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태사에는 '대충의전(大忠義殿)'이라 해서 관운장을 모시고 있다. 왜 관운장이 이곳에 모셔져 있을까?  
 
이 절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자, 재미있는 것이 있으니 대충의전(大忠義殿)이라 하여 관운장을 모시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닌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참 황당해 진다.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를 들고 긴 수염을 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 이 영정을 보았을 때는 태조왕건의 영정인지 알았는데 나중에 관운장의 영정으로 알게 되었다.
무인으로서 태조왕건의 영정이 없어 대신 모시는 것인지, 아니면 6.25전쟁 등을 막기 위한 주술이었는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는 누구도 잘 아는 분 아닌가? 이분이 어떤 분이기에 여기에 모셔져 있을까?

관운장이 죽어서는 엄청난 신적인 위험을 떨쳤는데, 중국과 한국에서는 관운장 신명께 빌면 어떠한 원한신과 척신 등 삿된 귀신도 물러갔다 한다. 그의 대인대의를 기려 역대 왕조에서 관왕묘를 세워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추앙해 왔다고 하는데, 우리 민족이 관운장을 경애하여 잘 받들어 주어 관운장이 삼보조선(三保朝鮮)한다는 말이 전해 온다.

<선조대왕 25년 어는 봄날이다. 선조대왕께서는 춘곤을 못 이겨 깊은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위풍이 당당한 한 장군이 적토마를 타고 청룡도를 들고 삼각수를 날리며 늠름하게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선조대왕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아우님 그간 별고 없으신지? 나는 삼국시대 관우인데 우리들의 의리와 인정을 잊지는 않았겠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말일세. 우리 3형제는 살아서는 합심협력하고 서로를 도왔고 특히 형님(유비)이 촉한의 왕이 되자 나(관우) 와 동생(장비)은 촉한에 충성을 바치고 마침내 순국하지 않았는가?

우리 삼형제는 한 세대가 끝나고 영혼의 세계에서도 그 의를 지켜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형님은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되고 나는 전쟁에서 인명을 너무 많이 해쳐서 인간 환생이 안 되었고 아우는 현재 조선왕이 되었지. 머지않아 동생의 나라에는 큰 병란이 일어날 텐데 아무 방비도 없이 나날이 보내는 동생이 딱해서 지금 내가 일깨워 주러 왔네. 이 난리는 표독한 왜적이 쳐들어오는 난리인데, 7~8년이나 걸릴 테니 명나라 신종황제(유비)에게 구원을 청해서 수습하도록 하게. 내가 신종황제에게 도원의 고사를 들어 간곡히 부탁할 테니 주저 말고 시행하게.”하고 선연히 사라졌다. 깨고 보니 이상한 꿈이었다.

그러나 꿈대로 임진왜란은 이어났고 선조는 명나라 신종에게 원병을 청하였다. 그 요청이 간곡해서인지 관우의 신종황제에 대한 현몽에 감동해서인지 신종황제는 이여송을 총수로 하여 5만의 군사를 파병하여 돕게 된다. 그래서 임진왜란이후에 관우의 의리를 기린다는 뜻으로 수많은 관왕묘가 이 땅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다.>

관우를 기리는 사당으로 유명한 곳이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보물 142호인 ‘동묘(東廟)’가 그것이다.
관우현령의 도움으로 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여 명나라 신종이 현액과 비용을 보내와 우리 조정에서 두 해 만인 선조 때 완성한 것으로 왕도 참배를 했다고 한다.

동묘에 모신 관우에게 치성을 하면 효험을 본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 같은데 예나 저나 한국인의 복달라고 비는 기복신앙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관운장은 키가 구척장신에 수염의 길이가 두 자로서 삼각수(三角鬚)이며, 또한 수염이 길고 아름다워 미염공(美髥公)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관운장은 적면(赤面)이라고 얼굴빛이 잘 익은 대추 같이 빨갛다고 해서 중조(重棗)라고 했다고 한다.

 
 
 
  ▲ 개태사에서는 관운장의 영정도 모시고 있다. 이 영정은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를 들고 긴 수염을 쓸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개태사에 모셔지고 있는 관운장의 영정은 좀 바래서 인지 잘 안 보인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위와 비슷한 것도 같은데 전체가 빨간색으로 그려져 있다.

관운장 영정 옆에는 갈퀴와 큰칼, 그리고 작은 칼까지 준비되어있다.

이것은 무엇 하는 도구일까?

<옛날 천하세계 임정국 대감과 지하세계 김진국 부인이 아기가 없다가 공을 들여 미모의 아기씨를 얻으니 자지맹왕 아기씨라 이름 지었다. 아기씨의 나이 15세에 이르매, 부모가 벼슬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하늘 공사를 올라간 동안에 시주 나온 도승이 딸아이의 머리를 세 번 쓸어 임신시켰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펄펄 뛰면서 아기씨를 쫓아냈다. 아기씨는 황금 산으로 남편을 찾아갔으나 “중이 부부 살림하는 법이 없으니 불도 땅에 가 살아라.”하면서 외면한다.

할 수없이 아기씨 혼자서 불도 땅에 가서 아들 세쌍둥이를 낳게 되었으니, 9월 초여드레인 본명두, 열여드레엔 신명두, 스무여드레엔 삼명두가 각 탄생하였다.

삼명두는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구박 속에 갖은 고생을 다한다. 그러나 워낙 총기가 있어 서당의 삼천선비들이 늘 시기하였다. 삼형제는 과거를 보아 모두 장원급제 하였으나 중의 자식인 탓으로 과거에서 낙방시키려 한다. 그러나 활쏘기에서도 삼형제가 이기자 결국 모두 장원급제를 시키고 만다. 그러나 삼천선비들이 흉계를 꾸며 모친을 삼천제석궁 깊은 곳에 가두어버린다. 집에 돌아온 삼형제는 삼천선비들의 흉계를 알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황금  산 도당 땅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제주도 무당의 조상(巫祖)이 탄생하는 내력을 담은 ‘초공본풀이’는 삼명두가 삼천선비의 목을 처 버리는 데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그리하여 삼명두는 제주도 무당의 조상신격이자 3대 무구(巫具)인 ‘천문’, ‘신칼’, ‘산판’을 일컫게 된다.

여기에 '신칼'이 나온다. 관운장 옆에 있는 이것을 일부에서는 무구에 쓰이는 도구라 보기도 하지만 무속용 도구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왜 무속이라면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까?

뒤로 무속인을 찾아가서는 “우리아이 대학 붙겠어요, 이번에 승진이 될까요, 차기대통령은 누가 될까요” 하면서 ‘미주알고주알’ 물어보고는 앞으로는 내가 언제 그런데 다녔냐는 듯이 안면을 바꾸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어차피 평범한 인간은 먼 앞날을 예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숨어서 호박씨 까듯이 하지 말고 정당하게 드러내놓고 그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 떳떳하지 않은가?

조선말까지 만해도 무속이나 점치는 일은 기피대상이 되지 않았다. 선조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그들을 잘 활용해 온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신적인 자산이다.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신명이 발달된 민족이 있는가?

이제 무속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면서 신비화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밝은 양지로 끌어내어 인간생활의 고달 품을 달래주고 같이 놀아 줄 수 있는 사회의 활력소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때로는 삶에 지친사람에게 따뜻한 대화를 하고 지친 영혼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세상살이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들어내 줌으로서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 할 수 있는 완충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무속인 들이 본인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심각히 자각하는 정화운동을 펼쳐야 할 시대에 이르렀다고 보여 진다. 신의 능력을 받는 것은 갈등을 해소함으로서 해원상생의 시대를 준비하고 인간에게 희망의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라고 부여된 의무를 가진 신의 대리인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일부에서 진행되는 '연극형태의 영가천도' 무대는 정말 신선하고 획기적인 사고의 발상이라고 보여 진다. 가슴에 억눌려온 모든 것을 풀어버리는 해원상생의 시대에 어울리는 절묘한 무대장치이다.

우리민족만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영적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여 영성과 영혼의 진정한 진화를 이끌어주는 것이야 말로 이들이 해야 할 사명적인 의무가 아닌가. 새로운 문화의 전환기에서 이들로부터 새로운 싹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금전과 인기에 야합하는 그런 자세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미리 보고 이를 알려줌으로서, 이러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준비자로서 진정한 선도자로서의 역할을 우리는 기대해보고 그들에게 변화의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폐쇄된 음지에서 이들을 끌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정화된 영성과 영혼을 가진 그들로 부터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인 패러다임을 듣는다면 우리의 영혼과 영성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 본다.

우리도 그들을 무시하면서 실은 그들의 능력을 이용하고 있는 파렴치한 자세에서 벗어나 단순한 '점을 치는 자'의 위치에서 아픈 삶을 어루만져주고 껴안아주면서 새로운 세계를 조언해주는 '사회병리치료사'의 위치까지  그들을 끌어 올려야 할 것이다. 

그 옆에는 이절을 중창한 김광영 보살의 사진이 안치되어 있다.

이 분에 대해서도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1938년 조선독립을 기원하고 있다는 이유로 밀고 되어 왜경에 체포 되, 법정에서 “을유년 7월7일(1945년8월15일)왜왕이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된다.” 선언하여 재판장으로부터 정신이상자로 몰려 석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분은 윤보선대통령의 사촌 되는 ‘윤포산’을 사위로 삼아 정도령을 꿈꾸었다고도 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르는 것이지만 폐허화 된 절을 이 정도까지 준비해 놓은 분이니 나름대로 상당히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 곤 한다.

