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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09 黃帝內經講義 (四) 1965년 7월호
  2. 2008.06.09 黃帝內經講義 (2) 1965년 1월호


출처: http://www.handongseok.org/lecture4.htm

黃帝內經講義 (4) 1965년 7월호

韓東錫


第一編 變化原理

    C. 十五分紀와 그의 槪念

  위에서 말한 바는 五行의 一般的 性質 다시 말하면 五行의 普遍的인 槪念에 不過했던 것이다. 그러나 宇宙의 變化原理인 五行은 各各 그가 지닌 바의 一般的 原理를 가지고 있거니와 여기에서 그의 一般的인 普遍性을 좀더 分析하여야 할 必要가 있기도 하며 또 그 自體가 普遍性에서 脫出하여 具體性을 띠려고 애쓰고 있기도 한 것이다.

  가령 木氣의 境遇에서 例를 들어보면 木을 生하는 힘(力)이라고 規定하는 것은 木의 作用에 대한 一般的인 모습에 不過한 것이다. 그러나 實際로 生하는 힘을 測定함에 있어서 그 힘의 强弱의 差를 無視할 수 없는 것이므로 여기에서 다시 힘을 細分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木의 힘이 絶對的으로 中道的 作用을 하는 境遇와 또는 너무 過强한 境遇와 너무 不及한 境遇의 셋으로 區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各人이 現象界를 觀望할 때에 위에서 말한바와 같은 세 가지 分裂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無數한 分裂을 目睹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人間의 認識이 언제나 皮相的인 觀望에만 머물기 쉽고 具體的인 觀察을 하여내지 못하게 되는 때문인 까닭이다. 萬一 吾人이 이것을 細密하게 觀察하여 낸다고 하면 그의 所謂 無數한 分裂을 하는 것 같던 變化狀態는 一이 三에서 分裂되고 또 그 一이 (첫번에 一이 三에서 分裂되면 三으로 分裂했다는 結果가 되지만 그 發展한 바의 三이란 것은 또한 獨立된 三個의 一에 不過한 것이다.) 다시 三으로 分裂하는 過程의 無數한 反復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變化過程에 있어서의 所謂 分裂作用은 本質的으로는 三數의 反復分裂이므로 五行의 一般的 槪念은 다시 다섯 가지라도 그 하나하나는 반드시 三으로 分裂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畢竟 이것은 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十五로 分裂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槪念設定에 있어서도 十五種의 新槪念이 다시 設定되어야 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一般的인 槪念과 具體的인 槪念으로 나뉘게 되며 따라서 十五分紀設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平氣 太過 不及이 五行의 三種이 된다는 것도 찬언할 餘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以下에 그의 十五種槪念을 說明하기로 하겠다.

    (가) 평기

  木氣

  木氣의 平氣를 敷和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木의 平氣라는 것은 木氣가 生함에 있어서 가장 알맞은 氣運을 平氣라고 한다. (火土金水의 境遇도 一般이다) 그러므로 그 槪念을 敷和라고 하는 것이니 이제 그의 뜻을 硏究하여보면 「敷」자의 뜻은 한오리로 쭉 뻗어나가는 狀態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日用하는 말에서 그 例를 찾아보면 鐵道를 建設하는 것을 敷設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의 建設하는 形態가 一絲不亂하게 두 줄로 쭉 펴져 나가는 까닭에 敷設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和」자의 뜻을 生覺하여 보면 不强不弱하며 맞게 適用될 수 있는 것이 和인 것이다. 그런즉 木氣의 正氣는 오직 敷하기에 알맞으며 동시에 그것이 和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過不及이 없는 木化作用을 할 수 있는 形象을 代表하는 것이 바로 敷和인 것이다.

    (나) 火氣

  升明

  火의 平氣를 升明이라고 하는 것이니 升字의 뜻을 살펴보면 十字의 변에 千字를 쓴 것이다.(此後부터는 ㅆ十+ㅆ千이라고 表示하겠다.) 그런데 自然數에 있어서 十과 千은 모다 陰數의 分裂인즉(下의 自然數에 詳論할 것임) 宇宙間의 明은 여기에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런즉 火氣의 平氣는 明을 生하기에 알맞은 것이며 또한 그의 正常的인 發展의 目的은 明을 生하려는 데에 있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明이란 것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火水가 均衡狀態에 놓였을 때에 明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그 明은 萬物을 完成시키며 모든 일의 目的을 達成하는 基本일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具體的으로 말하면 어떻게 생기는 것이며 또 그 正體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說明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精神問題를 說明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 土氣

  備化

  土의 公正한 作用이란 것은 모든 化할 수 있는 條件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平氣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化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氣運이(金木水火土) 가장 잘 中化되어서 不偏不黨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木火金水와 같이 偏僻됨이 없는 오직 絶對的인 中이며 또한 正中化한 土가 되는 것이니 즉 備化가 되는 것이다. 化字의 뜻은 本是 和字와 同意異稱인것에 不過한 것이다. 즉 和는 事物에 대한 指稱이며 反面에 化는 形而上에 대한 標示인 것이다.

  그런즉 化는 陰陽之中이기 때문에 그의 作用하는 面으로 보면 모든 事物의 過不及을 調節하는 氣運이지만 그 象으로 보면 寂然不動한 動靜의 中인 것이다.(中은 알맞다는 뜻이 있음) 그러므로 一般的으로 土를 가리켜서 中이라고 하지만 嚴密히 區分하면 平氣의 土 즉 備化만이 絶對中인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서 平氣의 土를 備化라고 命名한 것은 實로 這邊에 理由가 있는 것이다.(詳細는 土化作用에서)

    (라) 金氣

 審平

  金氣는 萬物을 生長에서 收藏으로 轉換하게 하는 最初의 氣運이란 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바 있거니와 收하는 기운이 藏하는 기운과 같이 恒常 殺伐하는 性質이 있으므로 그러한 境遇에 金氣가 萬一 公正性을 잃으면 收藏之道에서 第一 重要한 目的인 包陽作用∼다시 말하자면 金水가 包藏하는 바의 精神이 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五行中에서 金氣처럼 平氣의 維持가 重한 것은 없는 것이다.

  金氣는 本來 平定하는 것이 그의 機能이지만 또한 그의 性質이 자칫하면 猛暴에 치우치기도 쉬우므로 그의 平氣를 審平이라고 한 것이니∼다시 말하면 平定하기는 하여야 하지만 잘 살펴서 하여야 하는 것이므로 審字에도 역시 土의 性質을 內包하고 있다는 것을 잘 記憶하면 되는 것이다.

