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부 선생이 계룡산에서 공부 할 당시 우리나라는 몇 차례의 전쟁을 치루면서 민심은 피폐해지고 서구열강과 일제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여성과 하층민의 삶은 형편없었고 아무런 희망이 없어 엄청난 시대적 모순에 몸부림치고 있었을 때이다.

이런 시절에 새로운 시대를 내다보고 다가올 시대를 ‘정역팔괘(正易八卦)’라는 단순한 프로그램에 압축시켜 표현했으니, 지구상의 축의 변화에 따는 총체적인 변화가 따르고 지축이 바뀌므로  후천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하였다.

억압과 패권, 상극의 시대에서 평화와 조화, 협동과 평등의 시대를, 남성우위에서 여성의 지위가 우월해지는 새로운 시대, 노예의 해방, 부녀자들의 해방 ,남녀평등,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도래와 사회개혁의 대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구원의 희망을 안겨주려고 했었다.

이것이 강증산의 상생과 최제우의 동학혁명을 거쳐 커다란 민주주의의 한 뿌리를 형성했으면서도 아깝게도 조선말 기득권에 사로잡힌 수구적인 권력집단의 이익도모와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군을 끌어들이고 결국 그 뜻이 꺽 이면서 커다란 사회혁명까지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들이 보고 이루고자 했던 후천의 실제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은 그 후 유럽과 미국사람들이다. 평등과 자유와 창조와 행복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사회’가 그것이다.

그 당시 이러한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나라는 한국뿐이었으나 그것이 실패로 끝나게 되었을지라도 새로운 문명의 메시지는 동학을 통해 그것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더 큰 형태로 승화되게 된 것이다.

어렵게 민주주의를 얻었지만 김일부 선생이 외친 평등과 자유의 세계는 그 이상의 영성적이고 심미안적인 질적인 민주주의를 거쳐야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니 감성, 형제애, 솜씨 등 우리가 가진 응축된 힘을 새로운 영성의 미학으로 문화로 예술로 승화시켜내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이고, 김일부 선생이나, 강중산, 최시형, 최제우, 박중빈, 전봉준, 동학 그리고 당시의 의로운 선조들이 진정으로 원하고자 했던 가슴과 영혼이 살아나는 새로운 시대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한바다 著 3천년의 약속 중에서...>

우리가 짧은 사이에 이러한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애초부터 간직 되어 온 우리의 민주주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발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이를 위해 광주민주화운동과 6.10만세를 거치는 동안에 민주화를 위해 희생되신 모든 분들의 영혼에 감사를 드려야 할 차례이다.

김일부, 이 분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가슴을 열어주고 녹여줄 수 있는 진실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미래의 희망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힘이 있었던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계룡산은 이러한 위대한 사상이 나올 수 있는 에너지 터인 것이다.  

김일부 선생이 여성지위의 우월시대를 제시한 이래 동학의 최시형선생은 여성들을 중시하여 ‘바로 저들이 한울’이라고 선언했고, 강증산선생은 태안읍내에서 좁은 길에 들어섰다가 한 여인과 마주치고는 그는 여인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고 한다.

이 때만 해도 여자들이 길을 비켜야 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인지라 그 여자는 못내 송구스러워하며 길을 지나갔다. 제자들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지난 선천시대에는 여자가 길을 비켜주었지만 앞으로 올 후천시대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길을 양보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당시로는 대단한 혁명적인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요즈음은 여성우위의 후천시대가 훌쩍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4월 27일 국회에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호적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고 호주를 중심으로 가(家)단위로 호적을 편제하던 방식을 국민 개인별로 등록기준지에 따라 ‘가족관계 등록부 ’ 가 만들어져 대법원에서 이에 필요한 규정을 정비했으니 여성분들은 호주제 폐지가 가져올 양성 평등사회에 대한 설레는 기대감이 클 것으로 보인다.

여성분들이 이러한 남녀평등을 넘어선 여성 우월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고 이러한 ‘호주제 폐지는 단순한 신분등록제의 변화가 아니라 부계혈통제가 생물학적, 정치적, 도덕적으로 틀려서 없앤 거구나.’ 하면서 본적 없는 본적아 사라져라, 나는 나, 성씨는 자유롭게라면서 쟁취감에 도취되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가정의 평화, 자식의 교육문제, 남녀 간의 협동을 도외시 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된다.

이제는 ‘딸 셋을 키우면 기둥뿌리가 팬다’, ‘시집살이 못하면 동네 개가 다 업신여긴다’, ‘딸자식 치운다’라는 소리가 없어질 터이고 그동안 억눌려 왔던 여성들이 폭발할 시점도 되었으니 이제는 술 좀 자제하고 궁중마님에게 잘 보여야 하겠다.

그렇지만 여성분들은 이러한 미래를 보고 이를 실천하려고 했던 훌륭한 선조 분들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보고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시간이 난다면 가족화합 차원에서 최제우를 모시는 ‘수운교’도 찾아보기를 권한다.

