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조가 권중화(權仲和)에게 수도 자리(安胎地)를 구한바 권중화는 현재의 금산군 진산면을 천거하고 별도로 계룡산 도읍 도를 헌상하게 된다.

   
 
  ▲ 신도내 주초석 뒤로 보이는 낮은 산이 장구산이다.  
 
태조는 개성에서 수 백리를 달려와 비행장 옆 해군본부사령실 부근에 있는 장구 산 중봉에 올라 너른 뜰을 살펴본다. 이 봉우리가 계룡산의 여의주로 이태조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위치시키려했던 구릉으로 인경 봉으로도 불리는데 신도안의 중심 한복판에 있는 장구 산 중봉이다.

5일간 이곳을 답사한 후 크게 만족하여 1393년 3월 드디어 새 수도 건설의 대단원의 막이 오르게 된다.
이 너른 뜰, 신도로 구획된 안쪽이 지금의 용동리, 부남리, 석계리, 정장리로 신도안(新都內)이라 호칭한다.

전설에 의하면 계룡산에 제자봉(帝字峰)이 있고, 그 아래를 예로부터 제도(帝都)라고 불렀는데, 신라 말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와서 보고는 중국에 황제가 있거늘 이 소국에 제도가 있을 수 있느냐? 이를 마땅히 삭제하여야 한다 하므로 부득이 제자의 위아래 양쪽 획을 빼고 신(辛)자만을 남겨 신도(辛都)라 일컬어 왔다.

조선개국 초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번영의 기세를 올리고자 시경의 근기명(斤其明)의 근(斤)자를 따다 신(辛)자에 붙여 신도(新都)라 불렀다고 한다.

신도 안 이 명칭에 대하여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다.
신도 안, 부르기는 신도 안으로 불리어지고 한문으로는 신도 내(新都內)로 쓴다.
이러한 지명은 일면 이 일대를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는 ‘신도의 안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도 안을 표기 할 때 신도 내(新都內)라고 한다.

그렇다면 안팎(內外)이 있다는 개념인데 여기 안(內)에 대하여 그 밖(外)에 위치 한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두마(豆磨)이다.
두마는 팥을 많이 가는 곳이라 하여 지금도 팥거리 축제가 행해지고 있다.

   
 
  ▲ 팥거리 축제 모습  
 
이것이 과연 옳게 사용되는 지명일까?

두마(豆磨)를 표기대로 뜻으로 해석한다면 팥갈이가 되지만 이곳에는 팥 밭이 많지 않고 팥이 다량으로 생산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지명은 팥과는 무관한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 안(內)에 대하여 그 밖(外)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안팎(內外)의 개념에서 팎거리란 지명이 생성되게 된 것이고 팎거리라 부르는 고유 지명을 한자로 옮겨서 차자 표기한 것이 두마(豆磨)이다.
훈몽자회 등에 팥두(豆), 갈마(磨)로 기록되어 있으니 옛날에는 두(豆)의 훈음이 팥이며 마(磨)의 훈음이 갈이다.

따라서 ‘신도안의 밖 거리’란 뜻으로 팎거리를 훈음차 표기한 한자 지명이 두마(豆磨)일 뿐이다.
두마는 신도안의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신도 안 밖의 거리를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팥이라는 곡식은 원래 사악한 잡신이 범접하지 못하는데 쓰이는 재료이다.
그래서 팥죽이 만들어 진 것이고 새로 이사 가는 집의 벽면에 팥죽을 뿌리는 벽사관습이 전래되어 왔다.
그리고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동지에는 팥죽을 먹어 사악한 귀신의 접근을 막는 척사신앙이 강한 곡식이다.

그러면 그전에 신도안 형성에 주축이 된 분들은 누구인가?

구한말 외세의 간섭과 각종 민란 그리고 갑오농민운동으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난리를 피하고 새 세상에서 벼슬도 할수 있다는 희망으로 신도안으로 이주현상이 본격화되고 이주민 중에는 수백 년 동안 차별을 받아온 서북출신들이 많았는바 ‘정감록’이 처음 출현한 곳도 서북지역이다.
 
신도 안에 정신적인 뿌리를 둔 동학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분오열하는 과정에 탈 정치노선을 주장한 시천교가 탄생하게 된다.
내부에서 친일파와 절연한 상제교의 동학의 3대교주인 김연국(金演局)이 황해도와 평안도의 신도 3천명을 이끌고 1924. 2. 13.계룡산에 이주해오면서 신도안형성이 시작되게 된다.

이 당시 신도 안 인구가 7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도 안에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찼고, 주변마을로 이주민이 몰려들게 된다.
 
이들이 내건 탈정치화는 계룡산에 이주하는 모든 종교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이로부터 계룡산과 신도안의 혁명적 상징성이 사라지게 된다.
천황봉에는 이들이 설치한 천단(天壇)과 산제단(山祭壇)비석이 잘 보존되고 있다.

한때 이곳이 인기가 있는 참배지로 일부 군인들에게 회자된 일화가 있다.

