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6일, 한국기독교 회관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강연

김지하 모심


우리는 지금 생명세계의 위기를 말하고 그에 대한 기독교 비전을 찾고자 한다.

이 일을 함에 있어 우리는 한국 기독교 신학의 위대한 전설인 장공 김재준 목사의 가르침의 인도를 받고자 한다.

목사님의 기억 세 가지가 뚜렷이 내 가슴에 새겨져 있다.

첫째는 민주화 운동을 상의하고자 수유리 자택을 방문했을 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목사님은 허름한 런닝과 파자마 바람으로 나를 맞으셨다. 적이 놀라고 있는 내게 목사님은 첫 마디를 주셨다.

'밥은? 밥부터 먹자.'

그때의 놀라움은 이미 내게 있어 하나의 큰 가르침이다. 할아버지의 따뜻한 하나의 큰 가르침이다.

둘째는 YMCA 일층 찻집에서 있었던 최초의 유신헌법 반대 선언식 때다.

선언식 뒤 일행이 경찰에 의해 트럭을 타고 종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트럭 위 건너편에 앉아 계시던 목사님이 이편의 내게 보내신 그 눈빛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지극한 연민이었다. 나는 그때 결혼 직후였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목사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셋째는 그날 종로 경찰서에서다.

청와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거의 온종일 우리는 커다란 방에 무료하게 앉아 있었다.

가까이 계시던 목사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미스터 김. 외국에 좀 나가보지 않겠나?'

'바쁠수록 외국 견문은 꼭 필요해요. 평생 일할 텐데 뭘!'

'저는 아직 우리나라 땅도 다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한 번 주선해 볼까?'

'이때다 싶으면 제가 스스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때다 싶으면 그땐 이미 늦어!'

뒷날 바이칼 여행 중 이르크츠크 지역에서 그곳에서는 거대한 신화적 인물인 '샤먼 마하'를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허름한 농가의 허름한 할아버지였다. 현대 세계의 제1의 명제는 무엇인가를 묻는 내게 마하는 '생명, 여성, 평화'를 말했다. 그리고는 몸이 나빠 지팡이를 짚은 나를 짙은 연민의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다가 '당신 머지않아 몸이 크게 좋아진다.' 헤어질 때의 나의 큰 놀라움은 다름 아닌 장공 목사님의 기억 때문이었다.

'밥 먹고 가거라!'

생명 세계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 비전을 찾음에 있어 장공 목사님의 기억을 전제하는 것은 이제 기독교 신학에 대해 생명의 땅 동북아시아와 한국에로의 견문이 필요함을 말하고자 해서다.

위기 중에도 큰 위기다. 남은 때가 많지 않다.

그 견문 과정에도 장공 목사님의 신학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역시 세 가지 원칙이다.

'장공 김재준의 신학 세계'에서 인용한다.

'자유'다.

죄의식이나 죽음으로부터의 내적 자유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외교 등의 자유를 포함한 인간의 외적 자유도 포함한다.

동북아시아의 전통 종교, 불교나 동학과의 관계, 그 과정에서의 창조적 진화론과의 트인 관계. 그리고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신학이 요구하는 '네페쉬 하야'의 텅 빈 자유의 문제 등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자세다.

'종이 교황'에 대한 저항이다.

보수적 근본주의의 우상화 기도와 '성서 문자 무오설'에 대한 신학적 저항의 차원에서 외경에 대한 담대한 탐색과 함께 한국 및 동북아시아 신학 건설 과정에서 한국 교회의 참으로 신선한 주체성을 창조하는 문제다.

'고등비판'의 재평가다.

'고등비판은 성서 계시의 가장 유력한 답변자'라는 목사님의 견해를 다시 기억하는 일이다. 목사님의 다섯 가지 원칙이다.

하나님은 성서기록의 영감을 받은 사람을 결코 기계처럼 다루지 않았다.

성서 기자는 성서를 기록할 때 기존의 모든 자료를 참고, 비판, 정리, 취사하는 기록자의 정칙을 무시하지 않고 잘 지켰다. (눅 1:1~4)

하나님의 말씀 계시는 기성품처럼 완성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고 시대 환경 속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감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하신 내용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하는 것과 그가 사람을 향해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가 하는 두 가지이다.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 결코 기록의 절대 무오한 정확성을 기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기록의 불완전성이 성서의 구속적 목적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그러니 기독교 신학을 알 리 없다. 그러나 생명세계의 위기와 종교 간의 갈등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거대한 파국의 눈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 한복판에 진보 개신교가 서 있다. 이 파국을 도리어 개벽적인 차원 변화로 승화시키는 책임이 진보 개신교에 주어져 있다. 경기도 광주요양원 '작은 안나의 집' 상담사로 일하는 류상태 목사의 말이다.

파국을 어떻게 창조적 개벽으로 바꾸는가? 이것은 지금 우리가 부딪친 초미한 시대의 과제다.

여기에 관해서 고뇌하고 있는 나에게 마침 장공 기념회에서 특강 요청이 왔고 목사님을 늘 그리워하고 있는 나로서는 거절 못하고 강의 내용을 구상하다 보니 자연 목사님의 인도를 받게 된 것이다. 신의 뜻이라고 밖엔 말 못하겠다.

기독교에서 나는 몇 가지 크게 배운 게 있다.

확신이 서지 않은 경우에도 희망하고 투신하는 섬김.

그 과정의 모순, 갈등, 고뇌를 담대하게 접수할 때 한울의 가르침이 온다는 것, 그리고 죽음과 부활, 원수 사랑과 초월, 비둘기의 순결과 뱀의 슬기의 균형, 선과 악 사이의 상호보완적 반대 등 참 중도를 찾는 과정에서 '흰 그늘'이라는 숭고에 이른다는 믿음.

우리는 참으로 파국적인 생명위기와 동서 종교 간의 갈등, 그리고 악질만세(惡疾滿世)의 대병겁(大病劫)의 도래와 이를 틈 탄 전체주의적 에코 파시즘의 어두운 동굴 앞에 서 있다.

장공의 흰 영을 따라 그것을 뚫고 가는 길을 한 번 찾아보자.

지난 세기부터 서서히 지구가 병들고 흙과 물과 숲과 동물들이, 공기와 사람들이 병드는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생명위기가 전면화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수없이 많은 종(種)들이 멸종, 파괴, 변질되며 화석연료의 이산화탄소 과대 배출로 인한 온실가스로 온난화가 극에 달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온난화 사이사이에 간빙기(間氷期)가 겹쳐들면서 더위와 추위가 교차생성하며 기괴한 바이러스와 전염병이 여기저기서 창궐하기 시작한다.

