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조가 권중화(權仲和)에게 수도 자리(安胎地)를 구한바 권중화는 현재의 금산군 진산면을 천거하고 별도로 계룡산 도읍 도를 헌상하게 된다.

   
 
  ▲ 신도내 주초석 뒤로 보이는 낮은 산이 장구산이다.  
 
태조는 개성에서 수 백리를 달려와 비행장 옆 해군본부사령실 부근에 있는 장구 산 중봉에 올라 너른 뜰을 살펴본다. 이 봉우리가 계룡산의 여의주로 이태조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위치시키려했던 구릉으로 인경 봉으로도 불리는데 신도안의 중심 한복판에 있는 장구 산 중봉이다.

5일간 이곳을 답사한 후 크게 만족하여 1393년 3월 드디어 새 수도 건설의 대단원의 막이 오르게 된다.
이 너른 뜰, 신도로 구획된 안쪽이 지금의 용동리, 부남리, 석계리, 정장리로 신도안(新都內)이라 호칭한다.

전설에 의하면 계룡산에 제자봉(帝字峰)이 있고, 그 아래를 예로부터 제도(帝都)라고 불렀는데, 신라 말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와서 보고는 중국에 황제가 있거늘 이 소국에 제도가 있을 수 있느냐? 이를 마땅히 삭제하여야 한다 하므로 부득이 제자의 위아래 양쪽 획을 빼고 신(辛)자만을 남겨 신도(辛都)라 일컬어 왔다.

조선개국 초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번영의 기세를 올리고자 시경의 근기명(斤其明)의 근(斤)자를 따다 신(辛)자에 붙여 신도(新都)라 불렀다고 한다.

신도 안 이 명칭에 대하여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다.
신도 안, 부르기는 신도 안으로 불리어지고 한문으로는 신도 내(新都內)로 쓴다.
이러한 지명은 일면 이 일대를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는 ‘신도의 안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도 안을 표기 할 때 신도 내(新都內)라고 한다.

그렇다면 안팎(內外)이 있다는 개념인데 여기 안(內)에 대하여 그 밖(外)에 위치 한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두마(豆磨)이다.
두마는 팥을 많이 가는 곳이라 하여 지금도 팥거리 축제가 행해지고 있다.

   
 
  ▲ 팥거리 축제 모습  
 
이것이 과연 옳게 사용되는 지명일까?

두마(豆磨)를 표기대로 뜻으로 해석한다면 팥갈이가 되지만 이곳에는 팥 밭이 많지 않고 팥이 다량으로 생산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지명은 팥과는 무관한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 안(內)에 대하여 그 밖(外)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안팎(內外)의 개념에서 팎거리란 지명이 생성되게 된 것이고 팎거리라 부르는 고유 지명을 한자로 옮겨서 차자 표기한 것이 두마(豆磨)이다.
훈몽자회 등에 팥두(豆), 갈마(磨)로 기록되어 있으니 옛날에는 두(豆)의 훈음이 팥이며 마(磨)의 훈음이 갈이다.

따라서 ‘신도안의 밖 거리’란 뜻으로 팎거리를 훈음차 표기한 한자 지명이 두마(豆磨)일 뿐이다.
두마는 신도안의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신도 안 밖의 거리를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팥이라는 곡식은 원래 사악한 잡신이 범접하지 못하는데 쓰이는 재료이다.
그래서 팥죽이 만들어 진 것이고 새로 이사 가는 집의 벽면에 팥죽을 뿌리는 벽사관습이 전래되어 왔다.
그리고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동지에는 팥죽을 먹어 사악한 귀신의 접근을 막는 척사신앙이 강한 곡식이다.

그러면 그전에 신도안 형성에 주축이 된 분들은 누구인가?

구한말 외세의 간섭과 각종 민란 그리고 갑오농민운동으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난리를 피하고 새 세상에서 벼슬도 할수 있다는 희망으로 신도안으로 이주현상이 본격화되고 이주민 중에는 수백 년 동안 차별을 받아온 서북출신들이 많았는바 ‘정감록’이 처음 출현한 곳도 서북지역이다.
 
신도 안에 정신적인 뿌리를 둔 동학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분오열하는 과정에 탈 정치노선을 주장한 시천교가 탄생하게 된다.
내부에서 친일파와 절연한 상제교의 동학의 3대교주인 김연국(金演局)이 황해도와 평안도의 신도 3천명을 이끌고 1924. 2. 13.계룡산에 이주해오면서 신도안형성이 시작되게 된다.

이 당시 신도 안 인구가 7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도 안에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찼고, 주변마을로 이주민이 몰려들게 된다.
 
이들이 내건 탈정치화는 계룡산에 이주하는 모든 종교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이로부터 계룡산과 신도안의 혁명적 상징성이 사라지게 된다.
천황봉에는 이들이 설치한 천단(天壇)과 산제단(山祭壇)비석이 잘 보존되고 있다.

