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한동석선생과 증산도의 관계를 묻는 분이 계십니다.

'결론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단지 증산도에서 우주변화의원리 책을 활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위 말은 증산도에서 우주변화의원리를 강의하시는 윤창렬교수님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아래 글 참조)

우주변화원리는 한동석선생이 돌아가시기 1년 전인 1966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여기에 무슨 사심이 있었겠습니까. 분명히 우주원리와 동양학의 발전을 위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쓰인 책이지, 결코 증산도의 포교를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책의 내용으로 보면 알 수 있지만, 불교 교리를 좀 더 연구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돌아가실 때는 천주교 루까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 계룡산 향적산방에 기거하시면서, 정신을 집중하던 기록과 발자취가 곳곳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위 향적산방은 본래 일부선생이 제자들에게 정역을 가르치던 곳이었습니다. 제1기, 제2기를 거쳐 현재까지 동양학을 연구하는 학문의 전당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당연히 증산도와는 무관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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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우주변화의 원리’ 알기 쉽게 풀었어요

엄상현 기자 주간동아 3월 11일 626호 95p

한의사이자 동양철학자인 한동석이 1966년 펴낸 ‘우주변화의 원리’는 동양철학자와 한의학도들의 필독서다. 하지만 우주변화의 원리를 음양오행설로 풀어 설명한 이 책은 내용이 너무 난해해 끝까지 읽고 이해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이 책을 25년간 연구하고 대중화에 나선 사람이 있다. 대전대 한의대 윤창열 교수(51·한의학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대학에서 의역학과 의철학을 가르치는 윤 교수는 2006년 3월부터 1년간 63회분 방송용 강좌의 녹화를 마쳤다. 이를 지난해 3월 개국한 케이블TV 상생방송(STB)이 방송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 것.

윤 교수는 “읽고 싶지만 어려워서 엄두가 나지 않던 책을 알기 쉽게 설명해줘서 좋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1976년 경희대 한의학과에 입학해 이 책을 처음 접한 윤 교수 역시 한 번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82년 증산도에 입문해 안운산 종도사와 안경전 종정에게 설명을 듣고 비로소 깨우치기 시작했다는 것. 저자 한동석은 물론 ‘우주변화의 원리’도 증산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윤 교수는 다만 “증산도는 한동석 선생이 집대성한 우주변화의 원리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윤 교수에 따르면 음양오행설은 우주의 절대적 진리다. 철학자마다 다른 철학체계를 추구하는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철학은 음양오행이라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8괘, 자연수가 사용된다. “음양오행은 이런 숫자를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한다”는 것이 윤 교수의 주장이다.

윤 교수는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고 있다”면서 “‘환단고기’(한국 상고사를 다룬 책)를 100회 정도로 나눠 상생방송 등을 통해 강독한 뒤 많은 사람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민족정신을 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끝)

주간동아 3월 11일 626호 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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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역(KTX)에서 무상사(국사봉입구)까지 택시로 20분(1만원이내)
호남고속도로 계룡IC에서 무상사까지 승용차로 25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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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사(아래 좌측 나무 사이 건물) 위 3거리에서 좌측으로 무상사를 끼고 20분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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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산방 등반하면서 갈림길 2곳에서 아래 팻말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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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handongseok.org/secretstory.htm

臨床秘話 1966년 8월호

韓東錫

  人間의 生理現象이 病理的 變化를 일으킬 때처럼 그것을 측량하기 어려운 때는 없다. 가령 患者가 어떠한 身上의 呼訴를 할 때 醫師는 당연히 그 속에 秘藏되어 있는 病魔의 秘密을 探索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事實上 難中之難事다. 왜냐하면 患者의 陳述하는 바가 患者 自身이 느끼고 있는 感覺的 現象인 것 뿐이기 때문이다. 人間의 感覺은 언제나 그 뒤에 伏魔殿과도 같은 幽玄世界를 背景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人間의 感覺 즉 感性的 作用은 一種의 幻像에 不過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해 볼 때 感性的인 人間인 患者의 陳述이나 呼訴한 것을 따지고 보면 一種의 幻像이 自己를 演出하고 있는데 不過한 것이다.

  그러므로 醫師가 患者의 病理的 秘密과 問答한다는 것은 결코 容易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人間의 病理的 變化는 이러한 程度인 것뿐만 아니라 때로는 突然的인 異變을 나타내는 때가 있다. 좀더 仔細히 말하면 갑자기 子宮에서 물(水)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든지 或은 밤(夜)사이에 눈(眼)이 튀어나와서 마치 개구리(蛙)의 눈처럼 되었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것은 變化 中에서도 特殊한 變化이며 또한 突然的인 異變인 것이다.

  그런즉 醫師가 萬一 이러한 境遇를 當하게 되면 당황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醫師는 이러한 경우일수록 그 態度는 沈着하여야 하며 그 머리는 慧智的이어야 하며 그 思索은 哲學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醫師가 그러한 姿勢와 準備를 갖춤으로써 만일 위와 같은 秘密을 探索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이 바로 「臨床秘話」다.

  筆者는 이러한 境地에 臨하고 있는 學界에나 自身이 經驗한 바와 硏究한 바에 對하여 理論的 根據를 紹介함으로써 學術的 批判을 받으려고 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 글은 當分間 連載할 計劃인 즉 그 批判은 끝맺은 後에 있기를 부탁한다.

(一) 子宮出水

  1966年 6月 13日 31歲 가량의 靑年이 來院하였다. 그는 自己 婦人이 産後 2週日인데 子宮에서 물(水)이 터져 나와서 只今 ×××病院에 入院하고 있는 中이니 往診하여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唐惶하였다. 大抵 子宮에서 물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그 물 나오는 까닭을 都是 알 수 없기 때문이다. 或是 解産할 때에 醫師의 不注意로 因하여 膀胱을 破裂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症狀을 물어보았으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可能하면 그 往診을 避하려고 하였지만 그것도 不可能하다. 왜냐하면 그와 이야기하고 있던 바로 그때에 筆者의 親友 R氏로부터 그 患者를 잘 보아달라는 부탁의 電話가 걸려 왔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없이 그와 같이 ×××病院으로 떠났다. 나의 머리는 車 中에서도 그 生覺으로 가득했다.

  病院에 들어서서 患者를 診察하여 본즉 産後 2週日의 産母로서는 至極히 건강하다. 食事도 잘하고 大小便에도 異常이 없고 「컨디션」도 좋다. 다만 脈이 다소간 浮大하고 있을 뿐이다. 姓名은 禹希貞 年歲는 29歲 四象은 太陰人이다.

