(天其) 등의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 주석하였다고 하였음을 볼 때, 이는 개태사가 고려 때 활발했던 경판조성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쉽게도 현존하는 개태사의 경판은 한 점뿐이라고 하는데 아쉽다.

이러한 대장경 경판을 만드는 과정은 지리산이나 완도 등의 자작나무를 벌채하여 삼년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어 다시 소금물을 넣은 가마솥에 찐 뒤 그늘에서 말리고 대패질을 한 후, 경문을 붓으로 쓰고 그에 따라 새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큰 가마솥의 용도도  대장경판의 나무를 삼고 쪄내는데 일부 활용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 개태사 철확에는 소원을 빌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던진 동전이 잔뜩 담겨져 있다.  
 
개태사 가마솥 앞에서 수기스님과 대장경을 떠 올리면서 난국의 시대에 위기를 탈출하고자 만드는 대장경판각 작업에서 얼마나 힘든 노력과 정성이 들어갔을까 자문해 본다.

이렇게 나라가 위험에 빠졌을 때도 각자 위치에서 최선의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선조를 가진 우리가 정말 자랑스럽다. 이 개태사는 수기스님의 비밀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을까?

온몸에 난 상처는 역시 보기가 흉한 것일까, 온몸으로 고생하고 소임을 다한 결과가 만신창이 몸만 남아 있어 이렇듯 훌륭한 유물임에도 법주사에 있는 철확은 보물로 지정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대접을 받는 것 같다.

그렇지만 ‘얽은 구멍에 슬기 들었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얼굴은 흉하지만 마음속에 지혜를 간직하고 있으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마음의 보물’ 이다.

그래도 어떠하랴 온몸에서 내뿜는 기운은 상당하니 드러내지 않는 은은함은 천년을 가도 영원한 것이니 나는 그 맛에 개태사를 찾고 소원을 빌면서 그 찬란한 고려정신을 느끼기 위하여  개태사를 자주 찾는다.

이외에 개태사가 대단히 커다란 사찰이었음을 알리는 대형 북이 있는데 이것은 위 ‘개태사석조’가 있는 민가에서 집을 짓던 중 발견되어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명칭은 ‘금고(金鼓)’로 금속으로 만든 북으로 큼직하게 연꽃 16개를 돌린 다음 각각의 꽃 안에 개구리 모양의 동물을 양각한 것이 돋보이는데 직경이 무려 102㎝로 그 동안 알려진 고려시대 금고 중에서 가장 크다. 번성했던 개태사의 고려시대 당시 사세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유물로 알려져 있다.

가마솥에 소원을 빌었으면 이제 옆에 있는 팔각정으로 지어진 건물에 눈길을 돌려보자.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96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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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속의 감나무와 요사채

<전설 속의 감나무>

 
 
 
  ▲ 개태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나오는 전설속의 감나무. 1970년대에는 이 감나무 가지에서 엄나무가 자랐으나 지난 1995년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최근에 다시 이름모를 넝쿨이 자라고 있다.(사진)  
 
오른쪽에 커다란 감나무가 한그루가 서있다.
그저 맹하니 서있다.

물론 가을되면 홍시도 주렁주렁 열린다.
그때는 정말 보기도 좋다.

예전에 감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로 엄나무가 뚫고 나와 자라고 있어 매우 희귀한 일로 커다란 화제가 되었는데 몇 년 전만해도 이 엄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이를 보라고 사다리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으니 도깨비에게 속은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으니, “일제하에서 독립될 당시 주지승의 어머니인 김광영 여사가 이 절에서 수도를 하면서 매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던 중 계시를 받았는데, 그 계시에는 감나무에서 엄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하면 미륵불이 출현한 것을 알라고 했다는 것이다.
 

   
 
  ▲ 전설속의 감나무 가지 사이로 자라고 있는 이름모를 넝쿨의 모습  
 
수십 년이 넘은 감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1970년대에 그 감나무의 굵은 가지 사이에서 엄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 감나무에 엄나무를 접목한 사실도 없고 또한 자라나는 그 부위에 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종류가 다른 두 나무가 한 뿌리에서 동시에 자라고 있어 화제가 된 것이다. 

엄나무는 1995년경에 죽었고 이 감나무 단목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으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실이 없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라 죽은 엄나무 고목이 감나무가지 사이에 거시기 만하게 불쑥 솟아 있었는데 이것을 보라고 사다리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엄나무가 감나무를 아래서 몸을 파고 들어가 감나무 윗가지 사이로 자라고 있었으니, 이런 것은 자꾸 부연해보면 엄나무가 감나무를 뚫고 들어가는 뿌리의 모습이 남녀의 성행위와 흡사하여 보는 이가 민망스러웠는데, 지금은 아쉽지만 그런 것도 없다.

불교신도 분들은 종교성지에서 웬 음란한 생각을 하느냐고 힐난할지도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 이 뿌리에서 자라던 엄나무를 태워버린 흔적이 있었던 것을 보면 피장파장이다. ‘아쉬워 엄나무 방석’이라고 어쩔 수 없이 베임을 당한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여기에 웬 넝쿨이 자라고 있다.
많이도 자랐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궁금하다.

