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역성지(향적산방)/주변환경'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08.11.08 산신, 나 무시하면 안돼
  2. 2008.08.25 향적산 국사봉
  3. 2008.08.25 계룡의 산(계룡산,향적산,천마산)
  4. 2008.05.19 관운장-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아직도 모르냐
  5. 2008.05.19 부처-이름이야 어떻든 나는 남북통일이나 기원 할 란다
  6. 2008.05.19 단군-개태사는 나를 주인대접 하는데 후손들아 천부경 읽어 봤냐?
  7. 2008.05.17 칠성신-우리민족은 북두칠성에서 온 외계인
  8. 2008.05.17 나반존자-내가 인간의 원조여!
  9. 2008.05.17 살아있는 영물 개태사 가마솥
  10. 2008.05.17 고려의 개국사찰 '개태사'
  11. 2008.05.17 개태사 - 종교박물관속의 그 남겨진 유물은 무엇을 알리려고 하는 것일까
  12. 2008.05.15 두계천-청계천만 명당수인가?
  13. 2008.05.15 불종불박-주춧돌에 새겨진 뜻
  14. 2008.05.15 왕궁 터 구들장을 찾아가면서 잠시 느끼는 여담
  15. 2008.05.15 왕궁 터-남겨진 흔적들
  16. 2008.05.15 암용추와 숫용추-계룡산이 감추어 놓고 싶은 신비
  17. 2008.05.15 삼신당(三神堂)-잃어버린 우리민족의 정신과 독립운동의 메카
  18. 2008.05.15 신도안천도-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9. 2008.05.15 조선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우정 (2)
  20. 2008.05.15 신도 안-우리는 왜 계룡산에 끌려 들어가는가?
  21. 2008.05.14 사회개혁의 이론적 기반 ‘정역팔괘(正易八卦)’
  22. 2008.05.14 미완성의 민주주의 그리고 신의세계로 넘어간 김일부( 金一夫 )
  23. 2008.05.14 무상사-계룡산에 들어서기 위하여 입구를 지키는 관문 (1)
  24. 2008.05.14 도깨비 터 - 종교 터를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25. 2008.05.14 양정고개-위대한 사상가 김일부를 만나기 위해



이제 다시 나반존자는 이쯤하고 옆으로 돌아가서 보면 호랑이를 옆에 데리고 있는 흰 수염을 기른 백발의 노인이 앉아 계신다.

이런 데를 처음 가는 분은 좀 괴기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들 것이다.
본인도 처음에는 절을 찾아 이러한 울긋불긋한 단청이나 탱화를 볼 때면 약간 으스스 하고 뭔가 꺼림 칙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찌할 수 있으리, 우리의 국보 등 보물이 여기에 있으니 보기는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이것을 만든 분들은 우리의 직계선조들이 아닌가?

그래서 딱 들어가서 이러한 탱화를 쳐다보았는데 좀 무섭기도 하고, 사실 분위기도 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

   
 
  ▲ 개태사의 산신탱화  
 
탱화를 쳐다보면 그 인상들이 엄숙하다 못해 약간 공포감(?)도 들어 ‘푸줏간에 들어가는 소걸음’ 마냥 그 앞에서는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끌려나온 사람같이 ‘달팽이 눈이 되듯’ 겁이 나서 소심하게 기가 꽉 꺾인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너 절 안 할래” 하는 것 같아 우선 절부터 하고나니 좀 덜 무서운 것 같아지게 되었는데, 지금은 향도 한대 올려드리고 탱화를 째려보듯이 쳐다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어떤 때는 법당에 기도하는 불교신자분이 있던 말건 눈을 멍하니 뜨고 요모조모 살피곤 한다.
물론 절은 한다. 구경 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이곳 충청도에는 절보다는 천주교나 개신교 전도지, 전도당 그리고 유학의 명소들이 많다.

내친김에 하루 강경의 관광코스를 공개하겠다.
여기서 강경국도를 따라가다 익산 경계에 들어서고 200미터 오른쪽으로 유명한 화산의 나바위 성당이 있다.

한국천주교사의 중요한 성지이며 김대건신부가 최초로 국내에 상륙하여 전도를 시작한 역사적인 곳이다.
이곳 성당에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나바위에 있는 동학농민운동 때 망해버린 김여산(金如山)의 집을 1,000냥에 사들여 개조하고 성당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한국 초기 본당의 하나로서 당시의 풍속에 따라 남녀의 좌석을 칸막이로 막고 출입구도 각기 달랐는데, 우리문화의 특성에 맞게 한옥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나바위 성당 건물은 회랑이 있어서 한국적인 미를 맛볼 수 있는 곳 중에 하나이다.

정말 호젓한 성당이다. 건물내부에 있는 여러 점의 성화는 정말 문화재적 가치가 있어 보이는데 잘 그려져 있으니 빠트리지 말고 감상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성당 뒤로 언덕 위에 정자 뒤에는 바위에 삼세석불이 새겨져 있으니 찾아보기를 바란다.

천주교와 불교의 만남에 어울리는 절묘한 장소인데, 종교적인 화합의 포퍼먼스를 열기에는 최고의 터 같다.

여기서 다시 강경나루터에 오면 황복을 파는 집이 많은 데 황복 탕으로 포만감을 채우고 나루터 뒷산에 잇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팔괘정과 그의 스승이자 예학의 태두인 김장생이 강학하던 ‘임이정’이라는 정자를 들러보자.

아래에 있는 죽림서원에는 율곡과 사계의 위패를 모셔놓고 있는데 이곳이 유교적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특히 ‘팔괘정’의 건물 뒤 암벽에는 우암 송시열이 각자한 글씨가 있다. 당대의 조선의 유학의 거두들이 이곳에서 학문과 강학을 했던 곳이니 그 세도가 대단했던 장소이다. 이곳에서 조선사대부의 권력핵심에 있었던 자리이자 전국의 유학자를 움직이고 국가의 대소사와 국가의 왕을 견제하는 정신적인 지주노릇을 했다.

여기에서 옥녀봉 쪽으로 가서 금강나루 그 유명했던 강경포구를 전망하고 시원한 경치를 본 다음 전설을 듣고 내려가다 보면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북옥감리교회’인데 당시 선교사들이 서양인이어서 한옥이 부적절하여 다수의 초기기독교회가 헐리거나 개축되어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은 반면, 이곳은 당시의 예배 모습과 예배당 형태 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희소성과 중요성을 인정받아 문화재로 인정받은 곳이다.

이 일대는 근대 건축물도 많으니 잘 찾아보면 좋은 관광코스가 될 것이다.
 
가을에 간다면 ‘발효젓갈산업특구’로 지정되어 싸게 젓갈도 한웅 큼 사올 수 있으니, 오는 길에 미내 다리도 보고 여기는 용머리(龍首)를 잊지 말고 감상할 것이며 관촉사도 들린다면 마음이 풍요로워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시 개태사 산신탱화로 가보자.
 
산신(山神)!  우리가 그렇게 많이 들어 본 이름 아닌가?
절 안에 곁방살이를 하고 있지만 불교에 흡수 되지 않고 여전히 꿋꿋히 자리를 잡고 계시니 어떻게 보면 고집 센 노인네 같다. 그래도 얼굴을 가까이서 살펴보려면 우선 향을 한대 피워 올리고 절을 해야 옆에 있는 호랑이가 달려들지 않을 것 같다.

산신이 ‘야-호(虎)-야’ 하면 그 무서운 호랑이가 가만히 있겠는가. 그래서 산에 가면 ‘야-호(虎)’하는 것이 호랑이를 부르기 위한 호칭이었다고 한다.

산신탱화는 수염이 허옇게 백발의 노인이 배경을 산으로 하고 그 옆에는 호랑이가 있어야 하고 소나무와 시종이 필수조건이다.

여기에 절벽 위 평평한 곳, 부채, 불로초, 복숭아, 인삼, 시종이 화로에 주전자를 놓고 물을 끓이는 장면, 호리병이 달려있거나 달려있지 않은 지팡이 들이 등장하곤 한다. 

사실 절에 가면 우선 감상해야 포인트는 대웅전이 있는 법당의 천정과 산신이 그것인데, 잘 그려지고 장식된 천정을 보면 정말 동화속의 한 장면 같다.

오색에 치렁치렁하게 그려진 배경을 깔고 잘 지어진 닫집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커다란 용이 여의주를 물고 꿈틀거리고 금시조나 학이 날라 다니며  심지어는 도깨비 문향도 있으니 이런데 서는 감탄사가 나올 뿐이다.

그리고 산신탱화! 나는 이런 관점으로 보곤 한다.

산신에게서는,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나?, 안 쓰고 있나? 아니면 상투를 하고 있나?
머리를 빡빡 깎았나?, 아니면 긴 머리인가?
수염이 백발인가? 아니면 검은 수염인가?
젊은 모습인가?, 아니면 나이 지긋한 분인가?
입고 있는 복장이 어떠한가?, 노끈을 메고 있는 모습인가?
혼자만 폼을 잡고 있나?, 아니면 주변에 다른 분들과 같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나?
주변에 있는 분들이 1명인가?, 아니면 2명인가?

그리고 호랑이,

이놈이 호랑이인가?, 범인가?, 고양이 인가?
이놈이 백색으로 그려진 백호 인가?, 아니가?
이놈이 1마리인가?, 2마리인가? 또는 그 이상인가?
이놈의 인상이 째려보는가?, 장난을 치고 있는가?   
이글을 일고 실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어쩌랴.

나만의 감상법이다. 이런 것을 왜 보지 않으려고 하는지, 생각을 바꾸고 감상하는 법을 조금만 바꾼다면 이런 아기자기 함을 찾아가는 여정에 무한한 마음의 평온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이런데서 종교의 차이를 생각하고 미신으로 본다면 자신이 미신이고 사이비가 아닌가?

이러한 그림을 모시는 측에서는 신성시 할 것이고 다른 종교를 가진 분은 이를 미신 시 하는 것, 이 모두가 종교라는 색깔을 쓰고 마음속에서 선을 긋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을 넘어서자. 그림은 그냥 그림이다.

거기서 아름다움과 재미를 느낌으로써 영혼이 따뜻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소소한 재미를 느끼지 않겠는가. 이러한 그림에서 신성이니 미신이니 따지기 전에 그림의 어떤 점이 멋이 있고 해학적인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그 이전부터 이 땅에서 궁 굴러다니면서 그려 놓은 것이 아닌가?

그분들이 그린 그림이 종교성지 들에 있다고 해서 편견을 가질 필요가 무엇이리요.
그림을 정성껏 그린 그분들의 고마움을 봐서라도 보는 순간만이라도 ‘종교색깔을 훌훌 털고’ 이 그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서 감상하는 여유를 가지는 것은 어떨까?

요새는 서양화 그림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심지어는 영화까지 만들어 지는 것 같은데 이런 관심을 우리 것에도 가져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산신탱화로 유명한 곳은 직지사와 신원사 중악단이다.

신원사 중악단은 여기서 가까이 있고, 요사이는 해가 기니 오후 6시 이후에 다녀오는 것이 좋다.
그 시간 이후는 문화재관람료를 안 받으니 왠지 공짜 같은 느낌이 든다.    
중악단에 대한 설명은 각설하고 여기에 모셔진 산신을 한번 잘 살펴보시기를 권한다.

여기를 참견할 때는 도사(道師)급 수준의 분(?)들이 가끔 수행을 하고 계시니 몸가짐을 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함부로 산신탱화 앞으로 가까이 갈수 없는 분위기가 너무 엄숙한 곳인지라, 산신탱화 앞에 누군가 앉아 있으면 다음에 아무도 없을 때 가는 편이 낫다. 여기에 있는  산신 탱화, 그중에 호랑이 정말 죽인다!
머리 위에 솔가지에 앉아 있는 까치를 보고 째려보는데 그 놈의 표정이 가히 백만 불짜리이다. 뭔가 볼떼기에 불만이 가득한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인상하고는 더러워서 이것을 보고는 배꼽 빠질 뻔했다.

여기 모신 산신은 검은 수염에 젊은 선비모습인지라 상당히 근엄하고 멋있게 보인다.
이것이 전형적인 산신의 모습이 아닐까? 원래 계룡산신은 여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분은 누구일까? 

직지사에는 한국 최고의 걸작품으로 알려진 산신도가 있다.
나는 여기를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어 보지를 못했는데, 여기를 보신 분들의 말씀으로는 산신의 수염이 검고 산신 무릎에 안기듯이 바짝 붙은 호랑이 역시 위엄이 있어 눈빛이 상대를 노려보는 것이 무섭다고 한다.
그리고 뒤에 늘어진 소나무는 정말 잘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보고는 싶지만, 문을 안 열어 줄 것 같다.

이제 개태사 산신으로 가보자. 이절의 산신탱화는 평범하지 않다.

역시 무엇인가 다르게 두 분이 더 그려져 있다. 옆에 있는 두 분 ‘누구세요’ 물어 보니 대답이 없으시다.

먼저 주인 되는 산신의 이력을 알아보자 .

조선후기 설암추붕(雪巖秋鵬)이 남긴 묘향산지(妙香山誌)는 사료의 가치를 중시하여 특히 단군에 관한 금서인 제대조기(第代朝記)를 인용하여 환인의 아들인 환웅과 백호사이에 단군이 탄생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환웅은 천신인 환인과 지모신(地母神)인 웅녀 사이에서 탄생하였고, 단군은  환웅이 새로운 지모신인 흰범과의 사이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곰은 범보다 북방의 고아시아족으로 예족을 칭하고 범은 좀 더 남방에 위치한 맥족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이 산신각의 탱화와 상통하는 보편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신각의 노인으로 그린 산신령은 곧 환웅이고, 범은 백호로서 환웅과 백호가 단군의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산신도에 전하는 산신과 백호의 그림이 단순한 산신의 환신이자 심부름꾼인 범이 아니라 산신을 부계로 범을 모계로 단군의 탄생을 준비하기위한 교통의 장면인 것이다. (허흥식저 신령의 고향을 찾아서)

이러한 한웅과 단군이 산신으로 모셔지는 이유는 한웅이 태백진교(太白眞敎)를 창교(創敎)한 분이고, 단군왕검이 덕교(德敎)를 창교한 분이기 때문에, 두 종교의 교조로 모셔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환웅과 단군의 초상이 산신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그려져 전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도명산과 각산에 모셔지는 산신령들과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팔도명산과 각산에 모셔지는 산신령들은 그 고장에 처음 터를 잡은 종족의 우두머리이거나, 역사에 위인으로 남은 분들이다.

봉우(鳳宇) 권태훈 선생에 의하면 “어쨌든 산신도 정신계인 천상에서 임명하는 선관(仙官)중의 하나로서 임명직인 셈이다. 지상의 산악을 주관하는 정신계의 관리가 산신인데, 하나의 산에 하나의 산신과 여럿의 부산 신(副山神) 및 그 산의 각 지역을 맡은 지역산신들이 존재한다.

보통 각 지역의 주산에는 산신이 존재하는데 두 사람의 학인을 성공시키면 산신도 등급이 한 단계 올라간다고 하며 그래서 어떻게든 수도자가 성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하는 것이 산신의 주요 임무라 한다.
산신가운데 제일 원만하고 인자한 분은 역시 백두산 산신으로서 정신수련 학인들을 가장 성심껏 후원해 주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계룡산산신은 매우 엄격하다. 정신계 7계 이상으로, 인간으로서 도달 할 수 있는 최고 단계인 성인의 경지이다. 지상에 있을 때 전생에 천자소리 들었던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산신으로 있으면서도 성인 대접을 해야 좋아한다고 한다.
계룡산 학인들은 지금도 산주(山主)에게는 사배(四拜)로서 예를 표한다.
가끔 도인들(정신계 4~5계의)이 계룡산에 와서 산신이 영접을 안 한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툴툴대는데, 이는 자신의 계제만 알지 계룡산 산주의 계제가 이렇듯 높은 줄은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계룡산은 산은 작아도 정신계의 센터이며 사령부인 천상 자미원(紫微垣)의 동자미(東紫微) 구성(九星)의 천상(天象)이 조응(照應)하는 원혈(元穴)이 있는 명산으로서 역대로 수많은 성현들의 수도처였던 곳이다.
어쨌든 백두산을 빼놓고, 남한의 산중에서 가장 계제가 높은 산신이 주재하시고 있는 산이 계룡산이다.

계룡산의 지역산신(산안에 여러 지역이 있다)이 보통 다른 산의 주산신과 계제가 같을 정도이다.
계룡산 산주는 매우 엄격해서 학인들에 대한 신상필벌이 엄정하다. 산에 와서 공부에 태만하거나 성정이 사특한 자는 대번에 퇴출시켜 버린다. 잔술(小術)도 잘 안 봐준다. 그래서 공부 성공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다.

계룡산 초계가 다른 산의 재계(再階:2계) 만큼이나 어렵다고들 한다.
계룡 산주 입장에서는 계제를 쉽게 주면 학인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산중이 시장바닥처럼 될 것을 우려해, 그것이 싫어서 먼 산 바라보듯 학인들을 대한다는 것이다.
계룡산 산신은 아기봉과 천황봉, 연천봉을 두루 다니며 산을 주재한다.”
(봉우사상연구소 자료)

산신령도 시대별로 그 모습이 변해서 그려지고 있는 것 같고 나이 드신 분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젊은 분도 그려지고 여자 분들도 있는 것과 심지어는 상투를 튼 모습도 있는 것을 보면 산신령도 옛날분만 산신령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시대별로 학식 있었던 분으로 나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산신령으로 임명되는 것 같은데 또 지역수장의 위치도 바뀌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노끈으로 맨 도포, 숱이 많은 검은머리와 수염, 나뭇잎망토는 단군의 초상이나 입상에 자주 보이는데 이런 것이 호랑이와 더불어 단군과 관련된 징표가 아닌 가해서 유심히 쳐다보곤 한다.
참고로 나뭇잎망토는 중국의 복희씨 초상에도 이러한 망토를 입고 있는데 이분도 단군의 후손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면 산신도를 한번 살펴보자

산신도에는 보통 호랑이 1마리와 산신 그리고 동자 1명을 함께 그린 산신도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때로는 호랑이 2마리나 여자로 보이는 분들이 1-2명 그려진 그림도 있다.

이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호랑이 2마리가 호위하는 분은 환웅천왕이고, 호랑이 1마리가 호위하는 분은 단군왕검이다.

부인한분이 있는 것은 한웅천왕의 부인인 매화부인, 즉 ‘직녀’이고, 부인 두  분이 같이 있는 것은 단군왕검의 두 명의 부인, 즉 웅심국왕의 딸인 ‘웅녀(熊女)’와 하백 부소갑의 딸인 ‘하백녀(河伯女)’이다.
 
산신도에 그려지는 호랑이는 백호이다. 백호는 서쪽과 금성(金星)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천제(天帝)의 호위를 담당하는 별이 금성이다. 그러므로 산신도에 모셔진 산신이 금성의 호위를 받는 천제의 화신임을 알 수 있다. 천제의 화신은 곧 천자(天子)이다.

그러면 동자는 누구일까? 동자는 ‘마고(麻姑)’의 외동아들을 상징한다. 그를 막동이라고 한다.
막동이는 ‘막동이’(邈東夷), 즉 마고에게서 태어난 동이족을 의미한다.

뒤에 산은 그것이 고조선영역에서 전해지고 한반도로 축소되었을지라도, 우리의 팔도강산이다.
불교의 수미산을 가운데에 두고 도교의 오악이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 산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산들이다. 불필요한 불교와 도교가 과도하게 덧씌워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산신은 아직도 불교에서는 단지 원시적인 미신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는 바, 가야산 해인사의 성철스님은 교리적으로 무속적인 요소에 열정적으로 반대하고 ‘정화된’ 불교를 주창하면서 해인사의 모든 건물과 암자에서 산신제단과 그림을 치워버리고 사찰의 박물관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성철스님이 타계하신 후 일반인들이 산신을 많이 찾기 때문에 절반이상의 암자에 이들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화려하게 산신이 부처모습으로 바꾸어져 분칠되어 있으니 볼썽사납다.

산신과 같은 비불교적인 신이 독립적인 탱화, 제단, 공양물, 기도, 찬탄, 심지어는 독립적인 전각까지 가지게 될 때 이것이 자칫 불교의 신들에 대한 공양을 약화시키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는 데 그 근본이유가 있을 것 같다.

단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를 한결같이 지켜주고 조용히 자리하는 것만도 우리에게 감사하고 힘이 되는 것이 아닌가?

수천 년에 걸쳐 그 자리에 있게 해온 조상들의 말없는 몸가짐에서 그들이 우리와 우리 가족들 그리고 나라를 위해 눈물 흘리고 때로는 기뻐했을 삶이 농축되어 온 자리가 아닌가?

우리들의 편리함과 종교적인 이익만을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화려한 분칠도 하지 말고 하나의 목마른 생명수로, 한 줄기 고운 햇살로 그냥 놔두고 더 이상 서럽게 만들지 말고 자리하게 하여주자.
우리 곁에 오래오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바람이 함께 했으면 한다는 생각이 든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08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향적산(국사봉)

향적산(香積山) 국사봉은 이성계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할때 친히 올라가 신하들과 국사를 논했다고 하여 국사봉이라 한다.
국사봉은 계룡산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등산 코스이며, 종교연구가들에게는 제2의 신도안이자 한국 최고의 무속촌이었다.
국사봉에는 일부(一夫) 김항 선생이 정역(正易)을 공부하였다는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있고 맨재 소류지 위쪽에는 국제선원 무상사가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멀리 대전시가, 가까이 발 밑으로는 계룡대와 계룡시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연천봉 능선이 북쪽으로는 계룡산 천황봉과 머리봉이 지척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연산면으로 뻗어나간 국사봉 능선이 용의 허리를 닮아 있다.

 
향적산(국사봉)의 전설

국사봉 정상에는 오행비와 천지창운비가 자리잡고 있다.
중국 위나라에 관로라는 점성술의 대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남양현이란 시골 동네를 여행하는 중이었는데, 밭 한가운데서 일하고 있는 안초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런데 안초의 관상을 보아하니 머지않아 죽을 운명이었다. 관로는 “아아, 안타까운 일이다.
이 잘 생긴 소년이 고작 스무살까지밖에 살 수 없다니!”라고 중얼거렸다.

소년의 부친은 이 소식을 듣고 관로에게 찿아와 아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관로는 안초를 불러 말했다.
 "집에 돌아가서 청주 한통과, 말린 육포를 준비해, 묘(卯)일에 자네 밭의 남쪽 끝 뽕나무 아래로 가게,
거기서 두사람의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을테니, 그 옆에 술을 따르고 육포를 놓아두면, 두사람이 술을 마시고 육포를 먹을 것이네. 그들이 잔을 비우면 술을 따르고 이렇게 해서 술을 다 먹을때까지 기다리게. 만약 그들이 무어라고 말을 하더라도
아무말 하지말고 그저 머리 숙여 인사만 하면 되네, 그러면 그들이 자네를 구해줄 걸세."

안초는 관로가 일러준 날짜에 그 뽕나무 아래에 가봤더니 과연 두 노인이 바둑에 몰두해 있었다. 북쪽에 앉은 노인은 검은 도포를, 남쪽에 앉은 노인은 붉은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이들의 풍모가 신선같았다. 안초는 관로가 시킨대로 그들 앞에 술과 안주를 가만히 놓아두었다. 두 신선은 바둑에 푹 빠져 무의식중에 술과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신선들은 기분좋게 취하게 되었다.
그때 북쪽에 않아 있던 검은 도포를 입은 신선이 안초를 보고 꾸짖듯 말했다. "이런데서 뭘 하는게야, 저리 가거라."
그러나 안초는 머리만 조아려 인사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붉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방금 우리가 이 청년이 가져온 술과 안주를 먹었으니, 그렇게 박대하지 말게." 그러자 검은 도포노인은 "그럼 저 소년의 수명을 늘려주자는 말인가? 이 소년의 수명은 태어나서부터 정해져 있네. 자네 명부에 적혀 있는 탄생일과 내 명부에 적혀있는 죽는 날을 우리 맘대로 고친다면, 이 세상의 질서는 금방 어지러워질 것이 아닌가?"라고 응수했다.
"그렇긴 하네만, 이미 저 친구에게 실컷 얻어먹은 우리가 아닌가? 그것도 빚은 빚이니 우리 어떤 방법을 강구해보자구."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의 끈질긴 설득에 검은 옷 입은 신선은 하는 수 없이 "그 친구 참 끈질기기도 허이, 그래 여기 수명부가 있으니 자네 요량대로 해보게."라고 말하며 승낙하고 말았다."
붉은 도포의 신선은 수명부에서 소년의 이름을 찾아보니 소년의 수명은 19(十九)세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붉은 도포 신선은 붓을 들어 열십(十)자에 한 획을 더해 아홉구(九)자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소년의 수명은 아흔 아옵(九九)살이 되었다.

안초가 돌아와 관로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니, 관로는 "북쪽에 앉은 검은 도포를 입은 신선은 북두칠성이고, 남쪽에 앉은 붉은 도포를 입은 신선은 남두육성일세,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하고 남두육성은 삶을 관장하지.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에 깃들면 남두육성은 탄생일을 기록하고, 북두칠성은 사망일을 기록하는 거야." 말하고는 멀리 떠나갔다

http://blog.daum.net/hargy/532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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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일보

충청 산하를 지키자-계룡의 산(계룡·향적산등)

기사입력 2008-06-03 23:12


계룡산과 향적산, 천마산 등이 감싸고 있는 계룡시는 말 그대로 상록 도시이다.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고 유구한 세월을 동고동락한 역사의 산증인 인 계룡의 산. 이들 산에 대해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은 개발은 가급적 자제하고 인간과 자연이 상생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 개발이 상록 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계룡시에 우선시 되고 있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 꿈틀대는 계룡의 산을 자연 그대로 보존하고 잘 가꿔 후손에 물려주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일 것이다.

▲계룡산 (천황봉)

계룡산의 주봉이자 배달민족의 영봉인 천황봉은 해발 845.1m로 국운을 굽어 살피고 있는 듯한 자세로 산의 경관이 수려,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대표하는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정상에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 하늘에 제를 올리는 산제단(山祭壇)이 있고 이 곳에 서면 신선이 노니는 듯한 계룡산의 전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는 계룡산이 그다지 높지 않아 운무(雲霧)가 별로 없고 주변의 산들이 상대적으로 낮아 시야를 별로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계룡시 어디에서 보아도 선뜻 이마에 닿을 듯이 솟아 있는 천황봉은 계절따라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 변화무쌍함은 대자연의 신비 자체로 웅장한 산봉우리 위에 찬란한 해가 솟아 오르면 보는 이의 가슴에 용기와 희망을 주기에 충분해 계룡시는 매년 이 곳에서 새해 첫 날 해맞이 행사를 열고 있다.

천황봉은 자태가 백성을 품안에 안고 있는 제왕의 모습이라 하여 상제봉(上帝峰)이라고도 했으며, 상봉(上峰) 혹은 제자봉(帝字峰) 이라 불리기도 했다. 제자봉은 부남리와 석계리 뒤편에 있는 산봉우리를 지칭하는데 이 봉우리를 경계로 암용추와 숫용추가 좌청룡, 우백호의 전설을 품고 있기도 하다.

또 대궐터의 주봉이기도 했던 제자봉은 신도안 신흥종교가 번성했을 당시 교주들과 신도들이 가장 신성히 여겨 수시로 찾아 간바 있으며 무속 ,민속종교 등의 교인들과 등산객들의 기도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현재는 이 곳 일대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출입에 제한이 있으며 예전에 이곳을 즐겨 찾던 산악인들은 지금까지 그 향수(鄕愁)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한편 천황봉 정상에는 1948년에 설치한 철탑이 우뚝 솟아 미관을 저해하고 있다. 이 철탑의 제거와 함께 일상적인 등산로의 개방은 우리가 머지않아 풀어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

▲향적산 (국사봉)

계룡산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등산코스로 유명한 국사봉은 종교연구가에게 있어 제2의 신도안이자 한국 최고의 무속촌이었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할 때 친히 올라가 국사를 논했다하여 국사봉이라 유래된 이 곳은 두마면 향한리와 도곡리 일대의 산으로 계룡산맥의 남쪽 능선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이다.

해발 574m로 일명 향적산(香積山)이라고도 불리는 국사봉은 향기로운 땀이 쌓여 있는 산이자 공부와 도를 깨우치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또 국사봉에는 일부(一夫) 김항 선생이 정역(正易) 공부를 하였다는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있고 맨재소류지 위쪽으로는 국제선원 무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국사봉을 오르면 멀리 동쪽으로 대전시가 한눈에 들어오며, 가까이 눈 아래로는 계룡대와 계룡시가지가 훤히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는 연천봉 능선이, 북쪽으로는 천황봉과 머리봉이 지척이며, 남쪽으로는 연산면으로 뻗어나간 국사봉 능선이 용의 허리와 흡사한 모습으로 굽이쳐 있다.

한편 국사봉 정상에는 오(五), 화(火), 취(娶), 일(一) 등 네 글자가 음각된 오행비와 함께 천지창운비라는 비석이 있는데 이 비의 크기는 2m정도로 동서남북 각 면에 천계황지(天鷄黃地), 불(佛), 남두육성(南斗六星), 북두칠성(北斗七星)이란 글씨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이는 한반도가 1000년 이상 동방예의지국으로 유지되도록 하는 단군성조의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국사봉의 맨재골 최상단에는 약수와 같은 샘물이 난다하여 약수암이 있고 이는 논산, 연산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계룡지역에는 지역민들이 쉽게 찾고 있는 천마산이 금암동을 아우르며 친근하게 다가서고 있다. 천마산 정상에는 천마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수려한 천마산을 쉽게 볼 수 있고 동쪽으로는 계룡시 금암 신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며 서남쪽으로는 백제 계백장군의 충혼이 어린 황산벌이 멀리 보인다.

천마산 서편 기슭으로 왕건이 하늘의 도움으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개태사가 자리하고 있는 등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처럼 어느 한 곳 민족 역사와 숨결이 배어있지 않은 곳이 없는게 계룡의 산이다. 계룡의 산을 제대로 보존하고 소중히 가꿔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계룡=이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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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태사에는 '대충의전(大忠義殿)'이라 해서 관운장을 모시고 있다. 왜 관운장이 이곳에 모셔져 있을까?  
 
이 절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자, 재미있는 것이 있으니 대충의전(大忠義殿)이라 하여 관운장을 모시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닌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참 황당해 진다.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를 들고 긴 수염을 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 이 영정을 보았을 때는 태조왕건의 영정인지 알았는데 나중에 관운장의 영정으로 알게 되었다.
무인으로서 태조왕건의 영정이 없어 대신 모시는 것인지, 아니면 6.25전쟁 등을 막기 위한 주술이었는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는 누구도 잘 아는 분 아닌가? 이분이 어떤 분이기에 여기에 모셔져 있을까?

관운장이 죽어서는 엄청난 신적인 위험을 떨쳤는데, 중국과 한국에서는 관운장 신명께 빌면 어떠한 원한신과 척신 등 삿된 귀신도 물러갔다 한다. 그의 대인대의를 기려 역대 왕조에서 관왕묘를 세워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추앙해 왔다고 하는데, 우리 민족이 관운장을 경애하여 잘 받들어 주어 관운장이 삼보조선(三保朝鮮)한다는 말이 전해 온다.

<선조대왕 25년 어는 봄날이다. 선조대왕께서는 춘곤을 못 이겨 깊은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위풍이 당당한 한 장군이 적토마를 타고 청룡도를 들고 삼각수를 날리며 늠름하게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선조대왕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아우님 그간 별고 없으신지? 나는 삼국시대 관우인데 우리들의 의리와 인정을 잊지는 않았겠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말일세. 우리 3형제는 살아서는 합심협력하고 서로를 도왔고 특히 형님(유비)이 촉한의 왕이 되자 나(관우) 와 동생(장비)은 촉한에 충성을 바치고 마침내 순국하지 않았는가?

우리 삼형제는 한 세대가 끝나고 영혼의 세계에서도 그 의를 지켜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형님은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되고 나는 전쟁에서 인명을 너무 많이 해쳐서 인간 환생이 안 되었고 아우는 현재 조선왕이 되었지. 머지않아 동생의 나라에는 큰 병란이 일어날 텐데 아무 방비도 없이 나날이 보내는 동생이 딱해서 지금 내가 일깨워 주러 왔네. 이 난리는 표독한 왜적이 쳐들어오는 난리인데, 7~8년이나 걸릴 테니 명나라 신종황제(유비)에게 구원을 청해서 수습하도록 하게. 내가 신종황제에게 도원의 고사를 들어 간곡히 부탁할 테니 주저 말고 시행하게.”하고 선연히 사라졌다. 깨고 보니 이상한 꿈이었다.