한때 이곳이 인기가 있는 참배지로 일부 군인들에게 회자된 일화가 있다.

육군본부참모차장 출신인 신모중장이 이곳에 기도한 후 사성장군인 대장에 진급하였기 때문에 일명 ‘장군바위’로 통하는데 장군진급을 앞둔 고참대령 중 상당수가 이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장군으로 진급하려면 천황봉산제단에 먼저 인사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고 한다.
 
어쨌거나 태조는 옛 귀족이 건재 하는 개성이 싫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싶어 했던 것이다.
무척이나 신도 안에서 새로운 나라를 열기를 고대했고, 1년여 기간 동안 실제로 신도 안을 수도로 선포하여 왕궁과 도시공사를 하게 되었다.
 
여기를 떠나면서도 그 아쉬움이 남아 터를 누르는 작업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아쉬운 터전을 버리게 된 실제 이유는 무엇일까?

신도안천도가 무산된 것은 계룡산신의 반대라는 천명에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 이유 일 수 있지만 당시의 기득권세력의 반대에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에서 보이는 근거가 아닐까?

정도전과 하륜은 당시의 권문세가의 대표 수장들이다.
‘쇠고집 닭고집’ 같이 당시에 기득권을 움켜지고 있는 세도가들이 적극 천도를 반대했으니 집권초기 지지 세력이 약한 태조 이성계는 이것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고 보여 진다.

신도 안 천도를 결행하다 보니 개경에서 신도 안까지 이주해오는 관료들의 주거 문제도 큰 문제였을 것이다. 대대로 살아오던 개경 집을 몇 푼의 돈을 받고 떠나왔으니 억울하다는 것이  이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솔개 어물전 들 듯’ 개경에 애착을 가진 관료들이 그 곳을 선뜻 떠나지 못하는 심정이었으니 그냥 두면 불만이 폭발할 것이라 예견한 태조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 진다.

어찌 최근에 행정수도 천도와 그리 비슷한지, 서울사람들의 반대에 결국 신도 안 일대를 최적지로 지목하면서도 어정쩡하게 공주 장기일대로 후퇴해서 그것도 어찌 될 것인지? 

당시의 정도전과 하륜 등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도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고 하면서 천도를 반대 했다.

이런 주장을 보면, 당시의 학자들의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새 왕조의 옹립에 집착했고 멸망했지만 어엿한 개성일대에 막강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세도가들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가까운 한양을 나두고 뱃길도 없는 먼 남쪽에 있는 신도 안까지 오려고 했을까

당연이 ‘못 간다.’ 이 말이 나왔을 것이다.
하물며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할 때도 토지로 인하여 많은 문제가 노출되었으니 이주해오는 관료들의 주거 문제였다고 한다.

윤사영의 상소문에는 당시 관리들의 주거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데,

“군자감승 박희종이 세자의 힘을 빌려 부당하게 집터를 분양받고자 했으니 파직하소서. 세자의 좌정 자는 세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박희종이 세자의 좌정자로 있을 때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세자를 이용하려 들었고 아래로는 사풍을 더럽혔으니 법대로 죄를 물으소서.”

이렇듯이 이주 시 관리들의 주거문제로 시끌했으니 오늘날에도 똑같지 않은가, 예나 저나 권력과 부를 가진 집단의 반대 움직임에는 어찌할 수 없는 것 같다.
결국 풍수도 아닌 것을 가지고 풍수 핑계만 되는 모습이 지금에 봐도 한심하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신도안천도가 그것이 조선 초에만 있는 주장이던가, 조선 내내 신도  안에 대한 천도주장들이 많았으니 조선말에 흥선대원군이 도참서와 정감록에 계룡산은 정씨도읍지라는 전해오는 말을 듣고,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해서 정감록을 압수해 불태우고 이 지역의 출입을 금지하게 된다.
 
정감록은 이성계와 정몽주의 실제 조상이 아닌 상상속의 조상인 이심, 이연 형제와 정감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돼 있는 대담집으로, 실제로 정씨와 이씨가 문답한 것으로 ‘정이문답(鄭李問答)’이라 하는 것이 맞을 듯도 한데 이런 명칭은 매우 드문 경우이고 정감이 더 호감이 가는 측면이 있어 그랬는지, 대개는 ‘정감의 기록’이란 뜻에서 ‘정감록’이라 불렀다.

정도령이란 칭호는 정감록에는 안 보이는데 민중들이 암암리에 진인의 출현을 기대하는 분위기속에서 이씨조선에 반대하거나 제거된 정몽주, 정도전, 정여립, 정희량 등 조선왕조에 반대하는 선봉이었으므로 새 나라는 반드시 정씨가 왕이 돼야 한다는 것이 민중의 주장이었고 그 진인이 정씨라는 예언이 조선후반기에 등장한 것 같다.

