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연 이성계와 무학 대사의 향기로움이 배인 곳

   
 
  ▲ 계룡산 천왕봉  
 
계룡산(鷄龍山)!
우리가 늘 부르고 보아왔건만 845m의 이 산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금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의 명산! 풍수지리상의 최고 명당!
많은 미사여구를 받고 있지만 계룡산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아직도 살아있는 많은 전설을 그저 가슴으로 품고만 있다.

계룡산은 삼한시대에는 천태산(天台山)으로 불리다가 백제 때 계산(鷄山),  계람산(鷄藍山), 옹산(壅山), 구룡산(九龍山), 용산(龍山), 화채산(火彩山)이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고려 때 목화가 들어오기 전에 옷감으로 많이 쓰였던 삼(麻)이 이산에 많았다는 기록이 있고 껍질을 벗긴 삼대를 겨릅'이라 하기 때문에 겨릅 산이라 했다.

이 겨릅 산이란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 한자로 음역되면서 계립(鷄立)으로 되고 또 '립'이 비슷한 소리로 뜻이 좋은 용(龍)으로까지 발전해서 계룡산이 되었다고 보는 분도 있다.

이성계가 조선조를 창건할 무렵 무학 대사가 계룡산의 지형을 금계 포란형(金鷄抱卵形), 비룡 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해서 두 풍수적 형국에서 계(鷄)와 용(龍) 한자씩을 따 계룡산이라 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의 9백년 운은 서대궐은 무성(無城) 5백년, 동대궐은 유성(有城) 4백년으로 서대궐은 금계포란이고 동대궐은 비룡농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 속에는 금계는 부의 상징, 비룡은 현명한 임금을 의미하는 말이니 이는 조선의 창업자인 이성계와 당대의 사상계를 풍미한 무학 대사와의 만남이 있었음을 알리는 것이니,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밤에 금척(金尺)을 얻는 꿈을 꾸었을 때 송도로 돌아가 빨리 임금이 되라고 위화도회군을 종용한 사람이 바로 무학 대사이다.

어느 따스한 봄날, 태조와 무학 대사가 서로 농담하면서 희롱삼매에 들었을 때 태조가 먼저 말하였다.

"누가 농담을 잘 하는가 내기를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대왕께서 먼저 하십시오"

그래서 태조가 먼저 농담을 걸었다. "내가 자세히 스님을 쳐다보니 꼭 돼지처럼 생겼습니다 그려."
무학 대사 왈, "
제가 보니 대왕께서는 부처님처럼 생기셨습니다."

대사의 대답에 태조는 뜻밖이라는 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같이 농담을 하지 않습니까?"
대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님으로만 보이는 법입니다.”

두 사람은 함께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한다.
 
‘용 가는데 구름 간다.’고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다시 차길진 선생이 쓴 영기로 보는 계룡산 중에서 일부 글을 원용해 본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은 요즘도 계룡산 신도 안에 자주 들른다. 신도 안이란 말 그대로 600여 년 전 이성계가 일찌감치 조선의 수도로 점찍었던 곳이다. 그런데 10개월에 걸쳐 대궐 터까지 닦아놓은 상태에서 조선의 도읍은 갑작스레 한양으로 정해졌다. 무슨 사연이 숨어 있는가?

이성계는 왕이다.
절대 홀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을 초혼하려면 경호원들의 요란한 구둣발 소리를 감수해야 하듯, 태조 영혼의 행차에는 정도전, 하륜, 그리고 무학 대사 등 개국공신들과 국사(國師)가 동행한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는 필자에게 ‘~해라’체를 쓰고, 신하들은 ‘~하오’라고 한다.

“왜 계룡산을 포기하고 500리 나 떨어진 한양으로 가셨습니까.”
좌중을 둘러 본 태조가 털어놓는다.
‘이 사람들(정도전, 하륜)이 신도 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 불리하고, 신도 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기에....’
 
