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용추와 숫용추

계룡산에는 4곳에 계곡물이 모이는 커다란 웅덩이가 있어 서용추, 동용추, 남용추, 북용추로 불리었다고 한다. 서용추와 동용추는 현재의 숫용추와 암용추로 불리고, 남용추는 떨어져 나가 있고, 북용추는 갑사 쪽에 있다고 한다.

 

 
 
  ▲ [암용추] 직경 12m, 깊이 2.5m의 맑은 연못이다.  
 
   
 
  ▲ 최근의 암용추 모습  
 
삼신당을 보고 하산 중에  암용추를 지나면서 그냥 지나 갈 수가 없어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암용추는 여의주라 지금의 삼신당이 있는 성도봉이 황룡이고 제석사의 용구추가 청룡이라 암용추를 놓고서 쟁주(爭珠)를 벌이는 형태라고 한다.

이곳 웅덩이 석벽에는 경술국치 후 나라 잃은 망국의 한을 품은 12분들이 석벽위에 본인의 호와 이름을 새겨서 백절불굴하는 단결심을 표시하여두었다.
일러  ‘용산12일민회(龍山十二逸民會)’!
이분들은 의연금을 모으고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하는 애국운동을 하여 국가로부터 독립운동의 포상을 받았다.

이런 것은 보면 이 일대가 평소에 민족정신을 고양하다 나라가 위난에 빠질  때는 뜻있는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곤 하니 살아 있는 계룡산의 정신세계에 거듭 감사할 뿐이다.

날씨가 덥고 웅덩이 위쪽 용산12일민회 석각을 찾아본다는 핑계로 잠시 옷을 ‘홀라당’ 벗고 암용추로 들어갔는데 시원하면서 짜릿한 물맛 때문인지 나오기가 싫어졌다.
계룡산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알면 난리 나고 경 칠일이지만, 온몸이 근질거려  이곳에서 잠시 육체와의 향연(?)이 있었으니 온몸을 세척하고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웅덩이 깊이가 한길반이 넘는데 같이 간 박희덕은 수영이 프로급인지라  암용추 속으로 연신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물밑으로 들어갈 때 마다 한웅 큼의 돌을 집어가지고 나오는데, 먼 다른 생각이 있어 그러는지, 다시 한 번 찾아갔을 때는 이전에 저지른 업보를 받았는지 위험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했었다.

이 계곡에는 기도하면 소원성취를 할 수 있다 하여 길지로 여겨져 오고 있다.
1920년경 3·4월이면 이곳에서 서식하는 올챙이를 복용하면 만병통치효과가 있다고 하여 올챙이를 잡으러 몰려드는 인파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곳 암용추는 건너편 산봉우리에서 쳐다보면 우리가 가끔 인터넷에서 보는  여성의 거시기와 거시기를 빼어 닮았다고 하는 곳이지만,  이곳은 굉장히 신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지는 곳인지라 이런 표현이 가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이다.

이 계곡은 군부대에 속해있고 계룡산 국립공원의 통제지역인지라 보전이 잘되고 있지만 정말 한번 가보면 하는 멋진 장소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절경이 있나 싶을 정도의 일품이다.
하기야 개방되면 그것으로 이 계곡은 ‘사망’이다. 

   
 

  ▲ [용란(龍卵)] 계룡건설 이인구회장이 암용추와 숫용추에서 꺼냈다는 용의 알. 왼쪽이 암용추 용란, 오른쪽이 숫용추 용란  
 
계룡건설의 이인구회장은 이곳 암용추와 숫용추에서 나온 공룡 알 같은 수석인 ‘용의 알’, 즉 용란(龍卵) 두 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사진으로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별걸 다 지니고 있는 이 수석이 복을 부르는 돌인 것 같다. 개태사에 있는 용란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나도 이 암용추 밑바닥에서 나온 메추리알 크기의 돌멩이를 산신의 허락도 없이 슬쩍 해 왔는데 금암동에 있는 궁중갈비식당의 ‘이정호’ 사장에게 보여줬다가 압수당하고 돌려주지를 않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이 분은 계룡대 안에 살고 있는 흰 사슴 두 마리를 찍은 사진을 남모과장님으로부터 본인이 선물 받아 보관하고 있는데 이것도 압수하려고 하는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곳 식당은 정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니 지금은 웃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곤 하는데 정말 복이 들어오는 돌멩이 일까?
이정호사장의 음식조리는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솜씨이다.

