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6(법계사) 지리산
2005/11/03 23:53

[출처]http://blog.naver.com/1kangjd/80019066428

****이 글을 올리기 전에 먼저 밝히는 것은 아주 오래전에 발췌해둔 거라서(이렇게 올릴 생각은 거의 없었슴) 글쓴이를 제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송하다는 양해를 구하고 올립니다.****


6.*법계사*
천왕봉 병풍두른 하늘아래 불사
수난의 역사속 옛 위풍 간직
신라 불고문화 발상지 ... 일출 장관
독특양식 "3층탑"등 주변 명소 산재
등반객 쉼터․신자 불심공양 줄이어

법계사. 이 땅에 불고가가 전래된 이래 높은 곳에 세워진 사찰가운데 한 곳이다.
해발 1600m의 깍아지른 절벽위에 걸쳐 있다.
뒤로는 천왕봉이 장승처럼 버티고 있으며 운무가 사찰주변을 쉴새없이 넘나들어 이른바 하늘 아래 불사라고 부른다.
법계사는 지리산에 동이 트면 가장 먼저 찬란한 햇살을 맞이한다.
자연석 위에 반듯이 세워진 3층석탑으로 와 닿은 아침 햇살은 대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말해주는 듯 장관을 연출한다.
지리산에 신라시대 불교가 들어서게 된 의미는 법계사를 비롯한 수많은 지리산의 불사가 세워진 경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법계사는 신라 진흥왕 9년(548) 연기선사에 의해 세워졌다.
연기선사는 같은 해 법계사 동북쪽에 대원사를 세웠으며 4년 전인 진흥와 5년(544)에 구례 화엄사와 연곡사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기선사가 당시 지리산을 비롯한 경남 서북부지역에 불사를 세울때는 가야연맹국가의 종주국이던 김해의 가락국(금관가야)를 병합하고 영토를 지리산까지 확장한 시기였다.
따라서 신라는 이 시기에 들어와 지리산을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했을 뿐 아니라 불교문화 진흥의 근거지로 매우 중요시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섬진강을 경계로 백제와 대치상탱에 있으면서 남원의 여원재등지에서는 쉴새없이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반야봉 북쪽달궁에 황령정사란 큰 절을 세운데서도 엿볼 수 있다.
신라가 지리산에 불교를 들여놓기에 앞서 이미 가락국이 칠불사를 통해 불교를 전래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불교를 수용했던 신라는 굳이 한반도 불교의 첫 전래지인 칠불사를 성역시 하지는 않고 나름대로 불교문화를 지리산에 꽃피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인해 우리나라 불교의 첫 전래지인 칠불사의 존재는 역사의 뒤안길에 들어가게 됐고 우리나라 불교전래 역사조차 와전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처럼 지리산은 신라시대에 접어들어 불교문화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한 뒤 그 역할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신라사원으로 지리산 입산 2호로 기록되어 있는 법계사는 불교문화에 대한 의미도 깊지만 역사 이래로 한반도 수난의 역사와 더불어 곡절을 겪어 왔다.
한반도가 일본과의 숙명적 관계를 유지하며 오랜 역사를 보내왔듯 법계사도 마찬가지로 일본과의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어 왔던 것이다.
법계사 최초의 수난은 고려 우와 6년(1380) 9월에 왜구의 방화로 크게 불탄 것이다 남원의 황산전투에서 이성계장군에게 크게 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지리산으로 도망가면서 불태웠던 것이다.
그후 조선시대에 재건돼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돼왔으나 1908년 지리산이 항일 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 계속 항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두번째 화마에 휩싸이는 수난을 겪었다.
이와 함께 법계사는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계 되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 세번째의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이 그것이다.
역사의 아픔과 함께 수난을 감수하면서도 오늘에 이르기 까지 지리산과 더불어 우리와 호흡을 같이하는 법계사는 이같은 연유에선지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법계사가 망하면 일봉이 흥한다는 얘기가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선지 법계사는 세번에 걸친 수난에도 불구하고 복원돼 지금은 사찰 모습으 어엿하게 갖추고 있으며 끊임없는 신도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산을 아끼고 우리 전통을 계승하려는 우리 민중들의 작은 손길이 끊임없이 이어졌기에 오늘날의 법계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문헌에 나타나는 법계사는 더욱 흥미롭다.