   
 
  ▲ 최제우를 모시는 '수운교'의 모습. 이곳은 계룡산맥의 줄기인 금병산 아래 자운대가 있는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수운교의 전경(사진 왼쪽이 수운교종각, 나머지가 수운교 도솔천), 수운교종각, 수운석종, 수운본부 입구의 모습    ⓒ오마이뉴스  
 
계룡산맥의 줄기인 금병산 아래 자운대가 있는 초입에 있으니 찾기가 쉽다.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별나게 되어있고 건물내부의 배치형태도 특이하고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며 때리면 쇠 소리가 나는 ‘석종’이 특이하다.

쇠 소리 나는 돌은 철분이 많아서 나는 소리인데 경남 밀양시 만어사에는 커다란 물고기 모양의 돌이 서있고, 주변골짜기 너덜지대에는 가득 메운 돌들이 있는데 이 돌들을 작은 돌로 두드리면 맑은 소리의 종소리가 난다.

이렇듯이 우리에게 위대한 사상을 남긴 김일부는 그러면 과연 득도한 후 어찌 되었을까?

차길진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따금씩 일부가 천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며 섭섭해 한다. 국사봉에서 정역에 천착, 후천개벽의 이치를 깨친 반인 반신(半人半神)급 학자 김일부(1826~1898)를 보고 싶다는 얘기다. 생전의 김일부를 상제(上帝)와 만나게 해주는 특혜를 베풀었을 정도로 할머니는 그를 아낀다.”
결국 그는 무언가를 얻어 후천시대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의 묘지는 현재 당골에 있다.
논산시 양촌면 남선리 당골 마을에는 예전에 충남대 총장을 역임하신 이정호 박사 등이 앞장서서 묘지를 조성해 놓았는데 한눈에 보아도 좋은 자리인 것 같다. 뒤 주봉이 오도산(五道山) 이다.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당골 마을의 촌로 한분이 탁 쪼그리고 않으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이곳에는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예전에 어떤 스님한분이 지나가면서 이곳에 쉬더니 이 마을이 앞에 흐르는 논산 천과 함께 활궁의 시위대에 해당하여 인물이 많이 나겠네요. 하고는 가버렸어.

그래서 후에 마을회관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이 말을 했더니 뭐 그러냐고 면박을 받았는데 그것이 그게 아니더라고 이곳에는 김일부 선생만 나신 것이 아니라 송영무 해군참모총장이 나셨고 또 건양대학교를 설립한 김희수 총장의 부모묘역이 바로 이 옆에 있어요. 매년 풍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보고가곤 하지요. 이곳이 당골인 이유는 옛날에 여기 마을 앞으로 큰물이 들어차서 배가 다닐 때 이 앞산에 배를 묶어두었다고 합디다. 그래서 배를 묶어두는 당골이라고  했다지요”

‘당골’이란 지명은 아무래도 단군과 관계가 있는 듯 한데 자랑할 만도 한곳이다.
계속 쪼그리고 듣고 있으려니 재미는 있지만 쪼그리고 않는 자세에 익숙하지 않아 그만 내려 왔다.
언제 시간이 나면 한 번 더 찾아가 좋은 말씀을 들어보아야 하겠다.

부연하면 이곳 남산리는 교사선생님 40여분이 배출되어서 마을 자랑거리가 된 곳이기도 하니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는 참 인물이 많이 나는 지역인 것 같다.

시간이 나면 한번 들러서 좋은 산기운도 마시고 김일부 선생 묘소 주변에는 둥굴레가 만개했으니 적당히 취사해서 차를 끓여 먹어도 좋을 듯하다.

이쯤 했으면 이제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시던 향적산방(香積山房)을 둘러보아야 하지 않을까?

충남대 총장을 지낸 이정호(李正浩)선생도 1950년대 중반에 이 터에다 작은 사택을 지어놓고 제자들과 함께 정역공부를 했는데, 이 향적산방 앞에 보이는 산이 아주 보기 좋은 토산이다.
지금도 옛집이 남아있다. 예전에는 산제당(山祭堂)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는 가끔 김일부 선생과 관련된 모임이 열린다고 하는데 이곳을 양정  고개 초입에 계룡암이라는 암자를 가지고 있었던 ‘임덕순’보살이 지키고 있다.

 
 
 
  ▲ 거북바위와 용바위  
 
이곳에 거북바위동굴과 용바위가 있다.
김일부 선생은 이곳이 계룡산의 중심이고 한국의 중심이자 나아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했다.
거북바위는 바로 김일부 선생이 크게 깨달은 장소로 반 동굴로 되어있다.

여기가 지구역사가 생긴 이래  모든 운명의 파동이 공명으로 전해 내려오는 장소라고 해피타오라는 정신적인 단체를 이끌고 있는 ‘한바다’가 말한 곳이다.

짬을 내서 조용히 동굴 속에 앉아 명상에 잠기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지나치게 콘크리트로 내부를 정리 해놓았는데 좀 어색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평반에 물 담은 듯’ 시원하면서도 차분한 마음이 든다.

아래 용바위는 누군가 기다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 정역연구자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렇듯이 김일부 선생이 가르친 사상은 동학을 통하여 세계에 알려지고 민주주의 형성에 큰 모템이 되었고 이것이 현재에도 우리의 정신사적인 모태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와 이를 실천할 동학사상을 배태한 정신사적으로 위대한 사상을 가진 학자를 쉽게 지나치는 세태에 한숨이 나올 법도 하지만 이제라도 이분의 뜻을 기리고 고양시키는 것은 계룡시민이 할 일이 아닐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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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학의 재야권 거두 김일부

김일부는 호로 본명이 김항(金恒)이다.
1826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당골에서 태어났다.

