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나반존자는 이쯤하고 옆으로 돌아가서 보면 호랑이를 옆에 데리고 있는 흰 수염을 기른 백발의 노인이 앉아 계신다.

이런 데를 처음 가는 분은 좀 괴기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들 것이다.
본인도 처음에는 절을 찾아 이러한 울긋불긋한 단청이나 탱화를 볼 때면 약간 으스스 하고 뭔가 꺼림 칙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찌할 수 있으리, 우리의 국보 등 보물이 여기에 있으니 보기는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이것을 만든 분들은 우리의 직계선조들이 아닌가?

그래서 딱 들어가서 이러한 탱화를 쳐다보았는데 좀 무섭기도 하고, 사실 분위기도 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

   
 
  ▲ 개태사의 산신탱화  
 
탱화를 쳐다보면 그 인상들이 엄숙하다 못해 약간 공포감(?)도 들어 ‘푸줏간에 들어가는 소걸음’ 마냥 그 앞에서는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끌려나온 사람같이 ‘달팽이 눈이 되듯’ 겁이 나서 소심하게 기가 꽉 꺾인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너 절 안 할래” 하는 것 같아 우선 절부터 하고나니 좀 덜 무서운 것 같아지게 되었는데, 지금은 향도 한대 올려드리고 탱화를 째려보듯이 쳐다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어떤 때는 법당에 기도하는 불교신자분이 있던 말건 눈을 멍하니 뜨고 요모조모 살피곤 한다.
물론 절은 한다. 구경 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이곳 충청도에는 절보다는 천주교나 개신교 전도지, 전도당 그리고 유학의 명소들이 많다.

내친김에 하루 강경의 관광코스를 공개하겠다.
여기서 강경국도를 따라가다 익산 경계에 들어서고 200미터 오른쪽으로 유명한 화산의 나바위 성당이 있다.

한국천주교사의 중요한 성지이며 김대건신부가 최초로 국내에 상륙하여 전도를 시작한 역사적인 곳이다.
이곳 성당에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나바위에 있는 동학농민운동 때 망해버린 김여산(金如山)의 집을 1,000냥에 사들여 개조하고 성당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한국 초기 본당의 하나로서 당시의 풍속에 따라 남녀의 좌석을 칸막이로 막고 출입구도 각기 달랐는데, 우리문화의 특성에 맞게 한옥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나바위 성당 건물은 회랑이 있어서 한국적인 미를 맛볼 수 있는 곳 중에 하나이다.

정말 호젓한 성당이다. 건물내부에 있는 여러 점의 성화는 정말 문화재적 가치가 있어 보이는데 잘 그려져 있으니 빠트리지 말고 감상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성당 뒤로 언덕 위에 정자 뒤에는 바위에 삼세석불이 새겨져 있으니 찾아보기를 바란다.

천주교와 불교의 만남에 어울리는 절묘한 장소인데, 종교적인 화합의 포퍼먼스를 열기에는 최고의 터 같다.

여기서 다시 강경나루터에 오면 황복을 파는 집이 많은 데 황복 탕으로 포만감을 채우고 나루터 뒷산에 잇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팔괘정과 그의 스승이자 예학의 태두인 김장생이 강학하던 ‘임이정’이라는 정자를 들러보자.

아래에 있는 죽림서원에는 율곡과 사계의 위패를 모셔놓고 있는데 이곳이 유교적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특히 ‘팔괘정’의 건물 뒤 암벽에는 우암 송시열이 각자한 글씨가 있다. 당대의 조선의 유학의 거두들이 이곳에서 학문과 강학을 했던 곳이니 그 세도가 대단했던 장소이다. 이곳에서 조선사대부의 권력핵심에 있었던 자리이자 전국의 유학자를 움직이고 국가의 대소사와 국가의 왕을 견제하는 정신적인 지주노릇을 했다.

여기에서 옥녀봉 쪽으로 가서 금강나루 그 유명했던 강경포구를 전망하고 시원한 경치를 본 다음 전설을 듣고 내려가다 보면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북옥감리교회’인데 당시 선교사들이 서양인이어서 한옥이 부적절하여 다수의 초기기독교회가 헐리거나 개축되어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은 반면, 이곳은 당시의 예배 모습과 예배당 형태 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희소성과 중요성을 인정받아 문화재로 인정받은 곳이다.

이 일대는 근대 건축물도 많으니 잘 찾아보면 좋은 관광코스가 될 것이다.
 
