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산'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5.15 두계천-청계천만 명당수인가?


   
 
  ▲ 대전-논산간 국도상에서 바라본 우렁산의 모습. 일제가 철길을 만들기 위해 산을 파헤쳐 반쪽만 남은 형상을 하고 있다.  
 
지금 서울에 청계천을 가지고 명당수라고 하고 있고 최근에 여기를 새로 정비를 해놓고 있는데 물을 다시 끌어 올려 흘러내리게 하였는데, 깨끗해서 보기는 좋았다.
그렇지만 지나친 인위성이 너무 많고, 물이 위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게 아니고 역류하고 있으니......

정도전과 하륜 등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도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고 하면서 천도를 결사반대 했다.

정도전과 하륜은 당대의 풍수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신도 안 천도를 반대하지 않았으니 기존의 권문세가들이 속으로는 끓었겠지만 표면으로는 반대를 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륜, 그는 최영의 요동공격을 반대하다가 양주로 귀양 갔다 가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했다. 그는 이색·정몽주·이숭인·권근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쉬파리도 천리마 꼬리에 붙어야 된다’고, 정치적 변신을 하여 조선건국에 참여하게 된다.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공을 세우고 우정승으로 오르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개경의 기존의 권문세가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며 개경에서 떨어진 신도 안 천도를 반대하면서 한양천도를 주장하는 선봉에 서게 된다.

이러한 하륜의 맹렬한 반대로 조정대신들은 공방 끝에 하륜의 주장을 채택해 계룡산천도는 백지화 되고 말게 된다.

신도 안이 개경과 멀리 떨어져 많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오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이로 인해 남부지방 사람들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하니 그놈의 기득권이 무엇인지?

하륜은 신도 안 두계천을 “계룡산의 산은 건방(乾方‘서북쪽)으로부터 오고 흘러나가는 물이 손방(巽方 동남쪽)으로 흘러가니 땅의 기운을 약화시켜 나라가 곧 쇠망할 곳이라고 험하게 표현을 하고 있는데 두계천이 그렇게 볼품없는 개천인가?

당시 권문세가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개경에서 이곳까지 오기 힘들면 오기 힘들다고 하면 될 것을 권문세가의 눈총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억지소리를 하고 있으니 너무 한 것 같다.

'계룡산의 산맥이 건방에서 온다는 주장은 상대적이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계룡산의 맥은 오히려 덕유산에 이어져 있다고 본다. 즉 1:25만 지형도에서 확인하면 산맥이 남쪽으로는 연속되나 서북쪽은 연속되지 않을뿐더러 금강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고 있다.' (지리학 제29호 주경식 ‘계룡산 신도안의 지리적 현황’)

그나저나 하륜을 중심으로 한 권문세가들의 견강부회가 이 정도였고 이런 사람들이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으니 조선 내내 나라가 시끄러웠음은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청계천이 그렇게 좋은 하천인가를 살펴보자.

청계천은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로 북악산·인왕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箭串橋] 근처에서 중랑천(中浪川)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청계천이란 이름은 일제 초기에 서울의 지명을 개칭할 때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말기까지 개천으로만 불렸다.

한경지락의[산천 개천조]에도 서울 안팎의 산천들과 개천을 동열에 다루면서 개성의 천류도 개천이라 했으며 '송경지천수(松京之川水) 역명개천(亦名開川) 사시이기명이(似是移其名耳)'라는 주석을 달고 있는데, 즉, 서울의 개천이라는 이름은 개성에서 옮겨온 것 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니 당시 권문세가들이 개경을 얻지 잊으리오.
못 잊으니까 지명까지도 옮겨 온 것이다.
당시 태조가 이를 얼마나 못 마땅이 여겼을까?
그래서 무참한 살육이 자행된 것이 아닌가?

도성 내에 있었던 청계천은 수시로 하천이 범람하여 주민 생활에 위해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조선 초기 명당수로서 그 용도를 둘러싼 논쟁을 거치다 세종대에 개천의 용도는 하수도로 낙착되었다.

결국은 영조는 1760년 2월  20만 인원을 동원한 57일간의 대역사의 준설사업을 벌리기 까지 한다.

더구나 청계천의 끝 부분 수구인 현재 광희문-동대문운동장-관묘 일대는 벌어 질대로 벌어져 있다.
그래서 가산(假山)도 만들고 관묘도 만들었다니 ‘다 가서 문지방을 못 넘어 간다’.고 힘들여서 일은 하였으나 완전히 끝을 맺지 못하고 헛수고만 꼴이 아닌가?

이런 강이 풍수상 올바른 것인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권문세가들의 억지에 조선시대 내내 나라가 정쟁이다, 왜란이다 해서 혼란스럽고 현재를 사는 우리 후손까지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도 이러한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덮었다가 다시 걷어내고 새로운 개천을 만들었다고 하고 있으니 결국 애물단지로 전락한 강이 아닌가? 박정희대통령 때는 청계천을 덮은 것은 뜻이 있어 그랬다고도 하는데... 지금도 물이 순리대로 흐르는가? 지금처럼 한강 물을 억지로 역류시켜 수원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 청계천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역수(逆水)하는 물 기운이므로 한 나라 도읍지의 명당 수(明堂水)가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보통 물은 우리나라 지형 상 동쪽이 높아 대부분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동류서출(東流西出)이 일반적이나 이와 반대로 명당 수는 서쪽에서 동류는 흐르는 곳을 많이 지목해서 명당수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면 청계천만 명당수인가?