오존층 파괴와 라니냐, 엘니뇨 등 해수 변동 역시 심각하다. 2004년에는 대해일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 26만 명이 한꺼번에 죽는 사고가 일어났으니 이는 대륙판과 해양판의 대충돌 때문이며, 이 충돌은 지구 자전축의 이동 때문이라고 한다. 자전축 이동에 따라 북극을 구성하는 지구 중심 에너지 수렴 축인 지리극(地理極·geographic pole)과 지구 에너지의 외계 확산 연결고리인 자기극(磁氣極·magnetic pole)의 상호 이탈과 재형성으로 북극 대 빙산들이 본격 해빙되고, 동토대 밑에 묻힌 메탄층 대폭발로 인해 북극이 따뜻해지는 반면, 적도에는 눈이 내리고 케냐 등에 얼음이 어는 괴변이 일어난다. 난류와 한류가 엇섞이며 남반구 해수면이 예상보다 엄청나게 초과 상승하면서 대륙의 저지대가 깊이 침수돼 세계 농업지대가 대규모 상실되고 있다.

해일, 지진, 화산, 산불, 토네이도, 침강, 융기 현상 등이 매우 활발히 진행된다.

인간 생명계 일반에도 기괴한 변동이 속출하고 있으니 불임(不姙), 불감증, 극도의 피로감으로 인한 절대 노동력 감퇴, 암, 원인 모를 병들의 속출, 그리고 죽지 않는 괴 생명체의 출현과 수십종 곤충 겨드랑이에서 이미 아득한 옛날에 퇴화돼버린 날개가 다시 돋아나는 재진화(re-evolution) 현상이 나타나고,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OECD 국가 중 최고의 자살율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대학생 자살자 수만 한 달 평균 30명이다. 모방자살의 연쇄는 이제 뉴스도 되지 못한다.

올해 4월 말 촛불이 켜졌다.

그 주체는 어린이, 청소년, 여성과 쓸쓸한 대중으로서 동서고전에서 공히 피보호 대상에 불과하던 그들이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 역사 초유의 일로서 아젠다 역시 먹을거리, 물, 교육, 가스, 운하 문제, 의료보험, 생계 등 통상적 정치 차원에선 전적으로 배제되어 왔던 일상적 생활 자체였다.

더욱이 그들은 철저한 비폭력·평화와 춤, 노래, 문화의 행동 양식으로 일관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쪽에서 전면적인 직접 민주주의를 관철해서 고대 아시아의 풍류(風流)와 함께 화백(和白)을 부활시키는 듯했다. 새로운 형태의 호혜시장(互惠市場), 즉 신시(神市) 부활의 조짐마저 나타났다. 지도자도 조직도 동원 체제도 없는 철저히 자율적, 자발적, 개체 중심적인 우발적 분권적 융합의 기상천외한 군중 행동의 신 양식을 보였다.

이것을 '첫 촛불'이라 한다면 6월 29일 경의 좌우익 폭력의 악순환 이후 그것을 끊고 들어온 천주교, 불교, 원불교와 일부 기독교의 촛불 평화 시위는 '새 촛불'이라 하겠다.

이는 1968년 5월 프랑스 문화 혁명과도 그 차원이 다른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새로운 사태다. 이들은 모두 '생명·평화'를 표방한다.

이 모든 현상들이 한마디로 '생명세계의 위기'라고 하겠다. 수많은 지식인, 정치전문가, 언론인들이 이 촛불을 전혀 납득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촛불을 이용하려는 좌파 일부의 움직임이 있으나 이는 시민 자신들로부터도 '숯불'이나 '횃불'이라는 명칭으로 시니컬하게 구별되고 있다. 이 촛불은 어떻게 정당하게 해명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미국, 유럽을 중심으로 폭발하고 있는 대규모 금융위기는 대서양 중심 자본주의 문명의 일대 중심 변동으로 그 자본 이동의 방향으로 봐서도 동아시아, 태평양 및 아시아 중심의 새로운 세계 문명으로 경제적 개벽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역시 거대한 지구 위기일 것이다. 아시아 고대 신시 체제의 현대, 초현대적 부활 기회가 아닐까!

나는 현금의 생명위기, 우주 및 지구 변동, 온갖 행태의 생명괴변과 바이러스, 그리고 촛불 등을 한마디로 '후천개벽(後天開闢)'으로 파악, 인식한다.

'후천개벽'은 19세기 조선시대에 남한 일대에서 일어난 남조선 사상사 전반에 일관된 문명관, 시국관으로서 1860년 4월, 5월 동학(東學)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에게 내린 한울님의 계시가 그 시작이다. 이후 20년 뒤의 충청도 연산의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 또한 그 20년 뒤의 전북 모악산 구릿골의 강증산(姜甑山), 또 그 과정에서의 전북 진안(鎭安)의 이연담(李蓮潭)과 김광화(金光華)의 오방불교(五方佛敎) 및 남학(南學), 그리고 일제 하 전남 영광 등지의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의 원불교(圓佛敎)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고려 말 신돈(辛旽) 개혁 실패 이후 금강산과 지리산을 거점으로 형성된 하급 불교 승려들의 비밀조직인 '당취(党取)'가 일관되게 추구했던 '화엄선(華嚴禪)'의 전통 역시 개벽운동으로서 나는 그것을 '화엄개벽'의 선구로서 파악한다. 이는 신라 말, 고려시대 내내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우주와 세계 통합질서로 가능했던 화엄 사상을 개체 중심의 선(禪)으로 민중적 차원에서 해체 개벽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이들 노선들 간의 상호 혼효(混淆) 현상은 매우 복잡한 것이나 예외 없이 후천개벽 사상 안에서 유·불·선과 기독교가 혼합 통일돼 있음이 특징이다.

후천 개벽은 선천(先天) 개벽이 5만 년 전, 떼이야르 드 샤르뎅 진화론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 에렉투스(Homo sapiens erectus) 즉, '생각하는 직립인간'의 바다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즉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인간, 반성적 인간'의 출현 사태를 말하는 것에 비해 현대에 와서 우주 최초의 혼돈적 에너지가 극점(오메가 포인트)에 이르러 다시금 우주 생명계에 편만ㆍ지배하면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바다 속에서 이제는 놀랍게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디비나(Homo sapiens sapiens divina)' 즉 새로운 인간인 '신인간(神人間)'이 출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혼돈적 질서(東學의 運元之一氣· 弓弓太極이거나 正易의 呂律, 한민족 신화인 1만4000년 전 마고성의 八呂四律, 강증산의 陰開闢 등)'의 출현이다.