가을에 간다면 ‘발효젓갈산업특구’로 지정되어 싸게 젓갈도 한웅 큼 사올 수 있으니, 오는 길에 미내 다리도 보고 여기는 용머리(龍首)를 잊지 말고 감상할 것이며 관촉사도 들린다면 마음이 풍요로워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시 개태사 산신탱화로 가보자.
 
산신(山神)!  우리가 그렇게 많이 들어 본 이름 아닌가?
절 안에 곁방살이를 하고 있지만 불교에 흡수 되지 않고 여전히 꿋꿋히 자리를 잡고 계시니 어떻게 보면 고집 센 노인네 같다. 그래도 얼굴을 가까이서 살펴보려면 우선 향을 한대 피워 올리고 절을 해야 옆에 있는 호랑이가 달려들지 않을 것 같다.

산신이 ‘야-호(虎)-야’ 하면 그 무서운 호랑이가 가만히 있겠는가. 그래서 산에 가면 ‘야-호(虎)’하는 것이 호랑이를 부르기 위한 호칭이었다고 한다.

산신탱화는 수염이 허옇게 백발의 노인이 배경을 산으로 하고 그 옆에는 호랑이가 있어야 하고 소나무와 시종이 필수조건이다.

여기에 절벽 위 평평한 곳, 부채, 불로초, 복숭아, 인삼, 시종이 화로에 주전자를 놓고 물을 끓이는 장면, 호리병이 달려있거나 달려있지 않은 지팡이 들이 등장하곤 한다. 

사실 절에 가면 우선 감상해야 포인트는 대웅전이 있는 법당의 천정과 산신이 그것인데, 잘 그려지고 장식된 천정을 보면 정말 동화속의 한 장면 같다.

오색에 치렁치렁하게 그려진 배경을 깔고 잘 지어진 닫집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커다란 용이 여의주를 물고 꿈틀거리고 금시조나 학이 날라 다니며  심지어는 도깨비 문향도 있으니 이런데 서는 감탄사가 나올 뿐이다.

그리고 산신탱화! 나는 이런 관점으로 보곤 한다.

산신에게서는,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나?, 안 쓰고 있나? 아니면 상투를 하고 있나?
머리를 빡빡 깎았나?, 아니면 긴 머리인가?
수염이 백발인가? 아니면 검은 수염인가?
젊은 모습인가?, 아니면 나이 지긋한 분인가?
입고 있는 복장이 어떠한가?, 노끈을 메고 있는 모습인가?
혼자만 폼을 잡고 있나?, 아니면 주변에 다른 분들과 같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나?
주변에 있는 분들이 1명인가?, 아니면 2명인가?

그리고 호랑이,

이놈이 호랑이인가?, 범인가?, 고양이 인가?
이놈이 백색으로 그려진 백호 인가?, 아니가?
이놈이 1마리인가?, 2마리인가? 또는 그 이상인가?
이놈의 인상이 째려보는가?, 장난을 치고 있는가?   
이글을 일고 실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어쩌랴.

나만의 감상법이다. 이런 것을 왜 보지 않으려고 하는지, 생각을 바꾸고 감상하는 법을 조금만 바꾼다면 이런 아기자기 함을 찾아가는 여정에 무한한 마음의 평온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이런데서 종교의 차이를 생각하고 미신으로 본다면 자신이 미신이고 사이비가 아닌가?

이러한 그림을 모시는 측에서는 신성시 할 것이고 다른 종교를 가진 분은 이를 미신 시 하는 것, 이 모두가 종교라는 색깔을 쓰고 마음속에서 선을 긋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을 넘어서자. 그림은 그냥 그림이다.

거기서 아름다움과 재미를 느낌으로써 영혼이 따뜻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소소한 재미를 느끼지 않겠는가. 이러한 그림에서 신성이니 미신이니 따지기 전에 그림의 어떤 점이 멋이 있고 해학적인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그 이전부터 이 땅에서 궁 굴러다니면서 그려 놓은 것이 아닌가?

그분들이 그린 그림이 종교성지 들에 있다고 해서 편견을 가질 필요가 무엇이리요.
그림을 정성껏 그린 그분들의 고마움을 봐서라도 보는 순간만이라도 ‘종교색깔을 훌훌 털고’ 이 그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서 감상하는 여유를 가지는 것은 어떨까?

요새는 서양화 그림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심지어는 영화까지 만들어 지는 것 같은데 이런 관심을 우리 것에도 가져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산신탱화로 유명한 곳은 직지사와 신원사 중악단이다.