   
 
  ▲ 10m 길이의 폭포가 일품인 숫용추. 위에서 본 모양은 남자의 생식기 모습을 하고 있다.  
 
 

 
 
  ▲ 최근의 숫용추 모습  
 
암용추와 숫용추는 이런 여유로 성숭배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었고 아들을 낳고 싶으면 숫용추에서 계룡 산신에게 기도를 드렸고 딸을 원하는 부부는 암용추에서 푸닥거리를 일삼았다.
자연히 암용추는 남자들이 들끓었고 여자들도 북새통을 이뤘다.
이곳에 멀지 않은 장소에 숫용추가 있는데 이곳이 암용추와 자웅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도 전설이 없을 리 없지 않은가?

   
 
  ▲ 암용추 숫용추의 전설  
 
‘옛날 계룡산 땅속에 암용과 숫용 두 마리가 사이좋게 살고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때가 되면 하늘로 올라갈 것을 기대하면서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두 용은 계룡산 밑을 파서 산의 물을 금강으로 흐르게 하였고, 땅속으로는 신도 안에서 갑사·동학사·마곡사 쪽으로 어디든지 다니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명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참으로 깨끗한 용들이었고 항상 하늘에 올라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땅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이무기들은 추잡하게 살면서 그들도 하늘의 부름을 기다렸다.
용들은 그런 이무기들을 가소롭게 여겨 추잡한 행동을 보지 않으려고 몸을 땅위에 전혀 나타내지 않은 채 굴속과 물속에서만 지냈다.

용들은 몹시 비가 내릴 때나 천둥이 칠 때 혹시 하늘에서 자기들을 부르지나 않을까하고 굴속에서 눈을 내놓고 하늘을 바라봤다.
하루는 몹시 비가 내리는데 밖을 내다보는 것을 잊고 땅속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용들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어 더 큰 목소리로 부르자, 그때서야 알아듣고 굴속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대체 너희들은 하늘의 부름을 거역하려는 것이냐?”, “너희들은 항상 땅에서만 살려느냐? ”하고 하늘에서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용들은“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하고 빌면서 애원했다.

그러자 “땅의 껍질을 벗겨라. 그리고 언제든지 하늘에 올라올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너희들의 정(情)이 너무 지나치니 따로 따로 자리를 정해 다시는 만나지 마라.”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더니 날씨가 잠잠해졌다.

그들은 헤어지기가 아쉬웠지만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작별을 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서로 하늘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제각기 장소를 정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암용은 물이 꼬불꼬불 흘러내리다가 맑은 소(沼)를 이루는 장소를 택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숫용은 계룡산의 정기가 흐르듯 맑은 물이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는 아래쪽 계곡에 자리를 잡고 땅을 파들어 갔다. 이제는 하늘에 올라갈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용들은 이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가보다 생각하며 못에서 살그머니 머리를 내미니 하늘에서 “때가 되었으니 어서 올라오너라.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이곳 사람들은 암용이 하늘로 올라간 자리를 암용추, 숫용이 올라간 자리를 숫용추로 불렀다. 또한 암용추와 숫용추는 옛날에는 땅속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두용이 땅속을 통해 서로 만났다고도 전해진다.

실제로 암용추와 숫용추는 직선거리로 약 1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계룡산 정상에서 보면 같은 능선 상에 있다. 또 두 용추는 수심이 4-5m정도 이며 이곳을 제외하고는 계룡산 어느 바위에도 이런 웅덩이가 없다.“
(계룡시청  민속문화·전설 중에서)
 
숫용추에는 청남대의 대통령별장이 없어지고 새로운 대통령별장이 이곳에 지어져 있으며 여름에는 군관계자의 휴식처로 개방되고 있다.

노무현대통령께서도 여기에 자주 오시는 것 같다.

한번은 계룡역 앞에 라이온스 ‘한태철’회장이 운영하는 풍년식당에서 맛있는 순대국 식사를 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오신다고해서 보니 KTX열차가 역에 들어서고 멈추는데 노무현대통령께서 내리시는 게 아닌가?

이곳에서 대통령을 보니 좀 당황스러웠는데 주위사람들은 “뭐 평소에도 자주 보는데요. 뭘”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한다. 주위를 보니 경비도 별로 없고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기는 했구나 하면서 나도 호들갑을 떨었다가는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봐 조용히 식사를 마친 적이 있었다.

