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의 진수를 맛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주와 세상에 대한 큰 틀을 제시해 주시고 조감도를 보여주시니 또한 감사합니다.
인연이 닿아 이런 강의를 듣게 되어 무한 감사하고
생활가운데 지혜와 용기가 될 것으로 믿어집니다.
앞으로의 강의도 기대와 설레임으로 임하겠습니다.

2014.07.18. 19:56

카산드라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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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티맨
2010.12.08 22:18:12

우주변화의 원리를 수강하고 있습니다

 

처음 동양철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풍수지리를 공부하다가 인연이 되었습니다

각종 이론을 공부하면서 열심히 외우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론이 나오게된 원리가 궁금해 지드라구요. 넘 궁금해서 사주명리 등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지만 갈증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주변화의 원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도대체 머리말 부터 막혀서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만큼  너무 어려워 여러번 실의에 빠지다가 모 종교방송에서 무료방송을 보면서 겨우겨우 1독을 했지만 모르기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한동석 선생님 말씀따라 좀 넓게 파야되겠다 싶어 음양오행 관련 서적을 탐독하다보니 다소간의 진척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정리가 안되는 거예요. 회의감도 몰려들기 시작했지요 그럴때 유일한 위안은 막고 품는 것이었지요 몰라도 여러번 읽었습니다. 언젠가는 되겠지 하고요 조금씩 용어에 대한 적응은 돼가는데 전체적인 흐름이 꿰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던 중 음양오행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오행의 새로운 이해(은남근 저)'를 보고나서 동양철학을 계속 공부해야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때의 상실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죠.  근 2년간 미친듯이 달려왔는데 음양오행이라는 것이 추연, 동중서, 유흠 등에 의한 정치적 산물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내용을 보고 충격이 컸습니다. 그래도 동양철학에 대한 인연이 그 충격보다는 커서 였던지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본 강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며칠동안 흥분의 나날이었고 그간 잘 버텨 여기까지 이르게 해준 하늘에 감사했습니다

 

음양오행을 체계적으로 배우기는 매우 어려운게 현실인 거 같습니다

시중에 많은 서적이 범람하고 동영상 강좌가 있지만(가격도 만만치 않죠) 내용이 다 달라 혼선이 빚어지지고 그럴수록 더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는 같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번 강좌는 저와 같이 갈증에 허덕이는 초학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갈증도 해소해주고 나아갈 좌표까지 제시하니깐요 강좌수강을 통해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 하나의 용어에 묻혀서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없었는데 선생님의 강의 통해 큰 틀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서 곁가지 까지도 많이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늘 답답해 하는 부분이었는데 그 흐름들이 꿰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책 저책 기웃기웃거렸는데 운기, 주역, 정역분야로 구분하시는 강의를 듣는 순간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 나갈지 방향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덜 헤매고 탄력이 붙을 거 같습니다

 

둘째

그간 음양오행에 대해서 반신반의 하던 부분이 싹 사라지고 음양오행을 우주변화의 진정한 법칙으로 믿고 자신있게 이 공부를 해도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섰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제게 삶의 좌표를 그려주는 크나큰 행복있었습니다

 

셋째

이 수업이 지금 향적산방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아는데 직접 계룡산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수강(그것도 무료로)할 있다는 점입니다.

돈도 안들이고 이 엄청난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죄스런 마음도 듭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해야되겠단 생각도 들고요 그외에도 많지만 너무 길어져 이만 줄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自天祐之 吉无不利 란 경구를 가슴에 새기며 계속 정진토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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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름
2011.05.07 19:59:40

 

 동양철학은 관심밖이였는데 의외로 선생님 강의를 듣고 자꾸만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강의시간이 제에겐 마음의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대우주 변화의 영향을 받는 모든 동식물들이 각자의 원칙에 따라 생겨나고 죽어가는 당연한 사실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니 오묘한 세상의 이치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제마음이 커지고 겸손해짐에 감사드리며  한동석 선생님의  엑기스라는 정신론이 기다려집니다.

안그래도 착한데 더 착해지는 마법을 부리셨나요 ?  

                                                                                                                                                                                                                                                                                              감사합니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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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handongseok.org/lecture4.htm

黃帝內經講義 (4) 1965년 7월호

韓東錫


第一編 變化原理

    C. 十五分紀와 그의 槪念

  위에서 말한 바는 五行의 一般的 性質 다시 말하면 五行의 普遍的인 槪念에 不過했던 것이다. 그러나 宇宙의 變化原理인 五行은 各各 그가 지닌 바의 一般的 原理를 가지고 있거니와 여기에서 그의 一般的인 普遍性을 좀더 分析하여야 할 必要가 있기도 하며 또 그 自體가 普遍性에서 脫出하여 具體性을 띠려고 애쓰고 있기도 한 것이다.