    (마) 水氣

  靜順

  水氣는 本是 五行의 墳墓이며 또한 精神의 府庫이기도 한 것이다.(精神論에서 詳述할 것임) 그런데 水氣를 詳察하여 보면 그 象은 靜的이고 其性은 順한 것이다. 우리가 一般的으로 靜寂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것을 잘 考察하여 보면 靜이라는 것은 絶對的인 것을 말하는 것이요 寂이라는 것은 相對的인 것을 意味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寂은 動하려고 하여도 動할 수가 없는 것이요 靜은 동하려면 動할 수는 있지만 動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글자의 象에서 살펴보면 寂字가 ㅆ ㅆ叔 으로 되어있는 것은 收藏하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뜻이 있고 靜字의 象을 살펴보면 ㅆ靑ㅆ爭 한 것은 靑(木)과 相爭하려는 意志는 있으나 아직 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吾人은 여기에서 寂에는 土의 象이 內包되어 있고 靜에는 水의 象이 潛藏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水의 平氣를 正名함에 있어서 靜字를 쓴 이유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順字의 意味를 生覺하여 보면 順字가 ㅆ ㅆ頁 하였으니 坤의( 는 坤의 古字) 큰 머리라는 象이 있으니 즉 坤土의 始作이란 뜻이 있다.

  이와 같이 보면 水가 平意일 때는 絶對的인 靜的 狀態에 놓이게 되지만 水는 將次 動하여야 할 것이므로 土化作用의 要素도 內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水의 平氣를 靜順이라고 命名하였던 것이다.

  (附言) 難解를 걱정 말고 復習을 反復하면 講義가 前進함에 따라 모든 難題가 解決될 것인즉 念慮할 것은 없다.

  不及

  木氣

  委和

  木氣가 不及한 것을 委和라고 한다. 그런데 一般的으로 말하는 木氣가 不足이라고 하는 말과 不及이라고 하는 말은 어떻게 다른가? 不足이라는 말과 不及이라는 말은 그의 槪念이 전혀 다르다. 不及이라는 말은 힘(力)은 있지만 아직 時期가 이르다고 하는 境遇나 或은 힘이 어떠한 外的 障害 때문에 그 힘을 發揮할 수가 없는 때에 쓰이는 通稱이요 不足이란 말은 힘이 根本的으로 모자라는 境遇에 쓰이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不及之氣는 氣의 不足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不及을 말하는 것이니 不足과 不及을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이제 여기에서 木氣不及을 委和라고 한 것을 檢討하여 보면 委字의 뜻은 委屈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勢力에 威壓當하여서 生하려고 하여도 生하여 낼 수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즉 委和라는 말은 和氣가 委屈되어서 나올 수가 없는 象態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和氣라는 것은 무엇일까? 위에서도 이미 말한바와 같이 化氣라는 말과 和氣라는 말은 同意異語에 不過한 것이다. 勿論 天道가 모든 事物에 있어서 木氣를 生할 때에는 반드시 和氣(토)가 先行함으로써만이 坎水(子)의 凝固作用에서 脫出하여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健全한 和氣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말할 餘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和氣가 委屈되어서 그의 所任인 化和作用을 하지 못한다고 하면 木氣는 生하지 못하거나 혹은 生한다 하더라도 그 生은 遲遲不進할 것이다. 그런즉 木氣의 不及은 木氣自體의 缺點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土氣의 化和 作用에 그 缺點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土氣가 正常化하여서 化和作用을 잘 한다면 木化作用도 正常的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不及之氣를 委和라고 命名하였던 것이다.(土氣가 委屈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는 것은 土化作用에서 解明할 것이다.)

  火氣

  伏明

  伏字의 뜻은 潛伏을 意味하는 것이다. 換言하면 기운이 없는 것이 아니라 潛伏하여 있기 때문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는 象을 말하는 것이다.

  明에 對해서는 위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神明論에 詳述할 것이거니와 다만 여기에서 簡單하게 말한다면 分裂을 어느 程度 抑制하면서 自己의 形體를 保存하려고 할 때에 自然的으로 形成되는 것이 明이니 이것은 天道運行의 必然的인 過程의 所産인 것이다.

  그러므로 天道의 運行은 萬一 이 過程(火의 過程에 過不及이 없으면 升明이라는 正常的인 氣化作用을 하게 될 것이고 萬一 不及하게 되면 明이 生할 수 없거나 或은 生한다고 하여도 微微 不振한 狀態에 빠지게 될 것이니 이것을 伏明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不及을 伏明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不及을 伏明이라고 하는 것은 明이 不足한 것이 아니라 一時的인 潛伏으로 因한 不及이란 것을 말하는 것이다.

  土氣

  卑監

  土氣가 알맞으면 備化之氣가 되므로 陰陽의 相乘을 잘 調節하게 되는 것이니 矛盾과 對立은 그 힘에 依하여서 融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土氣가 萬一 不及하게 되면 土化作用은 正常을 잃고 卑監으로 化하게 되므로 陰陽의 對立과 矛盾을 仲裁하여 내지 못함은 勿論 事物의 備化作用이 中絶되어서 人事는 不和에 빠지게 되고 모든 生物은 氣가 下陷함으로 因하여 生命力인 陽氣가 發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天地之道도 또한 同一한 原理에 屬하여서 陰盛陽虛가 되면 凶年과 疾病에 빠지게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阿鼻叫喚의 慘狀을 빚어내는 것도 또한 土氣不及에서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은 意味에서 土氣가 不及한 象을 卑監이라고 하는 것이니 卑字의 뜻을 高字의 뜻과는 反對가 되는 것이다.

  모든 事物은 陽氣가 많으면 高化되게 마련이요 陽氣가 不及하면 卑縮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陰陽의 本性인 것이다.

  監字의 뜻은 視 또는 臨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즉 土가 卑監이 되는 것은 前半期의 陽作用이 不及하였을 境遇에는 土化作用에 미치는 影響이 크므로 그 때문에 不及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土의 本性은 솜(綿)처럼 피우는 作用이 있기 때문에 모든 事物을 醇化함으로써 事物의 組織을 中化시키는 것인데 萬若에 土가 下陷하여 卑監이 되면 土가 제구실을 못하게 되고 오직 下陷만을 계속하므로 다만 낮은 쪽만 바라본다는 뜻에서 卑監이라고 命名한 것이다.(詳細한 것은 土化作用을 論할 때에 詳述할 것임)

  金氣

  從革

  위에서 金氣의 平氣가 審平이란 것을 말한 바 있다. 金氣가 萬一 金의 그 사나운 性格 때문에 殺伐의 念慮를 警戒하여야 할 것은 勿論이지만 不及하는 境遇에 있어서도 그것만 못하지 않은 걱정이 있는 것이다.

  金이라는 것은 本是 收藏의 始初이기 때문에 木火의 때에 發展했던 陽을 自己(金氣)의 품안에 包藏하려는 本能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金과 火는 가장 相爭이 甚한 對立性을 가지고 있으므로 土의 仲裁를 기다려서 自己의 所任을 遂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土가 萬一 適當히 仲裁를 하면 金이 平氣를 얻을 수 있고 土가 萬若 調和力을 잃으면 金이 火를 包藏할 수 도 없으며 雖是 包藏한다고 하여도 이것은 金의 正氣를 나타내지 못하게 되므로 結局 金氣가 不及이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金氣의 不及을 從革이라고 하는 것이다.