결국 시대가 바뀌어도 이곳은 왕이 자주 찾는 터임을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이러한 터에서 마음껏 활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뿌듯해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명산은 계룡(鷄龍)이요, 주(州) 동쪽에 있다.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신라가 5악(岳)을 만드는데, 계룡을 서악(西岳)으로 삼아서 중사(中祀)에 실었다고 하였다. 본조에서는 소사(小祀)로 하고, 봄·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아래 산허리에 작은 못이 있는데, 잠연(潛淵)이라 한다.
아가리는 작고 안은 넓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며, 사람이 나무나 돌로 메우면, 그 이튿날 나무와 돌이 모두 밖으로 나온다. 땅속에 용신(龍神)이 있어서 구름 기운을 타고 드나든다 하여 가뭄을 만나 비를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다”

   
 
  ▲ 숫용추 계곡 인근에서 공사를 하면서 숫용추를 비롯한 계곡이 바위 등으로 인해 훼손되자 주민들이 원상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이 기록과 같이 이곳에 도로를 내면서 숫용추가 깨어진 돌로 덮였는데 어느  날 비가 내리더니 수북이 쌓여있던 돌들이 다 쓸려내려 가고 없었다고 하는데 여러 사람이 목격했던 진술기록이 지금도 남아있다.

숫용추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과 웅덩이가 남자의 거시기를 꼭 닮았다.
카메라 감상방법은 암용추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봐야 하고, 숫용추는 폭포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거시기가 분명하게 드러나니 좀 우습지만 사실인 것을 어찌하랴.

삼신당 바로 앞에는 제석사(帝釋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에도 무학 대사가 기도를 드렸다는 동굴이 있다.
이 동굴 이름은 ‘용구추(龍口湫)’라고 한다. 혼자 보기는 아까운 장소이다.
이절은 6·20사업에도 철거되지 않은 유일한 사찰이다. 

이곳 절에는 계룡산에 온 후 한 번도 이산을 떠난 적이 없다는 스님이 계신다는데 어려운 때 밥을 해먹다보면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삼시 세 때를 국수만 드셨다고 하는, 지금도 국수만 드신다는 ‘서용준’스님이 계신다는 데 인연이 안 되는지 뵙지는 못했다.
언젠가 이절은 철거되어야한다고 하는데 어찌될는지?

이 일대에 유명한 떡 보살이 있었다고 하는데 제물로 떡시루 99 개, 돼지 99마리를 바친 후 초 9,999자루를 켜놓고 제사의식을 했다고 하니 얼마나 성대했는지!
조그만 암자에 살던 떡 보살이 엄청난 제물로 의식한 것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여사가 지원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으니 정말 대단했다고 한다.

박정희대통령 시해 전에 육영수여사가 이곳 계룡산에서 수많은 기도를 드렸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정주영씨가 대통령에 출마한다고 해서 정도령의 시대라고 들썩거렸던 적이 있고, 행정수도 천도지라고해서 난리법석을 떨던 장소여서 그런지 계룡산은 시대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내려오는 길에 무학 대사가 창건했다는 고찰인 용화사가 있다고 하여 보았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용화사는 신흥종교가 아닌 유일한 조계종 전통사찰이었다고 하는데 6·20사업  때 함께 없어지는 피해를 보았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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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 대사는 천일기도를 전국의 산을 돌면서 하게 되는데 지금 남해에 있는 보리암에 이성계의 기도처인 태조기단이 있다. 이성계는 기도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보광산을 금산이라 개명했다.

다시 차길진선생의 말을 들어보자.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올리며 매달린 절대자 셋은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그리고 단군, 이렇게 3대다. 이성계 영가(靈駕)는 “그렇지만 단군 할아버지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반목한 것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하면서 조선 태조 기단(祈壇) 위쪽의 삼불암(三佛巖)을 보기로 들었다.