그러고 보면 광산김씨 가문에서는 자랑할 만한 인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조선유학의 제도권 거두로 조선중기 이후 송시열 등을 가르친 스승으로서 국가의 존망을 좌우지했던 김장생, 김집부자(父子) 그리고 재야 권 거두로 김일부 선생이 있었다.

김장생, 김집부자는 기호학파의 영수로서 예학을 중심으로 커다란 유학의 기둥을 완성하신 분들이고, 특히 김일부 선생은 정역을 완성하여 이분이 돌아가시자 영남지역에서 내 노라 하는 유생들은 천리가 멀다 않고 문상했다고 하며, 전라도 진안지회(鎭安支會)에서는 김일부를 성인으로 추앙했던 찬양문(讚揚文)이 있을 정도이니 위대한 인물들을 배출한 저력은 무엇일까?

김일부는 젊어서 옛 조선의 선비집안이 그랬듯이 성리학과 예학에 빠졌으나 훌륭한 스승을 만나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고 한다. 그의 스승이 유명한 연담 이운규(李雲圭)이다.
동학의 씨를 뿌린 최제우, 불교혁신의 뿌리인 남학의 김광화, 그리고 김일부가 모두 그 분의 제자들이니, 역시 위대한 분들은 훌륭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법인 모양이다.

스승은 김일부에게 서경과 주역의 다독을 권하면서 “맑은 것을 보는 데는 물만 같은 것이 없고, 덕을 좋아함은 어짊을 행함이 마땅하다. 달빛이 천심  월에서 움직이니 그대에게 권하노니 이 진리를 찾아보시게나. (觀淡은 莫如水요 好德은 宜行仁을 影動天心月하니 勸君尋此眞하소)”라는 한 토막 시적인 화두를 주었다고 한다.

김일부는 영가무도의 정진과 더불어  해와 달의 변화에 대한 복잡한 이론들을 종합하고 관통하여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의 진리를 깨닫고, 내놓은 결과가 바로 정역팔괘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역의 완성에 이르기 까지 일부선생은 독특한 수련법을 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영가무도(詠歌舞蹈)’이다.

무형문화재 27호인 이애주 교수는 “예로부터 몸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길게 늘여 노래하며 춤추고 뛰는 것이 곧 ‘영가무도’로써 그 행위가 담고 있는 의미는 우주 자연의 변화 과정이며 자연의 이치이다.”라고 말하며, “단기고사에 보면 ‘노인은 영가하고 아이는 무도 한다’라는 말이 있어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가무백희가 나오지요. 이것이 바로 영가무도입니다. 음악과 노래, 춤이 완전히 일치되는 상태지요. 선(禪)과 춤과 음악이 결합된 치유의 춤, 평화의 춤 입니다”

이와 같이 영가무도는 우리 민족에게서 발단하여 전해오다가 그 맥이 끊긴 것을 김일부 선생께서 제창하신 것이다. 김일부 선생께서는 사색 중 영감을 얻으시어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소리 '음 아 어 이 우’를 그대로 불렀을 뿐이며, 또한 아니 부르고는 못 견딜 만큼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기운을 독창적인 창법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열중 하셨다.

그의 출생지인 충남 논산군 양촌면 남산리 당골 잔디가 사그라지도록 뛰며 노래하여 사람들은 그를 광인이라 여길 정도였으며 심지어는 문중 족보에서 파헤쳐질 정도로 온갖 비아냥거림을 받아 왔다고 한다.

그러나 주역을 완성하는 '정역(正易)'을 선포하자 그 간의 비웃음은 사라지고 그를 성인으로 받들게 되었다 한다. 이곳에서 창시된 정역은 이후 우리나라 신흥종교가 불꽃처럼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한국유학의 새로운 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영가무도를 오래하면 오장에 가벼운 감전과 같은 상쾌한 현상이 생기고 궁둥이가 벌벌 떨리기도 하며 또한 이마가 짜릿짜릿하며 머리가 온통 덮어씌우는 듯 한 감각으로 기분을 매우 유쾌하게 한다고 한다.

갑자기 김도향이 TV에 나와 ‘항문을 조입시다.’라고 하는 노래가 왜 떠오르는지...

“지하철에서 또는 버스에서/쓸데없이 잡담 말고 졸지도 말고/편안하게 눈감고 고요히 앉아/다른 사람 모르게 명상하듯이/조용히 항문을 조 입시다/너무너무 화날 때/너무너무 힘이 들 때/너무너무 슬플 때/너무너무 괴로울 때/정신 차려지고 기분이 좋아져/가끔씩 조이면 정말 좋아/조용히 항문을 조입시다.

인터넷 할 때/TV 볼 때/너무너무 어깨에 힘주지 말고/편안하게 허리 펴고 고요히 앉아/다른 사람 모르게 명상하듯이/조용히 항문을 조 입시다/사랑싸움할 때도/미운 사람 있을 때도/스트레스 받을 때도/정력제가 필요할 때도/정신 차려지고 기분이 좋아져/가끔씩 조이면 정말로 좋아/조용히~ 조였다 놨다/조였다 놨다/에브리바디 항문을 조입시다.”

