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골 앞에서 인내강을 約十里 程度 거슬러 올라가면 용바위(할미바위)가 있다. 선생이 일찍이 연담선생을 여의고 蘇持平에게 다닐 때 이 바위를 사랑하여 자주 노니며 풍월을 읊조리고 幽情을 □□하던 곳이다. 물이 흘러 주야를 두지 않음은 孔夫子의 일찍이 歎息한 바이요, 물과 달의 逝往不復하여 盈虛消長함은 蘇東坡의 못내 嗟歎한 바이어니와, 선생이 이곳에서 우주의 신비를 느끼며 日月의 變動을 馳想할 때 風雲變態中에 天地와 더불어 出入하고 日月星辰과 더불어 氣影하며 八風과 더불어 風動하여 宇宙와 渾然一體가 되니, 不知不識中에 五音聲이 터져 나와 手舞足蹈를 不禁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조석으로 이곳에 往還하여 어떤 때는 終日終夜 歌舞하다가 새벽녘에야 갓에 서리를 허옇게 싣고 道袍자락이 찢어진 채 돌아오곤 하였다. 집안사람이나 洞里 사람들은 선생이 물가에서 도깨비에 홀려서 미친 줄 알고 玉樞經을 읽은 일도 있다 한다. 그러나 선생은 날이 갈수록 樂在其中 不知老之將至의 지경에 이르르니 남이 미쳤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굳이 辨明도 하지 않고 오로지 그 길을 邁進하여 드디어 天地無形之景을 能히 洞觀하게 되었으니 그 當時의 心境을 後日에 「六十平生狂一夫는 自笑人笑恒多笑라. 笑中에 有笑하니 笑何笑오. 能笑其笑하고 笑而歌하노라 」고 읊었던 것이다.

선생은 宮商角徵羽의 五音聲을 차례로「음아어이우」와 같이 整然하고 分明하게 불렀으나 詠에서 歌로 들어가 興이 滔滔함에 따라 자진 가락으로 나올 때는 흔히 五音中에서 宮聲과 商聲만을 내어 「음·아」를 反復連發하기도 하였으므로 이웃 사람들은 선생을 「음아生員」이라고도 別號하였다 한다.

한 번은 선생의 姑從弟인 權鍾夏가 찾아와서 선생에게 노래 들려주기를 請하므로 선생이 耳目의 번거러움을 避하여 당골 뒷산 으슥한 숲속으로 가서 淸雅한 音聲으로 五音을 發하고 아울러 그 曲調에 맞추어 춤을 추니 그 律呂의 整然함과 그 節調의 婉轉함이 마치 仙人이 玉笛을 戯弄하는듯 하고 白鶴이 空中에서 翻舞하는듯 하여 權이 한번 보고 恍惚한 가운데 크게 감동하여 노래를「詠歌」라 하고 춤을「舞蹈」라 하여, 「이 것은 古人이 詠歌로 心性을 기르고 舞蹈로 血脈을 열어서 消融(사□渣? 氵+査 옥편에서 물이름 사 확인(氵+査) 글자 못 구함)滓하고 蕩滌邪穢하였으나 中古以來 讀書學禮와 詞章之學으로 因하여 全廢하였던 것을 朱子가 小學題辭에서 勸獎하였을 뿐, 爾來 施行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兄님이 復活시키니 ‘先生’으로 모실 수 밖에 없다」하여 그날로 執贄入門하여 號를 一淸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一夫先生의 노래와 춤을 「詠歌舞蹈」라고 命名한 이는 바로 權一淸이며, 一淸은 그後 詠歌舞蹈로 因하여 東學黨調査次 地方을 巡廻하던 官員에게 異端之學으로 指目되어 空然한 嫌疑로 公州監營에서 고초를 받았으나, 先生이 親히 公州까지 自現하여 그 異端이 아님을 解明하고, 아울러 性理論을 展開하였던 바, 當時의 儒林文士와 討議한 結果 至理가 있다하여 監司가 그 事實을 들어 上□하여 無事白放된 일도 있다.

어쨌든 선생은 고요한 인내江邊의 寒村 당골의 一角에서 上古以來 中斷되었던 詠歌舞蹈를 復活시키고 文王以後 三千年에 끊어지려는 孔夫子의 道學을 다시 이어 第三易인 后天易을 宣布하여 萬古의 靜寂을 깨뜨리니, 先生이 일으킨 인내江의 波紋은 漸次 汪洋히 흘러 太平洋과 大西洋을 건너 온 世界에 메아리침이 可謂 東漸西被에 一波纔動萬波隨와 같이 될 것은 거의 疑心할 餘地가 없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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