  革字의 뜻은 一般的으로는 改革이라는 말로 쓰여지는 것이나 그러나 좀더 詳細히 稽考하여보면 革字와 皮字는 그의 槪念이 서로 다르다. 皮字의 뜻은 生命體 그대로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오 革字의 뜻은 生命體에서 이미 離脫시키서 人工을 加했을 때에 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製革이라는 語彙는 있어도 製皮라는 말은 없는 것이다.

  勿論 이것은 皮에다가 人工을 가한 境遇를 말하는 것이거니와 天工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金火가 交易하는 過程에서 萬若 火氣가 尙多하기 때문에 金의 收藏作用이 微弱하게 되는 그 象을 가리켜서 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人體에서 觀察하여 보면 皮膚의 毛髮은 火氣가 過하고 金氣가 不及할 때에 毛髮이 脫落되는 것과 同一한 原理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現象을 革化라고 한다. 그러므로 金氣不及의 作用을 從革이라고 하는 것이다.(詳細는 金火相爭에서)

  水氣

  流연

  水氣라는 것은 本來 流動의 源泉이며 萬物의 生命이며 精神의 府庫라는 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바 있다. 그렇다면 水氣는 어떻게 流動하는 것일까? 하는 것을 考察하여 보기로 하자. 宇宙안에 있는 森羅萬象은 動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 動하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물(水)의 流動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胎卵草木은 물덩어리에서 出發하게 마련이며 萬華方暢의 華麗한 춤도 또한 懸水三千 의 물(水)의 律動에 不過한 것이다.

  그런즉 萬物은 물에서 나왔다가 물로 다시 돌아가는 輪廻反復인 것뿐이다. 이것을 易에서는 坎이라고 하는 것이요 五行學에서는 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水라는 것은 果然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水氣自體의 特徵인 凝固力으로써 萬物의 生命이며 또한 精神이기도 한 陽덩어리를 密閉하는 作用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水氣가 一旦 門을 닫으면 核은 그의 陽을 貯藏하는 것이요 萬若 門을 열면 싹이 터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모습이 바로 水氣가 作用하는 形象이며 또한 律動하는 물의 幻像인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人間 世上에는 善惡의 對立과 生存의 競爭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極致에서 살펴보면 萬物의 變化過程은 다만 물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헤엄쳐 나오는 일만을 反復하는 潛水夫의 一生이야말로 바로 變變化化하는 造物界의 生涯와도 彷佛한 것이다.

  그런즉 물은 水氣에 의해서 形成되어진 것인즉 水의 存亡은 바로 萬物의 存亡인 것이다. 그것은 水源이 마르면 江이 마르게 되는 것과 같이 水氣가 宇宙에서  渴되어버리게 되면 律動하는 물의 變化는 찾아볼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詳細는 水火一體論에서)

 

 

  그러므로 水氣가 不足한 것을  流라고 命名한 것이니  字의 뜻은 一般的으로 물이 마른다는 말이지만 이 字에는 이것밖에  字의 뜻이 있는 것이다.  자에는 閉塞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水氣가  한다는 말은 渴한다는 뜻과는 다른 것이오나 다만 水氣가 不及하다는 뜻뿐인 것이다.

  流字는 古字를  不자로 썼던 것이다. 옛적에는 왜 이와 같이 流字를  不로서 標示하였던가? 이제 여기에서  不자의 象을 考察하여 보면  不字는 ㅆ水ㅆ不 하였으니 不자의 뜻은 木이 아직 一을 貫通하지 못하고 있는 象이다. 그러나 이 字를 水邊에 쓴 것은 不이 木으로 못된 것은 一水의 障碍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도록 暗示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즉  不字의 象 가운데는 動하는 힘이 潛藏하여있는 象이 있는 것이므로  流하는 말에는 動의 根源이 아직 不及하고 있다는 意味가 內包되어 있는 것이다. 水不及을  流하고 한 것은 실로 이러한 深奧한 理致가 있기 때문이다.

  太過之氣

  위에서는 不及으로 因한 缺點을 말했거니와 여기에서 말하려는 바의 太過는 바로 그의 反對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운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物化作用의 正常的인 發展과 收縮에 支障을 招來하는 境遇를 말하려는 것이다.

  木氣

  發生

  木의 太過를 發生이라는 槪念으로 命名한 것을 不及의 槪念을 委和라고 한 것과 比較硏究하여 보면 가장 明瞭한 것이다.

  그러므로 委和를 和氣가 委屈된 것이라고 한다면 發生은 나아가는 힘이 너무 많을 것을 意味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例를 하나 들어보면 銃彈이 爆發하는 모습은 바로 木氣의 太過現象이기 때문에 爆發이라고 하는 用語가 되어있는 것이며 또한 여러 해 묵은 씨앗에서는 종다리가 나오는 것은 여러 해 묵어서 凝固作用이 過多하기 때문에 木氣는 따라서 過多하게 된 것이므로 이것을 發芽라고 하는 것도 또한 그 때문인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五行氣가 平氣를 維持하지 못하고 太過나 不及이 생기게 되는 것은 허물이 水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其他 四氣의 境遇도 同一例인 것이다.(詳細는 生克論에서)

  火氣

  赫曦

  火氣가 太過한 것을 赫曦라고 하는 것이다. 火光이 沖天하는 것을 赫이라고 하고 日光이 曝射하는 것을 曦라고 한다.

  그런즉 赫曦라는 말은 灼熱이 蕃盛하는 象인즉 그것이 바로 火氣太過하는 모습이며 또한 伏明의 反對인 것이다.

  易에서는 이것을 亢龍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뜻은 陽氣가 너무 많아서 限없이 上升하여 後悔莫及의 境地에까지 오르는 象을 意味하는 것인즉 亢龍과 赫曦는 同一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亢龍이라는 것은 陽氣의 縱發하는 性質을 警戒한 것이오 赫曦라는 것은 陽性의 橫散하는 暴威를 말하는 것이니 각각 陽性(火)의 一面씩을 說明한 것이다.

  그러므로 植物이 萬一 赫曦之氣를 만나게 되면 枯死하게 마련이요 人間의 生理組織에 陽盛陰衰의 變故가 생기게 되면 빳빳하게 마르고 살이 생겨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들은 모다 赫曦의 罪科인 것이다.

  土氣

  敦阜

  土氣의 太過를 敦阜라고 하는 것이다. 敦字의 뜻을 生覺하여 보건대 敦字와 厚字는 意味가 同一한 것 같지만 實은 다르다. 氣化作用이 두터워지는 것을 敦이라고 하고 形化作用이 두터워지는 것을 厚라고 하는 것이다.

