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 대사는 천일기도를 전국의 산을 돌면서 하게 되는데 지금 남해에 있는 보리암에 이성계의 기도처인 태조기단이 있다. 이성계는 기도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보광산을 금산이라 개명했다.

다시 차길진선생의 말을 들어보자.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올리며 매달린 절대자 셋은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그리고 단군, 이렇게 3대다. 이성계 영가(靈駕)는 “그렇지만 단군 할아버지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반목한 것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하면서 조선 태조 기단(祈壇) 위쪽의 삼불암(三佛巖)을 보기로 들었다.

바위 셋 중 하나는 누워 있고, 둘은 서 있다.
이 바위 셋의 모습이 꼭 앉아 있는 부처 같다.
이성계 영가가 100일 기도를 하기 전까지 바위 셋은 죄다 누워 있었다.
기도를 마치자 바위 둘이 일어나 앉았다.
나머지 하나는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셋이 다 일어났다면 이성계는 조선의 국왕을 넘어설 수 있었다.
중국까지 손아귀에 쥔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단군과 석가가 각자 평가, 추후 맞춰 보고 공감한 이성계의 그릇 크기는 그러나 조선까지였다.”
<2006년3월6일자 주간조선>

그리고 여러 산에 기도를 거쳐 마이산에서 천신으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게 되는데 이곳 마이산에 있는 은수사에는 팔각정이 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으면 마이산과 돌탑만 보고 지나치게 되는데 이곳 팔각정에는 단군화상이 있고 태조 이성계가 도검을 하사받는 그림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고 그 증표로 씨앗을 심었는데 그것이 싹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청실돌배나무가 은수사 절 안에서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계와 무학은 계룡산에서도 많은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 삼신당. 이 곳은 아쉽게도 군부대내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보기가 어렵다.  
 
바로 기도를 드린 장소가 ‘제석사(帝釋寺)’와 ‘삼신당(三神堂’)이 있는 장소이다.
아쉽게도 이곳 제석사와 삼신당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군부대내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 보기가 어렵다.

6·20사업으로 신도 안 계룡대에 있는 모든 종교단체들이 철거되었음에도 이곳 2곳만 건재하고 있으니 무엇이 이들을 지켜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곳 특히 삼신당이 20년간 독립운동을 지원한 애국운동의 살아있는 장소라는 것을 안다면 자연히 숙연해 질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방문해보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암용추를 지나 200여  미터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신당은 큰 나무들이 많은 것을 보면 경치가 무척 빼어난 곳이다.

   
 
  ▲ 암용추의 아름다운 모습  
 
삼신을 모신 천단(天壇)인 대전각(大殿閣)이 있고 뒤에는 그리 깊지는 않지만 천연 동굴이 있는 데 이곳은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려 할 때 이 동굴에 와서 얼마간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한다.
삼신당을 전각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뜻인 것 같다.
이 골짜기를 임금 우자에 자취 적자를 써서 우적골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도장 시설로 적 벽돌 양옥 이층의 태상전(太上殿) 대강당이 있다.
관리자가 바꾸었는지 문에 굳게 시건장치를 해놓았는데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이곳을 본 분의 말씀으로는 전각에는 태극 문양이 아름다웠고, 천정에는 중앙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무지개 색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고 이것은 삼태극(三太極)으로, 그것은 한국이 중앙이 되어 세계를 향해서 뻗어나간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마 이곳에는 누군가에 의해 무속이 행해지는 것 같은데 진정 뜻이 있는 자라면 이 삼신당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곳에 있는 커다란 넙적한 돌인 만복암(萬福岩)은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한자리로 알려져 있었기에 유명하기도 하다. 그리고 바위동굴은 무학 대사가 기도 한 곳이라 한다.
 
삼신당은 1983년에 이곳을 내주고 장태산 휴양림 근처에 이곳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여 이주하고 있는데 한번 찾아가 보니 아담한 모습을 잘 재현해 놓았다.
삼신당(三神堂)현판은 정원강 선생이 직접 쓰신 것이라고 하는데 당 안에 모셔진 것이 특이 했다.
지금은 박영숙 여사가 이곳을 지키고 계시는데 80순이 넘으신 분이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삼신당의 유래를 설명하시는데 말씀하시는 것이 또렷하면서도 소리의 굴곡이 없으신 것을 보니 많은 지혜를 받은 분 같았다.