  가령 木氣의 境遇에서 例를 들어보면 木을 生하는 힘(力)이라고 規定하는 것은 木의 作用에 대한 一般的인 모습에 不過한 것이다. 그러나 實際로 生하는 힘을 測定함에 있어서 그 힘의 强弱의 差를 無視할 수 없는 것이므로 여기에서 다시 힘을 細分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木의 힘이 絶對的으로 中道的 作用을 하는 境遇와 또는 너무 過强한 境遇와 너무 不及한 境遇의 셋으로 區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各人이 現象界를 觀望할 때에 위에서 말한바와 같은 세 가지 分裂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無數한 分裂을 目睹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人間의 認識이 언제나 皮相的인 觀望에만 머물기 쉽고 具體的인 觀察을 하여내지 못하게 되는 때문인 까닭이다. 萬一 吾人이 이것을 細密하게 觀察하여 낸다고 하면 그의 所謂 無數한 分裂을 하는 것 같던 變化狀態는 一이 三에서 分裂되고 또 그 一이 (첫번에 一이 三에서 分裂되면 三으로 分裂했다는 結果가 되지만 그 發展한 바의 三이란 것은 또한 獨立된 三個의 一에 不過한 것이다.) 다시 三으로 分裂하는 過程의 無數한 反復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變化過程에 있어서의 所謂 分裂作用은 本質的으로는 三數의 反復分裂이므로 五行의 一般的 槪念은 다시 다섯 가지라도 그 하나하나는 반드시 三으로 分裂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畢竟 이것은 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十五로 分裂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槪念設定에 있어서도 十五種의 新槪念이 다시 設定되어야 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一般的인 槪念과 具體的인 槪念으로 나뉘게 되며 따라서 十五分紀設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平氣 太過 不及이 五行의 三種이 된다는 것도 찬언할 餘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以下에 그의 十五種槪念을 說明하기로 하겠다.

    (가) 평기

  木氣

  木氣의 平氣를 敷和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木의 平氣라는 것은 木氣가 生함에 있어서 가장 알맞은 氣運을 平氣라고 한다. (火土金水의 境遇도 一般이다) 그러므로 그 槪念을 敷和라고 하는 것이니 이제 그의 뜻을 硏究하여보면 「敷」자의 뜻은 한오리로 쭉 뻗어나가는 狀態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日用하는 말에서 그 例를 찾아보면 鐵道를 建設하는 것을 敷設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의 建設하는 形態가 一絲不亂하게 두 줄로 쭉 펴져 나가는 까닭에 敷設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和」자의 뜻을 生覺하여 보면 不强不弱하며 맞게 適用될 수 있는 것이 和인 것이다. 그런즉 木氣의 正氣는 오직 敷하기에 알맞으며 동시에 그것이 和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過不及이 없는 木化作用을 할 수 있는 形象을 代表하는 것이 바로 敷和인 것이다.

    (나) 火氣

  升明

  火의 平氣를 升明이라고 하는 것이니 升字의 뜻을 살펴보면 十字의 변에 千字를 쓴 것이다.(此後부터는 ㅆ十+ㅆ千이라고 表示하겠다.) 그런데 自然數에 있어서 十과 千은 모다 陰數의 分裂인즉(下의 自然數에 詳論할 것임) 宇宙間의 明은 여기에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런즉 火氣의 平氣는 明을 生하기에 알맞은 것이며 또한 그의 正常的인 發展의 目的은 明을 生하려는 데에 있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明이란 것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火水가 均衡狀態에 놓였을 때에 明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그 明은 萬物을 完成시키며 모든 일의 目的을 達成하는 基本일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具體的으로 말하면 어떻게 생기는 것이며 또 그 正體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說明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精神問題를 說明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 土氣

  備化

  土의 公正한 作用이란 것은 모든 化할 수 있는 條件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平氣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化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氣運이(金木水火土) 가장 잘 中化되어서 不偏不黨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木火金水와 같이 偏僻됨이 없는 오직 絶對的인 中이며 또한 正中化한 土가 되는 것이니 즉 備化가 되는 것이다. 化字의 뜻은 本是 和字와 同意異稱인것에 不過한 것이다. 즉 和는 事物에 대한 指稱이며 反面에 化는 形而上에 대한 標示인 것이다.

  그런즉 化는 陰陽之中이기 때문에 그의 作用하는 面으로 보면 모든 事物의 過不及을 調節하는 氣運이지만 그 象으로 보면 寂然不動한 動靜의 中인 것이다.(中은 알맞다는 뜻이 있음) 그러므로 一般的으로 土를 가리켜서 中이라고 하지만 嚴密히 區分하면 平氣의 土 즉 備化만이 絶對中인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서 平氣의 土를 備化라고 命名한 것은 實로 這邊에 理由가 있는 것이다.(詳細는 土化作用에서)

    (라) 金氣

 審平

  金氣는 萬物을 生長에서 收藏으로 轉換하게 하는 最初의 氣運이란 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바 있거니와 收하는 기운이 藏하는 기운과 같이 恒常 殺伐하는 性質이 있으므로 그러한 境遇에 金氣가 萬一 公正性을 잃으면 收藏之道에서 第一 重要한 目的인 包陽作用∼다시 말하자면 金水가 包藏하는 바의 精神이 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五行中에서 金氣처럼 平氣의 維持가 重한 것은 없는 것이다.

  金氣는 本來 平定하는 것이 그의 機能이지만 또한 그의 性質이 자칫하면 猛暴에 치우치기도 쉬우므로 그의 平氣를 審平이라고 한 것이니∼다시 말하면 平定하기는 하여야 하지만 잘 살펴서 하여야 하는 것이므로 審字에도 역시 土의 性質을 內包하고 있다는 것을 잘 記憶하면 되는 것이다.

