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논산간 국도상에서 바라본 우렁산의 모습. 일제가 철길을 만들기 위해 산을 파헤쳐 반쪽만 남은 형상을 하고 있다.  
 
지금 서울에 청계천을 가지고 명당수라고 하고 있고 최근에 여기를 새로 정비를 해놓고 있는데 물을 다시 끌어 올려 흘러내리게 하였는데, 깨끗해서 보기는 좋았다.
그렇지만 지나친 인위성이 너무 많고, 물이 위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게 아니고 역류하고 있으니......

정도전과 하륜 등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도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고 하면서 천도를 결사반대 했다.

정도전과 하륜은 당대의 풍수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신도 안 천도를 반대하지 않았으니 기존의 권문세가들이 속으로는 끓었겠지만 표면으로는 반대를 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륜, 그는 최영의 요동공격을 반대하다가 양주로 귀양 갔다 가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했다. 그는 이색·정몽주·이숭인·권근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쉬파리도 천리마 꼬리에 붙어야 된다’고, 정치적 변신을 하여 조선건국에 참여하게 된다.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공을 세우고 우정승으로 오르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개경의 기존의 권문세가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며 개경에서 떨어진 신도 안 천도를 반대하면서 한양천도를 주장하는 선봉에 서게 된다.

이러한 하륜의 맹렬한 반대로 조정대신들은 공방 끝에 하륜의 주장을 채택해 계룡산천도는 백지화 되고 말게 된다.

신도 안이 개경과 멀리 떨어져 많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오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이로 인해 남부지방 사람들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하니 그놈의 기득권이 무엇인지?

하륜은 신도 안 두계천을 “계룡산의 산은 건방(乾方‘서북쪽)으로부터 오고 흘러나가는 물이 손방(巽方 동남쪽)으로 흘러가니 땅의 기운을 약화시켜 나라가 곧 쇠망할 곳이라고 험하게 표현을 하고 있는데 두계천이 그렇게 볼품없는 개천인가?

당시 권문세가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개경에서 이곳까지 오기 힘들면 오기 힘들다고 하면 될 것을 권문세가의 눈총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억지소리를 하고 있으니 너무 한 것 같다.

'계룡산의 산맥이 건방에서 온다는 주장은 상대적이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계룡산의 맥은 오히려 덕유산에 이어져 있다고 본다. 즉 1:25만 지형도에서 확인하면 산맥이 남쪽으로는 연속되나 서북쪽은 연속되지 않을뿐더러 금강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고 있다.' (지리학 제29호 주경식 ‘계룡산 신도안의 지리적 현황’)

그나저나 하륜을 중심으로 한 권문세가들의 견강부회가 이 정도였고 이런 사람들이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으니 조선 내내 나라가 시끄러웠음은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청계천이 그렇게 좋은 하천인가를 살펴보자.

청계천은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로 북악산·인왕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箭串橋] 근처에서 중랑천(中浪川)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청계천이란 이름은 일제 초기에 서울의 지명을 개칭할 때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말기까지 개천으로만 불렸다.

한경지락의[산천 개천조]에도 서울 안팎의 산천들과 개천을 동열에 다루면서 개성의 천류도 개천이라 했으며 '송경지천수(松京之川水) 역명개천(亦名開川) 사시이기명이(似是移其名耳)'라는 주석을 달고 있는데, 즉, 서울의 개천이라는 이름은 개성에서 옮겨온 것 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니 당시 권문세가들이 개경을 얻지 잊으리오.
못 잊으니까 지명까지도 옮겨 온 것이다.
당시 태조가 이를 얼마나 못 마땅이 여겼을까?
그래서 무참한 살육이 자행된 것이 아닌가?

도성 내에 있었던 청계천은 수시로 하천이 범람하여 주민 생활에 위해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조선 초기 명당수로서 그 용도를 둘러싼 논쟁을 거치다 세종대에 개천의 용도는 하수도로 낙착되었다.

결국은 영조는 1760년 2월  20만 인원을 동원한 57일간의 대역사의 준설사업을 벌리기 까지 한다.