이분의 추모비가 절 입구 좌측에 있으니 한번 읽어 보기를 바란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48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창운각 속에 모셔진 단군

팔각정을 나서 옆 건물로 가보자.
나는 여기를 ‘팥죽단지에 생쥐 달랑거리듯’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들어가는 입구에 정법궁(正法宮)이라 쓰인 푸른색기와의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창운각(創運閣)이라고도 부른다.

위에 쓰인 이름은 어느 절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안을 힐끗 보면 야릇한 느낌까지 들 것이다. 우리나라 어디를 다녀도 이렇게 다양한 신을 모셔 놓은 데가 없다.

거기다 고려시대 국조사찰, 호국사찰의 커다란 명성을 가지고 있으니 비록 지금은 많이 쇄락했지만 이만한 절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편의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신앙의 박물관이자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가 아니겠는가.

낡고 협소하지만 겉모습 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면면히 이어오는 그 깊은 정신을 느끼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

이제 또 다시 먼 과거로의 여행을 해보자 .
이절의 배치 상 중심점임을 간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기둥에 남북통일세계평화기원대도량(南北統一世界平和祈願大道場)이라는 글을 써놓은 것이 이채롭다.

개태사가 호국의 성격을 지닌 사찰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절을 지켜온 분들이 개인의 영달만을 위한 기복을 뛰어 넘어 항상 국가를 염려 했던 분들임에 감사를 드린다.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부터 단군, 부처, 좌편이 관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창운각 속에 모셔진 단군영정. 이 그림은 조선말 유명한 '심전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오른쪽에 계신 분 ‘단군상제(檀君上帝)’, 우리의 시조이신 분이다.
가까이 가서 얼굴을 흩어 보려면 먼저 향을 한대 올리고 나름대로의 의식을 한 후, 이렇게 해야 혼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단군은 커다란 영 능력자이셨다고 한다.

자 영정에 계신 분의 눈부터 마주쳐 보자.
시선을 마주친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시선을 마주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치면서 좌우로 움직여 보자.

좀 놀라울 것이다.
단군할아버지가 내 눈을 응시하면서 따라다니시면서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향을 한대 올렸으니 후손으로 최소한의 도리는 다했다고 보는데 마치 “너는 누구냐” 하시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영정에 그려지신 단군할아버지는 다정다감한 눈동자를 가지셨다.

우리 회화사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18세기 초 선비 화가 공재 윤두서의자화상은 역시 시선이 가는 데로 따라온다. 형형한 눈매, 불꽃처럼 꿈틀거리는 수염, 안면의 핍진한 묘사가 압권인데 좀 으스스하다.

그런데 그 눈동자와 마주치면 귀신에게 홀린 듯 눈동자에 시선을 뗄 수 없으니, 쳐다보는 이의 눈을 통해 흉중까지 꿰뚫는 듯하다.

희여 번뜩한 눈빛은 보는 이를 그냥 놔두지 않고 파고드는데 그 안광이 얼마나 집요한지, 그림을 벗어나서도 잔상이 어른거린다. 한마디로 오싹하다. 그림이 저 정도이니 이에 반해 단군할아버지는 참 편안한 눈동자를 가지셨다.

유명한 모나리자의 눈동자도 쳐다보는 데로 시선이 따라온다.

왜 그럴까?

이렇듯 쳐다보는 각도에도 불구하고 그림속의 눈동자의 위치는 우리와 맞추어져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회화는 2차원의 평면인데, 실제 공간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원근법을 적용해 3차원을 만든 것이다.

원근법을 이용한 풍경화가 실제 풍경처럼 보이는 것도 그림속의 눈동자가 어느 쪽에서 보든 우리와 마주쳐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평면 안에 가상의 입체를 그려 넣어 생긴 미술기법인 것이다.

이 그림은 조선말 유명한 ‘심전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그린 그림이란다. 
안중식은 오원 장승업을 사사하여 많은 영향을 받고 조선시대의 전통화단과 근대화단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 유명한 분이다.

이 영정은 한때 분실되어 사라졌다가 논산출신의 수장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그림이 개태사에 있던 그림임을 알아보고 흔쾌히 돌려주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단군영정으로는 잘 그려진 그림으로 손꼽이며 계룡산일대는 개태사의 영정을 표준으로 많이 모시고 있다.
남한에서는 최초로 모셔진 영정으로 알려져 있다.

단군영정은 원래 1946년 음력 3월 3일 김광영 씨가 전국 8도를 상징하는 여덟 칸 창운각을 지어, 남한에서는 최초로 단군 영정을 모셨다고 하는데 그러면 창운각은 옆에 나반존자가 모셔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원래 팔각정은 단군을 모시는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단군영정은 지방의 크고 작은 단군성전에 모두 다 걸려 있지만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수난을 당해 한결같지는 않은데 해남에는, 대종교 1대교주인 나철이 망국의 통분을 하고 순사한 황해도 구월산의 유명한  삼성사에서 모셨다는 단군영정이 있다.

단군화상은 화가인 솔거가 꿈에 단군이 꿈에 나타나시고 그 모습을 천여 장이나 그려 이웃에 돌렸다고 하는데 정부지정 단군표준영정의 모습도 다양하니...

여기서 가까이 있는 부여의 장암면 장하리 천진전의 단군영정은 국내 어느 영정보다 제작 년대나 채식, 바탕, 필선, 구도 등에서 수준이 높은 국보급영정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부여박물관에 기증되어 보존되고 있다고 하나 박물관에 확인해보니 소유주의 허락 없이는 볼 수 없다고 한다. 소유주도 모른다고 하고, 알려주지도 않는데 아쉽다. 아쉽지만, 가는 길에 그 유명한 ‘장하리 삼층석탑’의 가날 픈 몸매를 살펴보는 재미를 느껴보기 바란다.

대전 서구 정림동에는 신도 안에서 이주해온 단군성전인 단묘(檀廟)가 있어 매년 대전대학교 주최로 어천대제(御天大祭)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신도 안에서 철거 당시 완강히 철거를 거부하여 육군본부에서 남선리에 있는 시설물 일체를 그대로 옮겨준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찾아가 보니 아담하게 잘 정리가 되었으나 주변정리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단군은 누구인가?

우리의 고대사에 아직도 논쟁중이지만 이제는 그 동안의 연구나 각종 유적을 볼 때 고조선을 단군을 부인함은 억지 주장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제는 실재성을 떠나 당시의 영역, 사회, 국가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시작돼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남의 땅도 내 것이라고 하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역사에서 수차례 겪었음에도 미리대비하고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는 겨우 한다는 것이 국사 교과서에 ‘단군조선은 있었다.’ 라는  단군의 실재성의 표현이라니, ‘가을바람에 새털’ 격인 사학자들이 들썩이는 우리나라가 불쌍하다.

치열한 민족의식과 고민하는 자세는 어디도 찾아 볼 수 없으니 단채신채호 선생이 하늘에서 통탄하고 계실 것 같다. ‘강아지에게 메주 멍석 맡긴 셈’이니 믿지 못할 사람에게 나라역사를  맡겨 불안하다.
그래도 늦었지만 국사교과서에도 단군조선을 인정하기로 했다고 하니 그나마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차길진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난 80년부터 구명시식을 통해 영가들을 천도하는 일을 하고, 또한 나름대로 영혼의 세계를 공부하면서 단군을 만난 것은 여러 번이다. 이것에 대해 내가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단군은 실재 인물이며 강력한 정신성, 곧 뇌파를 가진 인물 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그는 샤먼(무당)과 같이 뇌파의 델타 파장 영역까지를 넘나드는 굉장한 영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는 자세하게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단지 배달민족의 건국 시조로서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신화적 인물로만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구명시식을 하면서 만난 단군의 모습은 도포를 입고 턱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이 아니고, ‘청동 검으로 무장을 하고 갑옷과 투구를 쓴 젊은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왜 그가 젊은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는 실제로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온 것이 아니라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서부터 들어온 선진 문명(청동기 문화)을 가지고 있었던 이민족’이었던 것이다.

구명시식에 나타난 단군은 ‘천상에서 내려온 환웅과 웅녀의 아들이 아니라, 중구 북부 만주 지방에서 먼저 청동기 문명을 발달시킨 부족의 한 명이었으며, 특히 고아시아족들이 살고 있는 한반도를 침략하는 데 앞장 선 전투부대 대장’이었던 것이다.

특히 단군 자신은 ‘태백산 신단수 아래서 환웅이 곰과 만나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이다’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한반도 북부를 평정한 단군의 아버지, 곧 환웅의 전투부대가 토착부족, 특히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상하던 부족들 중에 곰 부족의 한 귀족 딸을 부인으로 맞아 낳은 아들이 바로 단군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단군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특히 ‘쑥과 마늘을 가지고 동굴에서 견디라’는 이야기는, 그 당시 단군의 어머니와 같은 지배자의 부인들은 다른 여자들과 같이 밖에 나가서 잡혼을 하지 않고 한 집에 머무르면서 지배자만을 섬기게 되어 있었던 것을 뜻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단군 영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또 그는 가끔 나타나 자신은 영과 육, 정신과 물질을 모두 다루는 능력이 있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는 ‘93년 겨울 구명시식 가운데 나타났던 단군 영가가 전한 메시지를 봤을 때 이러한 말들은 사실인 것 같다.