    (마) 水氣

  靜順

  水氣는 本是 五行의 墳墓이며 또한 精神의 府庫이기도 한 것이다.(精神論에서 詳述할 것임) 그런데 水氣를 詳察하여 보면 그 象은 靜的이고 其性은 順한 것이다. 우리가 一般的으로 靜寂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것을 잘 考察하여 보면 靜이라는 것은 絶對的인 것을 말하는 것이요 寂이라는 것은 相對的인 것을 意味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寂은 動하려고 하여도 動할 수가 없는 것이요 靜은 동하려면 動할 수는 있지만 動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글자의 象에서 살펴보면 寂字가 ㅆ ㅆ叔 으로 되어있는 것은 收藏하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뜻이 있고 靜字의 象을 살펴보면 ㅆ靑ㅆ爭 한 것은 靑(木)과 相爭하려는 意志는 있으나 아직 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吾人은 여기에서 寂에는 土의 象이 內包되어 있고 靜에는 水의 象이 潛藏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水의 平氣를 正名함에 있어서 靜字를 쓴 이유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順字의 意味를 生覺하여 보면 順字가 ㅆ ㅆ頁 하였으니 坤의( 는 坤의 古字) 큰 머리라는 象이 있으니 즉 坤土의 始作이란 뜻이 있다.

  이와 같이 보면 水가 平意일 때는 絶對的인 靜的 狀態에 놓이게 되지만 水는 將次 動하여야 할 것이므로 土化作用의 要素도 內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水의 平氣를 靜順이라고 命名하였던 것이다.

  (附言) 難解를 걱정 말고 復習을 反復하면 講義가 前進함에 따라 모든 難題가 解決될 것인즉 念慮할 것은 없다.

  不及

  木氣

  委和

  木氣가 不及한 것을 委和라고 한다. 그런데 一般的으로 말하는 木氣가 不足이라고 하는 말과 不及이라고 하는 말은 어떻게 다른가? 不足이라는 말과 不及이라는 말은 그의 槪念이 전혀 다르다. 不及이라는 말은 힘(力)은 있지만 아직 時期가 이르다고 하는 境遇나 或은 힘이 어떠한 外的 障害 때문에 그 힘을 發揮할 수가 없는 때에 쓰이는 通稱이요 不足이란 말은 힘이 根本的으로 모자라는 境遇에 쓰이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不及之氣는 氣의 不足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不及을 말하는 것이니 不足과 不及을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이제 여기에서 木氣不及을 委和라고 한 것을 檢討하여 보면 委字의 뜻은 委屈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勢力에 威壓當하여서 生하려고 하여도 生하여 낼 수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즉 委和라는 말은 和氣가 委屈되어서 나올 수가 없는 象態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和氣라는 것은 무엇일까? 위에서도 이미 말한바와 같이 化氣라는 말과 和氣라는 말은 同意異語에 不過한 것이다. 勿論 天道가 모든 事物에 있어서 木氣를 生할 때에는 반드시 和氣(토)가 先行함으로써만이 坎水(子)의 凝固作用에서 脫出하여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健全한 和氣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말할 餘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和氣가 委屈되어서 그의 所任인 化和作用을 하지 못한다고 하면 木氣는 生하지 못하거나 혹은 生한다 하더라도 그 生은 遲遲不進할 것이다. 그런즉 木氣의 不及은 木氣自體의 缺點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土氣의 化和 作用에 그 缺點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土氣가 正常化하여서 化和作用을 잘 한다면 木化作用도 正常的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不及之氣를 委和라고 命名하였던 것이다.(土氣가 委屈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는 것은 土化作用에서 解明할 것이다.)

  火氣

  伏明

  伏字의 뜻은 潛伏을 意味하는 것이다. 換言하면 기운이 없는 것이 아니라 潛伏하여 있기 때문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는 象을 말하는 것이다.

  明에 對해서는 위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神明論에 詳述할 것이거니와 다만 여기에서 簡單하게 말한다면 分裂을 어느 程度 抑制하면서 自己의 形體를 保存하려고 할 때에 自然的으로 形成되는 것이 明이니 이것은 天道運行의 必然的인 過程의 所産인 것이다.

  그러므로 天道의 運行은 萬一 이 過程(火의 過程에 過不及이 없으면 升明이라는 正常的인 氣化作用을 하게 될 것이고 萬一 不及하게 되면 明이 生할 수 없거나 或은 生한다고 하여도 微微 不振한 狀態에 빠지게 될 것이니 이것을 伏明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不及을 伏明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不及을 伏明이라고 하는 것은 明이 不足한 것이 아니라 一時的인 潛伏으로 因한 不及이란 것을 말하는 것이다.

  土氣

  卑監

  土氣가 알맞으면 備化之氣가 되므로 陰陽의 相乘을 잘 調節하게 되는 것이니 矛盾과 對立은 그 힘에 依하여서 融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土氣가 萬一 不及하게 되면 土化作用은 正常을 잃고 卑監으로 化하게 되므로 陰陽의 對立과 矛盾을 仲裁하여 내지 못함은 勿論 事物의 備化作用이 中絶되어서 人事는 不和에 빠지게 되고 모든 生物은 氣가 下陷함으로 因하여 生命力인 陽氣가 發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天地之道도 또한 同一한 原理에 屬하여서 陰盛陽虛가 되면 凶年과 疾病에 빠지게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阿鼻叫喚의 慘狀을 빚어내는 것도 또한 土氣不及에서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은 意味에서 土氣가 不及한 象을 卑監이라고 하는 것이니 卑字의 뜻을 高字의 뜻과는 反對가 되는 것이다.