그러나 꿈대로 임진왜란은 이어났고 선조는 명나라 신종에게 원병을 청하였다. 그 요청이 간곡해서인지 관우의 신종황제에 대한 현몽에 감동해서인지 신종황제는 이여송을 총수로 하여 5만의 군사를 파병하여 돕게 된다. 그래서 임진왜란이후에 관우의 의리를 기린다는 뜻으로 수많은 관왕묘가 이 땅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다.>

관우를 기리는 사당으로 유명한 곳이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보물 142호인 ‘동묘(東廟)’가 그것이다.
관우현령의 도움으로 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여 명나라 신종이 현액과 비용을 보내와 우리 조정에서 두 해 만인 선조 때 완성한 것으로 왕도 참배를 했다고 한다.

동묘에 모신 관우에게 치성을 하면 효험을 본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 같은데 예나 저나 한국인의 복달라고 비는 기복신앙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관운장은 키가 구척장신에 수염의 길이가 두 자로서 삼각수(三角鬚)이며, 또한 수염이 길고 아름다워 미염공(美髥公)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관운장은 적면(赤面)이라고 얼굴빛이 잘 익은 대추 같이 빨갛다고 해서 중조(重棗)라고 했다고 한다.

 
 
 
  ▲ 개태사에서는 관운장의 영정도 모시고 있다. 이 영정은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를 들고 긴 수염을 쓸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개태사에 모셔지고 있는 관운장의 영정은 좀 바래서 인지 잘 안 보인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위와 비슷한 것도 같은데 전체가 빨간색으로 그려져 있다.

관운장 영정 옆에는 갈퀴와 큰칼, 그리고 작은 칼까지 준비되어있다.

이것은 무엇 하는 도구일까?

<옛날 천하세계 임정국 대감과 지하세계 김진국 부인이 아기가 없다가 공을 들여 미모의 아기씨를 얻으니 자지맹왕 아기씨라 이름 지었다. 아기씨의 나이 15세에 이르매, 부모가 벼슬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하늘 공사를 올라간 동안에 시주 나온 도승이 딸아이의 머리를 세 번 쓸어 임신시켰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펄펄 뛰면서 아기씨를 쫓아냈다. 아기씨는 황금 산으로 남편을 찾아갔으나 “중이 부부 살림하는 법이 없으니 불도 땅에 가 살아라.”하면서 외면한다.

할 수없이 아기씨 혼자서 불도 땅에 가서 아들 세쌍둥이를 낳게 되었으니, 9월 초여드레인 본명두, 열여드레엔 신명두, 스무여드레엔 삼명두가 각 탄생하였다.

삼명두는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구박 속에 갖은 고생을 다한다. 그러나 워낙 총기가 있어 서당의 삼천선비들이 늘 시기하였다. 삼형제는 과거를 보아 모두 장원급제 하였으나 중의 자식인 탓으로 과거에서 낙방시키려 한다. 그러나 활쏘기에서도 삼형제가 이기자 결국 모두 장원급제를 시키고 만다. 그러나 삼천선비들이 흉계를 꾸며 모친을 삼천제석궁 깊은 곳에 가두어버린다. 집에 돌아온 삼형제는 삼천선비들의 흉계를 알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황금  산 도당 땅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제주도 무당의 조상(巫祖)이 탄생하는 내력을 담은 ‘초공본풀이’는 삼명두가 삼천선비의 목을 처 버리는 데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그리하여 삼명두는 제주도 무당의 조상신격이자 3대 무구(巫具)인 ‘천문’, ‘신칼’, ‘산판’을 일컫게 된다.

여기에 '신칼'이 나온다. 관운장 옆에 있는 이것을 일부에서는 무구에 쓰이는 도구라 보기도 하지만 무속용 도구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왜 무속이라면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까?

뒤로 무속인을 찾아가서는 “우리아이 대학 붙겠어요, 이번에 승진이 될까요, 차기대통령은 누가 될까요” 하면서 ‘미주알고주알’ 물어보고는 앞으로는 내가 언제 그런데 다녔냐는 듯이 안면을 바꾸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어차피 평범한 인간은 먼 앞날을 예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숨어서 호박씨 까듯이 하지 말고 정당하게 드러내놓고 그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 떳떳하지 않은가?

조선말까지 만해도 무속이나 점치는 일은 기피대상이 되지 않았다. 선조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그들을 잘 활용해 온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신적인 자산이다.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신명이 발달된 민족이 있는가?

이제 무속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면서 신비화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밝은 양지로 끌어내어 인간생활의 고달 품을 달래주고 같이 놀아 줄 수 있는 사회의 활력소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때로는 삶에 지친사람에게 따뜻한 대화를 하고 지친 영혼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세상살이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들어내 줌으로서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 할 수 있는 완충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무속인 들이 본인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심각히 자각하는 정화운동을 펼쳐야 할 시대에 이르렀다고 보여 진다. 신의 능력을 받는 것은 갈등을 해소함으로서 해원상생의 시대를 준비하고 인간에게 희망의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라고 부여된 의무를 가진 신의 대리인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일부에서 진행되는 '연극형태의 영가천도' 무대는 정말 신선하고 획기적인 사고의 발상이라고 보여 진다. 가슴에 억눌려온 모든 것을 풀어버리는 해원상생의 시대에 어울리는 절묘한 무대장치이다.

우리민족만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영적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여 영성과 영혼의 진정한 진화를 이끌어주는 것이야 말로 이들이 해야 할 사명적인 의무가 아닌가. 새로운 문화의 전환기에서 이들로부터 새로운 싹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금전과 인기에 야합하는 그런 자세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미리 보고 이를 알려줌으로서, 이러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준비자로서 진정한 선도자로서의 역할을 우리는 기대해보고 그들에게 변화의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폐쇄된 음지에서 이들을 끌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정화된 영성과 영혼을 가진 그들로 부터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인 패러다임을 듣는다면 우리의 영혼과 영성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 본다.

우리도 그들을 무시하면서 실은 그들의 능력을 이용하고 있는 파렴치한 자세에서 벗어나 단순한 '점을 치는 자'의 위치에서 아픈 삶을 어루만져주고 껴안아주면서 새로운 세계를 조언해주는 '사회병리치료사'의 위치까지  그들을 끌어 올려야 할 것이다. 

그 옆에는 이절을 중창한 김광영 보살의 사진이 안치되어 있다.

이 분에 대해서도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1938년 조선독립을 기원하고 있다는 이유로 밀고 되어 왜경에 체포 되, 법정에서 “을유년 7월7일(1945년8월15일)왜왕이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된다.” 선언하여 재판장으로부터 정신이상자로 몰려 석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분은 윤보선대통령의 사촌 되는 ‘윤포산’을 사위로 삼아 정도령을 꿈꾸었다고도 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르는 것이지만 폐허화 된 절을 이 정도까지 준비해 놓은 분이니 나름대로 상당히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 곤 한다.

이분의 추모비가 절 입구 좌측에 있으니 한번 읽어 보기를 바란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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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궁 부처

 




 
  ▲ [정법궁 부처] 이 부처상에는 '남북통일 세계평화'라고 쓰여져 있다.  
 
가운데 불단위에는 남북통일이라고 쓰여 있는 기단위에 부처상을 모셨다.
그런데 이분이  ‘미륵불’인지 ‘아미타불’인지 모르겠다.

걸려있는 등에는 '남무(南無)'라고 쓰여 있는데 이를 보아서는 아미타불이고 기둥에는 '용화(龍華)'라고 쓰인 것을 보면 미륵불 같기도 하다.

절에 가서 부처조각상을 감상하려면 최소한의 부처에 대하여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불타에는 석가여래, 아미타불, 약사불, 비로자나불, 미륵불이 있으며, 보살에는 미륵보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이 있다. 그리고 천은 범천, 제석천, 사천왕, 인왕(금강역사), 팔부중, 비천이 있으며, 나한은 부처님 십대제자와 유마거사 등 여러 나라에서 숭앙받았던 고승들이 해당된다.

‘석가여래(釋迦如來)’는 인도 북부에 왕자로 태어나 출가 후 보리수 아래에서 크게 깨달으신 분으로 석가모니라 하고 의역한다.

이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일반 인간이 본 여래모습은 이 분 밖에 안계시다.
그러므로 다른 부처상도 이분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되 손 모양만을 다르게 표현하여 구분하고 있다.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 불상이면 보통 이 분이라고 보면 된다. 
이분을 모시는 전각을 대웅전(大雄殿).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한다.

상상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만든 창작품이라니 인간의 상상의 나래는 어디까지 일까?

비로자나여래(毘盧遮那如來), 이분은 전 우주 어디에나 빛을 비치는 지혜의 광명이 큰 영원한 본체인 부처로 석가여래는 지구상에 생명을 받아 태어난 그분의 분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부처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智拳印)을 하고 있으며 보통 대적광전(大寂光殿).대광명전(大光明殿). 비로전(毘盧殿). 화엄전(華嚴殿)에 모셔져 있다.

마치 홍길동이 빗자루로 분신술을 쓸 때 홍길동 자신의 몸이 비로자나여래 인 것이다.
부처상 중에 한마디로 우두머리이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는 광명과 자비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무한한 세계에 까지 미치고 있으며 이 광명을 받은 자는 일체의 苦(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또 이 부처님은 지금도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면서 48가지의 큰 소원을 세워 중생을 대자비에 의하여 영원의 구원을 받게 한다고 한다.

신라의 원효스님이 외친 것이 이 “나무아미타불”이니 이것을 외면 그 광명을 받을 수 있다고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 분을 모시는 전각을 무량수전(無量壽殿). 극락전(極樂殿). 미타전(彌陀殿)이라 한다.

약사여래(藥師如來)는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고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 하는 등 12 큰 소원을 세워 중생의 질병이나 고난을 구제하려는 부처이다.

그래서 한 손에는 약 항아리를 들고 있는 상으로 표현하나 약 항아리를 가지지 않을 때에는 명문이 없으면 약사여래인지를 분명히 가리기가 어렵다. 이 분은 약사전(藥師殿). 약광전(藥光殿)에 모셔져 있다.  

마지막으로 미륵보살이란 인도의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 수도를 하고 미래에 성불하라는 전법을 받은 미래불이다. 이분은 용화전(龍華殿)에 모시고 있다.

그러니 삼불의 경우 가운데의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상, 오른쪽에 석가여래상을 배치하는 것이 기본이다. 부처상은 이정도 만 알면 감상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부처는 수만이니 이것을 이해하려면 불가에 정식 귀의하여야 할 것 같으니 이 정도로  하자.

   
 
  ▲ 기둥의 글씨중 맨 아래에 '해인조(海印造)'라고 쓰여있다.  
 
기둥에 흥미로운 글이 써 있으니, ‘...龍華(용화)... 海印造(해인조)...’라고 하여 ‘해인(海印)’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

해인(海印)! 무슨 말인지 그냥 지나치기에는 심심하지 않은가?

이러한 사소한 글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찾고 새로이 들어나는 그 모습을 보기위해 나는 오늘도 끝없는 여정을 즐긴다.

이제 새로운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을 만나보자.
역사학자 이이화씨의 부친으로도 유명하지만 그의 문하에서 대산(大産) 김석진 같은 주역의 대가가 나와 더 유명해진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야산(也山) 이달(李達)’이다.

모친이 문창성(文昌星)을 삼키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열두 달 만에 탄생하니 머리꼭대기에 별모양의 점이 있었다고 한다.

경술년 한일합방 후에 통분하시어 반일독립투쟁에 몸 바치셨고 해방 후 계룡산이 앞으로 보이는 논산 수곡리 대둔산 석정암(石井菴)에 들어와 은거하며 천부경, 주역 등을 가르치며 108명의 역학자들을 길러낸 대학으로 주역의 세계에서는 전설이 된 분이다. 주역에 통달하여 일단의 제자들을 키워 학단을 이룬 사람으로 계룡산파라 불리는 비결파의 원조이다.

야산은 주역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풀이한 분이며 유가정통의 의리역에 바탕을 둔 경학으로서 올바른 역 해석을 한 분으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48년 어느 날 하루는 노 여승이 석천암으로 와서 야산 선생님을 뵙고는 뽕나무 작대기를 드렸다.
이에 야산선생님이 그 연유를 물으니 노여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부처님이 현몽하셔서 말씀하시기를 “뽕나무 작대기를 만들어 대둔산을 찾아가 주역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갖다 주라. 하기에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하고는 떠나갔다. 그 말씀을 듣고 선생님은 우리를 불러 앉히고는, “이게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가를 주역으로써 알겠는가.”하고 물으셨다.

전혀 무슨 뜻인지 짐작을 못하고 묵묵히 있으니까 선생님은 천지비괘(天地否卦 :하늘과 땅의 기운이 통하지 못하여 꽉 막힌 상태를 나타내는 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망할 지경에 이른 것을 망하지 않게 미리 손을 쓰라는 것인데, 앞으로 난리가 나서 우리나라가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라를 우묵하고 단단한 뽕나무 밑 둥지에 붙들어 매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게가 쓰러지지 않도록 작대기로 받치듯이 우리나라가 쓰러지지 않도록 이 뽕나무 작대기로 받치라는 것이다.”

“왜 뽕나무 작대기 인가?하고 물으셨다.

우리가 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자 말씀하시기를 “뽕나무 밑 둥지는 질기고 단단할 뿐 아니라 해가 뜨는 동쪽을 ‘부상(扶桑)’이라 하지 않느냐?

그리고 ‘또우(又)’자 셋에 ‘나무목(木)’자가 있으니 삼팔목(三八木)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
(김석진저 스승의길 주역의 길 중에서)

야산은 땅에 놓여 진 뽕나무 지팡이를 보고 산대를 뽑아 보고 제자들을 불러 미구에 닥칠 6.25전쟁을 2년 전에 예견하고 제자와 가족들 300명을 이끌고 서해안 안면도로 이주를 하여 주역에 매진하는 동안 전쟁이나 대둔산 일대가 충남 빨치산의 본거지가 되어 환란을 치룬 것은 유명한 실화이다.

야산 이달! 정역의 김일부와 계룡산아래에서 동시대를 살면서 더불어 당대의 도인으로 알려진 인물로 후천개벽을 말하고 주역과 천부경의 해독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이때 사람들은 주역의 3대 고수를 꼽기를 이달, 김일부, 그리고 월정사의 선승 탄허였다.

고전학문을 탐구하는 학인이라면 대개 유불선 삼도(三道) 동원론(同源論)문제에 부딪치는데 유교와 도교와 불교의 3대 문(門)에서 주역에 통달한 이 세 사람의 영향으로 왜정시대를 거치면서 천박 그 자체로 곤두박질쳤던 사서육경의 한 분야인 주역이 학문과 종교와 민속학으로 편입되는 동기가 된다.

그러면 해인은 무엇이고 그것이 왜 개태사에 있게 되었는가?

해인의 인(印)은 도장으로서 전체적인 의미를 대표하는 표시이며 해인이란, 우주 간의 모든 일체법의 근원이 밝혀져 나오는 곳을 말한다. 석가모니의 팔만가지 설법은 다름 아닌 우주간의 일체제법을 여러 비유로써 설명해놓은 것이며 이 일체제법은 해인으로 다 흘러들어간다고 했다.

석가여래가 49년 동안 설법한 팔만대장경에 감추어진 가장 큰 비밀은 다름 아닌 미륵을 찾는 것이다. 이 미륵불은 인류 궁극의 목적지인 극락을 열어줄 부처이므로, 미륵이 세상에 출(出)하시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가장 큰 비밀인 것이다. 미륵은 해인에서 출(出)한다는 의미이므로, 해인을 찾아야 미륵의 출세(出世)를 맞이할 수 있고, 극락세상으로 인도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팔만가지 설법 속의 큰 비밀을 간직한 팔만대장경을 소장한 사찰을 해인사(海印寺)라 하는 것이며, 바로 이 해인을 찾아야만 그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내용은 어렵지만 해인(海印)은 결국은 벼락 맞은 대추나무나 옥돌 등 기운이 좋은 물체로 만들어 글자와 도면이 새겨진 도장인 것이다.

이야기는 다시 흥선대원군으로 돌아간다.
흥선대원군 그는 자신이 정권을 잡아 왕권을 회복하겠다는 야심으로 명당자리를 구하기 위해 정만인(鄭萬人)이라는 유명한 술법사를 찾아갔다.

흥선군은 “부친의 묘를 이장하려고 하는데 좋은 곳이 없겠는가?” 하고 물었다.
정만인은 말하기를, “충청도 덕산 땅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있고, 또 충청도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가 있는데 둘 중 한 곳을 택하라”고 하였다.
 
흥선군이 “2대 황제지지를 달라”고 하자, 정만인은 요구조건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흥선대원군이 훗날 정권을 잡으면 자신에게 “합천 해인사(海印寺)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에 대한 인출(引出)감독권을 달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정만인과 흥선대원군 사이에 밀약으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인출  권한을 가지게 되는 정만인은 해인사에서 경판일부와 해인을 가지고 나오게 된다.

이렇게 훔쳐 나온 해인을 흥선대원군이 다시 돌려받아 능참봉으로 있는 간원(艮元) 김병소(金炳韶)선생에게 잘 보존하라 하였다고 한다.

한일합방 후 일본이 이를 알고 해인을 빼앗으려 하자 김병소는 그것을 가지고 도망을 쳐서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라는 산골짝에 숨었다.

그 후 김병소 선생은 개태사의 내력을 잘 알고 있었고 개태사에서 얼마 되지 않은 벌곡에 사신관계로 그 물건이 불가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돌려준다는 뜻에서 후천이 열린다는 개태사에 맡기게 된다. 실제로 개태사에는 해인이 존재했다고 한다.

개태사에는 김광영 보살이 있었다.

이분이 당시에 ‘화주부인’으로 불리고 있는데, 화주부인이 어느 날 야산 이달을 찾아와 “저희 절에 해인이라는 도장이 있는데, 거기에 새겨진 글을 해득하는 이가 없으니 선생님이 좀 보시고 풀이해 주십시오. 그러나 가지고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니, 선생님이 직접 우리 절에 가셔서 보셔야 합니다.”라고 청하므로 이달선생이 개태사에 가서 해인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개태사를 방문한 후 야산은 제자들에게 “해인은 금도 아니고 옥도 아니며 유불선 삼도를 합한 하늘의 바른 도법이, 그 동안 인욕에 가려 감추어져 있다가 후천이 옴에 그 빛을 발한다는 뜻으로 선후천이 바뀔 때의 위태로움에서 창생을 구제하기 위한 호신부(護身符)가 바로 해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해인에 새겨진 16자는 다음과 같다.
“성몽화령(聖夢化領) 현기범광(賢氤梵光) 교도천사(敎道天師) 구묘혁영(玖妙亦暎)”.
그 뜻은 “성인의 꿈에 화령한 현인과 범광이 하늘의 도를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 옥돌의 신묘함 다시 빛나도다.”

그리고 야산은 이 해인에 쓰여 진 16글자와 예불할 때 쓰는 경문 일부를 수정 보완하여 64자의 해인경을 짓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해인을 제작하여 사용하다 부여 은산에 이것을 묻었다고 한다. 해인은 장차 세상이 환란에 빠질 적에 구제창생을 위한 호신부 로 쓰고자하는 도장인 것이다.

창운각 기둥에 쓰여 있는 해인은 이러한 뜻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절에 소장되어 있던 해인은 어디로 갔을까?

‘개태사(開泰寺)’

천지가 사귀어 만물이 통하는 지천태(地天泰)괘이니 개태(開泰)는 후천세계의 태를 여는 뜻이다. 그래서 일제도 조선의 기운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개태사에 그들의 신궁(神宮)을 지으려 했던 것이다.

조선조 임금의 옥새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많은 옥새를 다 잃어버리고 몇 점 남지 않았다니, 문화재청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텐데.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사소하게 여기는 이러한 것이 국가의 운을 걸고 벌어지는 이면의 세계인 것이다.
우리가 소홀히 하는 우리의 중요한 정신세계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도난당하고 있지나 않는지 최소한의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내 칼도 남의 칼집에 들어가면 찾기 힘들다’고 했지 않는가?

‘사향노루배꼽 때문에 죽는다.’고 기회를 잃고 늦게 일을 하지 말고 우리 것을 찾는 데 더 늦기 전에 발 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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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운각 속에 모셔진 단군

팔각정을 나서 옆 건물로 가보자.
나는 여기를 ‘팥죽단지에 생쥐 달랑거리듯’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들어가는 입구에 정법궁(正法宮)이라 쓰인 푸른색기와의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창운각(創運閣)이라고도 부른다.

위에 쓰인 이름은 어느 절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안을 힐끗 보면 야릇한 느낌까지 들 것이다. 우리나라 어디를 다녀도 이렇게 다양한 신을 모셔 놓은 데가 없다.

거기다 고려시대 국조사찰, 호국사찰의 커다란 명성을 가지고 있으니 비록 지금은 많이 쇄락했지만 이만한 절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편의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신앙의 박물관이자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가 아니겠는가.

낡고 협소하지만 겉모습 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면면히 이어오는 그 깊은 정신을 느끼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

이제 또 다시 먼 과거로의 여행을 해보자 .
이절의 배치 상 중심점임을 간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기둥에 남북통일세계평화기원대도량(南北統一世界平和祈願大道場)이라는 글을 써놓은 것이 이채롭다.

개태사가 호국의 성격을 지닌 사찰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절을 지켜온 분들이 개인의 영달만을 위한 기복을 뛰어 넘어 항상 국가를 염려 했던 분들임에 감사를 드린다.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부터 단군, 부처, 좌편이 관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창운각 속에 모셔진 단군영정. 이 그림은 조선말 유명한 '심전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오른쪽에 계신 분 ‘단군상제(檀君上帝)’, 우리의 시조이신 분이다.
가까이 가서 얼굴을 흩어 보려면 먼저 향을 한대 올리고 나름대로의 의식을 한 후, 이렇게 해야 혼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단군은 커다란 영 능력자이셨다고 한다.

자 영정에 계신 분의 눈부터 마주쳐 보자.
시선을 마주친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시선을 마주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치면서 좌우로 움직여 보자.

좀 놀라울 것이다.
단군할아버지가 내 눈을 응시하면서 따라다니시면서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향을 한대 올렸으니 후손으로 최소한의 도리는 다했다고 보는데 마치 “너는 누구냐” 하시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영정에 그려지신 단군할아버지는 다정다감한 눈동자를 가지셨다.

우리 회화사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18세기 초 선비 화가 공재 윤두서의자화상은 역시 시선이 가는 데로 따라온다. 형형한 눈매, 불꽃처럼 꿈틀거리는 수염, 안면의 핍진한 묘사가 압권인데 좀 으스스하다.

그런데 그 눈동자와 마주치면 귀신에게 홀린 듯 눈동자에 시선을 뗄 수 없으니, 쳐다보는 이의 눈을 통해 흉중까지 꿰뚫는 듯하다.

희여 번뜩한 눈빛은 보는 이를 그냥 놔두지 않고 파고드는데 그 안광이 얼마나 집요한지, 그림을 벗어나서도 잔상이 어른거린다. 한마디로 오싹하다. 그림이 저 정도이니 이에 반해 단군할아버지는 참 편안한 눈동자를 가지셨다.

유명한 모나리자의 눈동자도 쳐다보는 데로 시선이 따라온다.

왜 그럴까?

이렇듯 쳐다보는 각도에도 불구하고 그림속의 눈동자의 위치는 우리와 맞추어져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회화는 2차원의 평면인데, 실제 공간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원근법을 적용해 3차원을 만든 것이다.

원근법을 이용한 풍경화가 실제 풍경처럼 보이는 것도 그림속의 눈동자가 어느 쪽에서 보든 우리와 마주쳐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평면 안에 가상의 입체를 그려 넣어 생긴 미술기법인 것이다.

이 그림은 조선말 유명한 ‘심전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그린 그림이란다. 
안중식은 오원 장승업을 사사하여 많은 영향을 받고 조선시대의 전통화단과 근대화단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 유명한 분이다.

이 영정은 한때 분실되어 사라졌다가 논산출신의 수장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그림이 개태사에 있던 그림임을 알아보고 흔쾌히 돌려주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단군영정으로는 잘 그려진 그림으로 손꼽이며 계룡산일대는 개태사의 영정을 표준으로 많이 모시고 있다.
남한에서는 최초로 모셔진 영정으로 알려져 있다.

단군영정은 원래 1946년 음력 3월 3일 김광영 씨가 전국 8도를 상징하는 여덟 칸 창운각을 지어, 남한에서는 최초로 단군 영정을 모셨다고 하는데 그러면 창운각은 옆에 나반존자가 모셔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원래 팔각정은 단군을 모시는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단군영정은 지방의 크고 작은 단군성전에 모두 다 걸려 있지만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수난을 당해 한결같지는 않은데 해남에는, 대종교 1대교주인 나철이 망국의 통분을 하고 순사한 황해도 구월산의 유명한  삼성사에서 모셨다는 단군영정이 있다.

단군화상은 화가인 솔거가 꿈에 단군이 꿈에 나타나시고 그 모습을 천여 장이나 그려 이웃에 돌렸다고 하는데 정부지정 단군표준영정의 모습도 다양하니...

여기서 가까이 있는 부여의 장암면 장하리 천진전의 단군영정은 국내 어느 영정보다 제작 년대나 채식, 바탕, 필선, 구도 등에서 수준이 높은 국보급영정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부여박물관에 기증되어 보존되고 있다고 하나 박물관에 확인해보니 소유주의 허락 없이는 볼 수 없다고 한다. 소유주도 모른다고 하고, 알려주지도 않는데 아쉽다. 아쉽지만, 가는 길에 그 유명한 ‘장하리 삼층석탑’의 가날 픈 몸매를 살펴보는 재미를 느껴보기 바란다.

대전 서구 정림동에는 신도 안에서 이주해온 단군성전인 단묘(檀廟)가 있어 매년 대전대학교 주최로 어천대제(御天大祭)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신도 안에서 철거 당시 완강히 철거를 거부하여 육군본부에서 남선리에 있는 시설물 일체를 그대로 옮겨준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찾아가 보니 아담하게 잘 정리가 되었으나 주변정리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단군은 누구인가?

우리의 고대사에 아직도 논쟁중이지만 이제는 그 동안의 연구나 각종 유적을 볼 때 고조선을 단군을 부인함은 억지 주장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제는 실재성을 떠나 당시의 영역, 사회, 국가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시작돼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남의 땅도 내 것이라고 하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역사에서 수차례 겪었음에도 미리대비하고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는 겨우 한다는 것이 국사 교과서에 ‘단군조선은 있었다.’ 라는  단군의 실재성의 표현이라니, ‘가을바람에 새털’ 격인 사학자들이 들썩이는 우리나라가 불쌍하다.

치열한 민족의식과 고민하는 자세는 어디도 찾아 볼 수 없으니 단채신채호 선생이 하늘에서 통탄하고 계실 것 같다. ‘강아지에게 메주 멍석 맡긴 셈’이니 믿지 못할 사람에게 나라역사를  맡겨 불안하다.
그래도 늦었지만 국사교과서에도 단군조선을 인정하기로 했다고 하니 그나마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차길진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난 80년부터 구명시식을 통해 영가들을 천도하는 일을 하고, 또한 나름대로 영혼의 세계를 공부하면서 단군을 만난 것은 여러 번이다. 이것에 대해 내가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단군은 실재 인물이며 강력한 정신성, 곧 뇌파를 가진 인물 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그는 샤먼(무당)과 같이 뇌파의 델타 파장 영역까지를 넘나드는 굉장한 영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는 자세하게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단지 배달민족의 건국 시조로서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신화적 인물로만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구명시식을 하면서 만난 단군의 모습은 도포를 입고 턱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이 아니고, ‘청동 검으로 무장을 하고 갑옷과 투구를 쓴 젊은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왜 그가 젊은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는 실제로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온 것이 아니라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서부터 들어온 선진 문명(청동기 문화)을 가지고 있었던 이민족’이었던 것이다.

구명시식에 나타난 단군은 ‘천상에서 내려온 환웅과 웅녀의 아들이 아니라, 중구 북부 만주 지방에서 먼저 청동기 문명을 발달시킨 부족의 한 명이었으며, 특히 고아시아족들이 살고 있는 한반도를 침략하는 데 앞장 선 전투부대 대장’이었던 것이다.

특히 단군 자신은 ‘태백산 신단수 아래서 환웅이 곰과 만나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이다’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한반도 북부를 평정한 단군의 아버지, 곧 환웅의 전투부대가 토착부족, 특히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상하던 부족들 중에 곰 부족의 한 귀족 딸을 부인으로 맞아 낳은 아들이 바로 단군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단군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특히 ‘쑥과 마늘을 가지고 동굴에서 견디라’는 이야기는, 그 당시 단군의 어머니와 같은 지배자의 부인들은 다른 여자들과 같이 밖에 나가서 잡혼을 하지 않고 한 집에 머무르면서 지배자만을 섬기게 되어 있었던 것을 뜻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단군 영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또 그는 가끔 나타나 자신은 영과 육, 정신과 물질을 모두 다루는 능력이 있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는 ‘93년 겨울 구명시식 가운데 나타났던 단군 영가가 전한 메시지를 봤을 때 이러한 말들은 사실인 것 같다.

그때 흰 도복을 입고 나타난 단군의 영혼은 나타나자마자 나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말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이런 일하는 것으로 말하면 내가 제일’이라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는데, 그는 그 당시 내가 ‘어린 시절 아버님 차일혁 총경의 죽음 이후 가졌던 영 능력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현재까지 구명 의식을 행할 때마다 소위 설치고 힘이 세고 심술을 부리는 영가를 만날 때 그들이 덤비면 ‘영력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기술’이 발달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요즘도 가끔 단군의 영가는 구명시식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렇게 강한 메시지를 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데, 6척 거구에 살도 많이 찐 편이며 얼굴이 붉고 눈이 작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2007년 6월 22일자 주간조선)

단군, 긴 이야기가 필요 없는 분 아닌가.

단군영전 옆에는 천부경이 놓여 있고 문화일보 이규행사장과 애국사상선양회에서 기증한 백두산천지그림도 함께하고 있다.

개태사는 이래서 재미있다.

이 절을 중창하신 분은 단군 하면 ‘이 정도는 알아야지’ 하시는 것 같다.
후손들에게 점잖이 꾸짖고 계시는 것이니,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366사(참전계경), 이 책은 환인, 환웅, 단군이 우리민족의 우주와 인간의 법도를 가르쳐 전래해온 세상살이 기록이다.

이러한 책들을 시간을 내서 읽어 본다면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책들을 보다보면 사서삼경을 중심으로 한 유교나 도교 등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는 느낌을 수 없이 받게 된다.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껏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미 해독된 갑골문자들이 우리의 농은유집 천부경문에 다수 발견되고 확인됨으로써 결국 갑골문자가 중국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일시무시일( 一始無始一)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
 천일일지일이인일삼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일적십거무궤화삼(一積十鉅無匱化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天二三地二三人二三)
 대삼합육생칠팔구운(大三合六生七八九運)
 삼사성환오칠일묘연(三四成環五七一妙衍)
 만왕만래용변부동본 (萬往萬來用變不動本)
 본심본태양 (本心本太陽)
 앙명인중천지일(昻明人中天地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이라고 쓰여 있다.

한번 읽어 보고 나오기를 권한다.
한문이 어려운 부분이 있으니 미리 알고 가면 도움이 될 듯 싶다.

여기서 한 부분은 알고 가야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라는 글인데 여기서도 ‘3’자가 나오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알고 가야 할 것 같다.

어려운 부분이라 해석도 다양하지만 김인훈옹 이분은 민의학에 대가이신 분으로 이분이 생전에 강연하신 내용이 용어는 어려워도 재미있게 되어 있어 여기서 인용해본다.

"천부경의 석삼극무진본에 대해서 삼극론(三極論)이 여기서 나와 시작하는데,  그래 왜 이걸 우리도 알게 쓰지 않았느냐 하는 사람도 없어요.

그럼 거기에 3종류로 나눠 놓고 뭣이 나오느냐?

거 많은 3종류인데 천지인삼재지도(天地人三才之道)에 들어가 3종류는 삼생만물(三生萬物)까지 천개어자(天開於子), 지벽어축(地闢於丑), 인생어인(人生於寅). 그래 그 3종류를 내내 따져 나가면 수천억이 나와요.