또는 이연담(李蓮潭), 김광화(金光華), 김일부(金一夫)의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影動天心月)'라는 개벽적 명제 속의 바로 그 '그늘(影)' 그리고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의 '개벽적 일원상(開闢的 一圓相)' 등과 한 계열의 사상으로 결국은 당취 조직의 비원(悲願)인 '화엄개벽'의 거대한 혼돈적 질서(chaosmos)의 이미지 안에 수렴되는 것이다.

동학은 '한울을 모신다(侍天主)' 또는 '사람이 한울이다(人乃天)'라는 슬로건 안에 후천개벽을 압축하고 있는바 동학 수행의 초점인 주문 38자 降靈呪文, 本呪文, 實踐呪文 등 三種呪文 안에 총괄된 '화엄개벽'을 오늘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우주, 지구, 세계, 사회와 생명 및 영성의 대변동을 생생하게 살리고 예감하고 모시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운 최제우는 이미 1860년에 '십이 제국 괴질운수 아동방이 먼저 하여'라고 읊어 오늘 한반도의 이 괴이한 생명위기를 예언하고 있고 김일부의 정역은 현재의 지구 및 사회 대변동을 '기위친정(己爲親政)'이라는 원리 안에서 또한 예언하고 있다.

'기위친정'이란 주역(周易) 성립 전후한 3000년 전 서남·서북쪽으로 크게 경사(傾斜)되어 지구간지(地球干支)의 여섯 번째인 '기위(己位)' 즉 '대황락위(大荒落位)'에 함락된 지구 자전축이 후천을 맞아 본디의 자기 위치인 우주 정치의 중심 즉 북극으로 복귀한다는 뜻이다. '친정(親政)'은 임금 노릇을 회복한다는 뜻이니 스티븐 호킹이 전 우주에서 유일하게 물과 생명의 탄생지인 북극을 우주의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에서 그 뜻을 밝혀 알 수 있다.

또한, 정역은 자전축 북극 복귀 때에 앞서 나열한 바 있는 현재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괴한 변동들이 모두 뒤이어 일어남을 역학(易學) 용어와 상수(象數) 체계로 미묘하게 표시하고 있다.

'기위친정'은 또한 지구 자전축과 함께 북방의 은하, 성운, 별자리들이 한 방향으로 경사되어 있다가 제 자리에 되돌아옴을 뜻하기도 한다.

수운 최제우의 시에 '남쪽 별자리 원만하면 북쪽 은하가 제자리에 돌아온다(南辰圓滿北河回)'란 구절이 있으니 이것이 그 사정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남쪽 별자리의 원만함'이 뜻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에게 지금 무엇일까? 강증산은 후천을 '음개벽(陰開闢)'으로 강조하면서 그 과도기간에 전 인류의 3분의 2가 죽는 대병겁(大病劫)이 오리라 예언했으니 1907년경에 당대를 '악질만세(惡疾滿世)'라고 표현한 바 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기위친정'의 때엔 '이십 미만의 어린이, 청소년과 여성이 정치 전면에 나선다'는 뜻의 '십오일언(十五一言)'과 이와 전후하여 '기왕의 선각자, 지식인, 문화인, 종교인과 정치인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어린이, 여성들을 보조한다(十一一言)'고 정역은 주장한다.

첫 촛불의 직접 민주주의와 새 촛불의 보조, 지원, 그리고 지금 진행되는 여야 정가의 대의 민주주의(代議 民主主義), 지자제(地自制), 총리직 연관의 개헌론이 뜻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노자(老子)의 이른바 '무위이화(無爲而化)' 즉 '선각자인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백성이 모든 정치를 다 한다(我無爲 民自化)'는 이른바 고대 이상 정치, 태양정치(太陽政治), 그리고 기독교 쪽에서 본다면 '창조적 진화론에 토대한 조화정치(造化政治)' 즉 '하느님 통치'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인가?

강증산은 이러한 때 여성이 우주 정치의 전면에 나선다는 음개벽, 남성 하느님이 여성 하느님에게 하늘과 땅과 사람의 대 권력을 넘기는 '천지 굿'을 중심으로 신명과 인간과 일체 사회를 재판 처결하여 세계의 모든 종교를 통합하는 통일신단(統一神團)에 기초한 세계 조화정부(造化政府)를 강조해 말하고 있으니 이는 곧 영과 생명의 원리로 움직이는 새로운 UN 같은 것이겠다. 강증산은 '남조선 뱃노래'라는 가르침에서 서양의 물질문명이 배를 타고 한반도로 몰려드는 우주 역사의 대세를 설명하고 죽을 때에 임해서는 자신이 서천(西天) 즉 서양으로 가서 서양 문명의 모든 정수(精髓)를 모두 몰고 다시금 이 한반도에 와 후천 시대의 대문명을 세우리라고 약속한다.

지금 세계 시장에 진행되는 주식과 자본과 시장열(市場熱)의 이동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인가?

유럽 경제 전문 연구기관이 일관되게 코멘트하는 바 '서방엔 공포가, 동방엔 희망이 지배한다', '세계 자본 이동의 지정학적 변동', '리오리엔트'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통일신단의 구성 과정에 후천 기독교 종장에 '마테오리치'를 임명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크리스토퍼 도우슨이 인식한 16세기 마테오리치의 북경 상륙이 가진 인류 새 문명사 태동에 대한 잠재적 의미와는 어떤 상징적 연관이 있을 것인가?

또한, 그가 동학의 강령주문인 '지기금지(至氣今至)'가 '후천 시대의 율려주문으로서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라고 주장한 데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지기'가 다름 아닌 '혼돈한 우주 에너지(運元之一氣)'이고 보면 그것이 율려(律呂·동아시아, 특히 중국 고대 질서의 우주 음악의 율격, 즉 조화 질서)로서 임금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이니 바로 정역의 '기위친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증산의 농민의 풍물(農樂)에도 못 끼는 '걸뱅이 각설이 타령'을 바로 그 율려(19세기 민중적 혼돈적 질서를 뜻하는 여율·呂律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제자들에게 '내 말을 듣고 웃는 놈은 그 자리에서 직사하리라'고 엄포를 놓고 있는 점이다.