신원사 중악단은 여기서 가까이 있고, 요사이는 해가 기니 오후 6시 이후에 다녀오는 것이 좋다.
그 시간 이후는 문화재관람료를 안 받으니 왠지 공짜 같은 느낌이 든다.    
중악단에 대한 설명은 각설하고 여기에 모셔진 산신을 한번 잘 살펴보시기를 권한다.

여기를 참견할 때는 도사(道師)급 수준의 분(?)들이 가끔 수행을 하고 계시니 몸가짐을 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함부로 산신탱화 앞으로 가까이 갈수 없는 분위기가 너무 엄숙한 곳인지라, 산신탱화 앞에 누군가 앉아 있으면 다음에 아무도 없을 때 가는 편이 낫다. 여기에 있는  산신 탱화, 그중에 호랑이 정말 죽인다!
머리 위에 솔가지에 앉아 있는 까치를 보고 째려보는데 그 놈의 표정이 가히 백만 불짜리이다. 뭔가 볼떼기에 불만이 가득한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인상하고는 더러워서 이것을 보고는 배꼽 빠질 뻔했다.

여기 모신 산신은 검은 수염에 젊은 선비모습인지라 상당히 근엄하고 멋있게 보인다.
이것이 전형적인 산신의 모습이 아닐까? 원래 계룡산신은 여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분은 누구일까? 

직지사에는 한국 최고의 걸작품으로 알려진 산신도가 있다.
나는 여기를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어 보지를 못했는데, 여기를 보신 분들의 말씀으로는 산신의 수염이 검고 산신 무릎에 안기듯이 바짝 붙은 호랑이 역시 위엄이 있어 눈빛이 상대를 노려보는 것이 무섭다고 한다.
그리고 뒤에 늘어진 소나무는 정말 잘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보고는 싶지만, 문을 안 열어 줄 것 같다.

이제 개태사 산신으로 가보자. 이절의 산신탱화는 평범하지 않다.

역시 무엇인가 다르게 두 분이 더 그려져 있다. 옆에 있는 두 분 ‘누구세요’ 물어 보니 대답이 없으시다.

먼저 주인 되는 산신의 이력을 알아보자 .

조선후기 설암추붕(雪巖秋鵬)이 남긴 묘향산지(妙香山誌)는 사료의 가치를 중시하여 특히 단군에 관한 금서인 제대조기(第代朝記)를 인용하여 환인의 아들인 환웅과 백호사이에 단군이 탄생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환웅은 천신인 환인과 지모신(地母神)인 웅녀 사이에서 탄생하였고, 단군은  환웅이 새로운 지모신인 흰범과의 사이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곰은 범보다 북방의 고아시아족으로 예족을 칭하고 범은 좀 더 남방에 위치한 맥족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이 산신각의 탱화와 상통하는 보편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신각의 노인으로 그린 산신령은 곧 환웅이고, 범은 백호로서 환웅과 백호가 단군의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산신도에 전하는 산신과 백호의 그림이 단순한 산신의 환신이자 심부름꾼인 범이 아니라 산신을 부계로 범을 모계로 단군의 탄생을 준비하기위한 교통의 장면인 것이다. (허흥식저 신령의 고향을 찾아서)

이러한 한웅과 단군이 산신으로 모셔지는 이유는 한웅이 태백진교(太白眞敎)를 창교(創敎)한 분이고, 단군왕검이 덕교(德敎)를 창교한 분이기 때문에, 두 종교의 교조로 모셔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환웅과 단군의 초상이 산신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그려져 전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도명산과 각산에 모셔지는 산신령들과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팔도명산과 각산에 모셔지는 산신령들은 그 고장에 처음 터를 잡은 종족의 우두머리이거나, 역사에 위인으로 남은 분들이다.

봉우(鳳宇) 권태훈 선생에 의하면 “어쨌든 산신도 정신계인 천상에서 임명하는 선관(仙官)중의 하나로서 임명직인 셈이다. 지상의 산악을 주관하는 정신계의 관리가 산신인데, 하나의 산에 하나의 산신과 여럿의 부산 신(副山神) 및 그 산의 각 지역을 맡은 지역산신들이 존재한다.

