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태조 이성계(왼쪽)와 무학대사  
 
이제 이성계의 집안을 추적해보자.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1250년 원나라 몽골군에 투항하여 그 대가로 두만강유역의 현재 연길일대에 5천호 정도의 다루가치가 되어 옷치긴가(家) 고려계 몽골의 군벌가문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닦게 된다.

옷치긴가 고려계 몽골군의 임무중 하나는 조국 고려침공을 도우며 압록강과 원산을 오가면서 원나라를 위해 수도 개경의 고려왕조를 감시하는 극악한 배역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원나라가 고려군을 감축하라는 압박 하에, 고려가 거의 국방력을 상실하게 된 다음에도 이성계 가문은 강군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세계제국의 정치적 현지경영법을 체득하고 원이나 명의 중앙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상대적인 독립성을 확보하여 가문의 지배적인 위상을 높이게 된다.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춘은 보안테무르, 큰아버지에게는 타스부카, 아버지 이자춘에게는 울루스부카라는 몽골이름이 있다. 이로 미루어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하기 전 34년 전에 태어난 이성계에게도 몽골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동북아 정세에 밝았고 명과의 전투, 티무르와의 전투 등 일련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고 그래서 위화도 회군도 결행할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원의 멸망 후 우리나라에는 조선이 중국에는 명나라가 서게 되었다.
당시 몽골제국은 고려를 인정했고 고려왕조와 함께 힘을 합쳐 몽골 칸 제국을 세웠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몽주가 단심가를 불러 목숨을 걸고 이성계 일당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원종이후 고려왕조의 역사적 정통성이었으니 결국 원에 충성하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밖에 없겠다.      
<주채혁저 순록치기가 본 조선·고구려·몽골 중에서>

그러면 무학 대사는 그 당시 어디에 있었을까?
 
역시 세계의 중심지가 원나라 시대에는 연경이었으니 무학 대사도 예외 일 수 없었으리라.
원나라 수도인 연경 이곳에 26세의 기백 있는 수도승과 20세의 용기 있는 청년들이 있었으나 이들이 만나게 된 경위는 구체적으로는 없다.

단지 무학의 스승을 통해서 인 것 같은데 역사적 기록과 전래되는 이야기 속에서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무학은 1353년 공민왕 때에 원나라 연도로 간다.
무학 대사도 유명한 스승을 만나게 되니 그 분들이 지공과 나옹이다.
지공스님은 인도분으로 인도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가섭존자의 108대 후계자로 소위 정통 중의 정통 스님이며 가섭불의 법통을 이은 분이시다.

중국 원나라 시절을 보내시다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오셔서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천보산 자리가 마치 스님이 머리를 깎았던 인도 나라난타 절 주변의
산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제자 나옹스님에게 이야기하여 이 절에서 주석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회암사이다.

나옹스님은 연경에 도착하여 절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화상을 만나 크게 깨달을 배우게 되고,
무학 대사는 인도 승 지공을 만나 도를 인정받고 이듬해는 법천사(法泉寺)에서 고려인 출신의 나옹을 만나 수도 하다가 1356년 나옹을 하직하고 귀국하였으며, 나옹 역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렀다.

1376 년(우왕 2)회암사(輦輹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은 그를 불러 수좌로 삼고자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그해 나옹이 입적하자 전국의 명산을 유람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여주에 가면 신륵사가 있다.
이곳의  조사당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그의 스승 무학 대사와, 인도스님인 지공대사, 그리고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선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있다.
조사당 안에는 세님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고, 앞마당에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다.
이를 보면 훌륭한 스승과 스승 아래에 훌륭한 제자가 나오는 법이니,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위인은 없는 것 같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와 관련된 인연이 느껴지는 일화가 있다.

당시 원나라에는 있던 나옹대사가 무학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한 산소 자리를 가리키며 “그 위 터는 왕휘지 지이고, 아래쪽은 장상이 날 자리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마침 이성계의 집 청지기가 그 곳을 지나다가 그 말을 듣게 되어 이성계에게 전하자 이성계는 나옹대사를 찾아가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나 나옹대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때 나옹에게서 수학을 하던 무학이 스승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그곳에 쓰고 세월이 지나 왕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로 미루어 이성계집안과 나옹대사간에는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스승이 말하지 않은 것을 굳이 이성계에게 말하여 주었다는 것은 이미 깊은 인연 관계가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일화이다.