농민, 즉 전통적 조직 근로 대중도 아닌 밑바닥 천민, 그러니까 어린이, 미성년, 여성, 쓸쓸한 외톨이 대중 따위 '네페쉬 하야'(산상수훈) 그 나름의 음악(정치력)이 새 시대를 통치할 것이고, 이것의 필연성을 거스르는 자는 '직사'한다는 것이니 여기에 정역의 '十五一言과 十一一言으로 구성된 己爲親政'의 함의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바 이것이 예수 복음과의 관련에서 갖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또 이것이 수운 해월의 '인내천'이나 '어린이와 여성이 후천개벽 시대의 타고난 도인(道人)이요, 먼저 온 한울님이다'라는 독특한 사상과는 어떤 관계일 것인가?

정역은 후천개벽 사상사 전체에 대한 신비적 동양과학(易) 차원의 해명서일 것이다.

그리고 정역에 대한 이제까지의 가장 엄밀한 역철학적 연구서인 이정호(李正浩) 선생의 사상체계(아세아문화사 간행의 다섯 권)에서 보면 서경(書經)과 주역(周易)을 바탕에 둔 정역은 어쩌면 예수 신비의 동양적 해명서요 동서양 문명 새 시대에서의 큰 예언서가 될지도 모른다.

놀라운 일이다.

어쩌면 장공 목사님의 가르침 따라 찾아 가는 생명 위기 시대의 기독교 비전의 구조 안에서 동아시아 유·불·선과 한국 남조선 사상사와 그 신화적 배경 모두가 하나의 탁월한 통일에 도달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정역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동서 화합과 남북 화해의 근원적 원리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역의 기본은 기위친정과 십오일언, 십일일언에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이정호는 그 시작을 놀랍게도 '반고오화(盤古五化)'에서 찾는다.

반고는 한울님 즉, 하나님이다.

그 반고로부터 성인(聖人)이 하강한다는 것이니 그 성인은 곤(困·고통)을 통해서 죽음의 시절의 대 개벽을 지나 동지(冬至), 하지(夏至)의 극도의 추위, 더위 중심이 아닌, 추분(秋分), 추분(秋分) 중심의 서늘하고 온화한 4000년 유리세계(琉璃世界)를 연다는 것이다.

이때 반고는 모체(母體)의 태반(胎盤·태꼭지)과 흡사하니 모체의 회음혈이라, 마치 십자가 후의 무덤처럼 부활 전의 대황락위(大荒落位), 즉 기위(己位)이니 바로 꼬래비 자리다.

태반이 모체의 자궁벽에 깊이 붙어 있어 아무것도 못하는 듯하나 모체의 영양과 생명을 태아(胎兒)에게 공급하고 있는 곳, 바로 회음 자리인 것이다.

이 태아는 정역의 십오일언의 완전한 생명의 조화와 영적 일치로 건전한 발육을 하는 것이니 회음 중심의 태교(胎敎)와 같다. 아메리카 태교 과학에 의하면 태아의 뇌세포 70% 이상이 태교 과정에서 이미 다 형성된다. 태교는 죽음, 부활, 후천개벽, 기위친정, 신인간, 여성혁명에서 모두 치명적 중요성을 갖는다. 여기가 정역에서는 '천지인 삼극통합'의 자리요 동학에서는 바로 그 기초인 '모심'의 자리다.

바로 이것은 도리어 예수의 태생지인 '마굿간의 여물통' 즉 '기위'의 메타포에 해당하고 하늘로부터의 예수 탄강(誕降)은 지구 자전축의 이천년경위(二千八白年傾危-정역표현)이고 기위친정은 그로부터의 축대 이동 즉 후천개벽을 뜻할 수 있겠다.

참으로 에수 신비의 역사적 초과 달성 신학의 근거 아닐까?

동학 주문 '시천주(侍天主) 수련'의 새 시대 새로운 육체 내부의 자리, 그 첫 자리가 회음부이듯이 반고오화(盤古五化)는 곧 '모심'이고 '모심'은 '마굿간 여물통' 자리와 서남북으로 기운 '기위(己位)'인 '대황락위(大荒落位)' 서양 세계의 첫 그늘의 곳간이다.

노자의 현빈(玄牝)이고 동학의 궁궁(弓弓)이다. 그곳이 무궁(無窮)인 한울님의 첫 모심 자리다.

십오일언은 복희역(伏羲易)의 하도(河圖)이니 다름 아닌 노자의 고대 정치 이상인 무위이화(無爲而化)이고 구약의 준비 자리이고 '진손 십오용정(震巽 十五用政)' 과정이다.

십일일언은 문왕역(文王易)의 낙서(洛書)요 간태합덕(艮兌合德-한국과 미국이 산택통기(山澤通氣)의 호혜 신시 새 문명 창조를 위해 손을 잡는 화백 직접민주주의의 촛불을 켜는 대목), 여기 정역의 구체적 요목은 십일용정(十一用政), 십일귀체(十一歸體) 안에 상세히 전개된다.

설명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이제부터 장공 목사님의 세 가지 원칙에 따라 개신교 지혜가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구체적 후천개벽 실현인 기위친정이다. 여기에서 예수 신비와 직결된 수많은 역학(易學)적 메타포들이 풍요로운데 내 생각엔 이 부분에 대한 공부로부터 앞으로의 생명 평화 등 새 세상 창조하는 온갖 구체적 과정들이 뚜렷 뚜렷이 밝혀져 나올 것으로 믿는다.

'기위친정' 즉 무덤에서의 부활에 연계하여 '하느님의 눈부신 강림(上帝熙臨)'에 부딪치게 된다. 놀라운 일이다.

모든 세계 종교의 평화와 개체 개체들의 눈부신 융합과 세계, 조화정부의 출현이 '금화정역(金火正易)'에 의해 금화정역의 우주 개벽로드맵에 따라, '윤달 없는 4000년 유리세계, 사랑, 생명, 평등, 조화로 가득 찬 '화엄개벽과 만물해방'의 하늘나라를 능동적으로 창조하게 된다.

정역의 기본 골격을 예수 신비와 연결하며 엉성하게나마 추려 보았다.

내가 성경에서 잠결에도 기억하는 곳은 여섯 군데다.

마굿간에서의 예수 출생,
갈릴리 전도와 산상수훈,
예루살렘 입성 전야 제자들의 발을 씻어줌,
예루살렘 입성과 돌의 외침 그리고 성전의 회초리,
십자가의 죽음,
무덤에서의 몸의 부활이다.

나는 이 여섯 마당에서 '모심', '살림', '흰 그늘', '개벽' 그리고 '대화엄'을 발견한다. 이 발견과 함께 동서 대융합의 가능성이 나의 영혼과 상상력 안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최근 촛불 사태 이후의 일이다. 나 자신이 크게 놀라고 있다.