신도 안에 이런 전설도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신도 안은 우리나라 명산으로 손꼽히는 계룡산 아래 있는데, 옛날부터 이곳에 정씨가 도읍을 정하고 800년 권세를 누린다는 말이 끊임없이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그런데  칼날 같은 바위가 서있는 계룡산 갑사 쪽과 풍경이 좋은 동학사 쪽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신도 안 쪽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그때 마침  호탕하고 활 잘 쏘는 사냥꾼이 이곳을 지나다가, 조용히 살고 싶어 신도 안에 머물러 사냥을 하며 살았다.

그는 짐승을 잡아먹고 가죽은 웅진에 가서 팔아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갔는데 그날따라 노루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이 언덕 저 고개를 누비다가 노루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 뒤를 쫓는데, 노루는 그를 놀리듯 조금 도망치다 뒤돌아보고 화살을 당기려고 하면 다시 도망치곤 했다.

기어코 노루를 잡아야겠다는 결심으로, 계속 뒤를 따라 산비탈을 내려 들을 달리고 다시 언덕에 올랐다.
노루는 풀을 뜯어먹으며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화가 난 그는 마구잡이로 화살을 당겨 노루를 향해 날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노루는 틀림없이 달아나버렸는데 이상하게도 크게 울부짖는 말울음소리가 언덕 양편에서 들려왔다. 호탕한 그도 무서운 생각이 들어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자리에 눕자 곧 꿈을 꾸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고 먹구름이 쌓이더니 그 먹구름 사이로 백발노인이 노기를 띤 모습으로 나타나  "그래 너의 성이 정씨가 아니더냐."  정씨가 말을 쏘아 죽이다니. 그것도 두필의 말이나? 너는 큰 죄를 지었으니 내일 밤 안으로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이다“하고는 먹구름에 싸여 사라졌다.
생각할수록 괴이하게 여긴 그는 산신령의 노여움을 샀으니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이튿날 살던 집을 불태우고 멀리 떠나버렸다.

그 후로 이곳 신도 안에는 각처에서 사람이 몰려와 살게 되고, 부지중 주민들의 입에서는 “이곳 신도 안은 정씨가 맨 먼저 살면서 터를 닦았으니 정씨가 주인이다. 그러니 정씨 가문에서 왕이 나와 도읍을 정 한다”라는 말이 퍼졌다.

그러나 정씨가 이미 말을 쏘아 죽였으니 왕이 될 수 없다는 이설(異說)도 있다.
생각건대 이 전설이 원인이 되어 지금도 계룡산 신도 안에 정도령이 나와 도읍을 정하고 권세를 누린다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화살에 맞아 죽은 말의 울부짖음과 함께 신도 안 도읍이 물 건너 가 버렸는지, 아니면 왕 씨의 개성, 이 씨의 한양, 그 뒤를 이어 과연 정 씨의 계룡이 될는지 미지수다.    
(김석진저 ‘스승의길 주역의길 중에서)


이렇듯이 신도 안은 민중들입에서 오르내렸으니 조정대신들 사이에서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으니 19세기 말 권좌에 오른 대원군은 계룡산으로 천도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고 그는 천도를 통해서라도 이미 달아난 민심을 조선왕조에 매어두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은밀히 그 전설을 꺾고자 계룡산 하록에 도읍을 옮기려고 터를 닦는데 여기저기서 석추가 나와 ‘이곳은 정씨의 천년지택이니 이곳을 범하는  는 큰 화를 면지 못하리라’라는 유언비어에도 계속공사를 추진하다가 결국 재정난으로 공사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말이라는 것이 묘해서 한시대가 끝마치려면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니 쌀 이름도 백제 때는 백미, 신라 때에는 나(羅)락, 고려 때는 왕미(王米), 이조는 이(李)쌀, 입쌀이고, 계룡산 정씨가 도읍하면 정미, 지금은 정미소라고 하는데 이것이 끝나면 가야산 조 씨의 좁쌀이라고 하는데.....

최근에 와서 박정희대통령을 거쳐 노무현대통령시대에 다시 민족의 웅비를 깨울 수 있는 터라고 여기고 준비해 왔다. 그러함에도 지금도 그렇듯 없어진 단지 일국의 왕의 터만 매달리고 집착하는 기득권세력과 이에 동조하는 언론이 많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내 것이 손해를 본다는 생각에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속성이니 어찌하겠는가?