  모든 事物은 陽氣가 많으면 高化되게 마련이요 陽氣가 不及하면 卑縮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陰陽의 本性인 것이다.

  監字의 뜻은 視 또는 臨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즉 土가 卑監이 되는 것은 前半期의 陽作用이 不及하였을 境遇에는 土化作用에 미치는 影響이 크므로 그 때문에 不及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土의 本性은 솜(綿)처럼 피우는 作用이 있기 때문에 모든 事物을 醇化함으로써 事物의 組織을 中化시키는 것인데 萬若에 土가 下陷하여 卑監이 되면 土가 제구실을 못하게 되고 오직 下陷만을 계속하므로 다만 낮은 쪽만 바라본다는 뜻에서 卑監이라고 命名한 것이다.(詳細한 것은 土化作用을 論할 때에 詳述할 것임)

  金氣

  從革

  위에서 金氣의 平氣가 審平이란 것을 말한 바 있다. 金氣가 萬一 金의 그 사나운 性格 때문에 殺伐의 念慮를 警戒하여야 할 것은 勿論이지만 不及하는 境遇에 있어서도 그것만 못하지 않은 걱정이 있는 것이다.

  金이라는 것은 本是 收藏의 始初이기 때문에 木火의 때에 發展했던 陽을 自己(金氣)의 품안에 包藏하려는 本能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金과 火는 가장 相爭이 甚한 對立性을 가지고 있으므로 土의 仲裁를 기다려서 自己의 所任을 遂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土가 萬一 適當히 仲裁를 하면 金이 平氣를 얻을 수 있고 土가 萬若 調和力을 잃으면 金이 火를 包藏할 수 도 없으며 雖是 包藏한다고 하여도 이것은 金의 正氣를 나타내지 못하게 되므로 結局 金氣가 不及이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金氣의 不及을 從革이라고 하는 것이다.

  革字의 뜻은 一般的으로는 改革이라는 말로 쓰여지는 것이나 그러나 좀더 詳細히 稽考하여보면 革字와 皮字는 그의 槪念이 서로 다르다. 皮字의 뜻은 生命體 그대로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오 革字의 뜻은 生命體에서 이미 離脫시키서 人工을 加했을 때에 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製革이라는 語彙는 있어도 製皮라는 말은 없는 것이다.

  勿論 이것은 皮에다가 人工을 가한 境遇를 말하는 것이거니와 天工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金火가 交易하는 過程에서 萬若 火氣가 尙多하기 때문에 金의 收藏作用이 微弱하게 되는 그 象을 가리켜서 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人體에서 觀察하여 보면 皮膚의 毛髮은 火氣가 過하고 金氣가 不及할 때에 毛髮이 脫落되는 것과 同一한 原理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現象을 革化라고 한다. 그러므로 金氣不及의 作用을 從革이라고 하는 것이다.(詳細는 金火相爭에서)

  水氣

  流연

  水氣라는 것은 本來 流動의 源泉이며 萬物의 生命이며 精神의 府庫라는 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바 있다. 그렇다면 水氣는 어떻게 流動하는 것일까? 하는 것을 考察하여 보기로 하자. 宇宙안에 있는 森羅萬象은 動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 動하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물(水)의 流動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胎卵草木은 물덩어리에서 出發하게 마련이며 萬華方暢의 華麗한 춤도 또한 懸水三千 의 물(水)의 律動에 不過한 것이다.

  그런즉 萬物은 물에서 나왔다가 물로 다시 돌아가는 輪廻反復인 것뿐이다. 이것을 易에서는 坎이라고 하는 것이요 五行學에서는 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水라는 것은 果然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水氣自體의 特徵인 凝固力으로써 萬物의 生命이며 또한 精神이기도 한 陽덩어리를 密閉하는 作用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水氣가 一旦 門을 닫으면 核은 그의 陽을 貯藏하는 것이요 萬若 門을 열면 싹이 터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모습이 바로 水氣가 作用하는 形象이며 또한 律動하는 물의 幻像인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人間 世上에는 善惡의 對立과 生存의 競爭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極致에서 살펴보면 萬物의 變化過程은 다만 물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헤엄쳐 나오는 일만을 反復하는 潛水夫의 一生이야말로 바로 變變化化하는 造物界의 生涯와도 彷佛한 것이다.

  그런즉 물은 水氣에 의해서 形成되어진 것인즉 水의 存亡은 바로 萬物의 存亡인 것이다. 그것은 水源이 마르면 江이 마르게 되는 것과 같이 水氣가 宇宙에서  渴되어버리게 되면 律動하는 물의 變化는 찾아볼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詳細는 水火一體論에서)

 

 

  그러므로 水氣가 不足한 것을  流라고 命名한 것이니  字의 뜻은 一般的으로 물이 마른다는 말이지만 이 字에는 이것밖에  字의 뜻이 있는 것이다.  자에는 閉塞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水氣가  한다는 말은 渴한다는 뜻과는 다른 것이오나 다만 水氣가 不及하다는 뜻뿐인 것이다.