보통 각 지역의 주산에는 산신이 존재하는데 두 사람의 학인을 성공시키면 산신도 등급이 한 단계 올라간다고 하며 그래서 어떻게든 수도자가 성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하는 것이 산신의 주요 임무라 한다.
산신가운데 제일 원만하고 인자한 분은 역시 백두산 산신으로서 정신수련 학인들을 가장 성심껏 후원해 주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계룡산산신은 매우 엄격하다. 정신계 7계 이상으로, 인간으로서 도달 할 수 있는 최고 단계인 성인의 경지이다. 지상에 있을 때 전생에 천자소리 들었던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산신으로 있으면서도 성인 대접을 해야 좋아한다고 한다.
계룡산 학인들은 지금도 산주(山主)에게는 사배(四拜)로서 예를 표한다.
가끔 도인들(정신계 4~5계의)이 계룡산에 와서 산신이 영접을 안 한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툴툴대는데, 이는 자신의 계제만 알지 계룡산 산주의 계제가 이렇듯 높은 줄은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계룡산은 산은 작아도 정신계의 센터이며 사령부인 천상 자미원(紫微垣)의 동자미(東紫微) 구성(九星)의 천상(天象)이 조응(照應)하는 원혈(元穴)이 있는 명산으로서 역대로 수많은 성현들의 수도처였던 곳이다.
어쨌든 백두산을 빼놓고, 남한의 산중에서 가장 계제가 높은 산신이 주재하시고 있는 산이 계룡산이다.

계룡산의 지역산신(산안에 여러 지역이 있다)이 보통 다른 산의 주산신과 계제가 같을 정도이다.
계룡산 산주는 매우 엄격해서 학인들에 대한 신상필벌이 엄정하다. 산에 와서 공부에 태만하거나 성정이 사특한 자는 대번에 퇴출시켜 버린다. 잔술(小術)도 잘 안 봐준다. 그래서 공부 성공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다.

계룡산 초계가 다른 산의 재계(再階:2계) 만큼이나 어렵다고들 한다.
계룡 산주 입장에서는 계제를 쉽게 주면 학인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산중이 시장바닥처럼 될 것을 우려해, 그것이 싫어서 먼 산 바라보듯 학인들을 대한다는 것이다.
계룡산 산신은 아기봉과 천황봉, 연천봉을 두루 다니며 산을 주재한다.”
(봉우사상연구소 자료)

산신령도 시대별로 그 모습이 변해서 그려지고 있는 것 같고 나이 드신 분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젊은 분도 그려지고 여자 분들도 있는 것과 심지어는 상투를 튼 모습도 있는 것을 보면 산신령도 옛날분만 산신령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시대별로 학식 있었던 분으로 나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산신령으로 임명되는 것 같은데 또 지역수장의 위치도 바뀌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노끈으로 맨 도포, 숱이 많은 검은머리와 수염, 나뭇잎망토는 단군의 초상이나 입상에 자주 보이는데 이런 것이 호랑이와 더불어 단군과 관련된 징표가 아닌 가해서 유심히 쳐다보곤 한다.
참고로 나뭇잎망토는 중국의 복희씨 초상에도 이러한 망토를 입고 있는데 이분도 단군의 후손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면 산신도를 한번 살펴보자

산신도에는 보통 호랑이 1마리와 산신 그리고 동자 1명을 함께 그린 산신도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때로는 호랑이 2마리나 여자로 보이는 분들이 1-2명 그려진 그림도 있다.

이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호랑이 2마리가 호위하는 분은 환웅천왕이고, 호랑이 1마리가 호위하는 분은 단군왕검이다.

부인한분이 있는 것은 한웅천왕의 부인인 매화부인, 즉 ‘직녀’이고, 부인 두  분이 같이 있는 것은 단군왕검의 두 명의 부인, 즉 웅심국왕의 딸인 ‘웅녀(熊女)’와 하백 부소갑의 딸인 ‘하백녀(河伯女)’이다.
 
산신도에 그려지는 호랑이는 백호이다. 백호는 서쪽과 금성(金星)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천제(天帝)의 호위를 담당하는 별이 금성이다. 그러므로 산신도에 모셔진 산신이 금성의 호위를 받는 천제의 화신임을 알 수 있다. 천제의 화신은 곧 천자(天子)이다.

그러면 동자는 누구일까? 동자는 ‘마고(麻姑)’의 외동아들을 상징한다. 그를 막동이라고 한다.
막동이는 ‘막동이’(邈東夷), 즉 마고에게서 태어난 동이족을 의미한다.

