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1250년 원나라 몽골군에 투항하여 그 대가로 두만강유역의 현재 연길일대에 5천호 정도의 다루가치가 되어 옷치긴가(家) 고려계 몽골의 군벌가문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닦게 된다. 옷치긴가 고려계 몽골군의 임무중 하나는 조국 고려침공을 도우며 압록강과 원산을 오가면서 원나라를 위해 수도 개경의 고려왕조를 감시하는 극악한 배역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몽골세계제국의 정치적 현지경영법을 체득하고 원이나 명의 중앙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상대적인 독립성을 확보하여 가문의 지배적인 위상을 높이게 된다.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춘은 보안테무르, 큰아버지에게는 타스부카, 아버지 이자춘에게는 울루스부카라는 몽골이름이 있다. 이로 미루어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하기 전 34년 전에 태어난 이성계에게도 몽골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동북아 정세에 밝았고 명과의 전투, 티무르와의 전투 등 일련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고 그래서 위화도 회군도 결행할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정몽주가 단심가를 불러 목숨을 걸고 이성계 일당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원종이후 고려왕조의 역사적 정통성이었으니 결국 원에 충성하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무학 대사는 그 당시 어디에 있었을까? 단지 무학의 스승을 통해서 인 것 같은데 역사적 기록과 전래되는 이야기 속에서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무학은 1353년 공민왕 때에 원나라 연도로 간다. 중국 원나라 시절을 보내시다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오셔서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천보산 자리가 마치 스님이 머리를 깎았던 인도 나라난타 절 주변의 나옹스님은 연경에 도착하여 절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화상을 만나 크게 깨달을 배우게 되고, 1376 년(우왕 2)회암사(輦輹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은 그를 불러 수좌로 삼고자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여주에 가면 신륵사가 있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와 관련된 인연이 느껴지는 일화가 있다. 당시 원나라에는 있던 나옹대사가 무학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한 산소 자리를 가리키며 “그 위 터는 왕휘지 지이고, 아래쪽은 장상이 날 자리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나옹대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스승이 말하지 않은 것을 굳이 이성계에게 말하여 주었다는 것은 이미 깊은 인연 관계가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일화이다. 그리고 무학 대사와 이성계가 고려 땅에서 만나는 일화도 있으니, 서산대사가 쓰신 ‘설봉산 석왕사기’나오는 글이다. 고려 우왕 10년(1384)에 무학 대사가 함경도 설봉산 석왕사 토굴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 무관으로 있던 이성계는 이상한 꿈을 꾸고 꿈이 하도 신기해 설봉산에 해몽하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이성계를 보더니 “난 해몽 못하겠소, 다른데 찾아가시오. 그분이 무학 대사인데, 그래서 이성계가 찾아가 밖에서 절만하고 있는데 거들 떠 보지도 않는다? 이성계가 “정 이렇게 냉대하면 목을 치겠노라“하니까 무학 대사가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 해몽하러 왔다니까 ”해몽은 이 앞에 해몽하는 할머니가 따로 있잖소?“ 이성계가 그 할머니에게 갔더니 자기는 못하겠다고 이리가라고 합디다, 해서 왔다고 하니, 무학 대사가 “그러면 꿈 이야기나 해보시오” 그래서 꿈 이야기를 하는데 ,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석가래 만 3개 달랑 지고 나왔소.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된 뒤 경기ㆍ황해ㆍ평안 감사를 시켜 무학 대사를 찾도록 한다. 황해감사가 평안감사하고 의논해서 모시고 가자는데 말을 안 들어 이성계가 직접 와서 모시고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태조와 대면하게 되고 왕사(王師)가 되었다. 이정도 면 태조가 무학을 배려하는 것도 보통이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 태조가 그러나 1402년(태종2) 다시 함경도로 가 돌아오지 않았을 함흥차사(咸興差使)시절에 무학 대사가 가서야 겨우 서울로 오게 할 정도로 우정이 깊은 사이였던 것이다. 무학이 금강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태종은 그의 사리를 회암사로 모시도록 지시를 했다. 살면서 변하지 않은 이러한 진정한 우정으로 두 사람은 새 시대를 열었고, 그러한 점에서 이들의 우정은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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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그는 우정도 충성심 대단한 인물이다
그에 충성심은 명나라을 도와 오늘날 중국이 저거대한 대국이 되였다 그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안고 명나라을 쳐서 큰공을 세우고 정권도 잡았으면 누가 이성계을 민족에 반역자라 하겠는가
이성계 그는 조선에 왕으로서 붊근도포을 입지 몿했다
그는 명나라왕에게 충성심이 대단했다
우리는 이런 민족에 국운을 꺽은 민족반역자을 대왕이라하고 용에다 비유하고 좋은 말은 다같다 그에게 치장했다
왜그는 명나라을 쳐들어가지몿하고 구테타을 했을까
작은나라가 큰나라을 치는건 예의에 벗어나는일이라는 어느선생의 답변이 참맘에 든다
이순신이 적은 배와 적은 군사로 36번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리고 고려 고구려 많은장수들은 적보다 훨씬 적은 병사들로 수십배나 많은 적을 상대해서 그들을 물리쳤다
이런 장수들은 영웅에 들지몿하고 용도 몿되고 이적행위을한 이성계을 우리은 영웅이라고 하고 용에다 비유하고 있다
저 고구려에 광개토대왕님은 지렁이고 이성계는 용이야
이성계랑 무학대사 관계를 잘 모르겟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