거기 뭣이 있느냐?

사람은 흙에서 생긴 물체이기 때문에 황색이 제일 먼저 주인공이라. 황색이 주인공인데.
황색에서 따라서 변하는 건 토생금(土生金)의 원리로 백색이 나오기로 돼 있어.

백색은 금기(金氣)라, 황색은 토기(土氣)이고. 토색 왈 황(黃)이요, 금색 왈 백(白)인데. 그래 토생금은 자연의 원리기 때문에 백인종이 나오기로 돼 있고, 황인종은 인의(仁義)도덕이 근본이고 백인종은 의리는 있어도 그 사람들은 용맹을 세워. 그래서 무기까지 개발해, 선구자야.

그러면 금생수 하는 원리로 백색에서 변해서 흑색이 또 나와, 그럼 흑인종이라. 흑인종은 뭐이냐?

이건 힘이 있는 걸 자랑으로 여기고, 우리도 상고(上古)엔 그랬지요.
흑인종은 오늘까지 힘이 앞서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또 욕심이 또 많아.
그래 강욕자 왈(强慾者曰) 흑인(黑人)이라 하는 거거든, 이런데.

이건 인간의 삼종(三種)도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

그러면 초목(草木)의 삼종도 마찬가지라.
초목의 조상은 버들나무[버드나무]인데, 거 물에 이끼 끼는 거 있어요, 청태(靑苔)라고.

이끼 끼는 이끼, 버들이 돼요. 건 내가 눈으로 본 일도 있고, 건 사실이고, 이런데.

이치만 가지고 확실하다는 건 자연에 있어서는 사실이나 그건 과학적으론 증명자료가 돼야, 그래서 나는 본 일이 있어요. 금강산 묘향산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런데, 거기에 버들나무도 세 종류라, 삼형제라.

소낙비가 오는 것도 하루 세 번 오는데, 걸 삼형제라고 그러지? 이런데.

버들나무가 있고, 고 다음 번에 생긴 놈이 수양버들, 고 다음 번에 생긴 놈이 백양(白楊),

거기서 생긴 소나무가 있는데. 소나무도, 소나무에 잣나무 있고 전나무가 있다.

그럼 그 다음에 생기는 향나무가 있어. 향나무엔 참향나무가 있는데, 고 다음엔 넉 줄이 뻗는 묘향나무가 있고.  고 다음엔 노가지향나무(노간주향나무), 두향나무라고 해요. 그것도 삼형제라.

그래서 거기 쪽 가면서 삼형제에서 삼형제를 두게 되면 몇 만으로 변할 수 있어요.

그래서 복숭아도 몇 백 종류가 될 수 있고, 포도나 이런 것도 그래요.  머루까지 나가면 상당한 종류가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 삼극에 가게 되면 무진본(無盡本)이야. 그 근본이 끝날 수가 없어.

이래서 내가 천부경에, 왜 젊어서 머리 좋을 적에 붓을 안 드느냐?
천부경을 써 놓게 되면 세상에 글이 없어져. 어떤 경전이고 다 없어져.

천부경은 천지가 생긴 이후에 그 이상의 글이 나올 수가 없어. 만약 석삼극무진본 하나 끝나는 덴 주역 같은 책이 천 권이 넘을 거요.

내가 그걸 죄다 밝히면 천부경을, 여든하나 천부경을 다 끝내는 날이면 지구엔 글이 없어져 버려. 그래서 죽은 후에 후세에 참고자료로 전할 순 있어도 살아서 그걸 글이라고 세상에 자랑할 거리는 못돼요.

너무 좋아요, 너무 좋은데. 내가 이야기하는 건, 그게 지금 삼극론에 들어가서 무진본이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필요한 얘기가 거기 전부가 있다 이거요."

해석은 다양하지만 그 근본원리는 하나인데 그것의 해석은 각자의 몫이라 본다.
이것도 우리의 것이니 한번 알아보는 것도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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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신

옆으로 눈길을 돌려 이제 칠성님을 쳐다보자.
이분은 칠성여래라고 불리어지는 분이다. 전형적인 탱화라 별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이분도 ‘짬밥’으로 따지면 산신 못지않은 분이다.

 
 
 
  ▲ 개태사 칠성탱화  
 
우리의 민족이 북두칠성별의 기운으로 이 땅에 태어났으니 우리가 외계인이라면 이별이 우리의 고향인 것이다. 이 별의 기운에 감응해서 우리민족이 태어나고 대를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삼신당의 칠성탱화를 보고 환상적인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아무 그림도 없이 벽에 별모양으로 북극성과 북두칠성 및 주변의 별들을 배열해 놓았는데, 정말 ‘칠성신앙’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조각인지라 이것이 진정으로 칠성각이었다는 생각에 절에 가면 부처의 모습을 한 칠성여래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부처모습을 한 칠성신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별자리를 배열해 놓았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러한 칠성벽화는 장식품으로 사용해도 절묘한 느낌을 줄 것 같다.

칠성신앙이 어떠한 것이기에 절집 안에 꿋꿋이 그 모습을 이어 오고 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만큼 북두칠성에 목을 매다시피 하는 민족은 아마 없을 겁니다. 북두칠성에 대한 선조들의 관심은 말과 행동에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북두칠성이 앵돌아 졌네.’ ‘마음 한번 잘 먹으면 북두칠성이 굽어본다.’ 하는 옛말을 보면 북두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은 정화수를 떠놓고는 칠성별에 소원을 빌었고 죽어서는 칠성판에 누워야 하늘 문을 통과한다고 믿었어요. 그리고 상여가 나갈 때도 좌우로 7명씩 양두칠성과 음두칠성이 배치되었구요. 왜 우리 민족이 북두칠성에 그렇게 집착했을까요?”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의 저자이자 한배달 역사천문학회 부회장 ‘노중평’씨의 말이다.

우리가 일제 36년의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잃어버린 칠성 신앙을 오히려 일본이 계승해 최근 해외로 문화수출까지 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정도이니 여기서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음력 7월7일 행하는 칠석제는 은하수 때문에 만나지 못하던 견우성과 직녀성이 까치와 까마귀가 놓아주는 오작교를 건너 1년에 딱 한 번 만나는 날로 운우의 정을 나누는 것을 축복해준다는 이러한 의미는 북두칠성과 주변의 별들과의 운행을 뜻 하는 것으로 그 만큼 칠성을 중요시 했던 것이다.

우리의 옛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장독대 위에 정안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께 비나오니 부디 금 두꺼비 같은 아들하나 점지해 주옵소서.”라고 소원을 빌어 온 분이 북두칠성이다. 밤하늘의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출생을 기원하는 흰옷 입은 여인의 치성(致誠)은 인간의 지속을 염원하는 원초성이 담긴 것이다.

치성광여래는 북두칠성의 가장 중요한 북극성이고 큰곰자리에 있다. 큰곰은 곧 환웅이고 태양과 달의 맏아들이었다. 환웅은 삼천의 천신을 거느리고 단수가 우거진 신단에 이르렀고 신시를 열었다고 한다.

환웅은 지모신인 백호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음으로써 개천의 시조를 탄생하였다.
북두칠성에 기원하는 것은 환웅의 강림으로 잉태를 기원하는 백호의 재현인 것이다.
우리의 칠성신앙은 그렇게 커다란 의식 없이 순수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칠성신앙은 고대 이래로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고유 신앙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이 우주에서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야 하고, 길흉화복은 물론 수명까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칠성님이 주관하고 있다고 믿었다.

북두칠성은 우리 조상들이 믿던 삼신 상제님을 별로 나타낼 때 붙여지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칠성신앙은 신교신앙의 하나였던 것이고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우리는 북두칠성의 자손 즉 천손민족인 것이다.
 
그래서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면서 맨 먼저 지내던 초례(醮禮)는 칠성님께 드리는 인사였고 역대 임금들이 지내던 초재(醮齋)도 칠성님께 올리는 인사와 기원이었다고 한다.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과 북두칠성을 호위하는 28수(宿) 별자리를 본 따 조경한 독창예술품인 동시에 북두칠성 신앙과 삼신상제 신앙의 대표작품이 경복궁과 창덕궁이다.

우선 광화문 앞과 경복궁 안에 있는 해치('해태'라고도 호칭)는 자미궁(자미원을 궁궐에 비유한 표현)의 남쪽 하늘을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경복궁 근정전 실내는 자미궁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내전 안의 장식 색깔은 자미원을 상징하는 검붉은 자주색, 비취색이다.
임금의 용상 뒤에 있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는 용상이 해와 달의 음양과 다섯 개 산의 목화토금수 오행(五行) 즉 하늘의 칠정(七政)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한편 천장에는 용 두 마리가 각 28개의 발가락(하늘의 28수를 상징)으로 여의주(임금)를 호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조선시대의 고궁은 북두칠성이 있는 하늘의 궁궐, 자미궁을 본 따 지은 대궐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민족 고유의 칠성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조선시대에 명나라의 통제로 하늘의 제사권을 철저히 잃어버리고, 민간신앙으로나마 존립해오다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나라와 민족을 지탱하던 정신적 지주였던 칠성신앙을 몰아내기 위해 칠성신앙의 대표작인 경복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총독부를 지으면서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칠성신앙을 포함한 온갖 전통신앙을 탄압하여 없애 버렸다.

다행히도 총독부는 95. 8. 15.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철거되어 지금은 옛 모습대로 복구되었다.

민족정신의 정기를 바로 세운 쾌거였으나, 궁궐만 복구하였을 뿐 아직도 우리는 경복궁 조성에 간직되어 있던 진짜 의미인 ‘칠성신앙’과 ‘삼신상제 신앙’은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대다수 한국인은 경복궁에 그런 의미가 있었는지 조차 잘 모르고 있으니 또 한 번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다.

자미성은 북두칠성 동북쪽에 위치한 가장 강력한 기운의 별로 백두민족인 우리가 모시는 별로 천자(天子) 자리를 움직이는 별이므로 자미성의 기운을 받은 국가는 아시아의 천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서도 꿋꿋이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자미성은 우리나라 곳곳을 비추고 있지만 그 기운 자체는 남쪽이 강하다.
해가 뜨는 동쪽인 함경도와 경상도에서는 권력적인 사람이, 해가 지는 서쪽인 평양과 전라도에는 문화적인 사람이 나온다. 21세기 세계의 주인은 문화다. 자미성의 천자 자리도 권력에서 문화로 변하고 있다.

문화가 꽃피는 시대, 자미성의 기운으로 태어난 백두민족의 힘으로 문화의 중심에 우리나라의 위상을 드높일 때다. (노중평저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중에서)

북두칠성의 깃발, 결국은 그 중심에 한류(韓流)가 더 높아 질 수 밖에 없다.
가수 ‘비’의 미국공연이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의 한류에 두려움을 느끼는 또 다른 세력이 있음을 감지해보지만 결국 이러한 문화적인 전도를 막을 수는 없다고 보여 진다.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진 문화 사업이 그 모습을 점차 들어 낼 시대가 왔고 그 중심에 ‘간방(艮方)’의 한민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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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팔각정에 앉아 계신 분 나반존자

팔각정 형태인데 ‘삼일지상정천궁(三一地上正天宮)’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 안을 보면 참 작은 키에 아기자기한 한분이 여러 개의 방석을 포개놓고 닫집 아래에 앉아 계신다.
앉은 모습이 매우 넉넉하여 절로 웃음 짓게 된다.

웬 조그만 팔각정에 닫집이 다 있다니, 닫집이 참 아담하다.
닫집이란 임금님의 자리나 부처님의 자리위에 장식으로 만들었다는 집의 모형인데 여기에 이분도 닫집에 있는 것을 보면 상당히 중요하신 분 같다.

닫집에 아담하게 앉아 계시는 분이 인상도 좋아 보이는데 옆에 기둥에 나반존자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면 이분이 ‘나반존자(那般尊者)’인 것 같다.

나반존자는 일반적으로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시는데, 개태사에서는 삼일지상정천궁이라고 명명하여 다른 사찰과는 달리 팔각정에 모시고 있다. 또한 일반 사찰에서는 탱화를 모시는 데 반하여, 석조로 조각된 나반존자 상을 모시는 점이 특이하다. 계룡산에서 가져온 돌로 나반존자 상을 조성하여  모셨다고 한다.

뒤에는 산신탱화와 칠성탱화가 있는 것을 보면 여기가 삼성각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나반존자 이분이 누구인가?
 

 
 
 
  ▲ [방석위 나반존자(那般尊者] 나반존자는 일반적으로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시는데, 개태사에서는 삼일지상정천궁(三一地上正天宮)이라고 명명하여 다른 사찰과는 달리 팔각정에 모시고 있다. 또한 일반 사찰에서는 탱화를 모시는 데 반하여, 석조로 조각된 나반존자 상을 모시는 점이 특이하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열반에 즈음하여 네 명의 큰 제자 마하가섭 존자, 군도발탄 존자, 빈두로 존자, 라후라 존자들에게 미륵불이 와서 세상을 구제 할 때 까지 열반에 들지 말고 지상에 남아서 자신의 신통력으로 중생을 제도하도록 당부하셨다.

이 가운데 빈두로 존자가 바로 나반존자로 18나한 중 한 분이라고 하고 있는 것 같고, 또 중국의 천태산에서 깨달음을 얻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장수를 누리다 죽었다고 하는 고구려의 파약(破若)스님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렇지만 좀 이상하다.

적어도 나한이라면 여러 나한과 함께 나한전에 모셔지던지, 그리고 빈두로존자나 파약스님이라면 그분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따로 모셔질 만큼 독특한 성인은 아니다.

그런데 각 절에는 독성각이나 삼성각이 있어 나반존자를 별도로 모신다.
그렇다면 이분은 불교의 빈두로존자가 아니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미친다.

이분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대체 불교와는 어울리지 않게 산신과 칠성신과 함께 하는 이분은 누구일까?

환인이 인간을 창조하시니 남자이름은 나반이요, 여자이름은 아만이다. 나반은 다름 아닌 인류의 시조로서 아사달에서 아만과 만나 결혼하여 우리민족을 만든 분인 것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아담과 이브가 만들어 진 것과 같다.

이백의 태백일사(太白逸史)에 따르면 “이때 백호(白虎)가 산을 지키고 황웅(黃熊)이 산에 살았다”고 한다.
나반과 아만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나 아버지, 어머니라는 우리말로 기억되고 있다.

나반은 아바이, 즉 아버지라는 우리나라 함경도 사투리를 한자로 음역한 낱말이다.
아만 역시 함경도의 방언 오마니라는 소리를 한자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불교전래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전통 신령이었던 것이다.
불교신앙과 융합되는 과정에서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불교 용어화 되지 않았나 싶다.

(박성수 저 단군문화기행 중에서)

결국 불교는 우리의 신교였던 전통신앙과 치열한 다툼 끝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남아 있던 전통신앙마저도 불교화식으로 변형을 하여 포교를 넓히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우리의 고유 신앙을 차용한 흔적은 4월 초8일은 해모수가 단군조선의 5가 원로들을 끊임없이 회유하고 설득하여 마침내 화백회의를 통해 단군으로 등극한 날로, 해모수 단군 등극 축제일을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석가탄신일로 변경된 것이다.

대웅전이란 배달국의 환웅을 모셨던 ‘환웅전’의 변형으로 전각의 이름만 남기고 석가세존이 대웅의 자리에 앉은 것으로 우리나라만 대웅전이라 불리 우고 있다.

삼성각 또는 삼신각도 역시 다른 나라 불교에서 없는 한국만의 전각이다.
한단고기의 기록대로 환인, 환웅, 환검(단군) 세 성인을 모셨던 단군조선의 전각이 불교와 타협하면서 절간 뒤로 밀려 보존된 것이다.

마치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 (물론 여기에도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호칭하는 문제에 이견이 있는 것 같다.)이라고 표현하는 본래 단어의 기원은 하늘님(하늘天에 있는 님)이다.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천손(天孫)의 자손으로서 하늘을 공경해오는 전통신앙 강했다는데 ‘명나라는 조선에 하늘신인 천신(天神)의 제사를 받들지 못하도록 원구단(圓丘壇)의 설치를 제한하였다.

제후는 산천에만 제사를 지내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천자의 위상을 가지지 못하도록 압박하였으나 원단(圓壇)또는 환단(圜壇)으로 세조 시까지 끈질기게 유지하였다.

하늘에 대한 제사권의 박탈은 자주권의 제한이었다.
하늘을 상실한 민족은 오늘날 제공권을 상실한 국방과 같이 한계가 있고 우주선이나 핵을 보유하지 못한 국가가 느끼는 국제사회의 초라한 위상과도 같다.’
(허흥식저 ‘한국신령의 고향을 찾아서’ )

천손민족으로 자부해오면 고조선 이래 고려시대까지도 중화에 대하여 우월적 지위를 누리던 우리 민족이 고작 조선시대에 들어서 명나라에 눌렸으니 명이 만주족인 청나라에게 망한 후 중국은 사라졌고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해서야 다시 중국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그러함에도 기득권세력의 지나친 사대정신이 명이 망한 후에도 우리의 천신인 하늘에 대한 제사권을 찾지 못하고 소중화를 외치면서 망한 명나라만 쳐다보고 동경해 왔으니 결국 국민들의 하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은 조선말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의 전래로 하늘사상을 다시 찾게 되었으니 숱한 순교자를 내면서까지 찾으려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유일신을 뜻하는 단어 천주(天主)를 당시의 한글 표현인 하ᄂᆞ(天)님(主)으로 번역하여 받아들인 것이니 당연히 그 종교적인 전파속도도 빠를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외래 종교였던 불교가 우리의 전통신앙인 환웅전, 칠성, 산신, 나반존자 등의 성지에 주인으로 집을 차지하고 이들을 버리지 않고 불교 화에 끌어넣어 성공한 반면, 천주교나 개신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잘 빌려서 성공한 경우라 볼 수 있다.   

나반존자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일을 꿰뚫어 알고 있고,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말법시대의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한다.

독성각에는 나반존자 상을 봉안하기도 하지만 보통 독성탱화를 많이 봉안하는데 이 탱화는 천태산을 배경으로 하여 희고 긴 눈썹을 가진 늙은 비구가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일반 절에 갈 때 나반존자인 독성탱화와 산신을 산신탱화가 비슷하니 잘 살펴보아 차이나는 점을 찿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나반존자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시간이 되면 경북 청도 호거산 운문사(雲門寺) 내에 있는 사리암을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올라가기도 힘든 산중턱에 있던데 왜 그리 사람들이 많은지 경상도 사람들의 강렬한 불교신앙은 어디 까지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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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망청 부처와 개태사 철확

지나치기 쉬운 능청 망청 부처 여기서 ‘능청 망청 부처님’을 만나 보자.
 

 
 
 
  ▲ 요사채가 있는 우주당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전에 축대 옆에 소박하고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부처님이 앉아 있다. 이것이 바로 능청망청 부처님.  
 
요사채가 있는 우주당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전에 축대 옆에 소박하고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부처님이 앉아 있다. 마당 한 편을 지키고 있는 이름 모를 석불좌 상이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고 있어 지나가는 이가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치기 마련이다.

잘 쳐다보면 작은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고 수줍어하는 척하면서 장난을 쳐주었으면 하는 듯한데, 이 부처상을 보니 왠지 쓰다듬어 주고 싶은 느낌이 든다.

사실 쓰다듬어주기 보다는 한대 쥐어박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누군가 머리위에 작은 돌을 얹혀놓고 기원한 듯 한데, 그래서 그런지 작은 돌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다. 이런 아기자기한 부처상을 만든 장인은 누구일까?

자꾸 쳐다보여지지만 아직도 봐야 할 것이 많으니 축대 옆 계단을 올라가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자.

오른쪽 구석에 전각에 웬 쇠붙이가 잘 모셔져 있다.

가마솥-살아있는 영물

이것이 그 유명한 이름하여 ‘철확(鐵鑊)’, 개태사 가마솥이다.
충남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철확은 우주정 안에 잘 모셔져 있다.

“어느 해의 일이다. 큰 스님 한 분이 개태사를 찾아와서 얼마 후 대홍수가 나서 본당의 부처님이 위험할 것이니 이 솥으로 본당에 이르는 물길을 막으면 불상은 안전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스님들은 가마솥으로 본당 앞을 막았다. 과연 대홍수가 났는데 불상은 안전했지만 가마솥은 떠내려가 지금의 고양리 다리 근처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 쇠 솥으로 제방을 쌓으면 수해를 막아주고 풍년이 들게 한다고 한다. 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 가마솥의 뚜껑은 인근 천의 어디 엔가에 묻혀 있어 지금도 흐린 날에는 ‘윙’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 살아있는 영물이라 불리우는 개태사 철확  
 
이 가마솥은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국을 끓이던 것으로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나 된다고 한다 .
조선시대에 절이 없어지면서 벌판에 방치된 채 있던 것을, 가뭄 때 솥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으로 옮겼다가, 연산 읍에 옮겨진 후 서쪽냇가에 묻혀 있다가 발굴하여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서 열린 경성박람회에 출품되기도 했던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 후 연산공원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개태사의 경내에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다.

일본인에 의해 1435년 부산까지 반출해갔다가 솥에서 울려 나오는 큰 소리 때문에 반출되지 못하고, 도둑의 손에 고철로 부서질 때도 뇌성 같은 소리와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면서 날이 갑자기 어두워져 모두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그때 파손된 부분이 현재 테두리에 남아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온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니 철확이 지닌 어떤 불가사의 한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온몸으로 역사의 찬란함과 부상 속에서 우뚝 선 우리의 역사 그자체이다. 역시 대단한 물건이다.

그래서 그런지, 논산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그 세 가지를 보았느냐는 질문을 한단다.

   
 
  ▲ 강경 미내다리 ⓒ논산시청  
 
하나는 강경 미내 다리이고, 둘은 개태사철확이며, 셋째는 은진미륵이다.
강경 미내 다리도 잘 복원해 놓았으니 한번 찾아가서 보기를 권한다.

 
 
 
  ▲ 관촉사의 은진미륵  
 
시간이 나면 양촌에 있는 쌍계사를 찾아가서 대웅전 전면 5칸에 조각된 작품도 보기를 권한다.
이것도 가마솥과 같이 경성박람회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이다.

이런 영험한 철확, 미내 다리, 은진미륵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천리를 멀다하고 찾아왔다고 한다. 철확을 붙잡고 한 가지 소원만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니 그 파란만장한 역사만큼이나 효험이 있었던 것 같다.

이 가마솥은 1천여 명이 먹을 수 있는 밥솥으로써 규모도 놀랍지만, 천년이 넘도록 금간 흔적도 없다.
이 정도 크기면 한번 밥을 하면 몇 백 명이 먹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인근 주택가 담벼락 밑에 묻혀 있는 석조와 함께 그만큼 개태사가 웅장하였고, 그 기세가 대단하였음을 잘 보여주는 고려정신의 혼이 남아있는 멋진 작품이다.

그러면 이러한 거대한 철확이 단순히 밥이나 국만 끓여 먹는 도구였을까?

식사도구로만 쓰이기에는 너무 큰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절에는 유명한 ‘수기(守其)’ 스님이 계셨다.
고려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으로 고종 19년(1232) 불타버리자 강화로 도읍을 옮긴 최우의 무신 정권은 초조대장경 판각 작업에 곧 착수하게 되고 총감독으로 논산 개태사의 승통이신 수기 대사를 지명한다.

바로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총지휘를 하신분이 아니던가?

수기화상이 교정의 총책임을 맡고, 학식이 높은 일군의 고승들이 참여하였고 선승, 문인 지식인이 참석하였는데 특히 이규보가 이곳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는 개태사조전원문을 썼다.
수기대사는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바로 대장경의 목록작성과 판본비교와 교정을 보게 된다.

그것은 학문의 중도적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대장경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화상의 빼어나게 높은 학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수기화상은 이러한 작업의 여정을 일일이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 30권이다.

그렇다면 수기스님이 계신 개태사는 이미 고려조에서 경판을 만드는 기술이 많이 축척되어 있는 절이었을 것 같다. 전성기의 개태사에는 천여 명의 대중이 주석하였다고 하니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경판조성사업의 인적자원이 확보되어 있었다.

또한 당대의 명승 의천(義天)과 균여(均如) 등이 간경(刊經)과 강경(講經)을 위해 이곳에 왕래하였고 한편으로 대장경의 조성에 큰 역할을 맡았던 수기(守其)와 해인사의 간경을 주도했던 천기(天其) 등의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 주석하였다고 하였음을 볼 때, 이는 개태사가 고려 때 활발했던 경판조성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쉽게도 현존하는 개태사의 경판은 한 점뿐이라고 하는데 아쉽다.

이러한 대장경 경판을 만드는 과정은 지리산이나 완도 등의 자작나무를 벌채하여 삼년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어 다시 소금물을 넣은 가마솥에 찐 뒤 그늘에서 말리고 대패질을 한 후, 경문을 붓으로 쓰고 그에 따라 새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큰 가마솥의 용도도  대장경판의 나무를 삼고 쪄내는데 일부 활용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 개태사 철확에는 소원을 빌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던진 동전이 잔뜩 담겨져 있다.  
 
개태사 가마솥 앞에서 수기스님과 대장경을 떠 올리면서 난국의 시대에 위기를 탈출하고자 만드는 대장경판각 작업에서 얼마나 힘든 노력과 정성이 들어갔을까 자문해 본다.

이렇게 나라가 위험에 빠졌을 때도 각자 위치에서 최선의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선조를 가진 우리가 정말 자랑스럽다. 이 개태사는 수기스님의 비밀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을까?

온몸에 난 상처는 역시 보기가 흉한 것일까, 온몸으로 고생하고 소임을 다한 결과가 만신창이 몸만 남아 있어 이렇듯 훌륭한 유물임에도 법주사에 있는 철확은 보물로 지정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대접을 받는 것 같다.

그렇지만 ‘얽은 구멍에 슬기 들었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얼굴은 흉하지만 마음속에 지혜를 간직하고 있으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마음의 보물’ 이다.

그래도 어떠하랴 온몸에서 내뿜는 기운은 상당하니 드러내지 않는 은은함은 천년을 가도 영원한 것이니 나는 그 맛에 개태사를 찾고 소원을 빌면서 그 찬란한 고려정신을 느끼기 위하여  개태사를 자주 찾는다.

이외에 개태사가 대단히 커다란 사찰이었음을 알리는 대형 북이 있는데 이것은 위 ‘개태사석조’가 있는 민가에서 집을 짓던 중 발견되어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명칭은 ‘금고(金鼓)’로 금속으로 만든 북으로 큼직하게 연꽃 16개를 돌린 다음 각각의 꽃 안에 개구리 모양의 동물을 양각한 것이 돋보이는데 직경이 무려 102㎝로 그 동안 알려진 고려시대 금고 중에서 가장 크다. 번성했던 개태사의 고려시대 당시 사세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유물로 알려져 있다.

가마솥에 소원을 빌었으면 이제 옆에 있는 팔각정으로 지어진 건물에 눈길을 돌려보자.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96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전설속의 감나무와 요사채

<전설 속의 감나무>

 
 
 
  ▲ 개태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나오는 전설속의 감나무. 1970년대에는 이 감나무 가지에서 엄나무가 자랐으나 지난 1995년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최근에 다시 이름모를 넝쿨이 자라고 있다.(사진)  
 
오른쪽에 커다란 감나무가 한그루가 서있다.
그저 맹하니 서있다.

물론 가을되면 홍시도 주렁주렁 열린다.
그때는 정말 보기도 좋다.

예전에 감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로 엄나무가 뚫고 나와 자라고 있어 매우 희귀한 일로 커다란 화제가 되었는데 몇 년 전만해도 이 엄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이를 보라고 사다리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으니 도깨비에게 속은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으니, “일제하에서 독립될 당시 주지승의 어머니인 김광영 여사가 이 절에서 수도를 하면서 매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던 중 계시를 받았는데, 그 계시에는 감나무에서 엄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하면 미륵불이 출현한 것을 알라고 했다는 것이다.
 

   
 
  ▲ 전설속의 감나무 가지 사이로 자라고 있는 이름모를 넝쿨의 모습  
 
수십 년이 넘은 감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1970년대에 그 감나무의 굵은 가지 사이에서 엄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 감나무에 엄나무를 접목한 사실도 없고 또한 자라나는 그 부위에 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종류가 다른 두 나무가 한 뿌리에서 동시에 자라고 있어 화제가 된 것이다. 

엄나무는 1995년경에 죽었고 이 감나무 단목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으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실이 없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라 죽은 엄나무 고목이 감나무가지 사이에 거시기 만하게 불쑥 솟아 있었는데 이것을 보라고 사다리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엄나무가 감나무를 아래서 몸을 파고 들어가 감나무 윗가지 사이로 자라고 있었으니, 이런 것은 자꾸 부연해보면 엄나무가 감나무를 뚫고 들어가는 뿌리의 모습이 남녀의 성행위와 흡사하여 보는 이가 민망스러웠는데, 지금은 아쉽지만 그런 것도 없다.

불교신도 분들은 종교성지에서 웬 음란한 생각을 하느냐고 힐난할지도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 이 뿌리에서 자라던 엄나무를 태워버린 흔적이 있었던 것을 보면 피장파장이다. ‘아쉬워 엄나무 방석’이라고 어쩔 수 없이 베임을 당한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여기에 웬 넝쿨이 자라고 있다.
많이도 자랐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궁금하다.

‘TV는 신비 속으로’에 나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조용히 미소를 머금어 본다.

상상의 자유는 무한대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활력소를 찾는 것이 여정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원래 나무 두 가지가 서로 휘어 감고 자라는 것을 연리목(連理木)이라 하여 우리 조상들은 이것이 상서럽고 좋은 기운을 준다고 하여 인위적으로 만들곤 하였다. 한 몸이 된 이상 수분과 영양도 함께 나누면서 그렇게 한 나무인 양 살아간다. 마치 부부가 포옹한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여 옛날부터 부부의 금실을 표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나무는 원래 동티나는 나무인지라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엄나무가 자랐으리라 생각되지만 가을에 와서 감 서리나 해야겠다.

<깊은 뜻이 담긴 요사채>

 
 
 
  ▲ 뫼산(山)자 형태를 하고 있는 우주당의 모습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 있다. 3동으로 지어졌다. 여기도 '3'의 형상화가 나온다. 그런데 건물이 조금 이상하다. 3동으로 된 집이 약간 튀어 나와 보이는데 설계가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눈을 뜨고 잘 보면 이 건물이 바로 우주당이라고 하는 건물로 ‘뫼산(山)’자 형태를 하고 있다.
사찰 종무소와 다실, 요사채 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일설에는 석조삼존불의 세분부처가 뫼산(山)자 형태요.

이곳의 우주당의 요사채의 3동건물이 뫼산(山)자인 바 서로 어우러져 뫼산(山)자 형태로 가람배치를 한 것이라고도 한다.

1950년 초에 뫼산(山)자 형의 우주당 건물을 음력 5월 5일까지 급히 짓게 하여 관운장을 봉안했다고 하는데, 이는 다가올 환란인 6·25전쟁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예지력이 있는 분들이 당시에는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 건물은 그것을 다시 산뜻하게 복원해 놓았다.

요사채 한 채를 건축하는 데도 깊은 뜻이 있었으니, 역시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나라 사랑하는 법도 항상 물질로만 하는 것임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이것도 예지력 있는 분들의 뜻이 있어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니 호국 사찰로서의 전통은 계속 되는 것 같다.

요즈음은 약간의 예지력만 생기면 전 국민을 상대로 국운이니 예언이니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분들이 참 많다. 그렇지만 이러한 능력은 자신의 수행도구로서 삼아야 하는 것이 일차적이며, 진정으로 나라의 운명에 급격한 변화가 예지된다면 보이지 않는 처방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닐까?

세상 이치를 읽는 능력을 받은 것은 축복일수도 있지만 그만큼 커다란 의무가 부과 되는 법이 아닐는지, 국민들의 삶만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최근에 지어진 건물은 가운데 건물이 좀 더 튀어 나와야 뫼산 자 형태가 되는데 일자로 되어 있다.
바랜 옛 사진을 보면 일자 형태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뫼산 자 형태가 아니고 순수하게 ‘3’의 형상이 아니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지어진 건물이라고 지나치는 것들이 이렇게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 줄을 누가 알겠는가?