바위 셋 중 하나는 누워 있고, 둘은 서 있다.
이 바위 셋의 모습이 꼭 앉아 있는 부처 같다.
이성계 영가가 100일 기도를 하기 전까지 바위 셋은 죄다 누워 있었다.
기도를 마치자 바위 둘이 일어나 앉았다.
나머지 하나는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셋이 다 일어났다면 이성계는 조선의 국왕을 넘어설 수 있었다.
중국까지 손아귀에 쥔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단군과 석가가 각자 평가, 추후 맞춰 보고 공감한 이성계의 그릇 크기는 그러나 조선까지였다.”
<2006년3월6일자 주간조선>

그리고 여러 산에 기도를 거쳐 마이산에서 천신으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게 되는데 이곳 마이산에 있는 은수사에는 팔각정이 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으면 마이산과 돌탑만 보고 지나치게 되는데 이곳 팔각정에는 단군화상이 있고 태조 이성계가 도검을 하사받는 그림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고 그 증표로 씨앗을 심었는데 그것이 싹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청실돌배나무가 은수사 절 안에서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계와 무학은 계룡산에서도 많은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 삼신당. 이 곳은 아쉽게도 군부대내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보기가 어렵다.  
 
바로 기도를 드린 장소가 ‘제석사(帝釋寺)’와 ‘삼신당(三神堂’)이 있는 장소이다.
아쉽게도 이곳 제석사와 삼신당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군부대내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 보기가 어렵다.

6·20사업으로 신도 안 계룡대에 있는 모든 종교단체들이 철거되었음에도 이곳 2곳만 건재하고 있으니 무엇이 이들을 지켜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곳 특히 삼신당이 20년간 독립운동을 지원한 애국운동의 살아있는 장소라는 것을 안다면 자연히 숙연해 질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방문해보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암용추를 지나 200여  미터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신당은 큰 나무들이 많은 것을 보면 경치가 무척 빼어난 곳이다.

   
 
  ▲ 암용추의 아름다운 모습  
 
삼신을 모신 천단(天壇)인 대전각(大殿閣)이 있고 뒤에는 그리 깊지는 않지만 천연 동굴이 있는 데 이곳은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려 할 때 이 동굴에 와서 얼마간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한다.
삼신당을 전각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뜻인 것 같다.
이 골짜기를 임금 우자에 자취 적자를 써서 우적골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도장 시설로 적 벽돌 양옥 이층의 태상전(太上殿) 대강당이 있다.
관리자가 바꾸었는지 문에 굳게 시건장치를 해놓았는데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이곳을 본 분의 말씀으로는 전각에는 태극 문양이 아름다웠고, 천정에는 중앙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무지개 색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고 이것은 삼태극(三太極)으로, 그것은 한국이 중앙이 되어 세계를 향해서 뻗어나간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마 이곳에는 누군가에 의해 무속이 행해지는 것 같은데 진정 뜻이 있는 자라면 이 삼신당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곳에 있는 커다란 넙적한 돌인 만복암(萬福岩)은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한자리로 알려져 있었기에 유명하기도 하다. 그리고 바위동굴은 무학 대사가 기도 한 곳이라 한다.
 
삼신당은 1983년에 이곳을 내주고 장태산 휴양림 근처에 이곳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여 이주하고 있는데 한번 찾아가 보니 아담한 모습을 잘 재현해 놓았다.
삼신당(三神堂)현판은 정원강 선생이 직접 쓰신 것이라고 하는데 당 안에 모셔진 것이 특이 했다.
지금은 박영숙 여사가 이곳을 지키고 계시는데 80순이 넘으신 분이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삼신당의 유래를 설명하시는데 말씀하시는 것이 또렷하면서도 소리의 굴곡이 없으신 것을 보니 많은 지혜를 받은 분 같았다.

삼신당 법칙은 천지인 (天地人)삼신인데 천(天)은 하늘이요. 지(地)는 땅이요. 인(人)은 사람이라 천지인 삼라만사 만물이 생(生)하고 사(死)하고 하는데 세상만물 중에 사람이 최고 귀하니, 첫째 내 영을 닦아 불심을 길러야 하고, 둘째 삼강오륜을 지켜 유를 길러야 하고, 셋째 연구조화선법을 길러야 하나니 그래서 유불선삼교니라. 어쨌든 3가지 중 하나만 빼놓으면 코끼리 하나놓고 세 사람이 더듬어 보고 다투는 격이라고 한다.

박영숙 여사가 오래전에 구술예언을 한 것이 있는데 참 흥미롭다.
“송도 3백년 운은 씨를 뿌리는 격으로 사람들이 어둔하고, 삼각산 한양 오백년은 싹을 가꾸는 격으로 사람들이 삼강오륜을 숭상하고 예를 바로 잡아 지킨다. 계룡산 8백년 도읍에는 이미 다 배울 대로 다 배워서 머리가 비상하고 깨칠  대로 깨쳐서 사람들이 미련한 사람이 없으며 밝고 맑아지며 가을열매를 거두는 시기라. 가야산 천년도읍에는 편안하게 사는 시절로 밥도 안 해 먹고 약만 먹으면서 사는 시대로 겨울에 저장하는 시기이라.