‘뭇 사람들의 의심은 괴변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하였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변화도 하지 못하면서 꽃과 열매를 같이 취하려 하면서 어물 쩡 된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시대에 또 다른 후회를 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무엇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일인지,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는 민족은 결코 발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와중에도 신도 안 인근에 다시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 건설이 7월20일 첫 삽을 뜨고 2030년까지 24년간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수도권의 반대, 위헌 판결 등 수많은 난항을 겪은 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로 5년 여 만에 실현되는 것이다. 2005년 제정된 행정도시 특별법에 따라 추진돼 온 행정도시는 오는 2030년까지 세계 초일류 인프라를 갖춘 명품도시로 건설된다.

특히 행정도시에 2010년 하반기 중 첫 마을 입주가 시작된 후 중앙인사위원회를 포함한 대통령 직속기관 4개, 국무조정실 등 국무총리 직속기관 12개, 재정경제부, 교육인적자원부, 건설교통부, 산업자원부 등 중앙행정기관 33개 등 총 49개 기관과 1만 여 명에 달하는 소속 공무원들까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순차적으로 이전하면서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행정중심복합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비록 기득권세력의 반발로 많은 축소가 되었지만 새로운 천도계획을 담은 엄청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부디 조선시대에 ‘1년 수도’의 미완성의 행정도시가 되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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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연 이성계와 무학 대사의 향기로움이 배인 곳

   
 
  ▲ 계룡산 천왕봉  
 
계룡산(鷄龍山)!
우리가 늘 부르고 보아왔건만 845m의 이 산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금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의 명산! 풍수지리상의 최고 명당!
많은 미사여구를 받고 있지만 계룡산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아직도 살아있는 많은 전설을 그저 가슴으로 품고만 있다.

계룡산은 삼한시대에는 천태산(天台山)으로 불리다가 백제 때 계산(鷄山),  계람산(鷄藍山), 옹산(壅山), 구룡산(九龍山), 용산(龍山), 화채산(火彩山)이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고려 때 목화가 들어오기 전에 옷감으로 많이 쓰였던 삼(麻)이 이산에 많았다는 기록이 있고 껍질을 벗긴 삼대를 겨릅'이라 하기 때문에 겨릅 산이라 했다.

이 겨릅 산이란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 한자로 음역되면서 계립(鷄立)으로 되고 또 '립'이 비슷한 소리로 뜻이 좋은 용(龍)으로까지 발전해서 계룡산이 되었다고 보는 분도 있다.

이성계가 조선조를 창건할 무렵 무학 대사가 계룡산의 지형을 금계 포란형(金鷄抱卵形), 비룡 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해서 두 풍수적 형국에서 계(鷄)와 용(龍) 한자씩을 따 계룡산이라 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의 9백년 운은 서대궐은 무성(無城) 5백년, 동대궐은 유성(有城) 4백년으로 서대궐은 금계포란이고 동대궐은 비룡농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 속에는 금계는 부의 상징, 비룡은 현명한 임금을 의미하는 말이니 이는 조선의 창업자인 이성계와 당대의 사상계를 풍미한 무학 대사와의 만남이 있었음을 알리는 것이니,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밤에 금척(金尺)을 얻는 꿈을 꾸었을 때 송도로 돌아가 빨리 임금이 되라고 위화도회군을 종용한 사람이 바로 무학 대사이다.

어느 따스한 봄날, 태조와 무학 대사가 서로 농담하면서 희롱삼매에 들었을 때 태조가 먼저 말하였다.

"누가 농담을 잘 하는가 내기를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대왕께서 먼저 하십시오"

그래서 태조가 먼저 농담을 걸었다. "내가 자세히 스님을 쳐다보니 꼭 돼지처럼 생겼습니다 그려."
무학 대사 왈, "
제가 보니 대왕께서는 부처님처럼 생기셨습니다."

대사의 대답에 태조는 뜻밖이라는 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같이 농담을 하지 않습니까?"
대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님으로만 보이는 법입니다.”

두 사람은 함께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한다.
 
‘용 가는데 구름 간다.’고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다시 차길진 선생이 쓴 영기로 보는 계룡산 중에서 일부 글을 원용해 본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은 요즘도 계룡산 신도 안에 자주 들른다. 신도 안이란 말 그대로 600여 년 전 이성계가 일찌감치 조선의 수도로 점찍었던 곳이다. 그런데 10개월에 걸쳐 대궐 터까지 닦아놓은 상태에서 조선의 도읍은 갑작스레 한양으로 정해졌다. 무슨 사연이 숨어 있는가?

이성계는 왕이다.
절대 홀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을 초혼하려면 경호원들의 요란한 구둣발 소리를 감수해야 하듯, 태조 영혼의 행차에는 정도전, 하륜, 그리고 무학 대사 등 개국공신들과 국사(國師)가 동행한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는 필자에게 ‘~해라’체를 쓰고, 신하들은 ‘~하오’라고 한다.