삼신당 법칙은 천지인 (天地人)삼신인데 천(天)은 하늘이요. 지(地)는 땅이요. 인(人)은 사람이라 천지인 삼라만사 만물이 생(生)하고 사(死)하고 하는데 세상만물 중에 사람이 최고 귀하니, 첫째 내 영을 닦아 불심을 길러야 하고, 둘째 삼강오륜을 지켜 유를 길러야 하고, 셋째 연구조화선법을 길러야 하나니 그래서 유불선삼교니라. 어쨌든 3가지 중 하나만 빼놓으면 코끼리 하나놓고 세 사람이 더듬어 보고 다투는 격이라고 한다.

박영숙 여사가 오래전에 구술예언을 한 것이 있는데 참 흥미롭다.
“송도 3백년 운은 씨를 뿌리는 격으로 사람들이 어둔하고, 삼각산 한양 오백년은 싹을 가꾸는 격으로 사람들이 삼강오륜을 숭상하고 예를 바로 잡아 지킨다. 계룡산 8백년 도읍에는 이미 다 배울 대로 다 배워서 머리가 비상하고 깨칠  대로 깨쳐서 사람들이 미련한 사람이 없으며 밝고 맑아지며 가을열매를 거두는 시기라. 가야산 천년도읍에는 편안하게 사는 시절로 밥도 안 해 먹고 약만 먹으면서 사는 시대로 겨울에 저장하는 시기이라.

삼백년 도읍시절에는 40살이 종명(終命: 인간수명)이고, 그러므로 10세나 12세에 결혼을 함이 적절하고, 삼각산 오백년 시절에는 60살이 종명으로 15세나 18세에 결혼함이 적절하고, 계룡산 8백년 시절에는 80살이 종명으로 30세나 32세 또는 33세에 결혼함이 적절하며, 가야산 도읍에는 100살이 종명이니35세나 40세에 혼례를 갖출 것이다.

앞으로는 앉아서 천리, 서서 만리를 볼 것이다. 또 빨래를 안 하고 꼬매지도 않는다.
두드리지도 않고 밥하는 사람은 밥만 하고 떡 하는 사람은 떡 만 하고 바느질하는 사람은 바느질만 할 것이고 양반 상하가 다 없어지고, 어른 아이를 몰라보고 남녀가 구별이 없고 부자지간에도 재판하고 형제지간에도 재판한다.“

 
한 40분 그늘 아래에서 어른의 말씀이신지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강연을 들고 안내를 받아 삼신당 안을 보게 되었다.

그 흔한 조각성물도 없었고 탱화도 없었다.
마치 초현대식 화랑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는데, 울긋불긋 알 수 없는 색깔로 그려진 문양이 천정에서부터 벽면까지 그려져 있었다. 우리민족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삼신(三神)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장소이다.

천정에는 천단(天壇)을 상징하는 삼태극(三太極)의 팔괘문양을 그려놓았다.
오른쪽부터 하늘을 상징하는 천(天: 元天上帝), 가운데는 인간을 상징하는 인(人: 人皇)을 그리고 맨 왼쪽으로 땅을 상징하는 지(地: 元始地皇)의 단을 모시고 있다.
그 흔한 사람모습이 아니라 알록달록하게 그려진 영국 국기 같은 모습이다. 한마디로 환상적인 그림이다.

천지인을 상징하는 문향이 특이해서 몇 번이고 쳐다보았는데 안정감을 주면서 신비감과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우리의 삼신사상을 재구성하고  여기에 사용되는 문향을 잘 재현해서 여러 군데 쓸 수 만 있다면 정말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룡산에 있는 삼신당을 종교를 떠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패러다임으로 이용할 수는 없는지 뜻있는 분들의 마음자세가 아쉽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향을 알고 쓰더라도 선조들의 뜻이 무엇인지 그 가르침을 정확히 알고 써야 하는 법이거늘 우리나라는 태극기 하나도 잘못 만들어져 쓰고 있으니 상징하는 그것을 잘못 그려서 얼마나 혼란이 오는지 알기나 하는가?

깊이 들어가면 머릿속이 흔들거리니 간단히 말해서 북쪽은 추운 물의 기운으로 검정색으로 남쪽은 따뜻한 불의 기운으로 빨강색으로 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환란이 계속되고 시끄러운데 왜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이가 그리 많은지...