진양지에는 법계사는 천왕봉 10리 길에 있다.
절에는 석불 3좌가 있는데 기도자가 끊임없었다.
산문 서쪽 가까운 곳에 최고운이 놀던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문창대다.
거기서 북쪽으로 5리 쯤에 솟아있는 돌봉우리를 세존봉이라 부른다 고 적고 있다.
이륙은 그의 유산기에서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천불암, 법계사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를 임했고 서쪽으로는 천왕봉을 등져서 매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암법주 굴이라 한다 고 적고 있다.
1489년 4월 22일 중산리에서 칼바위를 거쳐 천왕봉을 오르던 김일손은 그의 속 두류록에서는 철쭉꽃 하나를 꺾어서 머리에 꽂고 따라오는 일행에게도 말하여 꽂게 하고 갔다.
우람한 봉우리를 만났는데 세존암이다.
사다리가 있어 올라가니 천왕봉이 10리 정도로 보였다.
5리쯤 더 가니 법계사가 나왔다.
절에는 중 한사람 밖에 없고 나뭇잎이 널찍널찍하여 비로서 자라나고 산죽은 곱게곱게 바야흐로 피어나니 바로 저문 봄철이다.
잠깐 쉬고 곧 올라가니 돌이 있는데 배같기도 하고 문짝도 같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문헌에서 나오는 세존암은 지금의 망바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는데 세존암으로 적고 있어 특이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천불암과 암법주굴에 대한 견해다.
천불암 터는 법계사에서 220~30분 가량 오르면 길이 10여m, 높이 1.5m가량의 굴이 나오는데 비박하기에는 적지로 등산로 주변에 있다.
그러나 일부 산악인들은 이굴(천불암터)을 바로 암법주굴이라고 주장한다.
이곳 암법주굴은 법계사와 천왕봉 사이의 암자로 절이라기보다는 천연의 수도처였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암법주굴고 천불암이 문헌상 따로 표기되고 있음을 볼 때 천불암과 암법주굴은 엄연히 다른 곳에 있음이 명백하다 하겠다.
하지만 암법주굴에 대한 명확한 지점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어 아쉽다.
법계사는 이렇듯 선조들의 기행문등에서도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법계사에는 또한 어사 박문수에 얽힌 설화도 갖고 있다.
박문수 어머니가 법계사에서 주목껍질을 벗겨서 즙을 짜서 밥을 지어 먹고 즙으로 목욕을 하면서 천일기도를 올렸는데 정성이 지극해 부처의 어머니인 문수보살이 아들을 하나 주겠다 해 자식을 얻어키운 아들이 바로 박문수라고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문수란 이름도 문수보살을 의미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법계사는 고려 말 왜구에 의해 불탄 뒤 조선조 벽계선사에 의해 재건돼 벽계사로 한때 부르기도 했다.
법계사 산문에 들어서면 큰 바위위에 우뚝 선 3층 석탑이 먼저 눈길을 끈다.
여느 석탑과는 달리 거대한 자연석을 기단으로해 그 가운데 3단의 괴임을 만들고 탑을 세운 특이한 양식이다.
보물 473호로 지정돼 있는데 고려초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공 석탑으로보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자연이 빚어낸 돌탑으로 여겨진다.
석탑과 석탑을 받치는 바위는 이끼로 뒤덮여 마치 태초부터 함께 빚어진 것처럼 보인다.
바위 높이 3.6m, 탑 높이 2.5m의 비교적 크지 않고 간결한 탑이지만 풍기는 인상은 신비스럽고 강력하기까지 하다.
삼층석탑 이외에는 다른 사찰의 그것들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으나 산신각과 칠성각이 특이하다.
이는 역사 이래로 우리 민중이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토속신앙의 한 흔적 때문으로 보인다.
신라 불교문화의 발상지며 선조들의 기행문 중의 한 쉼터로 기록되고 있으면서 곡절의 역사를 겪어왔던 법계사는 근년에 들어서는 천왕봉을 찾는 등반객들의 쉼터로 천왕봉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명소로 변했다.
중산리에서 6km로 천왕봉에서 3분의 2지점에 있는 지리적 여건 탓이다.
지금은 절 바로 아래 로터리 산장이 있어 갈길 바쁜 등반객들에겐 스쳐지나가는 곳이지만 그래도 대다수 등반객들은 꼭 법계사를 찾아보고 천왕봉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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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법계사 사진볼수있는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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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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