  그런데 子宮에서 물이 나오는 量을 물은즉 婦人들이 月經帶로 쓰는 綿布를 2枚씩 겹으로 깔고 있는데 30分間이면 물이 흐를 程度로 젖는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言質도 주지 못한 채 默默히 病院門을 나왔다. 患者의 男便되는 靑年도 따라 나섰다.

  집에 돌아온 나는 沈默에 사로잡혔다. 얼마동안 時間이 흐른 다음 나는 나의 머릿속에서 어떠한 閃光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때에 바로 婦人들의 月經血에 물(水)이 섞여서 血色에 淡色을 띠는 境遇를 聯想하기 始作하였던 것이다. 醫書는 이것을 「經色淡者 痰也」. 「經色帶淡者 有水混之也」. 「經色 淡白氣血俱虛也」라 하였은즉 只今 이 경우가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生覺하였던 것이다.

  좀더 仔細히 말하면 이 患者의 境遇는 産後 2週日인즉 孕胎 中에 消耗했던 衝任脈의 피(血)를 다시 再生産하여야만 할 重大한 契機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造血作用에 沒頭하여야 할 衝任이 그 機能에 故障이 생겨서 피를 생산하지 못하고 反對로 이것이 물(水)이 되어서 나오는 것이라고 判斷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判斷 뒤에는 반드시 推理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醫學所謂 「血化爲水」라는 것인데 要는 人體는 어떻게 하여서 피(血)가 될 것이 물(水)로 變化할까? 하는 것을 解決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거기에는 두 가지 境遇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體內에 濕氣가 鬱結됨으로써 熱을 蘊釀하게 되고 이와 같은 邪熱 즉 濕熱이 蓄積하게 되는 경우에 이것이 衝任의 造血機能을 痲痺시킬 때 子宮에는 물(水)이 고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子宮에는 攝血機能은 있지만 攝水機能은 없다. 그러므로 물(水)이 不斷히 排泄하게 마련인 것이다.

  "둘째"로는 衝任經에 寒氣가 鬱結하여서 그것이 오랫동안 係留하게 됨으로써 寒生熱하여서 子宮의 造血機能을 압박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 때에 또한 子宮의 造血作用은 血化爲水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바 邪熱이 造血作用을 妨害할 때에 그것이 어떻게 하여서 피(血)가 물(水)로 변하는가? 하는 問題를 解決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醫哲學의 原理로서 말한다면 至極히 簡單하게 解決된다.

  즉 「寅申相火의 造血作用이 辰戌水나 丑未土의 非正常的인 沈滯象態와 結付될 때에 人體의 피(血)는 반드시 물로 變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讀者 諸賢 中에는 이 文句에 對해서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에는 이와 같은 醫哲學의 原理인 陰陽五行의 原理를 硏磨하고 있는 數名의 同好者가 있다. 이분들은 이 文句를 보고 暫間 동안만 生覺하면 「그렇지」하고 快哉를 부를 것이다.

  勿論 筆者의 心境도 여기에서 이 原理를 解明하여놓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이것은 簡單한 時間이나 紙面으로써 解決될 問題가 아니므로 不得已 略하거니와 要는 不斷히 變化하는 人體는 恒常 이 原理 그대로 運動하고 있다는 事實에는 어김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人體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病變作用에서 實例를 들어서 硏究해보면 一目瞭然하게 理解될 수 있기 때문에 다음은 그러한 實例를 한두 개 들어서 硏究해보기로 하겠다.

  가령 우리가 항상 경험하고 있는 腫瘡에서 이것을 살펴보면 瘡이 發할 때에 그것을 詳察하여 보면 첫번에는 그 部位에 加熱되어서 炎證이 생기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즉 이것이 바로 前記한 바의 邪熱이 凝結하고 있는 狀態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凝結한 炎證은 그 狀態를 永遠히 계속해 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結局은 이것이 潰決하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腫瘡의 終結點인데 그 때에 터지게 되는 膿化作用이 바로 或은 濕化爲水요 或은 寒化爲水하는 狀態인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여기에서 이른바 子宮水畜作用도 또한 이와 같은 腫瘡의 生成原理에서 엿볼 수가 넉넉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 좀더 가까운 데서 찾아보면 우리는 浮腫에서 이것을 엿볼 수가 있다.

  가령 극도로 수척했던 患者가 久病으로 因하여 水穀을 全혀 攝取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밤사이에 全身이 浮腫으로 變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는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물(水)이 大抵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것이 問題點이다. 萬一 患者가 水分을 많이 攝取하였다면 그것으로써 浮腫의 原因을 斷定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患者는 水穀을 全혀 攝取하지 못하였은즉 이것이 바로 血化爲水한 것이다.

  그런즉 이러한 部類의 病原因은 或은 痰(濕生熱 熱生痰) 때문에 惑은 寒(寒凝爲熱) 때문에 或은 氣血이 俱虛(氣血이 運行能力을 喪失하면 留而爲熱)하기 때문에 血化爲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바의 醫書의 「經色淡者 痰也」. 「經色이 帶淡者 有水混之也」. 「經色이 淡白者는 氣血이 俱虛也」라고 한 것은 上記한 바와 같은 原理에서 推愆한 것이 分明한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에 近來에 많이 發病하는 「子宮물혹」이나 水疝등도 이렇게 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아울러 느끼게 되었다.

  고요히 눈을 뜨고 窓밖을 바라보니 窓문에 쏴부치는 夕陽의 光線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患者의 男便되는 靑年은 아직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내가 「當身 婦人의 病은 治療할 수가 있습니다.」하는 말 한마디를 던졌던 바 靑年의 얼굴에서 歡喜의 紅潮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나의 머리 속에는 아직도 검은 구름이 자욱하다. 왜냐하면 내가 構想한 處方이 아직까지 患者 禹孃의 體質的인 特徵과 잘 符合하지 않기 때문이다. 좀더 仔細히 말하면 禹孃의 體質은 肝熱이 動하기 쉽기 때문에 肺가 影響을 받아서 高原水道之源이 枯渴하기 쉬운 體質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의 病現象이 子宮水畜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一般的인 患者의 경우와 同一하다고 할지라도 治療技術을 實際로 施行함에 있어서는 이것이 重大問題로 擡頭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머리에서는 完全無缺한 方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窮餘之一策으로 다음과 같은 處方을 그려놓았다.

