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개국사찰인 개태사 대웅전의 모습.  
 
자! 계룡산 줄기에 또 다른 역사가 보존되고 있으니 유동리를 지나 화악리 오골계팻말을 보고 지나가노라면 S-OIL주유소 전 버스승강장사이로 굴다리가 나있는데 여기를 돌아가면 개태사가 나온다.

굴다리 사이로 승용차를 힘겹게 빠져나오면 정말 형편없는 절이 나온다. 조그만 암자 같은 곳이니 개태사가 큰절인 것으로 알고 찾아간다면 정말 실망이 앞설 것이다.

고려를 창업한 ‘태조 왕건’,  TV드라마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온 그 왕건!  그분의 영정이 존재하고 있었던 그 절이니 그 규모가 대단했을 텐데......

고려사절요에는 ‘개태사를 지을 때 사치스러운 것이 극도에 이르고.....12개월 만에 개태사가 완성되니 낙성법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소(疏)를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태사를 지을 때는 10만여 평이나 되고, 8만9암자(八萬九庵子)를 소속시켰다고 하니 고려의 호국대찰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지만 눈앞에 모습은 그 것과 다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이제부터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나씩 쳐다보고, 아기자기함을 느껴보자.

이절에 우리의 전통신앙의 모든 것이 배어있고 잘 진열되고 있으니 이곳에서 우리 조상들이 말해주고자 하는 정신세계의 모든 것을 천천히 찾아보도록 하자.

여기서는 놓칠 것이 하나도 없다.

일주문에서 사찰정문에 이르는 너무도 짧은 길

일주문에서 사찰정문에 이르는 길 양편으로는 거대한 고목들, 향나무냄새를 맡으면서 심호흡을 해보자 상큼함이 베어 나올 것이다. 원래 향나무를 심는 것은 귀신을 물리친다는 ‘신목(神木)’의 성격을 띠는 나무인지라 보편적으로 묘지나 사당 주위에 많이 심어놓았다.

이러한 신목으로는 향나무 외에 회화나무, 엄나무, 화살나무를 많이 심기도 한다. 특히 회화나무는 학자집안에 많이 심고 부귀를 불러온다고 하여 많이 권장되어 심는 것 같다.
대전 현충원에도 이러한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계룡시에도 금암동에는 회화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공해에도 튼튼하고 보기도 좋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입암 공단 조성작업으로 200년 이상 된  ‘엄나무’가 잘려나갔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엄나무는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기 때문에 200년 이상 된 엄나무는 보기도 힘들고 그 정도로 자라기도 힘들다.

계룡시에서는 택지개발이나 주택개발 등으로 잘려나가는 고목들을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이곳이 신령 깊은 땅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인식한다면, 그 것이 상록도시 이미지에도 부합하지 않을까.

그나마 인근 대전시처럼 기존에 잘 자라는 나무도 베어내고 새로 나무를 3천만그루를 심는다고 아우성치지는 않아서 좋지만 그렇다고 잘려나가는 고목나무들을 도외시 한다면 결국은 우리가 그 해로움을 당할 것 아닌가.

방금까지 달려온 도로의 삭막함이 일순간 사라진다면, 이제 역사의 길이 시작되는 문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풀어보자.

이야기를 다시 천호산으로 돌려보자.

우리가 쓰는 연호(年號), 단기(檀紀)는 하나의 시발점을 의미하듯이 불가에서는 불기(佛紀)를 쓰고 있다.
그런데 개태사 초입의 일주문상량에는 불기 3007년으로 씌어있고 정문상량에는 불기 2542년으로 다르게 적혀있다.

왜 다를까?

한 건물에 나이가 465년씩이나 차이가 나는 다른 두 가지 표시를 해놓고 있으니 이 건물의 나이가 불량한 것인지 제멋대로 적어놓은 것인지 그렇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이 절에 배치되고 있는 모든 것은 상당히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아무렇게 배치되거나 허접스럽게 가져다 놓은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하나하나에 주의를 더욱 기울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도래한 고구려 시대로부터 1962년까지 약 1300년 동안은 석가부처의 탄생을 1027BCE로 하는 북방불기를 사용해오다, 1956년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 불교도대회에서 불법의 기원에 대해 당해 연도인 1956년을 2500년으로 공통적으로 적용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태국과 미얀마 등의 남방불교에서 쓰던 불기가 채용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본래 쓰던 불기 3000년과 약 500여년의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태사는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으로 인해 북방불기를 고수하고 있다고 보여 지는데 북방불기(불탄 3007년=서기 1980년, 일주문상량)와 불멸을 기원으로 하는 남방불기(불기 2542년=서기 1998년, 정문상량)을 함께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불기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는 것 같으나 너무 많은 지식은 여행의 가치를 고식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자. 