  阜字의 뜻은 土山이나 大陸이나 혹은 肥大한 것들을 指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阜字와 丘字는 意味가 서로 다르다. 丘는 阜에 비해 面積이 훨씬 적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 氣가 넓게 펴져서 이룬 것은 阜가 되고 氣가 잘 펴지지 못하고 이루어진 언덕은 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土化作用이 中正을 잃으면 或은 不及하여서 丘가 되고 或은 太過하여서 敦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前記한 赫曦의 경우와는 反對로 모든 組織이 지나치게 繁殖하게 되므로 사람이나 動物같은 것은 너무 肥大하게 되고 草木의 경우는 根幹에 비해서 枝葉이 지나치게 茂盛하는 結果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金氣

  堅成

  堅字와 固字는 그 뜻이 서로 다르다. 表氣가 굳어진 것을 堅이라고 하고 裏氣가 굳어진 것을 固라고 한다. 그러므로 金의 性質은 堅이요 水의 性質은 固인 것이다.

  成字의 뜻은 事物이 完成된 것을 意味하는 것이니 예컨대 果穀의 完熟이나 人事의 完決은 모다 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收와 成은 同一 意味로 相通되는 것이다. 但只 火의 立場에서 보면 成이지만 反面 金의 立場에서 보면 收인것 뿐이며 또 全體的(變化的) 見地에서 보면 收라고 할 것이며 個物的(四時的) 見地에서 보면 成이라고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金氣가 太過하다는 말은 堅으로서 成收하였다는 말이므로 이것을 堅成이라고 命名하였던 것이다.

  그런즉 金氣의 경우에 있어서도 다른 原質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隨伴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것은 모다 金이 審平이 되지 못한데서 오는 犯罪인 것이다.

  水氣

  流衍

  流字는 古字로 쓰면  不로서 표시되는데  不의 象을 보면 여기에는 動하는 모습이 內包되어 있다는 것은 前에 말한바 있다.

  衍字는 ㅆ行ㅆ水하였은즉 여기는 動하는 象이 있는 것이며 또 反面에는 水가 行하려고 하여도 行해내지 못하는 象도 있는 것이다. 이 글자의 意味를 詳考하여 보면 늘어진다는 뜻도 있고 또 箱子라는 뜻도 있는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서 流衍이라는 槪念을 檢討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事實을 알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衍에는 늘어질 수 있는 바탕이 있기는 하지만 水氣가 太過하기 때문에 오히려 箱子속에 幽閉당하여 있는 象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流衍이라는 槪念속에는 動할 수 있는 要因만 갖추고 있을 뿐 아직 감히 동해내지 못하고 있는 象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不及之氣인  流와 이것을 비교해보면  流의 경우에 있어서는 動할 수 있는 힘이 缺乏한 것이 아니고 水의 凝固力이 太過하기 때문에 감히 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流는 內的 條件의 不備에서 생기는 缺陷이며 流衍은 外的 狀態의 不應에서 오는 事故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① 五行法則과 엠페도클레스의 原理

  B.C. 495∼435 間에 希臘의 哲人 엠페도클레스 Empedokles는 宇宙의 原質을 四原素로서 主張한 일이 있다.

  그가 이와 같은 主張을 하게 된 것은 畢竟 存在와 生命問題를 矛盾없이 解決하여 내려는 意圖에서였으리라고 生覺된다.

  그가 이와 같이 四元論을 主張하고 탈레스Thales 以後의 一元論을 排斥하게 된 것은 그로서는 여러 가지 理由가 있었겠지만 吾人이 볼 때는 그가 古代의 一元論을 그의 머리로서는 演釋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生覺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니 도리어 初期의 自然哲學을 無價値한 것으로 輕蔑하였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은 오직 옘페도클레스에 있어서만 局限되었던 것은 아니고 歷代 哲學들의 通弊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筆者가 여기에서 論하려는 바는 그의 短點을 指摘하거나 批判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의 長點的인 着眼을 들어서 東洋的인 象數原理와 比較하여 보려는 것이다.

  이제 아래에 잠시 그의 所論을 紹介하여 보기로 하겠다.

  宇宙의 原質은 불(火), 공기, 물(水), 땅의 넷으로 生覺하고 다시 그 性質을 區別하여 말하기를 四種의 原理는 變할 수 없는 自己 同一性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다만 그 變化하는 性質만 다르다고 生覺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四種의 根源은 서로 그의 性質을 달리하면서도 또한 永遠히 같은 性質을 確保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같은 것에도 還元되지 않으며 아무런 새로운 性質도 가질 수가 없고 다만 離會集散함으로써 現實界의 變化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異質的인 四原素들이 어떻게 離會集散 할 수 있는가? 하는 問題에 對答하기를 그것은 四種의 根源이 가장 잘 融合된 圓球로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生覺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分合集散하는 要因으로서 憎惡와 사랑을 生覺해 냈으니 憎惡로서는 分離시키고 사랑으로서는 統合시킨다고 主張하였던 것이다.

  以上에 論述한 바는 그의 思想의 要約이거니와 筆者가 여기에서 그것을 要約하는 것은 그의 所論 中 「四種의 根源은 서로 性質을 달리하면서 또한 永遠히 같은 性質을 確保하는 것이며 같은 것에로 還元되지도 아니하며 아무런 새로운 性質로 가질 수가 없고 다만 離合集散함으로써 現實에 變化를 나타낸다」고 하는 卓越한 觀點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論文을 詳察하여보면 그의 四原質 自體도 아직 完全치 못하며 또한 四原質의 基本點에 對해서 論及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비록 希臘 前期의 自然哲學 다시 말하면 그 時代의 一元論을 理解하지 못하였던데 緣由한 것이며 따라서 後期的인 變質要因이기는 하지만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여기에는 아직까지 前期的인 一元論의 命脈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東洋의 象數原理 즉 木火土金水의 法則인 運動原理와 彷佛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思想을 조금만 修正하여서 運動하는 原質이 五元素임을 밝히고 또한 그의 中樞가 陰陽의 本源인 太極이라는 點까지만 發展시켰더라면 그것으로써 宇宙原理는 完全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象數原理와 엠페도클레스 原理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差異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고 「四種의 根源은 서로 性質을 달리하면서도 또한 永遠히 같은 性質을 確保하는 것이며 또한 같은 것에로 還元하지도 아니하며 아무런 새로운 性質도 가질 수 없고 다만 離合集散하면서 現實界에 變化를 나타낸다」는 말을 하였더라면 希臘哲學의 次元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動하고 있는 現實的 存在만을 보고 靜하고 있는 基本的 存在를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思想의 一端에서 能히 엿볼 수 있으니 「憎惡로서 分離하고 사랑으로 統合한다」는 一節만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象數的 立場에서 보다면 木火發展의 過程에서는 憎惡心이 생기는 것이요 金水收藏의 過程에서는 博愛心이 생기는 것은 勿論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憎惡나 博愛는 宇宙의 運動法則인 四象(木火金水)에서 抽出한 人道的 原理일 분이고 그 自體가 바로 分裂에서 綜合으로 誘導하는 萬象의 原質이거나 法則일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萬物이 分裂할 때 이것을 인간이 사랑한다고 하여서 그 分離를 停止시키거나 또는 萬物이 綜合過程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것을 憎惡함으로써 그 綜合을 停止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認定하는 한 그의 理論은 空念佛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비록 現實과 本體, 人間과 天道는 同一한 法則에 依해서 움직인다는 點까지 看破하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사랑과 憎惡에도 分合의 原理가 있다고 본 點만은 看過할 수 없는 것이다. 一言으로 要約하면 그는 寶庫의 門고리는 잡았지만 아직까지 室內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東洋哲學은 이러한 愚를 犯하게 하지 말도록 하기 위하여서 모든 硏究에있어서 이와 같은 法則發見을 重視하였던 것이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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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handongseok.org/lecture2.htm
黃帝內經講義 (2) 1965년 1월호