  그렇다면 이 病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濕이 子宮에 鬱熱을 造成하거나 或은 寒이 鬱하여서 子宮에 鬱熱을 造成하던가 或은 氣血이 本虛하여서 그 循環作用이 活潑하지 못하기 때문에 드디어 鬱熱을 釀成하기에 이른다던가 하는 等等으로써 그 原因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 病을 除去하기 爲하여서는 于先 二陳의 힘을 빌어서 健脾燥濕하는 한편 氣血의 運行을 順調롭게 함으로써 正邪의 勝負之氣를 調和시키는 것을 急先務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먼저 이러한 措處를 해놓아야만 子宮鬱熱의 基盤을 除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욱 重要한 것은 人蔘과 白朮의 功이다. 왜 그런가 하면 二陳湯의 君藥인 半夏가 人蔘 白朮을 얻으면 上焦에서 浮散하려고 하는 元氣를 下焦로 下降시켜서 마치 사라지려는 불을 모아놓는 것과 같은 役割을 하기 때문이다.

  좀더 仔細히 말하면 半夏는 補脾燥濕할 뿐만 아니라 「下逆氣而 行腎水」하는 特性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이 무슨 말인고 하면 一切 上逆之氣를 모아서 腎인 生命의 本源點에 歸宿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本草에 半夏의 特性을 가르쳐서 「宣通陰陽而能眠」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這間의 消息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性能을 가진 半夏가 人蔘을 얻으면 人蔘의 肺中元氣(肺金속에 陽氣를 包藏함으로써 活力素를 만드는 것을 補肺作用이라고 한다)를 補하는 作用과 合勢하여서 耗散하려는 陽氣를 保護하면서 體內에 흩어져 있는 老廢物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白朮은 「利腰臍間血」하는 藥이다. 腰臍間에 있는 血을 利한다는 말은 腰臍間에 모이지 못하고 흩어지려는 血을 흩어지지 못하도록 묶어(束) 놓는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考察해보면 二陳湯에 人蔘 白朮을 加함으로써 이루어진 六君子湯은 다만 補氣去痰하는 藥이라고 漠然하게 생각하던 思考方式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一身의 元氣를 그 元氣의 出發點인 丹田(坎位)에 모아놓음으로써 保護의 實을 거두는 것과 함께 耗散하려는 피(血)까지도 元氣와 같이 血海에 歸宿시키는 處方이라는 具體的인 事實까지도 아울러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子宮水畜之證을 治療함에 있어서 또한 解決하여야 할 일은 水邪 때문에 耗散되어버린 氣血을 本院點에 모아놓고 保護하는 일부터 먼저 할 수밖에 道理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患者의 境遇는 피가 다 물로 化하여 버렸기 때문에 極度의 子宮貧血症을 나타내고 있은즉 當歸 川芎 등의 調血劑를 써서 血의 生成作用을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吾人은 여기에서 當歸 川芎이 어떻게 調血하는가 하는 것을 于先 살펴보아야 하겠다.

  當歸는 心肝脾의 統血藥이다. 統血이란 말은 피를 丹田에 歸宿시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藥名을 當歸라고 하였으니 피를 마땅히 돌아가야 할 곳인 丹田에 돌려보낸다는 말이다.

  그 다음 川芎은 潤肝補肝하면서 升陽開鬱하는 血中氣藥이다. 그런즉 川芎이 血中氣藥이란 말은 피의 動力藥이란 뜻이요 當歸를 統血藥이라고 하는 것은 피를 動에서 靜으로 誘導하는 藥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六君子가 氣血創造의 契機와 排水 做元의 要因을 만들어 놓은 뒤에는 반드시 當歸 川芎의 調血 養血하는 힘과 함께 함으로써만이 解産 後에 缺乏狀態에 빠졌던 造血之元이 復活하게 되어서 子宮은 自己 機能인 바의 攝血作用을 完遂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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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handongseok.org/lecture5.htm

黃帝內經講義 (5) 1965년 8월호

第一編 變化原理

第三節 五行의 相生과 相克

    가. 相生

  五行이라는 槪念과 五運이라는 槪念은 서로 다르다. 五行이라고 하면 木火土金水 다섯 種類의 氣가 아무런 變化없이 循環하는 自然的인 狀態를 말하는 것이요 五運이라고 하면 이미 그 純粹性을 잃고 變化하는 狀態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五行이라고 할 때에는 東方에서는 木을 生하고 南方에서는 火를 生하고 中央에서는 土를 生하고 西方에서는 金을 生하고 北方에서는 水를 生한다고 하는 基本的인 法則을 말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木火土金水란 五行法則은 그 性質이 純粹하여 아무런 變化나 鬪爭도 없는 基本的 槪念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은 基本的 槪念은 五行은 原則的으로 相生하거나 或은 相克하는 作用을 하는 五原質 自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五原質이 相生과 相克作用 즉 相扶相助와 豫備對立을 일으키고 있거나 或은 일으킨 다음의 狀態를 五運이라고 하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五行은 여기서 이미 純粹性을 잃은 混濁之象이 된다.

  이와 같은 五行이 純粹性을 잃으면 그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五行이 곧 變化하는 狀態의 五行이니 이것을 五運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五行이란 槪念과 五運이란 槪念은 區別하여야 하는 것이거니와 五運에 대한 說明을 後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五行만을 說明하기로 하겠다.

  그러면 五行 즉 純粹 五原質의 相生原理부터 說明하기로 하겠다. 이 原理는 河圖에 나타난 것이므로 河圖의 象을 그대로 表示하고 五行相生圖와 對照하여 보기로 하겠다.

  河圖


  五行相生圖


  河圖의 象을 보면 東쪽에 있는 三과 八은 五行相生圖의 東方에 있는 甲乙木이니 甲은 三이고 乙은 八이다. 河圖의 南쪽에 二와 七은 相生圖의 丙丁火이니 丙은 七이요 丁은 二다. 河圖中央의 上下便에 各各 五가 있고 正中央에도 五가 있으니 이것은 相生圖의 戊己五十土이다. 河圖의 西方에 四와 九가 있으니 이것은 相生圖의 西方에 있는 庚辛金이다. 庚은 九요 辛은 四다. 河圖의 北方에 一과 六이 있으니, 이것은 相生圖의 北方에 있는 壬癸水다. 壬은 一이요, 癸는 六이다.

  이와 같이 본즉 五行相生도는 河圖를 그냥 옮겨놓은 것에 不過하다(다만 東西南北의 間方에 辰戌丑未를 表示한 것은 이 四個의 土가 五行과 合하여 作用할 때에 變化가 생기므로 記載하여 둔 것이고 여기서 論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爲先 相生圖와 河圖를 對照한 結果 한 개의 疑問이 나타난다. 즉 相生圖를 順序로 볼 때에 壬癸와 甲乙은 一六과 三八의 順序로 되어있는데 왜 丙丁과 庚辛은 七二과 九四의 順序로 되는가? 하는 問題다. 이것은 다만 表面에 나타나 있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問題點이거니와 좀더 깊이 살펴보면 그밖에도 많은 問題點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河洛의 變化를 說明할 때에 說明할 問題들이다.