그때 흰 도복을 입고 나타난 단군의 영혼은 나타나자마자 나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말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이런 일하는 것으로 말하면 내가 제일’이라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는데, 그는 그 당시 내가 ‘어린 시절 아버님 차일혁 총경의 죽음 이후 가졌던 영 능력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현재까지 구명 의식을 행할 때마다 소위 설치고 힘이 세고 심술을 부리는 영가를 만날 때 그들이 덤비면 ‘영력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기술’이 발달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요즘도 가끔 단군의 영가는 구명시식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렇게 강한 메시지를 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데, 6척 거구에 살도 많이 찐 편이며 얼굴이 붉고 눈이 작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2007년 6월 22일자 주간조선)

단군, 긴 이야기가 필요 없는 분 아닌가.

단군영전 옆에는 천부경이 놓여 있고 문화일보 이규행사장과 애국사상선양회에서 기증한 백두산천지그림도 함께하고 있다.

개태사는 이래서 재미있다.

이 절을 중창하신 분은 단군 하면 ‘이 정도는 알아야지’ 하시는 것 같다.
후손들에게 점잖이 꾸짖고 계시는 것이니,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366사(참전계경), 이 책은 환인, 환웅, 단군이 우리민족의 우주와 인간의 법도를 가르쳐 전래해온 세상살이 기록이다.

이러한 책들을 시간을 내서 읽어 본다면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책들을 보다보면 사서삼경을 중심으로 한 유교나 도교 등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는 느낌을 수 없이 받게 된다.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껏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미 해독된 갑골문자들이 우리의 농은유집 천부경문에 다수 발견되고 확인됨으로써 결국 갑골문자가 중국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일시무시일( 一始無始一)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
 천일일지일이인일삼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일적십거무궤화삼(一積十鉅無匱化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天二三地二三人二三)
 대삼합육생칠팔구운(大三合六生七八九運)
 삼사성환오칠일묘연(三四成環五七一妙衍)
 만왕만래용변부동본 (萬往萬來用變不動本)
 본심본태양 (本心本太陽)
 앙명인중천지일(昻明人中天地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이라고 쓰여 있다.

한번 읽어 보고 나오기를 권한다.
한문이 어려운 부분이 있으니 미리 알고 가면 도움이 될 듯 싶다.

여기서 한 부분은 알고 가야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라는 글인데 여기서도 ‘3’자가 나오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알고 가야 할 것 같다.

어려운 부분이라 해석도 다양하지만 김인훈옹 이분은 민의학에 대가이신 분으로 이분이 생전에 강연하신 내용이 용어는 어려워도 재미있게 되어 있어 여기서 인용해본다.

"천부경의 석삼극무진본에 대해서 삼극론(三極論)이 여기서 나와 시작하는데,  그래 왜 이걸 우리도 알게 쓰지 않았느냐 하는 사람도 없어요.

그럼 거기에 3종류로 나눠 놓고 뭣이 나오느냐?

거 많은 3종류인데 천지인삼재지도(天地人三才之道)에 들어가 3종류는 삼생만물(三生萬物)까지 천개어자(天開於子), 지벽어축(地闢於丑), 인생어인(人生於寅). 그래 그 3종류를 내내 따져 나가면 수천억이 나와요.

거기 뭣이 있느냐?

사람은 흙에서 생긴 물체이기 때문에 황색이 제일 먼저 주인공이라. 황색이 주인공인데.
황색에서 따라서 변하는 건 토생금(土生金)의 원리로 백색이 나오기로 돼 있어.

백색은 금기(金氣)라, 황색은 토기(土氣)이고. 토색 왈 황(黃)이요, 금색 왈 백(白)인데. 그래 토생금은 자연의 원리기 때문에 백인종이 나오기로 돼 있고, 황인종은 인의(仁義)도덕이 근본이고 백인종은 의리는 있어도 그 사람들은 용맹을 세워. 그래서 무기까지 개발해, 선구자야.

그러면 금생수 하는 원리로 백색에서 변해서 흑색이 또 나와, 그럼 흑인종이라. 흑인종은 뭐이냐?

이건 힘이 있는 걸 자랑으로 여기고, 우리도 상고(上古)엔 그랬지요.
흑인종은 오늘까지 힘이 앞서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또 욕심이 또 많아.
그래 강욕자 왈(强慾者曰) 흑인(黑人)이라 하는 거거든, 이런데.

이건 인간의 삼종(三種)도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

그러면 초목(草木)의 삼종도 마찬가지라.
초목의 조상은 버들나무[버드나무]인데, 거 물에 이끼 끼는 거 있어요, 청태(靑苔)라고.

이끼 끼는 이끼, 버들이 돼요. 건 내가 눈으로 본 일도 있고, 건 사실이고, 이런데.

이치만 가지고 확실하다는 건 자연에 있어서는 사실이나 그건 과학적으론 증명자료가 돼야, 그래서 나는 본 일이 있어요. 금강산 묘향산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런데, 거기에 버들나무도 세 종류라, 삼형제라.

소낙비가 오는 것도 하루 세 번 오는데, 걸 삼형제라고 그러지? 이런데.

버들나무가 있고, 고 다음 번에 생긴 놈이 수양버들, 고 다음 번에 생긴 놈이 백양(白楊),

거기서 생긴 소나무가 있는데. 소나무도, 소나무에 잣나무 있고 전나무가 있다.

그럼 그 다음에 생기는 향나무가 있어. 향나무엔 참향나무가 있는데, 고 다음엔 넉 줄이 뻗는 묘향나무가 있고.  고 다음엔 노가지향나무(노간주향나무), 두향나무라고 해요. 그것도 삼형제라.

그래서 거기 쪽 가면서 삼형제에서 삼형제를 두게 되면 몇 만으로 변할 수 있어요.

그래서 복숭아도 몇 백 종류가 될 수 있고, 포도나 이런 것도 그래요.  머루까지 나가면 상당한 종류가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 삼극에 가게 되면 무진본(無盡本)이야. 그 근본이 끝날 수가 없어.

이래서 내가 천부경에, 왜 젊어서 머리 좋을 적에 붓을 안 드느냐?
천부경을 써 놓게 되면 세상에 글이 없어져. 어떤 경전이고 다 없어져.

천부경은 천지가 생긴 이후에 그 이상의 글이 나올 수가 없어. 만약 석삼극무진본 하나 끝나는 덴 주역 같은 책이 천 권이 넘을 거요.

내가 그걸 죄다 밝히면 천부경을, 여든하나 천부경을 다 끝내는 날이면 지구엔 글이 없어져 버려. 그래서 죽은 후에 후세에 참고자료로 전할 순 있어도 살아서 그걸 글이라고 세상에 자랑할 거리는 못돼요.

너무 좋아요, 너무 좋은데. 내가 이야기하는 건, 그게 지금 삼극론에 들어가서 무진본이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필요한 얘기가 거기 전부가 있다 이거요."

해석은 다양하지만 그 근본원리는 하나인데 그것의 해석은 각자의 몫이라 본다.
이것도 우리의 것이니 한번 알아보는 것도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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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망청 부처와 개태사 철확

지나치기 쉬운 능청 망청 부처 여기서 ‘능청 망청 부처님’을 만나 보자.
 

 
 
 
  ▲ 요사채가 있는 우주당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전에 축대 옆에 소박하고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부처님이 앉아 있다. 이것이 바로 능청망청 부처님.  
 
요사채가 있는 우주당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전에 축대 옆에 소박하고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부처님이 앉아 있다. 마당 한 편을 지키고 있는 이름 모를 석불좌 상이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고 있어 지나가는 이가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치기 마련이다.

잘 쳐다보면 작은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고 수줍어하는 척하면서 장난을 쳐주었으면 하는 듯한데, 이 부처상을 보니 왠지 쓰다듬어 주고 싶은 느낌이 든다.

사실 쓰다듬어주기 보다는 한대 쥐어박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누군가 머리위에 작은 돌을 얹혀놓고 기원한 듯 한데, 그래서 그런지 작은 돌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다. 이런 아기자기한 부처상을 만든 장인은 누구일까?

자꾸 쳐다보여지지만 아직도 봐야 할 것이 많으니 축대 옆 계단을 올라가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자.

오른쪽 구석에 전각에 웬 쇠붙이가 잘 모셔져 있다.

가마솥-살아있는 영물

이것이 그 유명한 이름하여 ‘철확(鐵鑊)’, 개태사 가마솥이다.
충남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철확은 우주정 안에 잘 모셔져 있다.

“어느 해의 일이다. 큰 스님 한 분이 개태사를 찾아와서 얼마 후 대홍수가 나서 본당의 부처님이 위험할 것이니 이 솥으로 본당에 이르는 물길을 막으면 불상은 안전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스님들은 가마솥으로 본당 앞을 막았다. 과연 대홍수가 났는데 불상은 안전했지만 가마솥은 떠내려가 지금의 고양리 다리 근처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 쇠 솥으로 제방을 쌓으면 수해를 막아주고 풍년이 들게 한다고 한다. 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 가마솥의 뚜껑은 인근 천의 어디 엔가에 묻혀 있어 지금도 흐린 날에는 ‘윙’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 살아있는 영물이라 불리우는 개태사 철확  
 
이 가마솥은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국을 끓이던 것으로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나 된다고 한다 .
조선시대에 절이 없어지면서 벌판에 방치된 채 있던 것을, 가뭄 때 솥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으로 옮겼다가, 연산 읍에 옮겨진 후 서쪽냇가에 묻혀 있다가 발굴하여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서 열린 경성박람회에 출품되기도 했던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 후 연산공원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개태사의 경내에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다.

일본인에 의해 1435년 부산까지 반출해갔다가 솥에서 울려 나오는 큰 소리 때문에 반출되지 못하고, 도둑의 손에 고철로 부서질 때도 뇌성 같은 소리와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면서 날이 갑자기 어두워져 모두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그때 파손된 부분이 현재 테두리에 남아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온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니 철확이 지닌 어떤 불가사의 한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온몸으로 역사의 찬란함과 부상 속에서 우뚝 선 우리의 역사 그자체이다. 역시 대단한 물건이다.