韓東錫

第一編 變化原理

第一章 總論

第四節 天地日月의 運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五行이란 것은 太極이 갈라져서 「陰陽→四象→五行」의 順序로 發展된 象을 말하는 것이거니와 果然 무엇이 그것을 그렇게 하였는가? 또는 그렇게 하는 힘 다시 말하면 그의 正體는 무엇인가? 하는 問題를 硏究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天道의 運行 즉 日月과 地球의 運行을 硏究하여야 할 必要性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天道의 運行하는 象을 把握하지 못하고서는 五行의 本質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天地와 日月의 運行에 對한 分紀와 道理(道程)를 論함으로써 變化原理를 解得하는데 便宜를 提供함과 아울러 五行原理에 대한 所自出點을 明示하려 하는 바이다.

  天體에는 本來 南北極이 있으니 이것이 樞軸이 되어서 모든 運行의 基盤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唯一不動한 곳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 不動하는 곳이 오히려 動할수 있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不動之處인 極이 있기 때문에 天地日月이 三百六十度의 循環運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今日의 天文學的 知識으로는 地球와 日月은 동하지만 天體는 動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그러나 그러한 天體로 역시 動하는 것이라고 보는 東洋哲學의 觀點에 오히려 至大한 妙味와 關心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地球와 日月은 勿論 天體까지도 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事實인 同時에 絶對的인 眞理인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들은 如何한 힘에 依하여 動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問題點인 것이다.

  그러므로 東洋哲學的 變化原理로써 보면 宇宙間에 있는 모든 有形體 즉 地球日月로부터 禽獸草木에 이르기까지 모두 躍動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들의 動하는 힘은 모두 天體의 動하는 힘 때문이라고 規定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天動說의 起源인 것이니 이 天動說은 地靜說과 相配되고 또 天圓說과 地方說이 따라서 나오게 되는 바 이 說들은 今日 學界에 많은 誤解를 쌓게 되었던 것이다. 西洋의 地動說 以前의 天動說과 뇌화부동시켜가지고 所謂 未開時代의 邪說로써 烙印을 찍어버리려는 傾向이 甚히 濃厚하거니와 그렇다면 天動說이라는 것이 果然 그와 같이 無價値한 것인지 또는 今日의 學界가 果然 天動地靜說을 올바르게 把握하고 있는가? 어떠한가? 하는 等等 問題는 各論에서 다루기로 하겠거니와 다만 本論에서 말하려는 바는 天動說을 前提로 한다는 點이다. 却說 위에서 말한 바 運行하는 天體에 包括되어 있는 日月과 地球의 運行은 如何히 하는 것인가? 하는 問題를 論述하여야 하겠다.

  그러나 本論을 敍述함에 앞서 먼저 本論을 理解시키기 爲한 豫備知識이 必要하다. 그것은 本論에서 뿐만 아니라 象數에 관한 學問을 硏究함에 있어서는 如何한 分野의 學問을 勿論하고 第一 먼저 이 點부터 認識하여야 비로서 變化와 象數를 理解하게 될 것이다. 萬一 그렇지 못하면 五里霧中에 빠져서 都是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具體的으로 말하면 東洋哲學의 硏究對象은 어떤 事物의 本體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事物의 作用에 있다고 하는 事實이다. 다시 말하면 地球가 太陽의 周圍를 돌고 달(月)이 地球의 周圍를 돌고 있다는 等을 硏究하는데 그 目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作用을 對象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日月이 地球에 비치는 結果로 如何한 現象이 일어나며 또 어떠한 變化가 생기며 또 그 變化하는 原理는 무엇인가? 하는 것 즉 그 本體가 아니고 다만 그 作用面을 硏究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醫學에 있어서도 五臟六腑의 本體나 그 位置를 밝히려는데 그의 對象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들의 作用 즉 눈에 보이지 않는 活動과 거기서 일어나는 變化를 硏究하려는데 바로 目的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硏究의 對象을 本體的 分析에 두는 것이 아니라 作用의 綜合的 檢討에 두기 때문에 近日 科學敎育에 머리가 젖어있는 우리로서는 얼핏 生覺하기에는 東洋哲學이란 觀念的 抽象的인 一種의 迷信에 不過한 것같이 여기기도 하지만 其實 깊숙이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事物의 本體를 硏究하려는 科學的인 것이 아니고 적어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는 作用까지 合하여 硏究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形而下가 아니고 形而上과 形而下를 綜合 硏究하려는 哲學이기 때문에 不得不 그 作用硏究에 置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萬一 그 本體面에만 硏究의 對象을 둔다고 하면 그것은 科學이요 哲學은 될 수 없으며 또 그것은 洋醫學의 特徵일지언정 漢醫學의 特徵으로는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東洋哲學은 天地日月의 運行을 說明함에 있어서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作用面 硏究에 더욱 置重하는 것이며 또 거기서 變化原理를 찾으려는 것임을 미리 理解하고 硏究하여야 한다는 것을 여기에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그러면 日月은 어떻게 運行하는 것인가? 하는 것부터 硏究해보기로 하겠다.

  天道에는 黃道와 赤道가 있다. 赤道라는 것은 天腰의 中半點이니 그 北쪽을 外廓이라 하고 그 南쪽을 內廓이라고 한다. 北極이란 것은 外廓의 極盡處인 것이요, 南極이란 것은 內廓의 極盡處인 것이다.