화엄경 도입부에는 '몸이 신이요, 신이 부처요, 부처가 무궁무한이다'라는 부분이 있다. 불교의 부처는 신령한 하나님의 힘을 가진 텅 빈 세계다.

기독교의 하느님은 물론 저주, 복수, 사랑 등 능력을 가진 존재요 메시아를 보내는 분이시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그 스스로 자유이신 분이란 점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네페쉬 하야와 자유의 관계'에 대한 창조적 진화 신화의 최근 명제, 그리고 그 자유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오스카 쿨만의 '크로노스'나 '아이온'이 전혀 아닌, 마치 화엄 세계와도 같은 사방팔방시방의 온 땅 끝을 향한 장엄한 확충(擴充)적 선교가 가능해질 것 같은 강한 낙관이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다.

하긴 기독교인도 아니고 신학자는 더욱 아닌 내가 이러니 조금 주책 같다. 그러나 동학당인 내게 나름의 의미가 있다.

동학의 한울님에서 가장 중요한 근원인 '한울' 즉 '天'에 대한 설명이 수운 체계 안에는 전혀 한 글자도 없다. 강렬한 계시는 있으나 그 존재는 곧 '무(無)'요 '공(空)'이요 '허(虛)'다. 무궁(無窮)이요 무극(無極)이다.

그 무궁을 님이라 불러 '부모처럼 친구 사귀며' 그 무궁의 힘으로 수억천 년 진화와 미래의 대화엄 개벽을 참선하듯 모심으로써 추진한다는 것이 바로 천도교 아닌 나홀로 동학당 김 아무개의 믿음이다.

나에게는 오늘 주제에 대한 특별한 결론은 없다.

나는 참고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결론은 여러분이 내야 한다.

장공 목사님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내 생각엔 다음과 같은 참고 과제들이 또한 부수되어야 할 것 같다.

외경연구를 본격화할 것.
화엄경과 선(禪),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을 연구할 것.
동학, 정역, 증산, 소태산을 연구할 것.
창조적 진화론의 동서융합과정에서의 완성.
(동양 초유 창조적 진화론인 동학을 특별히 참고할 것)
포스트 모더니즘과의 관계 재구성.
디지털 네트워크와의 적극적 관계 모색.
생태학과의 관계 적극 평가.
(심층 및 사회 생태학의 합일점인 '자유자연' 이론과 한국 기 철학 및 풍수지리학을 특별히 참고할 것)
촛불 현상의 다양한 심층 연구.
주역, 정역, 원효의 연기설과 삼일신고 및 천부경의 비교 연구.
이슬람 신학과의 목숨을 건 화해.
인디언 영성 및 아시아의 영성, 아시아 샤머니즘, 라마교, 조로아스터교, 아프리카 원시 영성과의 화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부경, 불교의 십이연기설, 그리고 스피노자의 결합을 시도할 것.

부디 오해 없기 바란다. 이것은 그저 나의 한낱 도움말일 뿐이다.

동학 수련의 최종 단계는 대화엄 또는 하늘나라, 무궁에 해당하는 '만사지(萬事知)'다. 그런데 그 '만사지'의 '지(知)' 즉 '앎'의 수운 해설은 '知其道而受其知', '진리를 노력해 알며 동시에 그 앎을 계시 받음'이다.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의 합발(合發)이다.

어찌 생각하는가? 오늘의 경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로 이것을 나는 '모심'에 의한 '화엄개벽'이라 한다. 그리고 그 모심 등은 이제 맨 먼저 몸 속에서 진행된다. 어찌 생각하는가? 모심은 곧 섬김이다.

예수의 이른바 최고의 사랑이다. 나는 이것이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가르침에 따른 생명세계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 비전에의 길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필사적인 부탁이 있다. 필사적이다. 불교와 화해하라! 온 국민, 온 인류, 온 생명과 우주 만물의 타는 목마름이다. 감사할 뿐이다.

김지하/시인 (aza1486@pressian.com)

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2844595&year=2008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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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나반존자는 이쯤하고 옆으로 돌아가서 보면 호랑이를 옆에 데리고 있는 흰 수염을 기른 백발의 노인이 앉아 계신다.

이런 데를 처음 가는 분은 좀 괴기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들 것이다.
본인도 처음에는 절을 찾아 이러한 울긋불긋한 단청이나 탱화를 볼 때면 약간 으스스 하고 뭔가 꺼림 칙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찌할 수 있으리, 우리의 국보 등 보물이 여기에 있으니 보기는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이것을 만든 분들은 우리의 직계선조들이 아닌가?

그래서 딱 들어가서 이러한 탱화를 쳐다보았는데 좀 무섭기도 하고, 사실 분위기도 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

   
 
  ▲ 개태사의 산신탱화  
 
탱화를 쳐다보면 그 인상들이 엄숙하다 못해 약간 공포감(?)도 들어 ‘푸줏간에 들어가는 소걸음’ 마냥 그 앞에서는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끌려나온 사람같이 ‘달팽이 눈이 되듯’ 겁이 나서 소심하게 기가 꽉 꺾인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너 절 안 할래” 하는 것 같아 우선 절부터 하고나니 좀 덜 무서운 것 같아지게 되었는데, 지금은 향도 한대 올려드리고 탱화를 째려보듯이 쳐다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어떤 때는 법당에 기도하는 불교신자분이 있던 말건 눈을 멍하니 뜨고 요모조모 살피곤 한다.
물론 절은 한다. 구경 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이곳 충청도에는 절보다는 천주교나 개신교 전도지, 전도당 그리고 유학의 명소들이 많다.

내친김에 하루 강경의 관광코스를 공개하겠다.
여기서 강경국도를 따라가다 익산 경계에 들어서고 200미터 오른쪽으로 유명한 화산의 나바위 성당이 있다.

한국천주교사의 중요한 성지이며 김대건신부가 최초로 국내에 상륙하여 전도를 시작한 역사적인 곳이다.
이곳 성당에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나바위에 있는 동학농민운동 때 망해버린 김여산(金如山)의 집을 1,000냥에 사들여 개조하고 성당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한국 초기 본당의 하나로서 당시의 풍속에 따라 남녀의 좌석을 칸막이로 막고 출입구도 각기 달랐는데, 우리문화의 특성에 맞게 한옥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나바위 성당 건물은 회랑이 있어서 한국적인 미를 맛볼 수 있는 곳 중에 하나이다.