향나무 길을 걸어 일주문에서 절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은 짧다.
‘풀끝의 이슬’같이 그것이 인생인 것을, 너무 짧아 허무감을 느끼기 전에, 자 고개를 들어  개태사 정문 현판을 보자!

‘대천호산 삼천일지 개태사(大天護山 三天一地 開泰寺)’ 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개태사의 전체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개태사가 있는 이 뒤 산이 바로 천호산(天護山)이다. 천호산의 예전 지명이 황산(黃山)이다.
태조 왕건이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여겨 황산(黃山)이라 부르던 승전지의 배산(黃嶺의 북부)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연산 뜰에서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던 태조 왕건이 위기에 몰리자 갑자기 천호산에서 신장을 들고 말을 탄 병사들이 나타나 백제군을 무찌르게 되었다고 하여 산의 신에 대한 가호에 감사를 드린다고 황산을 천호산이라 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남해 금산의 지명을 바꾸어 준 것과 같이 높으신 분이 뜻이니 천호산도 그렇게 지어지고 불리우 게 된다.

그렇다 이 근처, 연산 앞뜰이 황산벌이다.
이 지역은 예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서, 계룡산의 관문으로 여기를 지키다 순국한 수많은 원혼들이 있는 곳이었다.

유명한 계백의 황산벌이 바로 이 언저리인데, 양정 고개에서 연산면으로 들어가는 들판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는 계백장군이 신라군의 젊은 화랑 관창의 목을 벤 곳으로 유명한 관동리가 있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른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곳이 이곳 황산벌 싸움에서였으니, 이곳이 바로 계백 장군의 결사대가 순국한 곳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의 아들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명실상부하게 통일 대업을 달성한 곳도 바로 여기이다.

수많은 왜인들이 유독 이곳에 많이 침략을 해온 것도 고려의 3대 사찰로서 이 곳 일대에 수많은 전투가 치러졌으니, 그리고 동학혁명의 깃발에 다시 집결하게 된 곳도 이곳 계룡산이니 이곳에 왜 그리 선조들은 애착을 가지고 지키려 했을까?

천호산은 연산이다(連山).

연산이란 연이어진 산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병풍첩이 붙어서 펼쳐진 것같이 여자한복의 주름이 첩첩이 늘어진 것과 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산은 기운이 좋다고 하는데 익산에 용안에 있는 뒷산이 그렇고 대전에 있는 구봉산이 연산의 형태인바, 이러한 산들의 주위에는 정말 기운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연산의 형태이지만 느슨하게 연이어 있는 대전의 월평산성이 있는 월평산도 갑천을 따라 용 같이 길게 늘어져 있는데 여기를 뚫어 길을 낸다고  많은 마찰이 생기고 있다.  이런 산은 등산을 많이 하면 원광대 조용헌 교수의 표현대로 ‘마운틴오르가즘’을 많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연산이 늘어진 산인 늘뫼-놀뫼-논산이 되었다고 하는데 여하간 보기 좋은 산이다.

요새는 산중턱까지 전원주택을 진다고 산을 마구 헤쳐 놓았으니 볼썽사납다.  
이제 다시 개태사현판으로 돌아가서 삼천일지(三天一地)라고 쓰여 있는데, 하늘은 3이요 땅은 1이라, 즉 세 분 하느님을 한 분이 땅에서 받든다는 뜻이다.

삼천은 세 분 하느님으로서 여기 개태사에서는 미륵삼존불을 의미하고, 일지는 땅에 계신 한 분이 세 분의 하느님을 받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한 분이 바로 개태사의 삼존불이 모셔진 전각 왼편에 위치한 팔각정에 모셔져 있는 ‘나반존자’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태조 왕건이 나라를 창립할 당시는 삼신사상이 강했고 단군에 대한 믿음도 강한 시기이고 지금도 우리나라의 단군영정의 표본이 있는 장소인지라  삼천세계는 환웅, 환인, 단군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결국  천부경의 삼태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현판이 만들어진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을 보면  국초 이래로  ‘연산현(連山縣) 계룡산 개태사 터는 곧 후대에 정씨가 도읍할 곳이다.’라는 참설에 영향을 받아 삼천세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장소임을 알리는 표현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들의 신화에 담겨진 ‘3’의 의미를 지나치게 간과해왔다.
우리 민족의 탄생신화에조차 녹아 있는 3은 가장 환상적인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삼족오, 풍물 굿의 삼채장단인 삼박자, 삼성혈, 삼재수, 삼정승과 민족 신화에 3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음은 우리 민족의 형성기부터 3이 매우 중요했음을 암시한다. 하기야 기독교에서도 삼위일체가 있고, 유교에서도 삼강오륜이 있으니 3이라는 숫자의 묘미는 어디까지 일까? 삼천세계는 결국 3을 중시하는  삼신사상의 영향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3을 중시하는 우리 풍속에 삼신할멈이 있다.
제주도의 명진국 생불 할망 본풀이에서는 삼신할멈의 탄생과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삼신할멈의 나이가 일곱 살 되던 해 정월 초하루 인시에, 옥황상제님이 불러서 "너는 인간세계에 가서 아기를 낳게 하는 삼신할멈이 되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삼신할멈은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고 내려오다가, 아기를 낳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 아기를 낳게 해주었다. 삼신할멈은 은가위로 그 아이의 탯줄을 끊고 석자 실로 잡아맨 다음, 더운 물로 목욕시키고 유모를 불러 젖을 먹이는 한편, 미역국을 끓여 산모에게 먹였다.
그리고 사흘 후에 산모에게 쑥물로 목욕케 하고 태를 사르고 아기에게는 배내옷을 입혔다.
민간에서 삼신을 모시는 과정도 위와 같다.
      (주강현저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중에서)