이것도 영가무도의 변형인가!
이것은 춤추는 것이 아니라 똥꼬 만 벌름벌름하는 것인데, 하긴 이것도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원리가 있는 운동이겠지!

영가(詠歌)와 무도(舞蹈)는 뗄 수 없는 관계인지라 흥겹게 노래 부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춤을 추게 마련이지만 이 모두는 정역사상을 근거로 수련해야만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고 정역사상을 근거로 삼지 않은 영가는 맹목적이고, 영가가 뒷받침되지 않는 정역사상은 무의미하다고 보여 진다.

시간이 나면 정신세계사에서 주관하는 영가무도와 관련된 강좌도 참석해본다면 정신생활의 윤택함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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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이앤 뉴스에서는 변금섭 법무사와 공동으로 계룡시민들에게 계룡의 유적지와 사찰, 인물 등에 대해 낱낱이 파헤쳐봄으로써 계룡의 진정한 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8월부터 30여회에 걸쳐 「계룡의 묘미」에 대해 연재하고자 합니다.

계룡산에 진입하는 초입이 되는 양정고개로부터 출발하여 사계 김장생 선생에 이르기까지 계룡의 역사와 일화는 물론 먹거리까지 계룡시의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 글은 특정 종교와 무관하게 쓴 자료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편집자주]

글 : 변금섭   사진/편집 : 지아이앤 뉴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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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 고개-이제 출발해보자

 
 
 
  ▲ 지금의 양정고개의 모습. 지금은 대전-논산을 잇는 국도가 지나가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힘들게 통행하던 높은 고개였던 것 같다. 예전 사진이 없는 게 안타깝다.  
 
양정 고개, 양정치(兩政峙)는 모든 이들에게 계룡산에 진입하는 초입이 되었다.

진안 마이산과 대둔산에서 올라오는 금남정맥이 천호산을 넘어서 계룡지구대에서 잠시 쉬고 양정 고개를 지나고 비사벌 아파트를 거쳐 ‘천지대안도’ 건물을 지나면서, 도깨비 터의 중심인 ‘계룡정사’에서 오래 머물다 능선을 타고 ‘계룡웰빙타운’(예전에 이 자리에는 약사암이 있었다.)을 통하고 235봉을 타면 계룡산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힘을 내서 내달리고 나니 부여의 부소산에서 그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종착역에 이르게 된다.
   
예전부터 양정 고개는 고개 마루가 높아 힘들게 통행하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경사가 너무 심해 증기기관차가 늘 퍼지기 일쑤여서 오르다가 못 올라가면 후진해서 이곳 연산역으로 되돌아가서 물을 넣고 다시 올라가곤 하였다고 하는데 연산역에는 아직도 그 당시의 급수탑이 남아있다.

 
 
 
  ▲ 양정삼거리의 모습. 양정고개에는 현재 논산경찰서 계룡지구대와 양정 시외버스터미널 등이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룡산에 진입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곳에 어염집들이 많이 있었으니 지금도 이 골목에 들어서면 지금은 다소 낡았지만 제법 큰 여관 건물이며 한약방, 간이역과 각종 음식점들이 옛날의 호화스러움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곳으로 철길이 나고 새로 대전 논산 간에 도로가 뚫리면서 흐르는 금남정맥이 흩어지고 많이 약해진 느낌이 든다.

양정 고개에는 이러한 전설이 전래되어 오고 있다.

옛날 어느 해에 가뭄이 극심하여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이었는데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나라 일을 돌보지 않고 서로 모함을 해가며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이 그치질 않고 계속되니 백성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이 때 경상도에 사는 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열심히 글을 읽어 크게 출세할 것을 결심하고 노력하였는데 세상일 돌아가는 것을 보고 책을 팽개친 채 출세할 것을 포기하고 유람 길에 나섰다.
그는 여기 저기 발길 닿는 대로 다니면서 세상을 살폈다.

농부들은 먹을 것이 없어 저렇게 굶주리고 있는데 아직도 조정에서는 싸움질뿐이니 걱정이로구나. 한탄하면서 이거 나라에 무슨 정변이라도 일어나야 백성들이 살지, 큰일이구나 하면서 걱정을 하였다.

그는 금강산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와서 보니 딴 세상 같았다.
차라리 이곳에서 평생 동안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었다.

그는 한 절간에 머무르면서 며칠간을 쉬다가 하루는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한 장수가 나타나더니 그래 쓸 만한 놈들은 세상을 피하여 산속에 쳐 박혀 있고 몹쓸 놈들은 임금님 옆에서 서로 제가 잘났다고 야단들이니, 허참. 세상 잘 돌아가는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수 앞에 나가 앉으며 대체 당신은 누구요?
누구 시온 데 저에게 그런 말씀을...하고 물었다.