  流字는 古字를  不자로 썼던 것이다. 옛적에는 왜 이와 같이 流字를  不로서 標示하였던가? 이제 여기에서  不자의 象을 考察하여 보면  不字는 ㅆ水ㅆ不 하였으니 不자의 뜻은 木이 아직 一을 貫通하지 못하고 있는 象이다. 그러나 이 字를 水邊에 쓴 것은 不이 木으로 못된 것은 一水의 障碍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도록 暗示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즉  不字의 象 가운데는 動하는 힘이 潛藏하여있는 象이 있는 것이므로  流하는 말에는 動의 根源이 아직 不及하고 있다는 意味가 內包되어 있는 것이다. 水不及을  流하고 한 것은 실로 이러한 深奧한 理致가 있기 때문이다.

  太過之氣

  위에서는 不及으로 因한 缺點을 말했거니와 여기에서 말하려는 바의 太過는 바로 그의 反對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운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物化作用의 正常的인 發展과 收縮에 支障을 招來하는 境遇를 말하려는 것이다.

  木氣

  發生

  木의 太過를 發生이라는 槪念으로 命名한 것을 不及의 槪念을 委和라고 한 것과 比較硏究하여 보면 가장 明瞭한 것이다.

  그러므로 委和를 和氣가 委屈된 것이라고 한다면 發生은 나아가는 힘이 너무 많을 것을 意味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例를 하나 들어보면 銃彈이 爆發하는 모습은 바로 木氣의 太過現象이기 때문에 爆發이라고 하는 用語가 되어있는 것이며 또한 여러 해 묵은 씨앗에서는 종다리가 나오는 것은 여러 해 묵어서 凝固作用이 過多하기 때문에 木氣는 따라서 過多하게 된 것이므로 이것을 發芽라고 하는 것도 또한 그 때문인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五行氣가 平氣를 維持하지 못하고 太過나 不及이 생기게 되는 것은 허물이 水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其他 四氣의 境遇도 同一例인 것이다.(詳細는 生克論에서)

  火氣

  赫曦

  火氣가 太過한 것을 赫曦라고 하는 것이다. 火光이 沖天하는 것을 赫이라고 하고 日光이 曝射하는 것을 曦라고 한다.

  그런즉 赫曦라는 말은 灼熱이 蕃盛하는 象인즉 그것이 바로 火氣太過하는 모습이며 또한 伏明의 反對인 것이다.

  易에서는 이것을 亢龍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뜻은 陽氣가 너무 많아서 限없이 上升하여 後悔莫及의 境地에까지 오르는 象을 意味하는 것인즉 亢龍과 赫曦는 同一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亢龍이라는 것은 陽氣의 縱發하는 性質을 警戒한 것이오 赫曦라는 것은 陽性의 橫散하는 暴威를 말하는 것이니 각각 陽性(火)의 一面씩을 說明한 것이다.

  그러므로 植物이 萬一 赫曦之氣를 만나게 되면 枯死하게 마련이요 人間의 生理組織에 陽盛陰衰의 變故가 생기게 되면 빳빳하게 마르고 살이 생겨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들은 모다 赫曦의 罪科인 것이다.

  土氣

  敦阜

  土氣의 太過를 敦阜라고 하는 것이다. 敦字의 뜻을 生覺하여 보건대 敦字와 厚字는 意味가 同一한 것 같지만 實은 다르다. 氣化作用이 두터워지는 것을 敦이라고 하고 形化作用이 두터워지는 것을 厚라고 하는 것이다.

  阜字의 뜻은 土山이나 大陸이나 혹은 肥大한 것들을 指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阜字와 丘字는 意味가 서로 다르다. 丘는 阜에 비해 面積이 훨씬 적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 氣가 넓게 펴져서 이룬 것은 阜가 되고 氣가 잘 펴지지 못하고 이루어진 언덕은 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土化作用이 中正을 잃으면 或은 不及하여서 丘가 되고 或은 太過하여서 敦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前記한 赫曦의 경우와는 反對로 모든 組織이 지나치게 繁殖하게 되므로 사람이나 動物같은 것은 너무 肥大하게 되고 草木의 경우는 根幹에 비해서 枝葉이 지나치게 茂盛하는 結果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金氣

  堅成

  堅字와 固字는 그 뜻이 서로 다르다. 表氣가 굳어진 것을 堅이라고 하고 裏氣가 굳어진 것을 固라고 한다. 그러므로 金의 性質은 堅이요 水의 性質은 固인 것이다.

  成字의 뜻은 事物이 完成된 것을 意味하는 것이니 예컨대 果穀의 完熟이나 人事의 完決은 모다 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收와 成은 同一 意味로 相通되는 것이다. 但只 火의 立場에서 보면 成이지만 反面 金의 立場에서 보면 收인것 뿐이며 또 全體的(變化的) 見地에서 보면 收라고 할 것이며 個物的(四時的) 見地에서 보면 成이라고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金氣가 太過하다는 말은 堅으로서 成收하였다는 말이므로 이것을 堅成이라고 命名하였던 것이다.