그래서 그런지, 논산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그 세 가지를 보았느냐는 질문을 한단다.

   
 
  ▲ 강경 미내다리 ⓒ논산시청  
 
하나는 강경 미내 다리이고, 둘은 개태사철확이며, 셋째는 은진미륵이다.
강경 미내 다리도 잘 복원해 놓았으니 한번 찾아가서 보기를 권한다.

 
 
 
  ▲ 관촉사의 은진미륵  
 
시간이 나면 양촌에 있는 쌍계사를 찾아가서 대웅전 전면 5칸에 조각된 작품도 보기를 권한다.
이것도 가마솥과 같이 경성박람회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이다.

이런 영험한 철확, 미내 다리, 은진미륵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천리를 멀다하고 찾아왔다고 한다. 철확을 붙잡고 한 가지 소원만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니 그 파란만장한 역사만큼이나 효험이 있었던 것 같다.

이 가마솥은 1천여 명이 먹을 수 있는 밥솥으로써 규모도 놀랍지만, 천년이 넘도록 금간 흔적도 없다.
이 정도 크기면 한번 밥을 하면 몇 백 명이 먹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인근 주택가 담벼락 밑에 묻혀 있는 석조와 함께 그만큼 개태사가 웅장하였고, 그 기세가 대단하였음을 잘 보여주는 고려정신의 혼이 남아있는 멋진 작품이다.

그러면 이러한 거대한 철확이 단순히 밥이나 국만 끓여 먹는 도구였을까?

식사도구로만 쓰이기에는 너무 큰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절에는 유명한 ‘수기(守其)’ 스님이 계셨다.
고려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으로 고종 19년(1232) 불타버리자 강화로 도읍을 옮긴 최우의 무신 정권은 초조대장경 판각 작업에 곧 착수하게 되고 총감독으로 논산 개태사의 승통이신 수기 대사를 지명한다.

바로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총지휘를 하신분이 아니던가?

수기화상이 교정의 총책임을 맡고, 학식이 높은 일군의 고승들이 참여하였고 선승, 문인 지식인이 참석하였는데 특히 이규보가 이곳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는 개태사조전원문을 썼다.
수기대사는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바로 대장경의 목록작성과 판본비교와 교정을 보게 된다.

그것은 학문의 중도적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대장경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화상의 빼어나게 높은 학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수기화상은 이러한 작업의 여정을 일일이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 30권이다.

그렇다면 수기스님이 계신 개태사는 이미 고려조에서 경판을 만드는 기술이 많이 축척되어 있는 절이었을 것 같다. 전성기의 개태사에는 천여 명의 대중이 주석하였다고 하니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경판조성사업의 인적자원이 확보되어 있었다.

또한 당대의 명승 의천(義天)과 균여(均如) 등이 간경(刊經)과 강경(講經)을 위해 이곳에 왕래하였고 한편으로 대장경의 조성에 큰 역할을 맡았던 수기(守其)와 해인사의 간경을 주도했던 천기(天其) 등의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 주석하였다고 하였음을 볼 때, 이는 개태사가 고려 때 활발했던 경판조성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쉽게도 현존하는 개태사의 경판은 한 점뿐이라고 하는데 아쉽다.

이러한 대장경 경판을 만드는 과정은 지리산이나 완도 등의 자작나무를 벌채하여 삼년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어 다시 소금물을 넣은 가마솥에 찐 뒤 그늘에서 말리고 대패질을 한 후, 경문을 붓으로 쓰고 그에 따라 새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큰 가마솥의 용도도  대장경판의 나무를 삼고 쪄내는데 일부 활용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 개태사 철확에는 소원을 빌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던진 동전이 잔뜩 담겨져 있다.  
 
개태사 가마솥 앞에서 수기스님과 대장경을 떠 올리면서 난국의 시대에 위기를 탈출하고자 만드는 대장경판각 작업에서 얼마나 힘든 노력과 정성이 들어갔을까 자문해 본다.

이렇게 나라가 위험에 빠졌을 때도 각자 위치에서 최선의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선조를 가진 우리가 정말 자랑스럽다. 이 개태사는 수기스님의 비밀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을까?

온몸에 난 상처는 역시 보기가 흉한 것일까, 온몸으로 고생하고 소임을 다한 결과가 만신창이 몸만 남아 있어 이렇듯 훌륭한 유물임에도 법주사에 있는 철확은 보물로 지정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대접을 받는 것 같다.

그렇지만 ‘얽은 구멍에 슬기 들었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얼굴은 흉하지만 마음속에 지혜를 간직하고 있으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마음의 보물’ 이다.

그래도 어떠하랴 온몸에서 내뿜는 기운은 상당하니 드러내지 않는 은은함은 천년을 가도 영원한 것이니 나는 그 맛에 개태사를 찾고 소원을 빌면서 그 찬란한 고려정신을 느끼기 위하여  개태사를 자주 찾는다.

이외에 개태사가 대단히 커다란 사찰이었음을 알리는 대형 북이 있는데 이것은 위 ‘개태사석조’가 있는 민가에서 집을 짓던 중 발견되어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명칭은 ‘금고(金鼓)’로 금속으로 만든 북으로 큼직하게 연꽃 16개를 돌린 다음 각각의 꽃 안에 개구리 모양의 동물을 양각한 것이 돋보이는데 직경이 무려 102㎝로 그 동안 알려진 고려시대 금고 중에서 가장 크다. 번성했던 개태사의 고려시대 당시 사세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유물로 알려져 있다.

가마솥에 소원을 빌었으면 이제 옆에 있는 팔각정으로 지어진 건물에 눈길을 돌려보자.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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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속의 감나무와 요사채

<전설 속의 감나무>

 
 
 
  ▲ 개태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나오는 전설속의 감나무. 1970년대에는 이 감나무 가지에서 엄나무가 자랐으나 지난 1995년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최근에 다시 이름모를 넝쿨이 자라고 있다.(사진)  
 
오른쪽에 커다란 감나무가 한그루가 서있다.
그저 맹하니 서있다.

물론 가을되면 홍시도 주렁주렁 열린다.
그때는 정말 보기도 좋다.

예전에 감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로 엄나무가 뚫고 나와 자라고 있어 매우 희귀한 일로 커다란 화제가 되었는데 몇 년 전만해도 이 엄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이를 보라고 사다리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으니 도깨비에게 속은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으니, “일제하에서 독립될 당시 주지승의 어머니인 김광영 여사가 이 절에서 수도를 하면서 매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던 중 계시를 받았는데, 그 계시에는 감나무에서 엄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하면 미륵불이 출현한 것을 알라고 했다는 것이다.
 

   
 
  ▲ 전설속의 감나무 가지 사이로 자라고 있는 이름모를 넝쿨의 모습  
 
수십 년이 넘은 감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1970년대에 그 감나무의 굵은 가지 사이에서 엄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 감나무에 엄나무를 접목한 사실도 없고 또한 자라나는 그 부위에 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종류가 다른 두 나무가 한 뿌리에서 동시에 자라고 있어 화제가 된 것이다. 

엄나무는 1995년경에 죽었고 이 감나무 단목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으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실이 없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라 죽은 엄나무 고목이 감나무가지 사이에 거시기 만하게 불쑥 솟아 있었는데 이것을 보라고 사다리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엄나무가 감나무를 아래서 몸을 파고 들어가 감나무 윗가지 사이로 자라고 있었으니, 이런 것은 자꾸 부연해보면 엄나무가 감나무를 뚫고 들어가는 뿌리의 모습이 남녀의 성행위와 흡사하여 보는 이가 민망스러웠는데, 지금은 아쉽지만 그런 것도 없다.

불교신도 분들은 종교성지에서 웬 음란한 생각을 하느냐고 힐난할지도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 이 뿌리에서 자라던 엄나무를 태워버린 흔적이 있었던 것을 보면 피장파장이다. ‘아쉬워 엄나무 방석’이라고 어쩔 수 없이 베임을 당한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여기에 웬 넝쿨이 자라고 있다.
많이도 자랐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궁금하다.

‘TV는 신비 속으로’에 나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조용히 미소를 머금어 본다.

상상의 자유는 무한대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활력소를 찾는 것이 여정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원래 나무 두 가지가 서로 휘어 감고 자라는 것을 연리목(連理木)이라 하여 우리 조상들은 이것이 상서럽고 좋은 기운을 준다고 하여 인위적으로 만들곤 하였다. 한 몸이 된 이상 수분과 영양도 함께 나누면서 그렇게 한 나무인 양 살아간다. 마치 부부가 포옹한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여 옛날부터 부부의 금실을 표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나무는 원래 동티나는 나무인지라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엄나무가 자랐으리라 생각되지만 가을에 와서 감 서리나 해야겠다.

<깊은 뜻이 담긴 요사채>

 
 
 
  ▲ 뫼산(山)자 형태를 하고 있는 우주당의 모습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 있다. 3동으로 지어졌다. 여기도 '3'의 형상화가 나온다. 그런데 건물이 조금 이상하다. 3동으로 된 집이 약간 튀어 나와 보이는데 설계가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눈을 뜨고 잘 보면 이 건물이 바로 우주당이라고 하는 건물로 ‘뫼산(山)’자 형태를 하고 있다.
사찰 종무소와 다실, 요사채 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일설에는 석조삼존불의 세분부처가 뫼산(山)자 형태요.