“그렇다면 사연봉(四連峰) 태조대왕 동굴은 무엇인가요.”
‘궁을 짓는 동안 기도하던 곳이었지. 그런데 기도하다가 계룡산 할머니를 만났어. 할머니가 반대하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네.’
계룡산 산신은 여성이라는 세인들의 믿음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할머니 신령은 ‘계룡산의 임자는 당신이 아니라 다섯 가지 덕을 갖춘 선인’이라며 이성계에게 공사 중단을 명했다고 했다.
“계룡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날 신인(神人)이 새 나라의 수도로 정해 800년간 쓸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 신인은 바로 언제나 숱한 추측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정도령’이다.

할머니 산신이 이성계를 무작정 내몬 것은 아니었다.
한양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동시에 500년이라는 조선왕조 수명도 예고했다고 한다.

무학 대사도 한 마디 귀띔했다.
‘대왕이 고려를 멸하는 과정에서 피를 너무 많이 불렀다는 점도 할머니는 못마땅해 했다.
그래도 태조와 나는 아직까지 아쉬움이 남아 한양에서 달(月)을 바라보다 흥이 오르면 여기로 온다.’는 요지의 말 이였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런 분이다.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인 23.5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세계의 핵심을 주관하는 여신답다.
하지만 현 시점 계룡산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개발이 할퀴고 있는 상처들로 몸이 몹시 아프다.
아물만하면 또 파고든다.
그래서 할머니가 유성 후암정사와 국립현충원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이성계를 비롯한 최고 권력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야욕을 숨기지 않은 외세를 물리쳐온 계룡산 할머니다.
'할머니는 말하셨지 욕심을 버려라. 웃으면서 사는 인생 자, 계룡산이다.'”
<2005년11월12일자 주간조선>

이런 것을 보면 ‘팔자 도망은 독 안에 들어도 못 한다’다고 하듯이 제가 타고난 운명에 따라야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무학 대사는 이성계를 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해 최선의 일을 다 한 것 같다.
무학 대사는 실제로 천문과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우암 송시열이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이었고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고 한다. 그만큼 후학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분이다.

그렇지만 하지 말아야 했을 일을 했으니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고, 수도를 한양으로 최종 결정하면서 왕인 태조 이성계 가문과 한양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금정(金井)에 다가 돌을 덮어 계룡산의 혈맥을 끊었다.

은색의 바위에 맥을 끊는 기구인 ‘붉은 구슬을 넣어 만든 은색덮개’로 흐르는 물이며 계룡산의 맥인 곳을 덮으므로 천도에 역행하는 비방을 쓰게 된다.
이곳이 계룡산 천왕봉에 있는 압정사(壓鄭寺)라고 한다.

무학 대사는 본인이 저지른 일을 그가 지은 청구비결(靑丘秘訣)에 이렇게 후회하고 있다.
“돌로써 금정을 덮었는데 어찌하여 옳게 보지 못 하는가”

조선시대 유학자인 서거정선생은 이 우물을 뚫으면 계룡산의 돌은 다시 푸른색으로 변해서 어지러운 세상은 금색이 튀어 나오듯 밝아진다고 하였으니, 계룡산의 혈맥을 끊는 지나친 행위를 하였으니 이를 어찌 하겠는가 ?

태조 왕건이 이 일대의 지맥을 누른 후 무학 대사가 큰 혈맥을 끊었으니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쇠말뚝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작은 혈맥의 기운마저 끊었으니 계룡산의 운명도 가련할 뿐이다. 

이런 글을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뜻이 있다면 다시 우물을 여는 것도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상징적인 국운융성의 포퍼먼스로 해 볼만 하지 않은가?
천왕봉에 있었던 철탑만 옮겨간 것으로 그리고 일본인이 저지른 쇠말뚝만 뽑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자연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자연이 건강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도 건강해질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사실 이 지역은 고려가 나라를 세운 후 터를 누르기 위해 각종 부처입상을 세워 기운을 죽여 오다가 조선 이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함에 따라 조선 건국 시부터 작심을 하고 터의 기운을 없애려고 했으며 정여립의 모반 이후부터는 이 지역을 폐허화하다시피 방치하여 오게 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그 도가 더욱 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 일본인들은 계룡산 구석구석의 혈맥만 정확히 골라 쇠말뚝을 박았다.
일제강점기 중 일본의 새 수도 최적 후보지는 역시 계룡산으로 보고 일제는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를 대전으로 옮기면서 부여에 자신들의 신궁을 만들 정도로 계룡산일대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패망하고 말았지 않은가?