그 장수는 나는 충청도 사는 장수인데 당신을 계속 따라다니고 있소.
당신은 여기 있을 사람이 못되니 어서 빨리 충청도에 있는 계룡산으로 가시오.
그때 내가 말 하리다 하고 사라졌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꿈속에 나타났던 그 장수는 아무래도 이 어지러운 세상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 이튿날 날이 밝자 여장을 차리고 충청도 계룡산으로 갔다.
충청도에 들어서서 지금의 두계 고을에 다다르자 밤이 어두워졌다.

피곤한 여독을 풀기 위하여 그 근처에 있는 주막집에서 하루 저녁을 유숙하는데 꿈속에 먼저 나타났던 그 장수가 또 나타났다.
잘 왔소. 그런데 이것 참 큰일이오.
이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으려면 꼭 정씨가 나와야 하는데 나오질 않고 있고, 그것도 정씨 한 사람이 아니라 정씨 여덟 사람이 나와서 이 세상을 평정해 놓고 그 여덟 사람 중 두 사람이 싸우다가 한사람이 죽어야만 이 나라가 평온해 지는데 여덟 사람의 정씨도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참으로 큰일이요. 근심스러워 하면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 여덟 사람의 정씨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고 있소? 하고 그 선비가 묻자 그걸 알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겠소, 누구인지 한 사람도 모르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여기로 오라고 했소? 하며 선비는 장수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야 당신은 정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요.

단 한 가지 알려 드리리다. 정씨 두 사람이 나타날 때에는 금강 물줄기가 변하여 논산 강경으로 흐르게 될 것이요. 웅진 땅 계룡산 밑을 흘러서 말이요. 하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요? 하는데 그 장수는 또 어디로인지 사라졌다.

꿈을 깨고 난 선비는 참으로 이상한 꿈이로다. 한 번도 아닌 두 번 씩이나 나타난 그 장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며 생각해 보아도 알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온다는 정씨는 과연 언제 나타난다는 것이냐?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알 수 없는 일들 뿐이었다.

그 선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신도 안에 정씨가 도읍한다면 틀림없이 이 고개야말로 정씨가 나타날 고개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이곳에서 묵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정씨는 나타나지 않고 이제는 노잣돈까지 떨어져서 아주 이 고개 아래에 뗏 집을 짓고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생황은 어려움이 더해갔지만 나라를 구한다는 여덟 정씨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날 줄 몰랐다. 그래도 그는 기다렸다. 꿈에 나타났던 그 장수가 거짓말을 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월은 흘러 그는 이제 늙어서 허리는 꼬부라지고 머리는 백발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죽는 날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느 날 그 선비는 자기가 며칠 안가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끔 들리는 초동들에게 기다림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고 내가 죽은 후라도 정씨가 나타나면 내가 기다리다 늙어 죽었다고 꼭 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선비는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양정 고개에서 정씨 두 사람이 나타나서 왕관을 놓고 싸워야 할 고개라고 전하며 기다리다 지친 어느 선비의 한이 맺힌 고개라고도 한다.                          (계룡시청  민속문화·전설 중에서)

그래서 두 정씨가 대립한다고 해서 양정(兩鄭)고개로 불리기도 한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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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10. 29)                                    
                           影動天心月과  詠歌舞蹈  
                                                  (哲學博士 : 楊 在 鶴)
                                                  
                                                                 
    2. 詠歌舞蹈

1) 김석구는 1940년 “조선일보”에 ‘평조, 계면조 이야기(1)’라는 글을 썼다.『樂書』에서 설명한 5音의 구체적인 소리가 유가의 선비들이 행했다는 詠歌舞蹈에서 이용되는 ‘음․어․아․이․오’ 다섯 가지 소리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儒家에서 선비들이 영가무도를 했습니다. ‘음어아이오’ 이 다섯 가지 소리를 전문으로 독공하여 읊고 노래할 때에 단련된 성음을 간절하게 썼습니다. … 그러면 노래하고 읊고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다섯 가지 ‘음어아이오’ 모음일 것입니다. 이것을 많이 수련하자면 호흡을 길게 뻗치는 실력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음어아이오’ 이 오음이 제일 중대하고 필요한 것이며, 이 오음 속에는 필이 양상과 음성이 짝지어 있는데 많이 단련된 소리가 장부로부터 나올 때 … 신명이 합하고 흥할 것입니다.”5)

2) 김석구가 얘기하는 詠歌舞蹈는『詩經』「毛詩序」에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영가의 구체적인 발상법과 수련방법의 원형은 아득히 잊혀진 상태로 남아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영가무도6)의 재탄생은 김일부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사색 중에 영감을 얻어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그대로 불렀을 뿐이며, 또한 부르지 않을 않고는 못견딜 만큼 마음의 충동을 받은 것이다. 그 독창의 唱法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도록 열중했다.

3) 김일부의 출생지인 담골(淡谷; 충남 연산군 양촌면 남산리) 풀밭에 잔디가 사그라지도록 뛰며 노래했던 것이니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겼던 것이다.7) 영가무도에 얼마나 심취했으면 문중 족보에서 파헤쳐졌겠는가. 하지만 온갖 비아냥을 딛고 일어나서 중국철학을 극복한『正易』을 선포하여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4) 정역사상의 대부분은 존재론과 우주론과 시간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주변화의 원리(선후천 변화원리)라고 묶을 수 있다. 단편적으로 神觀을 비롯하여 윤리관을 언급하고 있으나 수행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발언이 없다. 단지 영가무도를 통하여 맑은 정신과 건강한 육체의 수련이라는 수행론을 제시했을 따름이다.