‘천생팔자가 누릉밥이라’ 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대단케 여기지 않는 누릉밥 정도라도 여행이 무엇인가? 하찮은 것에도 의미를 달고 찾아보는 것 그것이 진정 기쁨을 누리는 여행의 백미인 것이다.

‘찰찰(察察)이 불찰(不察)이니’ 무엇에 한번 맛을 붙이면 끈덕지게 떨어지기 싫어함으로 알기에 노력하고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그 보는 재미란 것이 야릇한 춘화도를 살짝 보는 것만큼이나 짜릿한 것을 어찌하랴!

여기에 있는 그 유명한 미륵삼존불도 가운데 부처님이 키가 더 크다. 이 역시 뫼산(山)이 아닌가?
그리고 이 요사채 건물도 뫼산(山)이니, 그렇다면 쌍권총을 가진 것이 아닌가?
완전히 대칭되는 두 가지 산이 있으니 산산(山山)!

세 분이 한자리에 모셔지면 뫼산(山)자가 된다는 이치를 깨달으라는 의미이며 산(山)이 온전히 형성되어야 비로소 출(出)자가 형성되고, 출(出)자가 형성되어야 미륵삼존불이 세상에 출(出)할 수가 있다는 것인데.

뫼산(山)자로 서서 계신 미륵삼존불 중  한분은 구천상제이고 한분은 옥황상제라고 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한분은 아직도 몰라 두 분만으로는 뫼산(山)자가 형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두 분으로는 뫼산(山)자를 온전히 형성되지 못하여 출(出)자가 형성될 수가 없고, 때문에 미륵삼존불이 세상에 출(出)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미륵삼존불이 출(出)하기 위해서는 인세에 오신 마지막 한 분의 정체를 더 밝혀 모셔야만 된다는 이치가 개태사의 이 미륵삼존불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한 분은 누구냐’ 하는 것! 그것을 찾는 여행,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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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개국사찰인 개태사 대웅전의 모습.  
 
자! 계룡산 줄기에 또 다른 역사가 보존되고 있으니 유동리를 지나 화악리 오골계팻말을 보고 지나가노라면 S-OIL주유소 전 버스승강장사이로 굴다리가 나있는데 여기를 돌아가면 개태사가 나온다.

굴다리 사이로 승용차를 힘겹게 빠져나오면 정말 형편없는 절이 나온다. 조그만 암자 같은 곳이니 개태사가 큰절인 것으로 알고 찾아간다면 정말 실망이 앞설 것이다.

고려를 창업한 ‘태조 왕건’,  TV드라마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온 그 왕건!  그분의 영정이 존재하고 있었던 그 절이니 그 규모가 대단했을 텐데......

고려사절요에는 ‘개태사를 지을 때 사치스러운 것이 극도에 이르고.....12개월 만에 개태사가 완성되니 낙성법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소(疏)를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태사를 지을 때는 10만여 평이나 되고, 8만9암자(八萬九庵子)를 소속시켰다고 하니 고려의 호국대찰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지만 눈앞에 모습은 그 것과 다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이제부터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나씩 쳐다보고, 아기자기함을 느껴보자.

이절에 우리의 전통신앙의 모든 것이 배어있고 잘 진열되고 있으니 이곳에서 우리 조상들이 말해주고자 하는 정신세계의 모든 것을 천천히 찾아보도록 하자.

여기서는 놓칠 것이 하나도 없다.

일주문에서 사찰정문에 이르는 너무도 짧은 길

일주문에서 사찰정문에 이르는 길 양편으로는 거대한 고목들, 향나무냄새를 맡으면서 심호흡을 해보자 상큼함이 베어 나올 것이다. 원래 향나무를 심는 것은 귀신을 물리친다는 ‘신목(神木)’의 성격을 띠는 나무인지라 보편적으로 묘지나 사당 주위에 많이 심어놓았다.

이러한 신목으로는 향나무 외에 회화나무, 엄나무, 화살나무를 많이 심기도 한다. 특히 회화나무는 학자집안에 많이 심고 부귀를 불러온다고 하여 많이 권장되어 심는 것 같다.
대전 현충원에도 이러한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계룡시에도 금암동에는 회화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공해에도 튼튼하고 보기도 좋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입암 공단 조성작업으로 200년 이상 된  ‘엄나무’가 잘려나갔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엄나무는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기 때문에 200년 이상 된 엄나무는 보기도 힘들고 그 정도로 자라기도 힘들다.

계룡시에서는 택지개발이나 주택개발 등으로 잘려나가는 고목들을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이곳이 신령 깊은 땅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인식한다면, 그 것이 상록도시 이미지에도 부합하지 않을까.

그나마 인근 대전시처럼 기존에 잘 자라는 나무도 베어내고 새로 나무를 3천만그루를 심는다고 아우성치지는 않아서 좋지만 그렇다고 잘려나가는 고목나무들을 도외시 한다면 결국은 우리가 그 해로움을 당할 것 아닌가.

방금까지 달려온 도로의 삭막함이 일순간 사라진다면, 이제 역사의 길이 시작되는 문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풀어보자.

이야기를 다시 천호산으로 돌려보자.

우리가 쓰는 연호(年號), 단기(檀紀)는 하나의 시발점을 의미하듯이 불가에서는 불기(佛紀)를 쓰고 있다.
그런데 개태사 초입의 일주문상량에는 불기 3007년으로 씌어있고 정문상량에는 불기 2542년으로 다르게 적혀있다.

왜 다를까?

한 건물에 나이가 465년씩이나 차이가 나는 다른 두 가지 표시를 해놓고 있으니 이 건물의 나이가 불량한 것인지 제멋대로 적어놓은 것인지 그렇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이 절에 배치되고 있는 모든 것은 상당히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아무렇게 배치되거나 허접스럽게 가져다 놓은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하나하나에 주의를 더욱 기울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도래한 고구려 시대로부터 1962년까지 약 1300년 동안은 석가부처의 탄생을 1027BCE로 하는 북방불기를 사용해오다, 1956년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 불교도대회에서 불법의 기원에 대해 당해 연도인 1956년을 2500년으로 공통적으로 적용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태국과 미얀마 등의 남방불교에서 쓰던 불기가 채용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본래 쓰던 불기 3000년과 약 500여년의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태사는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으로 인해 북방불기를 고수하고 있다고 보여 지는데 북방불기(불탄 3007년=서기 1980년, 일주문상량)와 불멸을 기원으로 하는 남방불기(불기 2542년=서기 1998년, 정문상량)을 함께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불기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는 것 같으나 너무 많은 지식은 여행의 가치를 고식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자. 

향나무 길을 걸어 일주문에서 절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은 짧다.
‘풀끝의 이슬’같이 그것이 인생인 것을, 너무 짧아 허무감을 느끼기 전에, 자 고개를 들어  개태사 정문 현판을 보자!

‘대천호산 삼천일지 개태사(大天護山 三天一地 開泰寺)’ 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개태사의 전체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개태사가 있는 이 뒤 산이 바로 천호산(天護山)이다. 천호산의 예전 지명이 황산(黃山)이다.
태조 왕건이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여겨 황산(黃山)이라 부르던 승전지의 배산(黃嶺의 북부)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연산 뜰에서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던 태조 왕건이 위기에 몰리자 갑자기 천호산에서 신장을 들고 말을 탄 병사들이 나타나 백제군을 무찌르게 되었다고 하여 산의 신에 대한 가호에 감사를 드린다고 황산을 천호산이라 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남해 금산의 지명을 바꾸어 준 것과 같이 높으신 분이 뜻이니 천호산도 그렇게 지어지고 불리우 게 된다.

그렇다 이 근처, 연산 앞뜰이 황산벌이다.
이 지역은 예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서, 계룡산의 관문으로 여기를 지키다 순국한 수많은 원혼들이 있는 곳이었다.

유명한 계백의 황산벌이 바로 이 언저리인데, 양정 고개에서 연산면으로 들어가는 들판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는 계백장군이 신라군의 젊은 화랑 관창의 목을 벤 곳으로 유명한 관동리가 있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른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곳이 이곳 황산벌 싸움에서였으니, 이곳이 바로 계백 장군의 결사대가 순국한 곳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의 아들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명실상부하게 통일 대업을 달성한 곳도 바로 여기이다.

수많은 왜인들이 유독 이곳에 많이 침략을 해온 것도 고려의 3대 사찰로서 이 곳 일대에 수많은 전투가 치러졌으니, 그리고 동학혁명의 깃발에 다시 집결하게 된 곳도 이곳 계룡산이니 이곳에 왜 그리 선조들은 애착을 가지고 지키려 했을까?

천호산은 연산이다(連山).

연산이란 연이어진 산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병풍첩이 붙어서 펼쳐진 것같이 여자한복의 주름이 첩첩이 늘어진 것과 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산은 기운이 좋다고 하는데 익산에 용안에 있는 뒷산이 그렇고 대전에 있는 구봉산이 연산의 형태인바, 이러한 산들의 주위에는 정말 기운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연산의 형태이지만 느슨하게 연이어 있는 대전의 월평산성이 있는 월평산도 갑천을 따라 용 같이 길게 늘어져 있는데 여기를 뚫어 길을 낸다고  많은 마찰이 생기고 있다.  이런 산은 등산을 많이 하면 원광대 조용헌 교수의 표현대로 ‘마운틴오르가즘’을 많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연산이 늘어진 산인 늘뫼-놀뫼-논산이 되었다고 하는데 여하간 보기 좋은 산이다.

요새는 산중턱까지 전원주택을 진다고 산을 마구 헤쳐 놓았으니 볼썽사납다.  
이제 다시 개태사현판으로 돌아가서 삼천일지(三天一地)라고 쓰여 있는데, 하늘은 3이요 땅은 1이라, 즉 세 분 하느님을 한 분이 땅에서 받든다는 뜻이다.

삼천은 세 분 하느님으로서 여기 개태사에서는 미륵삼존불을 의미하고, 일지는 땅에 계신 한 분이 세 분의 하느님을 받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한 분이 바로 개태사의 삼존불이 모셔진 전각 왼편에 위치한 팔각정에 모셔져 있는 ‘나반존자’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태조 왕건이 나라를 창립할 당시는 삼신사상이 강했고 단군에 대한 믿음도 강한 시기이고 지금도 우리나라의 단군영정의 표본이 있는 장소인지라  삼천세계는 환웅, 환인, 단군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결국  천부경의 삼태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현판이 만들어진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을 보면  국초 이래로  ‘연산현(連山縣) 계룡산 개태사 터는 곧 후대에 정씨가 도읍할 곳이다.’라는 참설에 영향을 받아 삼천세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장소임을 알리는 표현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들의 신화에 담겨진 ‘3’의 의미를 지나치게 간과해왔다.
우리 민족의 탄생신화에조차 녹아 있는 3은 가장 환상적인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삼족오, 풍물 굿의 삼채장단인 삼박자, 삼성혈, 삼재수, 삼정승과 민족 신화에 3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음은 우리 민족의 형성기부터 3이 매우 중요했음을 암시한다. 하기야 기독교에서도 삼위일체가 있고, 유교에서도 삼강오륜이 있으니 3이라는 숫자의 묘미는 어디까지 일까? 삼천세계는 결국 3을 중시하는  삼신사상의 영향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3을 중시하는 우리 풍속에 삼신할멈이 있다.
제주도의 명진국 생불 할망 본풀이에서는 삼신할멈의 탄생과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삼신할멈의 나이가 일곱 살 되던 해 정월 초하루 인시에, 옥황상제님이 불러서 "너는 인간세계에 가서 아기를 낳게 하는 삼신할멈이 되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삼신할멈은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고 내려오다가, 아기를 낳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 아기를 낳게 해주었다. 삼신할멈은 은가위로 그 아이의 탯줄을 끊고 석자 실로 잡아맨 다음, 더운 물로 목욕시키고 유모를 불러 젖을 먹이는 한편, 미역국을 끓여 산모에게 먹였다.
그리고 사흘 후에 산모에게 쑥물로 목욕케 하고 태를 사르고 아기에게는 배내옷을 입혔다.
민간에서 삼신을 모시는 과정도 위와 같다.
      (주강현저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중에서)

개태사의 대표적인 삼불부처도 삼신신앙의 확대 과정에서 등장한 부처가 아닌가 싶다.
삼불제석도 아기를 점지해주고 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
그래서 개태사가 미륵도장으로 유명했던 것 같다.
 
삼불의 ‘불’을 원래는 근본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인 ‘부리’에서 나온 말이 후대에 불교와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개태사에는 이렇게 ‘3’ 자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개태사 현판의 ‘삼천일지’, 요사채 3동건물, 팔각정에 모셔진 3분, 창운각에 모셔진 3분과 용화궁에 모셔진 석불입상 3분이 모두 3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빼먹지 말고 알아야할 3이 있으니 창운각안에 모셔진 단군 옆에 놓여 있는 천부경 안에 있다.
그것은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라는 표현 중 ‘석삼극’이라는 글인데, 어려운 글이다.

자, 이제 ‘개태사(開泰寺)’

태조가 친히 기원문(祈願文)을 지어주었는데, 절 이름을 개국에 이르게 된 것은 부처와 산신령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개태사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이 있었으며,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신탁(神託)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 온 절이다.

고려시대 왕실의 원찰이자 호국 사찰로는 개성의 봉은사, 봉업사, 논산의 개태사가 있어 고려의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고려의 존립 475년 동안 왕실에서 한해도 빠짐없이 선왕에 대한 예를 올렸다고 한다.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km에 달하는 토성이 있는데 승병이 주둔하였다고 전한다.
승병이라는 것은 고구려이전 시대부터 조의선인이라고 하여 왕의 친위부대의 명칭인 것이다.
절의 스님으로 구성된 병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절에는 유독 고려 말 이후부터 왜구의 침입이 많았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에는 한나라의 운세를 바꿀 수 있는 ‘해인(海印)’이 묻혀 있다고 한다.
이것만 있으면 천하도 두렵지 않는다고 한다.

이 땅에서 태생한 백제의 후손들이니 이를 모를 리 없을 것이고 이를 찾기 위하여 수많은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쳐들어 왔으니 바퀴벌레도 아니고 죽여도 나타나니 ‘개뿔도 없는 인간’들 같으니, 반성하는 뜻이 없는 민족이다.

옛날 삼신께 죄를 지은 황궁 씨는 자기 몸을 스스로 결박해 천제 단으로 나아가 하늘이 정죄해 줄 것을 자청했는데 이러한 속죄행위를 계불 의식이라 한다. 흔히 ‘개뿔도 없다’라는 말은 뿔 없는 짐승인 개(犬)의 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황궁 씨의 계불 의식에서 유래 된 말이다.

최영 장군은 1376년에는 연산의 개태사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하였다고도 하는데 최영장군까지 나선 것을 보면 결국은 이러한 대규모사찰도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대전을 향해 진군 중인 왜군에 의해 개태사가 불태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여립이 여기를 중심으로 한 모반이 있었다고 하여 조선왕조에서 의도적으로 더욱 폐사 화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신도 안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조선왕조는 이곳 계룡산일대를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 진다. 대한제국 말까지 이 신도 안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못했다.
 
누구든지 이곳에 들어와 득세하는 기미가 보이면 정감록을 꿈꾼다 하여 관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백성들이 들어와 살 수 없는 곳으로 대부분의 토지가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주변은 제약이 덜했지만 이곳에는 김장생, 송시열 등의 기호학파의 중심지로, 조선중기 이후 강경포구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파평 윤씨, 광산김씨 등의 쟁쟁한 문중들이 그 터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권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국초 이래로 “연산현(連山縣) 계룡산 개태사 터는 곧 후대에 정씨가 도읍할 곳이다.” “이 씨는 망하고 정 씨는 흥한다는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尊邑興)”이라는 참설에 과민 반응을 보여 왔던 조선왕조는 ‘정씨 외에’ 다른 성을 가진 집안이 계룡산일대를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하여 세도를 부렸어도 이를 용인해오는 정책을 써왔다.

‘삼발에 한번 똥 눈 개는 늘 눈 줄 안다’고 한번 죄를 진 사람은 언제나 의심받게 되니 그러다가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였으니 그 이름이 정여립(鄭汝立)이다.

조선왕조는 무엇이 두려워 정여립모반사건과 기축옥사를 만들어 정여립을 죽게 하고 진보적이고 유능한 인사들을 대부분 죽이거나 유배 보냈을까?

정여립모반사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 10월에 일어났고, 그때 죽거나 다친 자가 무려 1천여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나라의 인구가 500여만 명에 불과했다니 그래서 흔히 ‘기축옥사’를 ‘조선조의 광주사태’ 라고도 한다. 이 때에 호남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정여립을 두려워 한 것이 진정 무엇일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는 인민주권설, 능력에 따라 누구든 임금이 될 수 있다는 공화주의를 주창했으니 가히 혁명적인 사상 이론을 외쳤다. 어찌 보면 당시로서는 역성적인 사상가라고도 하겠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도 50여년 앞서 공화주의를 외쳤으니, 단재 신채호는 ‘그는 4백 년 전에 임금은 신하에 대하여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동양전래의 유교적학설인 군신강상설(君臣綱常說)을 타파하려고 했던 위대한 사상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주장과 움직임이 거대한 혁명으로 까지 가지 못해, 루소의 민약론에 영향 받아 거대한 파도처럼 장엄하게 전개된 프랑스혁명에 비할 수 없게 되었다고 단재 신채호선생은 말씀하시고 있는데 대단한 사상가였음은 틀림없다.

율곡 이이도 칭찬해 마지않을 정도로 당대의 천재로, 이이는 그의 학문과 인물됨을 사랑하여 기회 있을 때 마다 그를 요직에 천거하였고 당대의 최고의 엘리트들이 가는 홍문관의 수찬(정6품)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데 그는 이이가 죽자 집권파인 동인으로 변신하였고 이이를 비방하기에 이르게 되니 이에 선조가 “이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네가 지극히 따르더니 지금은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라고 질책하자 ”처음에는 신이 그들의 마음을 몰랐으나 이제야 깨달았으므로 절교하려는 것입니다”하면서 “신이 지금부터 다시는 천안(임금의 얼굴)을 뵐 수 없겠다”고 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선조를 쳐다보았다고 할 정도로 기개가 당당한 정여립이다.

더구나 양반과 상놈, 귀한 자와 천한 자를 구별하지 않아 그와 뜻을 같이 한 선비들은 물론 천민과 승려들이 많이 몰려들었으니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고,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고 외치면서, 전제군주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세상에 경천동지할 소리요. 당시의 유교의 가치관을 뿌리째 뒤엎을 만한 주장인지라 조선왕조에서는 섬뜩 함을 아니 느꼈겠는가.

더욱 왜란에 대비한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영향을 받아 대동계라는 무장단체를 만들고 정여립의 사상에 영향 받아 일부에서는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는 인계, 양반살육계(兩班殺戮契-다무력폭동단체)등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었으니 정권차원에서 불안을 아니 느낄 수가 있겠는가?

정여립이 일찍이 중 의연의 무리와 국내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폐사(廢寺)가 되어 있던 개태사의 벽에,

‘손이 되어 남쪽 지방 노닌 지 오래인데
 계룡산이 눈에 더욱 환 하여라
 무자 · 기축 년에 형통한 운수 열리거니
 태평 성세 이루는 것 무엇이 어려우랴’

라고 시를 썼는데, 그 시가 많이 전파하게 된다.

혁명의 시발점이 되는 표현이다.
이러한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을 조선왕조에서 가만히 놔두겠는가?

‘끽’이다

그곳도 계룡산아래 개태사에 알쏭달쏭한 시를 쓰고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그를 계룡산 정도령으로 보아 그 싹을 자르기 위하여 ‘애매한 두꺼비 떡돌에 치였다’고 무참한 살육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그의 집터며 선산, 그리고 사당 등은 모반 당시 숯불로 혈맥이 끊기고 파헤쳐졌으며 그와 인연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쑥대밭이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가 뜻을 못 펴보고 사라졌으니 안타깝다.
결국 개태사는 또 한 번의 사상가로 인하여 존립자체가 위협받게 되고 소멸될 위기에 이르게 된다.

개태사는 이래서 우리에게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된다.

절 안으로 발을 들여놓아보자.

여기에서 관람순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다오는 반시계방향으로 보는 것이 더 멋있고 이해하기가 좋다. 반시계방향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옛날로 가는 타임머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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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논산간 국도상에서 바라본 우렁산의 모습. 일제가 철길을 만들기 위해 산을 파헤쳐 반쪽만 남은 형상을 하고 있다.  
 
지금 서울에 청계천을 가지고 명당수라고 하고 있고 최근에 여기를 새로 정비를 해놓고 있는데 물을 다시 끌어 올려 흘러내리게 하였는데, 깨끗해서 보기는 좋았다.
그렇지만 지나친 인위성이 너무 많고, 물이 위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게 아니고 역류하고 있으니......

정도전과 하륜 등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도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고 하면서 천도를 결사반대 했다.

정도전과 하륜은 당대의 풍수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신도 안 천도를 반대하지 않았으니 기존의 권문세가들이 속으로는 끓었겠지만 표면으로는 반대를 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륜, 그는 최영의 요동공격을 반대하다가 양주로 귀양 갔다 가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했다. 그는 이색·정몽주·이숭인·권근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쉬파리도 천리마 꼬리에 붙어야 된다’고, 정치적 변신을 하여 조선건국에 참여하게 된다.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공을 세우고 우정승으로 오르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개경의 기존의 권문세가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며 개경에서 떨어진 신도 안 천도를 반대하면서 한양천도를 주장하는 선봉에 서게 된다.

이러한 하륜의 맹렬한 반대로 조정대신들은 공방 끝에 하륜의 주장을 채택해 계룡산천도는 백지화 되고 말게 된다.

신도 안이 개경과 멀리 떨어져 많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오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이로 인해 남부지방 사람들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하니 그놈의 기득권이 무엇인지?

하륜은 신도 안 두계천을 “계룡산의 산은 건방(乾方‘서북쪽)으로부터 오고 흘러나가는 물이 손방(巽方 동남쪽)으로 흘러가니 땅의 기운을 약화시켜 나라가 곧 쇠망할 곳이라고 험하게 표현을 하고 있는데 두계천이 그렇게 볼품없는 개천인가?

당시 권문세가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개경에서 이곳까지 오기 힘들면 오기 힘들다고 하면 될 것을 권문세가의 눈총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억지소리를 하고 있으니 너무 한 것 같다.

'계룡산의 산맥이 건방에서 온다는 주장은 상대적이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계룡산의 맥은 오히려 덕유산에 이어져 있다고 본다. 즉 1:25만 지형도에서 확인하면 산맥이 남쪽으로는 연속되나 서북쪽은 연속되지 않을뿐더러 금강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고 있다.' (지리학 제29호 주경식 ‘계룡산 신도안의 지리적 현황’)

그나저나 하륜을 중심으로 한 권문세가들의 견강부회가 이 정도였고 이런 사람들이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으니 조선 내내 나라가 시끄러웠음은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청계천이 그렇게 좋은 하천인가를 살펴보자.

청계천은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로 북악산·인왕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箭串橋] 근처에서 중랑천(中浪川)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청계천이란 이름은 일제 초기에 서울의 지명을 개칭할 때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말기까지 개천으로만 불렸다.

한경지락의[산천 개천조]에도 서울 안팎의 산천들과 개천을 동열에 다루면서 개성의 천류도 개천이라 했으며 '송경지천수(松京之川水) 역명개천(亦名開川) 사시이기명이(似是移其名耳)'라는 주석을 달고 있는데, 즉, 서울의 개천이라는 이름은 개성에서 옮겨온 것 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니 당시 권문세가들이 개경을 얻지 잊으리오.
못 잊으니까 지명까지도 옮겨 온 것이다.
당시 태조가 이를 얼마나 못 마땅이 여겼을까?
그래서 무참한 살육이 자행된 것이 아닌가?

도성 내에 있었던 청계천은 수시로 하천이 범람하여 주민 생활에 위해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조선 초기 명당수로서 그 용도를 둘러싼 논쟁을 거치다 세종대에 개천의 용도는 하수도로 낙착되었다.

결국은 영조는 1760년 2월  20만 인원을 동원한 57일간의 대역사의 준설사업을 벌리기 까지 한다.

더구나 청계천의 끝 부분 수구인 현재 광희문-동대문운동장-관묘 일대는 벌어 질대로 벌어져 있다.
그래서 가산(假山)도 만들고 관묘도 만들었다니 ‘다 가서 문지방을 못 넘어 간다’.고 힘들여서 일은 하였으나 완전히 끝을 맺지 못하고 헛수고만 꼴이 아닌가?

이런 강이 풍수상 올바른 것인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권문세가들의 억지에 조선시대 내내 나라가 정쟁이다, 왜란이다 해서 혼란스럽고 현재를 사는 우리 후손까지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도 이러한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덮었다가 다시 걷어내고 새로운 개천을 만들었다고 하고 있으니 결국 애물단지로 전락한 강이 아닌가? 박정희대통령 때는 청계천을 덮은 것은 뜻이 있어 그랬다고도 하는데... 지금도 물이 순리대로 흐르는가? 지금처럼 한강 물을 억지로 역류시켜 수원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 청계천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역수(逆水)하는 물 기운이므로 한 나라 도읍지의 명당 수(明堂水)가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보통 물은 우리나라 지형 상 동쪽이 높아 대부분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동류서출(東流西出)이 일반적이나 이와 반대로 명당 수는 서쪽에서 동류는 흐르는 곳을 많이 지목해서 명당수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면 청계천만 명당수인가?

이중환은‘ 계룡산은 오관산보다 웅장하지 못하고 삼각산보다 수려하지는 못하나 내맥(來脈)이 멀고 골이 깊어 정기(精氣)를 함축하였다. 그 서쪽에 있는 용연(龍淵)은 매우 깊고 크며 그 물이 넘쳐서 시내가 되는데 이것은 개성과 한양에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신도 안에도 숫용추와 암용추에서 흐르는 두계천을 본류로 하여, 용동천과 서쪽의 석계천 물이 계룡대 1정문으로 가는 계룡사거리의 신도안교 밑에서 합쳐져서(合江) 남선리 군인아파트 앞을 지나 남쪽으로 흐른다.
신도 안 입구인 양정 고개 부근에서 남동쪽으로 나선형으로 방향을 바꾸어 두계리와 대전시 유성구 송정동 방동사이를 흐른다.

두계천도 길이나 폭 그리고 주변면적이 청계천과 서울의 4대문 안에 못 지 않다. 사방 6-7킬로미터가 된다.
신도 안은 남쪽의 입구에서 보아도 구릉 군으로 시계가 차단되어 하나의 산골짜기로만 보여 져 피난처로도 좋은 곳이며, 군사상 많은 이점이 있는 곳이다.
 
이강도 물이 비교적 풍부하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명당수인 것이다.
두계천과 여기에 이르는 금강은 백제의 수도인 공주와 부여를 키우고 고려왕건의 기반지로 그리고 대전이라는 커다란 신흥도시를 일구어 내지 않았는가? 결국은 인식의 차이일 뿐이다.

   
 
  ▲ 두계천이 돌아나오는 마을을 지나 다시 국도로 나오는 길에서 바라본 우렁산  
 

   
 
  ▲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 본 우렁산의 모습  
 

두계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 위왕산의 꼬리이며 수구막이 해당되는 대전시의 ‘무도리’를 지나게 된다. 무도리는 물돌이가 변해서 나온 지명 같은데 바로 두계천의 수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위왕산은 신도안의 수구막이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산으로 신도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임금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위왕산(衛王山) 혹은 위왕산(爲王山)으로 부른다고 한다.

신도 안 부근의 모든 산들이 신도 안을 향해 굽히고 있는 모습인데 비해 이 산만은 신도 안을 등지고 있는데 그것은 수구막이를 호위하는 대장이 말을 탄 자세로 외곽을 경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그런 이치로 하여 이 산이 있음으로서 신도 안은 도읍터의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라 한다.

일본은 역시 예외 없이 이곳의 능선을 깎아내고 철도를 관통시켜 수구를 없애버렸다.
지금도 여기를 가보면 멋있는 능선을 저렇게 양쪽으로 깎아내 보기가 흉하다.
이 산은 한문표기로 위왕산이지만 우렁산으로 불린다.

   
 
  ▲ 일본은 우렁산의 능선을 깎아내고 철도를 관통시켜 수구를 없애버렸다.  
 

   
 
  ▲ 일본은 우렁산의 능선을 깎아내고 철도를 관통시켜 수구를 없애버렸다. 이로인해 우렁산은 보기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본이 이곳에 철길을 내면서 발파작업을 하여 산허리가 잘려나가면서 ‘우렁우렁’ 울었다고 해서 우렁산이라고 불리는데 호남고속도로도 이 옆으로 달려가니 또다시 ‘우렁우렁’ 울어서 이 다리도 우렁 다리라고 한다. 지금은 논산 간 국도도 옆으로 나있으니 얼마나 더 ‘우렁우렁’ 울어야 할까?
신도안천의 수구막이를 하기에는 벅찬 것일까?

우렁산 밑에 S자형의 멋진 노루벌인, 무도리를 지난 물은 흑석리를 지나 갑천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달고는 대전 시내를 관통해서 지나가다 금강을 만나 개명을 하고는 멀고 먼 여행을 시작한다.

알고 보면 한강보다 더 긴 강이요 바로 인구에 회자되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천하명당 터가 형성되는 장소를 만드는 강이다.

그러면 이 두계천의 명당자리는 어디일까?

   
 
  ▲ 두계천의 명당자리로 알려진 유성구 방동마을의 모습  
 
두계리에 있는 계룡역사 건너편 유성구 방동의 땅인 것 같다.
계룡시 입장에서는 좀 아쉽지만 최대의 명당 터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런지 여기에는 묘지가 상당히 많다. 지금은 개발제한구역이라 잘된 듯싶다.

이러한 좋은 땅도 세 동 마을 안으로 새로운 국도가 뚫리면서 계룡산의 한축을 무참히 뚫어 버렸는데 차도 별반  통행하지 않는 길을 굳이 길이 나야할 필요성도 없는 지역에 무엇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서 공사를 강행한 것인지... 다행히 큰길은 세 동 마을의 골짜기로 비켜나기는 해서 다행이다.
이렇게 남아도는 공사비를 좀 제대로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언젠가는 성북동을 가로 질러 대전서남부와 연결되는 도로가 뚫리면, 대전시방면으로 그나마 남아 흐르는 기운마저 차단될 것 같은데 편리하다고 그렇게 기뻐할만한 일도 아닐 듯싶다. 

우리나라 기운은 산천을 통해서 흐른다.
이제는 무조건 절단 내고 파헤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 땅은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신의 자식과 후손을 위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들이 살아갈 자연환경도 우리가 보존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후손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영성이 담긴 심미안에 의해 국토개발을 할 수 있는 공간은 남겨놓아야 하지 않을까?

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모든 개발을 해야만 하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욕심 사납다.

다행이 개경의 세도가의 욕심으로 수도가 한양으로 정해져 신도 안은 잘 지켜지게 되었으니 이것만은 후손들에게 자신 있게 남겨놓는 최후의 명당 터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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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종불박(佛宗佛朴)'이라는 글이 적힌 주춧돌. 궁궐터 안내간판에서 제일 멀리 놓여있는 두 번째 철책안의 철책 끝에 있는 주춧돌에 이와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 왕궁사적지 터에서 이제 또 하나의 흥미거리를 찾아보자.

계룡산에는 옛 부터 도참신앙에 입각해 세 군데의 신비한 글자가 새겨져 전해오고 있다고 하는데, 신도안의 옛 궁궐터, 계룡산 오송대 계곡 너럭바위 글자, 연천봉 정상 바위에 있는 글자 등 모두 세 군데의 글자가 있다.

그중에 하나인 이곳 궁궐터에 있는 주춧돌에 ‘불종불박(佛宗佛朴)’이라는 신비한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으니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찾기가 쉽지 않지만 이곳 궁궐터 안내간판에서 제일 멀리 놓여있는 두 번째 철책안의 철책 끝에 있는 주춧돌에 새겨져 있었다.

같이 간 박희덕이 찾았으니 공교롭게도 찾은 사람도 박 씨가 아닌가?
이분은 저번에 암용추 속을 들락거리다 벌을 받아 암용추 계곡으로 떨어졌는데, 멀쩡하게 살아난 사람이다.
산을 타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산박도사’라고 지칭할 만하다.

   
 
  ▲ '종불박(佛宗佛朴)'. 여기에서는 '박(朴)'은 무학대사를 지칭하는 '朴'이라는 설과 원불교 창시자인 박중빈의 '朴',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朴'이라는 세가지 설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여기에서 ‘불박(佛朴)’이라는 글에는 세분의 박 씨와 관련지어 설명되고 있다.