더구나 청계천의 끝 부분 수구인 현재 광희문-동대문운동장-관묘 일대는 벌어 질대로 벌어져 있다.
그래서 가산(假山)도 만들고 관묘도 만들었다니 ‘다 가서 문지방을 못 넘어 간다’.고 힘들여서 일은 하였으나 완전히 끝을 맺지 못하고 헛수고만 꼴이 아닌가?

이런 강이 풍수상 올바른 것인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권문세가들의 억지에 조선시대 내내 나라가 정쟁이다, 왜란이다 해서 혼란스럽고 현재를 사는 우리 후손까지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도 이러한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덮었다가 다시 걷어내고 새로운 개천을 만들었다고 하고 있으니 결국 애물단지로 전락한 강이 아닌가? 박정희대통령 때는 청계천을 덮은 것은 뜻이 있어 그랬다고도 하는데... 지금도 물이 순리대로 흐르는가? 지금처럼 한강 물을 억지로 역류시켜 수원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 청계천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역수(逆水)하는 물 기운이므로 한 나라 도읍지의 명당 수(明堂水)가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보통 물은 우리나라 지형 상 동쪽이 높아 대부분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동류서출(東流西出)이 일반적이나 이와 반대로 명당 수는 서쪽에서 동류는 흐르는 곳을 많이 지목해서 명당수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면 청계천만 명당수인가?

이중환은‘ 계룡산은 오관산보다 웅장하지 못하고 삼각산보다 수려하지는 못하나 내맥(來脈)이 멀고 골이 깊어 정기(精氣)를 함축하였다. 그 서쪽에 있는 용연(龍淵)은 매우 깊고 크며 그 물이 넘쳐서 시내가 되는데 이것은 개성과 한양에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신도 안에도 숫용추와 암용추에서 흐르는 두계천을 본류로 하여, 용동천과 서쪽의 석계천 물이 계룡대 1정문으로 가는 계룡사거리의 신도안교 밑에서 합쳐져서(合江) 남선리 군인아파트 앞을 지나 남쪽으로 흐른다.
신도 안 입구인 양정 고개 부근에서 남동쪽으로 나선형으로 방향을 바꾸어 두계리와 대전시 유성구 송정동 방동사이를 흐른다.

두계천도 길이나 폭 그리고 주변면적이 청계천과 서울의 4대문 안에 못 지 않다. 사방 6-7킬로미터가 된다.
신도 안은 남쪽의 입구에서 보아도 구릉 군으로 시계가 차단되어 하나의 산골짜기로만 보여 져 피난처로도 좋은 곳이며, 군사상 많은 이점이 있는 곳이다.
 
이강도 물이 비교적 풍부하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명당수인 것이다.
두계천과 여기에 이르는 금강은 백제의 수도인 공주와 부여를 키우고 고려왕건의 기반지로 그리고 대전이라는 커다란 신흥도시를 일구어 내지 않았는가? 결국은 인식의 차이일 뿐이다.

   
 
  ▲ 두계천이 돌아나오는 마을을 지나 다시 국도로 나오는 길에서 바라본 우렁산  
 

   
 
  ▲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 본 우렁산의 모습  
 

두계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 위왕산의 꼬리이며 수구막이 해당되는 대전시의 ‘무도리’를 지나게 된다. 무도리는 물돌이가 변해서 나온 지명 같은데 바로 두계천의 수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위왕산은 신도안의 수구막이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산으로 신도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임금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위왕산(衛王山) 혹은 위왕산(爲王山)으로 부른다고 한다.

신도 안 부근의 모든 산들이 신도 안을 향해 굽히고 있는 모습인데 비해 이 산만은 신도 안을 등지고 있는데 그것은 수구막이를 호위하는 대장이 말을 탄 자세로 외곽을 경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그런 이치로 하여 이 산이 있음으로서 신도 안은 도읍터의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라 한다.

일본은 역시 예외 없이 이곳의 능선을 깎아내고 철도를 관통시켜 수구를 없애버렸다.
지금도 여기를 가보면 멋있는 능선을 저렇게 양쪽으로 깎아내 보기가 흉하다.
이 산은 한문표기로 위왕산이지만 우렁산으로 불린다.