정말 호젓한 성당이다. 건물내부에 있는 여러 점의 성화는 정말 문화재적 가치가 있어 보이는데 잘 그려져 있으니 빠트리지 말고 감상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성당 뒤로 언덕 위에 정자 뒤에는 바위에 삼세석불이 새겨져 있으니 찾아보기를 바란다.

천주교와 불교의 만남에 어울리는 절묘한 장소인데, 종교적인 화합의 포퍼먼스를 열기에는 최고의 터 같다.

여기서 다시 강경나루터에 오면 황복을 파는 집이 많은 데 황복 탕으로 포만감을 채우고 나루터 뒷산에 잇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팔괘정과 그의 스승이자 예학의 태두인 김장생이 강학하던 ‘임이정’이라는 정자를 들러보자.

아래에 있는 죽림서원에는 율곡과 사계의 위패를 모셔놓고 있는데 이곳이 유교적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특히 ‘팔괘정’의 건물 뒤 암벽에는 우암 송시열이 각자한 글씨가 있다. 당대의 조선의 유학의 거두들이 이곳에서 학문과 강학을 했던 곳이니 그 세도가 대단했던 장소이다. 이곳에서 조선사대부의 권력핵심에 있었던 자리이자 전국의 유학자를 움직이고 국가의 대소사와 국가의 왕을 견제하는 정신적인 지주노릇을 했다.

여기에서 옥녀봉 쪽으로 가서 금강나루 그 유명했던 강경포구를 전망하고 시원한 경치를 본 다음 전설을 듣고 내려가다 보면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북옥감리교회’인데 당시 선교사들이 서양인이어서 한옥이 부적절하여 다수의 초기기독교회가 헐리거나 개축되어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은 반면, 이곳은 당시의 예배 모습과 예배당 형태 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희소성과 중요성을 인정받아 문화재로 인정받은 곳이다.

이 일대는 근대 건축물도 많으니 잘 찾아보면 좋은 관광코스가 될 것이다.
 
가을에 간다면 ‘발효젓갈산업특구’로 지정되어 싸게 젓갈도 한웅 큼 사올 수 있으니, 오는 길에 미내 다리도 보고 여기는 용머리(龍首)를 잊지 말고 감상할 것이며 관촉사도 들린다면 마음이 풍요로워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시 개태사 산신탱화로 가보자.
 
산신(山神)!  우리가 그렇게 많이 들어 본 이름 아닌가?
절 안에 곁방살이를 하고 있지만 불교에 흡수 되지 않고 여전히 꿋꿋히 자리를 잡고 계시니 어떻게 보면 고집 센 노인네 같다. 그래도 얼굴을 가까이서 살펴보려면 우선 향을 한대 피워 올리고 절을 해야 옆에 있는 호랑이가 달려들지 않을 것 같다.

산신이 ‘야-호(虎)-야’ 하면 그 무서운 호랑이가 가만히 있겠는가. 그래서 산에 가면 ‘야-호(虎)’하는 것이 호랑이를 부르기 위한 호칭이었다고 한다.

산신탱화는 수염이 허옇게 백발의 노인이 배경을 산으로 하고 그 옆에는 호랑이가 있어야 하고 소나무와 시종이 필수조건이다.

여기에 절벽 위 평평한 곳, 부채, 불로초, 복숭아, 인삼, 시종이 화로에 주전자를 놓고 물을 끓이는 장면, 호리병이 달려있거나 달려있지 않은 지팡이 들이 등장하곤 한다. 

사실 절에 가면 우선 감상해야 포인트는 대웅전이 있는 법당의 천정과 산신이 그것인데, 잘 그려지고 장식된 천정을 보면 정말 동화속의 한 장면 같다.

오색에 치렁치렁하게 그려진 배경을 깔고 잘 지어진 닫집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커다란 용이 여의주를 물고 꿈틀거리고 금시조나 학이 날라 다니며  심지어는 도깨비 문향도 있으니 이런데 서는 감탄사가 나올 뿐이다.

그리고 산신탱화! 나는 이런 관점으로 보곤 한다.

산신에게서는,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나?, 안 쓰고 있나? 아니면 상투를 하고 있나?
머리를 빡빡 깎았나?, 아니면 긴 머리인가?
수염이 백발인가? 아니면 검은 수염인가?
젊은 모습인가?, 아니면 나이 지긋한 분인가?
입고 있는 복장이 어떠한가?, 노끈을 메고 있는 모습인가?
혼자만 폼을 잡고 있나?, 아니면 주변에 다른 분들과 같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나?
주변에 있는 분들이 1명인가?, 아니면 2명인가?

그리고 호랑이,

이놈이 호랑이인가?, 범인가?, 고양이 인가?
이놈이 백색으로 그려진 백호 인가?, 아니가?
이놈이 1마리인가?, 2마리인가? 또는 그 이상인가?
이놈의 인상이 째려보는가?, 장난을 치고 있는가?   
이글을 일고 실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어쩌랴.

나만의 감상법이다. 이런 것을 왜 보지 않으려고 하는지, 생각을 바꾸고 감상하는 법을 조금만 바꾼다면 이런 아기자기 함을 찾아가는 여정에 무한한 마음의 평온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이런데서 종교의 차이를 생각하고 미신으로 본다면 자신이 미신이고 사이비가 아닌가?

이러한 그림을 모시는 측에서는 신성시 할 것이고 다른 종교를 가진 분은 이를 미신 시 하는 것, 이 모두가 종교라는 색깔을 쓰고 마음속에서 선을 긋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을 넘어서자. 그림은 그냥 그림이다.

거기서 아름다움과 재미를 느낌으로써 영혼이 따뜻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소소한 재미를 느끼지 않겠는가. 이러한 그림에서 신성이니 미신이니 따지기 전에 그림의 어떤 점이 멋이 있고 해학적인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그 이전부터 이 땅에서 궁 굴러다니면서 그려 놓은 것이 아닌가?

그분들이 그린 그림이 종교성지 들에 있다고 해서 편견을 가질 필요가 무엇이리요.
그림을 정성껏 그린 그분들의 고마움을 봐서라도 보는 순간만이라도 ‘종교색깔을 훌훌 털고’ 이 그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서 감상하는 여유를 가지는 것은 어떨까?

요새는 서양화 그림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심지어는 영화까지 만들어 지는 것 같은데 이런 관심을 우리 것에도 가져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산신탱화로 유명한 곳은 직지사와 신원사 중악단이다.

신원사 중악단은 여기서 가까이 있고, 요사이는 해가 기니 오후 6시 이후에 다녀오는 것이 좋다.
그 시간 이후는 문화재관람료를 안 받으니 왠지 공짜 같은 느낌이 든다.    
중악단에 대한 설명은 각설하고 여기에 모셔진 산신을 한번 잘 살펴보시기를 권한다.