사소하다고 보여 지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국운과 직결되는 것임을 누가 알겠는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고치지 않는 우리의 자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강한 근성도 안보이고 외국에만 빌붙어 사는 무리들만 양산해내고 있으니 여기서는 크게 한숨을 내쉬자. 어~휴~
  
계룡산 삼신당은 원래 평북태생의 백옥성(白玉星) 이라는 분이 묘향산에서 신도 안으로 이주해오면서 정도령이 오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고 믿고 공부를 하던 중 이곳에 수도 하러온 정원강(鄭元剛)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사위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정원강은 “노송의 껍질은 따서 가루를 만들어 붓치고 일주일 만에 떼어보라“라는 습종의 특효약을 교시 받아 이병을 앓고 있던 이선달 등 애국지사와 독립군에게 전해줘 신통력과 도술을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이 정씨를 따르자 계룡산 삼신당과 한양 삼각산에 독립기도를 드릴 수 있는 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부자들 몇 명이 자금을 내어 초하루 보름으로 구국기도를 올렸는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쌀을 가마니로 떡을 하고 풍성한 재물을 차려 놓고 기도를 올린 뒤에 시국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종교단체 같았지만 그 내막은 나라를 되찾고자 염원하는 이들의 밀집이었던 것이다.
뜻이 있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모여들어 다 모여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당시 경성태창방직의 백낙원, 백낙중 사장을 비롯한 많은 지사들의 협력이 있게 되었고 이층 양옥집을 지었다. 산꼭대기에 빨간 벽돌을 날라다 훌륭한 이층 벽돌집을 지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후 삼신당은 조선팔도 도사들이 만나 독립운동을 하는 거처로 변모했다고 한다.
매월초하루 보름날 한양삼각산에서는 저녁 술시(戌時)에, 계룡산에서는 밤 자시(子時)에 어김없이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운수기도가 지성으로 시행되었다.

3·1운동의 실패로 조성된 신도 안 이주 열풍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넘쳐나게 되었다.
일제의 멸망을 기원하며 1921년에는 계룡산 신도 안에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말까지 퍼지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일본으로의 침공을 외치기까지 하는 위험한 수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곳을 일제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는가?

이곳에서의 민족주의 성향의 독립운동의 열기는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위험지역으로 낙인찍히게 되고 신종교단체를 탄압해 나가게 되는데 치졸하게도 사기, 폭력, 금품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어 마음대로 탄압하게 된다.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을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 안은 그 불꽃이 타오르는 심지가 되었으니 민족의 성지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믿기지 않는 것은 신도 안에는 외국인이나 그 기운은 맥을 못 쓴다고 한다.
“계룡산 장군봉 밑에서 통신대대장인 미군소령인데, 새벽에 호랑이가 물어 메쳐서 죽었거든. 양갈보, 미군 죽은 거 보고 옷도 안 입고 내려왔어, 날이 밝아서. 그 이튿날 뜯어서 상봉에 옮겼거든 (그게 언젭니까?) 을축년(1949년) 해방 후 바로. 신도 안에 왜놈이 못 들어갔어. 주재소 안 죽으면 불나고 자꾸 죽어. 주재소 옮겼어. 되놈도 재미 못 봐. 되놈이 장터 점령하고 음식점 했는데 세 놈 죽으니 되놈 안 들어와. 왕도의 왕기(王氣) 시작도 안한 덴, 뭐이든 처음은 무서운 힘이거든, 외국기운은 맥을 못 써요“(김일훈저 신의원초 중에서)
 
광복 직후인 1948년, 미군은 계룡산 주봉인 천왕봉에 군용 통신 탑을 세우려 했다. 건축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 병사가 속출했다.
미군을 물리고 우리나라 군인이 공사를 전담한 다음에야 탑이 완공될 수 있었다.
이후 통신시설 관리를 명분삼아 슬그머니 계룡산으로 돌아 온 미군은 원인불명의 통신장애가 잇따르자 한국군에게 모든 것을 넘긴 채 완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주간조선 2005년11월12일자)

그렇지만 “계룡산 산신 찾는 소리에 귀가 시끄러워 벌레 같은 중생들 징그러워 모두 내 쫒을 난다. ” 라고 예언되어 6·20사업으로 한사람도 없이 사방 십리 밖으로 모두 내쫓겼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역사의 미완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곳이 우리의 독립운동의 역사적 증거이며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의 회복이라는 터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방치되고 있으니 애석할 뿐이다.

나라를 위하는 유적들이 함부로 방치되고 후손들에게 그분들의 정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누가 일하려 하겠는가?
더욱 이곳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시대에 부끄러울 뿐이다.

정원강 선생이 사상범으로, 독립운동혐의로 붙잡혀 경북성주경찰로 넘어가 고문 끝에 돌아가신 후, 그 며느리인 박영숙씨가 정원강 선생을 독립투사로 인정해주고 삼신당을 독립운동의 산실로 육성해달라고 외쳤건만 아직도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독립지사들의 기도장소로 그 숭고한 얼이 담긴 유물이 방치되어 손상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으니 역사 앞에 또 다른 죄를 짓는다는 의식이 깊이 든다.