이중환은‘ 계룡산은 오관산보다 웅장하지 못하고 삼각산보다 수려하지는 못하나 내맥(來脈)이 멀고 골이 깊어 정기(精氣)를 함축하였다. 그 서쪽에 있는 용연(龍淵)은 매우 깊고 크며 그 물이 넘쳐서 시내가 되는데 이것은 개성과 한양에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신도 안에도 숫용추와 암용추에서 흐르는 두계천을 본류로 하여, 용동천과 서쪽의 석계천 물이 계룡대 1정문으로 가는 계룡사거리의 신도안교 밑에서 합쳐져서(合江) 남선리 군인아파트 앞을 지나 남쪽으로 흐른다.
신도 안 입구인 양정 고개 부근에서 남동쪽으로 나선형으로 방향을 바꾸어 두계리와 대전시 유성구 송정동 방동사이를 흐른다.

두계천도 길이나 폭 그리고 주변면적이 청계천과 서울의 4대문 안에 못 지 않다. 사방 6-7킬로미터가 된다.
신도 안은 남쪽의 입구에서 보아도 구릉 군으로 시계가 차단되어 하나의 산골짜기로만 보여 져 피난처로도 좋은 곳이며, 군사상 많은 이점이 있는 곳이다.
 
이강도 물이 비교적 풍부하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명당수인 것이다.
두계천과 여기에 이르는 금강은 백제의 수도인 공주와 부여를 키우고 고려왕건의 기반지로 그리고 대전이라는 커다란 신흥도시를 일구어 내지 않았는가? 결국은 인식의 차이일 뿐이다.

   
 
  ▲ 두계천이 돌아나오는 마을을 지나 다시 국도로 나오는 길에서 바라본 우렁산  
 

   
 
  ▲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 본 우렁산의 모습  
 

두계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 위왕산의 꼬리이며 수구막이 해당되는 대전시의 ‘무도리’를 지나게 된다. 무도리는 물돌이가 변해서 나온 지명 같은데 바로 두계천의 수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위왕산은 신도안의 수구막이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산으로 신도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임금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위왕산(衛王山) 혹은 위왕산(爲王山)으로 부른다고 한다.

신도 안 부근의 모든 산들이 신도 안을 향해 굽히고 있는 모습인데 비해 이 산만은 신도 안을 등지고 있는데 그것은 수구막이를 호위하는 대장이 말을 탄 자세로 외곽을 경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그런 이치로 하여 이 산이 있음으로서 신도 안은 도읍터의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라 한다.

일본은 역시 예외 없이 이곳의 능선을 깎아내고 철도를 관통시켜 수구를 없애버렸다.
지금도 여기를 가보면 멋있는 능선을 저렇게 양쪽으로 깎아내 보기가 흉하다.
이 산은 한문표기로 위왕산이지만 우렁산으로 불린다.

   
 
  ▲ 일본은 우렁산의 능선을 깎아내고 철도를 관통시켜 수구를 없애버렸다.  
 

   
 
  ▲ 일본은 우렁산의 능선을 깎아내고 철도를 관통시켜 수구를 없애버렸다. 이로인해 우렁산은 보기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본이 이곳에 철길을 내면서 발파작업을 하여 산허리가 잘려나가면서 ‘우렁우렁’ 울었다고 해서 우렁산이라고 불리는데 호남고속도로도 이 옆으로 달려가니 또다시 ‘우렁우렁’ 울어서 이 다리도 우렁 다리라고 한다. 지금은 논산 간 국도도 옆으로 나있으니 얼마나 더 ‘우렁우렁’ 울어야 할까?
신도안천의 수구막이를 하기에는 벅찬 것일까?

우렁산 밑에 S자형의 멋진 노루벌인, 무도리를 지난 물은 흑석리를 지나 갑천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달고는 대전 시내를 관통해서 지나가다 금강을 만나 개명을 하고는 멀고 먼 여행을 시작한다.

알고 보면 한강보다 더 긴 강이요 바로 인구에 회자되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천하명당 터가 형성되는 장소를 만드는 강이다.

그러면 이 두계천의 명당자리는 어디일까?

   
 
  ▲ 두계천의 명당자리로 알려진 유성구 방동마을의 모습  
 
두계리에 있는 계룡역사 건너편 유성구 방동의 땅인 것 같다.
계룡시 입장에서는 좀 아쉽지만 최대의 명당 터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런지 여기에는 묘지가 상당히 많다. 지금은 개발제한구역이라 잘된 듯싶다.

이러한 좋은 땅도 세 동 마을 안으로 새로운 국도가 뚫리면서 계룡산의 한축을 무참히 뚫어 버렸는데 차도 별반  통행하지 않는 길을 굳이 길이 나야할 필요성도 없는 지역에 무엇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서 공사를 강행한 것인지... 다행히 큰길은 세 동 마을의 골짜기로 비켜나기는 해서 다행이다.
이렇게 남아도는 공사비를 좀 제대로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언젠가는 성북동을 가로 질러 대전서남부와 연결되는 도로가 뚫리면, 대전시방면으로 그나마 남아 흐르는 기운마저 차단될 것 같은데 편리하다고 그렇게 기뻐할만한 일도 아닐 듯싶다. 

우리나라 기운은 산천을 통해서 흐른다.
이제는 무조건 절단 내고 파헤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 땅은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신의 자식과 후손을 위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들이 살아갈 자연환경도 우리가 보존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후손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영성이 담긴 심미안에 의해 국토개발을 할 수 있는 공간은 남겨놓아야 하지 않을까?

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모든 개발을 해야만 하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욕심 사납다.

다행이 개경의 세도가의 욕심으로 수도가 한양으로 정해져 신도 안은 잘 지켜지게 되었으니 이것만은 후손들에게 자신 있게 남겨놓는 최후의 명당 터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