   
 
  ▲ 일본은 우렁산의 능선을 깎아내고 철도를 관통시켜 수구를 없애버렸다.  
 

   
 
  ▲ 일본은 우렁산의 능선을 깎아내고 철도를 관통시켜 수구를 없애버렸다. 이로인해 우렁산은 보기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본이 이곳에 철길을 내면서 발파작업을 하여 산허리가 잘려나가면서 ‘우렁우렁’ 울었다고 해서 우렁산이라고 불리는데 호남고속도로도 이 옆으로 달려가니 또다시 ‘우렁우렁’ 울어서 이 다리도 우렁 다리라고 한다. 지금은 논산 간 국도도 옆으로 나있으니 얼마나 더 ‘우렁우렁’ 울어야 할까?
신도안천의 수구막이를 하기에는 벅찬 것일까?

우렁산 밑에 S자형의 멋진 노루벌인, 무도리를 지난 물은 흑석리를 지나 갑천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달고는 대전 시내를 관통해서 지나가다 금강을 만나 개명을 하고는 멀고 먼 여행을 시작한다.

알고 보면 한강보다 더 긴 강이요 바로 인구에 회자되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천하명당 터가 형성되는 장소를 만드는 강이다.

그러면 이 두계천의 명당자리는 어디일까?

   
 
  ▲ 두계천의 명당자리로 알려진 유성구 방동마을의 모습  
 
두계리에 있는 계룡역사 건너편 유성구 방동의 땅인 것 같다.
계룡시 입장에서는 좀 아쉽지만 최대의 명당 터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런지 여기에는 묘지가 상당히 많다. 지금은 개발제한구역이라 잘된 듯싶다.

이러한 좋은 땅도 세 동 마을 안으로 새로운 국도가 뚫리면서 계룡산의 한축을 무참히 뚫어 버렸는데 차도 별반  통행하지 않는 길을 굳이 길이 나야할 필요성도 없는 지역에 무엇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서 공사를 강행한 것인지... 다행히 큰길은 세 동 마을의 골짜기로 비켜나기는 해서 다행이다.
이렇게 남아도는 공사비를 좀 제대로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언젠가는 성북동을 가로 질러 대전서남부와 연결되는 도로가 뚫리면, 대전시방면으로 그나마 남아 흐르는 기운마저 차단될 것 같은데 편리하다고 그렇게 기뻐할만한 일도 아닐 듯싶다. 

우리나라 기운은 산천을 통해서 흐른다.
이제는 무조건 절단 내고 파헤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 땅은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신의 자식과 후손을 위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들이 살아갈 자연환경도 우리가 보존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후손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영성이 담긴 심미안에 의해 국토개발을 할 수 있는 공간은 남겨놓아야 하지 않을까?

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모든 개발을 해야만 하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욕심 사납다.

다행이 개경의 세도가의 욕심으로 수도가 한양으로 정해져 신도 안은 잘 지켜지게 되었으니 이것만은 후손들에게 자신 있게 남겨놓는 최후의 명당 터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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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지대안도 중앙총본부] 천지대안도 중앙총본부 간판이 걸려 있는 모습. 지아이앤 뉴스 사옥과 인접해 있다.  
 
여기서(양정고개) 계룡굴다리 밑을 지나 10여 미터 쯤 가면 잠깐 살펴보고 가야 할 종교단체가 하나 있다. 
평범한 집이지만, 마침 이곳에 지아이앤 뉴스가 사옥으로 쓰고 있으니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천지대안도 건물과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는 지아이앤 뉴스 사옥. 왼쪽 옆으로 천지대안도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제주도와 관련이 많은 천지대안도(天地大安道)가 있는 곳이다.
일반인은 물론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 조차 생소하리라 본다.

   
 
  ▲ 건물형태도 특이하지만 자세히 보면 천지대안도라는 글씨가 써 있고 외벽에는 알 수 없는 문향이 그려져 있다. 엄사우체국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계룡시에 와서 엄사리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흰 색깔의 건물에 유난히 시선이 가곤했다.
건물형태도 특이하지만 자세히 보면 천지대안도라는 글씨가 써 있고 외벽에는 알 수 없는 문향이 그려져 있어 처음에는 유교재단에서 지은 건물로 알고 있었는데 금암동에 별도의 유교본부건물이 있어 궁금증이 더해 갔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천지대안도라는 종교단체였던 것이다.
내가 볼 때 수운의 후천세계와 일맥 통하는 것 같은데 제주도와 인연이 있는 종교라 제주도에 교인이 많으며, 가정의례는 지극히 간소하고 윤리도덕에 따라 행하고 있다.