육군본부참모차장 출신인 신모중장이 이곳에 기도한 후 사성장군인 대장에 진급하였기 때문에 일명 ‘장군바위’로 통하는데 장군진급을 앞둔 고참대령 중 상당수가 이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장군으로 진급하려면 천황봉산제단에 먼저 인사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고 한다.
 
어쨌거나 태조는 옛 귀족이 건재 하는 개성이 싫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싶어 했던 것이다.
무척이나 신도 안에서 새로운 나라를 열기를 고대했고, 1년여 기간 동안 실제로 신도 안을 수도로 선포하여 왕궁과 도시공사를 하게 되었다.
 
여기를 떠나면서도 그 아쉬움이 남아 터를 누르는 작업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아쉬운 터전을 버리게 된 실제 이유는 무엇일까?

신도안천도가 무산된 것은 계룡산신의 반대라는 천명에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 이유 일 수 있지만 당시의 기득권세력의 반대에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에서 보이는 근거가 아닐까?

정도전과 하륜은 당시의 권문세가의 대표 수장들이다.
‘쇠고집 닭고집’ 같이 당시에 기득권을 움켜지고 있는 세도가들이 적극 천도를 반대했으니 집권초기 지지 세력이 약한 태조 이성계는 이것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고 보여 진다.

신도 안 천도를 결행하다 보니 개경에서 신도 안까지 이주해오는 관료들의 주거 문제도 큰 문제였을 것이다. 대대로 살아오던 개경 집을 몇 푼의 돈을 받고 떠나왔으니 억울하다는 것이  이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솔개 어물전 들 듯’ 개경에 애착을 가진 관료들이 그 곳을 선뜻 떠나지 못하는 심정이었으니 그냥 두면 불만이 폭발할 것이라 예견한 태조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 진다.

어찌 최근에 행정수도 천도와 그리 비슷한지, 서울사람들의 반대에 결국 신도 안 일대를 최적지로 지목하면서도 어정쩡하게 공주 장기일대로 후퇴해서 그것도 어찌 될 것인지? 

당시의 정도전과 하륜 등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도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고 하면서 천도를 반대 했다.

이런 주장을 보면, 당시의 학자들의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새 왕조의 옹립에 집착했고 멸망했지만 어엿한 개성일대에 막강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세도가들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가까운 한양을 나두고 뱃길도 없는 먼 남쪽에 있는 신도 안까지 오려고 했을까

당연이 ‘못 간다.’ 이 말이 나왔을 것이다.
하물며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할 때도 토지로 인하여 많은 문제가 노출되었으니 이주해오는 관료들의 주거 문제였다고 한다.

윤사영의 상소문에는 당시 관리들의 주거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데,

“군자감승 박희종이 세자의 힘을 빌려 부당하게 집터를 분양받고자 했으니 파직하소서. 세자의 좌정 자는 세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박희종이 세자의 좌정자로 있을 때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세자를 이용하려 들었고 아래로는 사풍을 더럽혔으니 법대로 죄를 물으소서.”

이렇듯이 이주 시 관리들의 주거문제로 시끌했으니 오늘날에도 똑같지 않은가, 예나 저나 권력과 부를 가진 집단의 반대 움직임에는 어찌할 수 없는 것 같다.
결국 풍수도 아닌 것을 가지고 풍수 핑계만 되는 모습이 지금에 봐도 한심하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신도안천도가 그것이 조선 초에만 있는 주장이던가, 조선 내내 신도  안에 대한 천도주장들이 많았으니 조선말에 흥선대원군이 도참서와 정감록에 계룡산은 정씨도읍지라는 전해오는 말을 듣고,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해서 정감록을 압수해 불태우고 이 지역의 출입을 금지하게 된다.
 
정감록은 이성계와 정몽주의 실제 조상이 아닌 상상속의 조상인 이심, 이연 형제와 정감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돼 있는 대담집으로, 실제로 정씨와 이씨가 문답한 것으로 ‘정이문답(鄭李問答)’이라 하는 것이 맞을 듯도 한데 이런 명칭은 매우 드문 경우이고 정감이 더 호감이 가는 측면이 있어 그랬는지, 대개는 ‘정감의 기록’이란 뜻에서 ‘정감록’이라 불렀다.

정도령이란 칭호는 정감록에는 안 보이는데 민중들이 암암리에 진인의 출현을 기대하는 분위기속에서 이씨조선에 반대하거나 제거된 정몽주, 정도전, 정여립, 정희량 등 조선왕조에 반대하는 선봉이었으므로 새 나라는 반드시 정씨가 왕이 돼야 한다는 것이 민중의 주장이었고 그 진인이 정씨라는 예언이 조선후반기에 등장한 것 같다.

신도 안에 이런 전설도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신도 안은 우리나라 명산으로 손꼽히는 계룡산 아래 있는데, 옛날부터 이곳에 정씨가 도읍을 정하고 800년 권세를 누린다는 말이 끊임없이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그런데  칼날 같은 바위가 서있는 계룡산 갑사 쪽과 풍경이 좋은 동학사 쪽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신도 안 쪽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그때 마침  호탕하고 활 잘 쏘는 사냥꾼이 이곳을 지나다가, 조용히 살고 싶어 신도 안에 머물러 사냥을 하며 살았다.