“왜 계룡산을 포기하고 500리 나 떨어진 한양으로 가셨습니까.”
좌중을 둘러 본 태조가 털어놓는다.
‘이 사람들(정도전, 하륜)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기에....’
 
“그렇다면 사연봉(四連峰) 태조대왕 동굴은 무엇인가요.”
‘궁을 짓는 동안 기도하던 곳이었지. 그런데 기도하다가 계룡산 할머니를 만났어. 할머니가 반대하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네.’
계룡산 산신은 여성이라는 세인들의 믿음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할머니 신령은 ‘계룡산의 임자는 당신이 아니라 다섯 가지 덕을 갖춘 선인’이라며 이성계에게 공사 중단을 명했다고 했다.
“계룡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날 신인(神人)이 새 나라의 수도로 정해 800년간 쓸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 신인은 바로 언제나 숱한 추측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정도령’이다.

할머니 산신이 이성계를 무작정 내몬 것은 아니었다.
한양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동시에 500년이라는 조선왕조 수명도 예고했다고 한다.

무학 대사도 한 마디 귀띔했다.
‘대왕이 고려를 멸하는 과정에서 피를 너무 많이 불렀다는 점도 할머니는 못마땅해 했다.
그래도 태조와 나는 아직까지 아쉬움이 남아 한양에서 달(月)을 바라보다 흥이 오르면 여기로 온다.’는 요지의 말 이였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런 분이다.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인 23.5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세계의 핵심을 주관하는 여신답다.
하지만 현 시점 계룡산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개발이 할퀴고 있는 상처들로 몸이 몹시 아프다.
아물만하면 또 파고든다.
그래서 할머니가 유성 후암정사와 국립현충원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이성계를 비롯한 최고 권력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야욕을 숨기지 않은 외세를 물리쳐온 계룡산 할머니다.
'할머니는 말하셨지 욕심을 버려라. 웃으면서 사는 인생 자, 계룡산이다.'”
<2005년11월12일자 주간조선>

이런 것을 보면 ‘팔자 도망은 독 안에 들어도 못 한다’다고 하듯이 제가 타고난 운명에 따라야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무학 대사는 이성계를 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해 최선의 일을 다 한 것 같다.
무학 대사는 실제로 천문과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우암 송시열이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이었고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고 한다. 그만큼 후학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분이다.

그렇지만 하지 말아야 했을 일을 했으니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고, 수도를 한양으로 최종 결정하면서 왕인 태조 이성계 가문과 한양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금정(金井)에 다가 돌을 덮어 계룡산의 혈맥을 끊었다.

은색의 바위에 맥을 끊는 기구인 ‘붉은 구슬을 넣어 만든 은색덮개’로 흐르는 물이며 계룡산의 맥인 곳을 덮으므로 천도에 역행하는 비방을 쓰게 된다.
이곳이 계룡산 천왕봉에 있는 압정사(壓鄭寺)라고 한다.

무학 대사는 본인이 저지른 일을 그가 지은 청구비결(靑丘秘訣)에 이렇게 후회하고 있다.
“돌로써 금정을 덮었는데 어찌하여 옳게 보지 못 하는가”

조선시대 유학자인 서거정선생은 이 우물을 뚫으면 계룡산의 돌은 다시 푸른색으로 변해서 어지러운 세상은 금색이 튀어 나오듯 밝아진다고 하였으니, 계룡산의 혈맥을 끊는 지나친 행위를 하였으니 이를 어찌 하겠는가 ?

태조 왕건이 이 일대의 지맥을 누른 후 무학 대사가 큰 혈맥을 끊었으니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쇠말뚝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작은 혈맥의 기운마저 끊었으니 계룡산의 운명도 가련할 뿐이다. 

이런 글을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뜻이 있다면 다시 우물을 여는 것도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상징적인 국운융성의 포퍼먼스로 해 볼만 하지 않은가?
천왕봉에 있었던 철탑만 옮겨간 것으로 그리고 일본인이 저지른 쇠말뚝만 뽑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자연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자연이 건강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도 건강해질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사실 이 지역은 고려가 나라를 세운 후 터를 누르기 위해 각종 부처입상을 세워 기운을 죽여 오다가 조선 이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함에 따라 조선 건국 시부터 작심을 하고 터의 기운을 없애려고 했으며 정여립의 모반 이후부터는 이 지역을 폐허화하다시피 방치하여 오게 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그 도가 더욱 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 일본인들은 계룡산 구석구석의 혈맥만 정확히 골라 쇠말뚝을 박았다.
일제강점기 중 일본의 새 수도 최적 후보지는 역시 계룡산으로 보고 일제는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를 대전으로 옮기면서 부여에 자신들의 신궁을 만들 정도로 계룡산일대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패망하고 말았지 않은가?