무학 대사가 그 첫 번째 이니 무학 대사의 성은 박이요 본명은 자초(自招)이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신도 안에 도읍을 정하려고 갖다 놓은 돌인데, 무학 대사의 필적으로 불종불박(佛宗佛朴)을 새긴 것이라 한다. 그래서 무학 대사의 글로 여겨져 오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이다
원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소태산이 제자들과 이곳을 찾았다가 이글이 쓰인 주춧돌을 발견하자 사람들은 그 글귀를 보고 ‘장차 불법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는데, 그 때 주세불(主世佛)은 박 씨라는 것이고,  신도 안은 정치적 의미의 새 도읍이 아니라, 새 불국토의 중심이 될 곳이며, 소태산의 속명(俗名)이 박중빈이고 이 뜻은 장래에 불법이 주교가 되고 그 때의 부처님은 박  씨임을 예시한 것’이란 이유로 원불교에선 계룡산 신도 안을 특별하게 여긴다고 한다.
 
세 번째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우선 차길진 선생이  주간조선에 연재되었던 글을 살펴보자.

“1974년경부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제2국립묘지(대전 현충원) 건립 지와 함께 은밀히 새로운 수도 이전 지를 물색 중에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곳이 일찍이 명당으로 꼽혀왔던 신도 안을 중심으로 한 계룡산일대였다. 그 무렵 나는 초능력자로 알려지면서 여러 사람들이 조언을 청해왔다. 옛 사람이 쓴 글자를 감정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 소문이 최고권부에까지 알려져 신도 안을 포함한 계룡산 일대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서각자(書刻字)와 그곳이 과연 명당인지를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다.

그곳 수양원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글자의 소재지를 수소문했다.
 
이튿날 드디어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스승으로 알려진 무학 대사가 썼다는 ‘불종불박’ 네 글자가 새겨진 주춧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 초 신도 안을 천도지로 정하고 10개월 동안 궁궐터를 닦는 과정에서 누군가 새겨놓은 글자로 여겨졌다.

한편으로는 누군가 혹세무민하기 위해 일부러 새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글씨의 내용은 해석하기 애매했다.

불교와 박(朴)씨 성(姓)에 대한 찬양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나 아전인수 격이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신도 안은 일찍이 천도지로 꼽혀온 천하명당으로 소문난 곳으로 이 터를 차지하고 싶은 이들의 심정과 연결해보면 그 글자의 뜻이 묘해진다.

공교롭게도 박 씨 성과 관련해 신도 안을 처음 천도지로 택하고자했던 주역 중 한 사람이 무학 대사였고 그의 속성(俗姓)이 박 씨였다는 것.
또 이곳에 종단건물을 지은 신흥종교의 교주도 박 씨였으며,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 역시 같은 성씨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문구에 대한 해석이 더욱 괴이쩍었다.

오성계곡 너럭바위에 새겨져있다는 ‘黃牛萬國活南朝鮮 文明開花三千里 領導 朴瞻濟’ ‘黃牛如正熙將守 道術運通九萬里’라는 글자는 동학사에서 갑사로 가는 산길을 따라 약 400미터를 올라 나무다리를 건너 돌층계를 지나는 등 험하기 이를 데 없는 그곳 너럭바위 여기저기에 잡다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참을 살펴보고서야 그중 박첨제라는 사람이 썼다는 서른네 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며 언제 썼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판독해보니 당시 집권여당의 상징인 황소와 같이 박정희의 운수가 오래가리라는 것과 영도자 박 씨가 뜻을 이룰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눈에도 오래된 글자는 아니었다. 조잡하게 쓴 글자인데다 내용도 다분히 의도적인 글귀였다.“    (2005년11월5일자 주간조선)

당시의 신도안의 종교세계를 일거에 제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수도 천도를 위한 정비작업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가끔 생각해보면 박정희대통령도 우리 민족의 웅비를 위해 커다란 관심과 이를 실천하기위한 야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에서 이러하듯이 우리민족의 전통에 상당히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박대통령 주변에 박해월이라는 분과 탄허 스님이 자주 어른거렸다.

박해월이라는 분은 미아리 고개 밑에서 살면서 60, 70년대를 풍미한 술사라고 하는데, 같은 북한 출신인 김일성, 박태선, 문선명과 함께  한 스승으로부터 정감록 등 공부를 했고 그 이후 이들의 출세 과정도 비슷했다고 한다.

박해월을 제외한 세 사람은 각자 정감록에서 예언한 정도령이 자신이라면서 자신만이 전지전능으로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 아닌가?

김일성은 아버지인 김형직이 기독교장로가 되고, 무당 출신인 어머니 강반석이 권사가 되어 기독교를 부흥시키지만, 그 당시 샤머니즘에 가까운 기독교의 복음주의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계급해방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자 천국 건설이 오로지 '정감록'에 나타나 있는 '정도령 출현'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보고, 다른 형태의 복음과 구원의 결합 형태인 '주체사상'을 내놓게 된다.

박태선은 가난한 생활 속에서 성장하면서 기독교인들의 따뜻한 배려와 사랑에 힘입어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전도사로써 예수의 가르침을 펴는데 열정을 다 바치다 어느 날 ‘신’의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조물주임을 증명하는 언행을 일삼으며 그 유명한 신앙촌을 건설하고 안수기도로 천부교(신앙촌)를 세워 막강한 부를 모았다고 한다.

문선명은 자신과 함께 ‘도’를 닦았던 김일성이 북한을 통치하게 되고, 박해월은 박정희를 도와 일을 하고, 거기에 박태선 마저 눈부신 업적을 이루어 국내 기반을 잡지 못하자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기회에 일본에 터를 잡아 해외로 눈을 돌리면서 일본, 미국, 유럽 등지로 진출하여 처음에 예수를 믿고 가르침을 펴다가 자기세력이 강해지자 스스로 통일교를 만들게 된다.

박해월은 자신을 포기하고 박정희를 정도령으로 받들어 5,16쿠데타의 날짜까지 잡아주고 5.16이후 박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김중태저 원효결서 중에서)

그래서 그런지 계룡산에는 박대통령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으니 박대통령이 그린 천도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참 좋을 연만은 흥미로운 이야기이지만 계룡산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운영은 지금도 진행형이니 못할 것이 무엇인가?   

최근에 가보니 불종불박 바위의 새겨진 글씨가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고 세월 속에 묻혀 버리기 전에 유적에 대한 세심한 손길과 관심이 배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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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암 마을!

가야곡에서 운주로 넘어가는 국도 길옆에 있었으니, 여기를 찾아가기 전에 들러보아야 할 곳이 많으니 하루 일정을 잡고 좋은 여행코스를 소개하니 참고를 하시라.

계룡시에서 출발하여 유동리를 지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화악리 이래진 오골계 마을’이라는 신호간판이 나오면 철길을 건너 여기를 둘러보자.

 
 
 
  ▲ 화악리 오골계.  
 
연산 오골계 마을은 태조의 아들인 익안대군 14대손인 이형흠이 처음으로 오골계를 사육하다가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것을 그 후손인 이래진이 계승 사육하였다고 한다.

화산 전주이씨 지천석비가 마을입구에 씨족마을 이라는 느낌과 전설을 간직함을 보여 주는 것 같은데 몇 그루의 느티나무고목과 돌무덤이 있어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여기 느티나무 고목은 천호리 고목과 아울러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개태사를 창건하고 국찰로 명하였다.
왕건은 개태사를 짓는데 공이 큰 두 사람을 불러 느티나무 한그루씩을 상으로 내렸다.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집 근처에 심고 정성을 다하여 가꾸면서 서로 의형제를 맺고 도우며 살아갔다.
그 후 형은 옥동자를 낳아 훌륭하게 키웠다. 동생 역시 왕이 내려준 나무를 정성껏 가꾸어 무성하게 자랐다.

어느 날 왜적들이 마을에 침입하여 느티나무 그늘 밑에서 고기를 굽고 술상을 차려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그 나무를 심은 동생은 참다못해, ‘ 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려 주소서’하고 빌었다.
그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한바탕 폭풍우가 휩쓸더니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그 나무를 향해 벼락이 내려쳤다. 왜적들은 벼락에 맞아 죽고, 그 이후 이 마을에는 더 이상의 화는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는 벼락을 맞아 화상을 입어 속 부분이 불에 탄 채 텅 비어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오석으로 커다란 오골계조각돌을 세워놓았는데 재미있는 발상인 것 같다.
이곳의 오골계는 천연기념물 265호로 지정되었고 당나라를 통해 들여온 것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잘 자라지 않고 이곳에서만 사육되었다고 한다. 다른 지역은 전부 여기서 분양된 것이라 한다.

최근에 익산부근에 닭 캐슬 병이 유행했을 때 이곳의 오골계를 다른 지역으로 공수 받는 귀한 대접을 받을 정도였으니 부럽다.

조선연산군 때에는 일반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정승까지도 오골계를 먹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벼슬을 빼앗기고 심지어는 귀향까지 보냈다고 할 정도로 귀하게 보호되었다고 하니 예나 저나 귀한 대접을 받는 꼬끼오(高貴吾)오골계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전비방(家傳秘方) 책에는 이 오골계가 중풍, 고혈압에 너무나 신기하게 잘 듣는다고 적혀 있다.  그 방법을 소개하면, 탕을 끓일 때는 털과 내장을 버리고 해바라기 꽃 둥근  것 전체를 두세 개를 따서 오골계와 같이 푹 고아 국물과 살코기를 먹는데 사람이 따라 다르겠지만 다섯 마리 정도면 90퍼센트 완치를 볼 수 있다고 하니 권하고 싶다.

또 다른 방법은 오골계 한 마리에 검은콩 한홉을 넣어 달여서 마시되 세 번만 먹으면 효력을 본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 화악리 이래진 오골계 집은 정성을 다해주는데 양과 주머니 사정을 비교하면  가격이 좀 비싼 것이 흠이다.

여기를 보고 다시 돌아 나오면 철길 건너 쪽 앞 언덕위에 모 방송국의 ‘칭찬   합시다’에 나오시기도 했다는 신복균 씨가 운영하는 허름한 묵밥집이 있다. 시각장애인으로 장애인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분인데 많은 분들이 찾는 곳이다.

 
 
 
  ▲ 고려의 개국사찰인 개태사 대웅전의 모습.  
 
다시 하행 길로 가면 개태사역에 이르게 되는데 역 옆에 주유소 가기 전 버스주차장 옆으로 개태사로 진입하는 좁은 통로 길이 나있으니 조심해서 통과하면 종교박물관, 왕건의 고려왕조 개태사가 나타난다.
무조건 둘러보아야 할 곳이다.

다시 오던 길로 내려오면서 좌측 산을 보면 이것이 천호산이고 용마루같이 늘어진 병풍처럼 주름이 겹겹이 생겼다. 36개의 봉우리가 정말 멋있다.
그래서 늘어진 산이라는 의미로  '늘이기재' 또는 '누르기재' 라고도 부른다.
한문으로는 연산(連山)이 우리말로 놀뫼가 한자로 음역되면서 논산이 되었다고 한다.

연산검문소를 지나면서 공단좌측으로 벌곡으로 가는 연산 구길 로 접어들어 내려가다 보면 송불암이 있는데 여기에 서 있는 부처님이 계신다. 옆에 소나무가 멋있다.

그 아래에는 예전에 금들농원이었는 데 지금은 ‘산애들애’라는 참나무 장작  바비큐 집이 있는데 정원을 잘 가꾸어 놓았다. 여기서 연산사거리 가지 전 앞에 있는 주유소 좌측으로 돌아서 산 쪽으로 한참을 가면 ‘콩콩이와 청청이’이라는 상호로 두부와 김치찌개를 하는데 맛이 끝내준다. 한번 가보기를 권한다.

여기는 유명한 ‘산꾸지뽕’물을 주는데 여성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물이니 후회는 없을 것이다.
먹는 이야기는 여기쯤하고 연산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서 한민대학교를 지나가다 보면 여기도 맛있는 집이 있는데 송어무침집이 있다.

시간나면 들리고 아니면 그냥 직진하여 호남고속도로 위를 지나게 된다.

이 호남고속도로를 경계로 예전에 신라와 백제군이 대치를 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보아온 곳이 황산일대로 황산벌전투가 있었던 장소임을 알고, 고속도로 경계를 지나 200m쯤 가면 당골 마을에 김일부 선생의 묘역이 있으니 한번 가서 참배하고 계속 달려가 보자.

양촌시내에서 직진하면 유명한 바랑산, 대둔산과 그 일당들이 기다리지만 다음 기회로 하고 가야곡 쪽으로 진입하여 (물어서 가야 할 것이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좌측 산 옆에는 한국신약이 보이면서 ‘쌍계사’가 나온다. 여기는 가족들이 필히 도시락을 싸가지고 찾아보기를 권한다.

 
 
 
  ▲ 쌍계사 대웅전과 내부모습.  
 
쌍계사 뒷산이 불명산이고 이 주변은 아직도 옛날의 절이 많아 문화재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불명산 뒤쪽 완주에 화암사가 있다. 화암사 극락전은 그 내부도 멋있지만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하앙식(下昻式) 구조이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세까지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라고 하여 한국의 건축양식을 깔보던 일본이 이 하앙식 구조 건물이 발견되자 코가 석자나 빠졌다고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절이다.

자! 쌍계사 이절은 대웅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 품삮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절이다.

본인이 작성하여 법원문집에 실린 글을 옮겨 보겠다.

“ 예전에 포장이 안 되어 다니기도 어려웠으나 지금은  포장이 잘되어 있다.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전각이 손실되어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들기는 하나 구례의 쌍계사에 견주어 절 자체로는 논산의 쌍계사가 더 멋있다. 특히 조각에 의한 장식 미는 그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 보물 제40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이 법당  안을 감돌고 있다.

이제부터 대웅전 그 자체가 지니는 조각의 극치를 만나보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도깨비를 찾아보자.

전면 5칸에 모두 열 짝이 달린 문에는 국화, 작약, 모란, 태극, 무궁화, 연꽃 등 6종의 꽃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채색되어 있는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신기한 것은 법당 안에 들어가서 문을 보면 조각된 그림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문살만 보인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박람회를 핑계로 문짝을 떼어서 서울에 가져가서 구경까지 시켰다고 한다.

법당을 들어서면 법당입구위에 ‘게’그림이 그려져 있다.
웬 절에 게 그림이 그려져 있을까 의아심이 들겠지만 이것이 남방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남의 미황사에는 법당의 기둥 주추 석에 이런 게 그림이 나오는데 이런 것이 모두 남방불교의 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 이제 정면의 탱화를 보자. 웬 임금이 오만하게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유학 속에서 불교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석가여래부처님을 모시고 좌측으로 아미타불과 오른쪽은 약사여래를 모셔두고 있는데, 고개를 들고 부처님 위를 쳐다보면 닫집이 있다. 이 닫집은 임금님의 자리나 부처님의 자리위에 장식으로 만들었다는 집의 모형이다. 이 닫집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석가여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물을 토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멋진 조각솜씨이다. 여기서는 감탄사가 나와야 한다. 닫집 앞에는 새를 매달아 놓았다. 이것이 바로 용을 잡아먹는 전설속의 금시조라고 한다.

고개를 뒤로 젖혀서 천장을 보면 나무로 만든 학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천상세계를 실감나게 해준다.
이쯤 되면 법당 안이 조각전시장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뒤로 젖힌 고개를 바로하고 부처님 앞에 놓여 있는 긴 탁자를 보자.
이 탁자는 15미터의 길이에 나무를 잇거나 합하지 않은 한 나무판이다.

법당의 기둥 중에 하나는 칡뿌리 기둥이라는 전설이 있으니 좌측법당으로 들어가는 쪽 뒤에서 두 번째 기둥이라고 한다. 봉황루에 있는 법고는 통나무를 파서 만들었다는데 절의 역사만큼 천년을 넘겼을 것이라고 추정 되고 있는바 아직도 온전함에 감탄을 금할 길 없다.

이런 조각 작품으로 잘 지어 놓은 집에는 부처님 말고 그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자 여기서부터 우리의 도깨비를 찾아 황당함의 극치를 맛보자.
우리의 도깨비는 본래 뿔이 없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뿔 달린 일본도깨비가 들어와 이것이 도깨비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이 국가로 발전할 당시, 음양도(陰陽道)라는 유파가 있었는데 그 방면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음양사(陰陽師)라 불렀다. 그들은 영주나 귀족, 국가경영의 고문으로서 폭넓게 활약했었다.
지금도 이들의 활동이 일부 보이듯 하다. 도깨비는 바로 그 음양사들이 만들어낸 요괴(妖怪)인 것이다.

고구려 군인들은 뿔 달린 투구를 쓰고 나오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무서워했고 이것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뿔 달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학자도 있다. 치우천황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그렇지만  뿔 없는 도깨비가 우리의 도깨비 본래 모습이다.
보통 도깨비 문양은 지붕의 기와에 새겨놓은 것이 많은데 여기서는 당당히 불집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쯤이면 도깨비를 찾았을 것 같기도 한데, 도깨비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봉황루 전면 창방부에, 나머지 두 마리는 대웅전 편액의 위쪽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참 순하디 순한 모습이다. 저 도깨비들이 장난을 하여 멋진 조각품을 해놓은 것이 아닐까 하여 미소를 머금어 본다. 토속종교가 절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 쌍계사를 나와 시간이 난다면 바로 옆에 있는 감코리아를 둘러 곶감 말리는 작업도 구경하고 한방 곶감도 한번 시식해 보기를 권한다. 양촌일대가 곶감의 주산지라 유명한 곳인데 여기는 곶감을 특수 한방 처리하여 제조하고 있는데 맛이 참 좋다. 고집쟁이인 ‘이주용’사장이 만들어 낸 걸작품이다.

감을 냉장고에 얼려서 썰어 놓으면 시원하면서 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양주안주로는 최고이다.
삼성그룹에서 이곳의 곶감을 구입하여 도자기 단지에 넣어서 선물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서울의 일부 백화점에 까지 납품되고 있다고 한다. 머지않아 계룡시에 홈플러스가 들어서면 이곳에도 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여기를 나와 다시 가야곡 쪽으로 가면 사육신의 한분인 ‘성삼문의 묘소’도 있으니 참배를 하기를 바란다.

성삼문의 시신은 능지처참되어 사분오열되어 없어진 것을 뜻있는 분이 시신일부를 수습하여 여기에 모셨으니 참배하고 언덕을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육곡리유적지’가 있고 그 아래 ‘가야곡왕주’ 공장이 있다.

술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는데 여기 물맛이 예전부터 좋은 것 같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터를 잡고 살아온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일대가 양질의 흑운모 화강암임을 누가 알랴?

여기서 가야곡사거리에서 운주 쪽으로 방향을 틀어 재를 넘어가기 전에 왕암리가 나오는데 여기가 왕암구들장이 생산된 동네이다. 여기부터는 물어보아야 찾아 갈 수 있고 약간 비포장산길을 올라가야 하니, 가족들과 왔다면  힘들기 때문에 운주에 가서 저수지 구경도 하고 화산붕어찜도 먹으면 하루의 여정이 저물 것이다.

왕암리 산속을 올라가다 보니 여기저기 구들장으로 축대를 쌓아놓고 때로는 구들장으로 쓰려고 바위를 떼어 놓은 흔적이 보이는데 정상 거의 올라가니 광산입구가 파쇄석으로 폐쇄되어 있었다.

지금은 채광을 하지 않고 있는데 나랑 같이 간 나에게는 ‘풋고추에 절이 김치인’ 한상교 선생은 은은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한다. 운모가루 때문에 바위자체가 흰빛으로 아른거리는데 더 들어가 볼 수 없어 여기서 서성거리면서 좋은 기운을 받고 흑운모 몇 점을 수집해서 나왔다.
옛적에는 흑운모 구들장1장에 논1평과 거래가 될 정도였다니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던 같다.

처음에 여기를 찾아갈 때는 건너편에 있었던 석회광산을 착각했었다.
이 광산도 폐광되었는데 거기도 석회 뿐 아니라 흑운모돌이 많이 나오는데 이 채광동굴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에 온몸이 오싹해진다.

한선생은 이곳의 기운이 쭈삣쭈삣하여 강하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정말 작열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괜찮은 장소인지라 본인도 어깨통증 때문에 몇 번 가봤는데 온몸이 시원해지면서 기분이 상큼해지는 것이 나만 가기는 아까운 생각이 거듭 드는 장소이다.
신경통 등 통증이 있으신 분들은 이곳의 기운을 쐬면 상당한 자연치료가 되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런 데에 진정한 목적의 요양시설이 들어서야하는 것 같은데 최근에 다시가보니 웬 암자를 건축하고 있어 야릇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만 있다면 어떠랴.

건강에도 좋은 석재이니 한번 찾아가서 온몸으로 기운을 받고 오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이런 곳에 요양원 시설이 들어선다면 참 좆으련만 당시 경성태창방직의 백낙원, 백낙중 사장을 비롯한  만 그놈에 경제성 때문에 문제이다.

건강! 건강! 웰빙! 웰빙! 하는 시절에 이런 곳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마치 ‘터진 꽈리 보듯 하니’ 물건이나 사람을 아주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고 중히 여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저 우리 쌀, 우리 농산물만 죽어라 찾으나 왜 이 땅에 나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하면서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남이 좋다고 하니 나도 한다는 안이한 생각들이 너무 퍼져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속담에 ‘참깨 들깨 노는데 아주까리 못 놀까’,  ‘참나무에 곁 낫걸이’라는 글이 있다.

별 어 중이 떠 중이들이 다 활동하거나 참여하는 일에 어엿한 내가 어찌 못 끼겠는가 하는 것으로 남이 하니까 나도 하고, 제 능력은 생각하지도 않고 엄청나게 큰 세력에 부질없이 덤비고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이제 계룡산아래에서 만이 이라도 이런 분위기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보통 흑운모가 섞인 화강암지대는 예로부터 인물이 많이 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돌의 좋은 기운이 많이 방사된다고 한다. 여행은 이만하고 무대를 다시 신도 안 왕궁 터로 옮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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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내 주초석의 비밀

   
 
  ▲ 신털이봉의 예전모습  
 
여기를 벗어나면 또 보아야 할 장소가 있다.
공군기상대에 가기 전 우측 도로변에 잡목으로 덮인 야트막한 야산 이 작은 봉우리가 ‘신 털이 봉’이다.

왕궁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고 쌓인 흙들이 작은 봉우리를 이루어 신 털이 봉이라고 불리었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내를 기다리다 죽은 편 씨의 맺힌 한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지명을 보면 부남(夫南)은 한자 그대로 풀면 사나이(夫)가 남행(南行)한다는 뜻이니 사나이는 다름 아닌 씩씩한 군인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서울 쪽에서 그들이 많이 남행하여 결국 이 곳에 머물 것이란 얘기요, 정장(丁壯) 이란 지명 은 장정(壯丁)이니, 그 장정(군인)들이 올 것을 땅이름이 잘 말해 주고 있는 셈이다,

일찍부터 도곡리의 장군봉(將軍峯), 칼바위[劒岩], 깃대봉[旗峯]이라든가 남산면 남서쪽의 천호산(天護山), 북동쪽의 위왕산(衛王山), 관암산(冠岩山) 등이 모두 군인들과 관련되는 이름이다.

그 위에 지어진 계룡대 !

‘군을 구성하는 제반요소들이 때로는 화합하고, 때로는 발전적 변이를 이루어 나감으로서 큰 힘을 발휘하여 국운 번영의 주역이 될 것을 다짐하는 의미’로 주역의 8괘 원리를 적용해서 지었다는 계룡대!

이 안에 경관을 보면 정말 멋있다.
계룡산을 배경으로 하여 정말 넓은 뜰에 한 폭의 시원한 수채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가을에 피는 단풍나무는 그 빼어남에 미치도록 잡아 뜯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난다.
여기에 잡지 않고 방목되는 관계로 여기저기 사슴까지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여기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세상이라 도화경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전생에 신선들 이었나 정말 부럽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전쟁 없는 평화로움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지상낙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해야 할 일을 잊지 않는 유비무환의 자세는 흐트러져서는 안 될  듯싶다. 

   
 
  ▲ 신도내 주초석 입간판  
 
그 옆에 바로 태조가 점을 쳐서 집터를 잡은 곳이라는 왕궁 터가 있다.
이 왕궁을 짓던 터에는 많은 주춧돌과 구들장들이 널려있는데 최근에 이곳을 잘 가꾸어 놓았다.

1793년 정조 때 권감(權堪)이라는 학자가 쓴 계룡산추기(鷄龍山追記)에 보면 ‘기조 석을 운반해 놓은 것과 구혁(溝洫: 경계를 갈라 정한 구역을 표시하려고 판 도랑)을 복축(卜築:살 만한 땅을 가려서 그곳에 집이나 기타 구조물을 지음)해 놓은 것이 예전에 힘써 일한 곳이 분명하니 대저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 최초 점을 쳐서 새 집터를 잡은 곳이다. 객사 터며 종각 터가 또한 지금까지 내려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부터는 많은 주초석이 분실되었다.
국방부가 6·20사업으로 신도 안 지역을 수용한 후 여기저기 흩어진 돌을 이곳에 보아 보관하고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하고 있다.

 
 
 
  ▲ 신도내 주초석 전경  
 
주춧돌은 많이 없어 졌지만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옛날에는 이곳의 주초 석에 기도를 드리면 좋은 복을 준다고 하여 많은 이들이 돌을 가져가기도 하고 이곳에 치성을 들였다 고 한다. 때로는 아이를 밴 여인이 이곳에 쇠붙이를 묻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많은 여인들이 이곳에 쇠붙이를 묻었다고 하고 그 쇠붙이 중 일부는 신원사를 짓는데 보태졌다고도 한다.

이곳이 정돈되기 전에 찾아갔을 때는 이곳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구들장들이 널려있었다.
본인은 이 구들장에 주목을 하고 커다란 것 몇 점을 수집해왔다.
이것은 연구용이니 이해해주기 바라고 궁중식당사장이 알면 또 압수 당 할 테니까 잘 감추어두고 있다.

지금은 주춧돌 주변을 잘 정리해서 철책을 치고 잔디를 심어놔서 구들장은 땅 밑으로 무쳐서 볼 수 없고 깨어진 덩어리만 일부 흩어져 있다. 왜 왕궁 터에 이런 보잘 것 없다고 보여 지는 구들장들이 널려 있을까?

적어도 임금이 사실 터에 왕궁을 지을 정도면 조선에 최고급의 건축자재가 쓰이는 것이 당연한 것일 텐데..

필자는 가끔 이러한 엉뚱한 추측을 하면서 여행을 하는데, 이것도 재미를 배가시키고 여정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니 이런 하찮은 것을 주시하다 보면 새로운 여행지가 만들어 지고 그래서 남이 가지 않는 여행지를 많이 찾아가고는 하는 편이다.

   
 
  ▲ 신도내 주초석  
 
이것이 무엇이기에 이곳에 널려 있었던 것일까?
이 구들장의 정체는 ‘흑운모’이다
좀 어렵지만 학문적으로 살펴보면 영어 명으로는 biotite라고 하는데, 쪼개진  면은 빛나는 광택을 가졌다.
흑운모 분포는 매우 넓고, 대표적인 계룡산일대, 금강산, 경주불국사 등이 이러한 흑운모 화강암지대 인 것이다

흑운모 석은 세종대왕 때 저술된 의학경전인 향약집성방에서는 만 가지 약재의 서열 중에 으뜸으로 쳐주었다고 한다.

운모돌비늘은 맛은 맵고 성질은 평하며 독이 없다. 몸의 피부에 군살이 생긴 것, 중풍, 추웠다 열이 났다 하는 것, 수레 나배 멀미 등을  치료로 하는데 쓴다. 또 사기를 없애고 5장을 편안하게 하며 정을 불려 주고 눈을 밝게 한다. 또한 기를 내리우고 살을 단단하게 하며 부러진 것을 이어주고 기운이 약한 것도 치료하며 이질을 멈추기도 한다. 오랫동안 먹으면 몸이 가벼워지고 몸에 윤기가 돌며 늙지 않고 오래 산다. 또 추위나 더위를 타지 않고 의지가 강해진다.

자! 이 쯤 되면 엄청난 신약이다.

예로부터 왕실이나 사대부에서만 알려진 신비의 광물로 인정되어 왔다.
인체의 실험결과 체내의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여 혈액순환과 만성기관지염, 신경성 위염과 허리, 궤양성 대장염, 빈혈, 동맥 경화,당뇨병, 관절염, 요통 등 노인병은 물론 각종 현대병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며, 오장을 안정시키고 눈을 밝게 해주며 피부를 튼튼하게 해주는 신비의 돌로 각광받고 있으며 옛 부터 흑운모 석을 약돌 이라 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 아닌가?

   
 
  ▲ 신도내 주초석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태종, 세종, 세조 같은 조선조 초기의 왕들은 온천요법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함경도 오지 길주에 있는 온천에 왕들이 온천욕을 하러 행궁(行宮) 순행한 기록이 있고, 그들 중 세종임금은 황토와 흑운모 편암(片岩)을 쌓아 만든 한증막에 각별한 관심이 있어 한증요법을 장려하였다고도 한다.

흑운모 성분이 많은 화강암의 넓은 바위돌이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의 열을 받아 뜨거울 때 약간 젖은 넓은 수건을 깔고 그 위에 누워 있기만 하면 여러 가지 통증이 완화된다는 민간요법이 있는데 이것은 야외에서 하는 찜질이다.

방안에 흑운모구들장과 황토를 바르고 따뜻한 열을 가하면 구들장의 열로 방안에서  땀을 흘리면 각종 통증이 가라앉고 스트레스가 가라 는 상쾌함을 주어 그것이 인체의 본래의 자연 치유력인 면역의 힘을 기르는 원리였으니 얼마나 과학적이고 현명한 자연요법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유행하는  찜질방은 이러한 구들장 원리를 이용한 대표적인 온열요법이 아닌가?

그렇지만 요사이 찜질방은 겉은 시멘트로 뼈대를 잡고 중국산 천연 옥과 황토로 포장을 하고 있는 곳이 많은데 이런 것은 열을 받으면 황토와 중국산천연 옥, 시멘트로부터 해수병과 발암물질이 방사되기 때문에 건강에 오히려 위험하다. 그래서 신문지상에 찜질방에서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것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

찜질방을 지을 때는 이러한 흑운모화강암을 써서 해수병을 막고 발암물질을 제거하는 현명한 지혜가 아쉽다.
흑운모에 대한 사설이 길었지만 이것이 바로 멋진 자연요법의 건강을 유지하고 치료해주는 신비의 돌이었던 것이고 최고의 건축자재였던 것이다.

이렇게 계룡산을 선호했던 이유의 일부가 과학적으로 들어나고 있으니, 정도전은 “계룡산에 양질의 흑운모가 산출되니 그 곳을 왕도로 정하면 강군을 양병하고 백성이 건강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계룡산으로 서울을 정하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렇다! 이 신비의 돌이 바로 계룡산천도를 하려던 보이지 않는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양질의 흑운모화강암이 신도안의 심층을 형성하고 계룡산을 중심으로 많이 분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신도 안이 무궁무진한 ‘흑운모화강암(黑雲母花崗岩)’ 터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사는 것만으로도 건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연의 이치 인 것이다.

사실 이곳 계룡시 신도 안은 고도가 150m에서 200m 이상이어서 탁한 공기가 모이지 않고, 신도 안 안쪽으로는 최신의 시설로 된 군 본부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청정도를 늘 유지하면서 탁한 물이 바로 하류인 대전과 논산지역으로 흘러가는 관계로 오염되지 않고, 오염될 여건이 없는 곳인지라 기침 등 잔병이 없으며, 흑운모화강암에서 나오는 강열한 기운으로 병의 회복력이 상당히 강한 지역이다.

교통도 사통팔달이고 군의 지휘본부가 있는 관계로 지역경제가 기복이 없이 늘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관계로 이곳에 근무하고나 살아 본 분들은 여기를 절대로 떠나지 않고 있으니 결코 서울이 부럽지 않은 도시이다. 여기서 살아보니 정감록에서 여기를 그렇게 중요시한 이유를 가슴 깊이 느끼곤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흑운모 중에서 최상의 것을 생산했던 곳은 어디일까?

찾아보니 인근의 논산시 가야곡면 왕암리에서 ‘왕암 구들장’으로 유명한 곳이 있는 것이 아닌가!