그는 짐승을 잡아먹고 가죽은 웅진에 가서 팔아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갔는데 그날따라 노루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이 언덕 저 고개를 누비다가 노루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 뒤를 쫓는데, 노루는 그를 놀리듯 조금 도망치다 뒤돌아보고 화살을 당기려고 하면 다시 도망치곤 했다.

기어코 노루를 잡아야겠다는 결심으로, 계속 뒤를 따라 산비탈을 내려 들을 달리고 다시 언덕에 올랐다.
노루는 풀을 뜯어먹으며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화가 난 그는 마구잡이로 화살을 당겨 노루를 향해 날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노루는 틀림없이 달아나버렸는데 이상하게도 크게 울부짖는 말울음소리가 언덕 양편에서 들려왔다. 호탕한 그도 무서운 생각이 들어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자리에 눕자 곧 꿈을 꾸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고 먹구름이 쌓이더니 그 먹구름 사이로 백발노인이 노기를 띤 모습으로 나타나  "그래 너의 성이 정씨가 아니더냐."  정씨가 말을 쏘아 죽이다니. 그것도 두필의 말이나? 너는 큰 죄를 지었으니 내일 밤 안으로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이다“하고는 먹구름에 싸여 사라졌다.
생각할수록 괴이하게 여긴 그는 산신령의 노여움을 샀으니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이튿날 살던 집을 불태우고 멀리 떠나버렸다.

그 후로 이곳 신도 안에는 각처에서 사람이 몰려와 살게 되고, 부지중 주민들의 입에서는 “이곳 신도 안은 정씨가 맨 먼저 살면서 터를 닦았으니 정씨가 주인이다. 그러니 정씨 가문에서 왕이 나와 도읍을 정 한다”라는 말이 퍼졌다.

그러나 정씨가 이미 말을 쏘아 죽였으니 왕이 될 수 없다는 이설(異說)도 있다.
생각건대 이 전설이 원인이 되어 지금도 계룡산 신도 안에 정도령이 나와 도읍을 정하고 권세를 누린다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화살에 맞아 죽은 말의 울부짖음과 함께 신도 안 도읍이 물 건너 가 버렸는지, 아니면 왕 씨의 개성, 이 씨의 한양, 그 뒤를 이어 과연 정 씨의 계룡이 될는지 미지수다.    
(김석진저 ‘스승의길 주역의길 중에서)


이렇듯이 신도 안은 민중들입에서 오르내렸으니 조정대신들 사이에서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으니 19세기 말 권좌에 오른 대원군은 계룡산으로 천도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고 그는 천도를 통해서라도 이미 달아난 민심을 조선왕조에 매어두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은밀히 그 전설을 꺾고자 계룡산 하록에 도읍을 옮기려고 터를 닦는데 여기저기서 석추가 나와 ‘이곳은 정씨의 천년지택이니 이곳을 범하는  는 큰 화를 면지 못하리라’라는 유언비어에도 계속공사를 추진하다가 결국 재정난으로 공사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말이라는 것이 묘해서 한시대가 끝마치려면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니 쌀 이름도 백제 때는 백미, 신라 때에는 나(羅)락, 고려 때는 왕미(王米), 이조는 이(李)쌀, 입쌀이고, 계룡산 정씨가 도읍하면 정미, 지금은 정미소라고 하는데 이것이 끝나면 가야산 조 씨의 좁쌀이라고 하는데.....

최근에 와서 박정희대통령을 거쳐 노무현대통령시대에 다시 민족의 웅비를 깨울 수 있는 터라고 여기고 준비해 왔다. 그러함에도 지금도 그렇듯 없어진 단지 일국의 왕의 터만 매달리고 집착하는 기득권세력과 이에 동조하는 언론이 많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내 것이 손해를 본다는 생각에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속성이니 어찌하겠는가?

‘뭇 사람들의 의심은 괴변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하였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변화도 하지 못하면서 꽃과 열매를 같이 취하려 하면서 어물 쩡 된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시대에 또 다른 후회를 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무엇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일인지,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는 민족은 결코 발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와중에도 신도 안 인근에 다시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 건설이 7월20일 첫 삽을 뜨고 2030년까지 24년간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수도권의 반대, 위헌 판결 등 수많은 난항을 겪은 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로 5년 여 만에 실현되는 것이다. 2005년 제정된 행정도시 특별법에 따라 추진돼 온 행정도시는 오는 2030년까지 세계 초일류 인프라를 갖춘 명품도시로 건설된다.

특히 행정도시에 2010년 하반기 중 첫 마을 입주가 시작된 후 중앙인사위원회를 포함한 대통령 직속기관 4개, 국무조정실 등 국무총리 직속기관 12개, 재정경제부, 교육인적자원부, 건설교통부, 산업자원부 등 중앙행정기관 33개 등 총 49개 기관과 1만 여 명에 달하는 소속 공무원들까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순차적으로 이전하면서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행정중심복합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비록 기득권세력의 반발로 많은 축소가 되었지만 새로운 천도계획을 담은 엄청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부디 조선시대에 ‘1년 수도’의 미완성의 행정도시가 되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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