5) 1대 제자인 淸灘 金永坤(1863-1945)은 32세에 처음으로 김일부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영가무도에 전념했는데, 그는 하도낙서보다는 ‘윷말판’을 숭상하였다. 영가무도는 다시 朴相和로 승계되었으나, 오늘날 그 실상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발제자 보기에 현재 영가무도의 원형 찾기가 가장 시급하다. 영가무도의 원형이 밝혀져야 정역의 이론과 심신일체에 근거한 수행론인 영가무도의 논리적 연관성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담보되지 않은 갖가지의 노래와 춤은 깃털에 불과하다. 몸통(영가무도의 원형)은 온데 간데 없고, 깃털들이 날뛰고 있는 실정인 까닭에 전국적으로 몸통찾기운동이라도 벌려야 할 심정이다.

6) 영가무도에서는 ‘詠’이 기본이다. 詠을 오래 불러서 익속해지면 ‘歌’는 저절로 불리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詠을 올바르게 오래 불러야 하며, 자세를 바로 해야 한다. 영가는 마치 ‘구슬을 뀀’과 같이 5음을 하나로 꿰어 가며 단정히 불러야 한다. 이러한 형식을 가리켜 ‘詠(永言)’이라 한다. 詠은 소리를 길게 내야 하며, 오래 불러야 한다. 특히 宮聲(音)을 많이 부르는 것이 좋다. 宮聲은 5음의 중심소리이니, 이것을 오래 부름에 따라 和音을 얻게 되며, 五臟에 가벼운 感電과 같은 상쾌한 현상이 생긴다. 궁둥이가 벌벌 떨리기도 한다. 또 한 이마가 짜릿짜릿하며 머리가 온통 덮어씌우는 듯한 감각은 기분을 매우 유쾌하게 한다.

7) “詠歌로 그 심정을 기르고, 舞蹈로 그 혈맥을 기른다.” 그러니까 영가는 별도의 가사가 필요 없다. 영가는 무엇보다도 5音의 정확한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허튼소리가 되어 오히려 요사스런 노래가 되기 쉽다. ‘앙앙’ ‘엉엉’소리를 내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喪輿소리’가 나오기도 하는데 좋지 않다. 무슨 타령이나 가요곡 비슷한 소리가 되어도 좋지 않다. 영가는 처음 부르는 사람은 哀願聲으로 처량한 소리가 되기 쉽다. 차츰 더 불러 보면 懺悔聲이 나오게 되니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소리내어 우는 사람도 있다. 아주 익숙해져서 자유롭게 부르게 되면 感化聲이 나온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즐겁게 한다. 지극히 조화로운 소리가 나오게 될 때 그 소리를 神化聲이라 한다.8)

8) “詠歌는 5음을 주체로 하는 것이다. 5음을 궁, 상, 각, 치, 우라 함은 대개 알고 있지만, 그 소리를 어떻게 내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을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발성법을 一夫가 밝힌 것이다. 즉 宮․商․角․徵․羽9)를 吟․哦․唹․咿․吁10)로 발음하는 것이니, 이것이『樂書』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다.”11)

9) 詠歌(노래)와 舞蹈(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함수관계이다. 흥겹게 노래부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춤을 추게 마련이다. 詠에서 歌로, 舞에서 蹈로 차츰차츰 옮겨 가다 보면 노래와 춤이 하나가 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것은 곧 생명의 소리요 몸짓이다. 원래 ‘음아어이우’는 율여도수에 근거한 생명의 언어이며, 무도는 생명의 氣運이 깨어나게 하는 율동이다. 진리의 언어이자 율동인 율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영가무도는 소리와 춤의 예술의 극치인 것이다.

10) 이것은 신바람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신바람문화(神風文化)는 ‘맺힘’과 ‘풀림’이라는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한다. ‘고, 응어리, 어혈, 멍’ 등의 맺힘에 대한 감정의 표출은 ‘맺히고, 막히고, 엉키고, 꼬이는’ 강박관념과 한탄, 실망, 애환과 유감, 실의와 억울함과 좌절과 욕구불만이라는 경험의 상처를 유발하는 수동적 ‘恨’文化를 형성했다. 하지만 한민족은 풀리고, 뚫고, 달래고 매만지는 신명의 마당인 ‘굿’의 문화를 창출해냈다. 체념과 위안을 곁들이면서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의지의 산물이 바로 굿풀이였던 것이다.

11) 신명풀이로서의 춤사위와 노래는 영성을 뒷받침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강오는 김일부의 ‘詠歌’를 ‘靈歌’라고 바꾸어 표현했다. 달리 표현해서 詠歌를 일종의 呪文(Mantra)로 규정하였던 것이다.12) 결론적으로 말해서 영가무도는 긴 숨을 들이쉬면서(호흡조절) 노래 부르고, 춤추어 천지인의 기운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것은 가장 자연스런 생태적인 여건에서 천지와 하나되는 ‘소리춤’인 것이다.