  却說 相生이란 것은 河圖 그대로의 表示라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떻게 相生하는가? 하는 問題를 硏究하여야 한다. 즉 甲乙三八木은 丙丁二七火를 生하는데 이것은 五行의 一般的 槪念에서 說明한 바와 갈이 가장 힘이 있고 또 통가다리인 木氣가 다시 再分裂하는 過程이니 즉 통가다리인 木이 그것을 基礎로 無數한 再分裂을 함으로써 內容은 衰弱하여지면서 外形은 가장 旺盛하는 過程이 바로 木生火의 過程이니 이것이 解放의 第二契機 인 것이다.

  그 다음 丙丁二七火가 戊己五十土를 어떻게 生하는가? 火란 것은 木이 再分裂 한 것이라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그런데 火는 또다시 分裂하여서 分裂의 極端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分裂을 爲한 分裂이 아니고 分裂에 終止符를 찍기 위한 分裂이다. 이것이 解放의 第三契機가 되는 火의 分裂인즉 그것이 바로 火가 土를 生하는 過程인 것이다. 이와 같은 火의 分裂은 解放의 終點인 同時에 統一의 始點인 土를 現象化하는 中繼點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時點이 바로 無極을 生하여서 矛盾對立을 止揚하고 萬物을 成熟하게 하며 人間은 統覺(神明)이 생기며 靑年은 圓熟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한바 感性과 理性의 二 契機가 融合하는 곳이다. 즉 統一의 第一 契機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戊己土는 庚辛金을 生하나니 金이란 表面을 굳게 하는 性質이다. 다시 말하면 第三分裂인 火의 分裂은 純粹中立인 無極(土)으로 化한즉 그 土(無極)는 中立의 性質로서 外炎灼熱한 바의 第三分裂을 柔懷抱捉하여 놓게되면 그것은 바로 火인지 土인지 혹은 水인지를 분별할 수조차 없는 象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런즉 이러한 象은 火土水의 和合한 象이므로 外堅性을 가진 金으로서는 捕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分裂을 捕捉(綜合)하는 第二의 契機를 生하는 것을 土生金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成立된 金은 水를 生하게 마련이니 즉 金이 水를 生한다는 말은 金氣의 外表堅斂作用이 한걸음 더 나가서 그 內面까지 貞固하게 하는 作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統一의 第三契機가 形成되는 것이니 이것이 易에서 말하는 坎爲水오 탈레스가 말한 물이다. 뿐만 아니라 孔子가 易繫辭에 太極生兩儀라고 한 太極의 母體인 것이다.

  이와 같이 太極이 成立되면 水는 다시 木을 生하게 되는 것이니 즉 貞固한 속에 囚閉되었던 氣는 다시 活動하여 木을 生하게 되나니 이것이 解放의 第一契機가 되는 것이다. 宇宙의 構成要素인 土元質은 이와 같이 統一과 解放作用을 쉴 사이 없이 反復하는 것이니 이 運動을 陰陽運動이라고 하며 또 그 陰陽運動이 다시 五元質인 五行의 承繼作用에 의하여 解放과 統一의 作用인 陰陽作用을 周流不編하는 法則을 五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法則인 五行各個의 槪念을 定함에 있어서 甲乙木 丙丁火 戊己土 庚辛金 壬癸水라는 槪念을 附與하는 것이니 이 槪念은 곧 五氣五行運動의 基本的 原則인 五行의 槪念인 것이오 三八, 二七, 五十, 四九, 一六 등은 다시 木火土金水의 生成原理를 確認하는 數自體의 自然法則인 것이다.

  위에서 五行의 相生을 말했다. 그것을 여기서 要約해보면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의 發展까지는 解放過程의 三契機요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는 統一의 三契機였다. 이와 같이 보면 發展의 過程은 土에서 끝나는데 또한 統一의 過程도 그 土에서 始作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土는 二重性格을 띈 것이 分明하다. 왜 그런가? 하는 疑問은 다음에 六氣를 說明함으로써 分明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基礎的으로 그렇게 記憶만 남겨두기를 바란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兼하여 또 記憶해야 할 것은 언제 어떠한 場所에서든지 五行의 槪念이 木火土金水의 順序로 配列되면 여기는 相生原理를 內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 한가지 注意할 것은 甲乙木 丙丁火 戊己土 庚辛金 壬癸水라는 槪念이 木火土金水에 붙으면 이것은 五行의 基本原理이고 또한 變化하는 五運의 原理가 아니라는 것을 銘心해야하는 것이다.

    나. 五行의 相克

  五行이 지닌바 基本原理의 또 한개의 側面으로서 相克原理가 있다. 相克作用은 相生作用의 反對作用이므로 相生은 木火土金水의 順行法則이었던 것과는 反對로 이것은 金木水火土의 逆行作用을 하는 法則인 것이다. 相生作用이 相扶相助의 基本的 本質이었다면 相克作用은 矛盾對立의 基本的 要素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相生作用은 陽의 作用이요 相克作用은 陰의 作用이다.

  여기서 陰陽二契機의 矛盾과 對立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對立을 위한 矛盾이 아니고 發展과 統一을 위한 矛盾이다. 그러므로 相克의 必要性이 認定되는 것이니 그것을 人道的 立場에서 보면 善을 保護하기 위한 必要惡이기 때문이다.

  却說 이 相克原理는 洛書에서 啓示되는 原理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五行相克圖와 洛書를 그려놓고서 서로 對照하면서 硏究하기로 하겠다.

  洛書


  五行相克圖

  註 ()內의 金火와 四九.二七은 바꿔진 것을 表示한 것

  원에 두개의 그림을 對照하여 보면 爲先 洛書는 河圖와 다른 점으로 河圖의 四九와 二七이 易位된 點이다. 다시 말하면 河圖는 四九가 西에, 二七이 南에 있었는데 洛書는 四九가 南에, 二七이 西에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數가 易位되었다는 말은 數의 本體인 金火가 易位되었다는 말이다.