이곳 분들은 생식을 즐겨하시는 고로 이곳의 종단을 실제 이끌고 계시는 ‘최재화’ 회장을 뵐 때마다 그 옹골 한 자세가 신선 같은 느낌이 들 곤 한다.
계룡대가 들어서기 전에는 숫용추 주변에 상당한 규모의 성전도 있었다고 한다.

이 곳 천지대안도 뒤의 정상 능선 바로 아래가 그 유명한 ‘도깨비 터’이다.

도깨비 터에 들어선 건물은 대부분 종교 관련 건물들이다.
두마면 엄사리 음절마을, 도깨비 터로 알려진 이곳에는 종교 관련 건물들이 유난히 많아 그러한 풍수의 기본개념에 충실한 땅이 아닐까 여기는 이들이 많다.
‘엄사(奄寺)’란 행정구역명 또한 바로 이 ‘음절’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음절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도깨비 터로 알려지게 됐을까?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오면서 13년째 이장을 맡아온 이효택 씨에 따르면 원래 이곳은 1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농촌마을이었다.
그 이전에는 이곳에 음절이란 큰 절이 있었다는데, 언제 생겨서 언제 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에 계룡대(삼군본부)가 들어서면서 이곳 음절마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씨는 “집 다섯 채 지으면 그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되더니 지금은 교회가 족히 100개는 된다 ”고 말했다.
교회뿐만 아니다.

마을에는 종단이 서로 다른 절들, 요가원, 점집,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신흥종교 건물들이 혼재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외지인들이 와서 주민들에게 집터를 팔라고 졸라대는데, 대개는 절이나 교회를 짓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들 건물의 유형도 다양하다.
우람한 고층건물을 자랑하는 교회, 시멘트로 지은 사찰, 슬레이트 지붕이 얹힌 건물이 이색적인 민족종교 사원, 일반 주택에 온갖 부적으로 도배해놓은 점집…. 일요일이면 더욱 볼 만하다.
찬송가, 목탁, 염불, 주문 소리들이 아우러져 그야말로 도깨비들 잔칫날 같다.

조용하던 시골마을이 왜 이렇게 변해가는 것일까?
원래 도깨비 터였는데 이제야 그 땅이 제대로 쓰이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옛날에 이 마을에 있었다는 ‘음절’이란 큰 절이 망한 것만 보아도 이곳 터가 절터로서 적합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일반 주택에 차려진 점집. 그러나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계룡대가 들어서면서 그 인근에 있던 많은 종교 건물들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도깨비 터로 알려진 이곳에 대체지로 선택한 듯하다”                     
(김두규저 복을 부르는 풍수기행 중에서)

그런데 여기 도깨비 터에 한옥 집 한 채가 당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같이 간 한상교 선생은 이 일대에서 이 지점이 땅의 기운이 제일 강하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독특하게도 대문입구에는 윤리연구원(倫理硏究院)이라는 현판을 걸어 놓고 건물초입에는 계룡정사(鷄龍精舍)라고 쓰여 있다.
 
사라져가는 국혼과 민족 얼을 고취시키며 무너진 윤리관을 재조명하기 위하여 성재(誠齋) 봉기종(奉奇鍾)선생께서 1970년 윤리연구원을 창립하고, 한학과 윤리,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인재를 규합하여 인격도야와 덕성함양을 하고 계신다. 현재 삼백여 명의 한의사와 백여 명의 교수를 배출하여 각계에서 활동 중이다. 연구원 활동인원은 전국 약 1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15년 전부터는 현재의 계룡시 두마면 연구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하며, 군 장교들과 한의사, 인근 대학의 교수 등을 상대로 한학과 윤리,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만나 뵈오니 처음부터 무릎을 끊고 앉아 손님을 대하는 것이 꿋꿋한 선비의 자세가 보이신다.
봉기종 선생은 돌아가신 어머니께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상을 차려 올렸고 문안인사도 드린 분으로 고령에도 불구하고 요즘 보기 드문 시묘(侍墓·부모 거상 중 그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3년간 사는 일) 생활을 해온 분이다.