여기를 참견할 때는 도사(道師)급 수준의 분(?)들이 가끔 수행을 하고 계시니 몸가짐을 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함부로 산신탱화 앞으로 가까이 갈수 없는 분위기가 너무 엄숙한 곳인지라, 산신탱화 앞에 누군가 앉아 있으면 다음에 아무도 없을 때 가는 편이 낫다. 여기에 있는  산신 탱화, 그중에 호랑이 정말 죽인다!
머리 위에 솔가지에 앉아 있는 까치를 보고 째려보는데 그 놈의 표정이 가히 백만 불짜리이다. 뭔가 볼떼기에 불만이 가득한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인상하고는 더러워서 이것을 보고는 배꼽 빠질 뻔했다.

여기 모신 산신은 검은 수염에 젊은 선비모습인지라 상당히 근엄하고 멋있게 보인다.
이것이 전형적인 산신의 모습이 아닐까? 원래 계룡산신은 여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분은 누구일까? 

직지사에는 한국 최고의 걸작품으로 알려진 산신도가 있다.
나는 여기를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어 보지를 못했는데, 여기를 보신 분들의 말씀으로는 산신의 수염이 검고 산신 무릎에 안기듯이 바짝 붙은 호랑이 역시 위엄이 있어 눈빛이 상대를 노려보는 것이 무섭다고 한다.
그리고 뒤에 늘어진 소나무는 정말 잘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보고는 싶지만, 문을 안 열어 줄 것 같다.

이제 개태사 산신으로 가보자. 이절의 산신탱화는 평범하지 않다.

역시 무엇인가 다르게 두 분이 더 그려져 있다. 옆에 있는 두 분 ‘누구세요’ 물어 보니 대답이 없으시다.

먼저 주인 되는 산신의 이력을 알아보자 .

조선후기 설암추붕(雪巖秋鵬)이 남긴 묘향산지(妙香山誌)는 사료의 가치를 중시하여 특히 단군에 관한 금서인 제대조기(第代朝記)를 인용하여 환인의 아들인 환웅과 백호사이에 단군이 탄생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환웅은 천신인 환인과 지모신(地母神)인 웅녀 사이에서 탄생하였고, 단군은  환웅이 새로운 지모신인 흰범과의 사이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곰은 범보다 북방의 고아시아족으로 예족을 칭하고 범은 좀 더 남방에 위치한 맥족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이 산신각의 탱화와 상통하는 보편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신각의 노인으로 그린 산신령은 곧 환웅이고, 범은 백호로서 환웅과 백호가 단군의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산신도에 전하는 산신과 백호의 그림이 단순한 산신의 환신이자 심부름꾼인 범이 아니라 산신을 부계로 범을 모계로 단군의 탄생을 준비하기위한 교통의 장면인 것이다. (허흥식저 신령의 고향을 찾아서)

이러한 한웅과 단군이 산신으로 모셔지는 이유는 한웅이 태백진교(太白眞敎)를 창교(創敎)한 분이고, 단군왕검이 덕교(德敎)를 창교한 분이기 때문에, 두 종교의 교조로 모셔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환웅과 단군의 초상이 산신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그려져 전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도명산과 각산에 모셔지는 산신령들과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팔도명산과 각산에 모셔지는 산신령들은 그 고장에 처음 터를 잡은 종족의 우두머리이거나, 역사에 위인으로 남은 분들이다.

봉우(鳳宇) 권태훈 선생에 의하면 “어쨌든 산신도 정신계인 천상에서 임명하는 선관(仙官)중의 하나로서 임명직인 셈이다. 지상의 산악을 주관하는 정신계의 관리가 산신인데, 하나의 산에 하나의 산신과 여럿의 부산 신(副山神) 및 그 산의 각 지역을 맡은 지역산신들이 존재한다.

보통 각 지역의 주산에는 산신이 존재하는데 두 사람의 학인을 성공시키면 산신도 등급이 한 단계 올라간다고 하며 그래서 어떻게든 수도자가 성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하는 것이 산신의 주요 임무라 한다.
산신가운데 제일 원만하고 인자한 분은 역시 백두산 산신으로서 정신수련 학인들을 가장 성심껏 후원해 주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계룡산산신은 매우 엄격하다. 정신계 7계 이상으로, 인간으로서 도달 할 수 있는 최고 단계인 성인의 경지이다. 지상에 있을 때 전생에 천자소리 들었던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산신으로 있으면서도 성인 대접을 해야 좋아한다고 한다.
계룡산 학인들은 지금도 산주(山主)에게는 사배(四拜)로서 예를 표한다.
가끔 도인들(정신계 4~5계의)이 계룡산에 와서 산신이 영접을 안 한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툴툴대는데, 이는 자신의 계제만 알지 계룡산 산주의 계제가 이렇듯 높은 줄은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계룡산은 산은 작아도 정신계의 센터이며 사령부인 천상 자미원(紫微垣)의 동자미(東紫微) 구성(九星)의 천상(天象)이 조응(照應)하는 원혈(元穴)이 있는 명산으로서 역대로 수많은 성현들의 수도처였던 곳이다.
어쨌든 백두산을 빼놓고, 남한의 산중에서 가장 계제가 높은 산신이 주재하시고 있는 산이 계룡산이다.

계룡산의 지역산신(산안에 여러 지역이 있다)이 보통 다른 산의 주산신과 계제가 같을 정도이다.
계룡산 산주는 매우 엄격해서 학인들에 대한 신상필벌이 엄정하다. 산에 와서 공부에 태만하거나 성정이 사특한 자는 대번에 퇴출시켜 버린다. 잔술(小術)도 잘 안 봐준다. 그래서 공부 성공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다.

계룡산 초계가 다른 산의 재계(再階:2계) 만큼이나 어렵다고들 한다.
계룡 산주 입장에서는 계제를 쉽게 주면 학인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산중이 시장바닥처럼 될 것을 우려해, 그것이 싫어서 먼 산 바라보듯 학인들을 대한다는 것이다.
계룡산 산신은 아기봉과 천황봉, 연천봉을 두루 다니며 산을 주재한다.”
(봉우사상연구소 자료)

산신령도 시대별로 그 모습이 변해서 그려지고 있는 것 같고 나이 드신 분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젊은 분도 그려지고 여자 분들도 있는 것과 심지어는 상투를 튼 모습도 있는 것을 보면 산신령도 옛날분만 산신령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시대별로 학식 있었던 분으로 나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산신령으로 임명되는 것 같은데 또 지역수장의 위치도 바뀌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노끈으로 맨 도포, 숱이 많은 검은머리와 수염, 나뭇잎망토는 단군의 초상이나 입상에 자주 보이는데 이런 것이 호랑이와 더불어 단군과 관련된 징표가 아닌 가해서 유심히 쳐다보곤 한다.
참고로 나뭇잎망토는 중국의 복희씨 초상에도 이러한 망토를 입고 있는데 이분도 단군의 후손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면 산신도를 한번 살펴보자

산신도에는 보통 호랑이 1마리와 산신 그리고 동자 1명을 함께 그린 산신도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때로는 호랑이 2마리나 여자로 보이는 분들이 1-2명 그려진 그림도 있다.