삼백년 도읍시절에는 40살이 종명(終命: 인간수명)이고, 그러므로 10세나 12세에 결혼을 함이 적절하고, 삼각산 오백년 시절에는 60살이 종명으로 15세나 18세에 결혼함이 적절하고, 계룡산 8백년 시절에는 80살이 종명으로 30세나 32세 또는 33세에 결혼함이 적절하며, 가야산 도읍에는 100살이 종명이니35세나 40세에 혼례를 갖출 것이다.

앞으로는 앉아서 천리, 서서 만리를 볼 것이다. 또 빨래를 안 하고 꼬매지도 않는다.
두드리지도 않고 밥하는 사람은 밥만 하고 떡 하는 사람은 떡 만 하고 바느질하는 사람은 바느질만 할 것이고 양반 상하가 다 없어지고, 어른 아이를 몰라보고 남녀가 구별이 없고 부자지간에도 재판하고 형제지간에도 재판한다.“

 
한 40분 그늘 아래에서 어른의 말씀이신지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강연을 들고 안내를 받아 삼신당 안을 보게 되었다.

그 흔한 조각성물도 없었고 탱화도 없었다.
마치 초현대식 화랑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는데, 울긋불긋 알 수 없는 색깔로 그려진 문양이 천정에서부터 벽면까지 그려져 있었다. 우리민족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삼신(三神)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장소이다.

천정에는 천단(天壇)을 상징하는 삼태극(三太極)의 팔괘문양을 그려놓았다.
오른쪽부터 하늘을 상징하는 천(天: 元天上帝), 가운데는 인간을 상징하는 인(人: 人皇)을 그리고 맨 왼쪽으로 땅을 상징하는 지(地: 元始地皇)의 단을 모시고 있다.
그 흔한 사람모습이 아니라 알록달록하게 그려진 영국 국기 같은 모습이다. 한마디로 환상적인 그림이다.

천지인을 상징하는 문향이 특이해서 몇 번이고 쳐다보았는데 안정감을 주면서 신비감과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우리의 삼신사상을 재구성하고  여기에 사용되는 문향을 잘 재현해서 여러 군데 쓸 수 만 있다면 정말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룡산에 있는 삼신당을 종교를 떠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패러다임으로 이용할 수는 없는지 뜻있는 분들의 마음자세가 아쉽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향을 알고 쓰더라도 선조들의 뜻이 무엇인지 그 가르침을 정확히 알고 써야 하는 법이거늘 우리나라는 태극기 하나도 잘못 만들어져 쓰고 있으니 상징하는 그것을 잘못 그려서 얼마나 혼란이 오는지 알기나 하는가?

깊이 들어가면 머릿속이 흔들거리니 간단히 말해서 북쪽은 추운 물의 기운으로 검정색으로 남쪽은 따뜻한 불의 기운으로 빨강색으로 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환란이 계속되고 시끄러운데 왜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이가 그리 많은지...

사소하다고 보여 지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국운과 직결되는 것임을 누가 알겠는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고치지 않는 우리의 자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강한 근성도 안보이고 외국에만 빌붙어 사는 무리들만 양산해내고 있으니 여기서는 크게 한숨을 내쉬자. 어~휴~
  
계룡산 삼신당은 원래 평북태생의 백옥성(白玉星) 이라는 분이 묘향산에서 신도 안으로 이주해오면서 정도령이 오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고 믿고 공부를 하던 중 이곳에 수도 하러온 정원강(鄭元剛)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사위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정원강은 “노송의 껍질은 따서 가루를 만들어 붓치고 일주일 만에 떼어보라“라는 습종의 특효약을 교시 받아 이병을 앓고 있던 이선달 등 애국지사와 독립군에게 전해줘 신통력과 도술을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이 정씨를 따르자 계룡산 삼신당과 한양 삼각산에 독립기도를 드릴 수 있는 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부자들 몇 명이 자금을 내어 초하루 보름으로 구국기도를 올렸는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쌀을 가마니로 떡을 하고 풍성한 재물을 차려 놓고 기도를 올린 뒤에 시국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종교단체 같았지만 그 내막은 나라를 되찾고자 염원하는 이들의 밀집이었던 것이다.
뜻이 있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모여들어 다 모여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당시 경성태창방직의 백낙원, 백낙중 사장을 비롯한 많은 지사들의 협력이 있게 되었고 이층 양옥집을 지었다. 산꼭대기에 빨간 벽돌을 날라다 훌륭한 이층 벽돌집을 지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후 삼신당은 조선팔도 도사들이 만나 독립운동을 하는 거처로 변모했다고 한다.
매월초하루 보름날 한양삼각산에서는 저녁 술시(戌時)에, 계룡산에서는 밤 자시(子時)에 어김없이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운수기도가 지성으로 시행되었다.