봉기종 선생은 “나 스스로는 결코 효자가 아니지만,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본보기를 보여 달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시묘생활을 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인의예지의 본성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 사상을 제창하고 널리 펴는 데 남은 생을 바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여기를 지나 능선을 타고 가다보면 웰빙 열풍으로 계룡웰빙타운 찜질방이 나온다.
예전에는 여기에 약수암이 있었고 물이 참 좋아 많은 분들이 건강을 위해 마셨다고 한다.

   
 
  ▲ [약수암] 국사봉 맨재골 최상단에 있으며, 약수암의 샘은 연산ㆍ논산천의 발원지이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국사봉에 오르게 되는데 국사봉 등산로는 이쪽 방향이 오르기가 편하지만 우리가 찾아가는 향적산방은 우회해야 하는 관계로 지금은 엄사중학교 옆으로 큰 길이 시원하게 뚫려있으니 이 길을 통하여 가면 다소 편하다.

신도 안 일대에는 아직도 이러한 다양한 종교단체와 학문들을 연구하는 기관들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그러한 종교나 학문 연구하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정신을 밖으로 들어내도록 유도해주고 각 종교나 학문 연구하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가르침을 널리 알릴 수만 있다면 황폐화 되어 가는 우리 심성에 차분한 한줄기 영양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신도 안 땅은 특정의 종교인의 땅도 아니요 본래 다양한 종교와 학문이 잉태되어 태어나고 성장하며 그 중에는 커다랗게 성장하기도 하며 때로는 소멸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배양하는 지역이 아닌가?

더욱 이들을 양성화시켜 국민의 영성을 키우고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장으로서, 때로는 민속과 종교 그리고 문화가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배가 된다면 세계적인 ‘종교자생지’라는 문화콘텐츠로 좋은 호재를 가지고 있는 계룡시가 되지 않을 까 생각해본다.

부남리나 남선리 일대의 부지를 계룡시에서 매입해서, 물론 예산이 수반되는 거라 시일을 요하지만 계룡대 설치를 위한 6·20사업 이전에 이곳에 존재하다 철거된 각종 종교 단체들을 다시 모아 ‘종교촌’을 형성한다면 종교체험과 선인들의 종교생활의 경험과 지혜를 다시 볼 수 있는 멋진 장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치단체들은 없는 축제도 만들어서 쓸데없는 예산낭비를 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성공하는 축제도 많이 있는 반면, 이러한 종교타운을 형성하고 종교페스티발을 해본다면 종교인의 화합의 장소이자 우리 모두가 마음을 여는 장소로 최선의 움막 터가 될 수도 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종교 센터가 논산시 상월에 건설된다면 계룡은 기회를 놓치고 또 하나의 영적 메커니즘을 잃어버리게 될까 안타깝다.
좋은 의료시설과 종교 촌이 형성된다면 그야말로 살기 좋은 이상향의 신도  안이 건설 될 수 있다고 보여 지는데 우리 모두가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상록도시는 이러한 영성을 다스리고 좋은 의료시설을 갖춤으로써 더 빛나는 것이 아닐까?

자연을 보호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이지만 왠지 허공에 떠드는 메아리 같기만 하니, 하기야 대전시는 시를 상징하는 마크로 ‘It's Daejeon’이라고 알리는 것 같은데 뭔 소리인지, 상록도시는 그것보다는 뚜렷해 보이기는 하는데, 글쎄?
너무 공허한 트레이드마크들 같다.

신도 안에 사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진실 된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엄사리 도깨비 터에는 하루가 다르게 각종 종교단체들이 들어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 [국사봉 안내도] 맨재골 소류지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도  
 

   
 
  ▲ [향적산 등산안내도 간판] 최근의 간판모습이다.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없기 때문에 조심해서 엄사중학교 옆길을 따라 철길  옆으로 계속 내려가면서 멀리 바라보면 향적봉이 보인다.