삼일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선조들이 애국과 동지애로 만주에서 관동군 총칼에 피 흘리고 죽어 가고 이곳에 계룡산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지사들의 그 고혼(孤魂)이 오늘까지 위로받을 곳이 없다는 것은 너무 허망하다.

이곳을 길이 보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행이 이곳을 계룡시에서 사적지로 정한 것 같은데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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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태조 이성계(왼쪽)와 무학대사  
 
이제 이성계의 집안을 추적해보자.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1250년 원나라 몽골군에 투항하여 그 대가로 두만강유역의 현재 연길일대에 5천호 정도의 다루가치가 되어 옷치긴가(家) 고려계 몽골의 군벌가문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닦게 된다.

옷치긴가 고려계 몽골군의 임무중 하나는 조국 고려침공을 도우며 압록강과 원산을 오가면서 원나라를 위해 수도 개경의 고려왕조를 감시하는 극악한 배역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원나라가 고려군을 감축하라는 압박 하에, 고려가 거의 국방력을 상실하게 된 다음에도 이성계 가문은 강군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세계제국의 정치적 현지경영법을 체득하고 원이나 명의 중앙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상대적인 독립성을 확보하여 가문의 지배적인 위상을 높이게 된다.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춘은 보안테무르, 큰아버지에게는 타스부카, 아버지 이자춘에게는 울루스부카라는 몽골이름이 있다. 이로 미루어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하기 전 34년 전에 태어난 이성계에게도 몽골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동북아 정세에 밝았고 명과의 전투, 티무르와의 전투 등 일련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고 그래서 위화도 회군도 결행할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원의 멸망 후 우리나라에는 조선이 중국에는 명나라가 서게 되었다.
당시 몽골제국은 고려를 인정했고 고려왕조와 함께 힘을 합쳐 몽골 칸 제국을 세웠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몽주가 단심가를 불러 목숨을 걸고 이성계 일당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원종이후 고려왕조의 역사적 정통성이었으니 결국 원에 충성하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밖에 없겠다.      
<주채혁저 순록치기가 본 조선·고구려·몽골 중에서>

그러면 무학 대사는 그 당시 어디에 있었을까?
 
역시 세계의 중심지가 원나라 시대에는 연경이었으니 무학 대사도 예외 일 수 없었으리라.
원나라 수도인 연경 이곳에 26세의 기백 있는 수도승과 20세의 용기 있는 청년들이 있었으나 이들이 만나게 된 경위는 구체적으로는 없다.

단지 무학의 스승을 통해서 인 것 같은데 역사적 기록과 전래되는 이야기 속에서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무학은 1353년 공민왕 때에 원나라 연도로 간다.
무학 대사도 유명한 스승을 만나게 되니 그 분들이 지공과 나옹이다.
지공스님은 인도분으로 인도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가섭존자의 108대 후계자로 소위 정통 중의 정통 스님이며 가섭불의 법통을 이은 분이시다.

중국 원나라 시절을 보내시다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오셔서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천보산 자리가 마치 스님이 머리를 깎았던 인도 나라난타 절 주변의
산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제자 나옹스님에게 이야기하여 이 절에서 주석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회암사이다.

나옹스님은 연경에 도착하여 절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화상을 만나 크게 깨달을 배우게 되고,
무학 대사는 인도 승 지공을 만나 도를 인정받고 이듬해는 법천사(法泉寺)에서 고려인 출신의 나옹을 만나 수도 하다가 1356년 나옹을 하직하고 귀국하였으며, 나옹 역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렀다.

1376 년(우왕 2)회암사(輦輹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은 그를 불러 수좌로 삼고자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그해 나옹이 입적하자 전국의 명산을 유람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여주에 가면 신륵사가 있다.
이곳의  조사당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그의 스승 무학 대사와, 인도스님인 지공대사, 그리고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선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있다.
조사당 안에는 세님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고, 앞마당에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다.
이를 보면 훌륭한 스승과 스승 아래에 훌륭한 제자가 나오는 법이니,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위인은 없는 것 같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와 관련된 인연이 느껴지는 일화가 있다.