‘찬밥 두고 잠 아니 온다’고 멀지 않다면 냅다 달려가야 한다.
지나치게 계획을 세우면 계속되는 기분을 일순 깨버리기 때문에 알았으면  모조건 가는 것이 상책이다.
‘팔도를 메주 밟듯 하고 다녀야 한다.’

여정의 시작은 목적지에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느긋한 마음으로 시간을 가지고 꼼 씹어 보는 그 순간, 진정한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행을 가면 가는 시간이 늘어지고 여정의 목적지는 ‘소경 단청 보듯’ 순간 돌아보고 나오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다.

여행계획은 여정지의 자료를 미리 준비해서 알아보고 그것과 대조해서 한 가지씩 살펴본다면 그 재미가 배가되는 여정이 될 것이다. 알고 보는 재미는 정말 삶을 풍요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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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용추와 숫용추

계룡산에는 4곳에 계곡물이 모이는 커다란 웅덩이가 있어 서용추, 동용추, 남용추, 북용추로 불리었다고 한다. 서용추와 동용추는 현재의 숫용추와 암용추로 불리고, 남용추는 떨어져 나가 있고, 북용추는 갑사 쪽에 있다고 한다.

 

 
 
  ▲ [암용추] 직경 12m, 깊이 2.5m의 맑은 연못이다.  
 
   
 
  ▲ 최근의 암용추 모습  
 
삼신당을 보고 하산 중에  암용추를 지나면서 그냥 지나 갈 수가 없어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암용추는 여의주라 지금의 삼신당이 있는 성도봉이 황룡이고 제석사의 용구추가 청룡이라 암용추를 놓고서 쟁주(爭珠)를 벌이는 형태라고 한다.

이곳 웅덩이 석벽에는 경술국치 후 나라 잃은 망국의 한을 품은 12분들이 석벽위에 본인의 호와 이름을 새겨서 백절불굴하는 단결심을 표시하여두었다.
일러  ‘용산12일민회(龍山十二逸民會)’!
이분들은 의연금을 모으고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하는 애국운동을 하여 국가로부터 독립운동의 포상을 받았다.

이런 것은 보면 이 일대가 평소에 민족정신을 고양하다 나라가 위난에 빠질  때는 뜻있는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곤 하니 살아 있는 계룡산의 정신세계에 거듭 감사할 뿐이다.

날씨가 덥고 웅덩이 위쪽 용산12일민회 석각을 찾아본다는 핑계로 잠시 옷을 ‘홀라당’ 벗고 암용추로 들어갔는데 시원하면서 짜릿한 물맛 때문인지 나오기가 싫어졌다.
계룡산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알면 난리 나고 경 칠일이지만, 온몸이 근질거려  이곳에서 잠시 육체와의 향연(?)이 있었으니 온몸을 세척하고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웅덩이 깊이가 한길반이 넘는데 같이 간 박희덕은 수영이 프로급인지라  암용추 속으로 연신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물밑으로 들어갈 때 마다 한웅 큼의 돌을 집어가지고 나오는데, 먼 다른 생각이 있어 그러는지, 다시 한 번 찾아갔을 때는 이전에 저지른 업보를 받았는지 위험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했었다.

이 계곡에는 기도하면 소원성취를 할 수 있다 하여 길지로 여겨져 오고 있다.
1920년경 3·4월이면 이곳에서 서식하는 올챙이를 복용하면 만병통치효과가 있다고 하여 올챙이를 잡으러 몰려드는 인파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곳 암용추는 건너편 산봉우리에서 쳐다보면 우리가 가끔 인터넷에서 보는  여성의 거시기와 거시기를 빼어 닮았다고 하는 곳이지만,  이곳은 굉장히 신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지는 곳인지라 이런 표현이 가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이다.

이 계곡은 군부대에 속해있고 계룡산 국립공원의 통제지역인지라 보전이 잘되고 있지만 정말 한번 가보면 하는 멋진 장소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절경이 있나 싶을 정도의 일품이다.
하기야 개방되면 그것으로 이 계곡은 ‘사망’이다. 

   
 

  ▲ [용란(龍卵)] 계룡건설 이인구회장이 암용추와 숫용추에서 꺼냈다는 용의 알. 왼쪽이 암용추 용란, 오른쪽이 숫용추 용란  
 
계룡건설의 이인구회장은 이곳 암용추와 숫용추에서 나온 공룡 알 같은 수석인 ‘용의 알’, 즉 용란(龍卵) 두 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사진으로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별걸 다 지니고 있는 이 수석이 복을 부르는 돌인 것 같다. 개태사에 있는 용란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나도 이 암용추 밑바닥에서 나온 메추리알 크기의 돌멩이를 산신의 허락도 없이 슬쩍 해 왔는데 금암동에 있는 궁중갈비식당의 ‘이정호’ 사장에게 보여줬다가 압수당하고 돌려주지를 않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이 분은 계룡대 안에 살고 있는 흰 사슴 두 마리를 찍은 사진을 남모과장님으로부터 본인이 선물 받아 보관하고 있는데 이것도 압수하려고 하는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곳 식당은 정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니 지금은 웃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곤 하는데 정말 복이 들어오는 돌멩이 일까?
이정호사장의 음식조리는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솜씨이다.

   
 
  ▲ 10m 길이의 폭포가 일품인 숫용추. 위에서 본 모양은 남자의 생식기 모습을 하고 있다.  
 
 

 
 
  ▲ 최근의 숫용추 모습  
 
암용추와 숫용추는 이런 여유로 성숭배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었고 아들을 낳고 싶으면 숫용추에서 계룡 산신에게 기도를 드렸고 딸을 원하는 부부는 암용추에서 푸닥거리를 일삼았다.
자연히 암용추는 남자들이 들끓었고 여자들도 북새통을 이뤘다.
이곳에 멀지 않은 장소에 숫용추가 있는데 이곳이 암용추와 자웅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도 전설이 없을 리 없지 않은가?

   
 
  ▲ 암용추 숫용추의 전설  
 
‘옛날 계룡산 땅속에 암용과 숫용 두 마리가 사이좋게 살고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때가 되면 하늘로 올라갈 것을 기대하면서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두 용은 계룡산 밑을 파서 산의 물을 금강으로 흐르게 하였고, 땅속으로는 신도 안에서 갑사·동학사·마곡사 쪽으로 어디든지 다니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명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참으로 깨끗한 용들이었고 항상 하늘에 올라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땅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이무기들은 추잡하게 살면서 그들도 하늘의 부름을 기다렸다.
용들은 그런 이무기들을 가소롭게 여겨 추잡한 행동을 보지 않으려고 몸을 땅위에 전혀 나타내지 않은 채 굴속과 물속에서만 지냈다.

용들은 몹시 비가 내릴 때나 천둥이 칠 때 혹시 하늘에서 자기들을 부르지나 않을까하고 굴속에서 눈을 내놓고 하늘을 바라봤다.
하루는 몹시 비가 내리는데 밖을 내다보는 것을 잊고 땅속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용들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어 더 큰 목소리로 부르자, 그때서야 알아듣고 굴속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대체 너희들은 하늘의 부름을 거역하려는 것이냐?”, “너희들은 항상 땅에서만 살려느냐? ”하고 하늘에서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용들은“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하고 빌면서 애원했다.

그러자 “땅의 껍질을 벗겨라. 그리고 언제든지 하늘에 올라올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너희들의 정(情)이 너무 지나치니 따로 따로 자리를 정해 다시는 만나지 마라.”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더니 날씨가 잠잠해졌다.

그들은 헤어지기가 아쉬웠지만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작별을 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서로 하늘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제각기 장소를 정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암용은 물이 꼬불꼬불 흘러내리다가 맑은 소(沼)를 이루는 장소를 택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숫용은 계룡산의 정기가 흐르듯 맑은 물이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는 아래쪽 계곡에 자리를 잡고 땅을 파들어 갔다. 이제는 하늘에 올라갈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용들은 이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가보다 생각하며 못에서 살그머니 머리를 내미니 하늘에서 “때가 되었으니 어서 올라오너라.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이곳 사람들은 암용이 하늘로 올라간 자리를 암용추, 숫용이 올라간 자리를 숫용추로 불렀다. 또한 암용추와 숫용추는 옛날에는 땅속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두용이 땅속을 통해 서로 만났다고도 전해진다.

실제로 암용추와 숫용추는 직선거리로 약 1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계룡산 정상에서 보면 같은 능선 상에 있다. 또 두 용추는 수심이 4-5m정도 이며 이곳을 제외하고는 계룡산 어느 바위에도 이런 웅덩이가 없다.“
(계룡시청  민속문화·전설 중에서)
 
숫용추에는 청남대의 대통령별장이 없어지고 새로운 대통령별장이 이곳에 지어져 있으며 여름에는 군관계자의 휴식처로 개방되고 있다.

노무현대통령께서도 여기에 자주 오시는 것 같다.

한번은 계룡역 앞에 라이온스 ‘한태철’회장이 운영하는 풍년식당에서 맛있는 순대국 식사를 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오신다고해서 보니 KTX열차가 역에 들어서고 멈추는데 노무현대통령께서 내리시는 게 아닌가?

이곳에서 대통령을 보니 좀 당황스러웠는데 주위사람들은 “뭐 평소에도 자주 보는데요. 뭘”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한다. 주위를 보니 경비도 별로 없고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기는 했구나 하면서 나도 호들갑을 떨었다가는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봐 조용히 식사를 마친 적이 있었다.

결국 시대가 바뀌어도 이곳은 왕이 자주 찾는 터임을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이러한 터에서 마음껏 활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뿌듯해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명산은 계룡(鷄龍)이요, 주(州) 동쪽에 있다.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신라가 5악(岳)을 만드는데, 계룡을 서악(西岳)으로 삼아서 중사(中祀)에 실었다고 하였다. 본조에서는 소사(小祀)로 하고, 봄·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아래 산허리에 작은 못이 있는데, 잠연(潛淵)이라 한다.
아가리는 작고 안은 넓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며, 사람이 나무나 돌로 메우면, 그 이튿날 나무와 돌이 모두 밖으로 나온다. 땅속에 용신(龍神)이 있어서 구름 기운을 타고 드나든다 하여 가뭄을 만나 비를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다”

   
 
  ▲ 숫용추 계곡 인근에서 공사를 하면서 숫용추를 비롯한 계곡이 바위 등으로 인해 훼손되자 주민들이 원상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이 기록과 같이 이곳에 도로를 내면서 숫용추가 깨어진 돌로 덮였는데 어느  날 비가 내리더니 수북이 쌓여있던 돌들이 다 쓸려내려 가고 없었다고 하는데 여러 사람이 목격했던 진술기록이 지금도 남아있다.

숫용추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과 웅덩이가 남자의 거시기를 꼭 닮았다.
카메라 감상방법은 암용추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봐야 하고, 숫용추는 폭포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거시기가 분명하게 드러나니 좀 우습지만 사실인 것을 어찌하랴.

삼신당 바로 앞에는 제석사(帝釋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에도 무학 대사가 기도를 드렸다는 동굴이 있다.
이 동굴 이름은 ‘용구추(龍口湫)’라고 한다. 혼자 보기는 아까운 장소이다.
이절은 6·20사업에도 철거되지 않은 유일한 사찰이다. 

이곳 절에는 계룡산에 온 후 한 번도 이산을 떠난 적이 없다는 스님이 계신다는데 어려운 때 밥을 해먹다보면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삼시 세 때를 국수만 드셨다고 하는, 지금도 국수만 드신다는 ‘서용준’스님이 계신다는 데 인연이 안 되는지 뵙지는 못했다.
언젠가 이절은 철거되어야한다고 하는데 어찌될는지?

이 일대에 유명한 떡 보살이 있었다고 하는데 제물로 떡시루 99 개, 돼지 99마리를 바친 후 초 9,999자루를 켜놓고 제사의식을 했다고 하니 얼마나 성대했는지!
조그만 암자에 살던 떡 보살이 엄청난 제물로 의식한 것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여사가 지원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으니 정말 대단했다고 한다.

박정희대통령 시해 전에 육영수여사가 이곳 계룡산에서 수많은 기도를 드렸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정주영씨가 대통령에 출마한다고 해서 정도령의 시대라고 들썩거렸던 적이 있고, 행정수도 천도지라고해서 난리법석을 떨던 장소여서 그런지 계룡산은 시대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내려오는 길에 무학 대사가 창건했다는 고찰인 용화사가 있다고 하여 보았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용화사는 신흥종교가 아닌 유일한 조계종 전통사찰이었다고 하는데 6·20사업  때 함께 없어지는 피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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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 대사는 천일기도를 전국의 산을 돌면서 하게 되는데 지금 남해에 있는 보리암에 이성계의 기도처인 태조기단이 있다. 이성계는 기도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보광산을 금산이라 개명했다.

다시 차길진선생의 말을 들어보자.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올리며 매달린 절대자 셋은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그리고 단군, 이렇게 3대다. 이성계 영가(靈駕)는 “그렇지만 단군 할아버지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반목한 것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하면서 조선 태조 기단(祈壇) 위쪽의 삼불암(三佛巖)을 보기로 들었다.

바위 셋 중 하나는 누워 있고, 둘은 서 있다.
이 바위 셋의 모습이 꼭 앉아 있는 부처 같다.
이성계 영가가 100일 기도를 하기 전까지 바위 셋은 죄다 누워 있었다.
기도를 마치자 바위 둘이 일어나 앉았다.
나머지 하나는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셋이 다 일어났다면 이성계는 조선의 국왕을 넘어설 수 있었다.
중국까지 손아귀에 쥔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단군과 석가가 각자 평가, 추후 맞춰 보고 공감한 이성계의 그릇 크기는 그러나 조선까지였다.”
<2006년3월6일자 주간조선>

그리고 여러 산에 기도를 거쳐 마이산에서 천신으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게 되는데 이곳 마이산에 있는 은수사에는 팔각정이 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으면 마이산과 돌탑만 보고 지나치게 되는데 이곳 팔각정에는 단군화상이 있고 태조 이성계가 도검을 하사받는 그림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고 그 증표로 씨앗을 심었는데 그것이 싹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청실돌배나무가 은수사 절 안에서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계와 무학은 계룡산에서도 많은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 삼신당. 이 곳은 아쉽게도 군부대내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보기가 어렵다.  
 
바로 기도를 드린 장소가 ‘제석사(帝釋寺)’와 ‘삼신당(三神堂’)이 있는 장소이다.
아쉽게도 이곳 제석사와 삼신당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군부대내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 보기가 어렵다.

6·20사업으로 신도 안 계룡대에 있는 모든 종교단체들이 철거되었음에도 이곳 2곳만 건재하고 있으니 무엇이 이들을 지켜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곳 특히 삼신당이 20년간 독립운동을 지원한 애국운동의 살아있는 장소라는 것을 안다면 자연히 숙연해 질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방문해보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암용추를 지나 200여  미터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신당은 큰 나무들이 많은 것을 보면 경치가 무척 빼어난 곳이다.

   
 
  ▲ 암용추의 아름다운 모습  
 
삼신을 모신 천단(天壇)인 대전각(大殿閣)이 있고 뒤에는 그리 깊지는 않지만 천연 동굴이 있는 데 이곳은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려 할 때 이 동굴에 와서 얼마간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한다.
삼신당을 전각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뜻인 것 같다.
이 골짜기를 임금 우자에 자취 적자를 써서 우적골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도장 시설로 적 벽돌 양옥 이층의 태상전(太上殿) 대강당이 있다.
관리자가 바꾸었는지 문에 굳게 시건장치를 해놓았는데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이곳을 본 분의 말씀으로는 전각에는 태극 문양이 아름다웠고, 천정에는 중앙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무지개 색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고 이것은 삼태극(三太極)으로, 그것은 한국이 중앙이 되어 세계를 향해서 뻗어나간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마 이곳에는 누군가에 의해 무속이 행해지는 것 같은데 진정 뜻이 있는 자라면 이 삼신당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곳에 있는 커다란 넙적한 돌인 만복암(萬福岩)은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한자리로 알려져 있었기에 유명하기도 하다. 그리고 바위동굴은 무학 대사가 기도 한 곳이라 한다.
 
삼신당은 1983년에 이곳을 내주고 장태산 휴양림 근처에 이곳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여 이주하고 있는데 한번 찾아가 보니 아담한 모습을 잘 재현해 놓았다.
삼신당(三神堂)현판은 정원강 선생이 직접 쓰신 것이라고 하는데 당 안에 모셔진 것이 특이 했다.
지금은 박영숙 여사가 이곳을 지키고 계시는데 80순이 넘으신 분이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삼신당의 유래를 설명하시는데 말씀하시는 것이 또렷하면서도 소리의 굴곡이 없으신 것을 보니 많은 지혜를 받은 분 같았다.

삼신당 법칙은 천지인 (天地人)삼신인데 천(天)은 하늘이요. 지(地)는 땅이요. 인(人)은 사람이라 천지인 삼라만사 만물이 생(生)하고 사(死)하고 하는데 세상만물 중에 사람이 최고 귀하니, 첫째 내 영을 닦아 불심을 길러야 하고, 둘째 삼강오륜을 지켜 유를 길러야 하고, 셋째 연구조화선법을 길러야 하나니 그래서 유불선삼교니라. 어쨌든 3가지 중 하나만 빼놓으면 코끼리 하나놓고 세 사람이 더듬어 보고 다투는 격이라고 한다.

박영숙 여사가 오래전에 구술예언을 한 것이 있는데 참 흥미롭다.
“송도 3백년 운은 씨를 뿌리는 격으로 사람들이 어둔하고, 삼각산 한양 오백년은 싹을 가꾸는 격으로 사람들이 삼강오륜을 숭상하고 예를 바로 잡아 지킨다. 계룡산 8백년 도읍에는 이미 다 배울 대로 다 배워서 머리가 비상하고 깨칠  대로 깨쳐서 사람들이 미련한 사람이 없으며 밝고 맑아지며 가을열매를 거두는 시기라. 가야산 천년도읍에는 편안하게 사는 시절로 밥도 안 해 먹고 약만 먹으면서 사는 시대로 겨울에 저장하는 시기이라.

삼백년 도읍시절에는 40살이 종명(終命: 인간수명)이고, 그러므로 10세나 12세에 결혼을 함이 적절하고, 삼각산 오백년 시절에는 60살이 종명으로 15세나 18세에 결혼함이 적절하고, 계룡산 8백년 시절에는 80살이 종명으로 30세나 32세 또는 33세에 결혼함이 적절하며, 가야산 도읍에는 100살이 종명이니35세나 40세에 혼례를 갖출 것이다.

앞으로는 앉아서 천리, 서서 만리를 볼 것이다. 또 빨래를 안 하고 꼬매지도 않는다.
두드리지도 않고 밥하는 사람은 밥만 하고 떡 하는 사람은 떡 만 하고 바느질하는 사람은 바느질만 할 것이고 양반 상하가 다 없어지고, 어른 아이를 몰라보고 남녀가 구별이 없고 부자지간에도 재판하고 형제지간에도 재판한다.“

 
한 40분 그늘 아래에서 어른의 말씀이신지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강연을 들고 안내를 받아 삼신당 안을 보게 되었다.

그 흔한 조각성물도 없었고 탱화도 없었다.
마치 초현대식 화랑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는데, 울긋불긋 알 수 없는 색깔로 그려진 문양이 천정에서부터 벽면까지 그려져 있었다. 우리민족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삼신(三神)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장소이다.

천정에는 천단(天壇)을 상징하는 삼태극(三太極)의 팔괘문양을 그려놓았다.
오른쪽부터 하늘을 상징하는 천(天: 元天上帝), 가운데는 인간을 상징하는 인(人: 人皇)을 그리고 맨 왼쪽으로 땅을 상징하는 지(地: 元始地皇)의 단을 모시고 있다.
그 흔한 사람모습이 아니라 알록달록하게 그려진 영국 국기 같은 모습이다. 한마디로 환상적인 그림이다.

천지인을 상징하는 문향이 특이해서 몇 번이고 쳐다보았는데 안정감을 주면서 신비감과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우리의 삼신사상을 재구성하고  여기에 사용되는 문향을 잘 재현해서 여러 군데 쓸 수 만 있다면 정말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룡산에 있는 삼신당을 종교를 떠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패러다임으로 이용할 수는 없는지 뜻있는 분들의 마음자세가 아쉽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향을 알고 쓰더라도 선조들의 뜻이 무엇인지 그 가르침을 정확히 알고 써야 하는 법이거늘 우리나라는 태극기 하나도 잘못 만들어져 쓰고 있으니 상징하는 그것을 잘못 그려서 얼마나 혼란이 오는지 알기나 하는가?

깊이 들어가면 머릿속이 흔들거리니 간단히 말해서 북쪽은 추운 물의 기운으로 검정색으로 남쪽은 따뜻한 불의 기운으로 빨강색으로 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환란이 계속되고 시끄러운데 왜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이가 그리 많은지...

사소하다고 보여 지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국운과 직결되는 것임을 누가 알겠는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고치지 않는 우리의 자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강한 근성도 안보이고 외국에만 빌붙어 사는 무리들만 양산해내고 있으니 여기서는 크게 한숨을 내쉬자. 어~휴~
  
계룡산 삼신당은 원래 평북태생의 백옥성(白玉星) 이라는 분이 묘향산에서 신도 안으로 이주해오면서 정도령이 오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고 믿고 공부를 하던 중 이곳에 수도 하러온 정원강(鄭元剛)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사위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정원강은 “노송의 껍질은 따서 가루를 만들어 붓치고 일주일 만에 떼어보라“라는 습종의 특효약을 교시 받아 이병을 앓고 있던 이선달 등 애국지사와 독립군에게 전해줘 신통력과 도술을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이 정씨를 따르자 계룡산 삼신당과 한양 삼각산에 독립기도를 드릴 수 있는 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부자들 몇 명이 자금을 내어 초하루 보름으로 구국기도를 올렸는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쌀을 가마니로 떡을 하고 풍성한 재물을 차려 놓고 기도를 올린 뒤에 시국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종교단체 같았지만 그 내막은 나라를 되찾고자 염원하는 이들의 밀집이었던 것이다.
뜻이 있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모여들어 다 모여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당시 경성태창방직의 백낙원, 백낙중 사장을 비롯한 많은 지사들의 협력이 있게 되었고 이층 양옥집을 지었다. 산꼭대기에 빨간 벽돌을 날라다 훌륭한 이층 벽돌집을 지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후 삼신당은 조선팔도 도사들이 만나 독립운동을 하는 거처로 변모했다고 한다.
매월초하루 보름날 한양삼각산에서는 저녁 술시(戌時)에, 계룡산에서는 밤 자시(子時)에 어김없이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운수기도가 지성으로 시행되었다.

3·1운동의 실패로 조성된 신도 안 이주 열풍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넘쳐나게 되었다.
일제의 멸망을 기원하며 1921년에는 계룡산 신도 안에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말까지 퍼지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일본으로의 침공을 외치기까지 하는 위험한 수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곳을 일제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는가?

이곳에서의 민족주의 성향의 독립운동의 열기는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위험지역으로 낙인찍히게 되고 신종교단체를 탄압해 나가게 되는데 치졸하게도 사기, 폭력, 금품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어 마음대로 탄압하게 된다.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을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 안은 그 불꽃이 타오르는 심지가 되었으니 민족의 성지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믿기지 않는 것은 신도 안에는 외국인이나 그 기운은 맥을 못 쓴다고 한다.
“계룡산 장군봉 밑에서 통신대대장인 미군소령인데, 새벽에 호랑이가 물어 메쳐서 죽었거든. 양갈보, 미군 죽은 거 보고 옷도 안 입고 내려왔어, 날이 밝아서. 그 이튿날 뜯어서 상봉에 옮겼거든 (그게 언젭니까?) 을축년(1949년) 해방 후 바로. 신도 안에 왜놈이 못 들어갔어. 주재소 안 죽으면 불나고 자꾸 죽어. 주재소 옮겼어. 되놈도 재미 못 봐. 되놈이 장터 점령하고 음식점 했는데 세 놈 죽으니 되놈 안 들어와. 왕도의 왕기(王氣) 시작도 안한 덴, 뭐이든 처음은 무서운 힘이거든, 외국기운은 맥을 못 써요“(김일훈저 신의원초 중에서)
 
광복 직후인 1948년, 미군은 계룡산 주봉인 천왕봉에 군용 통신 탑을 세우려 했다. 건축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 병사가 속출했다.
미군을 물리고 우리나라 군인이 공사를 전담한 다음에야 탑이 완공될 수 있었다.
이후 통신시설 관리를 명분삼아 슬그머니 계룡산으로 돌아 온 미군은 원인불명의 통신장애가 잇따르자 한국군에게 모든 것을 넘긴 채 완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주간조선 2005년11월12일자)

그렇지만 “계룡산 산신 찾는 소리에 귀가 시끄러워 벌레 같은 중생들 징그러워 모두 내 쫒을 난다. ” 라고 예언되어 6·20사업으로 한사람도 없이 사방 십리 밖으로 모두 내쫓겼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역사의 미완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곳이 우리의 독립운동의 역사적 증거이며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의 회복이라는 터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방치되고 있으니 애석할 뿐이다.

나라를 위하는 유적들이 함부로 방치되고 후손들에게 그분들의 정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누가 일하려 하겠는가?
더욱 이곳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시대에 부끄러울 뿐이다.

정원강 선생이 사상범으로, 독립운동혐의로 붙잡혀 경북성주경찰로 넘어가 고문 끝에 돌아가신 후, 그 며느리인 박영숙씨가 정원강 선생을 독립투사로 인정해주고 삼신당을 독립운동의 산실로 육성해달라고 외쳤건만 아직도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독립지사들의 기도장소로 그 숭고한 얼이 담긴 유물이 방치되어 손상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으니 역사 앞에 또 다른 죄를 짓는다는 의식이 깊이 든다.

삼일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선조들이 애국과 동지애로 만주에서 관동군 총칼에 피 흘리고 죽어 가고 이곳에 계룡산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지사들의 그 고혼(孤魂)이 오늘까지 위로받을 곳이 없다는 것은 너무 허망하다.

이곳을 길이 보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행이 이곳을 계룡시에서 사적지로 정한 것 같은데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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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조가 권중화(權仲和)에게 수도 자리(安胎地)를 구한바 권중화는 현재의 금산군 진산면을 천거하고 별도로 계룡산 도읍 도를 헌상하게 된다.

   
 
  ▲ 신도내 주초석 뒤로 보이는 낮은 산이 장구산이다.  
 
태조는 개성에서 수 백리를 달려와 비행장 옆 해군본부사령실 부근에 있는 장구 산 중봉에 올라 너른 뜰을 살펴본다. 이 봉우리가 계룡산의 여의주로 이태조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위치시키려했던 구릉으로 인경 봉으로도 불리는데 신도안의 중심 한복판에 있는 장구 산 중봉이다.

5일간 이곳을 답사한 후 크게 만족하여 1393년 3월 드디어 새 수도 건설의 대단원의 막이 오르게 된다.
이 너른 뜰, 신도로 구획된 안쪽이 지금의 용동리, 부남리, 석계리, 정장리로 신도안(新都內)이라 호칭한다.

전설에 의하면 계룡산에 제자봉(帝字峰)이 있고, 그 아래를 예로부터 제도(帝都)라고 불렀는데, 신라 말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와서 보고는 중국에 황제가 있거늘 이 소국에 제도가 있을 수 있느냐? 이를 마땅히 삭제하여야 한다 하므로 부득이 제자의 위아래 양쪽 획을 빼고 신(辛)자만을 남겨 신도(辛都)라 일컬어 왔다.

조선개국 초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번영의 기세를 올리고자 시경의 근기명(斤其明)의 근(斤)자를 따다 신(辛)자에 붙여 신도(新都)라 불렀다고 한다.

신도 안 이 명칭에 대하여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다.
신도 안, 부르기는 신도 안으로 불리어지고 한문으로는 신도 내(新都內)로 쓴다.
이러한 지명은 일면 이 일대를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는 ‘신도의 안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도 안을 표기 할 때 신도 내(新都內)라고 한다.

그렇다면 안팎(內外)이 있다는 개념인데 여기 안(內)에 대하여 그 밖(外)에 위치 한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두마(豆磨)이다.
두마는 팥을 많이 가는 곳이라 하여 지금도 팥거리 축제가 행해지고 있다.

   
 
  ▲ 팥거리 축제 모습  
 
이것이 과연 옳게 사용되는 지명일까?

두마(豆磨)를 표기대로 뜻으로 해석한다면 팥갈이가 되지만 이곳에는 팥 밭이 많지 않고 팥이 다량으로 생산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지명은 팥과는 무관한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 안(內)에 대하여 그 밖(外)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안팎(內外)의 개념에서 팎거리란 지명이 생성되게 된 것이고 팎거리라 부르는 고유 지명을 한자로 옮겨서 차자 표기한 것이 두마(豆磨)이다.
훈몽자회 등에 팥두(豆), 갈마(磨)로 기록되어 있으니 옛날에는 두(豆)의 훈음이 팥이며 마(磨)의 훈음이 갈이다.

따라서 ‘신도안의 밖 거리’란 뜻으로 팎거리를 훈음차 표기한 한자 지명이 두마(豆磨)일 뿐이다.
두마는 신도안의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신도 안 밖의 거리를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팥이라는 곡식은 원래 사악한 잡신이 범접하지 못하는데 쓰이는 재료이다.
그래서 팥죽이 만들어 진 것이고 새로 이사 가는 집의 벽면에 팥죽을 뿌리는 벽사관습이 전래되어 왔다.
그리고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동지에는 팥죽을 먹어 사악한 귀신의 접근을 막는 척사신앙이 강한 곡식이다.

그러면 그전에 신도안 형성에 주축이 된 분들은 누구인가?

구한말 외세의 간섭과 각종 민란 그리고 갑오농민운동으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난리를 피하고 새 세상에서 벼슬도 할수 있다는 희망으로 신도안으로 이주현상이 본격화되고 이주민 중에는 수백 년 동안 차별을 받아온 서북출신들이 많았는바 ‘정감록’이 처음 출현한 곳도 서북지역이다.
 
신도 안에 정신적인 뿌리를 둔 동학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분오열하는 과정에 탈 정치노선을 주장한 시천교가 탄생하게 된다.
내부에서 친일파와 절연한 상제교의 동학의 3대교주인 김연국(金演局)이 황해도와 평안도의 신도 3천명을 이끌고 1924. 2. 13.계룡산에 이주해오면서 신도안형성이 시작되게 된다.

이 당시 신도 안 인구가 7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도 안에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찼고, 주변마을로 이주민이 몰려들게 된다.
 
이들이 내건 탈정치화는 계룡산에 이주하는 모든 종교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이로부터 계룡산과 신도안의 혁명적 상징성이 사라지게 된다.
천황봉에는 이들이 설치한 천단(天壇)과 산제단(山祭壇)비석이 잘 보존되고 있다.

한때 이곳이 인기가 있는 참배지로 일부 군인들에게 회자된 일화가 있다.

육군본부참모차장 출신인 신모중장이 이곳에 기도한 후 사성장군인 대장에 진급하였기 때문에 일명 ‘장군바위’로 통하는데 장군진급을 앞둔 고참대령 중 상당수가 이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장군으로 진급하려면 천황봉산제단에 먼저 인사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고 한다.
 
어쨌거나 태조는 옛 귀족이 건재 하는 개성이 싫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싶어 했던 것이다.
무척이나 신도 안에서 새로운 나라를 열기를 고대했고, 1년여 기간 동안 실제로 신도 안을 수도로 선포하여 왕궁과 도시공사를 하게 되었다.
 
여기를 떠나면서도 그 아쉬움이 남아 터를 누르는 작업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아쉬운 터전을 버리게 된 실제 이유는 무엇일까?

신도안천도가 무산된 것은 계룡산신의 반대라는 천명에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 이유 일 수 있지만 당시의 기득권세력의 반대에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에서 보이는 근거가 아닐까?

정도전과 하륜은 당시의 권문세가의 대표 수장들이다.
‘쇠고집 닭고집’ 같이 당시에 기득권을 움켜지고 있는 세도가들이 적극 천도를 반대했으니 집권초기 지지 세력이 약한 태조 이성계는 이것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고 보여 진다.

신도 안 천도를 결행하다 보니 개경에서 신도 안까지 이주해오는 관료들의 주거 문제도 큰 문제였을 것이다. 대대로 살아오던 개경 집을 몇 푼의 돈을 받고 떠나왔으니 억울하다는 것이  이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솔개 어물전 들 듯’ 개경에 애착을 가진 관료들이 그 곳을 선뜻 떠나지 못하는 심정이었으니 그냥 두면 불만이 폭발할 것이라 예견한 태조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 진다.