   
 
  ▲ 천마산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곳이 한군데 있는데 양정 고개에서 시청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천마사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여기가 예전에는 법성사(法性寺) 라고 불리었는데 이성계와 무학 대사가 만난 곳이라고 한다.
무학 대사가 이곳 산을 천마산(天馬山)으로 명명했다고 하는데 개태사가 있는 뒷산이 천호산인 것을 보면 그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산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 천마사 대웅전  
 

   
 
  ▲ 천마사에 있는 옥석불상  
 

   
 
  ▲ 높이 0.8m의 석가모니상인 옥석불을 설명하고 있는 간판  
 

현재는 천마사로 불리는 데 이곳에 원래 신도 안 봉안사(奉安寺) 대웅전 삼불중 하나인 옥석불 (玉石佛 문화재자료 85호) 이 있다. 1984년대 계룡대 건설로 봉안사 폐쇄 시 이전되어 온 0.8미터 항마촉지인불상이다. 
조선말 조성한 것으로 재료는 석고이나 옥으로 만든 조각 같이 정밀하고  사실적 조성된 불상이다.

그저 멋이 있다.

아마 우리나라 땅에 얽힌 전설을 살펴보면 무학 대사가 등장하지 않는 곳이 드물 것이다.

   
 
  ▲ 농소정의 모습  
 


   
 
  ▲ 조선태조 이성계가 마셨다는 농소정  
 

여기서 다시 농소리로 발길을 돌리면 농소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물이 참 많이 솟아나는 곳이다.
수량도 엄청나게 많고 물맛도 좋고 하니 들려볼만하다.
이 물을 옛적에 태조 이성계가 드셨다고 하는데 그 옆에는 선돌이 하나 누워있다.
여기도 기복신앙이 배인 곳이라 선돌은 남근석같이 보이는데 글쎄, 한번 벌떡 세워놓고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고 한다. 휠씬 멋있을 것 같다.

대외활동이 무척 많은 조효연 사장이 입암리 안쪽 끝에 있는 배재대학교 소유의 임야에 X지샘이라는 물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물맛은 괜찮았지만 글쎄, 좀 다른 것 같다.
아무렴 임금님이 마신 농소정 물맛에 비하면 별로 인 것 같았다.

   
 
  ▲ 남자의 거시기 같이 벌떡 서 있는 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입암리'. 사진 속의 돌이 바로 그것이다.  
 

   
 
  ▲ '왕의 처소가 된다는 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왕대리  
 

입압리(立岩里)에는 남자의 거시기 같이 벌떡 서 있는 돌이 있다고 해서 입압리라고 했다고 하는데 인근에 왕대리(旺垈里)는 왕의 처소가 된다는 터인지라 이곳의 지명도 재미가 있다.  

 
 
 
  ▲ 무학대사의 지팡이가 자라 괴목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괴목정  
 
하여간 무학 대사와 이성계를 찾아다니다 보니 무학 대사가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를 꽂아서 자라 괴목이 되었다는 괴목정 등 신도 안에는 그들에 관한 많은 전설이 널려있었다.

부연하면 여기에는 전주이씨 들이 참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기에 왜 그런 가 했는데 조선 초 이성계의 주변 집안사람들이 ‘횃불이 비치는 장소는 전주이씨 땅’이라고 해서 전부 전주이씨 땅으로 했다고 한다.
이 말은 금천건설을 운영하는 이영구 사장으로 부터 들었다.

사람은 키 큰 덕은 입어도 나무는 키 큰 덕은 못 입는다고, 권력과 재력은 역시 병행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 땅이 잠자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북적되고 있으니 영기가 서린 땅은 값을 올리면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쌀고리의 닭이라’고 생각지도 않게 큰 부자가 되면 그 씀씀이도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법이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는데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이승에서의 짧은 동안의 사귐일지라도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은 죽어서도 저승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니

이성계와 무학의 만남이 조선의 건국에서만 만남이 있었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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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지대안도 중앙총본부] 천지대안도 중앙총본부 간판이 걸려 있는 모습. 지아이앤 뉴스 사옥과 인접해 있다.  
 
여기서(양정고개) 계룡굴다리 밑을 지나 10여 미터 쯤 가면 잠깐 살펴보고 가야 할 종교단체가 하나 있다. 
평범한 집이지만, 마침 이곳에 지아이앤 뉴스가 사옥으로 쓰고 있으니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천지대안도 건물과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는 지아이앤 뉴스 사옥. 왼쪽 옆으로 천지대안도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제주도와 관련이 많은 천지대안도(天地大安道)가 있는 곳이다.
일반인은 물론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 조차 생소하리라 본다.