  그런즉 金氣의 경우에 있어서도 다른 原質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隨伴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것은 모다 金이 審平이 되지 못한데서 오는 犯罪인 것이다.

  水氣

  流衍

  流字는 古字로 쓰면  不로서 표시되는데  不의 象을 보면 여기에는 動하는 모습이 內包되어 있다는 것은 前에 말한바 있다.

  衍字는 ㅆ行ㅆ水하였은즉 여기는 動하는 象이 있는 것이며 또 反面에는 水가 行하려고 하여도 行해내지 못하는 象도 있는 것이다. 이 글자의 意味를 詳考하여 보면 늘어진다는 뜻도 있고 또 箱子라는 뜻도 있는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서 流衍이라는 槪念을 檢討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事實을 알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衍에는 늘어질 수 있는 바탕이 있기는 하지만 水氣가 太過하기 때문에 오히려 箱子속에 幽閉당하여 있는 象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流衍이라는 槪念속에는 動할 수 있는 要因만 갖추고 있을 뿐 아직 감히 동해내지 못하고 있는 象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不及之氣인  流와 이것을 비교해보면  流의 경우에 있어서는 動할 수 있는 힘이 缺乏한 것이 아니고 水의 凝固力이 太過하기 때문에 감히 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流는 內的 條件의 不備에서 생기는 缺陷이며 流衍은 外的 狀態의 不應에서 오는 事故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① 五行法則과 엠페도클레스의 原理

  B.C. 495∼435 間에 希臘의 哲人 엠페도클레스 Empedokles는 宇宙의 原質을 四原素로서 主張한 일이 있다.

  그가 이와 같은 主張을 하게 된 것은 畢竟 存在와 生命問題를 矛盾없이 解決하여 내려는 意圖에서였으리라고 生覺된다.

  그가 이와 같이 四元論을 主張하고 탈레스Thales 以後의 一元論을 排斥하게 된 것은 그로서는 여러 가지 理由가 있었겠지만 吾人이 볼 때는 그가 古代의 一元論을 그의 머리로서는 演釋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生覺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니 도리어 初期의 自然哲學을 無價値한 것으로 輕蔑하였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은 오직 옘페도클레스에 있어서만 局限되었던 것은 아니고 歷代 哲學들의 通弊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筆者가 여기에서 論하려는 바는 그의 短點을 指摘하거나 批判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의 長點的인 着眼을 들어서 東洋的인 象數原理와 比較하여 보려는 것이다.

  이제 아래에 잠시 그의 所論을 紹介하여 보기로 하겠다.

  宇宙의 原質은 불(火), 공기, 물(水), 땅의 넷으로 生覺하고 다시 그 性質을 區別하여 말하기를 四種의 原理는 變할 수 없는 自己 同一性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다만 그 變化하는 性質만 다르다고 生覺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四種의 根源은 서로 그의 性質을 달리하면서도 또한 永遠히 같은 性質을 確保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같은 것에도 還元되지 않으며 아무런 새로운 性質도 가질 수가 없고 다만 離會集散함으로써 現實界의 變化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異質的인 四原素들이 어떻게 離會集散 할 수 있는가? 하는 問題에 對答하기를 그것은 四種의 根源이 가장 잘 融合된 圓球로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生覺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分合集散하는 要因으로서 憎惡와 사랑을 生覺해 냈으니 憎惡로서는 分離시키고 사랑으로서는 統合시킨다고 主張하였던 것이다.

  以上에 論述한 바는 그의 思想의 要約이거니와 筆者가 여기에서 그것을 要約하는 것은 그의 所論 中 「四種의 根源은 서로 性質을 달리하면서 또한 永遠히 같은 性質을 確保하는 것이며 같은 것에로 還元되지도 아니하며 아무런 새로운 性質로 가질 수가 없고 다만 離合集散함으로써 現實에 變化를 나타낸다」고 하는 卓越한 觀點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論文을 詳察하여보면 그의 四原質 自體도 아직 完全치 못하며 또한 四原質의 基本點에 對해서 論及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비록 希臘 前期의 自然哲學 다시 말하면 그 時代의 一元論을 理解하지 못하였던데 緣由한 것이며 따라서 後期的인 變質要因이기는 하지만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여기에는 아직까지 前期的인 一元論의 命脈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東洋의 象數原理 즉 木火土金水의 法則인 運動原理와 彷佛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思想을 조금만 修正하여서 運動하는 原質이 五元素임을 밝히고 또한 그의 中樞가 陰陽의 本源인 太極이라는 點까지만 發展시켰더라면 그것으로써 宇宙原理는 完全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象數原理와 엠페도클레스 原理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差異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고 「四種의 根源은 서로 性質을 달리하면서도 또한 永遠히 같은 性質을 確保하는 것이며 또한 같은 것에로 還元하지도 아니하며 아무런 새로운 性質도 가질 수 없고 다만 離合集散하면서 現實界에 變化를 나타낸다」는 말을 하였더라면 希臘哲學의 次元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動하고 있는 現實的 存在만을 보고 靜하고 있는 基本的 存在를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思想의 一端에서 能히 엿볼 수 있으니 「憎惡로서 分離하고 사랑으로 統合한다」는 一節만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象數的 立場에서 보다면 木火發展의 過程에서는 憎惡心이 생기는 것이요 金水收藏의 過程에서는 博愛心이 생기는 것은 勿論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憎惡나 博愛는 宇宙의 運動法則인 四象(木火金水)에서 抽出한 人道的 原理일 분이고 그 自體가 바로 分裂에서 綜合으로 誘導하는 萬象의 原質이거나 法則일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萬物이 分裂할 때 이것을 인간이 사랑한다고 하여서 그 分離를 停止시키거나 또는 萬物이 綜合過程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것을 憎惡함으로써 그 綜合을 停止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認定하는 한 그의 理論은 空念佛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비록 現實과 本體, 人間과 天道는 同一한 法則에 依해서 움직인다는 點까지 看破하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사랑과 憎惡에도 分合의 原理가 있다고 본 點만은 看過할 수 없는 것이다. 一言으로 要約하면 그는 寶庫의 門고리는 잡았지만 아직까지 室內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東洋哲學은 이러한 愚를 犯하게 하지 말도록 하기 위하여서 모든 硏究에있어서 이와 같은 法則發見을 重視하였던 것이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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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10. 29)                                    
                           影動天心月과  詠歌舞蹈  
                                                  (哲學博士 : 楊 在 鶴)
                                                  
