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 대사는 천일기도를 전국의 산을 돌면서 하게 되는데 지금 남해에 있는 보리암에 이성계의 기도처인 태조기단이 있다. 이성계는 기도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보광산을 금산이라 개명했다.

다시 차길진선생의 말을 들어보자.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올리며 매달린 절대자 셋은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그리고 단군, 이렇게 3대다. 이성계 영가(靈駕)는 “그렇지만 단군 할아버지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반목한 것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하면서 조선 태조 기단(祈壇) 위쪽의 삼불암(三佛巖)을 보기로 들었다.

바위 셋 중 하나는 누워 있고, 둘은 서 있다.
이 바위 셋의 모습이 꼭 앉아 있는 부처 같다.
이성계 영가가 100일 기도를 하기 전까지 바위 셋은 죄다 누워 있었다.
기도를 마치자 바위 둘이 일어나 앉았다.
나머지 하나는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셋이 다 일어났다면 이성계는 조선의 국왕을 넘어설 수 있었다.
중국까지 손아귀에 쥔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단군과 석가가 각자 평가, 추후 맞춰 보고 공감한 이성계의 그릇 크기는 그러나 조선까지였다.”
<2006년3월6일자 주간조선>

그리고 여러 산에 기도를 거쳐 마이산에서 천신으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게 되는데 이곳 마이산에 있는 은수사에는 팔각정이 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으면 마이산과 돌탑만 보고 지나치게 되는데 이곳 팔각정에는 단군화상이 있고 태조 이성계가 도검을 하사받는 그림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고 그 증표로 씨앗을 심었는데 그것이 싹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청실돌배나무가 은수사 절 안에서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계와 무학은 계룡산에서도 많은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 삼신당. 이 곳은 아쉽게도 군부대내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보기가 어렵다.  
 
바로 기도를 드린 장소가 ‘제석사(帝釋寺)’와 ‘삼신당(三神堂’)이 있는 장소이다.
아쉽게도 이곳 제석사와 삼신당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군부대내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 보기가 어렵다.

6·20사업으로 신도 안 계룡대에 있는 모든 종교단체들이 철거되었음에도 이곳 2곳만 건재하고 있으니 무엇이 이들을 지켜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곳 특히 삼신당이 20년간 독립운동을 지원한 애국운동의 살아있는 장소라는 것을 안다면 자연히 숙연해 질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방문해보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암용추를 지나 200여  미터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신당은 큰 나무들이 많은 것을 보면 경치가 무척 빼어난 곳이다.

   
 
  ▲ 암용추의 아름다운 모습  
 
삼신을 모신 천단(天壇)인 대전각(大殿閣)이 있고 뒤에는 그리 깊지는 않지만 천연 동굴이 있는 데 이곳은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려 할 때 이 동굴에 와서 얼마간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한다.
삼신당을 전각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뜻인 것 같다.
이 골짜기를 임금 우자에 자취 적자를 써서 우적골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도장 시설로 적 벽돌 양옥 이층의 태상전(太上殿) 대강당이 있다.
관리자가 바꾸었는지 문에 굳게 시건장치를 해놓았는데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이곳을 본 분의 말씀으로는 전각에는 태극 문양이 아름다웠고, 천정에는 중앙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무지개 색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고 이것은 삼태극(三太極)으로, 그것은 한국이 중앙이 되어 세계를 향해서 뻗어나간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마 이곳에는 누군가에 의해 무속이 행해지는 것 같은데 진정 뜻이 있는 자라면 이 삼신당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곳에 있는 커다란 넙적한 돌인 만복암(萬福岩)은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한자리로 알려져 있었기에 유명하기도 하다. 그리고 바위동굴은 무학 대사가 기도 한 곳이라 한다.
 
삼신당은 1983년에 이곳을 내주고 장태산 휴양림 근처에 이곳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여 이주하고 있는데 한번 찾아가 보니 아담한 모습을 잘 재현해 놓았다.
삼신당(三神堂)현판은 정원강 선생이 직접 쓰신 것이라고 하는데 당 안에 모셔진 것이 특이 했다.
지금은 박영숙 여사가 이곳을 지키고 계시는데 80순이 넘으신 분이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삼신당의 유래를 설명하시는데 말씀하시는 것이 또렷하면서도 소리의 굴곡이 없으신 것을 보니 많은 지혜를 받은 분 같았다.

삼신당 법칙은 천지인 (天地人)삼신인데 천(天)은 하늘이요. 지(地)는 땅이요. 인(人)은 사람이라 천지인 삼라만사 만물이 생(生)하고 사(死)하고 하는데 세상만물 중에 사람이 최고 귀하니, 첫째 내 영을 닦아 불심을 길러야 하고, 둘째 삼강오륜을 지켜 유를 길러야 하고, 셋째 연구조화선법을 길러야 하나니 그래서 유불선삼교니라. 어쨌든 3가지 중 하나만 빼놓으면 코끼리 하나놓고 세 사람이 더듬어 보고 다투는 격이라고 한다.