  그런데 黃道란 것은 地球가 太陽의 周圍를 도는 길(道)인데 이 黃道는 赤道의 北쪽으로 二十四度, 赤道의 南쪽으로 二十四度까지 나갈 수 있는 것이고 그 밖으로 더 나가기는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春分後에는 赤道의 北쪽을 向하여 二十四度까지 나갈 수 있고 秋分後에는 赤道의 南쪽으로 二十四度까지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地球의 軸이 二十四度 以上 傾斜지는 法이 없기 때문이다.(現在는 二十三度 七分 傾斜져 있음)

  단 여기에서 黃道에 對해서 한마디 附言하여 둘 것은 「視黃道說」이다. 우리가 實地로 볼 때 地球가 太陽의 周圍를 돌고 있는 것이 事實이다. 그러나 그것은 前에 말한 바와 같이 地球 運行의 本體面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作用面 즉 現象面에서 보면 恒常 太陽이 地球의 周圍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日月이 地球에 光線을 던져 줌으로써 일어나는 모든 現象에서 變化를 把握하는데 便利하게 하기 爲해서는 一旦 太陽이 地球의 周圍를 돌고 있는 것으로 假定해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今日의 曆象學은 이것을 太陽이 地球의 周圍를 도는 것처럼 假定하고 그것에 「視黃道」라는 槪念을 設定한 것이다. 그런즉 여기 結論에서 筆者가 地球의 運行하는 길이 黃道라고 썼지만 原典에는 日行(즉 太陽이 간다)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以下 모든 說明은 視黃道에 依하여 說明할 것인즉 미리 여기서 讀者 諸位의 諒解를 바라는 바이다.

  그러면 다음은 달(月)의 運行에 대해 말하기로 하겠다.

  달(月)이 運行하는 길은 九個가 있으니 黃道 黑道 赤道(太陽이 運行하는 경우에 말하는 赤道와는 다른 것이다) 白道 靑道로서 區分되는데 그 중 黃道만 一個이고 다른 四道는 各各 두 개씩 있으므로 合하여 九道가 되는 것이다.

  九道 가운데 오직 黃道만은 一道로서 中央에 位하고 其他 八道는 黃道를 中心으로한 東西南北에 그들이 運行하는 길(道)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黑道는 黃道의 北에 있고 赤道는 黃道의 南에 있고 白道는 黃道의 西에 있고 靑道는 黃道의 東에 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宇宙間의 變化現象을 나타내는 九宮八風의 原理는 이와 같이 달이 運行하는 軌道에서 그 起原이 생겼던 것이다.(九宮八風原理는 各論에서 詳論할 것임)

  「殷」以後에 太陽曆制度를 採擇한 것도 實로 여기에 緣由한 것이다.(그 前에는 三六五日曆을 썼다) 뿐만 아니라 今日의 달(月)은 병든 달(月)이다. 그러나 병든 달(月)이 이 地球에 影響을 주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變化와 오늘날의 文物을 生産하기도 하는 것이다.

  (大體 달이 병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점 亦是 各論에 說明하겠다)

  다음은 地球에 對해서 말하기로 하겠다. 東西를 莫論하고 地球에 對해서는 많은 學者들 사이에 所謂 天圓地方說(天體는 둥글고 地球는 모나서 動하지 못한다고 하는 說)을 提唱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不過 數世紀前에 提唱된 바 있는 「코페르닉쓰」의 地動說이 마치 地動原理로서 世界 最初의 것인 것처럼 誤解하고 있는 것이다. 이 問題가 오늘날 東洋사람들에 있어서까지 如此狂信하고 있는 것은 東洋사람 自身이 自己 文明을 探求하는데 너무나 疏忽히 하고 科學文明에만 無條件 陶醉하여 버리는 後進國的 文化硏究態勢의 結果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重大한 問題일수록 精神을 가다듬어서 自己의 硏究態勢를 살펴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古代 東洋의 天文學은 地球의 運動을 如何히 보았던가? 하는 問題는 진실로 흥미있는 問題꺼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內經의 素問에 記載된 바의 五運行大論의 本文 몇 節을 紹介하면서 地球의 모습과 運行에 對해서 稽考해 보기로 하겠다. (여기에 論하는 바는 總論임에도 不拘하고 如此 本文紹介에 까지 論及하려는 바는 現代人의 知識이 너무나 科學一邊倒로 偏在하여 있기 때문에 마치 筆者가 現代 天文學思想에 대한 知識을 빌어 가지고 東洋天文學思想이라고 牽强附會나 하는 것처럼 誤解하지 않을까? 하는 念慮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黃帝가 岐伯에게 묻기를 「모든 宇宙간에 있는 것들이 이 所謂 動하며 또 靜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여 주시오」하고 간청하였던 것이다.(「本文」帝曰 動靜如何)

  그때에 岐伯이 對答하기를 「宇宙間에 있는 모든 存在는 위에서 作用하는 것은 반드시 右行하는 法이오 아래에서 作用하는 모든 存在는 반드시 左行하는 法이므로 그들 存在는 恒常 一左一右하면서 天體가운데서 돌고 있다고 對答하였던 것이다. (岐伯曰 上者右行 下者左行 左右周天)

  다시 말하면 地球 위에 存在하는 모든 作用體는 永遠不變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上向作用을 하던 것은 반드시 右遷하게 마련이며 따라서 右遷作用이 끝나면 또다시 繼續하여 左遷하는 作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作用을 繼續하는 狀態가 바로 左右周天하는 作用인 것이다. 그런즉 春夏와 秋冬이 바뀌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오 靑年이 老年으로 變하는 것도 바로 이 運動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左右周天 하는 것 때문에 地球上에 있는 모든 것들이 地球와 함께 左右周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黃帝가 只今까지 알기로는 地球는 方으로써 不動體인 것으로 알았던 것인데 이제 地球가 動한다고 認識하기는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黃帝는 再問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黃帝가 묻기를 「내가 前에 鬼臾區(六臣 中의 한사람)에게 들은즉 모든 應地하는 것은 靜한다고 들었는데 지금 夫子(岐伯)가 하시는 말씀은 모든 아래로 作用하는 것(卽 地)은 左行한다고 하니 무슨 말씀인지 理解할 수 없습니다」하고 다시 물었던 것이다. (帝曰 余聞鬼臾區 應地者靜 今夫子言 下者左行 不知其所謂也) 다시 말하면 前에 鬼臾區는 地에 應하는 것은 靜而不動한다고 하였는데 ...... 즉 地球가 萬一 動한다면 그위에 있는 모든 存在物은 반드시 흔들릴 것으로 生覺하는 것이 常識이므로 地球는 靜而不動하는 것으로 黃帝도 生覺하였던 모양이나 이것은 物의 大小와 空間의 廣狹이 陰極似陽 陽極似陰의 象을 나타낸다는 原則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只今 夫子께서 地球가 動하는 것으로서 左行한다고 하는 것은 疑惑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中略)

  그러므로 黃帝는 岐伯에게 「地球는 아래에 가만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하고 다시 물었던 것이다. (帝曰 地之爲下否)

  그 때 岐伯이 對答하기를 地球란 것은 우리 人間 中心으로 볼 때는 아래 있는 것이지만 天體로서 볼 때는 다만 虛空에 있는 것으로서 꼭 아래 있다 혹은 위에 있다 할 수 없는 것이다. (岐伯曰 地爲人之下 太虛之中者也)

  다시 말하면 사람은 恒常 自己의 발이 놓여 있는 곳을 가리켜서 이것을 아래(下)라고 生覺하는 習性 때문에 그렇게 生覺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冷靜하게 따져보면 地球는 大氣의 中間에 떠 있는 것인데 人間이 自己가 지닌 바의 尺覺(近視眼的 感覺) 때문에 그와 같이 誤解하는 것이라고 對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黃帝는 아직도 疑心이 풀리지 않아서 다시 물었던 것이다.