                                                                 
       1. 影動天心月        
   
1) 김일부선생은 과거시험을 통해 신분상승된 관료형 학자는 아니었으나, 당시에는 대단히 유명했던 재야의 거두였다. 김일부선생이 돌아가시자 영남지역에서 내노라하는 유생들은 천리가 멀다 않고 문상했던 文件과 成均館(왜정 당시에 經學院으로 명칭이 바뀜)을 대행한 1928(戊辰年) 慕聖公會 전라도 鎭安支會에서 김일부를 聖人으로 추앙했던「讚揚文」등이 그 증거이다.

2) 김일부는 젊어서부터 가문의 전통에 따라 성리학과 예학에 빠졌으나, 연담 선생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연담은 김일부에게 서경과 주역의 다독을 권했으며, ‘影動天心月’이란 평생의 화두를 남겼다. 이를 풀기 위해 정치철학서로 알려진 서경에서는 캘린더 형성의 메카니즘의 수수께끼를 배웠으며, 주역에서는 선후천변화의 이치를 깨닫고, 그 구체적 방법론은 황제내경의 오운육기론(선천의 5황극이 후천에서는 6황극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힌트를 얻음)에서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경과 주역의 합작품이 바로 정역사상이다.

3) 서경과 주역의 결합을 통해 김일부는 ‘易 = 曆’, 즉 우주변화(선후천변화)는 시간의 질적 변화로 나타남을 논증하여 동양철학의 물꼬를 새롭게 열어제쳤다. 

4) 김일부가 정역을 장기간에 걸쳐 구상하고 체계화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물은 蓮潭 李守曾이다. 젊어서부터 36세에 이르기까지 김일부는 조선조의 학풍과 광산 김씨 문중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과 예학에 힘썼다. 하지만 연담선생을 만나 그의 세계관에 흠뻑 빠진 뒤로는 인생관이 확연하게 바뀌게 되었다.

5) 연담선생이 김일부에게 던진 화두는 “내 나이 36세 때 처음으로 연담 이선생을 따르니 선생이 호를 내리시니 ‘관벽’이라 하시고, 시 한 수를 주시되 ‘맑은 것을 보는 데는 물만 같은 것이 없고, 덕을 좋아함은 어짐을 행함이 마땅하다. 달빛이 천심월에서 움직이니 그대에게 권하노니 이 진리를 찾아 보시게나(余年三十六에 始從蓮潭李先生하니 先生賜號曰觀碧이요 賜詩一絶曰 觀淡은 莫如水요 好德은 宜行仁을 影動天心月하니 勸君尋此眞하소)”(『正易』19張 후면)는 한 토막 시에 담겨 있다.

6) 연담선생의 권고로 김일부는 영가무도의 정진과 더불어 서경과 주역연구에 온 힘을 기울여 ‘영동천심월’의 진리를 깨달았다. 이를 풀기 위해 (주역과의 연관성에 고심) 서경에 나오는 ‘366일 堯임금의 朞數’와 ‘365¼일 舜임금의 朞數’의 깊은 뜻을 헤아렸고, 주역의 山風蠱卦의 ‘先甲 3日 後甲 3日(辛酉, 壬戌, 癸亥, 甲子, 乙丑, 丙寅, 丁卯에서 갑자를 중심으로 신유․임술․계해는 선갑 3일이며, 을축․병인․정묘는 후갑 3일이다)’의 이론과 重風巽卦의 ‘先庚 3日 後庚 3일(丁酉, 戊戌, 己亥, 庚子, 辛丑, 壬寅, 癸卯에서 경자를 중심으로 정유․무술․기해는 선경 3일이고, 신축․임인․계묘는 후경3일이다)’의 뜻을 깨닫고, 子午卯酉에서 辰戌丑未로 전환하는 이치를 밝혀냈다.