이곳의 우주당의 요사채의 3동건물이 뫼산(山)자인 바 서로 어우러져 뫼산(山)자 형태로 가람배치를 한 것이라고도 한다.

1950년 초에 뫼산(山)자 형의 우주당 건물을 음력 5월 5일까지 급히 짓게 하여 관운장을 봉안했다고 하는데, 이는 다가올 환란인 6·25전쟁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예지력이 있는 분들이 당시에는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 건물은 그것을 다시 산뜻하게 복원해 놓았다.

요사채 한 채를 건축하는 데도 깊은 뜻이 있었으니, 역시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나라 사랑하는 법도 항상 물질로만 하는 것임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이것도 예지력 있는 분들의 뜻이 있어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니 호국 사찰로서의 전통은 계속 되는 것 같다.

요즈음은 약간의 예지력만 생기면 전 국민을 상대로 국운이니 예언이니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분들이 참 많다. 그렇지만 이러한 능력은 자신의 수행도구로서 삼아야 하는 것이 일차적이며, 진정으로 나라의 운명에 급격한 변화가 예지된다면 보이지 않는 처방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닐까?

세상 이치를 읽는 능력을 받은 것은 축복일수도 있지만 그만큼 커다란 의무가 부과 되는 법이 아닐는지, 국민들의 삶만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최근에 지어진 건물은 가운데 건물이 좀 더 튀어 나와야 뫼산 자 형태가 되는데 일자로 되어 있다.
바랜 옛 사진을 보면 일자 형태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뫼산 자 형태가 아니고 순수하게 ‘3’의 형상이 아니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지어진 건물이라고 지나치는 것들이 이렇게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 줄을 누가 알겠는가?

‘천생팔자가 누릉밥이라’ 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대단케 여기지 않는 누릉밥 정도라도 여행이 무엇인가? 하찮은 것에도 의미를 달고 찾아보는 것 그것이 진정 기쁨을 누리는 여행의 백미인 것이다.

‘찰찰(察察)이 불찰(不察)이니’ 무엇에 한번 맛을 붙이면 끈덕지게 떨어지기 싫어함으로 알기에 노력하고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그 보는 재미란 것이 야릇한 춘화도를 살짝 보는 것만큼이나 짜릿한 것을 어찌하랴!

여기에 있는 그 유명한 미륵삼존불도 가운데 부처님이 키가 더 크다. 이 역시 뫼산(山)이 아닌가?
그리고 이 요사채 건물도 뫼산(山)이니, 그렇다면 쌍권총을 가진 것이 아닌가?
완전히 대칭되는 두 가지 산이 있으니 산산(山山)!

세 분이 한자리에 모셔지면 뫼산(山)자가 된다는 이치를 깨달으라는 의미이며 산(山)이 온전히 형성되어야 비로소 출(出)자가 형성되고, 출(出)자가 형성되어야 미륵삼존불이 세상에 출(出)할 수가 있다는 것인데.

뫼산(山)자로 서서 계신 미륵삼존불 중  한분은 구천상제이고 한분은 옥황상제라고 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한분은 아직도 몰라 두 분만으로는 뫼산(山)자가 형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두 분으로는 뫼산(山)자를 온전히 형성되지 못하여 출(出)자가 형성될 수가 없고, 때문에 미륵삼존불이 세상에 출(出)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미륵삼존불이 출(出)하기 위해서는 인세에 오신 마지막 한 분의 정체를 더 밝혀 모셔야만 된다는 이치가 개태사의 이 미륵삼존불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한 분은 누구냐’ 하는 것! 그것을 찾는 여행,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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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개국사찰인 개태사 대웅전의 모습.  
 
자! 계룡산 줄기에 또 다른 역사가 보존되고 있으니 유동리를 지나 화악리 오골계팻말을 보고 지나가노라면 S-OIL주유소 전 버스승강장사이로 굴다리가 나있는데 여기를 돌아가면 개태사가 나온다.

굴다리 사이로 승용차를 힘겹게 빠져나오면 정말 형편없는 절이 나온다. 조그만 암자 같은 곳이니 개태사가 큰절인 것으로 알고 찾아간다면 정말 실망이 앞설 것이다.

고려를 창업한 ‘태조 왕건’,  TV드라마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온 그 왕건!  그분의 영정이 존재하고 있었던 그 절이니 그 규모가 대단했을 텐데......

고려사절요에는 ‘개태사를 지을 때 사치스러운 것이 극도에 이르고.....12개월 만에 개태사가 완성되니 낙성법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소(疏)를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태사를 지을 때는 10만여 평이나 되고, 8만9암자(八萬九庵子)를 소속시켰다고 하니 고려의 호국대찰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지만 눈앞에 모습은 그 것과 다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이제부터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나씩 쳐다보고, 아기자기함을 느껴보자.

이절에 우리의 전통신앙의 모든 것이 배어있고 잘 진열되고 있으니 이곳에서 우리 조상들이 말해주고자 하는 정신세계의 모든 것을 천천히 찾아보도록 하자.

여기서는 놓칠 것이 하나도 없다.

일주문에서 사찰정문에 이르는 너무도 짧은 길

일주문에서 사찰정문에 이르는 길 양편으로는 거대한 고목들, 향나무냄새를 맡으면서 심호흡을 해보자 상큼함이 베어 나올 것이다. 원래 향나무를 심는 것은 귀신을 물리친다는 ‘신목(神木)’의 성격을 띠는 나무인지라 보편적으로 묘지나 사당 주위에 많이 심어놓았다.

이러한 신목으로는 향나무 외에 회화나무, 엄나무, 화살나무를 많이 심기도 한다. 특히 회화나무는 학자집안에 많이 심고 부귀를 불러온다고 하여 많이 권장되어 심는 것 같다.
대전 현충원에도 이러한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계룡시에도 금암동에는 회화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공해에도 튼튼하고 보기도 좋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입암 공단 조성작업으로 200년 이상 된  ‘엄나무’가 잘려나갔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엄나무는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기 때문에 200년 이상 된 엄나무는 보기도 힘들고 그 정도로 자라기도 힘들다.

계룡시에서는 택지개발이나 주택개발 등으로 잘려나가는 고목들을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이곳이 신령 깊은 땅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인식한다면, 그 것이 상록도시 이미지에도 부합하지 않을까.

그나마 인근 대전시처럼 기존에 잘 자라는 나무도 베어내고 새로 나무를 3천만그루를 심는다고 아우성치지는 않아서 좋지만 그렇다고 잘려나가는 고목나무들을 도외시 한다면 결국은 우리가 그 해로움을 당할 것 아닌가.

방금까지 달려온 도로의 삭막함이 일순간 사라진다면, 이제 역사의 길이 시작되는 문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풀어보자.

이야기를 다시 천호산으로 돌려보자.

우리가 쓰는 연호(年號), 단기(檀紀)는 하나의 시발점을 의미하듯이 불가에서는 불기(佛紀)를 쓰고 있다.
그런데 개태사 초입의 일주문상량에는 불기 3007년으로 씌어있고 정문상량에는 불기 2542년으로 다르게 적혀있다.

왜 다를까?

한 건물에 나이가 465년씩이나 차이가 나는 다른 두 가지 표시를 해놓고 있으니 이 건물의 나이가 불량한 것인지 제멋대로 적어놓은 것인지 그렇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이 절에 배치되고 있는 모든 것은 상당히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아무렇게 배치되거나 허접스럽게 가져다 놓은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하나하나에 주의를 더욱 기울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도래한 고구려 시대로부터 1962년까지 약 1300년 동안은 석가부처의 탄생을 1027BCE로 하는 북방불기를 사용해오다, 1956년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 불교도대회에서 불법의 기원에 대해 당해 연도인 1956년을 2500년으로 공통적으로 적용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태국과 미얀마 등의 남방불교에서 쓰던 불기가 채용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본래 쓰던 불기 3000년과 약 500여년의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태사는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으로 인해 북방불기를 고수하고 있다고 보여 지는데 북방불기(불탄 3007년=서기 1980년, 일주문상량)와 불멸을 기원으로 하는 남방불기(불기 2542년=서기 1998년, 정문상량)을 함께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불기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는 것 같으나 너무 많은 지식은 여행의 가치를 고식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자. 

향나무 길을 걸어 일주문에서 절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은 짧다.
‘풀끝의 이슬’같이 그것이 인생인 것을, 너무 짧아 허무감을 느끼기 전에, 자 고개를 들어  개태사 정문 현판을 보자!

‘대천호산 삼천일지 개태사(大天護山 三天一地 開泰寺)’ 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개태사의 전체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개태사가 있는 이 뒤 산이 바로 천호산(天護山)이다. 천호산의 예전 지명이 황산(黃山)이다.
태조 왕건이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여겨 황산(黃山)이라 부르던 승전지의 배산(黃嶺의 북부)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연산 뜰에서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던 태조 왕건이 위기에 몰리자 갑자기 천호산에서 신장을 들고 말을 탄 병사들이 나타나 백제군을 무찌르게 되었다고 하여 산의 신에 대한 가호에 감사를 드린다고 황산을 천호산이라 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남해 금산의 지명을 바꾸어 준 것과 같이 높으신 분이 뜻이니 천호산도 그렇게 지어지고 불리우 게 된다.

그렇다 이 근처, 연산 앞뜰이 황산벌이다.
이 지역은 예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서, 계룡산의 관문으로 여기를 지키다 순국한 수많은 원혼들이 있는 곳이었다.