그리고 무학 대사와 이성계가 고려 땅에서 만나는 일화도 있으니, 서산대사가 쓰신 ‘설봉산 석왕사기’나오는 글이다.

고려 우왕 10년(1384)에 무학 대사가 함경도 설봉산 석왕사 토굴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 무관으로 있던 이성계는 이상한 꿈을 꾸고 꿈이 하도 신기해 설봉산에 해몽하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없고 딸이 있는데 이 딸이 이성계의 꿈을 100냥에 사면서 당신 꿈은 “개꿈이다”라면서 침을 세 번 뱉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딸이 이성계 꿈 산 것을 알고서 딸을 때리고 이마에 침을 밷으 면서 돈을 돌려주고 꿈을 물렀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성계를 보더니 “난 해몽 못하겠소, 다른데 찾아가시오.
이안에 들어가면 설봉산 밑에, 삼방 석왕사 위에 석굴이 있는데 8만대장경만 외우는 중이 있으니 덮어놓고 살려달라고 절만하시오. “

그분이 무학 대사인데, 그래서 이성계가 찾아가 밖에서 절만하고 있는데 거들  떠 보지도 않는다? 이성계가 “정 이렇게 냉대하면 목을 치겠노라“하니까 무학 대사가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 해몽하러 왔다니까 ”해몽은 이 앞에 해몽하는 할머니가 따로 있잖소?“ 이성계가 그 할머니에게 갔더니 자기는 못하겠다고 이리가라고 합디다, 해서 왔다고 하니, 무학 대사가 “그러면 꿈 이야기나 해보시오”

그래서 꿈 이야기를 하는데 ,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석가래 만 3개 달랑 지고 나왔소.
나오는데 닭 새끼들이 꼬기오. 하고 울고, 또 사방에서 꽃이 송이송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소. “ 라고 하자.
무학은 “석가래 3개지고 나온 건 임금 왕(王)자요, 닭이 고귀(高貴)오 하고 울었으니 왕이 되는 건 틀림없소.
꽃 떨어지는 것은 낙화이종내어실(落花而終乃於實)이라 그러니 고려는 이제 망했소. 고려는 다 쓰러져가는 집이오. 인제 내려가시오“하고는 황해도 신기 곡산 고달산에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김일훈저 신의원초 중에서>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된 뒤 경기ㆍ황해ㆍ평안 감사를 시켜 무학 대사를 찾도록 한다.
새 왕조가 창건되면서 유명 무명의 유생과 승려들이 찾아왔지만 무학 대사는 종무소식이었다.
그래서 3도 감사에게 화상을 그려 돌리면서 무학 대사의 행방을 찾도록 한 것이다.
3년째 되던 해 곡산 고달산의 초막에 은거하고 있던 대사를 간신히 찾았다.

황해감사가 평안감사하고 의논해서 모시고 가자는데 말을 안 들어 이성계가 직접 와서 모시고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태조와 대면하게 되고 왕사(王師)가 되었다.
1392년(태조1)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 者)'라는 호를 내렸다. 엄청나게 길다.

이정도 면 태조가 무학을 배려하는 것도 보통이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 태조가 그러나 1402년(태종2) 다시 함경도로 가 돌아오지 않았을 함흥차사(咸興差使)시절에 무학 대사가 가서야 겨우 서울로 오게 할 정도로 우정이 깊은 사이였던  것이다.
결국에는 이방원을 임금으로 인정하고 무학 대사와 함께 불교에 정진하며 1408년에 세상을 떠난다.

무학이 금강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태종은 그의 사리를 회암사로 모시도록 지시를 했다.
회암사에는 태조가 무학을 위해 세워둔 부도가 있었다.

살면서 변하지 않은 이러한 진정한 우정으로 두 사람은 새 시대를 열었고, 그러한 점에서 이들의 우정은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실력을 갖춘 무학과 무인으로서의 태조는 두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마주 앉은 ‘은행나무 격이라’ 조선을 세울만한 큰 그릇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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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