당시 원나라에는 있던 나옹대사가 무학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한 산소 자리를 가리키며 “그 위 터는 왕휘지 지이고, 아래쪽은 장상이 날 자리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마침 이성계의 집 청지기가 그 곳을 지나다가 그 말을 듣게 되어 이성계에게 전하자 이성계는 나옹대사를 찾아가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나 나옹대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때 나옹에게서 수학을 하던 무학이 스승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그곳에 쓰고 세월이 지나 왕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로 미루어 이성계집안과 나옹대사간에는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스승이 말하지 않은 것을 굳이 이성계에게 말하여 주었다는 것은 이미 깊은 인연 관계가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일화이다.

그리고 무학 대사와 이성계가 고려 땅에서 만나는 일화도 있으니, 서산대사가 쓰신 ‘설봉산 석왕사기’나오는 글이다.

고려 우왕 10년(1384)에 무학 대사가 함경도 설봉산 석왕사 토굴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 무관으로 있던 이성계는 이상한 꿈을 꾸고 꿈이 하도 신기해 설봉산에 해몽하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없고 딸이 있는데 이 딸이 이성계의 꿈을 100냥에 사면서 당신 꿈은 “개꿈이다”라면서 침을 세 번 뱉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딸이 이성계 꿈 산 것을 알고서 딸을 때리고 이마에 침을 밷으 면서 돈을 돌려주고 꿈을 물렀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성계를 보더니 “난 해몽 못하겠소, 다른데 찾아가시오.
이안에 들어가면 설봉산 밑에, 삼방 석왕사 위에 석굴이 있는데 8만대장경만 외우는 중이 있으니 덮어놓고 살려달라고 절만하시오. “

그분이 무학 대사인데, 그래서 이성계가 찾아가 밖에서 절만하고 있는데 거들  떠 보지도 않는다? 이성계가 “정 이렇게 냉대하면 목을 치겠노라“하니까 무학 대사가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 해몽하러 왔다니까 ”해몽은 이 앞에 해몽하는 할머니가 따로 있잖소?“ 이성계가 그 할머니에게 갔더니 자기는 못하겠다고 이리가라고 합디다, 해서 왔다고 하니, 무학 대사가 “그러면 꿈 이야기나 해보시오”

그래서 꿈 이야기를 하는데 ,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석가래 만 3개 달랑 지고 나왔소.
나오는데 닭 새끼들이 꼬기오. 하고 울고, 또 사방에서 꽃이 송이송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소. “ 라고 하자.
무학은 “석가래 3개지고 나온 건 임금 왕(王)자요, 닭이 고귀(高貴)오 하고 울었으니 왕이 되는 건 틀림없소.
꽃 떨어지는 것은 낙화이종내어실(落花而終乃於實)이라 그러니 고려는 이제 망했소. 고려는 다 쓰러져가는 집이오. 인제 내려가시오“하고는 황해도 신기 곡산 고달산에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김일훈저 신의원초 중에서>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된 뒤 경기ㆍ황해ㆍ평안 감사를 시켜 무학 대사를 찾도록 한다.
새 왕조가 창건되면서 유명 무명의 유생과 승려들이 찾아왔지만 무학 대사는 종무소식이었다.
그래서 3도 감사에게 화상을 그려 돌리면서 무학 대사의 행방을 찾도록 한 것이다.
3년째 되던 해 곡산 고달산의 초막에 은거하고 있던 대사를 간신히 찾았다.

황해감사가 평안감사하고 의논해서 모시고 가자는데 말을 안 들어 이성계가 직접 와서 모시고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태조와 대면하게 되고 왕사(王師)가 되었다.
1392년(태조1)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 者)'라는 호를 내렸다. 엄청나게 길다.

이정도 면 태조가 무학을 배려하는 것도 보통이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 태조가 그러나 1402년(태종2) 다시 함경도로 가 돌아오지 않았을 함흥차사(咸興差使)시절에 무학 대사가 가서야 겨우 서울로 오게 할 정도로 우정이 깊은 사이였던  것이다.
결국에는 이방원을 임금으로 인정하고 무학 대사와 함께 불교에 정진하며 1408년에 세상을 떠난다.

무학이 금강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태종은 그의 사리를 회암사로 모시도록 지시를 했다.
회암사에는 태조가 무학을 위해 세워둔 부도가 있었다.