어찌 최근에 행정수도 천도와 그리 비슷한지, 서울사람들의 반대에 결국 신도 안 일대를 최적지로 지목하면서도 어정쩡하게 공주 장기일대로 후퇴해서 그것도 어찌 될 것인지? 

당시의 정도전과 하륜 등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도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고 하면서 천도를 반대 했다.

이런 주장을 보면, 당시의 학자들의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새 왕조의 옹립에 집착했고 멸망했지만 어엿한 개성일대에 막강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세도가들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가까운 한양을 나두고 뱃길도 없는 먼 남쪽에 있는 신도 안까지 오려고 했을까

당연이 ‘못 간다.’ 이 말이 나왔을 것이다.
하물며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할 때도 토지로 인하여 많은 문제가 노출되었으니 이주해오는 관료들의 주거 문제였다고 한다.

윤사영의 상소문에는 당시 관리들의 주거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데,

“군자감승 박희종이 세자의 힘을 빌려 부당하게 집터를 분양받고자 했으니 파직하소서. 세자의 좌정 자는 세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박희종이 세자의 좌정자로 있을 때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세자를 이용하려 들었고 아래로는 사풍을 더럽혔으니 법대로 죄를 물으소서.”

이렇듯이 이주 시 관리들의 주거문제로 시끌했으니 오늘날에도 똑같지 않은가, 예나 저나 권력과 부를 가진 집단의 반대 움직임에는 어찌할 수 없는 것 같다.
결국 풍수도 아닌 것을 가지고 풍수 핑계만 되는 모습이 지금에 봐도 한심하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신도안천도가 그것이 조선 초에만 있는 주장이던가, 조선 내내 신도  안에 대한 천도주장들이 많았으니 조선말에 흥선대원군이 도참서와 정감록에 계룡산은 정씨도읍지라는 전해오는 말을 듣고,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해서 정감록을 압수해 불태우고 이 지역의 출입을 금지하게 된다.
 
정감록은 이성계와 정몽주의 실제 조상이 아닌 상상속의 조상인 이심, 이연 형제와 정감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돼 있는 대담집으로, 실제로 정씨와 이씨가 문답한 것으로 ‘정이문답(鄭李問答)’이라 하는 것이 맞을 듯도 한데 이런 명칭은 매우 드문 경우이고 정감이 더 호감이 가는 측면이 있어 그랬는지, 대개는 ‘정감의 기록’이란 뜻에서 ‘정감록’이라 불렀다.

정도령이란 칭호는 정감록에는 안 보이는데 민중들이 암암리에 진인의 출현을 기대하는 분위기속에서 이씨조선에 반대하거나 제거된 정몽주, 정도전, 정여립, 정희량 등 조선왕조에 반대하는 선봉이었으므로 새 나라는 반드시 정씨가 왕이 돼야 한다는 것이 민중의 주장이었고 그 진인이 정씨라는 예언이 조선후반기에 등장한 것 같다.

신도 안에 이런 전설도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신도 안은 우리나라 명산으로 손꼽히는 계룡산 아래 있는데, 옛날부터 이곳에 정씨가 도읍을 정하고 800년 권세를 누린다는 말이 끊임없이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그런데  칼날 같은 바위가 서있는 계룡산 갑사 쪽과 풍경이 좋은 동학사 쪽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신도 안 쪽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그때 마침  호탕하고 활 잘 쏘는 사냥꾼이 이곳을 지나다가, 조용히 살고 싶어 신도 안에 머물러 사냥을 하며 살았다.

그는 짐승을 잡아먹고 가죽은 웅진에 가서 팔아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갔는데 그날따라 노루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이 언덕 저 고개를 누비다가 노루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 뒤를 쫓는데, 노루는 그를 놀리듯 조금 도망치다 뒤돌아보고 화살을 당기려고 하면 다시 도망치곤 했다.

기어코 노루를 잡아야겠다는 결심으로, 계속 뒤를 따라 산비탈을 내려 들을 달리고 다시 언덕에 올랐다.
노루는 풀을 뜯어먹으며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화가 난 그는 마구잡이로 화살을 당겨 노루를 향해 날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노루는 틀림없이 달아나버렸는데 이상하게도 크게 울부짖는 말울음소리가 언덕 양편에서 들려왔다. 호탕한 그도 무서운 생각이 들어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자리에 눕자 곧 꿈을 꾸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고 먹구름이 쌓이더니 그 먹구름 사이로 백발노인이 노기를 띤 모습으로 나타나  "그래 너의 성이 정씨가 아니더냐."  정씨가 말을 쏘아 죽이다니. 그것도 두필의 말이나? 너는 큰 죄를 지었으니 내일 밤 안으로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이다“하고는 먹구름에 싸여 사라졌다.
생각할수록 괴이하게 여긴 그는 산신령의 노여움을 샀으니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이튿날 살던 집을 불태우고 멀리 떠나버렸다.

그 후로 이곳 신도 안에는 각처에서 사람이 몰려와 살게 되고, 부지중 주민들의 입에서는 “이곳 신도 안은 정씨가 맨 먼저 살면서 터를 닦았으니 정씨가 주인이다. 그러니 정씨 가문에서 왕이 나와 도읍을 정 한다”라는 말이 퍼졌다.

그러나 정씨가 이미 말을 쏘아 죽였으니 왕이 될 수 없다는 이설(異說)도 있다.
생각건대 이 전설이 원인이 되어 지금도 계룡산 신도 안에 정도령이 나와 도읍을 정하고 권세를 누린다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화살에 맞아 죽은 말의 울부짖음과 함께 신도 안 도읍이 물 건너 가 버렸는지, 아니면 왕 씨의 개성, 이 씨의 한양, 그 뒤를 이어 과연 정 씨의 계룡이 될는지 미지수다.    
(김석진저 ‘스승의길 주역의길 중에서)


이렇듯이 신도 안은 민중들입에서 오르내렸으니 조정대신들 사이에서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으니 19세기 말 권좌에 오른 대원군은 계룡산으로 천도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고 그는 천도를 통해서라도 이미 달아난 민심을 조선왕조에 매어두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은밀히 그 전설을 꺾고자 계룡산 하록에 도읍을 옮기려고 터를 닦는데 여기저기서 석추가 나와 ‘이곳은 정씨의 천년지택이니 이곳을 범하는  는 큰 화를 면지 못하리라’라는 유언비어에도 계속공사를 추진하다가 결국 재정난으로 공사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말이라는 것이 묘해서 한시대가 끝마치려면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니 쌀 이름도 백제 때는 백미, 신라 때에는 나(羅)락, 고려 때는 왕미(王米), 이조는 이(李)쌀, 입쌀이고, 계룡산 정씨가 도읍하면 정미, 지금은 정미소라고 하는데 이것이 끝나면 가야산 조 씨의 좁쌀이라고 하는데.....

최근에 와서 박정희대통령을 거쳐 노무현대통령시대에 다시 민족의 웅비를 깨울 수 있는 터라고 여기고 준비해 왔다. 그러함에도 지금도 그렇듯 없어진 단지 일국의 왕의 터만 매달리고 집착하는 기득권세력과 이에 동조하는 언론이 많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내 것이 손해를 본다는 생각에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속성이니 어찌하겠는가?

‘뭇 사람들의 의심은 괴변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하였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변화도 하지 못하면서 꽃과 열매를 같이 취하려 하면서 어물 쩡 된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시대에 또 다른 후회를 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무엇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일인지,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는 민족은 결코 발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와중에도 신도 안 인근에 다시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 건설이 7월20일 첫 삽을 뜨고 2030년까지 24년간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수도권의 반대, 위헌 판결 등 수많은 난항을 겪은 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로 5년 여 만에 실현되는 것이다. 2005년 제정된 행정도시 특별법에 따라 추진돼 온 행정도시는 오는 2030년까지 세계 초일류 인프라를 갖춘 명품도시로 건설된다.

특히 행정도시에 2010년 하반기 중 첫 마을 입주가 시작된 후 중앙인사위원회를 포함한 대통령 직속기관 4개, 국무조정실 등 국무총리 직속기관 12개, 재정경제부, 교육인적자원부, 건설교통부, 산업자원부 등 중앙행정기관 33개 등 총 49개 기관과 1만 여 명에 달하는 소속 공무원들까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순차적으로 이전하면서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행정중심복합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비록 기득권세력의 반발로 많은 축소가 되었지만 새로운 천도계획을 담은 엄청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부디 조선시대에 ‘1년 수도’의 미완성의 행정도시가 되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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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태조 이성계(왼쪽)와 무학대사  
 
이제 이성계의 집안을 추적해보자.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1250년 원나라 몽골군에 투항하여 그 대가로 두만강유역의 현재 연길일대에 5천호 정도의 다루가치가 되어 옷치긴가(家) 고려계 몽골의 군벌가문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닦게 된다.

옷치긴가 고려계 몽골군의 임무중 하나는 조국 고려침공을 도우며 압록강과 원산을 오가면서 원나라를 위해 수도 개경의 고려왕조를 감시하는 극악한 배역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원나라가 고려군을 감축하라는 압박 하에, 고려가 거의 국방력을 상실하게 된 다음에도 이성계 가문은 강군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세계제국의 정치적 현지경영법을 체득하고 원이나 명의 중앙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상대적인 독립성을 확보하여 가문의 지배적인 위상을 높이게 된다.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춘은 보안테무르, 큰아버지에게는 타스부카, 아버지 이자춘에게는 울루스부카라는 몽골이름이 있다. 이로 미루어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하기 전 34년 전에 태어난 이성계에게도 몽골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동북아 정세에 밝았고 명과의 전투, 티무르와의 전투 등 일련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고 그래서 위화도 회군도 결행할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원의 멸망 후 우리나라에는 조선이 중국에는 명나라가 서게 되었다.
당시 몽골제국은 고려를 인정했고 고려왕조와 함께 힘을 합쳐 몽골 칸 제국을 세웠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몽주가 단심가를 불러 목숨을 걸고 이성계 일당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원종이후 고려왕조의 역사적 정통성이었으니 결국 원에 충성하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밖에 없겠다.      
<주채혁저 순록치기가 본 조선·고구려·몽골 중에서>

그러면 무학 대사는 그 당시 어디에 있었을까?
 
역시 세계의 중심지가 원나라 시대에는 연경이었으니 무학 대사도 예외 일 수 없었으리라.
원나라 수도인 연경 이곳에 26세의 기백 있는 수도승과 20세의 용기 있는 청년들이 있었으나 이들이 만나게 된 경위는 구체적으로는 없다.

단지 무학의 스승을 통해서 인 것 같은데 역사적 기록과 전래되는 이야기 속에서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무학은 1353년 공민왕 때에 원나라 연도로 간다.
무학 대사도 유명한 스승을 만나게 되니 그 분들이 지공과 나옹이다.
지공스님은 인도분으로 인도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가섭존자의 108대 후계자로 소위 정통 중의 정통 스님이며 가섭불의 법통을 이은 분이시다.

중국 원나라 시절을 보내시다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오셔서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천보산 자리가 마치 스님이 머리를 깎았던 인도 나라난타 절 주변의
산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제자 나옹스님에게 이야기하여 이 절에서 주석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회암사이다.

나옹스님은 연경에 도착하여 절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화상을 만나 크게 깨달을 배우게 되고,
무학 대사는 인도 승 지공을 만나 도를 인정받고 이듬해는 법천사(法泉寺)에서 고려인 출신의 나옹을 만나 수도 하다가 1356년 나옹을 하직하고 귀국하였으며, 나옹 역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렀다.

1376 년(우왕 2)회암사(輦輹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은 그를 불러 수좌로 삼고자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그해 나옹이 입적하자 전국의 명산을 유람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여주에 가면 신륵사가 있다.
이곳의  조사당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그의 스승 무학 대사와, 인도스님인 지공대사, 그리고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선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있다.
조사당 안에는 세님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고, 앞마당에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다.
이를 보면 훌륭한 스승과 스승 아래에 훌륭한 제자가 나오는 법이니,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위인은 없는 것 같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와 관련된 인연이 느껴지는 일화가 있다.

당시 원나라에는 있던 나옹대사가 무학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한 산소 자리를 가리키며 “그 위 터는 왕휘지 지이고, 아래쪽은 장상이 날 자리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마침 이성계의 집 청지기가 그 곳을 지나다가 그 말을 듣게 되어 이성계에게 전하자 이성계는 나옹대사를 찾아가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나 나옹대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때 나옹에게서 수학을 하던 무학이 스승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그곳에 쓰고 세월이 지나 왕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로 미루어 이성계집안과 나옹대사간에는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스승이 말하지 않은 것을 굳이 이성계에게 말하여 주었다는 것은 이미 깊은 인연 관계가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일화이다.

그리고 무학 대사와 이성계가 고려 땅에서 만나는 일화도 있으니, 서산대사가 쓰신 ‘설봉산 석왕사기’나오는 글이다.

고려 우왕 10년(1384)에 무학 대사가 함경도 설봉산 석왕사 토굴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 무관으로 있던 이성계는 이상한 꿈을 꾸고 꿈이 하도 신기해 설봉산에 해몽하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없고 딸이 있는데 이 딸이 이성계의 꿈을 100냥에 사면서 당신 꿈은 “개꿈이다”라면서 침을 세 번 뱉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딸이 이성계 꿈 산 것을 알고서 딸을 때리고 이마에 침을 밷으 면서 돈을 돌려주고 꿈을 물렀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성계를 보더니 “난 해몽 못하겠소, 다른데 찾아가시오.
이안에 들어가면 설봉산 밑에, 삼방 석왕사 위에 석굴이 있는데 8만대장경만 외우는 중이 있으니 덮어놓고 살려달라고 절만하시오. “

그분이 무학 대사인데, 그래서 이성계가 찾아가 밖에서 절만하고 있는데 거들  떠 보지도 않는다? 이성계가 “정 이렇게 냉대하면 목을 치겠노라“하니까 무학 대사가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 해몽하러 왔다니까 ”해몽은 이 앞에 해몽하는 할머니가 따로 있잖소?“ 이성계가 그 할머니에게 갔더니 자기는 못하겠다고 이리가라고 합디다, 해서 왔다고 하니, 무학 대사가 “그러면 꿈 이야기나 해보시오”

그래서 꿈 이야기를 하는데 ,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석가래 만 3개 달랑 지고 나왔소.
나오는데 닭 새끼들이 꼬기오. 하고 울고, 또 사방에서 꽃이 송이송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소. “ 라고 하자.
무학은 “석가래 3개지고 나온 건 임금 왕(王)자요, 닭이 고귀(高貴)오 하고 울었으니 왕이 되는 건 틀림없소.
꽃 떨어지는 것은 낙화이종내어실(落花而終乃於實)이라 그러니 고려는 이제 망했소. 고려는 다 쓰러져가는 집이오. 인제 내려가시오“하고는 황해도 신기 곡산 고달산에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김일훈저 신의원초 중에서>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된 뒤 경기ㆍ황해ㆍ평안 감사를 시켜 무학 대사를 찾도록 한다.
새 왕조가 창건되면서 유명 무명의 유생과 승려들이 찾아왔지만 무학 대사는 종무소식이었다.
그래서 3도 감사에게 화상을 그려 돌리면서 무학 대사의 행방을 찾도록 한 것이다.
3년째 되던 해 곡산 고달산의 초막에 은거하고 있던 대사를 간신히 찾았다.

황해감사가 평안감사하고 의논해서 모시고 가자는데 말을 안 들어 이성계가 직접 와서 모시고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태조와 대면하게 되고 왕사(王師)가 되었다.
1392년(태조1)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 者)'라는 호를 내렸다. 엄청나게 길다.

이정도 면 태조가 무학을 배려하는 것도 보통이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 태조가 그러나 1402년(태종2) 다시 함경도로 가 돌아오지 않았을 함흥차사(咸興差使)시절에 무학 대사가 가서야 겨우 서울로 오게 할 정도로 우정이 깊은 사이였던  것이다.
결국에는 이방원을 임금으로 인정하고 무학 대사와 함께 불교에 정진하며 1408년에 세상을 떠난다.

무학이 금강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태종은 그의 사리를 회암사로 모시도록 지시를 했다.
회암사에는 태조가 무학을 위해 세워둔 부도가 있었다.

살면서 변하지 않은 이러한 진정한 우정으로 두 사람은 새 시대를 열었고, 그러한 점에서 이들의 우정은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실력을 갖춘 무학과 무인으로서의 태조는 두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마주 앉은 ‘은행나무 격이라’ 조선을 세울만한 큰 그릇이었던 것이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20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우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연 이성계와 무학 대사의 향기로움이 배인 곳

   
 
  ▲ 계룡산 천왕봉  
 
계룡산(鷄龍山)!
우리가 늘 부르고 보아왔건만 845m의 이 산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금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의 명산! 풍수지리상의 최고 명당!
많은 미사여구를 받고 있지만 계룡산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아직도 살아있는 많은 전설을 그저 가슴으로 품고만 있다.

계룡산은 삼한시대에는 천태산(天台山)으로 불리다가 백제 때 계산(鷄山),  계람산(鷄藍山), 옹산(壅山), 구룡산(九龍山), 용산(龍山), 화채산(火彩山)이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고려 때 목화가 들어오기 전에 옷감으로 많이 쓰였던 삼(麻)이 이산에 많았다는 기록이 있고 껍질을 벗긴 삼대를 겨릅'이라 하기 때문에 겨릅 산이라 했다.

이 겨릅 산이란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 한자로 음역되면서 계립(鷄立)으로 되고 또 '립'이 비슷한 소리로 뜻이 좋은 용(龍)으로까지 발전해서 계룡산이 되었다고 보는 분도 있다.

이성계가 조선조를 창건할 무렵 무학 대사가 계룡산의 지형을 금계 포란형(金鷄抱卵形), 비룡 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해서 두 풍수적 형국에서 계(鷄)와 용(龍) 한자씩을 따 계룡산이라 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의 9백년 운은 서대궐은 무성(無城) 5백년, 동대궐은 유성(有城) 4백년으로 서대궐은 금계포란이고 동대궐은 비룡농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 속에는 금계는 부의 상징, 비룡은 현명한 임금을 의미하는 말이니 이는 조선의 창업자인 이성계와 당대의 사상계를 풍미한 무학 대사와의 만남이 있었음을 알리는 것이니,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밤에 금척(金尺)을 얻는 꿈을 꾸었을 때 송도로 돌아가 빨리 임금이 되라고 위화도회군을 종용한 사람이 바로 무학 대사이다.

어느 따스한 봄날, 태조와 무학 대사가 서로 농담하면서 희롱삼매에 들었을 때 태조가 먼저 말하였다.

"누가 농담을 잘 하는가 내기를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대왕께서 먼저 하십시오"

그래서 태조가 먼저 농담을 걸었다. "내가 자세히 스님을 쳐다보니 꼭 돼지처럼 생겼습니다 그려."
무학 대사 왈, "
제가 보니 대왕께서는 부처님처럼 생기셨습니다."

대사의 대답에 태조는 뜻밖이라는 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같이 농담을 하지 않습니까?"
대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님으로만 보이는 법입니다.”

두 사람은 함께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한다.
 
‘용 가는데 구름 간다.’고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다시 차길진 선생이 쓴 영기로 보는 계룡산 중에서 일부 글을 원용해 본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은 요즘도 계룡산 신도 안에 자주 들른다. 신도 안이란 말 그대로 600여 년 전 이성계가 일찌감치 조선의 수도로 점찍었던 곳이다. 그런데 10개월에 걸쳐 대궐 터까지 닦아놓은 상태에서 조선의 도읍은 갑작스레 한양으로 정해졌다. 무슨 사연이 숨어 있는가?

이성계는 왕이다.
절대 홀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을 초혼하려면 경호원들의 요란한 구둣발 소리를 감수해야 하듯, 태조 영혼의 행차에는 정도전, 하륜, 그리고 무학 대사 등 개국공신들과 국사(國師)가 동행한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는 필자에게 ‘~해라’체를 쓰고, 신하들은 ‘~하오’라고 한다.

“왜 계룡산을 포기하고 500리 나 떨어진 한양으로 가셨습니까.”
좌중을 둘러 본 태조가 털어놓는다.
‘이 사람들(정도전, 하륜)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기에....’
 
“그렇다면 사연봉(四連峰) 태조대왕 동굴은 무엇인가요.”
‘궁을 짓는 동안 기도하던 곳이었지. 그런데 기도하다가 계룡산 할머니를 만났어. 할머니가 반대하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네.’
계룡산 산신은 여성이라는 세인들의 믿음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할머니 신령은 ‘계룡산의 임자는 당신이 아니라 다섯 가지 덕을 갖춘 선인’이라며 이성계에게 공사 중단을 명했다고 했다.
“계룡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날 신인(神人)이 새 나라의 수도로 정해 800년간 쓸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 신인은 바로 언제나 숱한 추측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정도령’이다.

할머니 산신이 이성계를 무작정 내몬 것은 아니었다.
한양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동시에 500년이라는 조선왕조 수명도 예고했다고 한다.

무학 대사도 한 마디 귀띔했다.
‘대왕이 고려를 멸하는 과정에서 피를 너무 많이 불렀다는 점도 할머니는 못마땅해 했다.
그래도 태조와 나는 아직까지 아쉬움이 남아 한양에서 달(月)을 바라보다 흥이 오르면 여기로 온다.’는 요지의 말 이였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런 분이다.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인 23.5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세계의 핵심을 주관하는 여신답다.
하지만 현 시점 계룡산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개발이 할퀴고 있는 상처들로 몸이 몹시 아프다.
아물만하면 또 파고든다.
그래서 할머니가 유성 후암정사와 국립현충원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이성계를 비롯한 최고 권력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야욕을 숨기지 않은 외세를 물리쳐온 계룡산 할머니다.
'할머니는 말하셨지 욕심을 버려라. 웃으면서 사는 인생 자, 계룡산이다.'”
<2005년11월12일자 주간조선>

이런 것을 보면 ‘팔자 도망은 독 안에 들어도 못 한다’다고 하듯이 제가 타고난 운명에 따라야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무학 대사는 이성계를 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해 최선의 일을 다 한 것 같다.
무학 대사는 실제로 천문과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우암 송시열이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이었고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고 한다. 그만큼 후학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분이다.

그렇지만 하지 말아야 했을 일을 했으니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고, 수도를 한양으로 최종 결정하면서 왕인 태조 이성계 가문과 한양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금정(金井)에 다가 돌을 덮어 계룡산의 혈맥을 끊었다.

은색의 바위에 맥을 끊는 기구인 ‘붉은 구슬을 넣어 만든 은색덮개’로 흐르는 물이며 계룡산의 맥인 곳을 덮으므로 천도에 역행하는 비방을 쓰게 된다.
이곳이 계룡산 천왕봉에 있는 압정사(壓鄭寺)라고 한다.

무학 대사는 본인이 저지른 일을 그가 지은 청구비결(靑丘秘訣)에 이렇게 후회하고 있다.
“돌로써 금정을 덮었는데 어찌하여 옳게 보지 못 하는가”

조선시대 유학자인 서거정선생은 이 우물을 뚫으면 계룡산의 돌은 다시 푸른색으로 변해서 어지러운 세상은 금색이 튀어 나오듯 밝아진다고 하였으니, 계룡산의 혈맥을 끊는 지나친 행위를 하였으니 이를 어찌 하겠는가 ?

태조 왕건이 이 일대의 지맥을 누른 후 무학 대사가 큰 혈맥을 끊었으니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쇠말뚝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작은 혈맥의 기운마저 끊었으니 계룡산의 운명도 가련할 뿐이다. 

이런 글을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뜻이 있다면 다시 우물을 여는 것도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상징적인 국운융성의 포퍼먼스로 해 볼만 하지 않은가?
천왕봉에 있었던 철탑만 옮겨간 것으로 그리고 일본인이 저지른 쇠말뚝만 뽑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자연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자연이 건강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도 건강해질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사실 이 지역은 고려가 나라를 세운 후 터를 누르기 위해 각종 부처입상을 세워 기운을 죽여 오다가 조선 이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함에 따라 조선 건국 시부터 작심을 하고 터의 기운을 없애려고 했으며 정여립의 모반 이후부터는 이 지역을 폐허화하다시피 방치하여 오게 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그 도가 더욱 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 일본인들은 계룡산 구석구석의 혈맥만 정확히 골라 쇠말뚝을 박았다.
일제강점기 중 일본의 새 수도 최적 후보지는 역시 계룡산으로 보고 일제는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를 대전으로 옮기면서 부여에 자신들의 신궁을 만들 정도로 계룡산일대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패망하고 말았지 않은가?

   
 
  ▲ 천마산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곳이 한군데 있는데 양정 고개에서 시청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천마사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여기가 예전에는 법성사(法性寺) 라고 불리었는데 이성계와 무학 대사가 만난 곳이라고 한다.
무학 대사가 이곳 산을 천마산(天馬山)으로 명명했다고 하는데 개태사가 있는 뒷산이 천호산인 것을 보면 그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산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 천마사 대웅전  
 

   
 
  ▲ 천마사에 있는 옥석불상  
 

   
 
  ▲ 높이 0.8m의 석가모니상인 옥석불을 설명하고 있는 간판  
 

현재는 천마사로 불리는 데 이곳에 원래 신도 안 봉안사(奉安寺) 대웅전 삼불중 하나인 옥석불 (玉石佛 문화재자료 85호) 이 있다. 1984년대 계룡대 건설로 봉안사 폐쇄 시 이전되어 온 0.8미터 항마촉지인불상이다. 
조선말 조성한 것으로 재료는 석고이나 옥으로 만든 조각 같이 정밀하고  사실적 조성된 불상이다.

그저 멋이 있다.

아마 우리나라 땅에 얽힌 전설을 살펴보면 무학 대사가 등장하지 않는 곳이 드물 것이다.

   
 
  ▲ 농소정의 모습  
 


   
 
  ▲ 조선태조 이성계가 마셨다는 농소정  
 

여기서 다시 농소리로 발길을 돌리면 농소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물이 참 많이 솟아나는 곳이다.
수량도 엄청나게 많고 물맛도 좋고 하니 들려볼만하다.
이 물을 옛적에 태조 이성계가 드셨다고 하는데 그 옆에는 선돌이 하나 누워있다.
여기도 기복신앙이 배인 곳이라 선돌은 남근석같이 보이는데 글쎄, 한번 벌떡 세워놓고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고 한다. 휠씬 멋있을 것 같다.

대외활동이 무척 많은 조효연 사장이 입암리 안쪽 끝에 있는 배재대학교 소유의 임야에 X지샘이라는 물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물맛은 괜찮았지만 글쎄, 좀 다른 것 같다.
아무렴 임금님이 마신 농소정 물맛에 비하면 별로 인 것 같았다.

   
 
  ▲ 남자의 거시기 같이 벌떡 서 있는 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입암리'. 사진 속의 돌이 바로 그것이다.  
 

   
 
  ▲ '왕의 처소가 된다는 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왕대리  
 

입압리(立岩里)에는 남자의 거시기 같이 벌떡 서 있는 돌이 있다고 해서 입압리라고 했다고 하는데 인근에 왕대리(旺垈里)는 왕의 처소가 된다는 터인지라 이곳의 지명도 재미가 있다.  

 
 
 
  ▲ 무학대사의 지팡이가 자라 괴목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괴목정  
 
하여간 무학 대사와 이성계를 찾아다니다 보니 무학 대사가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를 꽂아서 자라 괴목이 되었다는 괴목정 등 신도 안에는 그들에 관한 많은 전설이 널려있었다.

부연하면 여기에는 전주이씨 들이 참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기에 왜 그런 가 했는데 조선 초 이성계의 주변 집안사람들이 ‘횃불이 비치는 장소는 전주이씨 땅’이라고 해서 전부 전주이씨 땅으로 했다고 한다.
이 말은 금천건설을 운영하는 이영구 사장으로 부터 들었다.

사람은 키 큰 덕은 입어도 나무는 키 큰 덕은 못 입는다고, 권력과 재력은 역시 병행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 땅이 잠자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북적되고 있으니 영기가 서린 땅은 값을 올리면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쌀고리의 닭이라’고 생각지도 않게 큰 부자가 되면 그 씀씀이도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법이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는데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이승에서의 짧은 동안의 사귐일지라도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은 죽어서도 저승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니

이성계와 무학의 만남이 조선의 건국에서만 만남이 있었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김일부 선생이 계룡산에서 공부 할 당시 우리나라는 몇 차례의 전쟁을 치루면서 민심은 피폐해지고 서구열강과 일제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여성과 하층민의 삶은 형편없었고 아무런 희망이 없어 엄청난 시대적 모순에 몸부림치고 있었을 때이다.

이런 시절에 새로운 시대를 내다보고 다가올 시대를 ‘정역팔괘(正易八卦)’라는 단순한 프로그램에 압축시켜 표현했으니, 지구상의 축의 변화에 따는 총체적인 변화가 따르고 지축이 바뀌므로  후천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하였다.

억압과 패권, 상극의 시대에서 평화와 조화, 협동과 평등의 시대를, 남성우위에서 여성의 지위가 우월해지는 새로운 시대, 노예의 해방, 부녀자들의 해방 ,남녀평등,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도래와 사회개혁의 대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구원의 희망을 안겨주려고 했었다.

이것이 강증산의 상생과 최제우의 동학혁명을 거쳐 커다란 민주주의의 한 뿌리를 형성했으면서도 아깝게도 조선말 기득권에 사로잡힌 수구적인 권력집단의 이익도모와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군을 끌어들이고 결국 그 뜻이 꺽 이면서 커다란 사회혁명까지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들이 보고 이루고자 했던 후천의 실제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은 그 후 유럽과 미국사람들이다. 평등과 자유와 창조와 행복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사회’가 그것이다.

그 당시 이러한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나라는 한국뿐이었으나 그것이 실패로 끝나게 되었을지라도 새로운 문명의 메시지는 동학을 통해 그것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더 큰 형태로 승화되게 된 것이다.

어렵게 민주주의를 얻었지만 김일부 선생이 외친 평등과 자유의 세계는 그 이상의 영성적이고 심미안적인 질적인 민주주의를 거쳐야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니 감성, 형제애, 솜씨 등 우리가 가진 응축된 힘을 새로운 영성의 미학으로 문화로 예술로 승화시켜내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이고, 김일부 선생이나, 강중산, 최시형, 최제우, 박중빈, 전봉준, 동학 그리고 당시의 의로운 선조들이 진정으로 원하고자 했던 가슴과 영혼이 살아나는 새로운 시대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한바다 著 3천년의 약속 중에서...>

우리가 짧은 사이에 이러한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애초부터 간직 되어 온 우리의 민주주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발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이를 위해 광주민주화운동과 6.10만세를 거치는 동안에 민주화를 위해 희생되신 모든 분들의 영혼에 감사를 드려야 할 차례이다.

김일부, 이 분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가슴을 열어주고 녹여줄 수 있는 진실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미래의 희망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힘이 있었던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계룡산은 이러한 위대한 사상이 나올 수 있는 에너지 터인 것이다.  

김일부 선생이 여성지위의 우월시대를 제시한 이래 동학의 최시형선생은 여성들을 중시하여 ‘바로 저들이 한울’이라고 선언했고, 강증산선생은 태안읍내에서 좁은 길에 들어섰다가 한 여인과 마주치고는 그는 여인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고 한다.

이 때만 해도 여자들이 길을 비켜야 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인지라 그 여자는 못내 송구스러워하며 길을 지나갔다. 제자들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지난 선천시대에는 여자가 길을 비켜주었지만 앞으로 올 후천시대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길을 양보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당시로는 대단한 혁명적인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요즈음은 여성우위의 후천시대가 훌쩍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4월 27일 국회에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호적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고 호주를 중심으로 가(家)단위로 호적을 편제하던 방식을 국민 개인별로 등록기준지에 따라 ‘가족관계 등록부 ’ 가 만들어져 대법원에서 이에 필요한 규정을 정비했으니 여성분들은 호주제 폐지가 가져올 양성 평등사회에 대한 설레는 기대감이 클 것으로 보인다.

여성분들이 이러한 남녀평등을 넘어선 여성 우월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고 이러한 ‘호주제 폐지는 단순한 신분등록제의 변화가 아니라 부계혈통제가 생물학적, 정치적, 도덕적으로 틀려서 없앤 거구나.’ 하면서 본적 없는 본적아 사라져라, 나는 나, 성씨는 자유롭게라면서 쟁취감에 도취되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가정의 평화, 자식의 교육문제, 남녀 간의 협동을 도외시 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된다.