유명한 계백의 황산벌이 바로 이 언저리인데, 양정 고개에서 연산면으로 들어가는 들판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는 계백장군이 신라군의 젊은 화랑 관창의 목을 벤 곳으로 유명한 관동리가 있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른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곳이 이곳 황산벌 싸움에서였으니, 이곳이 바로 계백 장군의 결사대가 순국한 곳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의 아들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명실상부하게 통일 대업을 달성한 곳도 바로 여기이다.

수많은 왜인들이 유독 이곳에 많이 침략을 해온 것도 고려의 3대 사찰로서 이 곳 일대에 수많은 전투가 치러졌으니, 그리고 동학혁명의 깃발에 다시 집결하게 된 곳도 이곳 계룡산이니 이곳에 왜 그리 선조들은 애착을 가지고 지키려 했을까?

천호산은 연산이다(連山).

연산이란 연이어진 산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병풍첩이 붙어서 펼쳐진 것같이 여자한복의 주름이 첩첩이 늘어진 것과 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산은 기운이 좋다고 하는데 익산에 용안에 있는 뒷산이 그렇고 대전에 있는 구봉산이 연산의 형태인바, 이러한 산들의 주위에는 정말 기운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연산의 형태이지만 느슨하게 연이어 있는 대전의 월평산성이 있는 월평산도 갑천을 따라 용 같이 길게 늘어져 있는데 여기를 뚫어 길을 낸다고  많은 마찰이 생기고 있다.  이런 산은 등산을 많이 하면 원광대 조용헌 교수의 표현대로 ‘마운틴오르가즘’을 많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연산이 늘어진 산인 늘뫼-놀뫼-논산이 되었다고 하는데 여하간 보기 좋은 산이다.

요새는 산중턱까지 전원주택을 진다고 산을 마구 헤쳐 놓았으니 볼썽사납다.  
이제 다시 개태사현판으로 돌아가서 삼천일지(三天一地)라고 쓰여 있는데, 하늘은 3이요 땅은 1이라, 즉 세 분 하느님을 한 분이 땅에서 받든다는 뜻이다.

삼천은 세 분 하느님으로서 여기 개태사에서는 미륵삼존불을 의미하고, 일지는 땅에 계신 한 분이 세 분의 하느님을 받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한 분이 바로 개태사의 삼존불이 모셔진 전각 왼편에 위치한 팔각정에 모셔져 있는 ‘나반존자’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태조 왕건이 나라를 창립할 당시는 삼신사상이 강했고 단군에 대한 믿음도 강한 시기이고 지금도 우리나라의 단군영정의 표본이 있는 장소인지라  삼천세계는 환웅, 환인, 단군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결국  천부경의 삼태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현판이 만들어진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을 보면  국초 이래로  ‘연산현(連山縣) 계룡산 개태사 터는 곧 후대에 정씨가 도읍할 곳이다.’라는 참설에 영향을 받아 삼천세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장소임을 알리는 표현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들의 신화에 담겨진 ‘3’의 의미를 지나치게 간과해왔다.
우리 민족의 탄생신화에조차 녹아 있는 3은 가장 환상적인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삼족오, 풍물 굿의 삼채장단인 삼박자, 삼성혈, 삼재수, 삼정승과 민족 신화에 3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음은 우리 민족의 형성기부터 3이 매우 중요했음을 암시한다. 하기야 기독교에서도 삼위일체가 있고, 유교에서도 삼강오륜이 있으니 3이라는 숫자의 묘미는 어디까지 일까? 삼천세계는 결국 3을 중시하는  삼신사상의 영향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3을 중시하는 우리 풍속에 삼신할멈이 있다.
제주도의 명진국 생불 할망 본풀이에서는 삼신할멈의 탄생과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삼신할멈의 나이가 일곱 살 되던 해 정월 초하루 인시에, 옥황상제님이 불러서 "너는 인간세계에 가서 아기를 낳게 하는 삼신할멈이 되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삼신할멈은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고 내려오다가, 아기를 낳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 아기를 낳게 해주었다. 삼신할멈은 은가위로 그 아이의 탯줄을 끊고 석자 실로 잡아맨 다음, 더운 물로 목욕시키고 유모를 불러 젖을 먹이는 한편, 미역국을 끓여 산모에게 먹였다.
그리고 사흘 후에 산모에게 쑥물로 목욕케 하고 태를 사르고 아기에게는 배내옷을 입혔다.
민간에서 삼신을 모시는 과정도 위와 같다.
      (주강현저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중에서)

개태사의 대표적인 삼불부처도 삼신신앙의 확대 과정에서 등장한 부처가 아닌가 싶다.
삼불제석도 아기를 점지해주고 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
그래서 개태사가 미륵도장으로 유명했던 것 같다.
 
삼불의 ‘불’을 원래는 근본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인 ‘부리’에서 나온 말이 후대에 불교와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개태사에는 이렇게 ‘3’ 자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개태사 현판의 ‘삼천일지’, 요사채 3동건물, 팔각정에 모셔진 3분, 창운각에 모셔진 3분과 용화궁에 모셔진 석불입상 3분이 모두 3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빼먹지 말고 알아야할 3이 있으니 창운각안에 모셔진 단군 옆에 놓여 있는 천부경 안에 있다.
그것은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라는 표현 중 ‘석삼극’이라는 글인데, 어려운 글이다.

자, 이제 ‘개태사(開泰寺)’

태조가 친히 기원문(祈願文)을 지어주었는데, 절 이름을 개국에 이르게 된 것은 부처와 산신령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개태사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이 있었으며,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신탁(神託)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 온 절이다.

고려시대 왕실의 원찰이자 호국 사찰로는 개성의 봉은사, 봉업사, 논산의 개태사가 있어 고려의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고려의 존립 475년 동안 왕실에서 한해도 빠짐없이 선왕에 대한 예를 올렸다고 한다.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km에 달하는 토성이 있는데 승병이 주둔하였다고 전한다.
승병이라는 것은 고구려이전 시대부터 조의선인이라고 하여 왕의 친위부대의 명칭인 것이다.
절의 스님으로 구성된 병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절에는 유독 고려 말 이후부터 왜구의 침입이 많았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에는 한나라의 운세를 바꿀 수 있는 ‘해인(海印)’이 묻혀 있다고 한다.
이것만 있으면 천하도 두렵지 않는다고 한다.

이 땅에서 태생한 백제의 후손들이니 이를 모를 리 없을 것이고 이를 찾기 위하여 수많은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쳐들어 왔으니 바퀴벌레도 아니고 죽여도 나타나니 ‘개뿔도 없는 인간’들 같으니, 반성하는 뜻이 없는 민족이다.

옛날 삼신께 죄를 지은 황궁 씨는 자기 몸을 스스로 결박해 천제 단으로 나아가 하늘이 정죄해 줄 것을 자청했는데 이러한 속죄행위를 계불 의식이라 한다. 흔히 ‘개뿔도 없다’라는 말은 뿔 없는 짐승인 개(犬)의 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황궁 씨의 계불 의식에서 유래 된 말이다.

최영 장군은 1376년에는 연산의 개태사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하였다고도 하는데 최영장군까지 나선 것을 보면 결국은 이러한 대규모사찰도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대전을 향해 진군 중인 왜군에 의해 개태사가 불태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여립이 여기를 중심으로 한 모반이 있었다고 하여 조선왕조에서 의도적으로 더욱 폐사 화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신도 안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조선왕조는 이곳 계룡산일대를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 진다. 대한제국 말까지 이 신도 안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못했다.
 
누구든지 이곳에 들어와 득세하는 기미가 보이면 정감록을 꿈꾼다 하여 관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백성들이 들어와 살 수 없는 곳으로 대부분의 토지가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주변은 제약이 덜했지만 이곳에는 김장생, 송시열 등의 기호학파의 중심지로, 조선중기 이후 강경포구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파평 윤씨, 광산김씨 등의 쟁쟁한 문중들이 그 터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권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국초 이래로 “연산현(連山縣) 계룡산 개태사 터는 곧 후대에 정씨가 도읍할 곳이다.” “이 씨는 망하고 정 씨는 흥한다는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尊邑興)”이라는 참설에 과민 반응을 보여 왔던 조선왕조는 ‘정씨 외에’ 다른 성을 가진 집안이 계룡산일대를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하여 세도를 부렸어도 이를 용인해오는 정책을 써왔다.

‘삼발에 한번 똥 눈 개는 늘 눈 줄 안다’고 한번 죄를 진 사람은 언제나 의심받게 되니 그러다가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였으니 그 이름이 정여립(鄭汝立)이다.

조선왕조는 무엇이 두려워 정여립모반사건과 기축옥사를 만들어 정여립을 죽게 하고 진보적이고 유능한 인사들을 대부분 죽이거나 유배 보냈을까?

정여립모반사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 10월에 일어났고, 그때 죽거나 다친 자가 무려 1천여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나라의 인구가 500여만 명에 불과했다니 그래서 흔히 ‘기축옥사’를 ‘조선조의 광주사태’ 라고도 한다. 이 때에 호남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정여립을 두려워 한 것이 진정 무엇일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는 인민주권설, 능력에 따라 누구든 임금이 될 수 있다는 공화주의를 주창했으니 가히 혁명적인 사상 이론을 외쳤다. 어찌 보면 당시로서는 역성적인 사상가라고도 하겠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도 50여년 앞서 공화주의를 외쳤으니, 단재 신채호는 ‘그는 4백 년 전에 임금은 신하에 대하여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동양전래의 유교적학설인 군신강상설(君臣綱常說)을 타파하려고 했던 위대한 사상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주장과 움직임이 거대한 혁명으로 까지 가지 못해, 루소의 민약론에 영향 받아 거대한 파도처럼 장엄하게 전개된 프랑스혁명에 비할 수 없게 되었다고 단재 신채호선생은 말씀하시고 있는데 대단한 사상가였음은 틀림없다.