‘TV는 신비 속으로’에 나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조용히 미소를 머금어 본다.

상상의 자유는 무한대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활력소를 찾는 것이 여정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원래 나무 두 가지가 서로 휘어 감고 자라는 것을 연리목(連理木)이라 하여 우리 조상들은 이것이 상서럽고 좋은 기운을 준다고 하여 인위적으로 만들곤 하였다. 한 몸이 된 이상 수분과 영양도 함께 나누면서 그렇게 한 나무인 양 살아간다. 마치 부부가 포옹한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여 옛날부터 부부의 금실을 표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나무는 원래 동티나는 나무인지라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엄나무가 자랐으리라 생각되지만 가을에 와서 감 서리나 해야겠다.

<깊은 뜻이 담긴 요사채>

 
 
 
  ▲ 뫼산(山)자 형태를 하고 있는 우주당의 모습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 있다. 3동으로 지어졌다. 여기도 '3'의 형상화가 나온다. 그런데 건물이 조금 이상하다. 3동으로 된 집이 약간 튀어 나와 보이는데 설계가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눈을 뜨고 잘 보면 이 건물이 바로 우주당이라고 하는 건물로 ‘뫼산(山)’자 형태를 하고 있다.
사찰 종무소와 다실, 요사채 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일설에는 석조삼존불의 세분부처가 뫼산(山)자 형태요.

이곳의 우주당의 요사채의 3동건물이 뫼산(山)자인 바 서로 어우러져 뫼산(山)자 형태로 가람배치를 한 것이라고도 한다.

1950년 초에 뫼산(山)자 형의 우주당 건물을 음력 5월 5일까지 급히 짓게 하여 관운장을 봉안했다고 하는데, 이는 다가올 환란인 6·25전쟁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예지력이 있는 분들이 당시에는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 건물은 그것을 다시 산뜻하게 복원해 놓았다.

요사채 한 채를 건축하는 데도 깊은 뜻이 있었으니, 역시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나라 사랑하는 법도 항상 물질로만 하는 것임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이것도 예지력 있는 분들의 뜻이 있어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니 호국 사찰로서의 전통은 계속 되는 것 같다.

요즈음은 약간의 예지력만 생기면 전 국민을 상대로 국운이니 예언이니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분들이 참 많다. 그렇지만 이러한 능력은 자신의 수행도구로서 삼아야 하는 것이 일차적이며, 진정으로 나라의 운명에 급격한 변화가 예지된다면 보이지 않는 처방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닐까?

세상 이치를 읽는 능력을 받은 것은 축복일수도 있지만 그만큼 커다란 의무가 부과 되는 법이 아닐는지, 국민들의 삶만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최근에 지어진 건물은 가운데 건물이 좀 더 튀어 나와야 뫼산 자 형태가 되는데 일자로 되어 있다.
바랜 옛 사진을 보면 일자 형태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뫼산 자 형태가 아니고 순수하게 ‘3’의 형상이 아니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지어진 건물이라고 지나치는 것들이 이렇게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 줄을 누가 알겠는가?

‘천생팔자가 누릉밥이라’ 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대단케 여기지 않는 누릉밥 정도라도 여행이 무엇인가? 하찮은 것에도 의미를 달고 찾아보는 것 그것이 진정 기쁨을 누리는 여행의 백미인 것이다.

‘찰찰(察察)이 불찰(不察)이니’ 무엇에 한번 맛을 붙이면 끈덕지게 떨어지기 싫어함으로 알기에 노력하고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그 보는 재미란 것이 야릇한 춘화도를 살짝 보는 것만큼이나 짜릿한 것을 어찌하랴!

여기에 있는 그 유명한 미륵삼존불도 가운데 부처님이 키가 더 크다. 이 역시 뫼산(山)이 아닌가?
그리고 이 요사채 건물도 뫼산(山)이니, 그렇다면 쌍권총을 가진 것이 아닌가?
완전히 대칭되는 두 가지 산이 있으니 산산(山山)!

세 분이 한자리에 모셔지면 뫼산(山)자가 된다는 이치를 깨달으라는 의미이며 산(山)이 온전히 형성되어야 비로소 출(出)자가 형성되고, 출(出)자가 형성되어야 미륵삼존불이 세상에 출(出)할 수가 있다는 것인데.

뫼산(山)자로 서서 계신 미륵삼존불 중  한분은 구천상제이고 한분은 옥황상제라고 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한분은 아직도 몰라 두 분만으로는 뫼산(山)자가 형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두 분으로는 뫼산(山)자를 온전히 형성되지 못하여 출(出)자가 형성될 수가 없고, 때문에 미륵삼존불이 세상에 출(出)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미륵삼존불이 출(出)하기 위해서는 인세에 오신 마지막 한 분의 정체를 더 밝혀 모셔야만 된다는 이치가 개태사의 이 미륵삼존불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한 분은 누구냐’ 하는 것! 그것을 찾는 여행,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길이 아닐까?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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