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와 수풀로 인해 묘소입구를 찾지 못해, 지리산까지 내려갔건만 그 아래에서 참배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생님 따님 내외분을 만나려 했으나, 외출 중이라 뵙지 못하고 돌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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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소서.
지리산 내대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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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사 초막의 팔선주 사랑

1955년 5월, 빨치산을 섬멸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었으니 '안심하고 오시라'는 안내문이 내걸렸지만, 아무나 쉽게 지리산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국민 소득 100불이 채 안 되던 시절이었으니, 일반인들은 등산 배낭을 메고 가는 사람을 양코쟁이 보듯 백안시했다.
더구나 교통불편, 치안불안, 원시장비의 악조건들을 무릅쓰고 지리산 천왕봉에 한번이라도 오른 사람은 극소수의 특수층(?)이었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거나 돈이라도 많거나 하지 않으면 지리산 산행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도 저도 아닌 성산(成山)은 어떻게 줄기차게 지리산을 오를 수 있었을까?
물론 본인의 등산 열정이 그 첫째일 것이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다.
그의 등산 열정을 보듬고 안아준 것이 바로 법계사(法界寺) 초막(草幕)이다.
전란 직후 성산이 지리산에 달려갔던 것과 비슷한 시기에 맨몸으로 지리산으로 뛰어들어 원시인처럼 살았던 또 한 명의 전설적인 인물이 있다.
진주 사람으로 일본 유학파인 허만수(許萬壽)다.
허만수의 '지리산 신화'와 김순용 노인의 '천왕봉 토굴산장'도 법계사 초막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천왕봉 남쪽 3킬로미터, 해발 1,400미터의 높은 곳에 자리한 법계사는 신라 진흥왕 9년(548년) 연기선사가 화엄사에 이어 세웠다.
하지만 이 절은 고려 우왕 6년(1308년) 황산전투에서 패한 왜구가 지리산으로 달아나면서 불태웠고, 1908년에는 박동의 의병부대가 덕산전투에서 패한 뒤 이곳에서 항전을 계속하다 추격해온 일본군의 방화로 또 불탔다.
1912년 곽수재 스님이 초막을 세운데 이어 1916년 신덕순 보살 등이 중심이 되어 법계사는 다시 복원됐다.
하지만 법계사는 49년 빨치산 토벌 과정에 군경이 방화, 세번째로 소실되는 비운을 맞이했던 것이다.

폐허로 버려진 법계사를 또사시 복원하겠다고 나선 이가 인근 시천면 신천리 곡점부락에 살던 독실한 신도 손청화(孫淸華) 보살이다.
그녀는 57년 법계사에서 우선 허름한 초막을 세웠는데, 이 초막이 천왕봉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산장 아닌 산장'의 역할을 했다.
그 때는 천왕봉과 가까운 곳으로 운행하는 버스는 남쪽은 덕산, 북쪽은 인월이었다. 덕산에서 법계사까지 오르는 데도 2~3일이 걸렸고, 망바위와 법계사 위편에서 길을 잃기 쉬웠다.
이런 상황에서 법계사 초막은 천왕봉 등정의 전진기지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손(孫)보살 또는 한(韓)보살로 알려지기도 한 그녀는 등산객들을 지극정성으로 받들었다.
1년을 통틀어 등산객이 100명 남짓하던 시절이라 그 높은 초막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춰도 반가웠을 것이다.
그녀는 또 법계사 복원을 위해서 무엇보다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시 등산 배낭을 메고 천왕봉을 오르는 사람들은 재력이 있는 등 특수층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녀는 법계사 초막을 등산객의 쉼터와 숙소로 제공하는 한편, 그들이 사는 부산 마산 등지를 찾아가선 법계사 복원을 위한 불사 헌금을 받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손보살이 드넓은 지리산의 품처럼 따뜻하게 보살펴준 이들은 돈도 없이 산이 좋아 무턱대고 뛰어든 지리산 산꾼들이었다.
세석고원의 허만수, 천왕봉 토굴산장의 김순용 노인도 법계사 초막을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었고, 식사도 자주 했다고 한다.
손보살은 특히 부산에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성산을 친아들처럼 각별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녀는 절 주변에 손수 심어 가꾸던 인삼을 달여주기도 했다.
손보살은 천하의 애주가 성산에게 특별히 법계사 주변의 나무껍질들을 우려낸 물로 비법의 팔선주(八仙酒)를 빚어준 것이 유명한 일화로 전해온다.

팔선주란 찹쌀을 소방목, 방풍, 창출, 송절, 선모, 모과, 우슬, 하수오라 불리는 나무껍질을 달여낸 물에 담가서 빚었다.
훗날 '지리산 박사'로 불린 김경렬옹이 '1958년 여름 처음으로 천왕봉에 올랐다가 비바람에 쫓겨 허둥지둥 내려와 법계사 초막에서 꽁보리밥을 얻어먹었는데, 그 맛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술회한 바 있다.
김옹은 또 64년 성산 덕분에 '도토리 껍질만한 술잔에 단 한 잔의 팔선주를 얻어마시고 불덩어리처럼 몸이 뜨거워져 지독한 한기를 느꼈다'고도 한다.
법계사 초막의 향기 좋은 이 팔선주는 지리산 등반 초기의 명물 중의 명물이었다.

법계사 초막은 78년 절 바로 아래 로타리산장이 세워지기까지 천왕봉 등정의 거점이 됐였다.
이 초막에 신세를 졌던 이들로는 신업재 김재문 김용기 김규태 오점량 한형석 김택진 이영도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다. 주로 부산 경남의 등산 선구자와 문화예술인, 그리고 지역 유지들이다.
법계사 초막에 신세를 졌던 이들 가운데는 로타리클럽 회원들이 많았다. 결국 그들이 주축이 되어 법계사 초막을 대신할 산장을 건립하게 된다.
일명 '로타리의 집'으로 불리는 로타리산장 건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13대손 조재영(曺在永)이다. 
(2001년 2월6일)

[출처] 법계사 초막의 팔선주 사랑 |작성자 산에산에
http://blog.naver.com/8296choi?Redirect=Log&logNo=31243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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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법계사 (해발 1450m)는 서기 544년 (신라 진흥왕 5년)에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께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하였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되었던것을 서기 1405년 (조선 태종 5년) 을유년에 벽계정심선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과 한일합방때 다시 왜인에 의해 불타고 1938년 신덕순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6.25동란에 다시 화재를 당하여 그간 초라한 초옥으로 3층석탑을 지켜오다가 1981년에 조재련,조재화,조재영 불자와 신도들의 발원으로 현재의 대웅전과 산신각을 복원하였다. 옛 유물로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인 삼층석탑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내용인용 : 사찰 안내표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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