  이밖에도 洛書와 河圖는 그 象이 다른 점이 많지만 여기서는 다만 金火가 四九 二七이 交易된 點만을 말하겠다. 이와 같이 交易되었다고 말을 하거나 또한 象을 表示하는 것은 勿論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自然의 運行法則이 .그렇게 垂象했기 때문에 人間은 그것은 그냥 文字로서 옮겨 놓은 것 뿐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圖表는 어떠한 根據에 依하여 成立되었는가?

  五行이 相生할 때는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의 順序로 그 生하는 바의 基本的인 原則만을 說明한 것이었다. 그러나 相克法則은 그 生하는 側面, 즉 生하기 위한 必要惡을 說明하는 것이다. 宇宙의 運行하는 象을 詳察하면 火가 南에서 旺盛하기 바로 前인 巳(이것은 六氣說明에서 詳論)에서 이미 金의 收斂運動이 싹트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이 차츰 勢力을 얻어서 西에 이르게 되면 南에서 旺盛하던 火는 金氣에 依하여 完全包圍를 當하게 된다. 그러므로 宇宙의 運行을 다만 相生하는 面에서만 보면 五行은 生成作用의 基本的인 法則에 不過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變化하는 面에서 보면 다시 말하여서 어떻게 生成하느냐? 하는 面에서 보면 이와 같은 金火交易의 必要克에 依하여 生成作用은 實現되는 것이다.

  그런즉 相克原理란 生成作用의 裏面 즉 成하는 바의 本質的 內容을 표시한 것이 바로 相克法則인 것이다.

  그런데 相生作用은 北方水位에서부터 始作하여 左旋運動을 하였는데 相克運動은 相克圖에서 表示한 바와 같이 南方火位(卽 四九金位)에서 始作하여서 오히려 生의 作用을 側面에서 돕고 있는 克인 것이다. 그러므로 相克作用은 金에서 始作하여 右旋運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金木水火土의 順으로서 五行相克 序列을 定하는 것이다.

  天地運行에 있어서 이와 같은 生成作用은 恒常 必要惡인 相克作用을 絶對로 要求하기 때문에 北方水가 水生木을 하려고 하면 南方火는 벌써 金을 克하여서 金克木의 準備態勢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相生作用 즉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를 始作하면 相克作用은 同時에 金克木 木剋土 土克水 水克火 火克金의 反對作用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相克이라고 하거니와 이와 같은 相克은 宇宙의 變化와 人間의 生成에 있어서 不可無의 必要克이며 必要惡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헤에겔이 말한 辨證的 發展過程이기도 한 것이다.

  註 헤에겔은 이와 같은 過程의 飛躍까지만을 보고 그의 統一法則을 發見하지 못하였다.

  世界가 實現하는 矛盾과 對立은 이와 같은 五行運動의 生克過程에서 일어나는 必要惡이므로 이와 같은 矛盾과 對立이 바로 世界이며 그것이 또한 世界의 生命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矛盾과 對立이 없는 世界란 形成될 수도 없고 또한 形成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變化도 찾아볼 수 없는 無意味한 暗黑界일 것이다.

  註 以上 論한 바를 初步者로서는 完全히 理解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宇宙發展에 있어서 相生과 相克의 絶對 必要性을 記憶함과 아울러 金火交易이 萬物生成의 裏面的 內容이 된다는 것을 銘心하기만 하면 된다. 다만 아직 이 程度의 進度에서 좀 지나치게 깊은 곳을 말한 감도 不無하다. 그러나 한번 이 程度의 아웃트라인 이라도 스쳐 지나가는 것이 金火交易 土化作用 寅申相火 等의 깊은 곳을 硏究할 때에 理解를 促進시킬 수 있으리라고 生覺되기 때문에 蛇足을 添加한 것이다.

 

 

  그렇다면 五行의 變化인 五運에 대해서 硏究하기로 하겠다.

第四節 五運과 變化

  運이란 槪念이 運動 運行 等에 對한 基本槪念이다. 運字를 만들 때에 軍字와  字를 合하여 만든 것은 軍이 가는 것(走)을 象徵한 것이다. 軍隊란 盲進만을 目的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前進할 때는 前進하고 後退할 때는 後退하는 것을 軍이라고 하는 것이다. 軍隊에서는 이것을 作戰이라고 한다. 軍이란 것은 이와 같은 作戰에 依하여 戰勢에 變化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한 意味에서 運字가 軍字와  字를 合하여 取象한 것은 運이란 것은 軍의 行進이 戰鬪에 變化를 나타내는 것처럼 運의 律動도 또한 一種의 戰鬪的 變化를 나타내면서 나가는 것이며 同時에 軍隊의 行進처럼 一進一退하면서 前進하는 宇宙變化의 律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運이라고 하거니와 여기에다가 五字를 合하여 五運이라고 하는 것은 宇宙運行의 基本法則인 五行이 變化하는 象을 五運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五行이라고 하면 五行 自體의 基本的인 法則을 意味하는 것이오 五運이라고 하면 五行이 變化를 實現하는 宇宙現象의 象을 意味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吾人이 五運을 硏究하려면 그의 名稱과 槪念부터 硏究하여야 하고 또한 宇宙는 運行하는 象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數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自然數의 生成關係를 硏究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五運이 變化現象과 물의 生化成形하는 것을 硏究할 수 있는 것이다.

    가 五運의 名稱과 方位의 否定

    A. 名稱

  五行이라는 五氣의 基本法則과 五運이라는 그가 運行하는 象인 律動이 서로 다른 한 그 의 名稱이 다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甲己를 土運이라고 하고 乙庚을 金運이라고 하고 丙辛을 水運이라고 하고 丁壬을 木運이라고 하고 戊癸를 火運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圖表에 依하여 說明하면 다음과 같다.

  五運圖









  위의 그림에서 보면 運은 土運에서부터 運行하기 始作하는 것이니 왜 이것이 土運에서부터 始作하는가? 하는 것부터 硏究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五行의 相生作用은 木(木火土金水)에서부터 始作하였고 相克作用은 金(金木水火土)에서부터 始作하였는데 五運은 왜 土에서부터 始作하였느냐? 하는 것부터 硏究하여야 한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五運이란 것은 變化現象의 象이다. 그런데 五行가운데서 오직 中立不偏하는 象을 나타내는 곳은 土位인 것이다. 水火金木은 各各 偏僻된 性質을 가지고 있지만 土만은 無이며 中이며 空인바의 象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象을 나타내는 五運이 土에서 出發하여야 할 것은 明若觀火한 것이다.