이제는 ‘딸 셋을 키우면 기둥뿌리가 팬다’, ‘시집살이 못하면 동네 개가 다 업신여긴다’, ‘딸자식 치운다’라는 소리가 없어질 터이고 그동안 억눌려 왔던 여성들이 폭발할 시점도 되었으니 이제는 술 좀 자제하고 궁중마님에게 잘 보여야 하겠다.

그렇지만 여성분들은 이러한 미래를 보고 이를 실천하려고 했던 훌륭한 선조 분들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보고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시간이 난다면 가족화합 차원에서 최제우를 모시는 ‘수운교’도 찾아보기를 권한다.

   
 
  ▲ 최제우를 모시는 '수운교'의 모습. 이곳은 계룡산맥의 줄기인 금병산 아래 자운대가 있는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수운교의 전경(사진 왼쪽이 수운교종각, 나머지가 수운교 도솔천), 수운교종각, 수운석종, 수운본부 입구의 모습    ⓒ오마이뉴스  
 
계룡산맥의 줄기인 금병산 아래 자운대가 있는 초입에 있으니 찾기가 쉽다.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별나게 되어있고 건물내부의 배치형태도 특이하고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며 때리면 쇠 소리가 나는 ‘석종’이 특이하다.

쇠 소리 나는 돌은 철분이 많아서 나는 소리인데 경남 밀양시 만어사에는 커다란 물고기 모양의 돌이 서있고, 주변골짜기 너덜지대에는 가득 메운 돌들이 있는데 이 돌들을 작은 돌로 두드리면 맑은 소리의 종소리가 난다.

이렇듯이 우리에게 위대한 사상을 남긴 김일부는 그러면 과연 득도한 후 어찌 되었을까?

차길진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따금씩 일부가 천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며 섭섭해 한다. 국사봉에서 정역에 천착, 후천개벽의 이치를 깨친 반인 반신(半人半神)급 학자 김일부(1826~1898)를 보고 싶다는 얘기다. 생전의 김일부를 상제(上帝)와 만나게 해주는 특혜를 베풀었을 정도로 할머니는 그를 아낀다.”
결국 그는 무언가를 얻어 후천시대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의 묘지는 현재 당골에 있다.
논산시 양촌면 남선리 당골 마을에는 예전에 충남대 총장을 역임하신 이정호 박사 등이 앞장서서 묘지를 조성해 놓았는데 한눈에 보아도 좋은 자리인 것 같다. 뒤 주봉이 오도산(五道山) 이다.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당골 마을의 촌로 한분이 탁 쪼그리고 않으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이곳에는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예전에 어떤 스님한분이 지나가면서 이곳에 쉬더니 이 마을이 앞에 흐르는 논산 천과 함께 활궁의 시위대에 해당하여 인물이 많이 나겠네요. 하고는 가버렸어.

그래서 후에 마을회관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이 말을 했더니 뭐 그러냐고 면박을 받았는데 그것이 그게 아니더라고 이곳에는 김일부 선생만 나신 것이 아니라 송영무 해군참모총장이 나셨고 또 건양대학교를 설립한 김희수 총장의 부모묘역이 바로 이 옆에 있어요. 매년 풍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보고가곤 하지요. 이곳이 당골인 이유는 옛날에 여기 마을 앞으로 큰물이 들어차서 배가 다닐 때 이 앞산에 배를 묶어두었다고 합디다. 그래서 배를 묶어두는 당골이라고  했다지요”

‘당골’이란 지명은 아무래도 단군과 관계가 있는 듯 한데 자랑할 만도 한곳이다.
계속 쪼그리고 듣고 있으려니 재미는 있지만 쪼그리고 않는 자세에 익숙하지 않아 그만 내려 왔다.
언제 시간이 나면 한 번 더 찾아가 좋은 말씀을 들어보아야 하겠다.

부연하면 이곳 남산리는 교사선생님 40여분이 배출되어서 마을 자랑거리가 된 곳이기도 하니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는 참 인물이 많이 나는 지역인 것 같다.

시간이 나면 한번 들러서 좋은 산기운도 마시고 김일부 선생 묘소 주변에는 둥굴레가 만개했으니 적당히 취사해서 차를 끓여 먹어도 좋을 듯하다.

이쯤 했으면 이제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시던 향적산방(香積山房)을 둘러보아야 하지 않을까?

충남대 총장을 지낸 이정호(李正浩)선생도 1950년대 중반에 이 터에다 작은 사택을 지어놓고 제자들과 함께 정역공부를 했는데, 이 향적산방 앞에 보이는 산이 아주 보기 좋은 토산이다.
지금도 옛집이 남아있다. 예전에는 산제당(山祭堂)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는 가끔 김일부 선생과 관련된 모임이 열린다고 하는데 이곳을 양정  고개 초입에 계룡암이라는 암자를 가지고 있었던 ‘임덕순’보살이 지키고 있다.

 
 
 
  ▲ 거북바위와 용바위  
 
이곳에 거북바위동굴과 용바위가 있다.
김일부 선생은 이곳이 계룡산의 중심이고 한국의 중심이자 나아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했다.
거북바위는 바로 김일부 선생이 크게 깨달은 장소로 반 동굴로 되어있다.

여기가 지구역사가 생긴 이래  모든 운명의 파동이 공명으로 전해 내려오는 장소라고 해피타오라는 정신적인 단체를 이끌고 있는 ‘한바다’가 말한 곳이다.

짬을 내서 조용히 동굴 속에 앉아 명상에 잠기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지나치게 콘크리트로 내부를 정리 해놓았는데 좀 어색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평반에 물 담은 듯’ 시원하면서도 차분한 마음이 든다.

아래 용바위는 누군가 기다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 정역연구자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렇듯이 김일부 선생이 가르친 사상은 동학을 통하여 세계에 알려지고 민주주의 형성에 큰 모템이 되었고 이것이 현재에도 우리의 정신사적인 모태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와 이를 실천할 동학사상을 배태한 정신사적으로 위대한 사상을 가진 학자를 쉽게 지나치는 세태에 한숨이 나올 법도 하지만 이제라도 이분의 뜻을 기리고 고양시키는 것은 계룡시민이 할 일이 아닐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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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학의 재야권 거두 김일부

김일부는 호로 본명이 김항(金恒)이다.
1826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당골에서 태어났다.

그러고 보면 광산김씨 가문에서는 자랑할 만한 인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조선유학의 제도권 거두로 조선중기 이후 송시열 등을 가르친 스승으로서 국가의 존망을 좌우지했던 김장생, 김집부자(父子) 그리고 재야 권 거두로 김일부 선생이 있었다.

김장생, 김집부자는 기호학파의 영수로서 예학을 중심으로 커다란 유학의 기둥을 완성하신 분들이고, 특히 김일부 선생은 정역을 완성하여 이분이 돌아가시자 영남지역에서 내 노라 하는 유생들은 천리가 멀다 않고 문상했다고 하며, 전라도 진안지회(鎭安支會)에서는 김일부를 성인으로 추앙했던 찬양문(讚揚文)이 있을 정도이니 위대한 인물들을 배출한 저력은 무엇일까?

김일부는 젊어서 옛 조선의 선비집안이 그랬듯이 성리학과 예학에 빠졌으나 훌륭한 스승을 만나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고 한다. 그의 스승이 유명한 연담 이운규(李雲圭)이다.
동학의 씨를 뿌린 최제우, 불교혁신의 뿌리인 남학의 김광화, 그리고 김일부가 모두 그 분의 제자들이니, 역시 위대한 분들은 훌륭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법인 모양이다.

스승은 김일부에게 서경과 주역의 다독을 권하면서 “맑은 것을 보는 데는 물만 같은 것이 없고, 덕을 좋아함은 어짊을 행함이 마땅하다. 달빛이 천심  월에서 움직이니 그대에게 권하노니 이 진리를 찾아보시게나. (觀淡은 莫如水요 好德은 宜行仁을 影動天心月하니 勸君尋此眞하소)”라는 한 토막 시적인 화두를 주었다고 한다.

김일부는 영가무도의 정진과 더불어  해와 달의 변화에 대한 복잡한 이론들을 종합하고 관통하여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의 진리를 깨닫고, 내놓은 결과가 바로 정역팔괘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역의 완성에 이르기 까지 일부선생은 독특한 수련법을 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영가무도(詠歌舞蹈)’이다.

무형문화재 27호인 이애주 교수는 “예로부터 몸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길게 늘여 노래하며 춤추고 뛰는 것이 곧 ‘영가무도’로써 그 행위가 담고 있는 의미는 우주 자연의 변화 과정이며 자연의 이치이다.”라고 말하며, “단기고사에 보면 ‘노인은 영가하고 아이는 무도 한다’라는 말이 있어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가무백희가 나오지요. 이것이 바로 영가무도입니다. 음악과 노래, 춤이 완전히 일치되는 상태지요. 선(禪)과 춤과 음악이 결합된 치유의 춤, 평화의 춤 입니다”

이와 같이 영가무도는 우리 민족에게서 발단하여 전해오다가 그 맥이 끊긴 것을 김일부 선생께서 제창하신 것이다. 김일부 선생께서는 사색 중 영감을 얻으시어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소리 '음 아 어 이 우’를 그대로 불렀을 뿐이며, 또한 아니 부르고는 못 견딜 만큼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기운을 독창적인 창법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열중 하셨다.

그의 출생지인 충남 논산군 양촌면 남산리 당골 잔디가 사그라지도록 뛰며 노래하여 사람들은 그를 광인이라 여길 정도였으며 심지어는 문중 족보에서 파헤쳐질 정도로 온갖 비아냥거림을 받아 왔다고 한다.

그러나 주역을 완성하는 '정역(正易)'을 선포하자 그 간의 비웃음은 사라지고 그를 성인으로 받들게 되었다 한다. 이곳에서 창시된 정역은 이후 우리나라 신흥종교가 불꽃처럼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한국유학의 새로운 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영가무도를 오래하면 오장에 가벼운 감전과 같은 상쾌한 현상이 생기고 궁둥이가 벌벌 떨리기도 하며 또한 이마가 짜릿짜릿하며 머리가 온통 덮어씌우는 듯 한 감각으로 기분을 매우 유쾌하게 한다고 한다.

갑자기 김도향이 TV에 나와 ‘항문을 조입시다.’라고 하는 노래가 왜 떠오르는지...

“지하철에서 또는 버스에서/쓸데없이 잡담 말고 졸지도 말고/편안하게 눈감고 고요히 앉아/다른 사람 모르게 명상하듯이/조용히 항문을 조 입시다/너무너무 화날 때/너무너무 힘이 들 때/너무너무 슬플 때/너무너무 괴로울 때/정신 차려지고 기분이 좋아져/가끔씩 조이면 정말 좋아/조용히 항문을 조입시다.

인터넷 할 때/TV 볼 때/너무너무 어깨에 힘주지 말고/편안하게 허리 펴고 고요히 앉아/다른 사람 모르게 명상하듯이/조용히 항문을 조 입시다/사랑싸움할 때도/미운 사람 있을 때도/스트레스 받을 때도/정력제가 필요할 때도/정신 차려지고 기분이 좋아져/가끔씩 조이면 정말로 좋아/조용히~ 조였다 놨다/조였다 놨다/에브리바디 항문을 조입시다.”

이것도 영가무도의 변형인가!
이것은 춤추는 것이 아니라 똥꼬 만 벌름벌름하는 것인데, 하긴 이것도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원리가 있는 운동이겠지!

영가(詠歌)와 무도(舞蹈)는 뗄 수 없는 관계인지라 흥겹게 노래 부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춤을 추게 마련이지만 이 모두는 정역사상을 근거로 수련해야만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고 정역사상을 근거로 삼지 않은 영가는 맹목적이고, 영가가 뒷받침되지 않는 정역사상은 무의미하다고 보여 진다.

시간이 나면 정신세계사에서 주관하는 영가무도와 관련된 강좌도 참석해본다면 정신생활의 윤택함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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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봉은 계룡산 남쪽의 봉우리로 계룡시 향한리와 도곡리 일대의 산을 말한다. 해발 574m  
 
여기서부터(향적산 묵집) 국사봉의 시발점이 된다.
지금은 새로 도로를 내느라 부산하기만하다.
예전의 계곡을 잘 살리는 형태로 했으면 좋으련만 여기도 계곡을 죽이는 기술은 어찌하겠는가!
우리나라는 요사이 무엇이든지 죽이는 기술이 많이 발전하고 있다.

   
 
  ▲ 국사봉 등산코스  
 

 

 
 
  ▲ 계룡시가 시로 분리되기 이전 논산시에 포함되었을 당시의 국사봉 안내도. 안내도에 개인 집이 표기된 것이 특이하다.  
 

이곳 향한리(香汗里)는 향기로울 향(香)과 땀 한(汗)이 어울려져 향적산과 향한면의 이름을 따서 불리었다한다.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라는 뜻이 아닌가?
(안초생각: 香은 土 즉 氣를 말압니다. 그렇다면 계룡, 향적, 향한 등 다른 지명 의미도 술술 풀리겠지요.^^)
향적산, 그리고 국사봉은 아담하고 등산하기가 편해 많은 분들이 산행을 하고 있는 곳이다.

   
 

  ▲ 무상사의 내부모습. 이 절에 가면 외국인 도반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블로그(lempicka33)  
 
이곳에 그 유명한 ‘무상사’가 있다.
한국불교의 해외포교에 앞서온 숭산선사가 전 세계의 모든 불자들이 와서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국제선원을 계룡산에 새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터를 찾던 중 현재의 무상사 자리가 이 산의 주봉으로부터 내려오는 기의 중심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선택하였다는 곳이다. 

국사봉은 계룡산과 대둔산의 중심에서 계룡산에 들어가는 관문역할을 해오는 산으로 바로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던 곳이 아닌가?     

이 절에는 외국인 도반들이 참 많이 보인다.
가끔 산행 길에 나설 때면 마주치는데 마음의 안정을 구하고자 고국을 떠나 머나먼 외국에서 이것까지 와서 수행을 하는 것을 보면 경외로움이 앞선다.

얻고자 보고자 하는 것이 마음인데 이들이 찾아가는 것은 무엇인지, ‘남이 장에 가니까 거름지고 나서’는 세상에, 강남에 가서 살지 못해서, 미국사람이 못되어 안달 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세상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에 숙연해진다.

   
 
  ▲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저술한 현각스님 ⓒ법보신문  
 
이 절에 TV 다규멘터리 ‘만행’으로 널리 알려진 벽안의 선승이 있으니,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진리를 찾아 정진하면서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내놓은 그 현각 스님이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종교를 뛰어 넘어 가정과 명문대학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숭산선사를 만나는 과정을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리오.

더구나 내가 잘 아는 건축사 정연배는 "이분은 거꾸로 캐나다로 꿈을 캐러 갔다" 며 이 절의 건축비 문제로 딴소리를 하고 있으니 ‘도(道)가 돈’이라는 세상 이치가 알듯 말듯 알쏭달쏭해지면서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거북바위와 귀룡정사에 들기 전 우측 야산을 지나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그곳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한숨을 돌리고 언덕 하나를 넘으면 집 몇 채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요사이 자유롭게 쓰고 있는 후천개벽, 상생의 미래를 예지한 정역의 완성 자 김일부 선생이 공부해온 향적산방(산제당)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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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지대안도 중앙총본부] 천지대안도 중앙총본부 간판이 걸려 있는 모습. 지아이앤 뉴스 사옥과 인접해 있다.  
 
여기서(양정고개) 계룡굴다리 밑을 지나 10여 미터 쯤 가면 잠깐 살펴보고 가야 할 종교단체가 하나 있다. 
평범한 집이지만, 마침 이곳에 지아이앤 뉴스가 사옥으로 쓰고 있으니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천지대안도 건물과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는 지아이앤 뉴스 사옥. 왼쪽 옆으로 천지대안도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제주도와 관련이 많은 천지대안도(天地大安道)가 있는 곳이다.
일반인은 물론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 조차 생소하리라 본다.

   
 
  ▲ 건물형태도 특이하지만 자세히 보면 천지대안도라는 글씨가 써 있고 외벽에는 알 수 없는 문향이 그려져 있다. 엄사우체국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계룡시에 와서 엄사리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흰 색깔의 건물에 유난히 시선이 가곤했다.
건물형태도 특이하지만 자세히 보면 천지대안도라는 글씨가 써 있고 외벽에는 알 수 없는 문향이 그려져 있어 처음에는 유교재단에서 지은 건물로 알고 있었는데 금암동에 별도의 유교본부건물이 있어 궁금증이 더해 갔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천지대안도라는 종교단체였던 것이다.
내가 볼 때 수운의 후천세계와 일맥 통하는 것 같은데 제주도와 인연이 있는 종교라 제주도에 교인이 많으며, 가정의례는 지극히 간소하고 윤리도덕에 따라 행하고 있다.

이곳 분들은 생식을 즐겨하시는 고로 이곳의 종단을 실제 이끌고 계시는 ‘최재화’ 회장을 뵐 때마다 그 옹골 한 자세가 신선 같은 느낌이 들 곤 한다.
계룡대가 들어서기 전에는 숫용추 주변에 상당한 규모의 성전도 있었다고 한다.

이 곳 천지대안도 뒤의 정상 능선 바로 아래가 그 유명한 ‘도깨비 터’이다.

도깨비 터에 들어선 건물은 대부분 종교 관련 건물들이다.
두마면 엄사리 음절마을, 도깨비 터로 알려진 이곳에는 종교 관련 건물들이 유난히 많아 그러한 풍수의 기본개념에 충실한 땅이 아닐까 여기는 이들이 많다.
‘엄사(奄寺)’란 행정구역명 또한 바로 이 ‘음절’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음절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도깨비 터로 알려지게 됐을까?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오면서 13년째 이장을 맡아온 이효택 씨에 따르면 원래 이곳은 1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농촌마을이었다.
그 이전에는 이곳에 음절이란 큰 절이 있었다는데, 언제 생겨서 언제 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에 계룡대(삼군본부)가 들어서면서 이곳 음절마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씨는 “집 다섯 채 지으면 그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되더니 지금은 교회가 족히 100개는 된다 ”고 말했다.
교회뿐만 아니다.

마을에는 종단이 서로 다른 절들, 요가원, 점집,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신흥종교 건물들이 혼재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외지인들이 와서 주민들에게 집터를 팔라고 졸라대는데, 대개는 절이나 교회를 짓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들 건물의 유형도 다양하다.
우람한 고층건물을 자랑하는 교회, 시멘트로 지은 사찰, 슬레이트 지붕이 얹힌 건물이 이색적인 민족종교 사원, 일반 주택에 온갖 부적으로 도배해놓은 점집…. 일요일이면 더욱 볼 만하다.
찬송가, 목탁, 염불, 주문 소리들이 아우러져 그야말로 도깨비들 잔칫날 같다.

조용하던 시골마을이 왜 이렇게 변해가는 것일까?
원래 도깨비 터였는데 이제야 그 땅이 제대로 쓰이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옛날에 이 마을에 있었다는 ‘음절’이란 큰 절이 망한 것만 보아도 이곳 터가 절터로서 적합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일반 주택에 차려진 점집. 그러나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계룡대가 들어서면서 그 인근에 있던 많은 종교 건물들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도깨비 터로 알려진 이곳에 대체지로 선택한 듯하다”                     
(김두규저 복을 부르는 풍수기행 중에서)

그런데 여기 도깨비 터에 한옥 집 한 채가 당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같이 간 한상교 선생은 이 일대에서 이 지점이 땅의 기운이 제일 강하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독특하게도 대문입구에는 윤리연구원(倫理硏究院)이라는 현판을 걸어 놓고 건물초입에는 계룡정사(鷄龍精舍)라고 쓰여 있다.
 
사라져가는 국혼과 민족 얼을 고취시키며 무너진 윤리관을 재조명하기 위하여 성재(誠齋) 봉기종(奉奇鍾)선생께서 1970년 윤리연구원을 창립하고, 한학과 윤리,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인재를 규합하여 인격도야와 덕성함양을 하고 계신다. 현재 삼백여 명의 한의사와 백여 명의 교수를 배출하여 각계에서 활동 중이다. 연구원 활동인원은 전국 약 1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15년 전부터는 현재의 계룡시 두마면 연구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하며, 군 장교들과 한의사, 인근 대학의 교수 등을 상대로 한학과 윤리,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만나 뵈오니 처음부터 무릎을 끊고 앉아 손님을 대하는 것이 꿋꿋한 선비의 자세가 보이신다.
봉기종 선생은 돌아가신 어머니께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상을 차려 올렸고 문안인사도 드린 분으로 고령에도 불구하고 요즘 보기 드문 시묘(侍墓·부모 거상 중 그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3년간 사는 일) 생활을 해온 분이다.

봉기종 선생은 “나 스스로는 결코 효자가 아니지만,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본보기를 보여 달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시묘생활을 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인의예지의 본성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 사상을 제창하고 널리 펴는 데 남은 생을 바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여기를 지나 능선을 타고 가다보면 웰빙 열풍으로 계룡웰빙타운 찜질방이 나온다.
예전에는 여기에 약수암이 있었고 물이 참 좋아 많은 분들이 건강을 위해 마셨다고 한다.

   
 
  ▲ [약수암] 국사봉 맨재골 최상단에 있으며, 약수암의 샘은 연산ㆍ논산천의 발원지이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국사봉에 오르게 되는데 국사봉 등산로는 이쪽 방향이 오르기가 편하지만 우리가 찾아가는 향적산방은 우회해야 하는 관계로 지금은 엄사중학교 옆으로 큰 길이 시원하게 뚫려있으니 이 길을 통하여 가면 다소 편하다.

신도 안 일대에는 아직도 이러한 다양한 종교단체와 학문들을 연구하는 기관들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그러한 종교나 학문 연구하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정신을 밖으로 들어내도록 유도해주고 각 종교나 학문 연구하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가르침을 널리 알릴 수만 있다면 황폐화 되어 가는 우리 심성에 차분한 한줄기 영양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신도 안 땅은 특정의 종교인의 땅도 아니요 본래 다양한 종교와 학문이 잉태되어 태어나고 성장하며 그 중에는 커다랗게 성장하기도 하며 때로는 소멸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배양하는 지역이 아닌가?

더욱 이들을 양성화시켜 국민의 영성을 키우고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장으로서, 때로는 민속과 종교 그리고 문화가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배가 된다면 세계적인 ‘종교자생지’라는 문화콘텐츠로 좋은 호재를 가지고 있는 계룡시가 되지 않을 까 생각해본다.

부남리나 남선리 일대의 부지를 계룡시에서 매입해서, 물론 예산이 수반되는 거라 시일을 요하지만 계룡대 설치를 위한 6·20사업 이전에 이곳에 존재하다 철거된 각종 종교 단체들을 다시 모아 ‘종교촌’을 형성한다면 종교체험과 선인들의 종교생활의 경험과 지혜를 다시 볼 수 있는 멋진 장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치단체들은 없는 축제도 만들어서 쓸데없는 예산낭비를 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성공하는 축제도 많이 있는 반면, 이러한 종교타운을 형성하고 종교페스티발을 해본다면 종교인의 화합의 장소이자 우리 모두가 마음을 여는 장소로 최선의 움막 터가 될 수도 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종교 센터가 논산시 상월에 건설된다면 계룡은 기회를 놓치고 또 하나의 영적 메커니즘을 잃어버리게 될까 안타깝다.
좋은 의료시설과 종교 촌이 형성된다면 그야말로 살기 좋은 이상향의 신도  안이 건설 될 수 있다고 보여 지는데 우리 모두가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상록도시는 이러한 영성을 다스리고 좋은 의료시설을 갖춤으로써 더 빛나는 것이 아닐까?

자연을 보호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이지만 왠지 허공에 떠드는 메아리 같기만 하니, 하기야 대전시는 시를 상징하는 마크로 ‘It's Daejeon’이라고 알리는 것 같은데 뭔 소리인지, 상록도시는 그것보다는 뚜렷해 보이기는 하는데, 글쎄?
너무 공허한 트레이드마크들 같다.

신도 안에 사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진실 된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엄사리 도깨비 터에는 하루가 다르게 각종 종교단체들이 들어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 [국사봉 안내도] 맨재골 소류지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도  
 

   
 
  ▲ [향적산 등산안내도 간판] 최근의 간판모습이다.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없기 때문에 조심해서 엄사중학교 옆길을 따라 철길  옆으로 계속 내려가면서 멀리 바라보면 향적봉이 보인다.

언젠가는 이곳 철길 건너 야산도 벌목되고 깎여서 커다란 아파트 숲으로 덮여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살아갈 것이지만 결국 옛날의 마음의 고향은 점차 잊혀 가지 않겠는가?

   
 
  ▲ 국사봉의 시발점이 되는 향적산묵집  
 
향적산방에 오르기 전 좌측 철길다리 아래로 동구나무가 푸르르 게 자라고 있는데 그 앞에 향적산 묵 집이 보인다. 이 집은 옻닭이 별미라 동동주 한잔을 걸치면 그 짜릿함에 온몸이 울부짖는다.
집터도 괜찮아 류보선 시의원도 나왔으니 터의 값은 했을 것 같다.

   
 
  ▲ [오행비와 천지창운비] 국사봉 정상에 세워져 있다. 한반도가 1천년 이상 동방예의지국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단군 성조의 뜻이 적혀 있어 무속인들의 기도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70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지아이앤 뉴스에서는 변금섭 법무사와 공동으로 계룡시민들에게 계룡의 유적지와 사찰, 인물 등에 대해 낱낱이 파헤쳐봄으로써 계룡의 진정한 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8월부터 30여회에 걸쳐 「계룡의 묘미」에 대해 연재하고자 합니다.

계룡산에 진입하는 초입이 되는 양정고개로부터 출발하여 사계 김장생 선생에 이르기까지 계룡의 역사와 일화는 물론 먹거리까지 계룡시의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 글은 특정 종교와 무관하게 쓴 자료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편집자주]

글 : 변금섭   사진/편집 : 지아이앤 뉴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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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 고개-이제 출발해보자

 
 
 
  ▲ 지금의 양정고개의 모습. 지금은 대전-논산을 잇는 국도가 지나가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힘들게 통행하던 높은 고개였던 것 같다. 예전 사진이 없는 게 안타깝다.  
 
양정 고개, 양정치(兩政峙)는 모든 이들에게 계룡산에 진입하는 초입이 되었다.

진안 마이산과 대둔산에서 올라오는 금남정맥이 천호산을 넘어서 계룡지구대에서 잠시 쉬고 양정 고개를 지나고 비사벌 아파트를 거쳐 ‘천지대안도’ 건물을 지나면서, 도깨비 터의 중심인 ‘계룡정사’에서 오래 머물다 능선을 타고 ‘계룡웰빙타운’(예전에 이 자리에는 약사암이 있었다.)을 통하고 235봉을 타면 계룡산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힘을 내서 내달리고 나니 부여의 부소산에서 그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종착역에 이르게 된다.
   
예전부터 양정 고개는 고개 마루가 높아 힘들게 통행하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경사가 너무 심해 증기기관차가 늘 퍼지기 일쑤여서 오르다가 못 올라가면 후진해서 이곳 연산역으로 되돌아가서 물을 넣고 다시 올라가곤 하였다고 하는데 연산역에는 아직도 그 당시의 급수탑이 남아있다.

 
 
 
  ▲ 양정삼거리의 모습. 양정고개에는 현재 논산경찰서 계룡지구대와 양정 시외버스터미널 등이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룡산에 진입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곳에 어염집들이 많이 있었으니 지금도 이 골목에 들어서면 지금은 다소 낡았지만 제법 큰 여관 건물이며 한약방, 간이역과 각종 음식점들이 옛날의 호화스러움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곳으로 철길이 나고 새로 대전 논산 간에 도로가 뚫리면서 흐르는 금남정맥이 흩어지고 많이 약해진 느낌이 든다.

양정 고개에는 이러한 전설이 전래되어 오고 있다.

옛날 어느 해에 가뭄이 극심하여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이었는데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나라 일을 돌보지 않고 서로 모함을 해가며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이 그치질 않고 계속되니 백성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이 때 경상도에 사는 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열심히 글을 읽어 크게 출세할 것을 결심하고 노력하였는데 세상일 돌아가는 것을 보고 책을 팽개친 채 출세할 것을 포기하고 유람 길에 나섰다.
그는 여기 저기 발길 닿는 대로 다니면서 세상을 살폈다.

농부들은 먹을 것이 없어 저렇게 굶주리고 있는데 아직도 조정에서는 싸움질뿐이니 걱정이로구나. 한탄하면서 이거 나라에 무슨 정변이라도 일어나야 백성들이 살지, 큰일이구나 하면서 걱정을 하였다.

그는 금강산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와서 보니 딴 세상 같았다.
차라리 이곳에서 평생 동안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었다.

그는 한 절간에 머무르면서 며칠간을 쉬다가 하루는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한 장수가 나타나더니 그래 쓸 만한 놈들은 세상을 피하여 산속에 쳐 박혀 있고 몹쓸 놈들은 임금님 옆에서 서로 제가 잘났다고 야단들이니, 허참. 세상 잘 돌아가는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수 앞에 나가 앉으며 대체 당신은 누구요?
누구 시온 데 저에게 그런 말씀을...하고 물었다.

그 장수는 나는 충청도 사는 장수인데 당신을 계속 따라다니고 있소.
당신은 여기 있을 사람이 못되니 어서 빨리 충청도에 있는 계룡산으로 가시오.
그때 내가 말 하리다 하고 사라졌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꿈속에 나타났던 그 장수는 아무래도 이 어지러운 세상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 이튿날 날이 밝자 여장을 차리고 충청도 계룡산으로 갔다.
충청도에 들어서서 지금의 두계 고을에 다다르자 밤이 어두워졌다.

피곤한 여독을 풀기 위하여 그 근처에 있는 주막집에서 하루 저녁을 유숙하는데 꿈속에 먼저 나타났던 그 장수가 또 나타났다.
잘 왔소. 그런데 이것 참 큰일이오.
이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으려면 꼭 정씨가 나와야 하는데 나오질 않고 있고, 그것도 정씨 한 사람이 아니라 정씨 여덟 사람이 나와서 이 세상을 평정해 놓고 그 여덟 사람 중 두 사람이 싸우다가 한사람이 죽어야만 이 나라가 평온해 지는데 여덟 사람의 정씨도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참으로 큰일이요. 근심스러워 하면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 여덟 사람의 정씨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고 있소? 하고 그 선비가 묻자 그걸 알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겠소, 누구인지 한 사람도 모르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여기로 오라고 했소? 하며 선비는 장수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야 당신은 정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요.

단 한 가지 알려 드리리다. 정씨 두 사람이 나타날 때에는 금강 물줄기가 변하여 논산 강경으로 흐르게 될 것이요. 웅진 땅 계룡산 밑을 흘러서 말이요. 하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요? 하는데 그 장수는 또 어디로인지 사라졌다.

꿈을 깨고 난 선비는 참으로 이상한 꿈이로다. 한 번도 아닌 두 번 씩이나 나타난 그 장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며 생각해 보아도 알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온다는 정씨는 과연 언제 나타난다는 것이냐?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알 수 없는 일들 뿐이었다.

그 선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신도 안에 정씨가 도읍한다면 틀림없이 이 고개야말로 정씨가 나타날 고개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이곳에서 묵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정씨는 나타나지 않고 이제는 노잣돈까지 떨어져서 아주 이 고개 아래에 뗏 집을 짓고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생황은 어려움이 더해갔지만 나라를 구한다는 여덟 정씨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날 줄 몰랐다. 그래도 그는 기다렸다. 꿈에 나타났던 그 장수가 거짓말을 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월은 흘러 그는 이제 늙어서 허리는 꼬부라지고 머리는 백발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죽는 날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느 날 그 선비는 자기가 며칠 안가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끔 들리는 초동들에게 기다림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고 내가 죽은 후라도 정씨가 나타나면 내가 기다리다 늙어 죽었다고 꼭 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선비는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양정 고개에서 정씨 두 사람이 나타나서 왕관을 놓고 싸워야 할 고개라고 전하며 기다리다 지친 어느 선비의 한이 맺힌 고개라고도 한다.                          (계룡시청  민속문화·전설 중에서)

그래서 두 정씨가 대립한다고 해서 양정(兩鄭)고개로 불리기도 한다.

http://www.g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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