  즉 「地球는 어떠한 곳에 依支하고 있는가? (帝曰 憑乎)

  다시 말하면 地球가 萬一 虛空에 떠 있다면 어떤 곳에 依支하지 않고서는 반드시 떨어질 것으로 生覺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反問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岐伯은 對答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고 다만 「大氣가 들고 있는 것이다」라고 對答하였던 것이다. (岐伯曰 大氣擧之也)

  그리고 그는 또 繼續하여 「燥以乾之」하고 「暑以蒸之」하고 「風以動之」하고 「濕以潤之」하고 「寒以堅之」하고 「火以溫之」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地球가 虛空에 떠서 動하기 때문에 이것이 日月의 光을 받으면서 左右周天하므로써 五行이 생겨나고 다시 그것이 六氣의 變化所致로 上記한 바의 「燥暑風濕寒火」의 六氣運動을 하는 大本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所謂 世俗的인 「天動地靜」說은 여기에서 崩壞되고 마는 것이니 老, 墨, 列. 莊의 思想은 이것을 받침하고 있다. 이것이 東洋의 古代天文思想의 境地(다시 말하면 地球와 日月이 動하는 것은 天體의 動하는 힘(力) 때문이라고 하는 것임을 生覺할 때 刮目한 만한 충분한 價値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地球와 日月은 그들의 運行에 있어서 반드시 規則的인 軌道의 運行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니 이것을 가리켜서 六節藏象論(素問)에는 「行有分紀 周有道理」라고 明示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만 本稿에서 말하려는 바는 「地球와 日月이 左右周天하는 그것 때문에 地球 위에서는 森羅萬象의 變化가 일어나게 되고 따라서 經度와 緯度의 차이 때문에 地方마다 各其 特殊한 物品을 生産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問題가 생기게 된다는 것과, 또 地球의 軸이 二十三度 七分 傾斜져서 있는 까닭에 黃道가 (地球의 軸이 傾斜진 그만큼) 赤道의 內外廓으로 出入하므로써 春夏秋冬 四時의 現象이 나타나게 되고 이 現像이 反復往來하는 過程에서 「土」와 「相火」를 自生하여서 비로소 이 宇宙間의 모든 變化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뿐인 것이다. 물론 여기 附隨되는 問題로서 地球의 軸은 왜 傾斜졌는가? 따라서 地球와 日月을 運行시키는 原動力은 무엇인가? 하는 問題는 가장 重要한 問題인 것이다.

  그러나 只今 여기서 論하려는 바는 다만 槪括的인 것으로 그치고 詳述하는 것은 各論에 미루기로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宇宙의 變化는 上述한 바의 모든 條件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또 吾人은 이들 條件에 의하여 그 原理를 算出할 수 있다는 것을 認識할 수 있으면 本論의 目的은 끝나는 것이다.

 

 

第五節 河圖洛書와 太極說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地球 위에서 發生하는 모든 變化는 오로지 地球와 日月이 左右周天하는 運動過程의 所産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宇宙間에 그러한 形과 象이 있다는 그 事實만으로서는 哲學은 成立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그 象과 形에 대한 原理를 捕捉하고 거기다가 論理的 妥當性을 賦與하여서 學問的 體系로 誘導함으로써 비로소 哲學이 成立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인들은 宇宙간에는 이러한 變化原理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發見하였으며 또 어떻게 哲學體系를 세웠던가? 하는 問題를 硏究하여야 할 것이다.

  古代에 伏羲氏가 바다에서 龍馬가 그의 등에 異常한 그림을 지고 陸地에 나온 것을 發見하고 그 그림을 深思熟考한 結果 그것이 바로 五行原圖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河圖라고 呼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伏羲氏는 河圖에서 五行原理를 發見한 것뿐만 아니라 그 作用 다시 말하면 變化하는 象을 捕捉하여서 그림으로써 그 象을 表示하여 놓은 것이 周易의 八卦인 것이니 이것이 易學의 基本이며 또 五行原理의 變化作用을 象으로 表示한 淵源이며 또 自然數가 生成變化하는 大本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비로소 東洋哲學, 즉 象數學은 哲學的 素地를 갖추게 되었고 同時에 人間은 變化하는 象을 알아낼 수 있게 되었으며 또 그 原理를 自然數로서 立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變化하는 過程에서 보면 變化原理인 것이요 變化本然의 立場에서 보면 象數學인 것이다. 筆者가 本稿의 第一編을 「變化原理」라고 命名한 것도 實로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러나 上述한 바의 河圖는 다만 萬象의 基本이 되며 또 萬物의 生成原理와 그의 象數를 表現한 것뿐이고 그 大變化의 象, 다시 말하면 生成의 現象을 表現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리켜서 先天卦圖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때(時)는 반드시 萬物이 生長에서 成遂를 完遂하는 象, 즉 大變化의 象, 다시 말하면 金火交易하는 象을 明示할 聖人을 내고야 말 것이다. 때(時)는 夏禹氏에 이르렀다. 이때에 洛水에서 거북이가 그의 등(背)에 글을 지고 나왔으니 이름을 洛書라고 하거니와 이 그림은 거의 河圖와 같으나 다만 河圖 때는 二七火가 南方에 있었고 四九金이 西方에 그려져 있던 것인데 洛書에서는 二七火가 西方에 와있고 四九金이 南方에 와 있으며 또 河圖에서는 中央에 五十土가 있던 것이 洛書에 와서는 中央에 五土만이 있다는 點이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洛書는 河圖에 比하여 이와 같은 特徵을 띄고 있는 바 여기서 問題되는 것은 왜 때(時)는 夏禹氏 때에 洛書를 보내어서 우리 人類에게 이와 같은 徵候를 가르쳤던가? 하는 것이다.

  이 問題에 對해서 硏究를 完成한 분이 바로 周文王이시니 그는 方不過 七十里의 諸侯領의 公子로서 紂王의 暴政아래  里獄에 投獄되어서 所謂 文王卦圖를 硏究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河圖原理가 洛書原理로의 轉換이며 同時에 生長原理에서 成遂原理로 變化하는 所謂 「金火交易原理」가 出現하는 契機의 創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後天卦圖라고 한다.

  이와 같은 象數學은 「河出圖 洛出書하여 聖人이 則之」(易繫辭)함으로써 發展한 것이지만 이것을 演繹硏究하여 보면 地球 日月이 運行하는 過程에서 人間이 알아낸 것이라고 하는 한마디로 歸納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의 河圖와 洛書 또 伏羲圖와 文王圖가 發明됨으로써 哲學의 成立은 보았지만 決코 完成은 아니다. 이것이 戰國 때 鄒衍 等에 依하여 華麗한 發展을 하였지만 秦火以後 거의 자취가 사라지게 되었던 것인데 때마침 周廉溪가 太極圖說을 내놓음으로써 河圖와 洛書의 運行原理를 明示하였던 것이다. 그 圖와 設은 至極히 簡單하지마는 그의 眞理는 圖와 說 가운데 彌滿하여서 象과 數의 硏究에 대한 偉大한 公式을 남겨놓았던 것이다.

