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충청 산하를 지키자-계룡의 산(계룡·향적산등)

기사입력 2008-06-03 23:12


계룡산과 향적산, 천마산 등이 감싸고 있는 계룡시는 말 그대로 상록 도시이다.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고 유구한 세월을 동고동락한 역사의 산증인 인 계룡의 산. 이들 산에 대해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은 개발은 가급적 자제하고 인간과 자연이 상생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 개발이 상록 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계룡시에 우선시 되고 있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 꿈틀대는 계룡의 산을 자연 그대로 보존하고 잘 가꿔 후손에 물려주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일 것이다.

▲계룡산 (천황봉)

계룡산의 주봉이자 배달민족의 영봉인 천황봉은 해발 845.1m로 국운을 굽어 살피고 있는 듯한 자세로 산의 경관이 수려,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대표하는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정상에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 하늘에 제를 올리는 산제단(山祭壇)이 있고 이 곳에 서면 신선이 노니는 듯한 계룡산의 전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는 계룡산이 그다지 높지 않아 운무(雲霧)가 별로 없고 주변의 산들이 상대적으로 낮아 시야를 별로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계룡시 어디에서 보아도 선뜻 이마에 닿을 듯이 솟아 있는 천황봉은 계절따라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 변화무쌍함은 대자연의 신비 자체로 웅장한 산봉우리 위에 찬란한 해가 솟아 오르면 보는 이의 가슴에 용기와 희망을 주기에 충분해 계룡시는 매년 이 곳에서 새해 첫 날 해맞이 행사를 열고 있다.

천황봉은 자태가 백성을 품안에 안고 있는 제왕의 모습이라 하여 상제봉(上帝峰)이라고도 했으며, 상봉(上峰) 혹은 제자봉(帝字峰) 이라 불리기도 했다. 제자봉은 부남리와 석계리 뒤편에 있는 산봉우리를 지칭하는데 이 봉우리를 경계로 암용추와 숫용추가 좌청룡, 우백호의 전설을 품고 있기도 하다.

또 대궐터의 주봉이기도 했던 제자봉은 신도안 신흥종교가 번성했을 당시 교주들과 신도들이 가장 신성히 여겨 수시로 찾아 간바 있으며 무속 ,민속종교 등의 교인들과 등산객들의 기도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현재는 이 곳 일대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출입에 제한이 있으며 예전에 이곳을 즐겨 찾던 산악인들은 지금까지 그 향수(鄕愁)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한편 천황봉 정상에는 1948년에 설치한 철탑이 우뚝 솟아 미관을 저해하고 있다. 이 철탑의 제거와 함께 일상적인 등산로의 개방은 우리가 머지않아 풀어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

▲향적산 (국사봉)

계룡산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등산코스로 유명한 국사봉은 종교연구가에게 있어 제2의 신도안이자 한국 최고의 무속촌이었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할 때 친히 올라가 국사를 논했다하여 국사봉이라 유래된 이 곳은 두마면 향한리와 도곡리 일대의 산으로 계룡산맥의 남쪽 능선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이다.

해발 574m로 일명 향적산(香積山)이라고도 불리는 국사봉은 향기로운 땀이 쌓여 있는 산이자 공부와 도를 깨우치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또 국사봉에는 일부(一夫) 김항 선생이 정역(正易) 공부를 하였다는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있고 맨재소류지 위쪽으로는 국제선원 무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국사봉을 오르면 멀리 동쪽으로 대전시가 한눈에 들어오며, 가까이 눈 아래로는 계룡대와 계룡시가지가 훤히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는 연천봉 능선이, 북쪽으로는 천황봉과 머리봉이 지척이며, 남쪽으로는 연산면으로 뻗어나간 국사봉 능선이 용의 허리와 흡사한 모습으로 굽이쳐 있다.