율곡 이이도 칭찬해 마지않을 정도로 당대의 천재로, 이이는 그의 학문과 인물됨을 사랑하여 기회 있을 때 마다 그를 요직에 천거하였고 당대의 최고의 엘리트들이 가는 홍문관의 수찬(정6품)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데 그는 이이가 죽자 집권파인 동인으로 변신하였고 이이를 비방하기에 이르게 되니 이에 선조가 “이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네가 지극히 따르더니 지금은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라고 질책하자 ”처음에는 신이 그들의 마음을 몰랐으나 이제야 깨달았으므로 절교하려는 것입니다”하면서 “신이 지금부터 다시는 천안(임금의 얼굴)을 뵐 수 없겠다”고 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선조를 쳐다보았다고 할 정도로 기개가 당당한 정여립이다.

더구나 양반과 상놈, 귀한 자와 천한 자를 구별하지 않아 그와 뜻을 같이 한 선비들은 물론 천민과 승려들이 많이 몰려들었으니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고,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고 외치면서, 전제군주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세상에 경천동지할 소리요. 당시의 유교의 가치관을 뿌리째 뒤엎을 만한 주장인지라 조선왕조에서는 섬뜩 함을 아니 느꼈겠는가.

더욱 왜란에 대비한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영향을 받아 대동계라는 무장단체를 만들고 정여립의 사상에 영향 받아 일부에서는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는 인계, 양반살육계(兩班殺戮契-다무력폭동단체)등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었으니 정권차원에서 불안을 아니 느낄 수가 있겠는가?

정여립이 일찍이 중 의연의 무리와 국내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폐사(廢寺)가 되어 있던 개태사의 벽에,

‘손이 되어 남쪽 지방 노닌 지 오래인데
 계룡산이 눈에 더욱 환 하여라
 무자 · 기축 년에 형통한 운수 열리거니
 태평 성세 이루는 것 무엇이 어려우랴’

라고 시를 썼는데, 그 시가 많이 전파하게 된다.

혁명의 시발점이 되는 표현이다.
이러한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을 조선왕조에서 가만히 놔두겠는가?

‘끽’이다

그곳도 계룡산아래 개태사에 알쏭달쏭한 시를 쓰고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그를 계룡산 정도령으로 보아 그 싹을 자르기 위하여 ‘애매한 두꺼비 떡돌에 치였다’고 무참한 살육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그의 집터며 선산, 그리고 사당 등은 모반 당시 숯불로 혈맥이 끊기고 파헤쳐졌으며 그와 인연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쑥대밭이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가 뜻을 못 펴보고 사라졌으니 안타깝다.
결국 개태사는 또 한 번의 사상가로 인하여 존립자체가 위협받게 되고 소멸될 위기에 이르게 된다.

개태사는 이래서 우리에게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된다.

절 안으로 발을 들여놓아보자.

여기에서 관람순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다오는 반시계방향으로 보는 것이 더 멋있고 이해하기가 좋다. 반시계방향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옛날로 가는 타임머신이 아닌가?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왕암 마을!

가야곡에서 운주로 넘어가는 국도 길옆에 있었으니, 여기를 찾아가기 전에 들러보아야 할 곳이 많으니 하루 일정을 잡고 좋은 여행코스를 소개하니 참고를 하시라.

계룡시에서 출발하여 유동리를 지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화악리 이래진 오골계 마을’이라는 신호간판이 나오면 철길을 건너 여기를 둘러보자.

 
 
 
  ▲ 화악리 오골계.  
 
연산 오골계 마을은 태조의 아들인 익안대군 14대손인 이형흠이 처음으로 오골계를 사육하다가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것을 그 후손인 이래진이 계승 사육하였다고 한다.

화산 전주이씨 지천석비가 마을입구에 씨족마을 이라는 느낌과 전설을 간직함을 보여 주는 것 같은데 몇 그루의 느티나무고목과 돌무덤이 있어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여기 느티나무 고목은 천호리 고목과 아울러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개태사를 창건하고 국찰로 명하였다.
왕건은 개태사를 짓는데 공이 큰 두 사람을 불러 느티나무 한그루씩을 상으로 내렸다.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집 근처에 심고 정성을 다하여 가꾸면서 서로 의형제를 맺고 도우며 살아갔다.
그 후 형은 옥동자를 낳아 훌륭하게 키웠다. 동생 역시 왕이 내려준 나무를 정성껏 가꾸어 무성하게 자랐다.

어느 날 왜적들이 마을에 침입하여 느티나무 그늘 밑에서 고기를 굽고 술상을 차려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그 나무를 심은 동생은 참다못해, ‘ 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려 주소서’하고 빌었다.
그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한바탕 폭풍우가 휩쓸더니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그 나무를 향해 벼락이 내려쳤다. 왜적들은 벼락에 맞아 죽고, 그 이후 이 마을에는 더 이상의 화는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는 벼락을 맞아 화상을 입어 속 부분이 불에 탄 채 텅 비어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오석으로 커다란 오골계조각돌을 세워놓았는데 재미있는 발상인 것 같다.
이곳의 오골계는 천연기념물 265호로 지정되었고 당나라를 통해 들여온 것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잘 자라지 않고 이곳에서만 사육되었다고 한다. 다른 지역은 전부 여기서 분양된 것이라 한다.

최근에 익산부근에 닭 캐슬 병이 유행했을 때 이곳의 오골계를 다른 지역으로 공수 받는 귀한 대접을 받을 정도였으니 부럽다.

조선연산군 때에는 일반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정승까지도 오골계를 먹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벼슬을 빼앗기고 심지어는 귀향까지 보냈다고 할 정도로 귀하게 보호되었다고 하니 예나 저나 귀한 대접을 받는 꼬끼오(高貴吾)오골계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전비방(家傳秘方) 책에는 이 오골계가 중풍, 고혈압에 너무나 신기하게 잘 듣는다고 적혀 있다.  그 방법을 소개하면, 탕을 끓일 때는 털과 내장을 버리고 해바라기 꽃 둥근  것 전체를 두세 개를 따서 오골계와 같이 푹 고아 국물과 살코기를 먹는데 사람이 따라 다르겠지만 다섯 마리 정도면 90퍼센트 완치를 볼 수 있다고 하니 권하고 싶다.

또 다른 방법은 오골계 한 마리에 검은콩 한홉을 넣어 달여서 마시되 세 번만 먹으면 효력을 본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 화악리 이래진 오골계 집은 정성을 다해주는데 양과 주머니 사정을 비교하면  가격이 좀 비싼 것이 흠이다.

여기를 보고 다시 돌아 나오면 철길 건너 쪽 앞 언덕위에 모 방송국의 ‘칭찬   합시다’에 나오시기도 했다는 신복균 씨가 운영하는 허름한 묵밥집이 있다. 시각장애인으로 장애인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분인데 많은 분들이 찾는 곳이다.

 
 
 
  ▲ 고려의 개국사찰인 개태사 대웅전의 모습.  
 
다시 하행 길로 가면 개태사역에 이르게 되는데 역 옆에 주유소 가기 전 버스주차장 옆으로 개태사로 진입하는 좁은 통로 길이 나있으니 조심해서 통과하면 종교박물관, 왕건의 고려왕조 개태사가 나타난다.
무조건 둘러보아야 할 곳이다.

다시 오던 길로 내려오면서 좌측 산을 보면 이것이 천호산이고 용마루같이 늘어진 병풍처럼 주름이 겹겹이 생겼다. 36개의 봉우리가 정말 멋있다.
그래서 늘어진 산이라는 의미로  '늘이기재' 또는 '누르기재' 라고도 부른다.
한문으로는 연산(連山)이 우리말로 놀뫼가 한자로 음역되면서 논산이 되었다고 한다.

연산검문소를 지나면서 공단좌측으로 벌곡으로 가는 연산 구길 로 접어들어 내려가다 보면 송불암이 있는데 여기에 서 있는 부처님이 계신다. 옆에 소나무가 멋있다.

그 아래에는 예전에 금들농원이었는 데 지금은 ‘산애들애’라는 참나무 장작  바비큐 집이 있는데 정원을 잘 가꾸어 놓았다. 여기서 연산사거리 가지 전 앞에 있는 주유소 좌측으로 돌아서 산 쪽으로 한참을 가면 ‘콩콩이와 청청이’이라는 상호로 두부와 김치찌개를 하는데 맛이 끝내준다. 한번 가보기를 권한다.

여기는 유명한 ‘산꾸지뽕’물을 주는데 여성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물이니 후회는 없을 것이다.
먹는 이야기는 여기쯤하고 연산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서 한민대학교를 지나가다 보면 여기도 맛있는 집이 있는데 송어무침집이 있다.

시간나면 들리고 아니면 그냥 직진하여 호남고속도로 위를 지나게 된다.

이 호남고속도로를 경계로 예전에 신라와 백제군이 대치를 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보아온 곳이 황산일대로 황산벌전투가 있었던 장소임을 알고, 고속도로 경계를 지나 200m쯤 가면 당골 마을에 김일부 선생의 묘역이 있으니 한번 가서 참배하고 계속 달려가 보자.

양촌시내에서 직진하면 유명한 바랑산, 대둔산과 그 일당들이 기다리지만 다음 기회로 하고 가야곡 쪽으로 진입하여 (물어서 가야 할 것이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좌측 산 옆에는 한국신약이 보이면서 ‘쌍계사’가 나온다. 여기는 가족들이 필히 도시락을 싸가지고 찾아보기를 권한다.