  그러므로 土는 甲에서 己에 이르는 變化過程에서 생겨나므로 甲己化土라고 하면 그 다음으로 乙에서 庚에 이르는 사이에서 金이 생겨나므로 乙庚化金이라고 하며 그 다음은 丙에서辛에 이르는 사이에서 水가 생겨나므로 丙辛化水라고 하며 그 다음은 丁에서 壬에 이르는 사이에서 木이 생겨나므로 丁壬化木이라고 하며 그 다음은 戊에서 癸에 이르는 사이에서 火가 생겨나므로 戊癸化火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五運의 名稱(槪念)을 甲己土 乙庚金 丙辛水 丁壬木 戊癸火로 規定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五運이 化하는 面에서 본 名稱인 것이다. 그러므로 各人이 萬一 五運이 變化하는 面을 規定한다고 하면 應當 己甲土 庚乙金 辛丙水 壬丁木 癸戊火가 成立될 수 있다는 것도 머리에 넣고 生覺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五行에서 變化하여서 五運이되는 根據를 論據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五運의 變化에서 說明하겠다.

  다만 여기에서 記憶하여야 할 것은 五行과 五運은 本質的으로는 그 槪念이 同一하다. 그러나 五行은 基本적인 法則이고 五運은 變化하는 現象이므로 本體와 作用의 面에서 名稱을 分離한 것이다.

    B. 方位의 否定

  五行에 있어서는 甲乙木 丙丁火와 같은 方位의 規定이 嚴格하였다. 그러나 五運에서는 方位를 定할 必要도 없고 또한 定하여 낼 수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五行은 五原質의 基本法則이었지만 五運은 運動하는 變化의 現象이므로 方位를 定할 수 없는 것이다. 現象은 언제나 流動的이므로 方位와 같은 固定性이 介在될 수 없다. 同一한 原質의 五行의 個性이 옮겨지는 空間과 時間에 依하여 各其相殊한 變化를 造成하는 것뿐이므로 運에서는 時空間的인 象을 다루는 데만 目的이 있는 것이고 方位나 場所와 같은 固定的인 面 - 다시 말해서 方位의 固定性은 變化를 拒否하는 것이므로 - 은 벌써 五運의 對象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五行의 基本인 方位가 없이는 五運의 流動인 象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數

  數를 硏究하려면 먼저 數의 槪念과 成立을 生覺하여야 하고 그 다음에 數의 變化를 硏究해야 한다.

    A. 數의 槪念

  數에도 亦是 哲學的 哲念과 言語學的 槪念의 두 가지가 있다. 言語學的인 面에서 考察하여 보면 數라는 것은 事物의 質量을 計算하는 手段에 不過할 것이다. 그러나 哲學的인 面에서 살펴보면 數는 事物의 幾微이며 有가 無에 이르는 過程이며 單이 多로 化하는 象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宇宙間에 存在하는 事物의 變化하는 象을 詳察하여보면 形(物質)이 分化하고 象(無)이 綜合하는 有無分合의 法則的 循環이 繼繼承承하는 물(水)의 波濤와 泡沫인 것이다. 그러므로 列子는 人物의 律動하는 變化를 물 속에서 出沒하는 潛水夫의 妙技로 보았고 伏羲는 그 물을 一(全體)이 六으로 分化하고 六이 一로 綜合하는 象을 河圖에서 發見하였고 文王은 그 물이 다시 分裂되어서 泡沫이 되고 그 泡沫(無)이 綜合의 契機로 飛躍하는 金火交易의 幾微를 洛書에서보았고 一夫는 이와 같은 先聖의 達觀에 依하여 正易을 著述하였고 또한 그것이 이루어지는 中心點(無極)을 指稱하여 十十一一之空이라고 함으로써 비로소 律動하는 물의 神秘는 開發되고야 말았다.

  却說 數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물(水)의 分化하는 形象을 象徵하는 물 自體의 表現인 것이니 그것이 바로 變化의 烙印이며 妙萬物의 母體인 것이다. 字典을 稽考하여보면 數字의 意味를 幾, 計, 細密 等으로 表示하였으니 幾라는 것은 幾微만 있어서 實在를 把握할 수 없는 것이다. 計라는 것은 一이 十으로 分裂되는 過程에서 생기는 事物의 發展과 그 綜合을 말하는 것이고 細密이란 것은 물이 泡沫이 되어서 물로서의 形을 喪失하고 다시 化合하기 始作하는 飛躍의 象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字典의 內容을 稽考하여 보면 數라는것은 上記한 바와 같이 古代의 先聖들이 立法한 河洛의 變化인 分化하는 물 自體의 表現 方式인 것이 分明한 것이다.

  宇宙란 것은 變化하는 時空間이다. 時空間이란 것은 變化하는 幾微의 一點 卽 十字의 交叉點인 것이다. 時의 延長과 空의 收藏은 반드시 이 間(十字의 交叉點)을 얻음으로써 飛躍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變化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意味에서 筆者는 緖論에서 「피묻은 十字架」 라는 表現을 빌려 쓴 일이 있거니와 이러한 時空間的 變化인 形象의 發展을 그 自體의 모습대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數라고 生覺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數는 變化하는 現象을 記錄하는 表示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이 變化自體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여기서 宋學이 「有氣則 有度 有度則 有數」라고 한 深奧한 底意를 엿볼 수 있으니 이것을 좀더 풀어서 말하면 宇宙라는 變化하는 大氣圈은 언제나 五行氣로서 充滿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모든 것이 動靜하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動靜하는 것은 氣가 있기 때문이요 氣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度가 있고 度가 있는 곳에 數가 따르는 法이다. 그것이 바로 推進力과 引退力인 陰陽의 運動力이다. 그러므로 地球와 日月의 秩序整然한 運行도 이와 같은 氣度數의 現象으로서 나타나는 것이오 曆命數와 物象數의 現象도 實로 여기 緣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數의 槪念을 一層 더 좁혀서 말한다면 數란 自然法則 自體의 運動現象의 表現인 것이다.