뒤에 산은 그것이 고조선영역에서 전해지고 한반도로 축소되었을지라도, 우리의 팔도강산이다.
불교의 수미산을 가운데에 두고 도교의 오악이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 산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산들이다. 불필요한 불교와 도교가 과도하게 덧씌워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산신은 아직도 불교에서는 단지 원시적인 미신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는 바, 가야산 해인사의 성철스님은 교리적으로 무속적인 요소에 열정적으로 반대하고 ‘정화된’ 불교를 주창하면서 해인사의 모든 건물과 암자에서 산신제단과 그림을 치워버리고 사찰의 박물관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성철스님이 타계하신 후 일반인들이 산신을 많이 찾기 때문에 절반이상의 암자에 이들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화려하게 산신이 부처모습으로 바꾸어져 분칠되어 있으니 볼썽사납다.

산신과 같은 비불교적인 신이 독립적인 탱화, 제단, 공양물, 기도, 찬탄, 심지어는 독립적인 전각까지 가지게 될 때 이것이 자칫 불교의 신들에 대한 공양을 약화시키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는 데 그 근본이유가 있을 것 같다.

단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를 한결같이 지켜주고 조용히 자리하는 것만도 우리에게 감사하고 힘이 되는 것이 아닌가?

수천 년에 걸쳐 그 자리에 있게 해온 조상들의 말없는 몸가짐에서 그들이 우리와 우리 가족들 그리고 나라를 위해 눈물 흘리고 때로는 기뻐했을 삶이 농축되어 온 자리가 아닌가?

우리들의 편리함과 종교적인 이익만을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화려한 분칠도 하지 말고 하나의 목마른 생명수로, 한 줄기 고운 햇살로 그냥 놔두고 더 이상 서럽게 만들지 말고 자리하게 하여주자.
우리 곁에 오래오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바람이 함께 했으면 한다는 생각이 든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08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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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신

옆으로 눈길을 돌려 이제 칠성님을 쳐다보자.
이분은 칠성여래라고 불리어지는 분이다. 전형적인 탱화라 별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이분도 ‘짬밥’으로 따지면 산신 못지않은 분이다.

 
 
 
  ▲ 개태사 칠성탱화  
 
우리의 민족이 북두칠성별의 기운으로 이 땅에 태어났으니 우리가 외계인이라면 이별이 우리의 고향인 것이다. 이 별의 기운에 감응해서 우리민족이 태어나고 대를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삼신당의 칠성탱화를 보고 환상적인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아무 그림도 없이 벽에 별모양으로 북극성과 북두칠성 및 주변의 별들을 배열해 놓았는데, 정말 ‘칠성신앙’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조각인지라 이것이 진정으로 칠성각이었다는 생각에 절에 가면 부처의 모습을 한 칠성여래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부처모습을 한 칠성신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별자리를 배열해 놓았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러한 칠성벽화는 장식품으로 사용해도 절묘한 느낌을 줄 것 같다.

칠성신앙이 어떠한 것이기에 절집 안에 꿋꿋이 그 모습을 이어 오고 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만큼 북두칠성에 목을 매다시피 하는 민족은 아마 없을 겁니다. 북두칠성에 대한 선조들의 관심은 말과 행동에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북두칠성이 앵돌아 졌네.’ ‘마음 한번 잘 먹으면 북두칠성이 굽어본다.’ 하는 옛말을 보면 북두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은 정화수를 떠놓고는 칠성별에 소원을 빌었고 죽어서는 칠성판에 누워야 하늘 문을 통과한다고 믿었어요. 그리고 상여가 나갈 때도 좌우로 7명씩 양두칠성과 음두칠성이 배치되었구요. 왜 우리 민족이 북두칠성에 그렇게 집착했을까요?”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의 저자이자 한배달 역사천문학회 부회장 ‘노중평’씨의 말이다.

우리가 일제 36년의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잃어버린 칠성 신앙을 오히려 일본이 계승해 최근 해외로 문화수출까지 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정도이니 여기서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음력 7월7일 행하는 칠석제는 은하수 때문에 만나지 못하던 견우성과 직녀성이 까치와 까마귀가 놓아주는 오작교를 건너 1년에 딱 한 번 만나는 날로 운우의 정을 나누는 것을 축복해준다는 이러한 의미는 북두칠성과 주변의 별들과의 운행을 뜻 하는 것으로 그 만큼 칠성을 중요시 했던 것이다.

우리의 옛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장독대 위에 정안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께 비나오니 부디 금 두꺼비 같은 아들하나 점지해 주옵소서.”라고 소원을 빌어 온 분이 북두칠성이다. 밤하늘의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출생을 기원하는 흰옷 입은 여인의 치성(致誠)은 인간의 지속을 염원하는 원초성이 담긴 것이다.