이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호랑이 2마리가 호위하는 분은 환웅천왕이고, 호랑이 1마리가 호위하는 분은 단군왕검이다.

부인한분이 있는 것은 한웅천왕의 부인인 매화부인, 즉 ‘직녀’이고, 부인 두  분이 같이 있는 것은 단군왕검의 두 명의 부인, 즉 웅심국왕의 딸인 ‘웅녀(熊女)’와 하백 부소갑의 딸인 ‘하백녀(河伯女)’이다.
 
산신도에 그려지는 호랑이는 백호이다. 백호는 서쪽과 금성(金星)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천제(天帝)의 호위를 담당하는 별이 금성이다. 그러므로 산신도에 모셔진 산신이 금성의 호위를 받는 천제의 화신임을 알 수 있다. 천제의 화신은 곧 천자(天子)이다.

그러면 동자는 누구일까? 동자는 ‘마고(麻姑)’의 외동아들을 상징한다. 그를 막동이라고 한다.
막동이는 ‘막동이’(邈東夷), 즉 마고에게서 태어난 동이족을 의미한다.

뒤에 산은 그것이 고조선영역에서 전해지고 한반도로 축소되었을지라도, 우리의 팔도강산이다.
불교의 수미산을 가운데에 두고 도교의 오악이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 산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산들이다. 불필요한 불교와 도교가 과도하게 덧씌워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산신은 아직도 불교에서는 단지 원시적인 미신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는 바, 가야산 해인사의 성철스님은 교리적으로 무속적인 요소에 열정적으로 반대하고 ‘정화된’ 불교를 주창하면서 해인사의 모든 건물과 암자에서 산신제단과 그림을 치워버리고 사찰의 박물관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성철스님이 타계하신 후 일반인들이 산신을 많이 찾기 때문에 절반이상의 암자에 이들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화려하게 산신이 부처모습으로 바꾸어져 분칠되어 있으니 볼썽사납다.

산신과 같은 비불교적인 신이 독립적인 탱화, 제단, 공양물, 기도, 찬탄, 심지어는 독립적인 전각까지 가지게 될 때 이것이 자칫 불교의 신들에 대한 공양을 약화시키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는 데 그 근본이유가 있을 것 같다.

단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를 한결같이 지켜주고 조용히 자리하는 것만도 우리에게 감사하고 힘이 되는 것이 아닌가?

수천 년에 걸쳐 그 자리에 있게 해온 조상들의 말없는 몸가짐에서 그들이 우리와 우리 가족들 그리고 나라를 위해 눈물 흘리고 때로는 기뻐했을 삶이 농축되어 온 자리가 아닌가?

우리들의 편리함과 종교적인 이익만을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화려한 분칠도 하지 말고 하나의 목마른 생명수로, 한 줄기 고운 햇살로 그냥 놔두고 더 이상 서럽게 만들지 말고 자리하게 하여주자.
우리 곁에 오래오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바람이 함께 했으면 한다는 생각이 든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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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한동석선생과 증산도의 관계를 묻는 분이 계십니다.

'결론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단지 증산도에서 우주변화의원리 책을 활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위 말은 증산도에서 우주변화의원리를 강의하시는 윤창렬교수님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아래 글 참조)

우주변화원리는 한동석선생이 돌아가시기 1년 전인 1966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여기에 무슨 사심이 있었겠습니까. 분명히 우주원리와 동양학의 발전을 위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쓰인 책이지, 결코 증산도의 포교를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책의 내용으로 보면 알 수 있지만, 불교 교리를 좀 더 연구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돌아가실 때는 천주교 루까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 계룡산 향적산방에 기거하시면서, 정신을 집중하던 기록과 발자취가 곳곳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위 향적산방은 본래 일부선생이 제자들에게 정역을 가르치던 곳이었습니다. 제1기, 제2기를 거쳐 현재까지 동양학을 연구하는 학문의 전당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당연히 증산도와는 무관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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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우주변화의 원리’ 알기 쉽게 풀었어요

엄상현 기자 주간동아 3월 11일 626호 95p

한의사이자 동양철학자인 한동석이 1966년 펴낸 ‘우주변화의 원리’는 동양철학자와 한의학도들의 필독서다. 하지만 우주변화의 원리를 음양오행설로 풀어 설명한 이 책은 내용이 너무 난해해 끝까지 읽고 이해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이 책을 25년간 연구하고 대중화에 나선 사람이 있다. 대전대 한의대 윤창열 교수(51·한의학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대학에서 의역학과 의철학을 가르치는 윤 교수는 2006년 3월부터 1년간 63회분 방송용 강좌의 녹화를 마쳤다. 이를 지난해 3월 개국한 케이블TV 상생방송(STB)이 방송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 것.

윤 교수는 “읽고 싶지만 어려워서 엄두가 나지 않던 책을 알기 쉽게 설명해줘서 좋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1976년 경희대 한의학과에 입학해 이 책을 처음 접한 윤 교수 역시 한 번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82년 증산도에 입문해 안운산 종도사와 안경전 종정에게 설명을 듣고 비로소 깨우치기 시작했다는 것. 저자 한동석은 물론 ‘우주변화의 원리’도 증산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윤 교수는 다만 “증산도는 한동석 선생이 집대성한 우주변화의 원리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윤 교수에 따르면 음양오행설은 우주의 절대적 진리다. 철학자마다 다른 철학체계를 추구하는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철학은 음양오행이라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8괘, 자연수가 사용된다. “음양오행은 이런 숫자를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한다”는 것이 윤 교수의 주장이다.

윤 교수는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고 있다”면서 “‘환단고기’(한국 상고사를 다룬 책)를 100회 정도로 나눠 상생방송 등을 통해 강독한 뒤 많은 사람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민족정신을 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끝)

주간동아 3월 11일 626호 95p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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