    B. 數의 成立

  自然數의 數列은 一, 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의 順序로 配列하여 成立되었다. 그런데 이 列을 자세히 살펴보면 奇數와 偶數가 서로 交代하면서 規則的으로 配列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奇數+偶數=數列」이라는 公式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問題되는 것은 이러한 數의 成立이 人爲的이냐? 或은 自然的이냐? 하는 것이 問題된다. 一般的으로 이 問題를 人爲的인 것으로 生覺하는 傾向이 많다. 그렇다면 自然數라는 槪念부터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萬一 數의 成立을 人爲的이라고 한다면 自然數란 槪念은 반드시 自然所産인 事物을 計量하는 것이 모든 自然數라고 한다고 하여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槪念學上으로 보아서 잘 首肯되지 않는다. 自然數란 말은 數 自體가 自然의 法則 그대로의 表象이기 때문에 自然數라고 한다고 하여야 槪念的으로 妥當하게 느껴진다. 萬一 數의 成立을 人爲的으로 된 것이라고 한다면 옛적에 數를 만들 때에 가령 數列을 一, 三, 四, 七, 九 等으로 粗雜하게 配定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오랜 동안의 歷史的 習慣에 依하여 事物을 그렇게 計量했을 것이다. 그것은 勿論 計數上으로는 無妨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一 다음에 三이라고 計數하더라도 그것이 習慣化 되기만 하면 一 다음은 二라고 認識하는 것을 一 다음은 三이라고 習慣으로 認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人爲的인 數를 使用한다면 哲學의 發展은 있을 수 없다. 특히 東洋哲學은 基本을 數에다 두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數라는 것은 動靜하는 事物의 現象 自體이기 때문이다. 勿論 西洋哲學에 있어서도 數를 대단히 重視한 피타고라스와 같은 學者가 있기는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다 疑心하였지만 思惟하는 나 我와 數만은 疑心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만 보아도 그가 數를 얼마나 重視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數에 대한 思索과 硏磨의 자취는 찾을 수 있지만 反面 數的인 法則을 硏究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東洋哲學은 그 出發부터 數로서 始作하였다. 다음의 河圖에서 그것을 엿보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위의 그림의 一, 三, 五, 七, 九는 白色圓이다. 이것은 奇數니 陽을 象徵하는 것이오 二, 四, 六, 八, 十의 黑色圓은 偶數이니 偶數는 陰을 象徵하는 것이다. 또 一, 三, 五, 七, 九의 五位 中에서 一, 三, 五는 陽數로서의 生數요 七, 九는 陽數로서의 成數다. 二, 四, 六, 八, 十 中에서 二, 四는 陰數로서의 生數요, 六, 八, 十은 陰數로서의 成數다. 이것을 다시 추려보면 自然數의 數列은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인데 그 중에서 一二三四五는 生數라고 하고 六七八九十은 成數라고 한다. 그런데 生數인 五位 즉 一二三四五 中에서 奇數인 一三五는 陽의 生數요 二四는 陰의 生數다. 또 成數인 六七八九十 中에서 六八十은 成數 中의 陰數요 七九는 成數 中의 陽數이다. 이와 같이 生數와 成數가 各各 奇偶數를 가지고 있는데 生數는 萬物이 變化하는 基本原理이고 成數는 萬物이 變化하는 實現形態인 것이다. 그런데 自然數는 이와 같은 性質을 가진 奇偶가 互相交雜하여 一陰一陽하면서 數列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法則으로서 成立된 數列의 理論的 根據가 바로 河圖에서부터 나왔다. 그것이 바로 數의 化生이며 同時에 萬事萬物의 化生인 것이다.

  여기서 河圖에서 나타난 數理를 대략 說明하면 一과 二인 水火의 生數는 宇宙變化의 二大 基本原理이고 三과 四의 木金은 一二 즉 水火의 運動을 돕기 위한 幇助的인 原理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一이 二로 化하려면 三의 도움이 必要하고 二가 一로 變하려면 三의 도움이 必要하다. 그런즉 宇宙의 運動은 一과 二의 互惠運動이므로 自然數의 一은 그 基本要素인 一二가 차례로 配列되고 그 다음은 一이 二로 發展하는 것을 돕는 要素인 三이 配置되고 그 다음은 二가 一로 歸藏하는 것을 돕는 要素인 四가 配置됨으로서 變化와 生成의 序列이 決定된 것이다. 이것이 一二三四의 順位가 法則的으로 形成되지 않을 수 없는 河圖의 序列인 것이다. 이것을 變化의 法則인 五行運動에서 보면 水火는 宇宙變化의 基本要素이고 木金은 幇助的 要素이므로 水火를 一二順位로 하고 木金을 三四位로 하였다는 말과 相通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生數 중에서 아직 남아있는 것은 五이다. 五는 生數 中에서 中數다. 이것을 五行의 槪念으로 바꿔놓으면 土다. 土의 性格이 不偏不黨한 中이라면 五의 性格이 그러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水火金木이 偏僻된 性格者라면 一二三四가 그러할 것도 當然한 것이다. 그러므로 一二三四의 다음에 五가 配置되어야 할 것은 水火金木의 中位에 土가 있어야 하는 것과 一般인 것이다. 그러므로 五는 數列의 中位인 五位에 配置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河圖를 살펴보면 中央의 五가 十에 依하여 包圍 當하고 있다. 五는 一二三四五의 生數의 끝이므로 十의 가운데 있으면서 生하려는 뜻을 內包하고 있는 것을 表象한 것이다. 위에서 變化의 化生數인 生數의 成立을 말했다. 그러면 다음은 變化形成數인 成數의 配置된 理由를 말하겠다.

  宇宙를 彌滿한 것은 萬物이다. 萬物은 大小와 粗密의 反復運動을 하면서 形上形下에 形象을 나타낸다. 그 運動의 過程에서 形而上的 表象이 바로 生數인 一二三四五의 化生이며 形而下的 表現이 成數인 六七八九十의 形成인 것이다.

  위에서 生數는 變化의 基本原理요 成數는 萬物이 變化하는 實現形態라고 한 것도 實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成數는 生數의 基本原理를 얻음으로써 萬物의 實現形態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고 生數는 成數의 實現形態를 얻음으로써 基本原理 즉 生命을 保存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陰陽의 互惠運動인 것이다. 그러므로 生數인 一二三四五는 成數인 六七八九十을 얻음으로써 萬物이 實現되는 것이다. 數가 自然自體인즉 數 自體의 發展도 自然自體의 發展과 同一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이 生數가 成數로 發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즉 生數는 一二三四五의 五位이지만 五는 一二三四의 綜合者 土로서의 性格을 가졌으므로 五가 곧 一二三四의 代表이며 同時에 生成의 本質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一+五=六, 二+五=七, 三+五=八, 四+五=九, 五+五=十의 公式으로 成數가 形成된 것이다. 그런즉 六은 五라는 形成의 本質과 一이라는 生化의 基本原理가 서로 綜合됨으로써 물(水)의 形質을 갖추게 되었고 七은 五라는 形成의 本質과 二라는 生化의 基本原理가 서로 綜合되어 서로 불(火)의 形質을 갖춘 것이다.(以下略)

  이와 같이 하여 生數와 成數의 互惠生成하는 運動을 陰陽의 五元化運動인 五行法則으로 規定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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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봉은 계룡산 남쪽의 봉우리로 계룡시 향한리와 도곡리 일대의 산을 말한다. 해발 574m  
 
여기서부터(향적산 묵집) 국사봉의 시발점이 된다.
지금은 새로 도로를 내느라 부산하기만하다.
예전의 계곡을 잘 살리는 형태로 했으면 좋으련만 여기도 계곡을 죽이는 기술은 어찌하겠는가!
우리나라는 요사이 무엇이든지 죽이는 기술이 많이 발전하고 있다.