12) 원래 易이 노동자(일꾼)들의 음악교과서(흥을 불러일으키는 악보)였다면, 영가무도는 무형과 유형의 온갖 수행법을 통합하여 나타난 오늘날 웰빙문화(참살이)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옛사람은 “영가는 마음(정신)을 상쾌한 경지에 이르도록 하며, 무도는 혈맥을 다스려 육체의 건강을 북돋우는 수련법이다”이라고 했다. “영가는 세속적 가치에 찌들고 낡고 묵은 기운에 물들어 오랫동안 잠든 인간의 본성과 정서를 일깨우는 데 특효가 있다. 소리는 눈과 귀를 맑고 밝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무도는 혈관을 넓히고 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데 더없이 좋다.”13)

  하지만 이 모두는 정역사상과 연장선에서 수련해야만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 정역사상을 근거로 삼지 않은 영가는 맹목적이고, 영가가 뒷받침되지 않는 정역사상은 공허하다는 것이 바로 김일부선생의 제자인 李象龍의 가르침이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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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10. 29)                                    
                           影動天心月과  詠歌舞蹈  
                                                  (哲學博士 : 楊 在 鶴)
                                                  
                                                                 
       1. 影動天心月        
   
1) 김일부선생은 과거시험을 통해 신분상승된 관료형 학자는 아니었으나, 당시에는 대단히 유명했던 재야의 거두였다. 김일부선생이 돌아가시자 영남지역에서 내노라하는 유생들은 천리가 멀다 않고 문상했던 文件과 成均館(왜정 당시에 經學院으로 명칭이 바뀜)을 대행한 1928(戊辰年) 慕聖公會 전라도 鎭安支會에서 김일부를 聖人으로 추앙했던「讚揚文」등이 그 증거이다.

2) 김일부는 젊어서부터 가문의 전통에 따라 성리학과 예학에 빠졌으나, 연담 선생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연담은 김일부에게 서경과 주역의 다독을 권했으며, ‘影動天心月’이란 평생의 화두를 남겼다. 이를 풀기 위해 정치철학서로 알려진 서경에서는 캘린더 형성의 메카니즘의 수수께끼를 배웠으며, 주역에서는 선후천변화의 이치를 깨닫고, 그 구체적 방법론은 황제내경의 오운육기론(선천의 5황극이 후천에서는 6황극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힌트를 얻음)에서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경과 주역의 합작품이 바로 정역사상이다.

3) 서경과 주역의 결합을 통해 김일부는 ‘易 = 曆’, 즉 우주변화(선후천변화)는 시간의 질적 변화로 나타남을 논증하여 동양철학의 물꼬를 새롭게 열어제쳤다. 

4) 김일부가 정역을 장기간에 걸쳐 구상하고 체계화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물은 蓮潭 李守曾이다. 젊어서부터 36세에 이르기까지 김일부는 조선조의 학풍과 광산 김씨 문중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과 예학에 힘썼다. 하지만 연담선생을 만나 그의 세계관에 흠뻑 빠진 뒤로는 인생관이 확연하게 바뀌게 되었다.

5) 연담선생이 김일부에게 던진 화두는 “내 나이 36세 때 처음으로 연담 이선생을 따르니 선생이 호를 내리시니 ‘관벽’이라 하시고, 시 한 수를 주시되 ‘맑은 것을 보는 데는 물만 같은 것이 없고, 덕을 좋아함은 어짐을 행함이 마땅하다. 달빛이 천심월에서 움직이니 그대에게 권하노니 이 진리를 찾아 보시게나(余年三十六에 始從蓮潭李先生하니 先生賜號曰觀碧이요 賜詩一絶曰 觀淡은 莫如水요 好德은 宜行仁을 影動天心月하니 勸君尋此眞하소)”(『正易』19張 후면)는 한 토막 시에 담겨 있다.

6) 연담선생의 권고로 김일부는 영가무도의 정진과 더불어 서경과 주역연구에 온 힘을 기울여 ‘영동천심월’의 진리를 깨달았다. 이를 풀기 위해 (주역과의 연관성에 고심) 서경에 나오는 ‘366일 堯임금의 朞數’와 ‘365¼일 舜임금의 朞數’의 깊은 뜻을 헤아렸고, 주역의 山風蠱卦의 ‘先甲 3日 後甲 3日(辛酉, 壬戌, 癸亥, 甲子, 乙丑, 丙寅, 丁卯에서 갑자를 중심으로 신유․임술․계해는 선갑 3일이며, 을축․병인․정묘는 후갑 3일이다)’의 이론과 重風巽卦의 ‘先庚 3日 後庚 3일(丁酉, 戊戌, 己亥, 庚子, 辛丑, 壬寅, 癸卯에서 경자를 중심으로 정유․무술․기해는 선경 3일이고, 신축․임인․계묘는 후경3일이다)’의 뜻을 깨닫고, 子午卯酉에서 辰戌丑未로 전환하는 이치를 밝혀냈다.