치성광여래는 북두칠성의 가장 중요한 북극성이고 큰곰자리에 있다. 큰곰은 곧 환웅이고 태양과 달의 맏아들이었다. 환웅은 삼천의 천신을 거느리고 단수가 우거진 신단에 이르렀고 신시를 열었다고 한다.

환웅은 지모신인 백호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음으로써 개천의 시조를 탄생하였다.
북두칠성에 기원하는 것은 환웅의 강림으로 잉태를 기원하는 백호의 재현인 것이다.
우리의 칠성신앙은 그렇게 커다란 의식 없이 순수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칠성신앙은 고대 이래로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고유 신앙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이 우주에서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야 하고, 길흉화복은 물론 수명까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칠성님이 주관하고 있다고 믿었다.

북두칠성은 우리 조상들이 믿던 삼신 상제님을 별로 나타낼 때 붙여지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칠성신앙은 신교신앙의 하나였던 것이고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우리는 북두칠성의 자손 즉 천손민족인 것이다.
 
그래서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면서 맨 먼저 지내던 초례(醮禮)는 칠성님께 드리는 인사였고 역대 임금들이 지내던 초재(醮齋)도 칠성님께 올리는 인사와 기원이었다고 한다.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과 북두칠성을 호위하는 28수(宿) 별자리를 본 따 조경한 독창예술품인 동시에 북두칠성 신앙과 삼신상제 신앙의 대표작품이 경복궁과 창덕궁이다.

우선 광화문 앞과 경복궁 안에 있는 해치('해태'라고도 호칭)는 자미궁(자미원을 궁궐에 비유한 표현)의 남쪽 하늘을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경복궁 근정전 실내는 자미궁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내전 안의 장식 색깔은 자미원을 상징하는 검붉은 자주색, 비취색이다.
임금의 용상 뒤에 있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는 용상이 해와 달의 음양과 다섯 개 산의 목화토금수 오행(五行) 즉 하늘의 칠정(七政)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한편 천장에는 용 두 마리가 각 28개의 발가락(하늘의 28수를 상징)으로 여의주(임금)를 호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조선시대의 고궁은 북두칠성이 있는 하늘의 궁궐, 자미궁을 본 따 지은 대궐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민족 고유의 칠성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조선시대에 명나라의 통제로 하늘의 제사권을 철저히 잃어버리고, 민간신앙으로나마 존립해오다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나라와 민족을 지탱하던 정신적 지주였던 칠성신앙을 몰아내기 위해 칠성신앙의 대표작인 경복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총독부를 지으면서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칠성신앙을 포함한 온갖 전통신앙을 탄압하여 없애 버렸다.

다행히도 총독부는 95. 8. 15.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철거되어 지금은 옛 모습대로 복구되었다.

민족정신의 정기를 바로 세운 쾌거였으나, 궁궐만 복구하였을 뿐 아직도 우리는 경복궁 조성에 간직되어 있던 진짜 의미인 ‘칠성신앙’과 ‘삼신상제 신앙’은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대다수 한국인은 경복궁에 그런 의미가 있었는지 조차 잘 모르고 있으니 또 한 번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다.

자미성은 북두칠성 동북쪽에 위치한 가장 강력한 기운의 별로 백두민족인 우리가 모시는 별로 천자(天子) 자리를 움직이는 별이므로 자미성의 기운을 받은 국가는 아시아의 천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서도 꿋꿋이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자미성은 우리나라 곳곳을 비추고 있지만 그 기운 자체는 남쪽이 강하다.
해가 뜨는 동쪽인 함경도와 경상도에서는 권력적인 사람이, 해가 지는 서쪽인 평양과 전라도에는 문화적인 사람이 나온다. 21세기 세계의 주인은 문화다. 자미성의 천자 자리도 권력에서 문화로 변하고 있다.

문화가 꽃피는 시대, 자미성의 기운으로 태어난 백두민족의 힘으로 문화의 중심에 우리나라의 위상을 드높일 때다. (노중평저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중에서)

북두칠성의 깃발, 결국은 그 중심에 한류(韓流)가 더 높아 질 수 밖에 없다.
가수 ‘비’의 미국공연이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의 한류에 두려움을 느끼는 또 다른 세력이 있음을 감지해보지만 결국 이러한 문화적인 전도를 막을 수는 없다고 보여 진다.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진 문화 사업이 그 모습을 점차 들어 낼 시대가 왔고 그 중심에 ‘간방(艮方)’의 한민족’이 있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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