  그러면 太極圖說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기에 說明해야 할 것이나 總論에서는 略하고 詳細는 各論으로 미루기로 하거니와 다만 本稿에서는 河圖와 洛書의 발전은 太極圖說의 發展으로 因하여 今日 東哲(즉 象數學)의 體系를 세워 놓았다는 것을 紹介하면 되는 것이다.

  以上에 紹介한 바는 甚히 難解한 部分이 많아서 理解하기 困難할 줄로 안다. 그러나 그것은 念慮할 것 없다. 以上에서 論述한 바는 다만 以下 各論에서 硏究할 것에 對해서 總括的으로 그 重要한 內容이 이러하다는 것을 紹介한 것이고 詳細한 것은 各論에서 逐條說明할 것인즉 이 점을 미리 理解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第六節 正名學

  正名이라는 말은 오늘날의 流行語로써 바꿔 말하면 槪念이라는 말과 서로 相通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事物은 이름(名)이 붙어진 後에 비로소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事物에 各其 이름을 붙이는 일은 本來 重要한 일이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人口의 增加와 함께 社會의 生活樣式과 文化의 發展形態가 漸漸 複雜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事物에 대한 名分關係는 絶對不可分의 關係로 登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事物과 名稱關係는 마치 車의 兩輪이나 鳥의 兩翼關係와도 같아 서로 分離할 수 없으리만큼 必要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돌이켜 生覺하여보면 人類의 生活과 文化의 發展이 아직 草創하였던 때에 있어서는 名稱을 設定할 必要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漸漸 複雜化되어가는 今日에 있어서는 人類와 文化의 發展에 따라 事物에 名稱을 賦與함으로써 그의 複雜性을 整理하고 또 認識하는데 도움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事物에 名稱을 賦與함으로써 哲學의 發展과 文化의 硏究에 對해서는 貢獻하는바 컸지만 反面 그 名稱은 도리어 自體矛盾을 誘發하기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名稱이란 것은 그의 槪念이 正確할 때에는 最上級의 功效가 있는 것이나 正名의 本質이 墮落될 때는 도리어 事物의 發展에 害毒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본래 東洋의 文字는 그 自體가 二面性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一面으로는 言語學的인 面을 지니었고 다른 面으로는 哲學的인 面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天」字에서 이것을 稽考하여 보면 言語學的인 面에서 보면 「하늘」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哲學的 面에서 보면 「天」(하늘)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意味가 그 글자의 象과 形 가운데 潛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萬一 正名精神이 墮落되면 글자의 意味는 言語學的인 面에서만 通用되고 哲學的인 面은 漸漸 退藏되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事物은 名에 依해 代表되고 正名은 文字에 依해서 象徵되는 것이라는 것을 認定하는 한 正名의 墮落이 바로 哲學의 墮落이 된다는 것을 認定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따라서 人事에 있어서는 正名이 行해지지 못하면 腐敗와 墮落만이 助長되는 法이오 萬物에 있어서 正名이 行해지지 못하면 物質硏究는 發展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例는 史上 非一非再였거니와 特히 中國史에 있어서 春秋末과 戰國初期의 混亂相은 이것을 如實히 代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孔子가 正名으로써만이 混亂한 社會를 矯正할 수 있다고 生覺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孔子가 人道에 있어서 名分을 바로잡음으로서 社會를 淨化하려고 한 까닭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人道哲學의 基盤을 後世에 남겨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墨子도 亦是 人道主義를 排斥한 것은 아니다. 孔子의 形式主義的인 面을 否認하는 同時에 人道的인 正名만 가지고는 그 當時의 社會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 墨子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腐敗墮落하여 骨肉相殘으로 寧日이 없는 權力層들과 塗炭속에서 阿鼻叫喚하는 衆生들의 悲慘한 實相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첫째로 物質文明을 發展시켜서 民生의 富를 增殖시키고 둘째로 兼愛思想을 鼓吹하여 戰爭을 禁止토록 하고 셋째로 節約思想을 奬勵하여 財産을 蓄積하도록 하여야 道德도 그 속에서 自然히 蘇生된다고 力說하였던 것이다.

  墨子의 이와 같은 思想은 思想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고 自己自身이 實踐하였으니 첫째로 事物의 正名을 철저히 함으로써 科學的 發達을 促進시켰으니 그의 科學的 所論은 오늘에 있어서는 믿지 못할 만한 卓越한 價値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註」光學, 力學 等을 參照) 그 다음 諸國을 歷訪하여 平和를 提唱하고 自己自身이 儉素한 生活을 하면서 勤儉을 奬勵한 것 등은 實로 본받을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中에서도 吾人이 特히 본받을만한 것은 그가 物質文明을 發展시키기 위하여 모든 事物에 賦與되어 있는 名稱에 대해 正名(槪念決定)을 徹底히 하였고 또 그의 正名方法을 指示하였다는 점이다. 勿論 斯學의 發展은 秦火以後 비록 衰殘하여졌다고 할지라도 그의 著書가 今日까지 남아있기 때문에 오늘의 光明을 받게 되었거니와 따라서 正名思想과 天道法則 硏究는 漢醫學硏究에 있어서도 혹은 基本哲學으로 혹은 補助科學으로써 絶對的 經典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哲學이 正名段階를 거치고야 事物의 眞理를 探索할 수가 있고 醫學이 正名된 다음에야 人體의 秘密을 찾아내는데 吝嗇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事物의 眞理를 探究하려면 正名이 必要하게 되고 따라서 正名하기 爲해서는 文字의 媒介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글字 自體부터 바로잡지 못하면 事物의 名稱을 바로 잡을 수 없게 되고 그의 名稱이 바르지 못하면 事物의 標識이 不公正하여져서 眞理도 邪道에로 轉落하기 일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哲學徒는 勿論 우리 漢醫學徒에 있어서도 正名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직 論議되어야 할 것은 正名方法인 것이다. 이 問題는 本稿에서 論할 性質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略하거니와 이제 여기에서 한마디로 말한다면 字典을 無限히 찾으면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다고 生覺되는 글자를 篆字나 古字까지 對照하면서 그의 象과 形을 檢討하는 일이오 다음은 正名에 關한 典籍을 잘 硏究할 것이오 세째로는 變化原理(五行思想)를 完全히 納得하게 되면 無難히 解決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本講에서 變化原理부터 先論하는 것도 實로 이와 같은 모든 難題解決의 基盤을 먼저 닦아놓으려는 것이다.(總論終)

<筆者=서울 鐘路區 韓東錫漢醫院長>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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