   
 
  ▲ 국사봉 등산코스  
 

 

 
 
  ▲ 계룡시가 시로 분리되기 이전 논산시에 포함되었을 당시의 국사봉 안내도. 안내도에 개인 집이 표기된 것이 특이하다.  
 

이곳 향한리(香汗里)는 향기로울 향(香)과 땀 한(汗)이 어울려져 향적산과 향한면의 이름을 따서 불리었다한다.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라는 뜻이 아닌가?
(안초생각: 香은 土 즉 氣를 말압니다. 그렇다면 계룡, 향적, 향한 등 다른 지명 의미도 술술 풀리겠지요.^^)
향적산, 그리고 국사봉은 아담하고 등산하기가 편해 많은 분들이 산행을 하고 있는 곳이다.

   
 

  ▲ 무상사의 내부모습. 이 절에 가면 외국인 도반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블로그(lempicka33)  
 
이곳에 그 유명한 ‘무상사’가 있다.
한국불교의 해외포교에 앞서온 숭산선사가 전 세계의 모든 불자들이 와서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국제선원을 계룡산에 새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터를 찾던 중 현재의 무상사 자리가 이 산의 주봉으로부터 내려오는 기의 중심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선택하였다는 곳이다. 

국사봉은 계룡산과 대둔산의 중심에서 계룡산에 들어가는 관문역할을 해오는 산으로 바로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던 곳이 아닌가?     

이 절에는 외국인 도반들이 참 많이 보인다.
가끔 산행 길에 나설 때면 마주치는데 마음의 안정을 구하고자 고국을 떠나 머나먼 외국에서 이것까지 와서 수행을 하는 것을 보면 경외로움이 앞선다.

얻고자 보고자 하는 것이 마음인데 이들이 찾아가는 것은 무엇인지, ‘남이 장에 가니까 거름지고 나서’는 세상에, 강남에 가서 살지 못해서, 미국사람이 못되어 안달 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세상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에 숙연해진다.

   
 
  ▲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저술한 현각스님 ⓒ법보신문  
 
이 절에 TV 다규멘터리 ‘만행’으로 널리 알려진 벽안의 선승이 있으니,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진리를 찾아 정진하면서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내놓은 그 현각 스님이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종교를 뛰어 넘어 가정과 명문대학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숭산선사를 만나는 과정을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리오.

더구나 내가 잘 아는 건축사 정연배는 "이분은 거꾸로 캐나다로 꿈을 캐러 갔다" 며 이 절의 건축비 문제로 딴소리를 하고 있으니 ‘도(道)가 돈’이라는 세상 이치가 알듯 말듯 알쏭달쏭해지면서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거북바위와 귀룡정사에 들기 전 우측 야산을 지나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그곳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한숨을 돌리고 언덕 하나를 넘으면 집 몇 채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요사이 자유롭게 쓰고 있는 후천개벽, 상생의 미래를 예지한 정역의 완성 자 김일부 선생이 공부해온 향적산방(산제당)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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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가 배출된다는 계룡산 국사봉 밑의 향적산방은 국운의 융창을 감지했던 수많은 학인·술사들의 아지트였다. 19세기 중반 ‘후천개벽’이라는 전 지구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예언한 김일부(金一夫)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1950~60년대 이 향적산방을 드나들었던 멤버들을 하나하나 추적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인물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 사람이 두암(斗庵) 한동석(韓東錫·1911~68)이었다.

두암은 환자를 치료하는 한의사였으면서 동시에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예언을 남겨 놓은 예언자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가 1960년대 중반에 저술한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은 전국 대학의 한의학과 학생들에게 현재까지 여전히 필독서로 꼽힐 만큼 유명한 책이기도 하다. 그는 한의학의 기본이 되는 음양오행을 연구하다 계룡산 향적산방의 멤버들과 인연이 닿았고, 이 멤버들과의 교류를 통해 ‘정역’(正易)의 세계에 깊이 심취하게 된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암이 남긴 국가의 중대사에 관한 예언이란 정권교체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예언을 말한다. 그의 예언을 가장 소상하게 알고 있는 생존 인물이 두암의 사촌동생 한봉흠(76) 박사다. 사촌 간이라서 두암 생존시 흉허물을 터놓고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고려대 독문학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는 정년퇴직해서 서울 정릉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정릉의 자택으로 한박사를 방문한 시점은 2002년 10월 하순이었다.

한박사로부터 간추린 두암의 예언은 다음과 같았다.
‘월간중앙’ 12월호에 소개한 내용이다.
“박대통령이 죽고 난 후 정치적 혼란기가 다시 한 번 오게 되는데, 이때도 1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정치형세가 서너 번 바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정부 상태를 거친다는 거였죠. 그 다음에 군사독재가 한 번 더 온다는 겁니다. 군사독재 다음에는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어정쩡한 인물이 정권을 잡은 다음, 금기(金氣)를 지닌 사람들이 한 10년 정도 정권을 잡는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니 금기를 지닌 사람들이란 양김(兩金)씨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금기 다음 정권은 목기와 화기를 지닌 사람이 연합한다고 했습니다. 목기와 화기를 가진 연합팀이 정권을 잡았을 때 비로소 남북이 통일된다는 것이었죠.”

“목기와 화기의 연합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죠?”
“저도 그것은 확실하게 모르겠어요. 목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게 어렴풋이 짐작되는데, 화기를 지닌 인물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 대선이 끝나고 나서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그때 총리가 과연 누가 될 것인지를 주의 깊게 관망하고 있습니다. 어찌 됐든 목기와 화기를 지닌 사람이 연합해야 피를 안 흘린다. 그리고 이 시기에 통일된다고 했습니다…. 통일되려면 남쪽에 약간의 혼란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암의 예언 가운데 핵심은 ‘목기와 화기를 가진 연합팀이 정권을 잡는다’는 대목이다. 한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 대목은 두암이 사망하기 전인 1968년 이전에 행해졌던 예언이다. 그리고 한박사와 필자가 정릉의 한박사 자택에서 이 이야기를 나누던 시점은 2002년 10월 하순이었다.

---월간중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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