3·1운동의 실패로 조성된 신도 안 이주 열풍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넘쳐나게 되었다.
일제의 멸망을 기원하며 1921년에는 계룡산 신도 안에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말까지 퍼지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일본으로의 침공을 외치기까지 하는 위험한 수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곳을 일제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는가?

이곳에서의 민족주의 성향의 독립운동의 열기는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위험지역으로 낙인찍히게 되고 신종교단체를 탄압해 나가게 되는데 치졸하게도 사기, 폭력, 금품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어 마음대로 탄압하게 된다.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을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 안은 그 불꽃이 타오르는 심지가 되었으니 민족의 성지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믿기지 않는 것은 신도 안에는 외국인이나 그 기운은 맥을 못 쓴다고 한다.
“계룡산 장군봉 밑에서 통신대대장인 미군소령인데, 새벽에 호랑이가 물어 메쳐서 죽었거든. 양갈보, 미군 죽은 거 보고 옷도 안 입고 내려왔어, 날이 밝아서. 그 이튿날 뜯어서 상봉에 옮겼거든 (그게 언젭니까?) 을축년(1949년) 해방 후 바로. 신도 안에 왜놈이 못 들어갔어. 주재소 안 죽으면 불나고 자꾸 죽어. 주재소 옮겼어. 되놈도 재미 못 봐. 되놈이 장터 점령하고 음식점 했는데 세 놈 죽으니 되놈 안 들어와. 왕도의 왕기(王氣) 시작도 안한 덴, 뭐이든 처음은 무서운 힘이거든, 외국기운은 맥을 못 써요“(김일훈저 신의원초 중에서)
 
광복 직후인 1948년, 미군은 계룡산 주봉인 천왕봉에 군용 통신 탑을 세우려 했다. 건축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 병사가 속출했다.
미군을 물리고 우리나라 군인이 공사를 전담한 다음에야 탑이 완공될 수 있었다.
이후 통신시설 관리를 명분삼아 슬그머니 계룡산으로 돌아 온 미군은 원인불명의 통신장애가 잇따르자 한국군에게 모든 것을 넘긴 채 완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주간조선 2005년11월12일자)

그렇지만 “계룡산 산신 찾는 소리에 귀가 시끄러워 벌레 같은 중생들 징그러워 모두 내 쫒을 난다. ” 라고 예언되어 6·20사업으로 한사람도 없이 사방 십리 밖으로 모두 내쫓겼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역사의 미완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곳이 우리의 독립운동의 역사적 증거이며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의 회복이라는 터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방치되고 있으니 애석할 뿐이다.

나라를 위하는 유적들이 함부로 방치되고 후손들에게 그분들의 정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누가 일하려 하겠는가?
더욱 이곳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시대에 부끄러울 뿐이다.

정원강 선생이 사상범으로, 독립운동혐의로 붙잡혀 경북성주경찰로 넘어가 고문 끝에 돌아가신 후, 그 며느리인 박영숙씨가 정원강 선생을 독립투사로 인정해주고 삼신당을 독립운동의 산실로 육성해달라고 외쳤건만 아직도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독립지사들의 기도장소로 그 숭고한 얼이 담긴 유물이 방치되어 손상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으니 역사 앞에 또 다른 죄를 짓는다는 의식이 깊이 든다.

삼일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선조들이 애국과 동지애로 만주에서 관동군 총칼에 피 흘리고 죽어 가고 이곳에 계룡산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지사들의 그 고혼(孤魂)이 오늘까지 위로받을 곳이 없다는 것은 너무 허망하다.

이곳을 길이 보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행이 이곳을 계룡시에서 사적지로 정한 것 같은데 다행스러운 일이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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