언젠가는 이곳 철길 건너 야산도 벌목되고 깎여서 커다란 아파트 숲으로 덮여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살아갈 것이지만 결국 옛날의 마음의 고향은 점차 잊혀 가지 않겠는가?

   
 
  ▲ 국사봉의 시발점이 되는 향적산묵집  
 
향적산방에 오르기 전 좌측 철길다리 아래로 동구나무가 푸르르 게 자라고 있는데 그 앞에 향적산 묵 집이 보인다. 이 집은 옻닭이 별미라 동동주 한잔을 걸치면 그 짜릿함에 온몸이 울부짖는다.
집터도 괜찮아 류보선 시의원도 나왔으니 터의 값은 했을 것 같다.

   
 
  ▲ [오행비와 천지창운비] 국사봉 정상에 세워져 있다. 한반도가 1천년 이상 동방예의지국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단군 성조의 뜻이 적혀 있어 무속인들의 기도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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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이앤 뉴스에서는 변금섭 법무사와 공동으로 계룡시민들에게 계룡의 유적지와 사찰, 인물 등에 대해 낱낱이 파헤쳐봄으로써 계룡의 진정한 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8월부터 30여회에 걸쳐 「계룡의 묘미」에 대해 연재하고자 합니다.

계룡산에 진입하는 초입이 되는 양정고개로부터 출발하여 사계 김장생 선생에 이르기까지 계룡의 역사와 일화는 물론 먹거리까지 계룡시의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 글은 특정 종교와 무관하게 쓴 자료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편집자주]

글 : 변금섭   사진/편집 : 지아이앤 뉴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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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 고개-이제 출발해보자

 
 
 
  ▲ 지금의 양정고개의 모습. 지금은 대전-논산을 잇는 국도가 지나가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힘들게 통행하던 높은 고개였던 것 같다. 예전 사진이 없는 게 안타깝다.  
 
양정 고개, 양정치(兩政峙)는 모든 이들에게 계룡산에 진입하는 초입이 되었다.

진안 마이산과 대둔산에서 올라오는 금남정맥이 천호산을 넘어서 계룡지구대에서 잠시 쉬고 양정 고개를 지나고 비사벌 아파트를 거쳐 ‘천지대안도’ 건물을 지나면서, 도깨비 터의 중심인 ‘계룡정사’에서 오래 머물다 능선을 타고 ‘계룡웰빙타운’(예전에 이 자리에는 약사암이 있었다.)을 통하고 235봉을 타면 계룡산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힘을 내서 내달리고 나니 부여의 부소산에서 그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종착역에 이르게 된다.
   
예전부터 양정 고개는 고개 마루가 높아 힘들게 통행하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경사가 너무 심해 증기기관차가 늘 퍼지기 일쑤여서 오르다가 못 올라가면 후진해서 이곳 연산역으로 되돌아가서 물을 넣고 다시 올라가곤 하였다고 하는데 연산역에는 아직도 그 당시의 급수탑이 남아있다.

 
 
 
  ▲ 양정삼거리의 모습. 양정고개에는 현재 논산경찰서 계룡지구대와 양정 시외버스터미널 등이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룡산에 진입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곳에 어염집들이 많이 있었으니 지금도 이 골목에 들어서면 지금은 다소 낡았지만 제법 큰 여관 건물이며 한약방, 간이역과 각종 음식점들이 옛날의 호화스러움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곳으로 철길이 나고 새로 대전 논산 간에 도로가 뚫리면서 흐르는 금남정맥이 흩어지고 많이 약해진 느낌이 든다.

양정 고개에는 이러한 전설이 전래되어 오고 있다.

옛날 어느 해에 가뭄이 극심하여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이었는데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나라 일을 돌보지 않고 서로 모함을 해가며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이 그치질 않고 계속되니 백성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이 때 경상도에 사는 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열심히 글을 읽어 크게 출세할 것을 결심하고 노력하였는데 세상일 돌아가는 것을 보고 책을 팽개친 채 출세할 것을 포기하고 유람 길에 나섰다.
그는 여기 저기 발길 닿는 대로 다니면서 세상을 살폈다.