   
 
  ▲ 건물형태도 특이하지만 자세히 보면 천지대안도라는 글씨가 써 있고 외벽에는 알 수 없는 문향이 그려져 있다. 엄사우체국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계룡시에 와서 엄사리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흰 색깔의 건물에 유난히 시선이 가곤했다.
건물형태도 특이하지만 자세히 보면 천지대안도라는 글씨가 써 있고 외벽에는 알 수 없는 문향이 그려져 있어 처음에는 유교재단에서 지은 건물로 알고 있었는데 금암동에 별도의 유교본부건물이 있어 궁금증이 더해 갔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천지대안도라는 종교단체였던 것이다.
내가 볼 때 수운의 후천세계와 일맥 통하는 것 같은데 제주도와 인연이 있는 종교라 제주도에 교인이 많으며, 가정의례는 지극히 간소하고 윤리도덕에 따라 행하고 있다.

이곳 분들은 생식을 즐겨하시는 고로 이곳의 종단을 실제 이끌고 계시는 ‘최재화’ 회장을 뵐 때마다 그 옹골 한 자세가 신선 같은 느낌이 들 곤 한다.
계룡대가 들어서기 전에는 숫용추 주변에 상당한 규모의 성전도 있었다고 한다.

이 곳 천지대안도 뒤의 정상 능선 바로 아래가 그 유명한 ‘도깨비 터’이다.

도깨비 터에 들어선 건물은 대부분 종교 관련 건물들이다.
두마면 엄사리 음절마을, 도깨비 터로 알려진 이곳에는 종교 관련 건물들이 유난히 많아 그러한 풍수의 기본개념에 충실한 땅이 아닐까 여기는 이들이 많다.
‘엄사(奄寺)’란 행정구역명 또한 바로 이 ‘음절’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음절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도깨비 터로 알려지게 됐을까?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오면서 13년째 이장을 맡아온 이효택 씨에 따르면 원래 이곳은 1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농촌마을이었다.
그 이전에는 이곳에 음절이란 큰 절이 있었다는데, 언제 생겨서 언제 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에 계룡대(삼군본부)가 들어서면서 이곳 음절마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씨는 “집 다섯 채 지으면 그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되더니 지금은 교회가 족히 100개는 된다 ”고 말했다.
교회뿐만 아니다.

마을에는 종단이 서로 다른 절들, 요가원, 점집,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신흥종교 건물들이 혼재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외지인들이 와서 주민들에게 집터를 팔라고 졸라대는데, 대개는 절이나 교회를 짓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들 건물의 유형도 다양하다.
우람한 고층건물을 자랑하는 교회, 시멘트로 지은 사찰, 슬레이트 지붕이 얹힌 건물이 이색적인 민족종교 사원, 일반 주택에 온갖 부적으로 도배해놓은 점집…. 일요일이면 더욱 볼 만하다.
찬송가, 목탁, 염불, 주문 소리들이 아우러져 그야말로 도깨비들 잔칫날 같다.

조용하던 시골마을이 왜 이렇게 변해가는 것일까?
원래 도깨비 터였는데 이제야 그 땅이 제대로 쓰이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옛날에 이 마을에 있었다는 ‘음절’이란 큰 절이 망한 것만 보아도 이곳 터가 절터로서 적합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일반 주택에 차려진 점집. 그러나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계룡대가 들어서면서 그 인근에 있던 많은 종교 건물들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도깨비 터로 알려진 이곳에 대체지로 선택한 듯하다”                     
(김두규저 복을 부르는 풍수기행 중에서)

그런데 여기 도깨비 터에 한옥 집 한 채가 당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같이 간 한상교 선생은 이 일대에서 이 지점이 땅의 기운이 제일 강하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독특하게도 대문입구에는 윤리연구원(倫理硏究院)이라는 현판을 걸어 놓고 건물초입에는 계룡정사(鷄龍精舍)라고 쓰여 있다.
 
사라져가는 국혼과 민족 얼을 고취시키며 무너진 윤리관을 재조명하기 위하여 성재(誠齋) 봉기종(奉奇鍾)선생께서 1970년 윤리연구원을 창립하고, 한학과 윤리,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인재를 규합하여 인격도야와 덕성함양을 하고 계신다. 현재 삼백여 명의 한의사와 백여 명의 교수를 배출하여 각계에서 활동 중이다. 연구원 활동인원은 전국 약 1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15년 전부터는 현재의 계룡시 두마면 연구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하며, 군 장교들과 한의사, 인근 대학의 교수 등을 상대로 한학과 윤리,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만나 뵈오니 처음부터 무릎을 끊고 앉아 손님을 대하는 것이 꿋꿋한 선비의 자세가 보이신다.
봉기종 선생은 돌아가신 어머니께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상을 차려 올렸고 문안인사도 드린 분으로 고령에도 불구하고 요즘 보기 드문 시묘(侍墓·부모 거상 중 그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3년간 사는 일) 생활을 해온 분이다.