한편 국사봉 정상에는 오(五), 화(火), 취(娶), 일(一) 등 네 글자가 음각된 오행비와 함께 천지창운비라는 비석이 있는데 이 비의 크기는 2m정도로 동서남북 각 면에 천계황지(天鷄黃地), 불(佛), 남두육성(南斗六星), 북두칠성(北斗七星)이란 글씨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이는 한반도가 1000년 이상 동방예의지국으로 유지되도록 하는 단군성조의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국사봉의 맨재골 최상단에는 약수와 같은 샘물이 난다하여 약수암이 있고 이는 논산, 연산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계룡지역에는 지역민들이 쉽게 찾고 있는 천마산이 금암동을 아우르며 친근하게 다가서고 있다. 천마산 정상에는 천마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수려한 천마산을 쉽게 볼 수 있고 동쪽으로는 계룡시 금암 신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며 서남쪽으로는 백제 계백장군의 충혼이 어린 황산벌이 멀리 보인다.

천마산 서편 기슭으로 왕건이 하늘의 도움으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개태사가 자리하고 있는 등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처럼 어느 한 곳 민족 역사와 숨결이 배어있지 않은 곳이 없는게 계룡의 산이다. 계룡의 산을 제대로 보존하고 소중히 가꿔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계룡=이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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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부 선생이 계룡산에서 공부 할 당시 우리나라는 몇 차례의 전쟁을 치루면서 민심은 피폐해지고 서구열강과 일제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여성과 하층민의 삶은 형편없었고 아무런 희망이 없어 엄청난 시대적 모순에 몸부림치고 있었을 때이다.

이런 시절에 새로운 시대를 내다보고 다가올 시대를 ‘정역팔괘(正易八卦)’라는 단순한 프로그램에 압축시켜 표현했으니, 지구상의 축의 변화에 따는 총체적인 변화가 따르고 지축이 바뀌므로  후천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하였다.

억압과 패권, 상극의 시대에서 평화와 조화, 협동과 평등의 시대를, 남성우위에서 여성의 지위가 우월해지는 새로운 시대, 노예의 해방, 부녀자들의 해방 ,남녀평등,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도래와 사회개혁의 대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구원의 희망을 안겨주려고 했었다.

이것이 강증산의 상생과 최제우의 동학혁명을 거쳐 커다란 민주주의의 한 뿌리를 형성했으면서도 아깝게도 조선말 기득권에 사로잡힌 수구적인 권력집단의 이익도모와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군을 끌어들이고 결국 그 뜻이 꺽 이면서 커다란 사회혁명까지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들이 보고 이루고자 했던 후천의 실제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은 그 후 유럽과 미국사람들이다. 평등과 자유와 창조와 행복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사회’가 그것이다.

그 당시 이러한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나라는 한국뿐이었으나 그것이 실패로 끝나게 되었을지라도 새로운 문명의 메시지는 동학을 통해 그것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더 큰 형태로 승화되게 된 것이다.

어렵게 민주주의를 얻었지만 김일부 선생이 외친 평등과 자유의 세계는 그 이상의 영성적이고 심미안적인 질적인 민주주의를 거쳐야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니 감성, 형제애, 솜씨 등 우리가 가진 응축된 힘을 새로운 영성의 미학으로 문화로 예술로 승화시켜내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이고, 김일부 선생이나, 강중산, 최시형, 최제우, 박중빈, 전봉준, 동학 그리고 당시의 의로운 선조들이 진정으로 원하고자 했던 가슴과 영혼이 살아나는 새로운 시대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한바다 著 3천년의 약속 중에서...>

우리가 짧은 사이에 이러한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애초부터 간직 되어 온 우리의 민주주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발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이를 위해 광주민주화운동과 6.10만세를 거치는 동안에 민주화를 위해 희생되신 모든 분들의 영혼에 감사를 드려야 할 차례이다.

김일부, 이 분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가슴을 열어주고 녹여줄 수 있는 진실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미래의 희망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힘이 있었던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계룡산은 이러한 위대한 사상이 나올 수 있는 에너지 터인 것이다.  