   
 
  ▲ 천마산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곳이 한군데 있는데 양정 고개에서 시청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천마사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여기가 예전에는 법성사(法性寺) 라고 불리었는데 이성계와 무학 대사가 만난 곳이라고 한다.
무학 대사가 이곳 산을 천마산(天馬山)으로 명명했다고 하는데 개태사가 있는 뒷산이 천호산인 것을 보면 그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산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 천마사 대웅전  
 

   
 
  ▲ 천마사에 있는 옥석불상  
 

   
 
  ▲ 높이 0.8m의 석가모니상인 옥석불을 설명하고 있는 간판  
 

현재는 천마사로 불리는 데 이곳에 원래 신도 안 봉안사(奉安寺) 대웅전 삼불중 하나인 옥석불 (玉石佛 문화재자료 85호) 이 있다. 1984년대 계룡대 건설로 봉안사 폐쇄 시 이전되어 온 0.8미터 항마촉지인불상이다. 
조선말 조성한 것으로 재료는 석고이나 옥으로 만든 조각 같이 정밀하고  사실적 조성된 불상이다.

그저 멋이 있다.

아마 우리나라 땅에 얽힌 전설을 살펴보면 무학 대사가 등장하지 않는 곳이 드물 것이다.

   
 
  ▲ 농소정의 모습  
 


   
 
  ▲ 조선태조 이성계가 마셨다는 농소정  
 

여기서 다시 농소리로 발길을 돌리면 농소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물이 참 많이 솟아나는 곳이다.
수량도 엄청나게 많고 물맛도 좋고 하니 들려볼만하다.
이 물을 옛적에 태조 이성계가 드셨다고 하는데 그 옆에는 선돌이 하나 누워있다.
여기도 기복신앙이 배인 곳이라 선돌은 남근석같이 보이는데 글쎄, 한번 벌떡 세워놓고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고 한다. 휠씬 멋있을 것 같다.

대외활동이 무척 많은 조효연 사장이 입암리 안쪽 끝에 있는 배재대학교 소유의 임야에 X지샘이라는 물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물맛은 괜찮았지만 글쎄, 좀 다른 것 같다.
아무렴 임금님이 마신 농소정 물맛에 비하면 별로 인 것 같았다.

   
 
  ▲ 남자의 거시기 같이 벌떡 서 있는 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입암리'. 사진 속의 돌이 바로 그것이다.  
 

   
 
  ▲ '왕의 처소가 된다는 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왕대리  
 

입압리(立岩里)에는 남자의 거시기 같이 벌떡 서 있는 돌이 있다고 해서 입압리라고 했다고 하는데 인근에 왕대리(旺垈里)는 왕의 처소가 된다는 터인지라 이곳의 지명도 재미가 있다.  

 
 
 
  ▲ 무학대사의 지팡이가 자라 괴목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괴목정  
 
하여간 무학 대사와 이성계를 찾아다니다 보니 무학 대사가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를 꽂아서 자라 괴목이 되었다는 괴목정 등 신도 안에는 그들에 관한 많은 전설이 널려있었다.

부연하면 여기에는 전주이씨 들이 참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기에 왜 그런 가 했는데 조선 초 이성계의 주변 집안사람들이 ‘횃불이 비치는 장소는 전주이씨 땅’이라고 해서 전부 전주이씨 땅으로 했다고 한다.
이 말은 금천건설을 운영하는 이영구 사장으로 부터 들었다.

사람은 키 큰 덕은 입어도 나무는 키 큰 덕은 못 입는다고, 권력과 재력은 역시 병행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 땅이 잠자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북적되고 있으니 영기가 서린 땅은 값을 올리면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쌀고리의 닭이라’고 생각지도 않게 큰 부자가 되면 그 씀씀이도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법이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는데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이승에서의 짧은 동안의 사귐일지라도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은 죽어서도 저승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니

이성계와 무학의 만남이 조선의 건국에서만 만남이 있었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