봉기종 선생은 “나 스스로는 결코 효자가 아니지만,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본보기를 보여 달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시묘생활을 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인의예지의 본성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 사상을 제창하고 널리 펴는 데 남은 생을 바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여기를 지나 능선을 타고 가다보면 웰빙 열풍으로 계룡웰빙타운 찜질방이 나온다.
예전에는 여기에 약수암이 있었고 물이 참 좋아 많은 분들이 건강을 위해 마셨다고 한다.

   
 
  ▲ [약수암] 국사봉 맨재골 최상단에 있으며, 약수암의 샘은 연산ㆍ논산천의 발원지이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국사봉에 오르게 되는데 국사봉 등산로는 이쪽 방향이 오르기가 편하지만 우리가 찾아가는 향적산방은 우회해야 하는 관계로 지금은 엄사중학교 옆으로 큰 길이 시원하게 뚫려있으니 이 길을 통하여 가면 다소 편하다.

신도 안 일대에는 아직도 이러한 다양한 종교단체와 학문들을 연구하는 기관들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그러한 종교나 학문 연구하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정신을 밖으로 들어내도록 유도해주고 각 종교나 학문 연구하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가르침을 널리 알릴 수만 있다면 황폐화 되어 가는 우리 심성에 차분한 한줄기 영양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신도 안 땅은 특정의 종교인의 땅도 아니요 본래 다양한 종교와 학문이 잉태되어 태어나고 성장하며 그 중에는 커다랗게 성장하기도 하며 때로는 소멸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배양하는 지역이 아닌가?

더욱 이들을 양성화시켜 국민의 영성을 키우고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장으로서, 때로는 민속과 종교 그리고 문화가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배가 된다면 세계적인 ‘종교자생지’라는 문화콘텐츠로 좋은 호재를 가지고 있는 계룡시가 되지 않을 까 생각해본다.

부남리나 남선리 일대의 부지를 계룡시에서 매입해서, 물론 예산이 수반되는 거라 시일을 요하지만 계룡대 설치를 위한 6·20사업 이전에 이곳에 존재하다 철거된 각종 종교 단체들을 다시 모아 ‘종교촌’을 형성한다면 종교체험과 선인들의 종교생활의 경험과 지혜를 다시 볼 수 있는 멋진 장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치단체들은 없는 축제도 만들어서 쓸데없는 예산낭비를 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성공하는 축제도 많이 있는 반면, 이러한 종교타운을 형성하고 종교페스티발을 해본다면 종교인의 화합의 장소이자 우리 모두가 마음을 여는 장소로 최선의 움막 터가 될 수도 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종교 센터가 논산시 상월에 건설된다면 계룡은 기회를 놓치고 또 하나의 영적 메커니즘을 잃어버리게 될까 안타깝다.
좋은 의료시설과 종교 촌이 형성된다면 그야말로 살기 좋은 이상향의 신도  안이 건설 될 수 있다고 보여 지는데 우리 모두가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상록도시는 이러한 영성을 다스리고 좋은 의료시설을 갖춤으로써 더 빛나는 것이 아닐까?

자연을 보호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이지만 왠지 허공에 떠드는 메아리 같기만 하니, 하기야 대전시는 시를 상징하는 마크로 ‘It's Daejeon’이라고 알리는 것 같은데 뭔 소리인지, 상록도시는 그것보다는 뚜렷해 보이기는 하는데, 글쎄?
너무 공허한 트레이드마크들 같다.

신도 안에 사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진실 된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엄사리 도깨비 터에는 하루가 다르게 각종 종교단체들이 들어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 [국사봉 안내도] 맨재골 소류지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도  
 

   
 
  ▲ [향적산 등산안내도 간판] 최근의 간판모습이다.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없기 때문에 조심해서 엄사중학교 옆길을 따라 철길  옆으로 계속 내려가면서 멀리 바라보면 향적봉이 보인다.

언젠가는 이곳 철길 건너 야산도 벌목되고 깎여서 커다란 아파트 숲으로 덮여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살아갈 것이지만 결국 옛날의 마음의 고향은 점차 잊혀 가지 않겠는가?

   
 
  ▲ 국사봉의 시발점이 되는 향적산묵집  
 
향적산방에 오르기 전 좌측 철길다리 아래로 동구나무가 푸르르 게 자라고 있는데 그 앞에 향적산 묵 집이 보인다. 이 집은 옻닭이 별미라 동동주 한잔을 걸치면 그 짜릿함에 온몸이 울부짖는다.
집터도 괜찮아 류보선 시의원도 나왔으니 터의 값은 했을 것 같다.

   
 
  ▲ [오행비와 천지창운비] 국사봉 정상에 세워져 있다. 한반도가 1천년 이상 동방예의지국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단군 성조의 뜻이 적혀 있어 무속인들의 기도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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