7) 연담선생이 준 수수께끼는 ‘달’변화에 있다. 그것은 해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즉 선후천변화는 일월의 변화요, 일월의 변화가 曆數變化(시간의 질적 변화)이며, 역수의 변화는 음양도수의 변화(선천의 三天兩地[抑陰尊陽]에서 후천의 調陽律陰[正陰正陽]으로)이다. 해와 달의 위치와 운동방식이 바뀌면 당연히 지구의 운동방식도 바뀐다. 이는 시간의 질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김일부는 “先天之易은 交易之易이니라 後天之易은 變易之易이니라”(「十一一言」)고 하여 ‘변역’은 천지 자체의 변화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8) 해와 달의 변화에 대한 복잡한 이론들을 종합하고 관통하여 내놓은 결과가 바로 정역팔괘도이다. 그 과정에서 ① 천지는 선천의 ‘甲己’질서에서 후천의 ‘己甲’질서로 바뀌며,1)   ② 日月은 晦朔의 전도로 말미암아 선천의 16일이 후천의 초하루로 바뀌며(한달로는 望變爲朔, 1년으로 秋變爲春), ③ 1년 360일에서 시간의 꼬리가 없는 无閏曆의 세계를 읽어냈다. 그것은 우주의 신비에 대한 위대한 쾌거였다.2)

9) ‘己甲夜半에 生癸亥’의 원칙에 의해 戊辰 天心月은 皇中月로 그 그림자를 움직여 癸未 초하루가 된다. 왜냐하면 ‘乾元用九’의 자리가 곧 癸亥이며, ‘用六’은 戊辰에서 시작하여 보름은 壬午이 되며, 16일은 癸未가 된다. 다시 말해서 선천의 16일이 후천의 초하루가 되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15일은 歸空(시간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본체가 원시반본하여 제자리에 돌아가는 원리; 물리적 현상으로 보면 ‘無化’인 셈이다)

10) 선천은 戊辰에서 달을 일으켜 15일 壬午에 이르러 보름달이 되므로 天心月이라 하며, 후천은 선천의 16일이 초하루가 되어 15일 후에는 皇心(선천의 30일)에 이르게 되므로 皇心月이라 부르는 것이다. 한달을 중심으로 보면 선천보름의 다음 날이 바로 후천 초하루가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皇中月이 자라서 皇心月이 되는 것이다.

11) 造化翁(化翁, 化无上帝, 化无翁)이 천지를 조화하여 완성시키려면 천지도수에 근거한 달의 운행이 반드시 60干支에 부합한 뒤에 가능하다. ‘皇中’3)은 한달이 언제나 30일로 이루어지는 본체달(과거에 숨겨졌던 우주의 본체가 후천이 되면서 활짝 열려 새롭게 솟구치는 달)4)이라고 할 수 있다.

12) 戊辰(戊戌)을 제 1일로 삼았기 때문에 16일은 후천월의 제 1일에 해당되는데, 그것을 6갑으로 따지면 癸未(癸‘丑’; 후천은 ‘축판’이라는 말의 어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癸未(癸丑)를 후천월의 朔으로 할 경우에는 선천월의 戊辰(戊戌)朔은 후천월의 16일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朔望 15일이 전환함을 선후천의 전도라 하는 것이다.

13) 이를 풀어서 말하면 原曆 375에서 선천개벽 이후 본체도수 ‘15(十五)’가 閏曆으로 작용하여 시간의 파도를 일으키는데, 후천 진입기에 이르러 윤도수 15는 다시 본체도수로 還元되는 현상이 일어나 결과적으로 ‘无閏曆’의 360일 정역세상이 수립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체용의 극적 전환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질서의 근원적 전환인 것이다.

14) 그것은 물리적 변화를 수반한다. 반대로 물리적 변화가 시간의 극적 전환을 일으킨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둘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 선후를 속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정역은 造化翁(最高神)의 섭리를 인수분해한 ‘도수’로 모든 것을 추론하는 까닭에 아무래도 원리가 현상을 이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15) 우주의 생성진화는 시간의 전개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우주의 생성사가 곧 시간의 역사이고, 시간의 역사의 마디를 해명하는 것이 바로 易의 궁극명제이다.

16) 김일부는 시간의 흐름은 일정한 목적을 갖는다는 것과, 우주의 생성사를 시간의 변화로 논증했다. 그것은 3단계의 ‘生長成’이라는 절차를 통과하면서 우주는 완성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즉 괘도로는 복희팔괘에서 문왕팔괘로, 문왕팔괘에서 정역팔괘로 나아가며, 시간적으로는 原曆에서 閏曆으로(375일 → 366일), 閏曆에서 正曆(366일 → 365¼일)로 진행한다고 하여 괘도의 이치와 시간흐름의 절차를 일원화시켰던 것이다.

17) 이미 소강절이 밝혔듯이「설괘전」3장은 복희팔괘도,「설괘전」5장은 문왕팔괘도이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주역의 귀재이자 대가였던 김일부는 제 3의 괘도인「설괘전」6장의 내용이 정역팔괘도임을 세상에 선언하였다. 우주의 변천사를 괘도의 변천사로 압축정리한 것이 바로 복희괘도와 문왕괘도와 정역괘도이다. 정역사상의 압권은 존재론인 무극․ 태극․ 황극의 3극론, 閏曆과 正曆의 시간론, 하도낙서를 일원적으로 통일시켜 정역팔괘도로 압축시킨 점에 있다고 하겠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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