김일부 선생이 여성지위의 우월시대를 제시한 이래 동학의 최시형선생은 여성들을 중시하여 ‘바로 저들이 한울’이라고 선언했고, 강증산선생은 태안읍내에서 좁은 길에 들어섰다가 한 여인과 마주치고는 그는 여인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고 한다.

이 때만 해도 여자들이 길을 비켜야 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인지라 그 여자는 못내 송구스러워하며 길을 지나갔다. 제자들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지난 선천시대에는 여자가 길을 비켜주었지만 앞으로 올 후천시대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길을 양보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당시로는 대단한 혁명적인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요즈음은 여성우위의 후천시대가 훌쩍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4월 27일 국회에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호적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고 호주를 중심으로 가(家)단위로 호적을 편제하던 방식을 국민 개인별로 등록기준지에 따라 ‘가족관계 등록부 ’ 가 만들어져 대법원에서 이에 필요한 규정을 정비했으니 여성분들은 호주제 폐지가 가져올 양성 평등사회에 대한 설레는 기대감이 클 것으로 보인다.

여성분들이 이러한 남녀평등을 넘어선 여성 우월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고 이러한 ‘호주제 폐지는 단순한 신분등록제의 변화가 아니라 부계혈통제가 생물학적, 정치적, 도덕적으로 틀려서 없앤 거구나.’ 하면서 본적 없는 본적아 사라져라, 나는 나, 성씨는 자유롭게라면서 쟁취감에 도취되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가정의 평화, 자식의 교육문제, 남녀 간의 협동을 도외시 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된다.

이제는 ‘딸 셋을 키우면 기둥뿌리가 팬다’, ‘시집살이 못하면 동네 개가 다 업신여긴다’, ‘딸자식 치운다’라는 소리가 없어질 터이고 그동안 억눌려 왔던 여성들이 폭발할 시점도 되었으니 이제는 술 좀 자제하고 궁중마님에게 잘 보여야 하겠다.

그렇지만 여성분들은 이러한 미래를 보고 이를 실천하려고 했던 훌륭한 선조 분들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보고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시간이 난다면 가족화합 차원에서 최제우를 모시는 ‘수운교’도 찾아보기를 권한다.

   
 
  ▲ 최제우를 모시는 '수운교'의 모습. 이곳은 계룡산맥의 줄기인 금병산 아래 자운대가 있는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수운교의 전경(사진 왼쪽이 수운교종각, 나머지가 수운교 도솔천), 수운교종각, 수운석종, 수운본부 입구의 모습    ⓒ오마이뉴스  
 
계룡산맥의 줄기인 금병산 아래 자운대가 있는 초입에 있으니 찾기가 쉽다.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별나게 되어있고 건물내부의 배치형태도 특이하고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며 때리면 쇠 소리가 나는 ‘석종’이 특이하다.

쇠 소리 나는 돌은 철분이 많아서 나는 소리인데 경남 밀양시 만어사에는 커다란 물고기 모양의 돌이 서있고, 주변골짜기 너덜지대에는 가득 메운 돌들이 있는데 이 돌들을 작은 돌로 두드리면 맑은 소리의 종소리가 난다.

이렇듯이 우리에게 위대한 사상을 남긴 김일부는 그러면 과연 득도한 후 어찌 되었을까?

차길진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따금씩 일부가 천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며 섭섭해 한다. 국사봉에서 정역에 천착, 후천개벽의 이치를 깨친 반인 반신(半人半神)급 학자 김일부(1826~1898)를 보고 싶다는 얘기다. 생전의 김일부를 상제(上帝)와 만나게 해주는 특혜를 베풀었을 정도로 할머니는 그를 아낀다.”
결국 그는 무언가를 얻어 후천시대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의 묘지는 현재 당골에 있다.
논산시 양촌면 남선리 당골 마을에는 예전에 충남대 총장을 역임하신 이정호 박사 등이 앞장서서 묘지를 조성해 놓았는데 한눈에 보아도 좋은 자리인 것 같다. 뒤 주봉이 오도산(五道山) 이다.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당골 마을의 촌로 한분이 탁 쪼그리고 않으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이곳에는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예전에 어떤 스님한분이 지나가면서 이곳에 쉬더니 이 마을이 앞에 흐르는 논산 천과 함께 활궁의 시위대에 해당하여 인물이 많이 나겠네요. 하고는 가버렸어.