7) 연담선생이 준 수수께끼는 ‘달’변화에 있다. 그것은 해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즉 선후천변화는 일월의 변화요, 일월의 변화가 曆數變化(시간의 질적 변화)이며, 역수의 변화는 음양도수의 변화(선천의 三天兩地[抑陰尊陽]에서 후천의 調陽律陰[正陰正陽]으로)이다. 해와 달의 위치와 운동방식이 바뀌면 당연히 지구의 운동방식도 바뀐다. 이는 시간의 질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김일부는 “先天之易은 交易之易이니라 後天之易은 變易之易이니라”(「十一一言」)고 하여 ‘변역’은 천지 자체의 변화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8) 해와 달의 변화에 대한 복잡한 이론들을 종합하고 관통하여 내놓은 결과가 바로 정역팔괘도이다. 그 과정에서 ① 천지는 선천의 ‘甲己’질서에서 후천의 ‘己甲’질서로 바뀌며,1)   ② 日月은 晦朔의 전도로 말미암아 선천의 16일이 후천의 초하루로 바뀌며(한달로는 望變爲朔, 1년으로 秋變爲春), ③ 1년 360일에서 시간의 꼬리가 없는 无閏曆의 세계를 읽어냈다. 그것은 우주의 신비에 대한 위대한 쾌거였다.2)

9) ‘己甲夜半에 生癸亥’의 원칙에 의해 戊辰 天心月은 皇中月로 그 그림자를 움직여 癸未 초하루가 된다. 왜냐하면 ‘乾元用九’의 자리가 곧 癸亥이며, ‘用六’은 戊辰에서 시작하여 보름은 壬午이 되며, 16일은 癸未가 된다. 다시 말해서 선천의 16일이 후천의 초하루가 되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15일은 歸空(시간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본체가 원시반본하여 제자리에 돌아가는 원리; 물리적 현상으로 보면 ‘無化’인 셈이다)

10) 선천은 戊辰에서 달을 일으켜 15일 壬午에 이르러 보름달이 되므로 天心月이라 하며, 후천은 선천의 16일이 초하루가 되어 15일 후에는 皇心(선천의 30일)에 이르게 되므로 皇心月이라 부르는 것이다. 한달을 중심으로 보면 선천보름의 다음 날이 바로 후천 초하루가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皇中月이 자라서 皇心月이 되는 것이다.

11) 造化翁(化翁, 化无上帝, 化无翁)이 천지를 조화하여 완성시키려면 천지도수에 근거한 달의 운행이 반드시 60干支에 부합한 뒤에 가능하다. ‘皇中’3)은 한달이 언제나 30일로 이루어지는 본체달(과거에 숨겨졌던 우주의 본체가 후천이 되면서 활짝 열려 새롭게 솟구치는 달)4)이라고 할 수 있다.

12) 戊辰(戊戌)을 제 1일로 삼았기 때문에 16일은 후천월의 제 1일에 해당되는데, 그것을 6갑으로 따지면 癸未(癸‘丑’; 후천은 ‘축판’이라는 말의 어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癸未(癸丑)를 후천월의 朔으로 할 경우에는 선천월의 戊辰(戊戌)朔은 후천월의 16일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朔望 15일이 전환함을 선후천의 전도라 하는 것이다.

13) 이를 풀어서 말하면 原曆 375에서 선천개벽 이후 본체도수 ‘15(十五)’가 閏曆으로 작용하여 시간의 파도를 일으키는데, 후천 진입기에 이르러 윤도수 15는 다시 본체도수로 還元되는 현상이 일어나 결과적으로 ‘无閏曆’의 360일 정역세상이 수립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체용의 극적 전환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질서의 근원적 전환인 것이다.

14) 그것은 물리적 변화를 수반한다. 반대로 물리적 변화가 시간의 극적 전환을 일으킨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둘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 선후를 속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정역은 造化翁(最高神)의 섭리를 인수분해한 ‘도수’로 모든 것을 추론하는 까닭에 아무래도 원리가 현상을 이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15) 우주의 생성진화는 시간의 전개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우주의 생성사가 곧 시간의 역사이고, 시간의 역사의 마디를 해명하는 것이 바로 易의 궁극명제이다.

16) 김일부는 시간의 흐름은 일정한 목적을 갖는다는 것과, 우주의 생성사를 시간의 변화로 논증했다. 그것은 3단계의 ‘生長成’이라는 절차를 통과하면서 우주는 완성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즉 괘도로는 복희팔괘에서 문왕팔괘로, 문왕팔괘에서 정역팔괘로 나아가며, 시간적으로는 原曆에서 閏曆으로(375일 → 366일), 閏曆에서 正曆(366일 → 365¼일)로 진행한다고 하여 괘도의 이치와 시간흐름의 절차를 일원화시켰던 것이다.

17) 이미 소강절이 밝혔듯이「설괘전」3장은 복희팔괘도,「설괘전」5장은 문왕팔괘도이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주역의 귀재이자 대가였던 김일부는 제 3의 괘도인「설괘전」6장의 내용이 정역팔괘도임을 세상에 선언하였다. 우주의 변천사를 괘도의 변천사로 압축정리한 것이 바로 복희괘도와 문왕괘도와 정역괘도이다. 정역사상의 압권은 존재론인 무극․ 태극․ 황극의 3극론, 閏曆과 正曆의 시간론, 하도낙서를 일원적으로 통일시켜 정역팔괘도로 압축시킨 점에 있다고 하겠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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