살면서 변하지 않은 이러한 진정한 우정으로 두 사람은 새 시대를 열었고, 그러한 점에서 이들의 우정은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실력을 갖춘 무학과 무인으로서의 태조는 두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마주 앉은 ‘은행나무 격이라’ 조선을 세울만한 큰 그릇이었던 것이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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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덕희 2008.05.22 2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성계 그는 우정도 충성심 대단한 인물이다
    그에 충성심은 명나라을 도와 오늘날 중국이 저거대한 대국이 되였다 그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안고 명나라을 쳐서 큰공을 세우고 정권도 잡았으면 누가 이성계을 민족에 반역자라 하겠는가
    이성계 그는 조선에 왕으로서 붊근도포을 입지 몿했다
    그는 명나라왕에게 충성심이 대단했다
    우리는 이런 민족에 국운을 꺽은 민족반역자을 대왕이라하고 용에다 비유하고 좋은 말은 다같다 그에게 치장했다
    왜그는 명나라을 쳐들어가지몿하고 구테타을 했을까
    작은나라가 큰나라을 치는건 예의에 벗어나는일이라는 어느선생의 답변이 참맘에 든다
    이순신이 적은 배와 적은 군사로 36번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리고 고려 고구려 많은장수들은 적보다 훨씬 적은 병사들로 수십배나 많은 적을 상대해서 그들을 물리쳤다
    이런 장수들은 영웅에 들지몿하고 용도 몿되고 이적행위을한 이성계을 우리은 영웅이라고 하고 용에다 비유하고 있다
    저 고구려에 광개토대왕님은 지렁이고 이성계는 용이야

  2. 사람 2009.04.09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성계랑 무학대사 관계를 잘 모르겟네요 ㅠ.ㅠ



우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연 이성계와 무학 대사의 향기로움이 배인 곳

   
 
  ▲ 계룡산 천왕봉  
 
계룡산(鷄龍山)!
우리가 늘 부르고 보아왔건만 845m의 이 산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금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의 명산! 풍수지리상의 최고 명당!
많은 미사여구를 받고 있지만 계룡산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아직도 살아있는 많은 전설을 그저 가슴으로 품고만 있다.

계룡산은 삼한시대에는 천태산(天台山)으로 불리다가 백제 때 계산(鷄山),  계람산(鷄藍山), 옹산(壅山), 구룡산(九龍山), 용산(龍山), 화채산(火彩山)이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고려 때 목화가 들어오기 전에 옷감으로 많이 쓰였던 삼(麻)이 이산에 많았다는 기록이 있고 껍질을 벗긴 삼대를 겨릅'이라 하기 때문에 겨릅 산이라 했다.

이 겨릅 산이란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 한자로 음역되면서 계립(鷄立)으로 되고 또 '립'이 비슷한 소리로 뜻이 좋은 용(龍)으로까지 발전해서 계룡산이 되었다고 보는 분도 있다.

이성계가 조선조를 창건할 무렵 무학 대사가 계룡산의 지형을 금계 포란형(金鷄抱卵形), 비룡 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해서 두 풍수적 형국에서 계(鷄)와 용(龍) 한자씩을 따 계룡산이라 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의 9백년 운은 서대궐은 무성(無城) 5백년, 동대궐은 유성(有城) 4백년으로 서대궐은 금계포란이고 동대궐은 비룡농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 속에는 금계는 부의 상징, 비룡은 현명한 임금을 의미하는 말이니 이는 조선의 창업자인 이성계와 당대의 사상계를 풍미한 무학 대사와의 만남이 있었음을 알리는 것이니,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밤에 금척(金尺)을 얻는 꿈을 꾸었을 때 송도로 돌아가 빨리 임금이 되라고 위화도회군을 종용한 사람이 바로 무학 대사이다.

어느 따스한 봄날, 태조와 무학 대사가 서로 농담하면서 희롱삼매에 들었을 때 태조가 먼저 말하였다.

"누가 농담을 잘 하는가 내기를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대왕께서 먼저 하십시오"

그래서 태조가 먼저 농담을 걸었다. "내가 자세히 스님을 쳐다보니 꼭 돼지처럼 생겼습니다 그려."
무학 대사 왈, "
제가 보니 대왕께서는 부처님처럼 생기셨습니다."

대사의 대답에 태조는 뜻밖이라는 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같이 농담을 하지 않습니까?"
대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님으로만 보이는 법입니다.”

두 사람은 함께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한다.
 
‘용 가는데 구름 간다.’고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다시 차길진 선생이 쓴 영기로 보는 계룡산 중에서 일부 글을 원용해 본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은 요즘도 계룡산 신도 안에 자주 들른다. 신도 안이란 말 그대로 600여 년 전 이성계가 일찌감치 조선의 수도로 점찍었던 곳이다. 그런데 10개월에 걸쳐 대궐 터까지 닦아놓은 상태에서 조선의 도읍은 갑작스레 한양으로 정해졌다. 무슨 사연이 숨어 있는가?