그래서 후에 마을회관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이 말을 했더니 뭐 그러냐고 면박을 받았는데 그것이 그게 아니더라고 이곳에는 김일부 선생만 나신 것이 아니라 송영무 해군참모총장이 나셨고 또 건양대학교를 설립한 김희수 총장의 부모묘역이 바로 이 옆에 있어요. 매년 풍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보고가곤 하지요. 이곳이 당골인 이유는 옛날에 여기 마을 앞으로 큰물이 들어차서 배가 다닐 때 이 앞산에 배를 묶어두었다고 합디다. 그래서 배를 묶어두는 당골이라고  했다지요”

‘당골’이란 지명은 아무래도 단군과 관계가 있는 듯 한데 자랑할 만도 한곳이다.
계속 쪼그리고 듣고 있으려니 재미는 있지만 쪼그리고 않는 자세에 익숙하지 않아 그만 내려 왔다.
언제 시간이 나면 한 번 더 찾아가 좋은 말씀을 들어보아야 하겠다.

부연하면 이곳 남산리는 교사선생님 40여분이 배출되어서 마을 자랑거리가 된 곳이기도 하니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는 참 인물이 많이 나는 지역인 것 같다.

시간이 나면 한번 들러서 좋은 산기운도 마시고 김일부 선생 묘소 주변에는 둥굴레가 만개했으니 적당히 취사해서 차를 끓여 먹어도 좋을 듯하다.

이쯤 했으면 이제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시던 향적산방(香積山房)을 둘러보아야 하지 않을까?

충남대 총장을 지낸 이정호(李正浩)선생도 1950년대 중반에 이 터에다 작은 사택을 지어놓고 제자들과 함께 정역공부를 했는데, 이 향적산방 앞에 보이는 산이 아주 보기 좋은 토산이다.
지금도 옛집이 남아있다. 예전에는 산제당(山祭堂)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는 가끔 김일부 선생과 관련된 모임이 열린다고 하는데 이곳을 양정  고개 초입에 계룡암이라는 암자를 가지고 있었던 ‘임덕순’보살이 지키고 있다.

 
 
 
  ▲ 거북바위와 용바위  
 
이곳에 거북바위동굴과 용바위가 있다.
김일부 선생은 이곳이 계룡산의 중심이고 한국의 중심이자 나아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했다.
거북바위는 바로 김일부 선생이 크게 깨달은 장소로 반 동굴로 되어있다.

여기가 지구역사가 생긴 이래  모든 운명의 파동이 공명으로 전해 내려오는 장소라고 해피타오라는 정신적인 단체를 이끌고 있는 ‘한바다’가 말한 곳이다.

짬을 내서 조용히 동굴 속에 앉아 명상에 잠기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지나치게 콘크리트로 내부를 정리 해놓았는데 좀 어색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평반에 물 담은 듯’ 시원하면서도 차분한 마음이 든다.

아래 용바위는 누군가 기다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 정역연구자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렇듯이 김일부 선생이 가르친 사상은 동학을 통하여 세계에 알려지고 민주주의 형성에 큰 모템이 되었고 이것이 현재에도 우리의 정신사적인 모태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와 이를 실천할 동학사상을 배태한 정신사적으로 위대한 사상을 가진 학자를 쉽게 지나치는 세태에 한숨이 나올 법도 하지만 이제라도 이분의 뜻을 기리고 고양시키는 것은 계룡시민이 할 일이 아닐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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