농부들은 먹을 것이 없어 저렇게 굶주리고 있는데 아직도 조정에서는 싸움질뿐이니 걱정이로구나. 한탄하면서 이거 나라에 무슨 정변이라도 일어나야 백성들이 살지, 큰일이구나 하면서 걱정을 하였다.

그는 금강산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와서 보니 딴 세상 같았다.
차라리 이곳에서 평생 동안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었다.

그는 한 절간에 머무르면서 며칠간을 쉬다가 하루는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한 장수가 나타나더니 그래 쓸 만한 놈들은 세상을 피하여 산속에 쳐 박혀 있고 몹쓸 놈들은 임금님 옆에서 서로 제가 잘났다고 야단들이니, 허참. 세상 잘 돌아가는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수 앞에 나가 앉으며 대체 당신은 누구요?
누구 시온 데 저에게 그런 말씀을...하고 물었다.

그 장수는 나는 충청도 사는 장수인데 당신을 계속 따라다니고 있소.
당신은 여기 있을 사람이 못되니 어서 빨리 충청도에 있는 계룡산으로 가시오.
그때 내가 말 하리다 하고 사라졌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꿈속에 나타났던 그 장수는 아무래도 이 어지러운 세상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 이튿날 날이 밝자 여장을 차리고 충청도 계룡산으로 갔다.
충청도에 들어서서 지금의 두계 고을에 다다르자 밤이 어두워졌다.

피곤한 여독을 풀기 위하여 그 근처에 있는 주막집에서 하루 저녁을 유숙하는데 꿈속에 먼저 나타났던 그 장수가 또 나타났다.
잘 왔소. 그런데 이것 참 큰일이오.
이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으려면 꼭 정씨가 나와야 하는데 나오질 않고 있고, 그것도 정씨 한 사람이 아니라 정씨 여덟 사람이 나와서 이 세상을 평정해 놓고 그 여덟 사람 중 두 사람이 싸우다가 한사람이 죽어야만 이 나라가 평온해 지는데 여덟 사람의 정씨도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참으로 큰일이요. 근심스러워 하면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 여덟 사람의 정씨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고 있소? 하고 그 선비가 묻자 그걸 알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겠소, 누구인지 한 사람도 모르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여기로 오라고 했소? 하며 선비는 장수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야 당신은 정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요.

단 한 가지 알려 드리리다. 정씨 두 사람이 나타날 때에는 금강 물줄기가 변하여 논산 강경으로 흐르게 될 것이요. 웅진 땅 계룡산 밑을 흘러서 말이요. 하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요? 하는데 그 장수는 또 어디로인지 사라졌다.

꿈을 깨고 난 선비는 참으로 이상한 꿈이로다. 한 번도 아닌 두 번 씩이나 나타난 그 장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며 생각해 보아도 알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온다는 정씨는 과연 언제 나타난다는 것이냐?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알 수 없는 일들 뿐이었다.

그 선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신도 안에 정씨가 도읍한다면 틀림없이 이 고개야말로 정씨가 나타날 고개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이곳에서 묵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정씨는 나타나지 않고 이제는 노잣돈까지 떨어져서 아주 이 고개 아래에 뗏 집을 짓고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생황은 어려움이 더해갔지만 나라를 구한다는 여덟 정씨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날 줄 몰랐다. 그래도 그는 기다렸다. 꿈에 나타났던 그 장수가 거짓말을 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월은 흘러 그는 이제 늙어서 허리는 꼬부라지고 머리는 백발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죽는 날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느 날 그 선비는 자기가 며칠 안가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끔 들리는 초동들에게 기다림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고 내가 죽은 후라도 정씨가 나타나면 내가 기다리다 늙어 죽었다고 꼭 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선비는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양정 고개에서 정씨 두 사람이 나타나서 왕관을 놓고 싸워야 할 고개라고 전하며 기다리다 지친 어느 선비의 한이 맺힌 고개라고도 한다.                          (계룡시청  민속문화·전설 중에서)

그래서 두 정씨가 대립한다고 해서 양정(兩鄭)고개로 불리기도 한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66

Posted by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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