개태사의 대표적인 삼불부처도 삼신신앙의 확대 과정에서 등장한 부처가 아닌가 싶다.
삼불제석도 아기를 점지해주고 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
그래서 개태사가 미륵도장으로 유명했던 것 같다.
 
삼불의 ‘불’을 원래는 근본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인 ‘부리’에서 나온 말이 후대에 불교와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개태사에는 이렇게 ‘3’ 자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개태사 현판의 ‘삼천일지’, 요사채 3동건물, 팔각정에 모셔진 3분, 창운각에 모셔진 3분과 용화궁에 모셔진 석불입상 3분이 모두 3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빼먹지 말고 알아야할 3이 있으니 창운각안에 모셔진 단군 옆에 놓여 있는 천부경 안에 있다.
그것은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라는 표현 중 ‘석삼극’이라는 글인데, 어려운 글이다.

자, 이제 ‘개태사(開泰寺)’

태조가 친히 기원문(祈願文)을 지어주었는데, 절 이름을 개국에 이르게 된 것은 부처와 산신령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개태사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이 있었으며,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신탁(神託)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 온 절이다.

고려시대 왕실의 원찰이자 호국 사찰로는 개성의 봉은사, 봉업사, 논산의 개태사가 있어 고려의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고려의 존립 475년 동안 왕실에서 한해도 빠짐없이 선왕에 대한 예를 올렸다고 한다.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km에 달하는 토성이 있는데 승병이 주둔하였다고 전한다.
승병이라는 것은 고구려이전 시대부터 조의선인이라고 하여 왕의 친위부대의 명칭인 것이다.
절의 스님으로 구성된 병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절에는 유독 고려 말 이후부터 왜구의 침입이 많았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에는 한나라의 운세를 바꿀 수 있는 ‘해인(海印)’이 묻혀 있다고 한다.
이것만 있으면 천하도 두렵지 않는다고 한다.

이 땅에서 태생한 백제의 후손들이니 이를 모를 리 없을 것이고 이를 찾기 위하여 수많은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쳐들어 왔으니 바퀴벌레도 아니고 죽여도 나타나니 ‘개뿔도 없는 인간’들 같으니, 반성하는 뜻이 없는 민족이다.

옛날 삼신께 죄를 지은 황궁 씨는 자기 몸을 스스로 결박해 천제 단으로 나아가 하늘이 정죄해 줄 것을 자청했는데 이러한 속죄행위를 계불 의식이라 한다. 흔히 ‘개뿔도 없다’라는 말은 뿔 없는 짐승인 개(犬)의 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황궁 씨의 계불 의식에서 유래 된 말이다.

최영 장군은 1376년에는 연산의 개태사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하였다고도 하는데 최영장군까지 나선 것을 보면 결국은 이러한 대규모사찰도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대전을 향해 진군 중인 왜군에 의해 개태사가 불태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여립이 여기를 중심으로 한 모반이 있었다고 하여 조선왕조에서 의도적으로 더욱 폐사 화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신도 안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조선왕조는 이곳 계룡산일대를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 진다. 대한제국 말까지 이 신도 안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못했다.
 
누구든지 이곳에 들어와 득세하는 기미가 보이면 정감록을 꿈꾼다 하여 관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백성들이 들어와 살 수 없는 곳으로 대부분의 토지가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주변은 제약이 덜했지만 이곳에는 김장생, 송시열 등의 기호학파의 중심지로, 조선중기 이후 강경포구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파평 윤씨, 광산김씨 등의 쟁쟁한 문중들이 그 터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권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국초 이래로 “연산현(連山縣) 계룡산 개태사 터는 곧 후대에 정씨가 도읍할 곳이다.” “이 씨는 망하고 정 씨는 흥한다는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尊邑興)”이라는 참설에 과민 반응을 보여 왔던 조선왕조는 ‘정씨 외에’ 다른 성을 가진 집안이 계룡산일대를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하여 세도를 부렸어도 이를 용인해오는 정책을 써왔다.