박영숙 여사가 오래전에 구술예언을 한 것이 있는데 참 흥미롭다.
“송도 3백년 운은 씨를 뿌리는 격으로 사람들이 어둔하고, 삼각산 한양 오백년은 싹을 가꾸는 격으로 사람들이 삼강오륜을 숭상하고 예를 바로 잡아 지킨다. 계룡산 8백년 도읍에는 이미 다 배울 대로 다 배워서 머리가 비상하고 깨칠  대로 깨쳐서 사람들이 미련한 사람이 없으며 밝고 맑아지며 가을열매를 거두는 시기라. 가야산 천년도읍에는 편안하게 사는 시절로 밥도 안 해 먹고 약만 먹으면서 사는 시대로 겨울에 저장하는 시기이라.

삼백년 도읍시절에는 40살이 종명(終命: 인간수명)이고, 그러므로 10세나 12세에 결혼을 함이 적절하고, 삼각산 오백년 시절에는 60살이 종명으로 15세나 18세에 결혼함이 적절하고, 계룡산 8백년 시절에는 80살이 종명으로 30세나 32세 또는 33세에 결혼함이 적절하며, 가야산 도읍에는 100살이 종명이니35세나 40세에 혼례를 갖출 것이다.

앞으로는 앉아서 천리, 서서 만리를 볼 것이다. 또 빨래를 안 하고 꼬매지도 않는다.
두드리지도 않고 밥하는 사람은 밥만 하고 떡 하는 사람은 떡 만 하고 바느질하는 사람은 바느질만 할 것이고 양반 상하가 다 없어지고, 어른 아이를 몰라보고 남녀가 구별이 없고 부자지간에도 재판하고 형제지간에도 재판한다.“

 
한 40분 그늘 아래에서 어른의 말씀이신지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강연을 들고 안내를 받아 삼신당 안을 보게 되었다.

그 흔한 조각성물도 없었고 탱화도 없었다.
마치 초현대식 화랑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는데, 울긋불긋 알 수 없는 색깔로 그려진 문양이 천정에서부터 벽면까지 그려져 있었다. 우리민족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삼신(三神)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장소이다.

천정에는 천단(天壇)을 상징하는 삼태극(三太極)의 팔괘문양을 그려놓았다.
오른쪽부터 하늘을 상징하는 천(天: 元天上帝), 가운데는 인간을 상징하는 인(人: 人皇)을 그리고 맨 왼쪽으로 땅을 상징하는 지(地: 元始地皇)의 단을 모시고 있다.
그 흔한 사람모습이 아니라 알록달록하게 그려진 영국 국기 같은 모습이다. 한마디로 환상적인 그림이다.

천지인을 상징하는 문향이 특이해서 몇 번이고 쳐다보았는데 안정감을 주면서 신비감과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우리의 삼신사상을 재구성하고  여기에 사용되는 문향을 잘 재현해서 여러 군데 쓸 수 만 있다면 정말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룡산에 있는 삼신당을 종교를 떠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패러다임으로 이용할 수는 없는지 뜻있는 분들의 마음자세가 아쉽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향을 알고 쓰더라도 선조들의 뜻이 무엇인지 그 가르침을 정확히 알고 써야 하는 법이거늘 우리나라는 태극기 하나도 잘못 만들어져 쓰고 있으니 상징하는 그것을 잘못 그려서 얼마나 혼란이 오는지 알기나 하는가?

깊이 들어가면 머릿속이 흔들거리니 간단히 말해서 북쪽은 추운 물의 기운으로 검정색으로 남쪽은 따뜻한 불의 기운으로 빨강색으로 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환란이 계속되고 시끄러운데 왜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이가 그리 많은지...

사소하다고 보여 지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국운과 직결되는 것임을 누가 알겠는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고치지 않는 우리의 자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강한 근성도 안보이고 외국에만 빌붙어 사는 무리들만 양산해내고 있으니 여기서는 크게 한숨을 내쉬자. 어~휴~
  