이성계는 왕이다.
절대 홀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을 초혼하려면 경호원들의 요란한 구둣발 소리를 감수해야 하듯, 태조 영혼의 행차에는 정도전, 하륜, 그리고 무학 대사 등 개국공신들과 국사(國師)가 동행한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는 필자에게 ‘~해라’체를 쓰고, 신하들은 ‘~하오’라고 한다.

“왜 계룡산을 포기하고 500리 나 떨어진 한양으로 가셨습니까.”
좌중을 둘러 본 태조가 털어놓는다.
‘이 사람들(정도전, 하륜)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기에....’
 
“그렇다면 사연봉(四連峰) 태조대왕 동굴은 무엇인가요.”
‘궁을 짓는 동안 기도하던 곳이었지. 그런데 기도하다가 계룡산 할머니를 만났어. 할머니가 반대하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네.’
계룡산 산신은 여성이라는 세인들의 믿음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할머니 신령은 ‘계룡산의 임자는 당신이 아니라 다섯 가지 덕을 갖춘 선인’이라며 이성계에게 공사 중단을 명했다고 했다.
“계룡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날 신인(神人)이 새 나라의 수도로 정해 800년간 쓸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 신인은 바로 언제나 숱한 추측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정도령’이다.

할머니 산신이 이성계를 무작정 내몬 것은 아니었다.
한양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동시에 500년이라는 조선왕조 수명도 예고했다고 한다.

무학 대사도 한 마디 귀띔했다.
‘대왕이 고려를 멸하는 과정에서 피를 너무 많이 불렀다는 점도 할머니는 못마땅해 했다.
그래도 태조와 나는 아직까지 아쉬움이 남아 한양에서 달(月)을 바라보다 흥이 오르면 여기로 온다.’는 요지의 말 이였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런 분이다.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인 23.5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세계의 핵심을 주관하는 여신답다.
하지만 현 시점 계룡산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개발이 할퀴고 있는 상처들로 몸이 몹시 아프다.
아물만하면 또 파고든다.
그래서 할머니가 유성 후암정사와 국립현충원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이성계를 비롯한 최고 권력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야욕을 숨기지 않은 외세를 물리쳐온 계룡산 할머니다.
'할머니는 말하셨지 욕심을 버려라. 웃으면서 사는 인생 자, 계룡산이다.'”
<2005년11월12일자 주간조선>

이런 것을 보면 ‘팔자 도망은 독 안에 들어도 못 한다’다고 하듯이 제가 타고난 운명에 따라야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무학 대사는 이성계를 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해 최선의 일을 다 한 것 같다.
무학 대사는 실제로 천문과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우암 송시열이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이었고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고 한다. 그만큼 후학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분이다.

그렇지만 하지 말아야 했을 일을 했으니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고, 수도를 한양으로 최종 결정하면서 왕인 태조 이성계 가문과 한양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금정(金井)에 다가 돌을 덮어 계룡산의 혈맥을 끊었다.

은색의 바위에 맥을 끊는 기구인 ‘붉은 구슬을 넣어 만든 은색덮개’로 흐르는 물이며 계룡산의 맥인 곳을 덮으므로 천도에 역행하는 비방을 쓰게 된다.
이곳이 계룡산 천왕봉에 있는 압정사(壓鄭寺)라고 한다.

무학 대사는 본인이 저지른 일을 그가 지은 청구비결(靑丘秘訣)에 이렇게 후회하고 있다.
“돌로써 금정을 덮었는데 어찌하여 옳게 보지 못 하는가”

조선시대 유학자인 서거정선생은 이 우물을 뚫으면 계룡산의 돌은 다시 푸른색으로 변해서 어지러운 세상은 금색이 튀어 나오듯 밝아진다고 하였으니, 계룡산의 혈맥을 끊는 지나친 행위를 하였으니 이를 어찌 하겠는가 ?

태조 왕건이 이 일대의 지맥을 누른 후 무학 대사가 큰 혈맥을 끊었으니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쇠말뚝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작은 혈맥의 기운마저 끊었으니 계룡산의 운명도 가련할 뿐이다. 