‘삼발에 한번 똥 눈 개는 늘 눈 줄 안다’고 한번 죄를 진 사람은 언제나 의심받게 되니 그러다가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였으니 그 이름이 정여립(鄭汝立)이다.

조선왕조는 무엇이 두려워 정여립모반사건과 기축옥사를 만들어 정여립을 죽게 하고 진보적이고 유능한 인사들을 대부분 죽이거나 유배 보냈을까?

정여립모반사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 10월에 일어났고, 그때 죽거나 다친 자가 무려 1천여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나라의 인구가 500여만 명에 불과했다니 그래서 흔히 ‘기축옥사’를 ‘조선조의 광주사태’ 라고도 한다. 이 때에 호남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정여립을 두려워 한 것이 진정 무엇일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는 인민주권설, 능력에 따라 누구든 임금이 될 수 있다는 공화주의를 주창했으니 가히 혁명적인 사상 이론을 외쳤다. 어찌 보면 당시로서는 역성적인 사상가라고도 하겠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도 50여년 앞서 공화주의를 외쳤으니, 단재 신채호는 ‘그는 4백 년 전에 임금은 신하에 대하여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동양전래의 유교적학설인 군신강상설(君臣綱常說)을 타파하려고 했던 위대한 사상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주장과 움직임이 거대한 혁명으로 까지 가지 못해, 루소의 민약론에 영향 받아 거대한 파도처럼 장엄하게 전개된 프랑스혁명에 비할 수 없게 되었다고 단재 신채호선생은 말씀하시고 있는데 대단한 사상가였음은 틀림없다.

율곡 이이도 칭찬해 마지않을 정도로 당대의 천재로, 이이는 그의 학문과 인물됨을 사랑하여 기회 있을 때 마다 그를 요직에 천거하였고 당대의 최고의 엘리트들이 가는 홍문관의 수찬(정6품)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데 그는 이이가 죽자 집권파인 동인으로 변신하였고 이이를 비방하기에 이르게 되니 이에 선조가 “이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네가 지극히 따르더니 지금은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라고 질책하자 ”처음에는 신이 그들의 마음을 몰랐으나 이제야 깨달았으므로 절교하려는 것입니다”하면서 “신이 지금부터 다시는 천안(임금의 얼굴)을 뵐 수 없겠다”고 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선조를 쳐다보았다고 할 정도로 기개가 당당한 정여립이다.

더구나 양반과 상놈, 귀한 자와 천한 자를 구별하지 않아 그와 뜻을 같이 한 선비들은 물론 천민과 승려들이 많이 몰려들었으니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고,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고 외치면서, 전제군주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세상에 경천동지할 소리요. 당시의 유교의 가치관을 뿌리째 뒤엎을 만한 주장인지라 조선왕조에서는 섬뜩 함을 아니 느꼈겠는가.

더욱 왜란에 대비한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영향을 받아 대동계라는 무장단체를 만들고 정여립의 사상에 영향 받아 일부에서는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는 인계, 양반살육계(兩班殺戮契-다무력폭동단체)등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었으니 정권차원에서 불안을 아니 느낄 수가 있겠는가?

정여립이 일찍이 중 의연의 무리와 국내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폐사(廢寺)가 되어 있던 개태사의 벽에,

‘손이 되어 남쪽 지방 노닌 지 오래인데
 계룡산이 눈에 더욱 환 하여라
 무자 · 기축 년에 형통한 운수 열리거니
 태평 성세 이루는 것 무엇이 어려우랴’

라고 시를 썼는데, 그 시가 많이 전파하게 된다.

혁명의 시발점이 되는 표현이다.
이러한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을 조선왕조에서 가만히 놔두겠는가?

‘끽’이다

그곳도 계룡산아래 개태사에 알쏭달쏭한 시를 쓰고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그를 계룡산 정도령으로 보아 그 싹을 자르기 위하여 ‘애매한 두꺼비 떡돌에 치였다’고 무참한 살육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그의 집터며 선산, 그리고 사당 등은 모반 당시 숯불로 혈맥이 끊기고 파헤쳐졌으며 그와 인연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쑥대밭이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가 뜻을 못 펴보고 사라졌으니 안타깝다.
결국 개태사는 또 한 번의 사상가로 인하여 존립자체가 위협받게 되고 소멸될 위기에 이르게 된다.

개태사는 이래서 우리에게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된다.

절 안으로 발을 들여놓아보자.

여기에서 관람순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다오는 반시계방향으로 보는 것이 더 멋있고 이해하기가 좋다. 반시계방향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옛날로 가는 타임머신이 아닌가?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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