계룡산 삼신당은 원래 평북태생의 백옥성(白玉星) 이라는 분이 묘향산에서 신도 안으로 이주해오면서 정도령이 오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고 믿고 공부를 하던 중 이곳에 수도 하러온 정원강(鄭元剛)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사위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정원강은 “노송의 껍질은 따서 가루를 만들어 붓치고 일주일 만에 떼어보라“라는 습종의 특효약을 교시 받아 이병을 앓고 있던 이선달 등 애국지사와 독립군에게 전해줘 신통력과 도술을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이 정씨를 따르자 계룡산 삼신당과 한양 삼각산에 독립기도를 드릴 수 있는 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부자들 몇 명이 자금을 내어 초하루 보름으로 구국기도를 올렸는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쌀을 가마니로 떡을 하고 풍성한 재물을 차려 놓고 기도를 올린 뒤에 시국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종교단체 같았지만 그 내막은 나라를 되찾고자 염원하는 이들의 밀집이었던 것이다.
뜻이 있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모여들어 다 모여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당시 경성태창방직의 백낙원, 백낙중 사장을 비롯한 많은 지사들의 협력이 있게 되었고 이층 양옥집을 지었다. 산꼭대기에 빨간 벽돌을 날라다 훌륭한 이층 벽돌집을 지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후 삼신당은 조선팔도 도사들이 만나 독립운동을 하는 거처로 변모했다고 한다.
매월초하루 보름날 한양삼각산에서는 저녁 술시(戌時)에, 계룡산에서는 밤 자시(子時)에 어김없이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운수기도가 지성으로 시행되었다.

3·1운동의 실패로 조성된 신도 안 이주 열풍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넘쳐나게 되었다.
일제의 멸망을 기원하며 1921년에는 계룡산 신도 안에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말까지 퍼지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일본으로의 침공을 외치기까지 하는 위험한 수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곳을 일제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는가?

이곳에서의 민족주의 성향의 독립운동의 열기는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위험지역으로 낙인찍히게 되고 신종교단체를 탄압해 나가게 되는데 치졸하게도 사기, 폭력, 금품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어 마음대로 탄압하게 된다.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을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 안은 그 불꽃이 타오르는 심지가 되었으니 민족의 성지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믿기지 않는 것은 신도 안에는 외국인이나 그 기운은 맥을 못 쓴다고 한다.
“계룡산 장군봉 밑에서 통신대대장인 미군소령인데, 새벽에 호랑이가 물어 메쳐서 죽었거든. 양갈보, 미군 죽은 거 보고 옷도 안 입고 내려왔어, 날이 밝아서. 그 이튿날 뜯어서 상봉에 옮겼거든 (그게 언젭니까?) 을축년(1949년) 해방 후 바로. 신도 안에 왜놈이 못 들어갔어. 주재소 안 죽으면 불나고 자꾸 죽어. 주재소 옮겼어. 되놈도 재미 못 봐. 되놈이 장터 점령하고 음식점 했는데 세 놈 죽으니 되놈 안 들어와. 왕도의 왕기(王氣) 시작도 안한 덴, 뭐이든 처음은 무서운 힘이거든, 외국기운은 맥을 못 써요“(김일훈저 신의원초 중에서)
 
광복 직후인 1948년, 미군은 계룡산 주봉인 천왕봉에 군용 통신 탑을 세우려 했다. 건축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 병사가 속출했다.
미군을 물리고 우리나라 군인이 공사를 전담한 다음에야 탑이 완공될 수 있었다.
이후 통신시설 관리를 명분삼아 슬그머니 계룡산으로 돌아 온 미군은 원인불명의 통신장애가 잇따르자 한국군에게 모든 것을 넘긴 채 완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주간조선 2005년11월12일자)

그렇지만 “계룡산 산신 찾는 소리에 귀가 시끄러워 벌레 같은 중생들 징그러워 모두 내 쫒을 난다. ” 라고 예언되어 6·20사업으로 한사람도 없이 사방 십리 밖으로 모두 내쫓겼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역사의 미완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곳이 우리의 독립운동의 역사적 증거이며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의 회복이라는 터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방치되고 있으니 애석할 뿐이다.

나라를 위하는 유적들이 함부로 방치되고 후손들에게 그분들의 정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누가 일하려 하겠는가?
더욱 이곳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시대에 부끄러울 뿐이다.

정원강 선생이 사상범으로, 독립운동혐의로 붙잡혀 경북성주경찰로 넘어가 고문 끝에 돌아가신 후, 그 며느리인 박영숙씨가 정원강 선생을 독립투사로 인정해주고 삼신당을 독립운동의 산실로 육성해달라고 외쳤건만 아직도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독립지사들의 기도장소로 그 숭고한 얼이 담긴 유물이 방치되어 손상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으니 역사 앞에 또 다른 죄를 짓는다는 의식이 깊이 든다.

삼일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선조들이 애국과 동지애로 만주에서 관동군 총칼에 피 흘리고 죽어 가고 이곳에 계룡산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지사들의 그 고혼(孤魂)이 오늘까지 위로받을 곳이 없다는 것은 너무 허망하다.

이곳을 길이 보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행이 이곳을 계룡시에서 사적지로 정한 것 같은데 다행스러운 일이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