이런 글을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뜻이 있다면 다시 우물을 여는 것도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상징적인 국운융성의 포퍼먼스로 해 볼만 하지 않은가?
천왕봉에 있었던 철탑만 옮겨간 것으로 그리고 일본인이 저지른 쇠말뚝만 뽑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자연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자연이 건강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도 건강해질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사실 이 지역은 고려가 나라를 세운 후 터를 누르기 위해 각종 부처입상을 세워 기운을 죽여 오다가 조선 이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함에 따라 조선 건국 시부터 작심을 하고 터의 기운을 없애려고 했으며 정여립의 모반 이후부터는 이 지역을 폐허화하다시피 방치하여 오게 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그 도가 더욱 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 일본인들은 계룡산 구석구석의 혈맥만 정확히 골라 쇠말뚝을 박았다.
일제강점기 중 일본의 새 수도 최적 후보지는 역시 계룡산으로 보고 일제는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를 대전으로 옮기면서 부여에 자신들의 신궁을 만들 정도로 계룡산일대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패망하고 말았지 않은가?

   
 
  ▲ 천마산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곳이 한군데 있는데 양정 고개에서 시청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천마사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여기가 예전에는 법성사(法性寺) 라고 불리었는데 이성계와 무학 대사가 만난 곳이라고 한다.
무학 대사가 이곳 산을 천마산(天馬山)으로 명명했다고 하는데 개태사가 있는 뒷산이 천호산인 것을 보면 그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산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 천마사 대웅전  
 

   
 
  ▲ 천마사에 있는 옥석불상  
 

   
 
  ▲ 높이 0.8m의 석가모니상인 옥석불을 설명하고 있는 간판  
 

현재는 천마사로 불리는 데 이곳에 원래 신도 안 봉안사(奉安寺) 대웅전 삼불중 하나인 옥석불 (玉石佛 문화재자료 85호) 이 있다. 1984년대 계룡대 건설로 봉안사 폐쇄 시 이전되어 온 0.8미터 항마촉지인불상이다. 
조선말 조성한 것으로 재료는 석고이나 옥으로 만든 조각 같이 정밀하고  사실적 조성된 불상이다.

그저 멋이 있다.

아마 우리나라 땅에 얽힌 전설을 살펴보면 무학 대사가 등장하지 않는 곳이 드물 것이다.

   
 
  ▲ 농소정의 모습  
 


   
 
  ▲ 조선태조 이성계가 마셨다는 농소정  
 

여기서 다시 농소리로 발길을 돌리면 농소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물이 참 많이 솟아나는 곳이다.
수량도 엄청나게 많고 물맛도 좋고 하니 들려볼만하다.
이 물을 옛적에 태조 이성계가 드셨다고 하는데 그 옆에는 선돌이 하나 누워있다.
여기도 기복신앙이 배인 곳이라 선돌은 남근석같이 보이는데 글쎄, 한번 벌떡 세워놓고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고 한다. 휠씬 멋있을 것 같다.

대외활동이 무척 많은 조효연 사장이 입암리 안쪽 끝에 있는 배재대학교 소유의 임야에 X지샘이라는 물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물맛은 괜찮았지만 글쎄, 좀 다른 것 같다.
아무렴 임금님이 마신 농소정 물맛에 비하면 별로 인 것 같았다.

   
 
  ▲ 남자의 거시기 같이 벌떡 서 있는 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입암리'. 사진 속의 돌이 바로 그것이다.  
 

   
 
  ▲ '왕의 처소가 된다는 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왕대리  
 

입압리(立岩里)에는 남자의 거시기 같이 벌떡 서 있는 돌이 있다고 해서 입압리라고 했다고 하는데 인근에 왕대리(旺垈里)는 왕의 처소가 된다는 터인지라 이곳의 지명도 재미가 있다.  

 
 
 
  ▲ 무학대사의 지팡이가 자라 괴목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괴목정  
 
하여간 무학 대사와 이성계를 찾아다니다 보니 무학 대사가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를 꽂아서 자라 괴목이 되었다는 괴목정 등 신도 안에는 그들에 관한 많은 전설이 널려있었다.

부연하면 여기에는 전주이씨 들이 참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기에 왜 그런 가 했는데 조선 초 이성계의 주변 집안사람들이 ‘횃불이 비치는 장소는 전주이씨 땅’이라고 해서 전부 전주이씨 땅으로 했다고 한다.
이 말은 금천건설을 운영하는 이영구 사장으로 부터 들었다.

사람은 키 큰 덕은 입어도 나무는 키 큰 덕은 못 입는다고, 권력과 재력은 역시 병행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 땅이 잠자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북적되고 있으니 영기가 서린 땅은 값을 올리면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쌀고리의 닭이라’고 생각지도 않게 큰 부자가 되면 그 씀씀이도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법이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는데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이승에서의 짧은 동안의 사귐일지라도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은 죽어서도 저승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니

이성계와 무학의 만남이 조선의 건국에서만 만남이 있었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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