 
 
 
  ▲ 쌍계사 대웅전과 내부모습.  
 
쌍계사 뒷산이 불명산이고 이 주변은 아직도 옛날의 절이 많아 문화재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불명산 뒤쪽 완주에 화암사가 있다. 화암사 극락전은 그 내부도 멋있지만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하앙식(下昻式) 구조이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세까지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라고 하여 한국의 건축양식을 깔보던 일본이 이 하앙식 구조 건물이 발견되자 코가 석자나 빠졌다고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절이다.

자! 쌍계사 이절은 대웅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 품삮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절이다.

본인이 작성하여 법원문집에 실린 글을 옮겨 보겠다.

“ 예전에 포장이 안 되어 다니기도 어려웠으나 지금은  포장이 잘되어 있다.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전각이 손실되어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들기는 하나 구례의 쌍계사에 견주어 절 자체로는 논산의 쌍계사가 더 멋있다. 특히 조각에 의한 장식 미는 그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 보물 제40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이 법당  안을 감돌고 있다.

이제부터 대웅전 그 자체가 지니는 조각의 극치를 만나보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도깨비를 찾아보자.

전면 5칸에 모두 열 짝이 달린 문에는 국화, 작약, 모란, 태극, 무궁화, 연꽃 등 6종의 꽃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채색되어 있는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신기한 것은 법당 안에 들어가서 문을 보면 조각된 그림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문살만 보인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박람회를 핑계로 문짝을 떼어서 서울에 가져가서 구경까지 시켰다고 한다.

법당을 들어서면 법당입구위에 ‘게’그림이 그려져 있다.
웬 절에 게 그림이 그려져 있을까 의아심이 들겠지만 이것이 남방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남의 미황사에는 법당의 기둥 주추 석에 이런 게 그림이 나오는데 이런 것이 모두 남방불교의 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 이제 정면의 탱화를 보자. 웬 임금이 오만하게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유학 속에서 불교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석가여래부처님을 모시고 좌측으로 아미타불과 오른쪽은 약사여래를 모셔두고 있는데, 고개를 들고 부처님 위를 쳐다보면 닫집이 있다. 이 닫집은 임금님의 자리나 부처님의 자리위에 장식으로 만들었다는 집의 모형이다. 이 닫집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석가여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물을 토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멋진 조각솜씨이다. 여기서는 감탄사가 나와야 한다. 닫집 앞에는 새를 매달아 놓았다. 이것이 바로 용을 잡아먹는 전설속의 금시조라고 한다.

고개를 뒤로 젖혀서 천장을 보면 나무로 만든 학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천상세계를 실감나게 해준다.
이쯤 되면 법당 안이 조각전시장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뒤로 젖힌 고개를 바로하고 부처님 앞에 놓여 있는 긴 탁자를 보자.
이 탁자는 15미터의 길이에 나무를 잇거나 합하지 않은 한 나무판이다.

법당의 기둥 중에 하나는 칡뿌리 기둥이라는 전설이 있으니 좌측법당으로 들어가는 쪽 뒤에서 두 번째 기둥이라고 한다. 봉황루에 있는 법고는 통나무를 파서 만들었다는데 절의 역사만큼 천년을 넘겼을 것이라고 추정 되고 있는바 아직도 온전함에 감탄을 금할 길 없다.

이런 조각 작품으로 잘 지어 놓은 집에는 부처님 말고 그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자 여기서부터 우리의 도깨비를 찾아 황당함의 극치를 맛보자.
우리의 도깨비는 본래 뿔이 없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뿔 달린 일본도깨비가 들어와 이것이 도깨비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이 국가로 발전할 당시, 음양도(陰陽道)라는 유파가 있었는데 그 방면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음양사(陰陽師)라 불렀다. 그들은 영주나 귀족, 국가경영의 고문으로서 폭넓게 활약했었다.
지금도 이들의 활동이 일부 보이듯 하다. 도깨비는 바로 그 음양사들이 만들어낸 요괴(妖怪)인 것이다.

고구려 군인들은 뿔 달린 투구를 쓰고 나오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무서워했고 이것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뿔 달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학자도 있다. 치우천황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그렇지만  뿔 없는 도깨비가 우리의 도깨비 본래 모습이다.
보통 도깨비 문양은 지붕의 기와에 새겨놓은 것이 많은데 여기서는 당당히 불집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쯤이면 도깨비를 찾았을 것 같기도 한데, 도깨비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봉황루 전면 창방부에, 나머지 두 마리는 대웅전 편액의 위쪽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참 순하디 순한 모습이다. 저 도깨비들이 장난을 하여 멋진 조각품을 해놓은 것이 아닐까 하여 미소를 머금어 본다. 토속종교가 절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 쌍계사를 나와 시간이 난다면 바로 옆에 있는 감코리아를 둘러 곶감 말리는 작업도 구경하고 한방 곶감도 한번 시식해 보기를 권한다. 양촌일대가 곶감의 주산지라 유명한 곳인데 여기는 곶감을 특수 한방 처리하여 제조하고 있는데 맛이 참 좋다. 고집쟁이인 ‘이주용’사장이 만들어 낸 걸작품이다.

감을 냉장고에 얼려서 썰어 놓으면 시원하면서 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양주안주로는 최고이다.
삼성그룹에서 이곳의 곶감을 구입하여 도자기 단지에 넣어서 선물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서울의 일부 백화점에 까지 납품되고 있다고 한다. 머지않아 계룡시에 홈플러스가 들어서면 이곳에도 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여기를 나와 다시 가야곡 쪽으로 가면 사육신의 한분인 ‘성삼문의 묘소’도 있으니 참배를 하기를 바란다.

성삼문의 시신은 능지처참되어 사분오열되어 없어진 것을 뜻있는 분이 시신일부를 수습하여 여기에 모셨으니 참배하고 언덕을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육곡리유적지’가 있고 그 아래 ‘가야곡왕주’ 공장이 있다.

술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는데 여기 물맛이 예전부터 좋은 것 같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터를 잡고 살아온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일대가 양질의 흑운모 화강암임을 누가 알랴?

여기서 가야곡사거리에서 운주 쪽으로 방향을 틀어 재를 넘어가기 전에 왕암리가 나오는데 여기가 왕암구들장이 생산된 동네이다. 여기부터는 물어보아야 찾아 갈 수 있고 약간 비포장산길을 올라가야 하니, 가족들과 왔다면  힘들기 때문에 운주에 가서 저수지 구경도 하고 화산붕어찜도 먹으면 하루의 여정이 저물 것이다.

왕암리 산속을 올라가다 보니 여기저기 구들장으로 축대를 쌓아놓고 때로는 구들장으로 쓰려고 바위를 떼어 놓은 흔적이 보이는데 정상 거의 올라가니 광산입구가 파쇄석으로 폐쇄되어 있었다.

지금은 채광을 하지 않고 있는데 나랑 같이 간 나에게는 ‘풋고추에 절이 김치인’ 한상교 선생은 은은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한다. 운모가루 때문에 바위자체가 흰빛으로 아른거리는데 더 들어가 볼 수 없어 여기서 서성거리면서 좋은 기운을 받고 흑운모 몇 점을 수집해서 나왔다.
옛적에는 흑운모 구들장1장에 논1평과 거래가 될 정도였다니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던 같다.

처음에 여기를 찾아갈 때는 건너편에 있었던 석회광산을 착각했었다.
이 광산도 폐광되었는데 거기도 석회 뿐 아니라 흑운모돌이 많이 나오는데 이 채광동굴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에 온몸이 오싹해진다.

한선생은 이곳의 기운이 쭈삣쭈삣하여 강하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정말 작열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괜찮은 장소인지라 본인도 어깨통증 때문에 몇 번 가봤는데 온몸이 시원해지면서 기분이 상큼해지는 것이 나만 가기는 아까운 생각이 거듭 드는 장소이다.
신경통 등 통증이 있으신 분들은 이곳의 기운을 쐬면 상당한 자연치료가 되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런 데에 진정한 목적의 요양시설이 들어서야하는 것 같은데 최근에 다시가보니 웬 암자를 건축하고 있어 야릇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만 있다면 어떠랴.

건강에도 좋은 석재이니 한번 찾아가서 온몸으로 기운을 받고 오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이런 곳에 요양원 시설이 들어선다면 참 좆으련만 당시 경성태창방직의 백낙원, 백낙중 사장을 비롯한  만 그놈에 경제성 때문에 문제이다.

건강! 건강! 웰빙! 웰빙! 하는 시절에 이런 곳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마치 ‘터진 꽈리 보듯 하니’ 물건이나 사람을 아주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고 중히 여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저 우리 쌀, 우리 농산물만 죽어라 찾으나 왜 이 땅에 나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하면서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남이 좋다고 하니 나도 한다는 안이한 생각들이 너무 퍼져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속담에 ‘참깨 들깨 노는데 아주까리 못 놀까’,  ‘참나무에 곁 낫걸이’라는 글이 있다.

별 어 중이 떠 중이들이 다 활동하거나 참여하는 일에 어엿한 내가 어찌 못 끼겠는가 하는 것으로 남이 하니까 나도 하고, 제 능력은 생각하지도 않고 엄청나게 큰 세력에 부질없이 덤비고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이제 계룡산아래에서 만이 이라도 이런 분위기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보통 흑운모가 섞인 화강암지대는 예로부터 인물이 많이 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돌의 좋은 기운이 많이 방사된다고 한다. 여행은 이만하고 무대를 다시 신도 안 왕궁 터로 옮겨보자.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